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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고대사의 계보학

        김기봉(Kim Gi-bong) 한국고대사학회 2008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52

        역사의 3요소는 시간, 공간, 인간이다. 한국사에서 이 삼요소가 무엇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대사다. 한국 고대사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한국사의 시작은 언제며, 한국사의 영역은 어디고 한국인의 조상은 누구인가가 정해진다. 시간, 공간, 인간의 조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국 고대사의 구성과 체계가 달라진다. 한국 고대사의 계보학이란 삼국사기 이래의 正史로부터 근대 ‘국사’로 이어지는 한국사학사에서 고대사를 구성하는 방식의 변화에 대한 메타역사적 성찰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탈근대 역사이론은 과거에 대한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 서술됨으로써 과거가 존재했던 것으로 인식된다는 전제 아래 ‘과거로서 역사(thehistory-as-past)’가 아니라 ‘역사로서 과거’(the-past-as-history)로의 ‘인식론적 전환(epistemological turn)’을 주장한다. 실제로 한국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없었던 시대의 역사까지를 포괄해서 한국고대사를 쓰는 것은 이 같은 ‘인식론적 전환’을 이미 성취한 셈이다. 사실상 ‘국사’라는 역사서술 패러다임도 이 같은 ‘인식론적 전환’에 입각해서 성립했다. 다시 말해 한국이라는 과거가 있어서 한국사라는 ‘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라는 ‘국사’가 한국이라는 과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국사’ 패러다임에 입각한 한국 고대사의 체계는 오늘날 다음 두 가지 이유로 수정돼야 한다. 첫째로 이제는 민족사가 아니라 문명 교섭사로 방향전환해야 한다. ‘국사’에 의해 망각된 고대 동아시아 역사세계를 복원하는 동아시아사를 서술하는 것이 문명 교섭사의 출발점이다. 둘째로 한국사회가 앞으로 점점 더 다문화사회로 변하고 있다면, 이제 한국인이란 누구인가의 정체성을 단일민족과 같은 혈통을 코드로 해서가 아니라 인류 보편적 가치에 입각해서 재정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예컨대 弘益人間과 같은 민족 고유의 가치를 인류 보편적 가치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한국사 서술이 나와야 한다. 이 같은 新韓國人 정체성 형성 프로젝트의 시작에 한국 고대사가 있다. 나는 한국 고대사학자들이 어떤 역사를 쓰느냐는 바로 우리의 미래가 걸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The three elements of history are time, space and human beings. In Korean history, it is especially ancient history which can define these three elements. The questions about when Korean history starts, what the space of Korean history is, and who the ancestors of Koreans are, can be answered based upon how one writes ancient Korean history. The composition and system of ancient Korean history depends on how time, space and human beings are put together. The genealogy of ancient Korean history is the meta-historical reflection upon the change in reconstructing ancient history in Korean historiography from ‘the canonical history(正史)’ since the “Three Kingdom's history” to the “National History(國史).” Presuming that history is not written about the past, but instead the past is perceived to have existed only by being written as history, postmodern history theory suggests an “epistemological turn” from “the-history-as-past” to “the-past-as-history.” This art of epistemological turn is already achieved when the Korean ancient history includes even the periods in which the identity as Korean nation was not formed yet. Actually, the paradigm of “National History” has set its foundation upon this epistemological turn. In other words, writing the national history of Korea was possible not because of the existence of the past of Korea, but instead, because the national history of Korea created the past of Korea. Now, the system of ancient Korean history needs to be corrected for two reasons. Firstly, we should turn around towards civilizational interchange history(=transfer history) from National History. It can begin with restoring ancient East-Asian history which was erased by National History. Secondly, Koreans need to redefine the Korean identity not by the code of blood, but based upon universal human value, in this time that Korean society is more and more becoming multi-cultural. This redefinition demands a historiography which is able to transform such a national value as “Hongik human being” into a universal human value. Ancient Korean history is standing in the first row of this project to form a new Korean identity. Our future depends on what kind of history that the ancient Korean historians write.

      • KCI등재

        한국 고대(古代) 선도(仙道)사상 고찰

        양태호 한국초등도덕교육학회 2016 초등도덕교육 Vol.0 No.53

        삼국의 건국설화와 고구려의 조의선인(?衣仙人)제도 그리고 신라의 화랑국선(花郞國仙)제도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古代) 선도(仙道)사상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삼국의 건국설화를 고찰한 결과 그 중심사상이 선도사상 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한국 고대 선도사상은 고유사상인 신도(神道)사상을 부계(父系)로 하고 외래 사상인 중국 선도사상을 모계(母系)로 하여 탄생한 최초의 한국사상이다. 둘째, 한국 고대 선도사상은 전통사상을 바탕으로 외래의 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형성된 사상이기 때문에 단순히 선도사상의 성격만을 갖지는 않는다. 비록 사상의 겉모습이 선도의 형태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유교와 불교를 융섭(融攝)하여 일체화한 선도사상인 것이다. 즉 한국 고대 선도사상의 세계는 도가(道家)의 소요유(逍遙遊)하는 경계 속에서 밝혀진 자연과 불가(佛家)의 이상적 세계인 불국토(佛國土)가 유가(儒家)적 윤리 가운데서 일체화된 인간 주체적 자각을 통해 밝혀진 세계이다. 따라서 그 세계는 인간 사회는 물론 사물과 자연 그리고 신이 인격성 안에서 하나가 되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세계인 것이다. 셋째, 한국 고대 선도사상은 전통사상인 밝사상을 바탕으로 형성된 사상이기 때문에 인간 주체적 자각을 통하여 밝혀진 사회가 중심이다. 따라서 개체가 아닌 우리 또는 국가, 더 나아가서 세계에 그 중심이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고대 선도사상은 덕화(德化)정치 그리고 국가, 사회에 대한 봉사정신의 발로라는 특징을 갖는 것이다. 本文以三國建國說話,高句麗?衣仙人制度,新羅花郎國仙制度爲中心,探究了韓國古代仙道思想。得出以下結論。 第一,三國的建國說話的中心思想是仙道思想。韓國的古代仙道思想是作爲父系的固有神道思想與作爲母系的中國仙道思想二者融合之後所誕生的最初的韓國思想。 第二,因爲韓國的古代仙道思想以傳統思想爲基礎融合了外來思想,所以韓國仙道思想幷不與一般仙道思想相同。雖然有仙道思想的外部特征,但是從內容上看韓國仙道思想是與儒敎和佛敎一體化後的思想。所以,韓國仙道思想的世界是道家的逍遙遊的境界中發現佛家的佛國土理想世界,儒家倫理中一體化的自覺發現的世界。這個仙道世界是人與事物與自然與神全部融爲一體後的美好世界。 第三,因爲韓國的古代仙道思想是以傳統思想發掘思想(밝사상)爲基礎形成的思想,所以通過人自主的自覺而形成的社會是中心。所以不是個體而是共同體或者國家,進一步說是世界,幷以此爲中心。正因此,韓國古代仙道思想是德政與對社會和國家的奉獻精神的外表特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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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대사의 대중화와 대중문화화

        최광식(Choe, Kwang-Shik) 한국고대사학회 2016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84

        정부는 2015년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방안을 발표하고, 2018년부터 교육 현장에서 역사교육 내용의 획일화된 편찬을 추진하려고 하고 있다. 한편 유사역사학자들 중에는『환단고기』 등 위서를 원사료로 활용하여 한국고대사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며 대중들의 역사인식을 혼란시키고 있다. 한국고대사 연구자들은 한국고대사회의 모습을 제대로 복원하려는 노력과 함께 한국사 인식을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하는 역사인식을 학생들과 대중들에게 보여줄 책임이 있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서 고대사 사료 데이터베이스를 제대로 구축하고, 고고학 자료 데이터베이스도 구축하여 고대사와 고고학 연구자들이 보다 풍부한 자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한국고대사 교육이 학교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다양한 시각의 ‘대안 교과서’나 ‘개설서’ 및 ‘지도’들을 제작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의 사례처럼 많은 박물관들이 한국사의 체계적 인식을 도울 수 있는 통사적 전시를 추진하도록 하는데 역사학자들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중들이 한국고대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스토리텔링 기법을 도입하여 한국고대사에 대해 흥미를 갖도록 하는 저서들을 집필 출판하는데 참여하여 한국고대사의 대중화를 이루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대중들이 디지털과 모바일 시대에 영화나 드라마 등 문화콘텐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므로 문화콘텐츠 종사자들과 소통과 협력을 통해 한국고대사의 연구결과물을 문화콘텐츠화하여 대중문화를 질적으로 발전시킨다면 ‘한류’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제고시키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In 2015, the government announced a plan to standardize the Korean history textbooks, and attempts unified publication of the materials of history education in education field from 2018. Meanwhile, some pseudo-historians, using Hwantankogi (桓檀古記) as a primary source, is disturbing history awareness of the public, saying they are to show ‘greatness’ of the ancient Korean History. The Korean history scholars need to put more effort in rebuilding the aspects of the ancient Korean society, and have a responsibility to introduce the public and students the historical awareness to interpret the Korean history in various perspectives. For this purpose, it is necessary to establish a proper database for historical sources related to the ancient Korea, while providing ample sources for archaeologists through an archaeological source database. Plus, publishing ‘Alternative Textbooks’, ‘general history books’ and ‘maps’ written in various perspectives are needed, in order to set a proper education system of ancient Korean history in schools. Additionally, Historians are encouraged to actively participate in carrying forward museums’ exhibition for the general history of Korea, like National Museum of Korea, which will help methodical understanding in the Korean history. It is also required for historians to join in publishing books that will draw the public’s attention to the ancient Korean history, using ‘story-telling’ method for easy understanding of the history and supporting the popularization of the ancient Korean history. Considering the public’s high interest in cultural contents such as movies and TV dramas in this digital and mobile era, it is also important to communicate and cooperative with the practicians in the cultural contents business to convert research achievements to cultural contents. Through this cooperation, the historians will have an important role to improve the quality of the public culture, which will ultimately take the ‘Korean Wave’ to the next level.

      • KCI등재

        서양 학계의 한국 고대불교사 연구

        판카즈 모한(Pankaj N. Mohan) 신라사학회 2011 新羅史學報 Vol.0 No.21

        지난 100여 년 동안 서양에서 이루어진 고대 한국 불교에 대한 연구를 개관하는 본 글은 고대 한국 불교 연구의 주요 경향과 성과를 한국역사의 흐름과 연관시켜 정리하려고 한다. 시기별 연구 현황은 1910~1970년, 1980~2000년, 2000년대로 나누어 그간의 주요한 연구업적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따라서 고대한국불교사 분야의 서양의 연구동향과 국내의 연구동향을 비교해서 검토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으로 사료되며 이러한 시도를 통해 한국 불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 한다. 해방 이후 한국불교 연구는 이론적인 틀과 목표를 완전히 달리하는 두 그룹의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불교의 자율성을 침식하는 `호국불교` 이론을 견지하였다. 한국불교의 기증을 `호국`으로 간단화하는 국내 학자들의 의식에는 민족주의 색체가 짙게 깔려있었으나 한국 고대불교에 대한 한국 학자들의 연구에서 많은 진전이 있었다. 1950년대에 김철준 교수와 이기백 교수는 고고학, 인류학, 불교학 등의 인접 학문 분야를 연구하면서 얻은 통찰력을 자신의 한국고대사 연구에 이용한 최초의 한국 학자들이었다. 그들은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방법론상의 돌파구를 제시해 주었고, 이 분야의 후속 연구에 매우 중요한 틀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두 학자들의 지도 아래 일군의 젊은 한국불교 연구자들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불교학과 한국사의 교차지점으로서 불교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철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한국불교학 연구 또한 1960년대 조명기, 이기영, 이종익, 김영태 등 몇몇 동국대 교수들의 노력으로 한층 성숙되었다. 1970년대에 본격화된 한국 고대 불교 연구는 꾸준한 발전을 거듭해 갔으며 주로 연구된 분야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대 삼국에서의 불교의 전래과정,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의 형성과 불교; 신라에서의 불교교학의 발전과 불교대중화와 선종구산의 성립, 학문으로서 한국불교학이 고도로 정교한 지적 수준에 도달한 것이 서양학자들의 관심에 불을 붙였음은 명백하다. 서양인이 한국불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된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볼 수 있으나 1980년대에 버스웰(Robert Buswell, Jr)과 요르겐센(John Jorgensen)과 같은 외국학자들이 한국불교학연구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었다. 그들의 한국불교 연구는 한국인학자가 구축한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나 민족주의 사상의 불교사 연구에의 투영으로 빚어진 문제점에 대한 비판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그들은 한국불교 이해의 체계적인 틀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한국불교를 `호국불교`나 `통불교`로 이상화하기보다는 `시대별 과제와 문화적 특징을 역사적으로 살피는 자세가 요구된다`고 강조하면서 기존의 방법론이 안고 있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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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고대 질병연구의 궤적과 과제

        이현숙(Lee, Hyun-Sook) 한국고대사학회 2021 韓國古代史硏究 Vol.- No.102

        이 글은 한국고대 의학 및 질병의 역사에 대한 연구 성과를 정리한 것이다. 한국고대 질병연구는 한국 질병의 기원을 규명하는 작업이다. 한국고대 의학 및 질병사 연구는 1960년대 미키 사카에와 김두종에 의해 한국의학사라는 통사의 서두로서 이루어졌다. 21세기 들어 신진연구자들이 새롭게 유입됨에 따라 매우 다양한 방식의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필자는 2002년 『신라의학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 5세기와 7세기 전쟁의 시기에 군사의학과 불교의학이 발달하였음을 규명하고, 8~9세기가 전염병 특히 두창의 시대라는 것을 주목해왔다. 최근 연구성과를 분석해본 결과 첫째 학제간의 협업들이 이루어졌으며, 둘째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었으며, 셋째 기존의 연구가 더욱 정치해졌으며, 넷째 기존 연구의 오류들이 정정되었다. 그러나 한국 전근대 의학 및 질병사에서 볼 때 여전히 고대 분야의 연구성과와 연구자가 적다. 이는 의학사 및 질병사가 아직 한국고대사의 한 장르로 자리 잡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통해 전염병이 한 사회를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한국고대 사회가 경험하였던 혹독한 두창의 시대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 This article aims to explore the researches on the history of ancient Korean medicine and diseases. The study of ancient diseases in Korea is an attempt to determine the origin of diseases in Korea. The history of ancient Korean medicine and disease had been researched and introduced as its origin by two medical doctors, Kim Doo-jong(金斗鐘) and Miki Sakae(三木榮) since 1960’s. From the 21st century, newly scholars made researches in diverse ways. Since 2002 of my doctoral thesis, I have wrote many articles about ancient medicine and diseases. I pointed out the 5th and 7th century as the momentum of development from military medicine and Buddhist medicine. The smallpox was introduced from Tang China’s troops in the middle of the 7th century during the Silla’s unification war. It provided many motivations to Unified Silla’s medicine. Silla established the national medical school in 692 and it could be a starting point of medieval medicine in Korea. Because they adopted the Chinese Tang’s curriculums and so was the Japan. It was the beginning of the East Asian medicine world, sharing with the same text books. I categorized the researches of the 21st century in four. The first was the interdisciplinary collaboration, such as the archaeologist and Korean traditional medical doctor, as well as the DNA analysts and anthropologists. The second, new data have been discovered from the document type wooden tablet, Chinese and Japanese old documents. The third, it has become more advanced than before. The fourth, the errors in existing researches have been corrected by new researches. However, in the pre-modern history of medicine and diseases in Korea, the ancient fields have been the less researches and the less researchers than others. This is because the history of medicine and disease have not yet obtained a genre of Korean ancient history. Through the Corona 19 pandemic, we realized that the infectious diseases could fundamentally shake up a society. Now it is an important task to identify the harsh era of smallpox experienced by the ancient Korea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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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학계와 한국학계의 한국 고대사연구

        판카즈 모한(Pankaj N. Mohan)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11 아시아문화연구 Vol.22 No.-

        해외 각국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한국의 국제적인 위상의 제고와 더불어 한국사 연구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10년 전까지만해도 서양인에게 한국고대사 분야는 황무지와 같았다. 켄 가디너(Ken Gardiner)박사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고구려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한국고대사 분야의 최초의 외국인 학자이며 그의 저서인 “The Early History of Korea”가 서구학계에 있어 한국고대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선구적인 업적으로 여겨진다. 가디너 박사가 시작한 이 연구 분야가 영어권에서 오랫동안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방치된 상태에 있었으나 최근에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가 영어로 번역되었고 한국고대사의 여러 측면에 대한 우수한 논문 및 저서들이 출판되었다. 외국인에 의해 연구되고 있는 한국고대사 분야가 어느 정도까지 진척되었는가를 검토하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영어권의 최근 한국고대사분야의 연구 성과는 한국인학자가 구축한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나 민족주의 사상의 고대사 연구로의 투영으로 인해 빚어진 문제점에 대한 비판으로서 그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This paper attempts to provide an overview of the major points of view of the English language scholarship on the material relating to the Three Kingdoms Period. This paper also discusses the reaction or response of Korean scholars to the Western scholarship on early Korea, The Western scholarship on ancient Korean history has been studied with special relation to some major literary and epigraphic sources. Dr Ken Gardiner’s was the first Western scholar to study early Korea, and his early works, based on primary material in classical Chinese and secondary works written by Japanese scholars, evoked criticism in Korea. However, commencing from the 1970’s all the Western scholars considered Korean language scholarship as crucial to the task of inquiry into ancient Korean history. Through reference to some studies on Hwarang segi or Kwanggaeto stele this paper shows how Western scholarship and scientific Korean scholarship are not only reaching a point of convergence but Western scholarship is also playing a complimentary ro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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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고대 교육사의 연구 현황과 과제 : 삼국시대 이전의 연구물을 중심으로

        안경식(安京植) 한국교육사상연구회 2005 敎育思想硏究 Vol.17 No.-

        이 논문은 우리나라 역사의 출발점인 고조선의 교육을 비롯한 삼국시대 이전의 교육사 연구 성과를 검토하고 향후 연구 과제를 제시하기 위해 쓴 글이다. 연구의 주요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다. 첫째, 우리나라 교육사의 출발점에 대한 교육사학자들의 인식을 검토하였다. 둘째, 지금까지의 삼국시대 이전의 교육사 관련 연구물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셋째, 연구 현황에 나타난 문제점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식으로 고대교육사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를 논의하였다. 연구 결과, 이 시대의 교육사 연구는 다른 시대에 비해 상당히 빈약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역사 연구가 사료를 바탕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데, 이 시대와 관련된 사료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사는 가치와 의미의 탐구사가 되어야 한다고 볼 때, 고대 교육사 연구는 ‘만들어진’ 역사에 대한 탐구로서만 구성될 수 없고, ‘만들어가는’ 역사라고도 할 수 있기에 연구의 부진을 자료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本文旨在以文獻硏究方法, 探討硏究對三國時代以前韓國古代敎育史的成果, 呈現出硏究韓國古代敎育史上課題. 本文包括緖論, 共分四章, 各章硏究主題及內容如下: 第一章: 緖論. 提示硏究問題和硏究方法. 第二章:探討敎育史學者之看法對韓國敎育史出發點. 透過國敎育史學者之時代區分論, 探討韓國敎育史之出發點. 第三章: 探討硏究成果. 探討敎育史硏究成果對三國時代以前, 主要是對古朝鮮的硏究成果. 第四章: 向後課題. 本文之結論如下. 硏究古代敎育的學者和硏究成果都?不豊富, 其主要原因是史料之不足. 但從敎育學之觀點而言, 敎育史是一種價値史. 硏究古代敎育史的學者, 積極呈現出自己的敎育哲學, 籍供後代敎育史學者之參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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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고대 문화의 일본전파와 대마도

        정효운(鄭孝雲) 한국고대사학회 2007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48

        오늘날 한국과 일본 양국의 국경의 섬이기도 한 대마도는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대한해협에 위치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고대로부터 대륙과 한반도의 정치, 경제,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특히, 전근대 시대에 있어서의 대마도는 해상 교통로상의 중요한 기항지였을 뿐만 아니라 문화 교류의 중계지로서 존재하였다. 그런데 대마도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공존하고 있다. 본고에서는 대마도가 가지고 있는 문화교류사적인 측면과 정치·외교사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고대 한국과 일본 양국의 교류에 있어서 대마도가 어떤 역할을 하였던가, 그리고 고대 한·일 양국의 지배층은 대마도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에 대해 살펴보았다. 대마도는 지정학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사이에 위치한 관계로 선사시대 이래 양국 문물 교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도작문화와 철기문화 등 고대국가 형성에 필요한 선진 문물이 일본열도로 전파되어 갔다. 역사시대에 들어서는 삼한과 삼국의 정치세력뿐만이 아니라 중국대륙의 정치세력들과의 정치, 문화의 교류에 있어서도 대마도가 해상 항로의 주요 기항지로 이용되었다. 한편, 대마도에 대한 동아시아 각국의 인식은 시기와 당시 정세에 따라 변화되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한반도 남부에 가야가 성립하고 난 이후부터 대마도는 가야 및 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역사를 영위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7세기 중반의 백강전투 이전의 단계에서는 왜국의 정치, 문화 교류의 중계 역할을 담당하던 섬에서, 백강 전투 이후의 동아시아적 위기 정세를 계기로 하여 점차 大和정권의 국경의 섬으로 정착되어 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마도는 문화교류사적 측면에서 볼 때 고대 한국과 대륙 문화의 기항지이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화의 수용지임과 동시에 발신지의 역할을 하였다고 보아진다. 또한 정치교류사적 측면에서 볼 때 대마도는 고대 한국과 일본의 국경의 섬이었으며, 한반도 지역을 둘러싼 동아시아적 군사 긴장내지 전쟁에의 개입이나 침략의 시기에 있어서는 그 전초기지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대마도의 지정학적 위치는 근세와 근대기에 있어서도 한·일 양국의 선린우호를 매개하기도 하고 일본열도 정치세력의 대륙 진출의 출선기관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결국, 대마도는 한국 측에서 본다면 문화를 전달하는 출구였지만, 일본 측의 입장에서 본다면 문화를 받아들이는 입구임과 동시에 한반도와 대륙 진출의 창구였던 것이다. 이러한 양국의 문화적, 정치적 필요성의 인식의 차이가 대마도의 귀속 욕구의 차이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 KCI등재

        Achievements and Future Tasks in the Field of Ancient Korean History

        Moon Chang Rho(문창로)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05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8 No.-

        본고는 광복이후부터 현재까지 이룩한 한국고대사 연구의 주요성과를 살펴서 그 동향과 과제를 정리한 글이다. 광복이후에 전개된 좌ㆍ우 대립의 정국과 분단의 고착화 과정에서 일제의 식민사학을 청산하고 고대사연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비록 소박한 수준으로 평가되지만, 1950년대에 실증적인 연구풍토가 정착되는 가운데 모색된 새로운 연구주제와 방법론은 이후 한국고대사의 주체적인 인식에 토대가 되었다. 곧 1960년대에 이루어진 연구성과는 식민 사학에 의해 왜곡된 한국고대의 역사상을 불식시켰으며, 이후 고대사분야의 연구 범위를 확대하고 연구주제를 구체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 한국 고대국가의 형성문제가 제기되면서 연구활동이 촉진되었고, 고대사회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또한 고대의 사회구조 및 구성단위 문제와 함께, 고대국가의 지배체제가 논의되면서 삼국의 지배세력, 중앙 및 지방 통치체제의 정비, 군사조직의 운영, 민에 대한 편제방식 등을 해명하여 고대사회의 구조적인 인식이 가능하였다. 1980년대 이후 연구자의 증가, 다양한 주제와 연구내용의 심화로 고대사의 체계적 구성은 더욱 튼실해졌다. 실제로 민족의 형성문제와 함께 단군 및 고조선사와 관련된 논의가 구체화되었고, 신라와 백제사에서 축적된 연구성과는 가야와 고구려사 분야로 확장되었다. 발해 또한 귀속문제에서 점차 발해사 자체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으며, 이밖에 낙랑ㆍ대방군의 재검토, 부여사의 전개과정, 삼한의 성장과 대외관계, 영산강유역의 옹관고분과 그 축조세력을 둘러싼 논의 등으로 연구의 지평을 넓혀갔다. 1990년대로 접어들어 건국신화 및 제의, 고대 여성사와 관련된 문제, 농업생산 및 교역에 관한 접근 등도 다양한 연구주제의 모색에 일조하였다. 이와 함께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적 국제질서나 문화적 교류에 대한 이해를 더하였다. 나아가 고대와 중세의 시대구분 문제, 삼국의 천도 및 도성제에 대한 접근, 불교사상사 연구의 심화, 촌락문서 및 통일신라의 토지제도에 대한 재검토, 장보고와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해상활동, 나말여초 호족의 동향과 후삼국의 성립, 필사본 「화랑세기」를 둘러싼 진위논쟁 등의 문제도 부각되었다. 한편 고고학적 성과와 새로운 금석문의 발굴은 고대사연구에 활력소가 되었는데, 실제로 백제본기의 신빙성 확인, 백제문화사의 이해증진, 삼국의 중앙정치 및 점령지 통치방식, 민의 존재양태, 고구려-신라의 대외관계, 신라의 정치ㆍ경제ㆍ제도사 정리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한국 고대사학계는 식민사학의 폐해를 극복하고 고대사의 체계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 연구주제의 다양한 접근, 관련자료의 발굴 등을 통해서 큰 진전이 있었다. 이는 전적으로 어려운 여건을 딛고 고대사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했던 1세대 연구자들, 그리고 이들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2ㆍ3세대 연구자들의 노력과 구체적인 성과물의 축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 KCI등재

        中國 古代 標點 符號의 類型과 韓國 古代와 中世의 標點 符號에 대하여

        이건식 구결학회 2013 구결연구 Vol.31 No.-

        이 글은 한국 고대와 중세의 표점 부호가 가지는 특징을 이해하기 위하여 중국 고대 표점 부호의 유형을 ‘교정 부호, 문장 부호, 대치 부호’ 등의 3종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음을 제안하였다. 한국 고대와 중세 削除의 교정 부호로 ‘●, ○, ⋮, ⦙, 卜, ⧵’ 등이 출현하였음을 확인하였다. ‘●, ○, ⋮, ⦙, 卜’ 등은 중국 고대 표점 부호에도 존재하였으나 ‘⧵’은 한국의 고대와 중세의 표점 부호에만 존재하는 교정 부호임을 확인하였다. 삽입의 교정 부호에는 ‘▫/∘/ㆍ’ 등이 있음을 확인하였고, 이 삽입의 교정부호는 중국 고대 표점 부호에는 그 존재가 보고된 바 없으나 존재했었을 가능성을 제안했다. 전도의 교정 부호에 3종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즉, ‘전도될 글자 사이에 ‘√’를사용하는 방법, 전도될 해당 첫 글자 우측에 [’]를 표시하고 마지막 글자 우측에[‘]를 표시하는 방법, 전도될 해당 첫 번째 글자 우측에 ‘下’를 표시하고, 두 번째글자 우측에 ‘上’을 표시하는 방법’ 등이다. ‘√’는 중국 고대 표점 부호에서도 존재하나, [‘ ’]과 [下 上]의 방법은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것임을 확인하였다. 의미를 변별하는 문장 부호로 ‘◦’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즉 ‘◦’의 문장부호가 國名, 年號, 干支, 地名, 人名 등을 구별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중복된 글자를 대치하는 부호로 ‘〻, , ㆍ, 又, ’ 등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〻, , ㆍ’ 등은 중국 고대 표점 부호에도 존재하나 ‘又, ’ 등은 한국고대 표점 부호에만 존재함을 확인하였다. 月城垓字 149號 木簡의 ‘白|’에서 ‘|’를 문자를 생략하여 대신하는 대치 부호로 파악할 가능성을 제안했다. 중국 고대 중복 표점 부호가 가지는 逆讀 기능을 언급하고 이를 고려 시대 석독 구결의 逆讀點과 유사한 것임을 언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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