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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씨전>의 통속화 양상과 그 사회적 의미

        서혜은 ( Hye Eun Seo )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0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Vol.0 No.20

        본 논문은 <박씨전>의 통속화 양상과 사회적 의미를 고찰하는 것을 연구의 목적으로 한다. <박씨전>은 필사본과 활자본 이본이 현전하는데, 판매를 목적으로 간행된 활자본은 표제에 따라 각각 <박씨부인전>과 <박씨전>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활자본 <박씨부인전>계열의 결말에는 <임경업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임경업과 관련된 서사가, 활자본 <박씨전>계열의 서두에는 이시백의 출생담과 결말에는 <임경업전>의 내용이 추가되어 원본의 형태와 멀어지면서 통속화되었다. 활자본 <박씨부인전>계열의 결말에 추가된 부분은 원본의 형태를 취하는 고대본 계열을 제외하고는 <박씨전>의 모든 이본에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지만, <박씨전> 전체 이본에서 활자본 <박씨전>계열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다. 따라서 활자본 <박씨부인전>계열과 <박씨전>계열 모두 통속화되었지만 활자본 <박씨부인전>계열은 대중성을 확보했고, 활자본 <박씨전>계열은 통속화된 정도가 지나쳐서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했다. 이러한 활자본 <박씨부인전>계열과 <박씨전>계열의 통속화된 양상을 1910년대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 지었을 때, <박씨부인전>계열은 박씨의 우월성을 국가를 위한 충(忠)과 절(節)을 위한 행위로 귀결시켰으며 <박씨전>계열은 당대 정치 체제에 순응하고 지배 질서를 정립하고자 하는 보수적 시각이 표출된 것으로 생각된다. This paper is a study on the aspects and social meanings of the popularity in <Bak-Ssi-Jeon>. There are manuscripts and printed books of a different version in <Bak-Ssi-Jeon>. Printed books of <Bak-Ssi-Jeon> are classed as two affiliation. One is of affiliation of <Bak-Ssi-Bu-In-Jeon> and the other is affiliation of <Bak-Ssi-Jeon>. In end of <Bak-Ssi-Bu-In-Jeon> was added narration about Im Gyung-Up. And in beginning of <Bak-Ssi-Jeon> was added narration about Yi Si-Baek`s birth story. In end of <Bak-Ssi-Jeon> was added narration about Im Gyung-Up. Narration about Im Gyung-Up in end of <Bak-Ssi-Bu-In-Jeon> and <Bak-Ssi-Jeon> were assured in <Im-Gyung-Up-Jeon>. In affiliation of <Bak-Ssi-Bu-In-Jeon> is included manuscripts of 16 different versions. But in affiliation of <Bak-Ssi-Jeon> is assured manuscripts of 2 different versions. And narration about Im Gyung-Up in end of <Bak-Ssi-Bu-In-Jeon> is assured all different of version <Bak-Ssi-Jeon> exclude affiliation of original version. But affiliation of <Bak-Ssi-Jeon> is different in kind comparing with the whole of different versions. So I guess affiliation of <Bak-Ssi-Bu-In-Jeon> and <Bak-Ssi-Jeon> were popularity(通俗化) but very affiliation of <Bak-Ssi-Bu-In-Jeon> was very popular(大衆的) version but affiliation of <Bak-Ssi-Jeon> was not. Bak-Ssi`s remarkable activities concluded in ethics of Confucianism in affiliation of <Bak-Ssi-Bu-In-Jeon>. And conservative point of view are revealed itself a political structure in affiliation of <Bak-Ssi-J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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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하대 朴氏勢力의 동향과 ‘朴氏 王家’

        권덕영(Kwon Deok-Young) 한국고대사학회 2008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49

        신라는 건국초기에 박·석·김 세 성씨가 교대로 왕위를 잇다가 奈勿王때부터 김씨 세습제가 확립되었다. 그 후 비록 내부적으로 구성원들 사이에 갈등하고 경쟁하였으나, 변함없이 김씨 왕족이 신라 왕실을 장악하고 이끌어 갔다. 그런데 10세기 초에 이르러 김씨 왕조가 아무른 투쟁이나 갈등 없이 갑자기 박씨에게로 넘어갔다. 이는 동서양 왕조시대의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다. 사실 신라 하대 박씨 세력은 그 숫자와 활동면에서 김씨에 비해 극히 미미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치, 사회적 지위가 문한직을 중심으로 한 중견관료와 지방의 小豪族 정도여서 신라 왕실을 차지할 정도의 세력은 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박씨 왕가’를 개창한 神德王의 가계를 분석해보면, 그의 실제 성은 박씨가 아니라 김씨였다. 그래서인지 당대인들도 이른바 박씨 왕실을 김씨 왕실과 다른 역성왕조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삼국사기 를 비롯한 후대 史書에는 모두 그들을 박씨 왕이라 하였다. 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역성왕조의 건국세력들은 종종 앞 왕조의 혈통을 변조해 새 왕조 개창의 명분을 만들어냈다. 漢왕조는 진시황을 呂不韋의 핏줄이라 하였고, 조선왕조는 우왕과 창왕을 辛旽의 자식이라 하였다. 甄萱에 의하여 불법적으로 세워진 경순왕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건국한 고려 왕조도 신라 왕실의 정통을 이었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신덕왕을 박씨로 변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바로 신라 하대 ‘박씨 왕가’의 실체가 아닐까 한다. At the outset of Silla dynasty, the three family names-Park(박), Seok (석), Kim(김) had throned alternately until the reign of King Naemul(내물왕) when Kim hereditary system was completely launched. Kims were powerful enough to survive later interior feuds and competition and continuously dominated the Dynasty. In the beginning of the 10th century, however, power was suddenly transferred from Kims to Parks without any protests and conflicts. This is quite rare in any dynasties of both the East and the West. In fact, Parks' power was not strong as Kims’ in terms of their numbers and activities. And their political and social positions were not high either while they remained middle levels centering on academicians employed in offices or local gentry families. This indicates that they failed to become major constituents of Silla. Moreover, the family name of King Sindeok(신덕왕) who started Parks’ royal families(박씨 왕가) turned out to be Kim, according to one analysis of his family tree. It is no wonder then that people didn't think Parks’ royal families were different from and against Kims' at that time. Nevertheless, all the historical documents including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삼국사기) wrote their family name as Park. History, past and present, witnesses that founding powers overthrowing existing administration often made an excuse of the new royal family by modulating blood line of the old counterpart. For example, Han(한) dynasty argued Shih Huangti(시황제) was from Yeobulwe(여불위) and Chosun(조선) dynasty considered King Woo(우왕) and King Chang(창왕) children of Shindon(신돈). Therefore, it is highly possible that Goryeo(고려) dynasty, succeeded King Gyeongsoon(경순왕) illegally founded with manipulation of Geonhwon(견훤), alternated King Sindeok’s family name into Park to emphasize legitimate ground of Goreyo following lineage of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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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적 관점에서 본 <박씨전> 소고

        김나영 한국고소설학회 2003 古小說 硏究 Vol.16 No.-

        <박씨전>은 작품을 구성하는 인물과 배경, 사건에 신이함이 짙게 배어 있는 작품 중의 하나다. 본 글은 그러한 작품의 신이함을 신화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하였으며 이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첫째, <박씨전>의 서사가 당신화의 서사 구성과 대응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고 둘째, 박씨가 보여주는 여성신의 원초적인 특성과 후대의 변모된 특성을 통해 인간이 인식하는 여성신 형상의 변모를 추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논의의 결과로 <박씨전> 서사 전개의 일관성과 서사 내적 삽화들의 유기적 필연성을 밝힐 수 있었으며, 더 나아가 현실의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키고 怨望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대상을 堂神의 존재에서 찾으려 했던 민중의 심리가 <박씨전> 서사 구성에 작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씨전>은 박씨를 통해 시종일관 유교적 윤리규범과 그 논리를 강조함으로써 현실의 온리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박씨전>이 비록 현실의 원한과 소망을 '신의 이야기' 형식을 빌어 풀어내고 있지만 결코 그 허황함에 기대어 현실을 외면하여 병자호란과 같은 역사적 과오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Pakssijeon(<박씨전>) is one the works that novelty is being saturated with thickly in character, background, and case to constitute work. As for the writing, this researcher tried to look at such novelty of work from mythologic viewpoint. And in the course to research, this researcher could know that the narration of Pakssijeon is equivalent to the constitution of narration of then myths of village god(堂神話) firstly and could extract the transfiguration of female God from that human beings recognize through the original feature of female God that Mrs. Park shows and the transfigured feature of next period secondly. As the result of this discussion, this researcher could clarify the consistency of narration unfolding of Pakssijeon and the organic inevitability of illustrations inside narration and could guess that the psychology of populace who tried to find the subject to be able to reverse the disadvantageous situation of actuality and solve resentment from the existence of village god was acting in the constitution of narration of Pakssijeon. Nevertheless, Pakssijeon is emphasizing the logic of actuality by emphasizing Confucian moral norm and the logic consistently through Pakssijeon. It can be said that this is because Pakssijeon is expecting that historical mistake like the Chinese Invasion of Korea in 1636(丙子胡亂) may not be repeated even once more by leaning to vanity and turning away actuality, though Pakssijeon is solving the spite and wish of actuality by using the form of story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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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燕巖의「烈女咸陽朴氏傳」再考 - 새로운 자료 소개를 겸하여

        金血祚(Kim Hyul-Jo) 대동한문학회 2006 大東漢文學 Vol.24 No.-

          본고는 소설과 열녀전으로 알려진 燕巖 朴趾源의「烈女咸陽朴氏傳」을 다시 고찰함으로써 작품의 창작동기 및 주제를 밝히기 위해 썼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암의 작품을 보다 깊이 있게 정독하고, 아울러 새로운 자료를 소개하며 이를 통해 작품을 상호 대비하고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새로운 자료는 연암의 작품에서도 그 작품명과 작자명을 밝히고 있는 세 편의 작품과, 그리고 그 존재자체를 처음 소개하는 한 편의 작품이다.<BR>  학계에 새로 소개하는 작품은 ?敦恒의「烈婦朴氏行錄」, 咸陽郡守 尹光錫의「烈婦朴氏傳」, 山淸縣監 李勉齊의「朴烈婦傳」,『閒汨董』에 수록된 작자미상의「烈女朴氏傳」등이다. 본고에서는 새로운 자료를 소개하기 위해 네 작품을 각각 분절로 나누어 그 개요를 소개하고, 논문 뒤에 부록으로 제시하였다.<BR>  새로운 자료와 연암의 작품을 상호 입체적으로 대비함으로서 본 논문이 도달한 결론은 연암의 작품은 단순히 殉節한 함양 박씨를 미화 칭송하기 위해 지은 것은 아니며, 그 장르 역시 소설로 보는 관점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전 학계에서의 연구 성과는 일정 정도 수정되어야 한다. 연암의 작품은 순절의 폐습을 심각하게 비판한 것이며, 작품 제목을「烈女咸陽朴氏傳」이라고 한 것은 박씨의 순절이 그 주제를 입론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를 제공하였다는 것이며 박씨를 미화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또한 제목이 소설적인 傳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종래 이를 소설적 작품으로 간주해 왔으나, 작품창작의 동기나 내용으로 볼 때 이는 산문 작품이다.   This paper aims to clarify the theme and the motive for its creation by reconsidering 「Yeleohamyangparksigeon(烈女咸陽朴氏傳)」 of Yeonam Park Ji-Won(燕巖 朴趾源) who is noted for novels including Yeleogeon(烈女傳). A closer reading of Yeonam(燕巖)"s works and the parallelism of both through the introduction of new materials make it possible to attain this goal. The new materials are the three works with the writer"s name and the title name along with one work unknown up to date.<BR>  The works newly introduced to the academic society are Sin Don-hang(?敦恒)「Yelbuparksihangrok(烈婦朴氏行錄)」, Yoon Kwang-seok(尹光錫)「Yelbuparksigeon(烈婦朴氏傳)」, Lee Myun-jae(李勉齊)「Parkyelbu- geon(朴烈婦傳)」, and the anonymous work「Yeleoparksigeon(烈女朴氏傳)」in『Hangoldong(閒汨董)』. In this article, the effectiveness of the introduction of the four works leads to the division of them into each chapter with its own synopsis in each work, All the works are attached as an appendix in the very end.<BR>  The scrutiny on the parallelism of both the new materials and Yeonam(燕巖)"s works induces the conclusion that Yeonam(燕巖)"s works are not written just to glorify the sacrifice of herself in defence of her chastity, and the classification of its genre into a novel is also problematic. In this perspective, the academic accomplishments so far made by scholars should be partly amended. Yeonam(燕巖)"s「Yeleohamyangparksigeon(烈女咸陽朴氏傳)」is a poignant criticism of the abuse of self-sacrifice. The entitlement of it to「Yeleohamyangparksigeon(烈女咸陽朴氏傳)」is not a glorification of the lady, but a means of building up the theme. Furthermore, the title with the novel-like Geon(傳) attached has primarily ministered to calling it a novel. But Yeonam(燕巖)"s motive for its creation and its content strongly suggest that it is p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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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씨전>의 여성 인물 형상과 그 영웅 서사적 가치

        김혜정 ( Kim Hae-jyung ) 한민족어문학회 2020 韓民族語文學 Vol.0 No.90

        <박씨전>에서 여성 영웅의 모습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은 단연 주인공인 ‘박씨’일 것이나, 작품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의 곁에는 다른 많은 여성이 함께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박씨의 가장 가까운 곳에는 ‘계화’라는 인물이 존재한다. 박씨는 계화를 움직이는 수뇌부 역할을 하고 모든 일을 컨트롤하는 존재이지만, 그의 말에 따라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고 자신이 굴복시킬 대상(굴욕적인 전쟁의 책임을 물을 존재들)에게 직접 나서서 말과 행동을 실천하는 존재는 계화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박씨-계화’와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 역시 ‘호국공주-기홍대’라는 관계로 얽혀 있다는 점에서, 이들 관계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설정된 것임도 다시 살펴보았다. 병자호란에서 활약한 적대국의 실존 인물 ‘용골대’를 작품에 그대로 등장시키면서도, 이러한 여성 인물을 새로 설정했다는 것은 작가가 ‘국가, 신분, 나이 구분 없이 다양한 여성들의 활동상’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박씨전> 후반부에 등장하는 청에 포로로 잡혀가는 여성들(피로(被虜) 하층 여성들)을 통해서도 이러한 작가의 메시지를 재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박씨전>에서는 일부 영웅들의 활약을 통해서는 전쟁이라는 큰 난관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지만, ‘박씨’와 ‘계화’의 연대 활약을 보여줌으로써, 이것을 헤쳐 나가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일찍이 <박씨전>은 가정 내에서 무시당하던 ‘박씨’라는 인물이 환골탈태하여 남편, 왕에게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진정한 여성 영웅으로 인정받는 이야기라 해석됐다. 하지만 ‘박씨’를 둘러싼 수많은 등장인물의 행동, 대사를 분석한 결과, <박씨전>은 단순히 ‘박씨’라는 일인(一人) 영웅 서사물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컨대 <박씨전>은 박씨라는 인물이 주변 인물과 때로는 연대하고 때로는 훗날을 기약하면서, 현재를 바꿔나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서사이자, 아직은 미완이지만 희망을 남겨둔 ‘열린 서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완벽한 해피엔딩’이 되기 위해서는 결국, 각자 고유한 능력을 가진 ‘각계각층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가능함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박씨전>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메시지를 던져주는 소중한 고전(古典) 자산임이 틀림없다. The most dramatic portrayal of a female hero in Park-ssi-Jeon may be the main character Park, but many other women are portrayed as well. Most important is the character Gyehwa who appears near Lady Park. Although Park is the leader who controls everything, the persona who actually meets people and speaks and acts is Gyehwa. A paired relationship similar to that of Lady Park and Gyewha is that of Princess Hoguk and Ki Hong-Dae. The real-life Yonggoldae from "the Manchu war of 1636" appears in the work, but she is included because the author wanted to show the activities of various women, regardless of their country, status, or age. The women who are taken prisoner near the end of Park-ssi-Jeon serve the same function. Although Park does not fully address the great difficulties of war, her solidarity with Gyehwa shows how they may be overcome. Park-ssi-Jeon previously has been interpreted as a story in which Park is finally recognized by her husband and king as a true hero. However, the actions and words of numerous characters surrounding Park, suggest that it is not a simple hero's epic. Instead, Park-ssi-Jeon is an open narrative that develops as Park acts in solidarity with her neighbors, creating their future together. Because it is incomplete, it ends with hopeand the suggestion that a "perfect happy ending" may be possible through the solidarity of people fulfilling their own unique abilities. In this sense, Park-ssi-Jeon is a precious asset that the world still needs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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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초기 박씨왕 시대를 보는 눈

        이종욱(Lee, Jong-wook)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8 한국고대사탐구 Vol.28 No.-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신라 내물왕 이전 기록을 조작된 것이라 하며 내물왕 이전 역사를 은폐·말살하는 작업을 벌였다. 그러나 쓰다 소키치가 시작한 신라 내물왕 이전 역사말살론은 근본적으로 한국인의 존재를 말살하는 잘못된 주장이었다. “쓰다 소키치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혁거세신화와 『삼국사기』 박씨왕 시대의 자료에 들어 있는 역사적 사건과 사실 그리고 시간을 재구성하여 국가형성발전단계, 지배세력과 신분, 중앙정부조직과 지방통치조직 등을 구조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본 논문에서는 신라 시조 혁거세 거서간에서 제8대 아달라 이사금까지의 박씨왕 시대의 왕호, 지배세력과 신분, 정치조직을 중심으로 당시 신라 사회의 다양한 면들이 서로 연관되어 조직된 사회체제(commingling of institutions)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신라 건국신화는 신라에서 立邦·設都를 거쳐 6촌(6부)을 통합한 徐羅伐小國이 형성되었으며, 혁거세가 6촌(6부)의 지배세력이 아니라 6촌(6부)를 통합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 즉 왕이 되었음을 알려준다. 차차웅이라는 왕호를 사용한 시기 서라벌소국과 이웃한 소국들은 낙랑과의 원거리교역을 위한 교역망을 형성했다. 이후 이사금이라는 왕호를 사용한 시기 서라벌소국은 진한 소국을 정복해 들어갔다. 서라벌소국의 건국 당시 박씨족은 왕국 전체를 지배하던 세력으로 출발했다. 박씨왕 시대에 탈해를 시조로 하는 석씨족이 월성에 자리 잡고 알지를 시조로 하는 김씨족이 계림에 등장한 이후, 박씨족·석씨족·김씨족은 혼인을 통해 연결되어 갔다. 그들 씨족에서 왕·왕비·왕모 등이 배출되었으며, 신라의 왕을 배출했던 박씨족과 석씨족·김씨족은 6부의 세력이 된 일이 없었다. 반면 6부성을 가진 세력들은 서라벌6촌이 추장사회단계에 있을 때 최고의 지배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혁거세세력이 이주하여 6촌을 통합해 서라벌소국을 형성하며 2급 지배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박씨왕 시대의 박씨족·석씨족·김씨족과 그 밑의 신분을 가졌던 과거 서라벌6촌 세력들의 존재는 후일 신라 골품신분을 편제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정사당 설치 이전 박씨왕 시대의 신라는 궁실정치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이 시기 신라에서는 왕정과 궁실의 통치가 구별되지 않고 궁실을 중심으로 두 가지 업무가 처리되었다. 또한 궁실정치 시대에 관직·관등·관부의 분화·설치는 맹아단계에 머물렀다. 그리고 134년 정사당 설치 이후에는 정사당정치를 행했다고 생각해 보았다. 이 시기 정사당의 업무는 궁실의 업무와 구분되기 시작했으며 관직은 분화되는 과정을 거쳐 나가게 되었다. 한편 박씨왕 시대 신라는 피정복소국을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한 것이 아니라, 피정복소국의 왕실세력을 제거하고 그 밑의 지배세력들은 제후적인 존재로 그대로 두어 통치하였다. 또한 신라에서는 정복되었던 피정복소국이 배반을 하면 군대를 보내 토평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러한 피정복소국 지역에서는 군-촌-마을로 이어지는 3단계지방통치조직이 편제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신라초기 박씨왕 시대는 신라 사회체제의 기본적인 구조가 만들어진 시기였다.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사회체제는 나아가 고려・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이어지는 사회체제의 바탕이 되었다. “쓰다 소키치의 함정”을 벗어나 신라 초기 박씨왕 시대의 역사를 되찾는다는 것은 한국인의 오리진을 새롭게 찾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인은 단군의 자손이 아니라 신라 오리진이기 때문이다. The Park clan was the central force during the early days of the Silla. Other clan, Seok, which progenitor was Sok T’alhae appeared in Wolseong and Kim clan which progenitor was Alji, appeared in Gyerim. These clans were related with Park clan by marriage. Kings and queens, even king’s mothers were from Park, Seok and Kim clan. Three clans never had been the leader of Six Bu. However, when the kings were from Park clan, three clans became the ruling power. Three clans and other political powers were the origin of Golpum-je: Bone rank system(骨品制). Council for Political Affairs before Jeongsa-dang settled all of the important affairs of the state in palace in Silla. Also, central administrative system was at an early age. After Jeongsa-dang, Political Affairs was divided into two categories and official sets was subdivided into several sets. In Silla, King of the Parks reigned a kingdom by killing monarch in colony and letting their lord become a feudal lord. Also, when people of the colonies rebelled against Silla, Silla’s army set an ease. Therefore, three stages of ruling organization, district-town-village, was formed in colony. Social system established in Silla became the origin of the present social system. Being free from “Paradox by Professor Tsuda Sōkichi” and regaining our history from early Silla, we can find new origin of Korean. Because Koreans are Silla origin, not the son of Dangun, the legendary founder of Go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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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盤湖 尹光顏의 <朴烈婦傳> 연구 : 다른 입전 사례와 비교를 겸하여

        이명희(Lee Myoung-Hee) 어문연구학회 2021 어문연구 Vol.107 No.-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image of women who conformed to the patriarchal ideology of Confucianism was defined as the ideal woman s image. In its characteristic female image, there is a woman who died after her husband s death or died in a critical situation, or uses the expression £, which means a woman who kept her incision. Many aristocratic intellectuals recorded the lives of women who practiced a chaste woman, and in the late Joseon Dynasty, the number of young women who entered the war gradually increased, and their activities had a huge impact on Joseon society. At this time, there was a young priest, Ham Yang-bak, who practiced his passion and became the creative motif of many civilizations, drawing attention from the male ruling class. In addition to Yoon Kwang-an s <Bagyeolbujeon(朴烈婦傳)>, there were various entries based on HamYang-baksi, including Park Ji-won s <Yeolnyeohamyangbagssijeon(烈女咸陽朴氏傳)>, Monk Eung-yoon s <Bagyeolbujeon(朴烈婦傳)>, Jung Deok-je s <Yeolnyeo hagsaeng imsuljeungcheo milyangbagssijilyeo(烈女學生林述曾妻密陽朴氏之閭)>, Yoon Kwang-seok s <Yeolnyeobagssijeon (烈婦朴氏傳)>, Lee Myeon-je s <Bagyeolbujeon(朴烈婦傳)>, Sin Donhang s <Yeolnyeobagssihaenglog(烈婦朴氏行錄)> Yoon Kwang-an s <Bagyeolbujeon(朴烈婦傳)>, which was introduced in this paper, is significant in that it is an introduction of new data that has not been known about the research and existence of academia. In the late Joseon Dynasty, excessive Yeol-nyeo(烈女) discourse served as a suppression within members of Joseon society, and the perception that to become Yeol-nyeo(烈女), at least one should die with her husband spread, leading many women to death. Hamyang Park s attention was different from the existing heat wave. Park married for loyalty, which she could have avoided, and chose to die at the same time on the same day after her husband died, instead of dying immediately. Furthermore, he was not a woman from an internalized family, but from a Korean-American family, so everyone was moved by Park s passion. In particular, they emphasized that the humble woman of Yeohang practiced loyalty that was difficult for the four masters to do, emphasized her hard work according to the author, or praised both filial piety and enthusiasm. However, some people were concerned about the social problems that Park s hard work would bring. They were Yoon Kwang-an and Park Ji-won. Park Ji-won pointed out the social problem of Yeol-nyeo(烈女) and tried to criticize the excessive social atmosphere that caused Yeol-nyeo((烈女) s social discourse in the late Joseon Dynasty to encourage her to perform more enthusiastically than her widow s embroidery. Thus, while praising Yeol-bu s passionate performance, he raised the problem in Byeong-seo in his own unique narrative style, and the existing papers noted that. Yoon Kwang-an s <Bagyeolbujeon(朴烈婦傳)> differed from Park Ji-won in this regard, and he praised Park s hard work and hinted at his innermost thoughts that Park s extreme choice did not have to be essential, citing the adult s words. If the existing research pointed out only the problems of the late Joseon Dynasty discourse, Yoon Kwang-an s Park Yeol Bujeon is a good example of the self-purification that took place within it. 조선 시대는 유교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여성상을 이상적인 여성의 典型으로 규정하였다. 그 특징적인 여성상에 남편 사후 수절하거나 위난 시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烈女가 있으며 烈婦, 또는 절개를 지킨 부인이라는 뜻의 節婦라는 표현을 쓴다. 다수의 양반 지식인들은 烈行을 실천한 여인들의 삶을 立傳하여 기록으로 남겼는데 조선 후기에는 열녀전에 입전된 열녀의 수가 점차 늘어났고, 그들의 행적은 조선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때 열행을 실천하여 남성 지배층의 주목을 받으며 많은 문사의 창작 모티브가 된 어린 과부 함양박씨가 있었다. 함양박씨를 소재로 다양한 입전 작품이 여러 편 있는데 윤광안의 <朴烈婦傳> 외에도 박지원의 <烈女咸陽朴氏傳)>, 승려 응윤의 <朴烈婦傳>, 정덕제의 <烈女學生林述曾妻密陽朴氏之閭>, 윤광석의 <烈婦朴氏傳>, 이면제의 <朴烈婦傳)>, 신돈항의 <烈婦朴氏行錄>, ≪閒汨董≫에 실린 <烈女朴氏傳>, 이학전의 <朴氏烈婦傳>, 9편이 존재하였다. 이번 논문에서 소개한 윤광안의 <朴烈婦傳>은 그동안 존재 여부가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자료의 소개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조선 후기 과도한 열녀 담론은 조선 사회 구성원 내면에 하나의 억압으로 작용하여 수절은 지극히 평범한 일이 되었으며 열녀가 되려면 최소한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많은 여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함양박씨가 주목을 받은 것은 기존의 열부와 다른 차별성이다. 박씨는 의리를 위하여 굳이 피할 수 있었던 혼인을 하였고, 또 남편이 죽은 후 바로 따라 죽지 않고 삼년상을 치룬 다음,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음을 선택하였다. 게다가 그는 유학이 내재화된 집안의 여자가 아닌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었기 때문에 모두 박씨의 열행에 감동하였다. 특히 그들이 강조한 것은 여항의 비천한 여자가 사대부도 하기 어려운 의리를 실천한 점에 무게를 두었으며, 작자에 따라 열행을 강조했거나, 효와 열을 모두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박씨의 열행이 가져올 사회적 문제를 우려한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윤광안과 박지원이었다. 박지원은 열녀에 대한 사회적 문제를 지적하며 조선후기 열녀의 사회적 담론이 과부의 수절보다 순절을 부추겨 지나친 열행을 강요하게 만든 과도한 사회 분위기를 비판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열부의 열행을 칭송하면서도 자기만의 독특한 서술 방식으로 병서에 그 문제점을 제기하였고 기존 논문들은 그 점에 주목하였다. 윤광안의 <朴烈婦傳>은 이 부분에 있어서 박지원과 차이를 두었는데, 그는 박씨의 열행을 칭찬하면서 논찬에서 성인의 말씀을 인용해 성인의 정신이 ‘不以死傷生’에 있음을 언급하여 박씨의 극단적 선택이 필수적일 필요가 없었다는 자신의 속마음을 넌지시 밝혀놓았다. 기존의 연구는 조선 후기 열부 담론의 문제점만을 지적하였지만, 윤광안의 <朴烈婦傳>은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자정작용을 함께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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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박씨왕 시대의 왕실 세력과 신분 편성

        김병곤(Kim, Byoung-go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8 한국고대사탐구 Vol.28 No.-

        신라 건국 초기에는 시조 朴赫居世를 포함해 박씨 성을 가진 7명의 왕이 존재하였다. 초기 기사를 불신하는 연구자들은 박씨 왕족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그러나 『국사』를 편찬케 했던 眞興王이 김씨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조 혁거세가 박씨였고 건국 초기 총 7명의 박씨 왕들이 재위하였다는 행적이 고려시대까지 전승되었다. 이는 후대 김씨 왕족과 구별되는 혈통을 가진 시조와 후예 왕들이 실재하였고 이러한 사실을 신라인들이 분명히 전승시켰던 결과였다. 박혁거세는 육촌민의 추대로 즉위하여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에 독자 세력이 미약하였다. 이에 2대왕 南解는 선진 철제기술을 지닌 석씨 집단과 혼인하여, 육촌의 영향력을 희석시키며 독자 세력 확장을 도모했다. 또 3대왕 儒理는 왕비의 아버지를 葛文王으로 책봉해 왕비 가계의 권위를 증대시켰다. 4대 왕으로 석씨 왕족의 시조 脫解가 즉위하였다. 탈해 역시 독자세력의 확보를 위해 새로 유입된 김씨 집단과 결탁하였다. 5대왕인 유리왕의 2자 婆娑는 김씨 史省부인과 혼인해 석씨 왕족과 김씨 집단의 밀착을 약화시키며 김씨에 대한 왕실 영향력을 확산시켰다. 파사왕의 적자인 6대왕 祗麽도 김씨 愛禮부인과 혼인하고 그녀의 아버지 마제를 갈문왕으로 책봉하였다. 파사왕과 지마왕은 김씨 집단과 거듭된 혼인을 통해 지지세력의 확산과 왕실 권위를 고양시켰다. 반면 유리왕의 장자 逸聖이 7대 왕으로 박씨 □禮부인과 혼인했고, 그의 장자 阿達羅가 8대 왕으로 박씨 內禮부인과 혼인하였다. 일성왕과 아달라왕은 족내혼을 통해 박씨 왕족 자체의 응집력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박씨왕 재위기 斯盧國의 신분 편성을 보자. 우선 혁거세의 박씨 왕족과 남해왕의 사위로 왕위에 오른 석탈해와 그 일족 그리고 박씨 왕과 거듭 혼인 관계를 맺으며 갈문왕에 책봉된 김씨 가계 등이 왕실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상층 지배집단으로 박씨 왕족의 방계 혈족 그리고 혁거세를 추대해 사로국을 건국하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한 육촌장과 그 일족 및 누대에 걸쳐 왕의 측근으로 요직을 수행한 瓠公일가와 같은 인물이 위치하였다. 그리고 명확한 계층 분화가 확인되지 않지만, 육촌장의 방계 후손이나 각 촌에 소속된 마을의 장 등이 중하위 계층으로써 일반민과 구별되는 신분층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In the early days of Silla, There were seven kings whose name was Park including the founder of dynasty Hyeoggeose(赫居世). Some researchers deny the presence of Park king. Even though king Jinheung(眞興王) who compiled ‘Gugsa(國史)’ was Kim, the act of 7 king’s region was Handed down to the Goryeo Dynasty. This means that there was fathers and kings who distinct with Kim king and This is result of Silla people’s spread. As you can see from six village people recommendation of Parkhyeoggeose’s power was weak. Second king Namhae(南解王) weakend six village people’s influence by make son in row with Seogtalhae(昔脫解) who had advanced iron skill. Third king Yuri(儒理王) made queen’s father Galmoonwang(葛文王) to made queen family powerful. Fourth king was Seog founder Talhae. Talhae also conspired with Kim’s group to made more powers. The second son of Yuri and fifth king Pasa(婆娑王) married with Kim sasoung(史省) the Seok king and Kim group was weakend so the Kim could have more powers. The sixth king Zima(祗麽王) of Pasa son also married with Kim aere(愛禮) and made her father Galmoonwang. Pasa and Zima could power up supportive force and royal authority. But Yuri son Ilsung(逸聖) seventh king married with Park □rae(□禮) and his son Adalla(阿達羅) eighth king married with Park naerae(內禮). Ilsung king and Adala king reinforced cohesion by family wedding. As you can see from the Park king times Saroguk(斯盧國) identity formation. Park family and Seoktalhae’s family and Kim family Constituted a royal family. And There was dominant group which was six village headman and Hogong(瓠公) family. There is no clear stratification but there was six village headman’s descendent and village leader who was low level than publ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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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永泰二年塔誌>를 통해 본 竹州地域 朴氏들의 존재양태

        이재범(李在範) 신라사학회 2011 新羅史學報 Vol.0 No.21

        <영태이년탑지>의 내용 재검토 결과, 탑지의 박씨는 평산박씨나 죽산박씨와는 다른 가계로 추정하게 되었다. 죽주지역에는 죽산박씨 외에도 다른 박씨 호족 세력이 8세기 중엽 이전부터 세거하였을 것으로 파악하였다. <영태이년탑지>와 관련된 박씨 세력은 박적오계 평산박씨의 잔존세력, 박기오계의 죽산박씨 세력들과 함께 자신들의 세거지를 중심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장명사와 관련된 안성안씨, 혜소국사비의 고탁본 발견으로 알게 된 혜소국사의 본관인 안서이씨, 죽주 적괴 기훤 등과 같은 호족적 기반을 가진 세력들과 공존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호족들이 서로 대립과 협조를 통하여 공존하였을 가능성은 비단 죽주 일대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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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렴의 결혼과 그 정치적 의미

        張日圭 신라사학회 2011 新羅史學報 Vol.0 No.22

        응렴은 국선이었다. 그는 산천을 돌아다니며 당시 신라 사회의 모습을 살폈다. 헌아왕은 응렴의 능력을 시험하며 내심 사위로 맞고자 하였다. 응렴의 부모와 형제는 당시 정치 상황을 고려한 탓에 헌안왕의 제안에 쉽게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범교사로 대표되는 응렴의 낭도들은 결혼하기를 절실히 바랐다. 결국 응렴은 ‘둘째 딸’과 결혼하고자 했지만, 헌안왕은 화랑의 요구대로‘첫째 딸’과 혼인하도록 하였다. 응렴은 헌안왕의 사위로 즉위하였다. 헌안왕과 응렴의 아버지 계명은 충공계나 박씨 세력과 인척 관계를 맺었다. 원성왕대 이후에 박씨 세력은 인겸과 애장왕, 충공, 흥덕왕과 혼인 관계를 맺으며 주요 정치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헌덕왕의 즉위 이후 박씨 세력과 충공은 인겸계 후손은 물론 예영계 후손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흥덕왕 사후 치열한 왕위계승 다툼이 벌어지자 충공계가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분열한 것처럼 박씨 세력도 分枝化하였다. 특히 균정과 결혼한 박씨 세력은 그의 손자 문성왕과 연속적으로 혼인하면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나아가 신무왕이 장보고의 도움으로 즉위하면서, 이들 가운데 일부는 장보고 선단의 기반인 서남해안 일대로 옮겨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문성왕대에 중앙의 박씨 세력은 감양이나 양순 등의 견제를 받아 점차 주도권을 잃어 갔다. 이들은 다시 충공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김양 세력을 축출해 나갔다. 그것은 헌안왕과 경문왕의 아버지 계명을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문성왕은 서남해안 일대 박씨 세력을 위무하고자 하였다. 헌안왕 역시 이러한 의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헌안왕은 여론을 등에 업고 왕비와 신하의 이해를 얻어 응렴에게 왕위를 넘겨주었다. 경문왕은 즉위 초에 문성왕과 헌안왕처럼 서남해안 일대에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는 한편 그곳의 박씨 세력을 아우르려고 하였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서남해안 일대의 사찰에 불사를 설행하였다. 그 뒤 친동생인 위홍을 중심으로 왕실의 위상을 강화하면서 새로운 친족과 측근 세력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때 그는 서남해안 일대의 박씨 세력은 물론 경주의 박씨 세력을 한데 아우르려고 하였다. 특히 도당유학한 박씨 세력을 측근 세력으로 등용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씨 세력은 혈연적인 일체감을 형성하면서 점차 정치적 영역을 확대해 갔다. 특히 경문왕 사후에 아들 헌강왕이 박씨 세력을 사위로 맞이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는 주요 정치 세력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마침내 경문왕계 왕실의 마지막 혈손인 효공왕 이후 박씨 세력은 신라의 왕위를 차지하였다. 경문왕의 즉위와 경문왕계 왕실의 활동은 박씨 세력의 재건에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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