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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黃庭經』의 存想身神法과 화려한 몸 속 세상

        이봉호(Bong ho, Lee) 한국동양철학회 2008 동양철학 Vol.0 No.30

        일반적으로 上淸派의 핵심 경전인 『黃庭經』을 두고서, 도교의 수련이론에 의학과 해부학을 도입하여 이루어진 책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입장이 가능한 것은 『황정경』 에 보이는 장기들의 모양과 크기들이 의학적 내용을 보는 듯하 고, 인체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황정’을 설정한 것이 의학의 ‘三焦’개념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점을 취할 경우, 『황정경』 이 그려내는 몸속 장기들에 간직된 신들의 모습 및 그 기능, 그리고 『황정경』 속의 도교적 수련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이에 필자는 『황정경』 이 그리는 장기들의 모습과 색상, 기능뿐 만 아니라, 화려한 모습의 신들도 전래의 도교 서적들에서 이어진 내시법의 수련의 결과로 얻어진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를 위해 『老子河上公章句』와 『太平經』 등에 보이는 내시법을 추적하고, 이들 서적에서 나타난 신들을 규명하 여, 『황정경』 에서 그리고 있는 장기들과 신들이 도교이론의 내부적 발전과정에서 도달한 것임을 해명하였다. 아울러 의학적 관점으로 황정경 을 파악하는 것이 가지는 문제점을 해명하였는데, 동양에서 의학적 목적으로 해부가 실시된 적이 없으며, 『黃帝內經』과 『難經』의 이론이 황정경 에 스며들었다는 것도 이들 책들이 갖는 관계에 서 필연성이 적다는 점을 해명하였다. 도교적 전통에서 내시법은 존신법으로 발전하고, 존신에 의해 몸속의 화려한 신들의 세계가 드러남도 아울러 해명하였다. In general, as far as essential scripture, 『Huang-ting jing(黃庭經)』 of Shang-qing pai(上淸派) is concerned, it is deemed as a book that had brought idea of medicine and anatomy to training theory for Taoism. This position is regarded probably true because the shape and size of inner organs seen at Huang-ting jing looked like medical contents, dividing human body into three pieces and setting up ‘huang-ting(黃庭)’, which seemed similar to the concept of ‘sam-cho(三焦)’ in medicine. But, the problem lies in, as far as this point of view is concerned, that it is hard to explain figures of Gods described in inner organs and functions drawn in the 『Huang-ting jing』 , and Taoistic training in 『Huang-ting jing』 . Therefore, I, researcher, happened to regard brilliant figures and colors of Gods drawn by 『Huang-ting jing』 , as result from training of nei-shi(內視) continued from inherited Taoistic books. To do this, I have tracked down nei-shi shown on 『He-shanggong(河上公)』 and 『Tai-ping jing(太平經)』 , revealed Gods shown in these books, explaining that inner organs and Gods from Huang-ting jing had reached from the developmental process of Taoistic theory. In addition, I have explained about the problems in identifying 『Huangting jing』 from the viewpoint of medicine. In reality, there had been no anatomy for the purpose of medical orientation in the Oriental W orld. Furthermore, I have explained about the fact that the theory of 『Huangje-nei-gyeong(黃帝內經)』 and 『nei-gyeong(難經)』 had penetrated into 『Huang-ting jing』 without having common ground with each other unavoidably. Finally I have revealed that in the course of Taoistic tradition development, nei-shi progressed into cun-shin method(存神法), which had revealed brilliant world of Gods inside the body according to cun-shin.

      • 기능기처리된 다공성 카본재료를 이용한 리튬-황전지의 특성 분석

        김민건,성영은 한국공업화학회 2015 한국공업화학회 연구논문 초록집 Vol.2015 No.1

        리튬이차전지의 한계점에 대한 극복 방안으로 리튬이차전지의 물질 및 성능 자체에 대한 개선과 더불어 소듐이차전지, 리튬황전지와 같은 새로운 대안으로서의 배터리 연구가 최근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리튬황전지는 그 연구가 매우 활발하여 지고 있으며, 산학간의 협력도 긴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에 따라 리튬황전지의 단점인 짧은 수명 및 급격한 성능저하 현상이 많은 부분 극복되고 있다. 특히, 리튬황전지는 기존의 리튬이온전지에 비하여 높은 용량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장기성능의 안정성을 구현하게 되면 충분히 차세대 이차전지로서 제 역할을 다 할 것이라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리튬황전지의 주요 성능 저하의 원인은 리튬황전지의 구동 중 필수적으로 일어나는 전해질로의 황분해이다. 이와 같은 황의 분해는 상대 전극인 리튬 표면에 황의 재흡착을 일으킴으로써 황의 유실과 리튬전극의 불순물에 의한 성능 저하를 발생시킨다. 이에 따라 최근 다공성 탄소 소재를 이용하여 황을 다공성 카본 내에 저장하고, 황의 유실을 최소화시키는 방법이 많이 연구되고 있다. 특히, 다공성 카본의 capillary force 뿐 만 아니라, 다공성 표면과 황의 직접적인 흡착을 유도함으로써 그 손실을 줄이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표면에 기능기 처리된 카본재료를 사용하여 황의 유실을 최소화시키려고 하였다.

      • KCI등재

        투고논문 : <황부인전> 구조 연구 -과제 제시와 해결 구조를 중심으로-

        왕매용 ( Mei Rong Wang )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 2008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43 No.-

        이 논문은 작자와 연대를 알 수 없는 고전소설, <황부인전>을 대상으로 그 구조를 분석한 것이다. <황부인전>은 단편소설로 <삼국지연의>의 내용 중에서 일부분을 기초로 하여 재창작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황부인전>의 이본 중에서 <황부인전>의 내용을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선행 연구에서도 가장 널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세창서관본 <황부인전>을 주된 자료로 하여 <황부인전>을 분석하였다. <황부인전>의 구조는 천상의 과제 제시와 지상의 과제 해결 구조로 분석할 수 있다. <황부인전>의 이야기 전개를 이끌어나가는 원리는 천상계에서 제시한 과제를 중간계나 지상계의 존재가 해결하는 방식이다. 천상계의 과제는 황부인과 제갈공명 두 사람에게 주어진다. 이러한 공간적 층위 속에서 황부인과 제갈공명 두 사람에게 몽조의 형태로 천상계의 과제가 주어졌다. 황부인의 과제는 전생의 죄에 대한 벌의 형태로 주어졌으며, 제갈공명의 과제는 전생에 채우지 못한 욕망에 대한 해결 형태로 주어졌다. 두 사람에게 주어진 천상의 과제 중 한 가지는 일치한다. 그것은 하늘이 정해 준 인연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갈량과 황부인의 공통 과제인 결연은 제갈공명의 소극적인 회피와 도주는 황부인의 적극적인 설득 및 방해로 인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해결된다. 그 후제갈량은 남은 과제인 공명 성취를 위해 노력하기 시작하고, 황부인은 그를 돕는 보조역할을 맡는다. 이와 같이 <황부인전>은 천상계의 과제 제시와 인간계에서의 과제 해결이라는 과제 제시-과제 해결의 구조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주인공 황부인의 과제 제시-과제해결은 단일한 것인 반면 제갈공명의 과제 제시-과제해결은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황부인전>의 전체 내용은 남성인 제갈공명보다 여상인 황부인의 능력이 더 뛰어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반해, 여성 주인공의 과제는 단일하고 남성 주인공의 과제는 이중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후행 연구의 과제로 남긴다. Hwangbuinjeon reflects dual female consciousness and the dualistic view of the world. Toward domestic conflicts, Ms. Hwang was quite aggressive and did her utmost efforts to make successful marriage. With social conflicts, on the contrary, she was not in the front line. Rather, she tried to solve them in a detour. In this respect, the researcher analyzed duality from the introduction of Samgukji Yeoneui into Korea via Bakssijeon (17C) to Hwangbuinjeon (19~20C). Also, immersed in Hwangbuinjeon is a world view that the tasks of the heavenly world rule the lives of both the in-between and earthly worlds. This outlook grants inevitability to the story otherwise hard to understand. The fact that the perfect male character like Jegal Gongmyeong should marry an ugly woman like Ms. Hwang is difficult to accept unless based on a dualistic world view. The author makes use of `heavenly tasks` in order to let the readers understand the dual world view that heavenly principles govern the earthly world.

      • KCI등재

        황진(黃震)의 인심유위장(人心惟危章) 해석을 통해 본 남송(南宋) 말 학술의 일면

        윤상수(YOUN Sangsoo)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21 泰東古典硏究 Vol.47 No.-

        이 글에서는 황진(黃震)의 『서경』 「대우모」편의 ‘인심유위장’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전심설(傳心說)과 심학(心學)에 대한 비판을 통해 남송(南宋) 말 학술계의 일면을 드러내 보고자 하였다. 남송 말의 주자학자 황진은 ‘인심유위장’의 본지는 요·순·우가 ‘마음을 전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전수했다’는 데 있다고 해석한다. 이는 ‘전심(傳心)’을 중심으로 이 장을 해석하는 것이 ‘선학자(禪學者)’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고 있다는 당시의 학술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배경으로 하여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심학(心學)을 말하기를 좋아하다가 선(禪)에 빠진 ‘선학자’ 가운데 황진의 시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인물이 양간(楊簡)이었다. 불교 심학을 물리쳐 리학(理學)을 위기에서 구한 것을 주희의 위대한 공적으로 평가하는 황진은 주희를 계승하여 양간의 불교 심학을 비판 극복하려 하였다. 양간의 심학을 따르는 문급옹(文及翁)은 마음의 절대성과 심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심학 비판에 대해 강하게 반발한다. 황진이 리학(理學)의 입장에서 양간을 불교 심학이라고 비판하고, 문급옹이 심학의 입장에서 양간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은 남송 말 유학에서 나타난 주륙(朱陸) 대립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examined Huang Zhen(黃震)’s interpretation of the “renxin-weiwei (人心惟危)” chapter in the Book of Documents, and through the critique of Chuan Xin theory(傳心說) and Xin Xue(心學) that appeared there, attempted to reveal an aspect of the academic situation at the end of the Southern Song period. Huang Zhen who followed Zhu Xi, interpreted the original meaning of the “renxin-weiwei” chapter is not that Yao(堯), Shun(舜), Yu(禹) “delivered their hearts”, but that they teached “how to rule the world” each other. This was based on the recognition of the academic situation at the time that the interpretation of this chapter focusing on the ‘delivering hearts’ strengthened the position of the ‘scholar of Zen(禪)’. However, Yang Jian (楊簡) was the most influential person in the era of Hwang Zhen among the ‘scholars of Zen’ who liked to talk about Xin Xue(心學) and fell into Zen. Hwang Zhen, who evaluated Zhu Xi(朱熹)’s great achievement in defeating the Buddhist Xin Xue and saving Li Xue(理學) from the crisis, tried to overcome Yang Jian’s Buddhist Xin Xue by succeeding Zhu Xi. Wen ji weng(文及翁) who followed Yang Jian, strongly resisted criticism of Xin Xue, emphasizing the absoluteness of the mind and the importance of Xin Xue. Hwang Zhen’s criticism of Yang Jian as Buddhist Xin Xue from the standpoint of Li Xue and Wen ji weng’s defense of Yang Jian from the standpoint of Xin Xue can be said to be an example of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School of Zhu Xi(朱熹) and the school of Lu Jiuyuan(陸九淵) at the end of the Southern Song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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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蘇軾 <寒食詩卷> 黃庭堅 跋文考(Ⅱ)

        김병기(金炳基) 한국서예학회 2012 서예학연구 Vol.21 No.1

        본고는 2012년 2월 中國文學(韓國中國語文學會) 제70집에 게재한 논문「蘇軾<寒食詩卷> 黃庭堅 跋文考(Ⅰ)-作詩·作書 時期 問題와「此詩似李太白, 猶恐太白有未到處」句 析意」-의 후속으로 이루어진 연구로서 蘇軾의 서예작품인<寒食詩卷>에 붙인 黃庭堅의 跋文에서 擧論한 李西臺가 과연 누구인지를 밝힌 논문이다. 臺灣의 연구자 張淸治는 蘇軾 <寒食詩帖>에 대한 黃庭堅의 跋文에 나오는 李西臺는 李建中이 아니라 李邕이다는 의견을 처음으로 제기하였다. 역시 臺灣의 연구자인 李郁周는 張淸治의 견해에 반론을 제기하여 李西臺는 李邕이 아니라 李建中이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 두 사람의 주장을 상호 비교하고 宋史를 비롯한 여러 자료를 검토한 결과 필자는 黃庭堅 跋文 중의 李西臺는 李邕이라는 張淸治의 의견이 더 의미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黃庭堅은 顔眞卿, 楊凝式, 李邕을 蘇軾의 書藝를 구성하는 3대 淵源이자 蘇軾의 書藝가 滋養分을 얻은 곳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黃庭堅 跋文 중의 李西臺는 李邕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黃庭堅이 평소 존경하고 추앙하던 蘇軾의 글씨를 평하면서 소식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黃庭堅 자신도 탐탁찮게 여겼던 李建中을 들어 “이 글씨는 안진경, 양응식, 이건중의 필의를 겸하고 있다(此書兼顔魯公·楊少師·李西臺筆意).”는 평을 할리 없다. 그러므로 黃庭堅 跋文 중의 李西臺는 李建中이 아니라 李邕을 지칭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3. 李郁周가 제기한 증거인 宋史 <列傳>「李建中」부분의 “前後三求掌西京留 司御史臺” 구절은 ‘전후 세 차례에 걸쳐 西京留司御史臺를 관장하기를 구한 적이 있다.’는 뜻이지 李建中이 西京留司御史臺의 직을 맡았다는 뜻은 아니다. 李建中은 御史臺의 직에 나간 적이 없다. 御史臺가 곧 西臺이다. 그러므로 李建中을 李西臺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 4. 李郁周는 “李邕은 從7品 下의 낮은 관직인 9명의 殿中侍御史중 한 사람일 뿐이었으며 李邕을 ‘西臺’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이유로 黃庭堅 跋文 중의 ‘李西臺’는 李建中임을 거듭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李邕은 처음 관직에 나갈 때부터 ‘諫諍之官’을 맡았으며 훗날 御史臺의 실질적 首長인 御史中丞을 맡기에 가장 적격인 인물로 추천은 되었으나 간신의 모함으로 인해 그 직에 나가기 직전에 뜻을 접어야 했던 인물이다. 이런 인물이기 때문에 전혀 御史臺의 관직에 나간 적이 전혀 없는 李建中보다는 李邕을 李西臺로 불러야 옳다. 5. ‘西臺’라는 어사대 首長의 관직에 직접 나가지 않았다는 점에 있어서는 李邕이나 李建中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西臺의 직에 보다 더 근접해 있었던 인물은 李建中이 아니라 李邕이다. 그러므로 黃庭堅 跋文 중의 李西臺를 李邕으로 보는 것은 전혀 무리가 없다. 本稿是2012年2月刊登在中国文学(韩国中国语文学会)第70集的论文「苏轼<寒食诗卷>黄庭坚 跋文考(Ⅰ)37)-作诗·作书时期问题与「此诗似李太白, 犹恐太白有未到处」句 析意」的后续研究.在本论文中表明了苏轼书法作品<寒食诗卷>上黄庭坚的跋文中提及的李西臺身份. 台湾的研究者张淸治首次指出对苏轼<寒食诗帖>的黄庭坚跋文中提及的李西臺不是李建中而是李邕.之后台湾的研究者李郁周对张淸治的看法提出了反驳,主张李西臺不是李邕而是李建中.笔者将两人的论文进行相互比较,对宋史等诸多材料进行研究后认为张淸治说黄庭坚跋文中的李西臺是李邕的意见更具意义.得出以上结果的理由如下: 1. 黄庭坚认为顔眞卿、杨凝式、李邕是构成苏轼书法的三大渊源,也是苏轼书法得到滋养的途径. 因此黄庭坚跋文中的李西臺应看做是李邕. 2. 苏轼不是很喜欢李建中,而黄庭坚也不是很称心李建中.黄庭坚在评论平时尊敬并仰慕的苏轼作品时,没理由提及李建中并进行“此书兼顔鲁公․杨少师․李西臺笔意.”的评论.因此黄庭坚跋文中的李西臺不会是指李建中,应看做是李邕. 3. 李郁周提出的证据是宋史<列传>「李建中」部分的 “前后叁求掌西京留司御史臺”句.意思是说‘前后三次求掌管西京留司御史臺’不是说李建中在西京留司御史臺任职.李建中没有在御史臺任职.御史臺即是西臺.因此李建中是李西臺的说法不当. 4. 李郁周以“李邕只是从7品下低官的殿中侍御史九名之一.历史上并没有李邕是‘西臺’的记录.”的理由屡次主张黄庭坚跋文中的‘李西臺’是李建中.但事实则否.李邕第一次任‘谏诤之官’,之后被推荐任为御史臺的实质性首长之御史中丞一职.但因奸臣所谋,最后未能成志.与没在御史臺任职的李建中相比,李邕应是李西臺. 5. 论没任御史臺首长-‘西臺’之职,李邕与李建中是相同处境.但临近西臺一职的人物并非李建中而是李邕.因此黄庭坚跋文中的李西臺应看做是李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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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皇明世說新語》의 국내 출판과 수용 연구

        劉僖俊,閔寬東 한국중국소설학회 2013 中國小說論叢 Vol.40 No.-

        《皇明世說新語》是明代李绍文十年整理并与1610年刊行。 1614~1615年通过許筠傳入韓國。韓國國內文集中, 許筠的《閑情錄》中引用了很多內容來介紹。 許筠著《閑情錄》中的《何氏語林》和 《世說新語》也引用了很多《皇明世說新語》的內容, 《閑情錄》以後大概朝鮮時期的知識人將《閑情錄》抄寫以後, 整理成了《皇明世說新語》。 朝鮮英祖·正祖年間《世說新語補》非常流行, 因此, 對於《皇明世說新語》的興趣特別大。 當時在朝鮮《世說新語補》被數次出版, 爲了更容易方便的閱讀,《世說新語姓彙韻分》的書刊行以後被很多人接受。 和《世說新語》相比, 朝鮮的知識分子閱讀《世說新語補》的人數更多, 因為書中插有很多明代的故事。 因此對於含有明代知識份子的生活內容的《皇明世說新語》有相當的興趣。 因此由於《世說新語補》的關心熱度, 以及朝鮮知識份子對新的作品的閱讀渴望才促成了《皇明世說新語》的出版。 遺憾的是, 刊行出版的相關記錄并沒有留存, 對於何時何地刊行的部份更不得而知。 特別是在全羅道的錦城丁氏家族珍藏了多卷, 也許可以推測出出版的一些相關聯繫。 锦城丁氏在家设置的默容室里收藏的書籍, 已寄赠给延世大学和成均馆大学, 因此我們可以借閱保存完好的《皇明世说新语》。 国内刊行的《皇明世说新语》以国立中央图书馆为首, 在首尔大奎章阁、 延世大学、 成均館大學、 启明大學等都有收藏。

      • 고유황 석탄의 황 형태별 정량 연구

        박형우,정봉진,염진호,이나연 한국폐기물자원순환학회 2013 한국폐기물자원순환학회 학술대회 Vol.2013 No.2

        자원 고갈로 인해 원자재 가격 상승과 고유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 중 하나로 저가의 고유황 석탄의 사용이 고려되고 있다. 생산공정에서 고유황 석탄의 사용은 원가절감의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높은 황함량에 따른 다량의 황화합물의 배출로 대기오염 및 설비의 부식에 대한 문제가 예상된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고유황 석탄으로부터 발생되는 화합물에 대한 특성을 파악하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고유황 석탄의 유기황, 무기황의 분포를 파악하였다. 일반적으로 석탄에 함유된 황성분은 크게 무기질과 유기질의 두가지 형태로 나눌 수가 있다. 무기황 성분은 대부분 pyrite 형태로 존재하고, 유기황 성분은 크게 thiols, sulfides, disulfides, thiopenes의 혼합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이와 같이 다양한 화합물의 혼합형태로 석탄에 함유된 황성분은 석탄전환 과정에서 분해 및 화학반응을 거치게 된다. 석탄이 고온에서 열분해가 일어나면 석탄중에 함유된 무기질 및 유기질 황성분이 분해를 시작하여 H₂S, COS, CS₂ 등으로 변환되어 각 반응기 내에서 고체물질과 반응하여 순환된다. 여기서 저가 고유황 석탄의 사용량을 증가시킬 경우에 수처리 설비 및 가스 청정계에 부하를 더 심화될 수 있다. 따라서 저가 고유황 석탄의 열전환과정에서 석탄으로부터 방출되는 황화합물에 대한 특성 연구를 통하여 황의 반응특성 해석 및 순환과정을 정량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석탄의 황 형태별 분포 비율을 알기 위해서 총 황함량과 무기황의 함량을 분석해야 한다. 이때 무기황의 분석은 아래와 같은 4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진행이 된다. 석탄 시료를 묽은 염산 및 질산 환류 용액 내에서 황산염과 황철광의 용해도 차이를 이용하여 용액 내에서 연속적으로 취하고 직접 정량한다. 1단계는 황산염 및 황산철의 황 성분 분리 단계, 2단계는 황산염 황 정량 단계, 3단계는 황철광 황의 정량 단계, 4단계는 유기황의 정량 단계로 구분이 된다. 고유황 역청탄의 실험결과 총 황함량은 2.82wt.% 이고, pyritic sulfur 함량은 1.186wt.%, sulfate sulfur 함량은 0.026wt.%, 유기황 함량은 1.608wt.% 이다. 총 황함량 중에서 황 형태별 분포 비율을 보면 유기황 함량 비율이 57.09%, pyritic sulfur 함량 비율이 42.2%, sulfate sulfur 함량 비율이 1.06%로 총 황함량 중에서 유기황 함량 비율이 약 57%로 무기황 함량 비율보다 약간 높음을 알 수가 있다. 또한 무기황과 유기황의 비율(Inorganic S/Organic S)은 0.754, pyritic sulfur와 유기황의 비율(Pyritic S/Organic S)은 0.738을 나타내었다.

      • KCI등재

        英祖代 皇朝人 대한 인식

        노혜경 동양고전학회 2009 東洋古典硏究 Vol.37 No.-

        황조인은 조선 중기까지 중국 사람을 뜻하는 말로 쓰이다가 영조 대에 와서 명나라 유민으로 조선에 들어와 정착한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황조인 개념이 생성된 배경을 보면 兩亂 이후 국가 재건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념적 기반으로, 효종 때의 '北伐論'은 이후 '尊周論'으로 대체되었고, 숙종 때 대보단 창설로 小中華主義의 정당성이 확보되었다. 영조 때에는 대보단의 확대개편 및 양란에 희생된 충신열사에 대한 현창 작업 등이 이루어졌다. 영조는 존주론과 대명의리론에 대한 자신의 이론화 작업에 힘썼다. 이는 ‘風泉’의식의 유포, 御製書의 편찬과 교육, 다수의 英祖御製 저술 등으로 표현되었다. 영조 때의 황조인과 그 후손에 대한 정책은 忠良科의 설치, 대보단에 三皇 배향, 황단 守直임무, 관직 제수, 贈職 등으로 시행되었다. 또 황조인의 명부인『華人錄』을 만들어 향화인과 차별된 우대책을 시행했다. 한편 영조의 '風泉'의식이 널리 전파되어,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 개념을 작품 속에 썼다. 이규상의 幷世才彦錄과 宋奎斌의 風泉遺響 등이 그것이다. 황조인에 대한 일반 민의 생각은 황조인의 우대책으로 인해 그들의 처지를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영조 시기 황조인에 대한 인식은 대명의리론과 존주론을 기반으로 이를 정책에 반영하는 방식으로 드러났고, 황조인에 대한 정책 또한 같았다. 향화인과는 다른, 명의 후손을 보호하고 우대하는 가운데 조선의 위상을 분명히 하려는 정치적 이념이 깔린 것이다. This paper is about the conception of "Hwangjoin(皇朝人)" during the reign of King Youngjo in the Joseon Dynasity. Originally, Hwangjoin meant the Chinese people till the mid-term of the Joseon Dynasty but the meaning was changed to the immigrants from the Ming(明) dynasty in reign of King Youngjo. They were Han Chinese(漢族) and moved to the Joseon between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the Manchu war in 1636. The Joseon government gave a warm welcome to them. Two wars made the Joseon government pay attention to the national restoration and served the entrance of 'Sallim(山林)' on the central government as a momentum. Song, Siyeol(宋時烈) was the leader of Sallim, who made an issue of 'Daecheong-boksu Discourse(對淸復讐論;to revenge on Ching(淸) Dynasty)' like a way of 'Bukbeol(北伐;to attack Ching Dynasty)'. His plan came to fail because of the death of King Hyojong and was replaced with Jonju Discourse(尊周論;respect for Zhou Dynasty). Daebodan(大報壇) was built in the reign of King Sukjong, which meant Joseon got the justness that they inherited from the Ming Dynasty. Later Daebodan expanded and it led to works in honor of loyal subjects and patriots, victims of two wars and a policy of a warm reception for Hwangjoin. King Youngjo did his best to theorize Daemyeong Euiri Discourse(對明義理論) and Jonju Discourse for himself. His efforts came out as a spread of conception on Pungcheon(風泉;fengquan), publication and education of Eoje-seo(御製書) and making literary works(英祖御製). King Youngjo employed many policies for Hwangjoin. First, operation of Chungnyanggwa(忠良科) opened a door for them to go into politics. Second, descendants of Hwangjoin had charge of Hwangdan's guard(皇壇 守直) posts. and joined in the sacrificial rites of Ming Emperors. Third, they could have government jobs and honorary posts for ancestors' merits. Fourth, a list of Hwangjoin, Hwainlok(華人錄) was published and they got preferential treatment unlike Hyanhwain(向化人). King Young's Pungcheon(風泉) had an effect on literature such as Lee, Gyusang(李奎象)'s Beong-sejaeunlok(幷世才彦錄) and Song, Gyubin(宋奎斌)'s Pungcheon-yuhyang(風泉遺響). The general people of Joseon were jealous and envious of them because of special treatment polices for Hwangjoin. So people wanted to be included in Hwangjoin as far as possible and there were cases of pretending to be a Hwangjoin. The conception of "Hwangjoin(皇朝人)" during the reign of King Youngjo was realized as the policy for Hwangjoin based on Daemyeong Euiri Discourse(對明義理論) and Jonju Discourse(尊周論). It was a way of becoming clear about Joseon's position in political principle.

      • 황상(黃裳)의 영물시(詠物詩)에 대하여

        장진엽(Jang, Jin-youp)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 2018 다산과현대 Vol.11 No.-

        황상(黃裳)의 『치원유고(巵園遺稿)』에는 영물시(詠物詩)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 19제(題) 28수(首) 있다. 지금까지 황상의 작품은 다산가(茶山家) 및 추사가(秋史家)와의 교유, 그리고 다산을 계승한 사회시나 애민시 위주로 연구되어 왔으나, 그의 영물시(詠物詩) 역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영물시는 대개 우의(寓意)의 기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시인의 평소 뜻을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황상 영물시의 특징을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첫째는 자연과 사물에 대한 관심과 관찰이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전원생활의 동반자로서의 자연물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치자, 대나무, 귤나무, 새 등의 자연물은 시인의 삶에 함께 하면서 고적한 은둔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치자는 황상의 삶의 방식 자체를 표상하는 시적 대상으로서 화자의 동반자인 동시에 분신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세 번째는 까치, 수탉, 어미 소 등의 동물을 묘사한 시들에 나타나는 특성인데, 시적대상이 현실의 고난을 견뎌내어야 하는 주체로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때로 시인의 모습과 겹쳐지기도 하고, 그의 사회시 작품에 나오는 고통 받는 민중의 모습으로 비치기도 한다. 조선의 실제 경관과 사회 현실을 주된 시적 제재로 삼았던 다산과 마찬가지로 황상 역시 사회현실을 비롯하여 주변의 자연물과 사물을 주요한 시적 대상으로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영물시의 창작에도 다산의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을 통해 황상의 고유한 시세계의 일단을 엿볼 수 있음도 분명하다. Hwang Sang (黃裳)’s Posthumous Writings of Ch’iwŏn (巵園遺稿, Ch’iwŏn yugo) contains twenty-eight odes on nineteen topics. Until now, most of Hwang’s writings studied were those concerning the disciples of Chŏng Yakyong and Kim Chŏnghŭi, or his social or commoner poems written in the manner of Chŏng. However, his odes (詠物詩, yŏngmulsi) are also worthy of study. As the genre frequently employs allegory, the poems clearly indicate Hwang’s inner world. This study examines three aspects of Hwang’s odes. The first is that the poems tend to focus on contemplating nature or objects. The second is that nature is portrayed as a companion of rural life. Gardenias, bamboo, tangerine trees, and birds stimulate Hwang’s peaceful retirement; gardenias in particular symbolize the poet’s way of life, and simultan eously are a companion of the narrator and their alter ego. The third is that the poems which depict a swallow, rooster, or cow are often the subjects of overcoming hardship. These animals often overlap with the image of the poet himself, while they also appear as the suffering commoners in his social poems. Like Chŏng, who mainly took Chosŏn’s landscapes and social realities as poetic themes, Hwang also addressed social realities through the subjects of nature and objects. In other words, Hwang’s odes were influenced by Chŏng. However, these poems also give us insight into Hwang’s poetic world.

      • KCI등재

        『皇華集』의 編纂 意圖와 文學的 價値 再考 - 『皇華集』 逸序文과 『皇華集』 關聯 資料를 中心으로 -

        尹載煥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16 고전과 해석 Vol.21 No.-

        『皇華集』은 조선의 의도와 명나라 사신들의 정치적 목적이 결합한 결과물이다. 조선은 『황화집』을 통해 조선의 문화적 수준을 밝히고 이를 통해 명나라로부터 주변의 여타 국가와는 다른 차별적 지위를 인정받고 싶어 했으며, 조선에 사행 온 명나라 사신들은 조선에서 간행된 『황화집』을 통해 황제와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자신을 善政官, 牧民官으로 인정받고 싶어 했는데, 각기 다른 두 가지 목적의 달성에 『황화집』이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고 보인다.『황화집』의 간행에는 당대 조선의 대표적인 문인들이 거의 모두 투입되었지만, 그들의 詩文은 다양한 한계를 지닌다. 그것은 『황화집』에 수록되어 있는 그들의 시문이 전적으로 명나라 사신의 시에 대한 次韻과 和答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황화집』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 문인들의 시는 기본적으로 창조성이 제한된 형식적 완벽성에 치중한 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조선 문인들의 시는 근본적으로 문학성, 예술성이 제한된 시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황화집』에 수록된 시가 문학적 성취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그 한계는 더욱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문의 창작 주체가 당대 조선 최고의 문인들이었고, 그들이 명나라 사신들과 주고받은 시의 평가를 통해 그 자신의 문학적 성가를 분명하게 인정받고 드러내려 했었다는 점에서 『황화집』의 문학적 가치의 검토는 『황화집 의 편찬 의도와 가치, 그리고 당대 조선 문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의식과 함께 『황화집』이라는 문집의 특수한 상황과 『황화집』 소재 시문을 창작했던 창작자들의 특수한 처지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황화집』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그 자체의 타당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으리라 보인다. Hwanghwajip is the result of combining Joseon’s aim and Ming dynasty envoys’ political aim. Joseon, through Hwanghwajip, wanted to prove the level of Joseon’s culture and to have Ming dynasty recognize her distinctive status differentiated from other nations neighboring Ming; and Ming dynasty envoys wanted Ming dynasty court to recognize themselves as good governors through Hwanghwajip published in Joseon. Hwanghwajip seems to have helped to reach those two different aims. Although the publication of Hwanghwajip consumed almost all best representative writers of Joseon of the time, their poems and proses implied various limits because their poems and proses recorded in Hwanghwajip were entirely to rhyme lines in reciprocation for the poems of Ming dynasty envoys. Thus, Joseon writers’ poems in Hwanghwajip were basically for formal perfection with limited creativity. From such a perspective, Joseon writer’s poems were of limited literary and artistic value. Especially, since poems in Hwanghwajip were not for literary achievement but for a nation’s political aim, their limits must have become even more limited. However, as the subjects of creating those poems were best writers of Joseon of the time, and as the writers attempted to have their literary achievements be revealed and be recognized through evaluating the poems given and taken between Ming dynasty envoys and themselves, the literary value of Hwanghwajip should be evaluated within the consideration of the aim for publishing Hwanghwajip, of the consciousness of Joseon’s writers of the time, and of the unique situation of Hwanghwajip, as well as the consideration of the unique circumstances of the writers creating poems and proses in Hwanghwajip. Otherwise, every evaluation on the literary value of Hwanghwajip would lose its own valid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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