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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론:조선시대 ‘국가의례’ 연구의 성과와 전망

        나영훈(Na young hun) 한국사학회 2021 史學硏究 Vol.- No.144

        조선시대 국가의례는 ‘五禮’로 정리할 수 있다. 본 공동연구는 조선의 ‘국가의례’와 관련된 성과가 상당수 누적되어 있는 것에 비해 이들 성과를 정리한 시도가 없었던 점에 착안하여서 이들 연구사를 세밀하게 정리하여 연구의 한계점을 파악하고, 또한 향후 국가의례 연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고민을 하고자 시도되었다. 각 연구자들은 오례 가운데 ‘길례’, ‘가례’, ‘빈례’, ‘흉례’ 연구사를 정리하고 또한 실학자들의 ‘예학’을 추가하여 공동으로 국가의례 연구를 정리하였다. 총론에서는 조선시대 국가의례 연구를 박사학위논문을 중심으로, 연구의 추이를 종합적으로 정리하였다. 국가의례 연구의 서막은 1980년대 이범직과 지두환의 오례 연구로 시작된다. 이전까지 유교망국론 등의 영향으로 연구가 진행되지 않는 불모지였던 국가의례 분야는 이들 연구자에 힘입어 본격적인 연구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1990년대는 국가의례 연구의 기반이 조성된 시기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해영, 한형주는 길례 연구를 토대로 오례 전 분야에 걸친 연구를 시도하였다. 이 시기에는 조선 왕실에 대한 연구자와 대중의 관심이 함께 증가한 시점으로, 이들 연구는 국가의례 연구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예학과 관련된 심도 있는 연구가 이 무렵 증폭되면서 이 역시 국가의례 연구에 기여한 바가 컸다. 이 시기는 국가의례를 주제로 한 분야가 한국사 내에서 점차 학문적 영역을 확보한 시작점으로 의미가 있다. 2000년대는 왕실에 대한 관심 속에서 연구자의 수효가 증가하고 학술적인 연구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기였다. 국가의례를 선도하는 다수의 연구자가 배출되었고 연구의 기반이 될 전례서, 의궤, 등록 등의 자료에 대한 이해 역시 심화되었다. 이 시기는 다방면에서 국가의례 연구가 비상할 수 있게 해준 시기로 의미가 크다. 2010년대는 국가의례 연구의 방법론상의 외연이 확장된 시기이면서 폭넓은 사례 연구가 진행되는 시기이다. 더 나아가 90년대 후반부터 진행된 주요 자료의 인터넷 서비스로 관련 자료를 손쉽게 접근하고 연구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의례 연구가 범람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누적된 수많은 국가의례 관련 연구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해결해야할 과제 역시 남아 있다. 첫째, 국가의례 전체를 아우르는 시도가 다시 진행되어야 한다. 둘째, 방법론상의 영역을 넓히되 국가의례를 주요 주제로 하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타분과 학문과의 긴밀한 융복합 연구를 모색해야 한다. 조선시대 국가의례는 현재에도 상당한 연구가 이루어져 있지만 앞으로 더 많은 연구주제가 산적해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본 공동 연구사 정리는 현재까지 누적된 국가의례 연구를 집적하는 역할에 그쳤다. 향후 이를 토대로 내실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The Joseon Dynasty’s “National Ritual(國家儀禮)” can be summarized as “Five Rites(五禮)”. This study was attempted based on the fact that there were no attempts to summarize these achievements, compared to the accumulation of significant achievements related to Joseon’s ‘National Ritual’. It was attempted to understand the limitations of the study by organizing the ‘National Ritual’ study in detail and to think about the future direction of the "National Rituals’ study. The prelude to the study of ‘National Ritual’ begins with the study of ‘Five Rites(五禮)’ by “Lee Bum-jik” and “Ji Doo-hwan” in the 1980s. The 1990s was the time when the foundation for the study of ‘National Ritual’ was established, and it is of great significance. This period is meaningful as a starting point for the field under the theme of ‘National Ritual’ to gradually secure academic areas within Korean history. The 2000s was a time when the number of researchers increased and academic research exploded amid interest in the ‘Royal(王室)’. The 2010s was a time when the extension of the methodology of ‘National Ritual’ research was expanded and extensive case studies were conducted. Despite the accumulated studies so far, several challenges remain to be solved. First, attempts must be made to encompass the entire ‘National Ritual’. Second, while expanding the scope of methodology, research with the main theme of ‘National Ritual’ should be conducted. Third, it is necessary to seek close convergence research with other branches and disciplines. This joint research organization has only played a role in integrating research on ‘National Ritual’ accumulated so far. It is expected that substantial research will be conducted based on this in the future.

      • KCI등재

        허조(許稠)와 태종~세종대 국가의례의 정비

        한형주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6 民族文化硏究 Vol.44 No.-

        이 연구는 조선초기 최고의 예학자로 평가되었던 許稠의 사상과 정치활동을 통하여 태종~세종연간의 국가의례의 정비과정에서 어떠한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단계적인 차별성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허조는 정치활동은 태종대 후반기 예조참의로 국가의례를 담당하면서 본격화되었는데, 세종 21년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 예조와 이조의 관원으로 활약하면서 후대에 명재상으로 평가받았다. 학문적으로 볼 때 그는 鄭道傳과 같이 조선건국에 직접 참여하여 易姓革命의 이론을 제공했던 儒者들과 세종대 守成期의 새로운 인재로 양성되어 안정적인 국가유지에 기여했던 集賢殿출신 학자들 사이에서 가교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허조의 대표적인 활동은 태종~세종 연간의 국가의례의 제정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는 예의 실천자로서 강한 사명 의식을 가졌는데, 비록 王道政治와 民本意識을 유자가 취해야할 덕목으로 인식했지만 이것이 국왕권 혹은 국가의 이익과 상충되었을 때에는 전자가 희생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部民告訴禁止法과 凌上禁止의 주장을 통해 上下의 分別을 엄격히 하였고, 君臣간의 엄격한 차별성으로 군주권을 강조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의식은 국가의례의 정비과정에서 그대로 반영되었다. 국가의례 정비과정에서 허조의 역할은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기는 태종대 후반기로, 이 시기에 그는 예조의 참의와 참판으로 재직하면서 吉禮와 嘉禮를 중심으로 고려시대의 체제에서 벗어난 새로운 조선시대 국가의례의 기본틀을 설정하였다. 2기는 세종 즉위년부터 동왕 9년까지의 시기인데, 허조는 세종의 즉위 직후 예조판서에 임명되어 예제정비를 주도하였고, 이후에도 儀禮詳定所 提調를 겸직하면서 의례의 제정에 적극 관여하였다. 그렇지만 정종과 태종의 國喪 및 부묘과정에서 群王間의 차별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원칙론을 제시함으로써 정종과 태종을 차별하려는 세종과 갈등을 빚었다. 3기는 세종 10년 이후의 시기인데, 이때 허조는 1품의 원로로 國政 전체를 총괄하면서 의례상정소 제조로 중요한 국가의례에 관여하였다. 그런데 이 시기는 집현전이 역대의 古制硏究를 통해 허조의 주도하에 마련되었던 기존의 국가의례가 재검토되는 단계였다. 특히 허조의 사후 세종은 집현전관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례의 전면적인 개정을 추구하였다. 그렇지만 세종의 사후 金宗瑞, 허후 등이 허조의 禮說을 중심으로 『世宗實錄』五禮를 편찬함으로써 이후 허조의 예설은 이후 조선시대 국가의례의 중요한 뼈대로 남게 되었다.

      • KCI등재

        일제강점기 체화(體化)된 황국신민의례와 일제의 ‘착한 근대 아동’ 만들기: 경성(京城)의 소학교를 중심으로

        안주영 한국문화인류학회 2020 韓國文化人類學 Vol.53 No.3

        This article is examined the implications of “Good modern children” by analyzing how the Japanese manipulated the school schedule and education policy in elementary schools, mainly in Keijō(京城) in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ism, in order to ‘japanize’ the students [convert them to subjects of the Japanese empire(皇國臣民)] through school rituals. The school’s time schedules and rituals were made to directly reflect Japanese national ideologies. An elementary school, where children of Joseon descent attended, was the first school to have this new Japanization policy institutionalized. The amount of Japanese national rituals and Japanization education steadily grew. The “modern child” that Japanese wanted to create in the Joseon children through the new elementary school education system was basically a Japanized native colonial citizen making them a “subjects of the Japanese empire.” The Japanese Empire in elementary schools, mostly in Keijō, used the repetition of Japanese national rituals to instill a sense of alignment to the Japanese empire into the daily lives of the children. This kind of education increased in the elementary schools in Keijō as Japanese rule neared its end. The use of Japanese, shrine worship rituals, and morning assembly rituals, Japan’s national festival day rites were greatly increased. The elementary schools in Keijō aimed to turn the Joseon children into “subjects of the Japanese empire,” the Japanese national ideologies were slowly and naturally integrated into the children as they were exposed to the rituals daily. And the rites of subjects of the Japanese empire were naturally embodied in the Joseon children. This was how, children at elementary schools in Keijō, used Japanese, carried out rituals and were educated to be “good modern children” in order to become “subjects of the Japanese empire.”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경성의 주요 소학교의 시간 구성과 교육 정책에서 강조된 황국신민화 교육이 학교 의례의 수행으로 표출된 과정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일제의 식민지 초등 교육에서 추구되는 ‘착한 근대 아동’이 지닌 함의에 대해 고찰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식민지국가 이데올로기는 학교의 시간 구성과 학교 의례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나타났으며, 경성의 조선인 아동이 다니는 소학교는 일제의 식민정책과 황국신민화교육을 가장 우선적으로반영시키는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식민지 국가의 시간 구성 속에서 일제의 국가 의례와 수신교육은 점차 강화되었다. 일제가 국가 시간체제 내에서 소학교 교육을 통해 조선의 아동에게 주입시키고자 한 ‘근대 아동’은 서구의 근대 국민의 모델을 일제의 식민지 국가 이데올로기에 의해 변용시킨 ‘황국신민’이다. 일제는 경성의 주요 소학교에서 반복되는 국가의례의수행을 통해 아동의 일상생활 깊숙이 황국신민의식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소학교 의례의 시간을 정교하게 구성하였다. 일제강점기 말기로 갈수록 경성의 소학교에서는 수신 교육을 전면에 내세우게 되었고, 이와 연계되어 일본어의 상용화, 신사참배 의례, 봉안전 의례, 조회와국가축제일의례의 수행이 점차 심화되었다. 경성의 소학교에서는 조선의 아동을 ‘일제의 황국신민’으로 육성시키고자 하였으며, 아동의 매일의 일상속에서 국가 이데올로기가 함의된황국신민의례는 이들의 삶과 결부되며 점차 자연스럽게 체화되어갔다. 이로써 일제강점기경성의 소학교 아동은 일본의 언어와 의례를 수행하며 일제의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 학교의시간과 규율을 잘 지키는 ‘착한 근대 아동’으로서 교육받았다.

      • KCI등재

        고려시대 국가의례로서의 불교의례 설행과 그 정치적 의미

        강호선 동국대학교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5 동국사학 Vol.59 No.-

        본 연구는 고려시대 국가의례로서 설행된 불교의례가 갖는 정치적 기능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고려시대 국가와 불교의 관계, 불교와 왕권의 관계를 살펴보는 데 목적이 있다. 『高麗史』 「禮志」에 전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 고려시대 국가의례는 유교뿐만 아니라 도교와 불교가 차별 없이 설행되었다. 특히 불교의례는 국초부터 중요한 국가의례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양한 불교의례 가운데서도 궁궐이나 眞殿사원에서 국왕이 주재하는,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의례를 국가의례로 이해할 수 있다. 고려시대 국가의례로서의 불교의례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첫째, 국가의 권위와 왕권과 관련된 주요의례가 불교의례로 수렴됨으로써 불교의례를 통해 왕권을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재생산하였다. 둘째, 불교의례를 통해 불교로 왕권을 수식할 뿐만 아니라 국왕의 통치행위는 보살행으로서 정당화되었는데, 이점에서 국왕의 菩薩戒受戒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셋째, 의례를 통한 “君臣同樂”의 실현은 공동체의식 함양에 기능하였다. This paper inquires into the relationship between Buddhism and State, focusing on Buddhism and royal authority by studying political role of Buddhist rituals performed as Royal Ritual in Goryeo dynasty. Not only Confucian rituals but also Buddhist or Daoist rituals were held as royal rituals and there was no distinction of their status and authority as Royal rituals. It is different from “the Ritual Records(Ye-ji)” of Goryeo History(Goryeosa). Actually, lots of Buddhist rituals were held during Goryoe dynasty and among them royal rituals required some or all of following four points: (1) it held in palace-Royal audience hall, Royal office, and Royal residence- or Jinjeon Temple. (2) King or Royal preceptor as attorney managed ritual, (3) the rituals were held regularly on any given day or special aim, (4) all country was participate in rituals. Ritual for Benevolent Kings(仁王道場), King’s Receiving Bodhisattva Precepts(菩薩戒), Monks parade holding Prajuāpāramitā-sūtra(經行), Lotus lantern festival(Yeondeunghoe) and Assembly of Eight Prohibitions (Palgwanhoe) were typical Royal Buddhist rituals. These Royal Buddhist ritual had political significances such as (1) important rituals for authority of State and Royal converged on Buddhist rituals, which played a role for reconfirming and reproducing of King’s authority, for example Worship of Tae-jo, (2) rule of King was justified as Bodhisattva’s deed and King had to practice mercy as Bodhisattva, (3) they contribute to promote community spirit.

      • KCI등재

        한국인의 국기관(國旗觀)과 “국기에 대한 경례” -국가 표상으로서의 국기(國旗)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의 변화 과정-

        전우용 ( Woo Yong Chun )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14 동아시아 문화연구 Vol.56 No.-

        國旗는 圖像化한 국가이며 事物化한 국가다. 국기를 비롯한 국가 표상들은 추상적인 국가를 인식 가능한 실체로 전환시키고, 그럼으로써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관념을 구체적 행위로 표현할 수 있게 해준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는 국민이다. 따라서 민주공화국에서 국민이 자국기에 대해 경례하는 것은, 형식논리로 따지자면 주인이 자기 소유물의 표지에 경례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이것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 오히려 국기에 대해 경례하지 않는 사람은 불순하거나 반국가적 사상을 가진 위험 분자로 지목된다. 본 연구는 이런 모순적인 현상과 인식 태도가 형성된 역사적 경위를 추적한 것이다. 중세적 중화체제에서 벗어나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한국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列國 중의 하나’로서 고유한 표지를 만들어야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기는 처음 대외적으로 국가를 상징하는 수단으로만 사용되었으나, 이윽고 스스로 국가의 一員임을 자각하는 국민을 만드는 상징적 기호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학교 등 공공기관이나 각종 행사장에 내걸린 국기는 사람들에게 같은 표지를 공유한다는 느낌을 반복적으로 심어주었다. 이런 반복적인 체험을 통해 사람들은 ‘국기 밑에서 하나 된’ 국민으로 재탄생했다. 그런데 대한제국 시기의 국기는 국민과 同格으로서 황제보다는 아래에 있었다. 따라서 황제는 충성의 대상이었으나, 국기와 그것이 표상하는 國家는 ‘사랑’의 대상이었다. 대한제국 시기 ‘국민’들은 국경일 등에 국기를 대문 옆에 내걸거나 손에 쥐고 흔들기는 했으나, 그를 향해 경례하지는 않았다. 국기가 敬拜의 대상으로 승격된 것은 대한제국 멸망 직전의 일이었다. 망해가는 국가에 대한 애틋함, 그 국가를 되살리려는 강렬한 의지가 국기에 投射되었고, 그것이 국기를 誓約의 대상으로 올려 세웠다. 이런 상황에서 타국민을 자국민으로 전환시켜 온 역사 속에서 형성된 미국식 국기에 대한 의례가 별다른 저항 없이 수용되었다.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 한국인은 두 개의 국기를 갖게 되었다. 하나는 이미 망한 대한제국의 국기인 태극기였고, 다른 하나는 새 국가가 된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였다. 일본의 한국 강점 직후 일본인들은 조선 내에서 여러 차례 국기 축제를 열었고, 이 축제는 자국기를 잃어버린 식민지 주민들의 상실감을 자극했다. 1919년 3·1운동이 국기 축제 형식으로 전개된 것은, 이 경험과 결부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해외 교민들에게 태극기는 ‘피눈물을 흘리며 우러러 보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고, 국내 민중에게 일장기는 ‘지극한 충성심을 담아 경배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태극기와 일장기 모두 사람들에게 특별한 동작과 의례를 요구하는 神物이었다. 해방 이후 반공 국가 체제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태극기에는 ‘反共의 표상’이라는 지위가 附加되었다. 기독교계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부 있었으나,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국기에 대한 경건주의적, 열정주의적 태도는 그 반대 움직임을 가볍게 분쇄했다. 다만 이 반대 운동의 결과로, 그리고 기독교인이던 이승만의 지원으로, 국기에 대한 ‘最敬禮’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 미국식 의례 동작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에서 미국인과 한국인만 공유하는 국기에 대한 경례 의식이 만들어진 경위이다. 한국의 태극기와 국민의례에는 그것이 지내온 역사만큼이나 많은 이념적, 정신적 요소들이 묻어있다. 그래서 지금도 태극기와 국민의례는 여러 정치적 종교적 성향이 싸우는 전쟁터이다. National Flags are the Nations themselves which are materialized by some icon. National symbol, including the flags transfer the abstract nation to a reality, and people can express their concept about the nation concretely by those symbols. In the Democratic Republic, the sovereign is the people. Therefore, in the Democratic Republics, it is logical contradiction that people salute to their National Flags. It is the same with that an owner salute to a sign of their self-possessions. However, too many Koreans can`t recognize this contradiction at all. Rather, people who do not salute the National flag are pointed regarded as dangerous or impure men who possess the anti-national ideolog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plain the historical backgrounds of this contradictory attitude to the National flag of Koreans. In the course of incorporating into the imperialistic world system, Korea have to make a their own symbols of nation like other countries. The Korean National flag, Taegukgi was the typical one among those symbols. At first, this symbol was used as external National representation, but eventually activated as a symbol which make nation people who feel “we are the one under our flag.” the National Flags hoisted in front of government offices, schools, or event halls, make people feel the sense of belonging to the Nation repeatedly. Yet the status of National Flag of the Great Han Empire was lower than the Emperor and higher than people. People must be loyal to the Emperor, but to the National Flag, they only need to love it. In the period of the Great Han Empire, people hoisted the National Flag in front of their house and store, or waved it, but did not salute it. But at the last period of the Great Han Empire, Korean people have begun to salute their National Flag. They have projected their patriotism and pathos to the Flag, and thus the Flag has been the object of pledge. On this environment, Korean could have accepted the American style pledge allegiance to the flag which has been built in the process of making foreigners to their own nations without special resist. Koreans had got two National Flags after Japan brought the Great Han Empire to the ground. The one is Taegukki, the past National Flag of the Great Han Empire which was already fallen, the other is Hinomaru, the Japanese National Flag. Under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Japan people have hold several Flag Festival. Many Koreans have seen this festival and envied their freedom and pride. In 1919, the March First Movement played in the form of Flag Festival. Since then, Koreans lived in abroad had to see the Taegukki with tears in their eyes, lived in Korea had to revere the Hinomaru with extreme loyalty. Taegukki and Hinomaru was a sacred symbol which require some specific action and attitude. After liberation, during the formation of anti-communist Nation, Taegukki also have acquired the status of the symbol of anti-communism. Some Christians have opposed the salute to the National Flag, but the reverent and enthusiastic attitude of Koreans to the National Flag which was formd in colonial period, have defeated this opposition without special trouble. Merely the result of this opposing movement, Seungman-Rhee, the first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 have directed to change the action of salute to the National Flag with USA style, to put the right hand on the left chest. Thus now, only the Americans and Koreans salute to their National Flag in the world.

      • KCI등재

        淸朝 支配의 理念的 指向과 國家祭祀 運營 : -順治~乾隆時期를 중심으로

        최갑순(崔甲洵),김상범(金相範)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9 역사문화연구 Vol.34 No.-

        이 논문은 국가제사의 운영정황과 관련논의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淸朝의 이념적 지향과 국가적 성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정권수립과 중국지배의 정당화문제와 관련하여 천명론과 교천의례를 검토하였다. 청조의 천명론은 초기에는 金朝와의 족적인 연계를 중시했지만, 다양한 구성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세계제국을 건설했던 大元의 천명론을 계승했다. 천명의 근거에 있어서도 種族문제보다는 도덕성을 강조했다. 입관 후 강희제는 특히 성리학적 입장에서 ‘天人感應의 內省化’를 이룩하였고, 自譴과 改革을 통해 天理에 골몰하는 도덕군주상을 제시했다. 천명론을 확산시키고 자신들의 중국지배를 정당화하기위해 청 전기의 황제들은 郊天儀禮를 적극 활용하였다. 강희제는 ‘無故不攝’의 원칙을 주장하며 재위 60년간 교천례의 실행에 모범을 보였다. 이는 향후에 祖法처럼 전승되어 옹정, 건륭시기에는 교천례의 친제율이 100%에 육박한다. 주목되는 것은 전체 郊祀가운데 교천의례의 친제율이 方澤, 太廟, 社稷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인데, 이는 확대된 제국으로 성장한 청조가 祖上神의 族的 權威보다는, ‘天’이라는 좀 더 公的인 권위를 선호했음을 반영해준다. 청 전기의 황제들은 이민족 출신이라는 결함을 보완하기 위해서 治統承繼를 강조하며 ‘歷代帝王祭祀’를 중시했다. 明朝와의 관계도 정복보다는 계승임을 강조했는데, 入關을 ‘除暴安民’의 義擧로 미화했다. 崇禎帝의 喪葬禮를 주도하고, 명황제릉에 대한 보호조치를 하달함으로써 士人과 백성들의 지지를 획득하려 했다. 순치제는 역대제왕묘를 건립하여 이러한 계승의지를 명조이전의 전통왕조로 확대했다. 역대제왕제사가 뚜렷한 발전을 보이는 것은 강희제시기인데, 開國君主에한정되던 崇祀 대상을 143位까지 확대했으며, 朝代를 초월한 군신관계를 강조하여, 臣權에 대한 皇權의 우월성을 강화했다. 역대제왕제사의 확장과 적극적인 운영은 前代와 비교가 불가능한데, 건륭시기에는 祀典을 전면 수정하여 제사를 더욱 확장했고, 일시적이지만 역대제왕제사를 국가제사의 최상레벨인 大祀로 승격시키기도 했다. 역대제왕제사가 ‘治統承繼’를 의미한다면, 釋奠儀禮는 유교국가를 상징하는 ‘道統’의 승계를 확인하는 의례이다. 순치제가 ‘崇儒重道’가 국시임을 선포한 이래 청전기의 황제들은 적극적으로 유교이념의 실천자를 자임했다. 강희제는 北京 文廟에서 親祭를 거행하였고, 역대제왕 가운데 처음으로 曲阜 孔廟에서 三?九叩頭의 예를 행했다. 이러한 노력은 옹정, 건륭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또한 ‘經筵日講’을 통해 倫常의 학습과 실천에도 모범을 보였다. 강희제는 心法이 治法의 근본이라며 朱子가 修身의 요체로 여긴 ‘居敬’을 중시했는데, 학인군주의 모습으로 이민족군주에 대한 한인관료들의 거부감을 불식시켰다. ‘傳心殿’의 설치도 주목되는데,治統을 상징하는 역대 성왕들과 道統을 상징하는 성현들을 한 건물에서 숭배함으로써, 황제가 道統과 治統이 합류되는 중심선에 위치하게 되었다. 적어도 상징적으로는 황제가 제국의 정치권력 뿐 아니라 사상 · 문화 권력의 핵심적 위상을 점하게 된 것이다. 옹정제시기에는 공자탄신일의 公休가 확정되었고, 文廟내부제사의 조정을 통해 중앙정부에 대한 구심력을 강화했다. 무려 9차례에 걸쳐 곡부공묘를 방문했던 乾隆帝는 역대제왕묘와 마찬가지로 孔廟도 황권을 상징하는 황색 유리 기와로 교체하며 황실의 지지와 사상적 지향성을 표출했다. 이처럼 석전의례에 기울인 관심은 공자와 문묘의 儀禮的 위상을 격하시켜 황권의 상대적인 提高를 시도한 明代 孔廟改革과 뚜렷이 대조된다. 청조는 내부적으로는 만주족의 정체성을 강화하기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제국차원에서는 확대된 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전통국가의례를 적극 활용하였다. 本?文?合???代前期?家祭祀的?用情?及其相???,考察了?朝的?治思想及其?家特性。首先,??政?合法化的??工具'天命?'而言,?代初期的天命???重??金朝的?族?系,而?着?家的成?,?了?得多?族成?的支持,?承了曾?建?世界帝?的大元之??,?在天命?的理?上,替?族?系,?始注重'道德'??。入主中原后,康熙?理?的角度,把天人感???向化,?通?自譴及改革,提?出追求天理的道德君主面貌。?代前期的皇帝,?了?散天命?,???用了郊天禮。康熙提倡郊天禮‘無故不攝’的原?,在位六十年?,?心主持郊天禮,成?后世的典范。直至雍正,乾隆?期,郊天?的?祭率接近100%.?得注目的是,郊天?的?祭率在整?郊祀?系中最高,??超?太廟?,方澤?,社稷?。?反映着已?成??大的帝?,?朝政府比祖先神的?族??,更重?昊天上帝所具的公式的,?放的??。?政府,?了??異族出身的缺陷,特?强?'治統?承',而重?'歷代帝王祭祀'。入?初期,?政府??明?之?的?史?承??,?系重大。先把入主中原的征服行?美化成‘除暴安民’的義擧,而后主??行崇禎帝的喪葬禮,?下令?施明皇帝陵的保?措施,?得士人及基?人民的支持。順治建立歷代帝王?,??史?承的意志?大到明朝以前的傳統王朝。康熙年?,在歷代帝王祭祀制度上,?生了明? 的?化,限制于??君主的崇祀范?,?大到143位。康熙皇帝?提及超越朝代的君臣?系,加强皇??臣?的?越性。如此,?代前期的皇帝???用'歷代帝王祭祀,?前代无法比?。乾隆?期,曾把相?祀典全面修?,帝王祭祀的范?更??大。?得注意的是,一?把歷代帝王祭祀,提升?國家祭祀?中最高?次的‘大祀’。如果?代帝王祭祀象征着‘治統?承’,?奠?就是象征着?承儒??家‘道統’的??。順治年?,宣布‘崇儒重道’的政?以?,?代前期的皇帝,??自以儒?思想的追踪者?任。康熙在北京文?,?自?行?奠?。,??曲阜孔廟?,先?的神位面前,初次?行'三?九叩??'表示无限的尊敬。?些努力,成?祖法,直接影?于雍正,乾隆皇帝。而且,康熙每日?行‘經筵日講’,自以??而??倫常?理的模范?任。康熙??,心法就是治法之本,而??重?朱子所提的修身要?‘居敬’。康熙一??的相?活?中,‘傳心殿’的建立,?得??。‘傳心殿是’把象征'治統'的?代?王?象征'道?'意?的?代??,在同一?里聚在一起,合同祭祀的地方。在此?里,皇帝能站在治統?道統合流的位置,主持典?。至少在象征意?上,?示出皇帝不?是帝?政治?力的核心,也是思想及文化?力的核心。此外,雍正?定孔?日的公休,??整一些文廟的附?祭祀,加强?中央政府的向心力量。多?九次,??曲阜孔?的乾隆皇帝,如?代帝王?一般,?曲阜孔?覆盖着?色琉璃瓦,表示皇室的支持。?代前期的皇帝??奠?的?心及支持?曾?把推行孔?改革,降下孔子及文廟在??上的位置,相???强化皇?的明朝,成?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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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항의례의 국가화와 계승 담론의 정치

        정호기(Jung Ho-Gi) 비판사회학회 2007 경제와 사회 Vol.- No.76

        19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는 이전과 다른 기원과 배경을 가진 사건들을 기억하는 의례들이 생겨났다. 이 글은 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높은 위상을 갖는 5ㆍ18민중항쟁의 추모의례를 하나의 문화 구조로 보고, 이것의 작동과 효과를 분석했다. 구체적인 고찰 내용은 저항의례의 국가화에 따른 공간과 주체의 변화 및 효과, 그리고 계승 담론을 둘러싼 정치이다. 이 연구는 현장조사의 관찰법에 의거하여 수집한 사진, 조사 기록, 문자 및 신문 자료 등을 분석하여 이루어졌다. 망월묘역에서의 저항의례는 마당극과 극장이 융화된 공간성에 기반을 두어 진행되었다. 반면, 5ㆍ18묘지에서의 국가화된 추모의례는 여느 국가의례와 구별되지 않는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확연한 단절을 보여주었다. 추모의례의 국가화는 정부의 관례, 일반 시민에 대한 통제, 행사의 진행을 위한 동원의 원칙에 따라 참여 주체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저항의례에서 자발적 참여 주체였던 시민과 학생의 수는 현저하게 줄었다. 기념식을 전후하여 의제화된 5ㆍ18민중항쟁 계승 정신은 국가에 의해 전유된 담론, 통제 및 억압된 담론, 지역을 매개로 협상된 담론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이것들은 대립, 타협 또는 이해관계로 특정화된 정치적 행위의 담론이다. Since the mid-1990s, new ceremonies and rituals have come into being that have different types of origins and backgrounds than those of preceding ones. Among these, the memorial ceremonies to commemorate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are the largest in scale and have the highest status. The uprising took place in Gwangju, Korea, back in 1980. This paper views the memorial ceremonies to mark the uprising as constituting a cultural structure and analyzes the cultural structure’s functions and effects. More specifically, the paper examines how the nationalization of a ceremony that marks a resistance ceremony changes and influences who holds the ceremony where and who participates in it. It also takes a close look at politics centering on discussions of who inherits the spirit of the resistance. This study analyzes newspaper contents, text, investigative records and photographs collected from on-site observations. The memorial ceremony as a resistance ritual at Mangwol Cemetery employed a space that combined the characteristics of modern theaters and Madanggeuk, traditional Korean outdoor theaters. Meanwhile, the nationalized memorial ceremony held at the May 18 Cemetery was no different from the typical national ceremonies of any average nation in form and content, revealing a clear discrepancy. The nationalization of the memorial ceremony brought about considerable changes to the participants as the government’s conventions, principles for mobilizing participants and control of participants were applied. As a result, many fewer civilians and students, who were voluntary participants in the resistance ritual, participated in the nationalized ceremony. Discussions of the spirit of the uprising taking place before and after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memorial ceremony are appropriated, controled and suppressed by the state, as well as negotiated through regions. The discourses form relationships of confrontation, compromise or understanding to be used as discourses regarding political acts.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examine the changes and effects brought about by the nationalization of a resistance ritual and engage in a broad range of discussions to produce a s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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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트남 리 왕조시기 탕롱(昇龍)과 도성의례

        김상범 한국베트남학회 2022 베트남연구 Vol.20 No.2

        이 논문은 도성 공간에서 거행된 국가의례를 중심으로, 탕롱의 의례도시적 성격과 리 왕조가 지향했던 통치이념의 점진적인 변화과정을 추적해보았다. 리 왕조는 불교세력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으며 건립되었기 때문에, 불교의례가 국가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도입되었다.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는 궁성의 중심에 위치한 용지광장에서 ‘인왕회’ 등을 거행하며 국태민안을 기구하였다. 지역신앙도 국가의례의 일환으로 채택되었다. 특히 용지에서 거행된 동고산신 의례는 지방 세력들이 황권에 대한 충성을 주기적으로 맹서하는 의례로서 그 위상을 확고히 했다. 리 왕조는 탕롱 천도를 통해서 당초 고변이 건립한 방형 성곽도시를 계승하였고, 도성의 기본 구조와 전각 명칭도 중국식 도성제도를 모방했지만, 도성 구획의 기준이 되는 기념비적인 건축물은 전통적인 ‘좌조우사(左祖右社)의 구도 대신에, 불사와 도관을 선택하였다. 하지만 향후 탕롱정권은 당송시기의 전통 도성의례를 점진적으로 수용하였다. 태묘는 황제가 친정이후 포로를 바치는 개선의례로, 탄일행사는 황권을 선양하는 의례로 활용되었다. 리 왕조의 황제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표출한 의례는 성경, 성렴 등 농업의례였다. 인종이후에는 도성에 문묘가 설립되었고 공자와 유교 선현을 제향하는 석전례도 거행되었다. 리 왕조 시대는 불교의 정치적 영향력이 지대한 시기였지만, 적어도 의례상에 있어서는 유교화 추세가 점진적으로 강화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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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祭天儀禮의 전개

        조우연 고구려발해학회 2011 고구려발해연구 Vol.41 No.-

        이 글에서는 고구려의 국가제사로서의 제천의례가 지니는 정치적 의미와 그 시기별 변화에 대해 살폈다. 필자는 고구려 제천의례를 초기국가시대, 3세기를 전후한 나부연맹체 국가시대와 4∼5세기 강력한 왕권 등장 이후로 시기를 구분하여 제천의례가 각 단계에서 어떠한 정치적 목적으로 행해졌는지에 대해 살폈다. 우선, 초기 국가시대에는 고구려의 제천의례는 巫的인 왕이 천신과의 소통능력을 드러내는 신성한 의식으로, 왕은 그러한 능력을 재연함으로써 구성원들로부터 정치권력을 부여받았다. 다음으로, 나부연맹시대에 행해진‘東盟祭’라는 제천의례는 기존의 학계에서 이해해왔던 것처럼 왕권의 신성성을 드러냄으로써 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라기보다는‘천신’이라는 추상적인 공동의 신에 대한 정기적(혹은 전쟁에 앞서) 의례를 통해 연맹세력을 취합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로서 기능했다. 그 다음, 4∼5세기 이후 강력한 왕권의 등장과 비대해진 親왕실 집단을 배경으로, 왕실에서 천신을 독점하게 되며, 왕실의 시조는‘昇天’하여 神의 지위를 부여받음으로써 퇴거한 천신을 대신해 국가신앙의 전면에 대두하게 된다. 이러한 전개로 인해, 고구려의 제천의례는 후기에 이르러 점차 간소화 된다. 중국 고대 사회제도 체계가 宗法을 토대로 한 분봉체제에서 중앙집권체제로 전환되면서,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장치로서 국가제사체계의 중심이 조상제사에서 제천의례로 전환된다. 그와 달리, 고구려 국가제사의 중심은 나부연맹체 시대 非혈연 집단 취합을 목적으로 행해진‘공동의 天神’에 대한 제천의례 중심에서 4∼5세기 강력한 왕권의 대두와 함께 왕실 시조에 대한 조상제례 중심으로 변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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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軍禮 연구의 현황과 과제

        윤혜민 조선시대사학회 2022 朝鮮時代史學報 Vol.- No.100

        조선시대 국가 의례는 吉禮․嘉禮․賓禮․軍禮․凶禮의 五禮 체제로 구성되어 있었다. 禮治를 표방한 조선에서는 국가 의례를 통해 국왕의 지위를 상징적으로 구현하려 했는데, 오례 중에서도 제왕의 통치 의례라는 측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항목이 바로 군례였다. 군례는 군의 기강을 확립하는 효과와 함께 군의 최고 통수권이 국왕에게 있음을 가시적으로 확인시켜주며, 왕의 절대적인 책임과 권위를 강조해 주었던 것이다. 조선의 국가 의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축적되고 있지만, 아직 군례는 그 중요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흡한 실정이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조선의 군례에 관한 그동안의 연구 성과들을 점검해 보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군례 연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추진해야 할 과제들을 제시하였다. 군례에 대한 연구 성과들은 ‘國家典禮書의 군례 연구’와 ‘군례 세부 주제별 연구’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국가전례서의 군례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대표 국가전례서인 『世宗實錄』 「五禮」, 『國朝五禮儀』, 『國朝續五禮儀』, 『國朝五禮通編』, 『春官通考』, 『大韓禮典』 등에 수록된 군례 항목을 분석한 연구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으며, ‘군례 세부 주제별 연구’에서는 연구 현황을 고려하여 ‘射儀, 大閱儀와 講武儀, 宣露布儀와 獻馘儀’의 세 범주로 나누어 연구사를 정리하였다. 기존에 수행된 군례 연구들을 바탕으로, 향후의 연구 과제를 제안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군례의 유래에 대한 비교사적 연구가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군례가 중국으로부터 도입된 의례와 역대 한국의 왕조로부터 내려온 전례를 수용하여 형성된 것임을 고려할 때, 그 의례들을 비교․검토하는 작업은 조선시대 군례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인식시켜 주는 것은 물론이고 해당 의례의 역사적 연결성과 구조적인 이해까지 가능하게 해 줄 것이다. 그리고 국가전례서의 군례 항목에 대한 통시적이고 철저한 분석 또한 요구된다. 특히, 오례 체계 내에서 군례가 갖는 고유성과 의의를 찾고, 군례 항목의 구성과 편제 내용 및 변화 양상 등도 함께 고찰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군례 세부 의식의 의주 내용을 분석하는 작업은 앞으로 특히 활성화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판단되며, 기존 의주와 실제 운용된 행례 간의 간극을 파악하고 의례별 행례 빈도를 헤아리는 작업도 수반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군례 연구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사항은 군사훈련과 군사의례를 구분해서 서술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에 따라 군사훈련과 군사의례를 분리하여 의례만의 기능과 특징을 밝히는 연구와 양측의 상호 연계성에 주목하여 변화하는 양상을 유기적으로 고찰하는 연구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오례 간의 연계 연구를 비롯해 군례를 통한 제도사․재정사적 연구와 음악․미술․복식 등 다양한 방면의 학제 간 연계 연구도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During the Joseon Dynasty, national rituals consisted of Orye(五禮). It was Gilrye(吉禮), Garye(嘉禮), Binrye(賓禮), Gunrye(軍禮) and Hyungrye(凶禮). In Joseon, through national rituals, the king’s status and the justification of the royal authority were symbolically embodied. Among the Orye, the item that clearly shows the king’s ruling ritual was Gunrye. Gunrye visually showed that the king had the highest command of the military, along with the effect of establishing military discipline and strengthening military power, and emphasized the absolute responsibility and authority of the king. As interest in Joseon’s national rituals increases, various research results are accumulating, but the research on Gunrye are still relatively insufficient compared to their importance. Therefore, this paper examined the achievements of Joseon’s Gunrye research and presented the directions for future Gunrye research and tasks to be promoted based on this. The research results of Gunrye were reviewed by dividing them into ‘Study on Gunrye of the National Ritual Book’ and ‘Study by Detailed Topics of Gunrye’. In ‘Study on Gunrye of the National Ritual Book’, focused on the studies that analyzed the items of the Gunrye included in the national ritual book of the Joseon Dynasty, such as Orye of Sejong-Chronicle(世宗實錄), Gukjo-oryŭi(國朝五禮儀), Gukjo-Sokoryeŭi(國朝續五禮儀) etc. In ‘Study by Detailed Topics of Gunrye’, the research results were organized into three categories:Saŭi(射儀), Daeyeolŭi(大閱儀)-Gangmuŭi(講武儀), and Seonropoŭi (宣露布儀)-Hunkwekŭi(獻馘儀) in consideration of the research status. Based on the previously conducted Gunrye studies, future research tasks are as follows. First, it seems that a comparative historical study on the origin of the Gunrye should be supplemented. In addition, a thorough analysis of the Gunrye items of the National Ritual Book is also required. In particular, the work of analyzing the main contents of individual items of the Gunrye is judged to be a part that should be particularly activated in the future. The most important thing to be aware of in the Gunrye study is that military training and military ritual should be described separately. Accordingly, a study that reveals the functions and characteristics of rituals alone by separating military training and military rituals and a study that organically examines the changing patterns by paying attention to the interconnection between the two sides should also be conducted. In addition, research on linkage between Orye and institutional history and financial history through Gunrye and interdisciplinary linkage studies in various fields such as music, art, and clothing should be sou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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