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중국「巫山一段雲」詞牌의 한국에서의 수용 양상 연구: 8영체 중심으로

        김현주(Kim, Hyun Ju),백연주(Baek, Youn Ju)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문학연구소 2021 외국문학연구 Vol.- No.81

        중국 사패 중 「巫山一段雲」은 많이 塡詞된 사패가 아니었으나 한국에 유입된 이후 고려·조선에 걸쳐 90여명의 문인들이 500여 수의 많은 작품을 지을 정도로 크게 유행하였다. 또한, 한국의 「무산일단운」의 형식은 절반 이상이 聯章體 八詠의 寫景詞라는 것은 한국에서의 수용에 있어 독특한 양상이다. 중국의 「무산일단운」에는 8영체 형식이 없으며, 前蜀의 毛文錫에 의해 처음 무산 12봉을 제재로 하는 詞가 지어진 이후 李珣에 의해 연장사의 형태로 발전하였고, 柳永에 의해 5영체로 이어지며, 마침내 趙孟頫에 의해 형식적으로 12영체를 갖추며 제재면에서 사경사가 되었다. 연장체는 敦煌民間詞 중 大曲에서 보이는 형식으로서 이후 중국 민간문학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한국의 이제현은 조맹부와 교유의 관계였고, 조맹부의 「무산일단운」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제현의 사는 중국의 것과 달리 두 개의 組로 이루어진 8영체였다. 한국에 최초로 나타난 8영체로 된 이제현의 「무산일단운」은 이후 고려와 조선의 문인들 사이에서 매우 유행하여 형식면에서는 8영체 뿐만 아니라 非 8영체로 확대되는 모습을 보이며, 제재면에 있어서도 사경사에서 시작하여 이후 다양한 제재를 택하는 양상을 보였다. 본 연구는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한국의 「무산일단운」을 연구대상으로, 중국 「무산일단운」 사패가 한국에서 수용될 때, 8영체의 형식으로 발전하는 양상에 주목하고 8영체에 해당하는 작품들의 형식과 제재면에서 보여지는 양상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았다. 비 8영체 작품 수 또한 적지 않으므로 이에 대한 연구도 후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Among the tunes for Chinese Ci poetry, 「Wushan Yiduanyun」 was not very popular, but since it was introduced to Koryo Dynasty, it has become so popular that about 90 writers have built more than 500 works in Koryo and Joseon Dynasty. In addition, it is unique in terms of acceptance in Korea that more than half of Korea"s 「Wushan Yiduanyun」is "Realistic Landscape Poetry’ of ‘Chapter-after-chapter Ci’ while China"s 「Wushan Yiduanyun」 does not have the ‘eight Chapter style’ . Lee Jehyun"s 「Wushan Yiduanyun」 was the first ‘eight Chapter style Ci’ to appear in Korea, Later, it became very popular among dynasty Koryo and Joseon’s writers. However, this kind of format, the ‘eight chapter style’, was not the only format to have been utilized, as shown in the example of the ‘Not eight chapter style’, which derived from the root of the first style, while having opposite characteristics. Furthermore, in terms of content it started with ‘Realistic Landscape Poetry’ and then expanded to include various contents. This research will serve as a foundation for research in the field of literary geography, which studies geographical content and topics recited by Korea"s 「Wushan Yiduanyun」.

      • KCI등재

        明淸 時期 「巫山一段雲」의 形式 考察

        류기수 중국학연구회 2015 중국학연구 Vol.- No.74

        高麗와 朝鮮의 詞人 73명이 지은 481首의 「巫山一段雲」은 어떻게 수용되고 발전되었을까? 이 문제의 정확한 답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中國의 「巫山一段雲」의 발전 궤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3年 이에 대한 기초 연구를 진행하여 그 결과로 한반도에 들어온 「巫山一段雲」이 趙孟頫詞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적이 있으나, 그 후 20여 年 간 중국에서는 『全明詞』, 『全明詞補編』, 『全淸詞⦁順康卷』, 『全淸詞⦁雍乾卷』등의 詞籍이 출판되었고, 필자도 그 당시보다 200여 首나 더 많은 고려와 조선의 「巫山一段雲」詞를 발견하였기에 과거 연구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기도 하다. 본고에서는 현재까지 발간된 明淸 時期의 詞集을 기본 자료로 삼아 明淸代에 塡詞된 「巫山一段雲」의 형식에 대해 전반적인 고찰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은 한국과 중국의 「巫山一段雲」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밝히기 위한 토대 연구이며, 분석 과정에서 발견된 중국 詞籍들의 문제점은 詞總集 增補版을 준비하는 연구자들에게 어느 정도의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 KCI등재

        <巫山一段雲>與韓國詞創作

        박영순,요대용 중국어문연구회 2011 中國語文論叢 Vol.0 No.48

        일부 중국의 문학작품은 본토에서는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하다가 외부로 흘러들어가면서 도리어 영향을 준 경우가 왕왕 있다. 바로 <巫山一段雲>이 그러하다. 특히 중국 송대에 유행했던 사는 고려·조선으로 들어와 고려·조선사라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巫山一段雲> 사패 중국본은 중국 사인들에게 그다지 환영을 받지 못했으며 가작도 비교적 적다. 그러나 고려 詞壇의 명인 李齊賢이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 비로소 광범위하게 流轉, 사용되면서 깊은 영향을 주었다. 한국의 역대 문사들은 <巫山一段雲>의 詞형식으로 산수풍경을 묘사하고 일상풍물을 읊조리면서 자신의 흉금을 토로하였다. 이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왔으며, 이로 인해 한국사학사상 ``<巫山一段雲> 현상``이 생겨났다. 본고는 역대 한국의 <巫山一段雲> 詞의 대표적인 특징인 제재의 풍부함, 풍격의 다양함, 세속화되어 가는 경향 등을 통해 한국의 詞작품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 KCI등재후보

        고려 문인들의 팔경문학 향유에 대하여

        김건곤(Kim, Kun Kon)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 장서각 Vol.0 No.34

        이 글은 고려시대의 팔경문학의 전개양상을 통시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고려 문인들이 중국의 소상팔경을 대상으로 시를 짓고 차·화운하는 한편, 고려의 특정지역이나 공간을 팔경으로 정하고 문학활동을 영위한 과정을 저작경위와 영향관계에 주목하여 고찰하였다. 특히 소상팔경시와 한국 팔경시, 八景詩와 八景詞로 나누어 그 전개과정을 파악하고, 기존연구의 몇 가지 문제점을 검토하였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소상팔경시와 소상팔경도가 제작된 것은 명종이 신하들에게 지시를 하면서부터이다. 李仁老의 한시 〈宋迪八景圖〉가 그 당시에 지어진 것으로,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이것은 후대에 지어진 여러 팔경시의 전범이 되었다. 이어서 李奎報가 6편, 陳澕가 1편의 소상팔경시를 남기고 있는데, 당시 관료·문인·승려들 사이에 소상팔경시를 짓고 차운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고려 후기에는 소상팔경시가 그다지 지어지지 않았다. 李齊賢이 지은 1편이 남아있을 뿐이다. 대신 李穡은 소상팔경이 아닌 중국의 다른 승경을 대상으로 〈東吳八詠〉과 〈鳳山十二詠〉을 지었다. 곧 대상과 형식이 다양해진 것이다. 한편 고려 문인들은 소상팔경을 한국적으로 변용하여 한국 팔경시를 창작하였다. 金克己는 강릉의 8곳을 유람하며 최초의 한국 팔경시 〈江陵八景〉을 남겼다. 실경을 소표제로 삼고 경관과 관련 있는 역사나 전설을 원용한 점이 특징적이다. 이규보는 2편의 한국 팔경시를 지었지만, 모두 자신이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지어준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한국 팔경시가 여러 문인들에 의해 성행하였다. 문단의 종주였던 이제현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가 원나라에 머물면서 송도를 그리워하며 〈憶松都八詠〉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安軸은 관동지방의 관리로 나갔다가 〈三陟西樓八詠〉을 지었고, 李穀과 李達衷이 그 시에 차운하였다. 또 안축은 경상도의 여덟 경치를 〈東南八景詩〉로 읊었다. 이색은 자신의 고향을 대상으로 〈韓山八詠〉을 지어 자부심을 드러내는 한편, 간신 廉興邦을 위해 〈金沙八詠〉을 지어주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 팔경문학의 한 특징으로 寫景詞의 창작을 들 수 있다. 이제현이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며 詞를 익혀 독보적인 솜씨를 보였는데, 巫山一段雲으로 〈소상팔경사〉와 〈송도팔경사〉를 지었다. 그의 영향 아래 鄭誧가 〈蔚州八景〉, 陳義貴가 〈淸安八景〉, 安魯生이 〈寧海十二詠〉 등을 차례로 지었다. 모두 귀양지에서의 閑適한 삶을 무산일단운으로 읊은 것이다. 무산일단운이 유행한 것은 이제현에 의해 새로 전해진 詞調인데다, 오언과 칠언의 조합으로 상대적으로 짓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시대 팔경문학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기존연구의 몇 가지 오류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특히 진화의 소상팔경시 저작시기, 김극기의 문학사적 위치, 虔州八境 및 東吳八景의 소상팔경과의 관계, 봉산십이경의 대상 등에 대해서는 재고할 여지가 있다. This study is about observation of how the eight-view literature in the Goryeo period has been evolved. Goryeo writers made and quoted a poem based on the eight views of Xiaoxiang of China. Also, they appointed a certain area and space as the eight views and studied the process of literature activity focusing on the purpose of writing and effect relationship. Especially they tried to understand the development process by splitting into a poem on the eight views of Xiaoxaing, Korea eight-view poem, the eight-view poem and cí (詞). The first painting/poem on eight views of Xiaoxiang in Goryeo period was produced by an order from the king, Myung-Jong (明宗). A poem on eight views of Xiaoxiang by a writer, Lee, In-Ro (李仁老) was written in this period and it is known as the oldest existing poem. This became a role model for the later poem of eight views. Following his poem, there were 6 poems from Lee, Gyu-Bo (李奎報), and 1 poem from Jin-Hwa (陳澕). At that time, it was popular among bureaucrats, writers, and monks to make and rhyme a word [character] of a poem on eight views of Xiaoxiang but the type of poem was not in popular in the late Goryeo. There was only one poem left from Lee, Je-Hyun (李齊賢). Instead, Lee, Saek (李穡) wrote a poem on the eight-view and twelve-view poem about other magnificent views in China, not the Xiaoxiang. That is, a subject and a form of poem were varied. On the other hand, Goryeo writers customized the eight views on Xiaxiang in Korean way and created the unique style of a poem on eight views Kim, Geuk-Ki (金克己) travelled eight places in Gangneung and left the very first poem on eight views in Korea history. It is distinctive that he set a sub-heading using the real view and quoted a related history and legend. Lee, Gyu-Bo wrote two Korea eight-view poems, not for his enjoyment but for someone else. From the late Goryeo, the Korea eight-view poem started to be written in earnest. It was mainly because of the influence of Lee, Je-Hyun, the leader of the literary world at that time. Following the eight-view poem that he wrote during his stay in Yuán (元) with heart missing Songdo (松都), Ahn, Chuk (安軸) made a poem on eight different views in Samcheok in Gangwon-do, and Gyeongsang-do. Lee, Saek wrote a poem about his hometown so he showed pride, and he even wrote a poem for his disloyal subject. One of characteristics of eight-view literature in the late Goryeo is a creation of Sa-gyung cí (寫景詞; cí to describe the view). Lee, Je-Hyun associated with writers in Yuán learned cí and showed the distinctive skill. He wrote Xiaoxiang and Songdo eight-view cí with Moosanildanwoon (巫山一段雲). Under his influence, many writers wrote the eight-view cí such as Jung, Po (鄭誧), Jin, Ui-Gui (陳義貴), and Ahn, No-Saeng (安魯生). They all wrote the cí about the lonely life using Moosanildanwoon. The fame of Moosanildanwoon was because it was the new form of literature introduced by Lee, Je-Hyun and relatively easy due to the combination of five words and seven words

      • KCI등재

        고려후기 사문학(詞文學)의 전개 양상과 미적 특질

        하정승 ( Ha Jung Seung ) 한국한문학회 2016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63

        중국문학사에서 詞는 매우 독특한 장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문학으로서의 모습만이 아니라 음악적인 요소까지 가미되었기 때문이다. 사는 원래 노래를 위한 악곡의 가사로 출발했다. 하지만 후대로 갈수록 악곡과는 관계없는 사, 즉 순전히 독서를 위한사들이 많아졌다. 이는 한국문학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려시대 송으로부터 사가 들어온 이후로 한국한시사에서 사는 원래의 목적인 악곡과는 큰 상관없이 창작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노래로서의 말과 시로서의 글이 일치하지 않게 되는 한국한문학 특유의 장벽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생각된다. 게다가 일찍부터 지어져 왔던 비슷한 장르인 한시가 활발히 창작되고 있었기에 시인들 입장에서는 악보와 평측, 음률 등이 부담이 되는 사의 창작에 열의를 쏟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같이 창작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고려조에 시작된 사의 창작은 조선 말기까지 꾸준히 그 명맥을 유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사의 작가와 작품 수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최초의 사는 고려 제 13대 왕인 宣宗이 지은 것으로, 그는 요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향연에서 楊柳枝의 詞調에 따라 遼帝의 생일을 축하하는 「賀聖朝詞」를 지었는데, 이것이 한국문학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詞이다. 선종 이후로 고려 문단에서 사의 창작은 갈수록 활발하게 이뤄졌는데, 예컨대 고려 문단에서 핵심으로 활동한 시인들인 金克己, 李奎報, 李齊賢, 李穀, 鄭?, 金九容, 鄭道傳, 權近 등이 사를 남기고 있다. 그 외 승려시인으로 유명한 慧諶 역시 사를 지었다. 이를 정리해 보면 현재 작품이 전해지는 고려시대 사의 작가는 10명이고, 작품 수는 110수이다. 이들이 사용한 사패는 30여 가지가 넘고, 그중 가장 즐겨 사용한 것은 ‘巫山一段雲’이며 그 외 望江南, 浣溪紗, 桂枝香慢 등도 자주 사용되었다. 사의 내용을 보면 개인적인 감정을 읊은 서정적인 北宋詞계열의 작품들이 대다수인데, 하지만 북송사의 가장 큰 특징인 남녀간의 사랑을 읊은 花間風의 작품보다는 인생의 허무와 같은 애상조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Sa(詞) is a very unique genre in the history of Korean Chinese poetry. Because it is rhythmical in spite that it belongs to prose genre. Sa(詞) originally starts from song lyrics. As time, however, went on, Sa詞 came to be read for reading itself regardless of singing. In the history of Korean Chinese poetry, Sa(詞) was introduced to Koryeo Dynasty from Song Dynasty. Since then, it had been created regardless of its own original purpose as a song. That``s because there was a real barrier between real spoken language as lyrics and written language as poems. Besides, Korean Chinese poetry, a similar genre to Sa(詞) had been already being created actively. Although poets of the day needed not particularly be warming to creation of Sa(詞), it not only remained in existence until late Chosun Dynasty, but also the number of writer and literary works related to it rapidly increased. The first Sa(詞) remained in the history of Korean literacy was written by King Sunjong. He wrote Hasungjosa(賀聖朝詞) celebrating the birthday of the emperor of Yao dynasty with it following Yangryuji(楊柳枝). After that, the creation of Sa(詞) became active. For instance, a number of poets such as Kimguki(金克己), Leekyubo(李奎報), Leejehyon(李齊賢), Leegok (李穀), Jungpo(鄭?), Kimguyong(金九容), Jungdojeon(鄭道傳), Kwongun (權近) engaged themselves in writing Sa(詞). Hyesim(慧諶) known as monk and poet also wrote Sa(詞). The number of poets of Koryeo Dynasty who bequeathed works of Sa(詞) is 10 and 110 poems were leaved. They used 30 kinds of rhythms Sapae(詞牌)-Manggangnam(望江), Wangyesa(浣溪紗), Gyejihyangman(桂枝香慢) as well as Musanildanun(巫山一段雲). Poems written by them consists of contents involving personal emotion, as is the case with the line of Buksongsa(北宋詞). But unlike Buksongsa(北宋詞), poems about vanity of life are more predominant than ones about love affair.

      • KCI등재

        일반논문 : 19세기 사(詞)문학 유행의 배경에 대하여

        유영혜 ( Young Hye Yoo ) 한국고전연구학회 2011 한국고전연구 Vol.0 No.23

        이 글은 19세기 사창작의 동향과 이 시기 사문학이 유행했던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한 명의 작가가 많은 수의 사를 창작하는 경향이 생겨나는데, 고려 말에서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사 창작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문집의 한 편제 안에 사를 포함시켜 대량으로 창작하는 경우는 19세기에 가장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일관적으로 시여(詩餘)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 시기 사에 대한 일정한 개념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조선후기의 시문화 안에서 사를 체계화 하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19세기가 되면 <무산일단운(巫山一段雲)>사가 거의 창작되지 않고 대신 새롭게 등장한 사조만 해도 24조나 된다. 연작을 하더라도 각각 다른 곡조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러 명이 어울려 함께 사를 창작하는 모습도 19세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19세기 사문학 유행의 배경으로는 우선,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 가창문화의 변화를 들 수 있다. 19세기의 사는 가창문화의 발달로 다른 장르들과 결합하면서 보다 진솔한 감정을 드러내는 문학 장르로 인식되었고 이것이 이 시기 다양한 사가 창작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다음으로, 청대의 사 부흥은 당시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던 우리나라의 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청대의 문학 서적들이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해 우리나라에 다량 유입되었고 아울러 중국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당시 부흥했던 사 문학의 유행이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19세기 주요 사작가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편지나 차운사를 통해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고 평가하는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런 문화를 바탕으로 다수의 사를 남기고 있는 작가군이 형성 될 수 있었으며 사창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사의 진면모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불렸던 시조나, 소설 안에 등장하는 노래들도 함께 살펴봐야 할 것이며 악부와 사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도 재검토가 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19세기 詞의 전반적인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개별 작품에 대한 분석이나 작가들의 의식은 심도 있게 다루지 못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This paper focused on the "Sa(詞)" literature trend and historical background in 19th century. Since the mid-19th century some author started to create a lots of "Sa". From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to beginning of the Joseon dynasty, the "Sa" was created continuously. But the "Sa" started to have a great vogue at 19th century, such as including "Sa" in a collection of literary works. People was constant in using "Si_Yo(詩餘)", which means basic concept of "Sa" has been built. And this "Si_Yo" word also means there were great effort to organize this "Sa"_literature in poem_literature category. We can fine The first background of The Vogue in 19th century from "Ga_Chang(歌唱)" literature in 18th century. From end of 18th century, "Ga_Chang" was developed and was combined with other literature. So "Ga_Chang" became a genre which can express various emotions. This "Ga_Chang" gave opportunity for various "Sa" creation. The second background is the "SA" Vogue in the China. At this time, there were a lot of introduction of books. And writers exchanged their thoughts. For last background, writers shared their creations by the letter and "Cha_Un_Sa(次韻詞)". This sharing made writer group and gave opportunity for various "Sa" creations. This paper couldn``t show the individual works or the detail analysis. but this paper will explain the overall "SA" trend in 19th century.

      • KCI등재

        중국사(中國詞)의 수용(受容)과 창작(創作) - 새로 발견된 고려(高麗)ㆍ조선사(朝鮮詞)를 중심(中心)으로

        류기수 중국학연구회 2013 중국학연구 Vol.- No.65

        过去的一段时间, 汉字是东方的拉丁语, 东方的文人大都用汉子写文学作品, 所以他们密切关注中国文学的各种体裁的发展。唐宋词始于中国, 传播到高丽、朝鲜、日本和越南等的东亚国家, 而扎根其地, 豊富了他们的文学宝库。 2006年问世的《历代韩国词总集》收录了不少高丽朝鲜兩朝词,然失误较多, 去年据新得的资料补充了《历代韩国词总集》的疏失和遗漏, 发表了<《历代韩国词总集》补正记>。今年又发现了《总集》遗漏的55人的195首词作, 现予以指出, 期望能够为《总集》的完善有所补益。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