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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상(韓國思想)(사학(史學)) : 조선의 월남에 대한 인식 -월남에 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기술을 중심으로-

        김택중 ( Taek Joong Kim ) 한국사상문화학회 2011 韓國思想과 文化 Vol.59 No.-

        21세기 현재 한국과 월남 양국은 물적 교류와 인적 교류 상 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경제적 파트너이며 전략적 동반자 관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적, 역사적 관계로 근대 이전 한월 양국 간의 교류는 활발하지 못하였다. 특히 조선시대 한국과 월남은 직접적인 교류가 거의 없었다. 때문에 본 논문 주제에 관련된 자료 역시 매우 희소한 편이다. 본문은 주로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는 조선사행의 보고서를 근거자료로 근대이전 조선의 월남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았다. 본문에서 검토한 결과를 토대로 조선시대 월남에 대한 인식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시대 한국과 월남 간에는 오늘날처럼 직접 상대국을 오고가는 인적 교류와 물적 교류가 없었다. 때문에 조선의 월남에 대한 정보 혹은 인식은 주로 양국 사신들이 만나는 중국의 수도 북경에서 간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방법에 있어서는 대체로 한국사신이 중국에서 중국정부로부터 월남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경우, 중국정부가 조선정부에 조서 등을 통해 월남에 대해 알려주는 경우, 한국사신이나 통역관이 중국에서 월남의 사신이나 통역관을 직접 만나 상호 간의 정보를 주고받는 경우 등이 있다. 둘째, 조선시대 월남에 대한 인식의 범위는 월남내부의 큰 정치변동에서부터 대중국 외교정책과 공물내용, 천주교 탄압, 국호 변경, 의관 풍습 등 매우 다양하다. 특히 정치방면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인물의 이름과 행적 등과 같이 정보의 내용이 매우 상세하다. 시대는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고 월남의 호(胡) 왕조로부터 후기의 완(阮) 왕조에 이르기까지 근대이전 월남의 각 시대를 망라하고 있다. 셋째, 조선시대 조선은 다른 무엇보다 월남의 정치적 변동과 그에 대한 중국의 대응과 월남정책 및 월남의 대중국 사대정책이나 조공관계 등에 대해 지대한 관심과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조선 역시 중국 중심의 중화질서 속에서 월남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자신의 안위와 존립을 지키고자 하는 관심에서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넷째, 조선시대 월남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중국을 통해서 얻는 정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때문에 정보의 내용이 객관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중국의 대월남관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월남에 대한 인식 역시 부정확한 면이 있음과 동시에 중국의 월남에 대한 관점이 많이 작용하고 있다. 다섯째, 조선시대 조선은 중국 중심의 아시아 국가 중에서 중국을 제외한 가장 뛰어난 문화국가라는 자부심과 우월감을 지닌 채, 의관 풍습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상대적으로 월남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경시하고 무시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요컨대 조선시대 한국은 월남과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양국 사신들의 학문교류와 정보교환, 혹은 중국의 조서나 대외발표문 등과 같은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 예상외로 월남의 각 상황에 대해 많은 정보를 확보하고 또한 그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現在韓越兩國在經濟和戰略上흔重要關係.可是因地理和歷史的背景,20世紀以前韓越兩國之間흔少人和物的往來或交流.尤其是朝鮮時代幾乎沒有韓越兩國之間直接交流.從而也흔少有關本論文的資料.因此本文主要根據朝鮮王朝實錄所記述朝鮮使行的報告文,探索朝鮮對越南的認識.其結果如下.第一,朝鮮時代在韓越兩國之間從未有像現在的直接交流.因而朝鮮要獲得對越南的情報,主要依據在中國首都北京所進行的資料.在其資料有幾種,一.朝鮮使臣由於中國政府的報告書得到越南的狀況,二,中國政府通過詔書等告訴朝鮮政府對越南的情況,三,朝鮮使臣和通譯官與越南使臣和通譯官在北京面對而互相交換情報.第二,朝鮮時代對越南的理解範圍有廣範而多樣,如從越南內部的政治變動至越南對中國外交政策和供物內容,天主敎彈壓,國號變更,衣冠風習等.特別朝鮮在對越南的政治方面認識흔詳細,如對人物的姓名和行爲等比較具體的了知.此外,時代範圍也是不局限於特定時代而網羅近代以前的全越南時代如從胡王朝至阮王朝.第三,朝鮮關於越南的政治變遷,越南對中國的事大主義和朝貢政策等持有至大的關心和敏感的反應.此目的是朝鮮亦在中國中心的中華秩序上,以越南當作他山之石,爲了保持朝鮮自身的安危和存立.第四,朝鮮時代對越南的情報,大部分是從通過中國而獲得.所以其情報的內容不但不客觀,而且多包含中國的觀點.從而在朝鮮對越南的認識上難免有不正確的部分,同時在其認識內多作用於中國的對越南觀.第五,近代以前以中國爲中心的亞細亞國家中,朝鮮以爲除了中國以外朝鮮具有最優秀的文化,持有此種自負和優越感的朝鮮相對越南具有輕視和無視的傾向.總而言之,雖然朝鮮時代朝鮮與越南從未有直接交流,但是朝鮮通過像韓越兩國使臣的學問交流和情報交換,或中國的詔書和對外發表文等間接交流方式,得到多方面的越南情況而據此了解越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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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의 울산인(蔚山人)

        이명훈(Lee Myung-Hoon) 한일관계사학회 2007 한일관계사연구 Vol.28 No.-

        울산이 조일관계의 역사에서 갖는 중요성에 착안하여, 본 연구는 조선시대 울산인이 영위한 삶의 모습을 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하여 조명함을 목적으로 한다. 왕조실록에 울산인으로 명기되어 있는 인물은 20인이다. 그리고 이 20인에 속하는 인물의 자손으로 왕조실록에 명기되거나 확인되는 사람이 2인이다. 이를 합친 22인 중에서 9인이 일본과 관련되어 있다. 본고는 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하여 조선 초기의 대일통신사였던 이예 및 이종실, 임란 중 대일외교관이었던 이겸수 및 장희춘, 그리고 임란 중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이경연, 박응량, 이응춘?이승회에 대해 살펴보았다.이 중 이겸수의 경우, 왕조실록을 사명대사의 분충서난록 과 대비하면서 일본군을 대상으로 하는 반간계의 입안과 실행 과정을 분석하였다. 이어서 효자 송도와 효녀 향춘 및 소근련, 그리고 세쌍둥이의 어머니와 열녀서씨 및 이씨, 선비 김방한 및 이경주와 무신 이경주, 아전 박청과 상민 김성(金姓)에 대한 기록도 요약하였다. 이와 더불어, 범죄인으로 왕조실록에 기록된 승려 상진, 사노비 독장, 그리고 강사덕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본고의 분석은 왕조실록에 울산인으로 명기된 울산인, 혹은 그러한 울산인의 자손으로 뚜렷이 나타나는 울산인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것은 본고의 한계이며, 앞으로 본고의 내용을 더욱 확대하고 발전시켜야 할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유용하리라 생각되는 자료는 1609년(광해군 1)에 발간된 울산부 호적대장이다. 호적대장에 기록된 인물들을 왕조실록의 기록에서 찾아내는 방법을 활용한다면 상당한 연구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In respect for the significance of Ulsan"s namesake in the history of Korea-Japan relationship, this paper aims at analyzing the lives of contemporary Ulsan natives as portrayed in the Annals of Joseon Dynasty(Annals, henceforth). The Annals identifies a total of 20 figures as native Ulsanians, while two figures are confirmed as offsprings thereof by the Annals or otherwise. Nine out of the 22 figures are distinctly associated with the Korea-Japan relationship. This paper investigates the lives and careers the following Ulsanians: two ambassadors to Japan during the early-Joseon period, namely, Lee Ye and Lee Jong-Sil; two diplomats who served in the cease-fire talks during the 1592 Invasion of Japan, namely, Lee Gyeom-Soo and Jang Hee-Choon; and four volunteer corps officers during the said Invasion, namely, Lee Gyeong-Yeon and three comrades. In regard of Lee Gyeom-Soo, an in-depth probe is attempted on the processes of drafting and executing the top-secret espionage plans by the King’s court against the Japanese military hierarchy. This probe was made possible by utilizing the paleography in the name of Bunchung-seonan-rok. The paper also reports on the following Ulsan natives who were officially commended by Royal mandate: three filial children, a mother of three new-born triplets, and two virtuous suttees. Other products of Ulsan appearing in the Annals are as follows: three members of ruling class, an official clerk of local government, and a commoner, as well as three criminals. The figures in this paper are limited to those who are identified as Ulsanians by the Annals and those who are confirmed as offsprings thereof by the Annals or otherwise. This may be regarded as a qualification of the paper and suggests a desirable direction of further research in the area. The ancient documents of Ulsan Census Registration, published in 1609 and presently available, is expected to contribute to broadening the pool of Ulsanians through cross-check with the Anna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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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고대사 연구의 ‘왕조(王朝)’ 개념

        김현경 한국고대사학회 2023 韓國古代史硏究 Vol.- No.110

        일본사 연구에서 고대가 끝나는 시기,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전환기는 중요한 논점중 하나이다. 일찍이 고대 율령국가의 쇠퇴를 맞아 중세를 대비하는 국가 체제로서 ‘왕조국가(王朝國家)’가 등장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고, 왕조국가는 일본의 고대사를 논의함에 있어중요한 키워드라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일본 고대사 연구에서 등장한 ‘왕조국가’의 ‘왕조’가무엇을 가리키는지 학설 상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왕조’는 근세 이전의 사료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말이며, 근세에는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조정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때의 왕조는 막부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쓰였고고대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 왕정복고와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짐에 따라 무사정권 이전에 존재한 천황 친정(親政)의 통치 체제를 ‘왕조’라고 부르게 되었고, 그 시대 범위도 가마쿠라 막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고대로 한정되어 갔다. 다만, 왕조라는 말 자체의 모호성으로 인해 논자에 따라 구체적인 시기는 다르게 규정되기도 하였다. 한편 왕조라는 말에서 궁정의 이미지가 연상됨에 따라 왕조문학, 왕조정치와 같은 말이사용되었고, 궁정 문화가 꽃피운 시기인 헤이안시대를 왕조로 가리키기에 이르렀다. 이러한경향은 역사학계에서도 널리 퍼져 헤이안시대 내지 헤이안 중기 무렵을 왕조시대라고 부르는 사례가 늘어났다. 그러한 배경 속에서 헤이안시대에 등장한 고대 율령국가를 대체할 정치 체제의 명칭이 왕조국가로 명명되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실제 dynasty의 의미로서 왕조라는 말이 사용되어 일본 고대의 여러 개의 왕조의 존재와 왕조교체의 가능성을 논한 연구도 존재한다. 하지만 왕조라는 개념이 가지는모호성으로 인해 혼란이 발생하는 점이 있으며, ‘왕조’라는 용어의 사용에는 보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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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九鼎”传说流考及其中国传统文化

        张翀 숭실사학회 2010 숭실사학 Vol.25 No.-

        중국의 청동기문명은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게 찬란하다. 그 가운데 夏, 商, 周 세 王朝의 시대는 청동기문명이 최고조로 발달한 시대이다. 이들 세 왕조가 번영한 1,800년 동안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청동기가 탄생했다. 殷周金文集成 이란 서적에는 銘文이 새겨진 청동기가 1만 2,113점이나 수록되어 있다. 만약 명문이 새겨지지 않은 청동기까지 계산에 넣는다면 그 수량은 더욱 더 많아질 것이다. 이들 수많은 청동기 가운데 어떤 청동기가 가장 먼저 출현하였을까? 그리고 그것은 누구에 의해 제작된 것일까? 靑銅 鼎은 商周시대의 청동기 가운데 수량이 가장 많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종이다. 최초로 출현한 청동기는 바로 鼎類의 물건이다. 중국의 고대 문헌에는 ‘아홉 개의 정[九鼎]’에 관련된 각종 기록이 나타난다. ‘아홉 개의 정’ 설화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夏 왕조 禹 임금의 아들인 啓 임금 때에 이것이 만들어졌다 한다. 이 설화의 비교적 빠른 전거는 左傳 , 墨子 등의 고대 문헌이다. 夏 왕조 때에 제작되었다고 전해지는 이 ‘아홉 개의 정’에는 천하의 物象을 장식하여 그것으로써 천하를 상징하였고, 그것은 왕조의 성쇠에 따라 夏 왕조에서 商 왕조로, 그리고 다시 周 왕조로 차례차례 전해져 그들의 祠堂에 보존되었고, 주 왕조가 멸망할 즈음에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아홉 개의 정’은 단순한 청동 용기가 아니라 천하의 통치권을 상징하는 표징으로 기억되어 왔다. 따져보자면, 이 ‘아홉 개의 정’은 중국의 전통문화, 의례제도를 극단적으로 物化한 대표적 상징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왕권의 集中과 지고무상함을 體現한 것이며, 국가의 통일과 민족의 昌盛을 반영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우 임금이 아홉 개의 정을 주조하였다’는 전설은 현대 고고학의 지식을 이용하면 아주 쉽게 ‘조작된 옛 역사’라 단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아홉 개의 정’에 관련된 전설을 정리해 보면, 이 이야기는 ‘점진적으로 만들어진 중국의 고대사’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인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점진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임의로 위조된 것은 아니다. 그 일이 역사상 존재하지는 않았다고는 해도 임의로 날조된 것 역시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설화의 형성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그 설화가 성립될 수 있었던 역사의 배경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것을 통해 중화 고대 문명의 형성과 발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들에게, ‘아홉 개의 정’을 추적하는 일은 그 실물을 찾는 것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그것이 제시하는 정신적인 영역의 의미를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漢 왕조에서 唐 왕조 나아가서는 宋 왕조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조의 제왕들은 이 ‘아홉 개의 정’을 수소문하기도 하고 또 스스로 주조하기도 하면서, 그것으로 국가의 통일과 강성함을 상징하였다. 그리하여 정은 중화민족의 정신적인 상징물이 되었고, 그 기본 정신은 대대로 이어져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Bronze ritual vessel civilization of China is really radiant without precedent. Of which, the age of three dynasties like Xia, Shang and Zhou, was a peak in process of bronze ritual vessel civilization development. Immeasurably many bronze ritual vessels came into blossom for 1800 years during which these three dynasties had prospered. For instance, around 12,113 items of ritual vessels were found with inscribed epigram, according to the book titled, Yinzhoujinwenjicheng. If we count other ritual vessels without inscription, total volume would be far more than our imagination. Which ritual vessels did come first of all items? By whom were they made? This question causes our curiosity. Bronze ‘Ding(tripod)’ w hich was rampant in volumes of all items excavated in Shang-Zhou period has the most important significance. In my assumption, pot like item might be firstly found. Lots of records regarding 9 tripods were found for this same period, many literatures of primitive China said. According to the ‘9 tripods legend’, this was made in king ‘Qi’, a son of ‘Yu’ of Xia dynasty. What historical references then do the ‘9 tripods’ have here? This article is designed to regulate some literature & archives referring to folklores of 9 tripods and their tradition, and to research an entire process of excavation history in comparative study. I want to hear any kinds of comments from our readers, if necessary. The authentic reference of this narrative derived from venerable documents like Zuozhuan and Mozi. In the ‘9 tripods’ known as that they were made in Xia dynasty, there are some decorated shapes that signifies the whole country. It is said that the shapes handed down from Xia dynasty to Shang dynasty, and then from Shang to Zhou dynasty in accordance with rise & decline of dynasties, finally disappeared with downfall of Zhou dynasty. In this sense, the ‘9 tripods’ are simple bronze ware any more but an emblem that signifies majesty of whole country. As a matter of fact, these ‘9 tripods’ are sort of typical symbols representing traditional culture and its ceremonial system of China. In other words, they are the one that embodied dignity of kingship and its eternity, and reflected unification and prosperity of the nation, China. As we look back, the legend saying that the King ‘Yu’ commanded to mold the 9 tripods was easily found as a manipulated concoction when we look into some archaeological materials. Arranging the related legends altogether, we come to an end that the story is a typical case to show off they are gradually made in the midst of making Chinese history. They were rather formed in times not fabricated in option. Though never existed in history, it does not mean that they were intentionally forged. Accordingly as we trace the procedure of the legend, we possibly may reach to the historical origin of the legend, through which we may find some clues to understand the whole procedure of venerable history of China. Probably to trace its origin is meant to us as a pious curiosity to see what the spiritual meaning of it is. So it needs not to be an academic obligation. A lot of successive dynasties from Han to Song via Tang inquired here and there, sometimes molded by them to symbolize their country dignified & unified. For this reason, the ‘Ding’ has been a spiritual symbol of Chinese people, and its basic spirit handed down as a proud traditio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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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淸初 朝鮮표도 중국 표류민 송환 방식의 변화와 이유

        왕천천 중국학연구회 2020 중국학연구 Vol.- No.91

        This paper focuses on the change of the way of returning of the chinese drifters to Joseon during the early period of the Qing Dynasty. The study is based on "Bibyunsadeunglok(『備邊司謄錄』)" which recorded the Chinese drifter's cases, and with reference to the record of "Annals of the Joseon Dynasty(『朝鮮王朝實錄』)", the "Tongmunhwuigo(『同文彙考』)" and "Jiyeongnok(『知瀛錄』)", "Jeongmi-jeonsinnok(『丁未傳信錄』)", "Overseas Travelogue(『海外聞見錄』)". The study is based on three drifting events and discusses the transformed node of Joseon Dynasty on the way of returning of the Chinese drifters, the cause of this change and the political and diplomatic reality reflected in the change. Joseon Dynasty repatriated the Chinese drifters from the land strictly, and the only one fundamental reason is the high pressure and strong supervision from Qing Dynesty. With the analysis of many of drifting cases, we can conclude that returning the drifters by land was the preferred way of Joseon Dynasty. After this event, The Qing Dynasty made it clear that Joseon Dynasty could return drifters by sea through official documents. And after this, Joseon confirmed that Qing Dynasty lifted the ban of maritime trade from the year of 1684. In a word, the political and diplomatic considerations rather than moral force (Confucian Ethics) changed the way of returning China drifters to Joseon Dynasty. 명·청 교체기에 동아시아 각 왕조의 권력이 변경되면서 새롭게 통합됨에 따라 조선은 중국에서 온 표류민에 대한 구조 정책과 송환 방식 모두 일정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본고는 1644년 만청이 북경으로 들어와 중국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 조선 왕조의 중국 표류민을 송환한 사례와 송환 방식, 송환 정책의 변화를 고찰하였다. 주로 『비변사등록』과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통문관지』와 『동문회고』, 『사대고례』, 『만기요람』 등 중앙왕조의 사료와 『지영록』과 『정미전신록』 등 개인 저작을 통해서 특히 묘진실(苗珍實) 표류 사건, 임인관(林寅觀) 표류 사건, 제주 표류민을 송환했던 진건(陳乾) 사건을 중심으로 조선 왕조가 청초에 엄격하게 육로로 송환한 이유와 전환점에 대해 분석하고 고증하였다. 필자가 판단하기에는 조선 왕조가 중국 표류민을 육로를 통해 송환을 견지했던 것, 특히 남명에 소속된 해상들을 엄격하게 육로로 송환한 근본적인 이유는 청 왕조의 조선에 대한 고압적인 정책과 강한 감시였다. 조선이 청나라 초기 이래 엄격히 집행해 오던 육로송환 정책을 바꾸게 된 분수령은 1667년의 임인관 사건이 아니라 1688년의 진건 사건이었다. 1688년 진건 사건을 경험한 이후 조선은 청나라 예부의 회문을 받고나서 해금 정책이 이미 취소됐으며 표류민을 해로로 송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해로 송환을 재개하였다. 즉 유교의 도덕적 힘이 아닌 정치외교 현실은 조선왕조의 표류민 송환방식을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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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越南 李朝(Lý朝) 古法(Cổ Pháp)과 Đền Đô(都殿)

        박순교 동아인문학회 2024 동아인문학 Vol.66 No.-

        越[Việt Nam] 최초의 장기 독립 왕조였던 Lý 왕조는 몇 가지 측면에서 특이하다. Lý 왕조가 새로운 수도 ‘昇龍’을 세웠지만, ‘昇龍’이 아닌 古法[Cổ Pháp]에 '太廟'를 건립한 점, Lý 왕조의 역대 군주, 황태후가 ‘昇龍’ 언저리가 아닌 古法에 歸葬한 점이 그러하다. ‘古法’은 ‘홍하’를 사이에 두고 ‘昇龍’ 북쪽에 있다. 이에 ‘古法’은 Lý 왕조 북진 정책의 전초 기지로도 비친다. 古法은 또한 Lý 왕조의 開祖 李公蘊의 出鄕地였다. 왕조의 발상지 古法이 지닌 불가침의 상징성과 중요성, 군사적 거점의 위상은 Lý 왕조의 명맥과 궤를 같이했다. Lý 왕조가 10년의 공역 끝에 越 역사상 최초로 ‘古法’에 세운 ‘太廟’는 고대 동아시아 都城 造營의 준칙, ‘左廟右社’의 혁파였다. Lý 왕조 군주 모두가 古法에 歸葬한 것은 부와 권력, 종교와 군사의 ‘古法’ 집중을 함의한다. Lý 왕조 치세 내내 역대 황제들이 영면한 ‘古法’과, 그곳에 세워진 ‘太廟’는 중요성을 지녔다. Lý 왕조의 시작과 끝은 ‘古法’에서 태동했다. ‘古法’은 Lý 왕조의 ‘神市’였다. Lý 왕조 ‘古法’의 '太廟'는 이후 ‘古法殿’, ‘李八位陵廟’ 등으로 불렸다. 현재 ‘古法’의 ‘太廟’는 舊墟 위에 복원을 거쳐 Đền Đô[都祠], ‘Đền Lý Bát Đế[李八帝殿]’로 불리고 있다. 현 Đền Đô의 正殿 中軸線은 고래의 동아시아에서 崇信된 정남향이 아닌, 남서향을 띤다. ‘古法’의 ‘太廟’가 특이하게 남서향을 택한 것은, 중화의 오랜 질서와 羈束에서 벗어난 것이자 홍하 건너 ‘古法’에 세워진 ‘太廟’가 ‘昇龍’과의 긴밀성을 역설하고자 照應함에 기인했다. 이는 유의미한 지점이다. ‘古法’의 ‘太廟’[Đền Đô]는 ‘昇龍’을 비추는[加護] 등불로 상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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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사에서 古都에 대한 지식과 상상력 확장의 한계

        이훈상(Lee, Hoonsang)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4 동양한문학연구 Vol.39 No.-

        Mass media, mainly newspapers, have played important roles in spreading knowledge and imagination concerning the old capitals of the past dynasties since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ism. Before the colonial period, only a few elites possessed the knowledges and imagination of the old capitals, which were expressed through Chinese poetry. Contemporary Koreans' knowledge and imagination concerning old capitals, which date back to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period, shows discrepancy from those of Joseon Dynasty. Still, These two periods reveal a certain similarity in their nostalgia for the past in the fact that their nostalgia did not truly develop into a creative imagination. With this presumption, this study explores the peculiarities of Joseon Dynasty and the social and cultural heritage, which restricted the development of imagination concerning the past of Korean old dynasties. Despite the expansion of historical knowledge of old capitals since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old capitals have not been reborn as the space of memory with more creative imagination. The reason why can be pointed out as Joseon Dynastity's ideology of restoration, which viewed the Chinese three Dynasties, Xia, Yin, Zhou as utopia and tried to realize their ideal vision. Furthermore, social and cultural institutions which can support sociopolical collective actions based upon old capitals did not visibly exist. Local knowledge and folklore were subordinated into the dominant central hegemony. In this way, a series of factors can be explained as having restricted the development of creative imagination concerning the old capitals of the past dynasties of Korea. 이 연구는 근대 이후 한국사에서 古都를 대상으로 한 지식과 그 상상력에 초점을 맞추어 고도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새로운 상상력을 촉발하는 것으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전제 아래 그 요인을 조선왕조사회의 현저한 특성으로 환원하여 논의하려 한 것이다. 이것은 고도에 대한 현재 한국사회의 지식과 상상력이 사실상 식민지기의 그것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고도와 관련된 지식을 조선후기와 식민지기의 그것을 대비하였는데, 조선시대의 경우 양반 엘리트의 문헌을 식민지기의 경우 대중 매체, 이 중에서도 주로 신문을 중심으로 추적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반도가 국가 권력의 발생과 더불어 크고 작은 국가들이 출현하고 사라졌다. 그렇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이어 조선왕조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한반도에는 하나의 정치권력만 허용되는 환경이 조성되었다. 과거의 왕조가 해체되고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서 과거를 청산하는 방식은 각기 달랐으나 일단 조선왕조의 경우 과거의 기억에 근거한 정치 세력의 결집이나 사회적 집합 행동은 출현하지 않았다. 이것은 조선시대 고도에 대한 기억 및 노스탤지어에도 반영되어 고도를 소재로 한 각종 시문의 대부분은 왕조의 흥망성쇠에 대한 허무와 무상의 감성에서 큰 차이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이 같은 시정을 표출하고 생산한 것은 여기에 대한 지식을 가진 양반 지배 엘리트들이이었다. 반면 식민지기에는 고도에 대한 역사 지식이 민족주의와 식민지 권력이 각기 상호 경합하는 가운데 생산되어 대중매체를 통하여 소비되었으며 나아가 역사의 관광화를 통해서도 확산되었다. 이렇듯 고도에 대한 역사 지식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고도는 새로운 상상력을 촉발하는 기억의 공간으로 탄생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조선왕조의 오랜 사회적 문화적 유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다. 회귀하여야 하는 이상향을 중국의 삼대로 상정하고 그 실천을 강력하게 추구한 조선 왕조의 복고 이념 아래 고도가 새로운 회귀의 자리로 재생하기는 어려웠다고 생각된다. 나아가 고도를 기반으로 사회적 집합 행동이 가능한 사회적 문화적 장치도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전복할 수 있는 지역 지식이나 전승도 강인한 중앙의 헤게모니 아래 종속되어 있었다. 이렇듯 조선왕조의 중요한 특성으로 거론되는 일련의 사회 문화적 장치들은 고도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의 촉발을 제약하는 유산으로 계속 작용하여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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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 개창의 형식과 논리 - 선양론(禪讓論)과 추대 사실의 검토

        오수창 ( Oh Soo-chang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6 동방학지 Vol.176 No.-

        오늘날 1392년 이성계의 즉위, 즉 조선왕조 개창이 공양왕의 선양으로 이루어졌다는 설명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도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선양했다는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공양왕이 왕위를 양보한 듯한 인상을 주는 서술도 많다. 하지만 고려말의 정국과 이성계의 즉위 과정에서 공양왕의 선양 행위가 끼어들어 갔을 여지는 없다. 선양했다는 자료도 물론 확인되지 않는다. 공양왕은 죄인으로 폐출되었던 만큼 그에게서 왕위를 물려받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공양왕이 선양하였다는 소수의 기록은 개인적 수준의 역사왜곡이거나 시간이 오래 지난 후 빚어진 조선왕조 건국에 대한 미화였을 따름이다. 조선시대 인사들이 태조의 왕조 개창을 논의할 때 중심을 이룬 것은 인심과 천명이 다한 고려의 마지막 왕을 이성계가 추방했다는 사실이었다. 세종은 태조의 행적을 정벌이라고 규정했고, 영조와 신하들은 정벌을 강조하지는 않았지만 조선왕조 개창이 ‘자립’이었다는 데 인식을 같이하였다. 이성계의 즉위 및 조선왕조 개창은 ‘추대’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왕실의 교체가 정당하다는 근거를 근원적으로 인심의 향배에서 찾았다. 이후 두 차례의 반정에서 다시 확인되듯이, 신하들이 국왕을 추대하고 이념과 체제에 어긋나는 국왕을 교체할 수 있다는 논리는 조선의 정치현실 그 자체였다. The prevailing current explanation is that King Taejo(Yi Seong-Gye. 1335∼1408 r 1392∼1398), founder of Joseon dynasty, came to the throne when the last king of Goryeo dynasty abdicated, regardless of whether it was by his own accord. However, this was not the case. There was no time for a rite of resignation and succession, and no records have been found referring to the abdication of Goryeo``s king. The last king of Goryeo was deposed as a criminal and expelled from the capital, so it was not justifiable for the Joseon dynasty to inherit the Goryeo crown. Politicians and intellectuals of the Joseon period believed that King Taejo vanquished the last king of Goyeo, who had lost both his people``s support and the mandate of Heaven. As for the logic and form of the founding of Joseon dynasty, it was through the selection and support of the new king by the powerful elite. It was the political reality of the Joseon period that subjects could have someone found a new dynasty and replace a king who did not follow their political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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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팔의 왕실 의례 나바라뜨라와 그 의례 형태의 재편에 대한 논의

        심재관 불교의례문화 연구소 2023 무형문화연구 Vol.0 No.10

        말라왕조와 샤왕조는 카트만두 계곡을 연속적으로 통치하며, 유사한 종교 전통을 유지하고 있었던 왕조들이다. 특별한 왕가의 여신을 모셔온 것도 두 왕조의 공통점이다. 18세기에 샤왕조가 카트만두 계곡의 권력을 통합하게 되면서 고르카에서카트만두로 이들의 왕실이 이동하게 되고, 두 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던 왕실 나바라뜨라 의례도 완전히 재편되는 과정을 거친다. 결과적으로 고르카 뿐만 아니라 카트만두에서도 나바라뜨라 의례는 샤왕조를 위해 강화된 의례복합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의례들의 통합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두 가지의 다른 전략들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카트만두 계곡 내에 존속해왔던 말라왕조의 의례들은 거의 변함없이 존치시킨 반면, 샤왕조의 의례는 새로운 의례절차, 사제, 의례시기 등을 추가하여, 과거 말라왕조의 왕실 나바라뜨라 의례의 권위를 이어받으면서, 새로이 확장된 형태의 나바라뜨라 의례는 샤왕조를 위해 강화된 형태를 띠도록 변형된다. Astrid Zotter examines the textual sources for the Malla(1200–1768) and Shah (1768–2008) dynasties of Kathmandu through ethnohistorical method. In this chapter, Zotter compares the ritual procedures of both courts to reconsider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wo dynasties. She complicates the received history of Nepal’s royal rituals by showing how the Shahs adopted rites, deities, and specialists of the previous dynasty while advancing their own ritual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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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百濟의 對中關係와 使臣路 : 北朝 정권과의 교섭을 중심으로

        조범환(Cho Beumhwan) 백산학회 2020 白山學報 Vol.0 No.116

        본 논문은 백제가 중국과의 교섭에서 남조보다는 북조 왕조와 교섭을 추진한 목적과 그것이가지는 의미 등에 대해서 검토해 본 것이다. 백제는 전통적으로 중국과의 교섭에서 대부분 남조왕조를 통해 신문물을 수입하였기에 남조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한성백제시기 개로왕대와 사비시대 위덕왕대는 이와 같은 전통적인 교섭에서 벗어나 북조 왕조와 교섭을 추진하였기에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개로왕은 북위 효문제에게 표문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표문의 내용은북위에게 고구려를 쳐야 하는 명분을 주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다 보니 표문의 내용이 과장되고허위로 볼 수 있는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이와 같은 내용을 보낼 수밖에없었던 것은 직면한 문제 즉 고구려의 군사적인 공세를 막아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북위가건국된 이후에도 그리고 또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였을 때도 사신을 보내지 않다가 느닷없이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벌의 명분을 표명한 것은 이와 같은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개로왕의 이와 같은 대북위 교섭은 황제의 거절로 끝이 났으며 결국 고구려의 군사적공격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개로왕은 남조 일변도의 외교 정책에서 벗어나 북조와의 외교정책을 추진하였으나 진정성이 결여된 외교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기대 이상의 효과를 거두지못하였다. 더 나아가 개로왕은 중국의 북조 정권이 남조 정권과는 여러 가지로 다르다는 것을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였던 결과에서 이와 같은 일이 빚어진 것이다. 또한 개로왕대 대중국 외교를 담당한 관료들은 남조 일변도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던 실무 주역들이었으므로 북조 정권과의외교 정책의 경험이 부족하였기에 그다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할 수 있다. 사비 시기 위덕왕은 또다시 북조 왕조와 교섭을 재개하였다. 당시 고구려나 신라는 이미 북제와 교섭하여 책봉을 받은 상태였기에 백제로서는 상당히 늦게서야 대중국 교섭에 관심을 두었다. 그는 남조 왕조의 진과 북조 왕조의 북제에 각각 사신을 파견하여 남조 일변도의 외교정책에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그가 북제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고구려를 염두에 둔 행위였다기 보다는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 무엇보다 컸다. 물론 중국 대륙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한 것과아울러 국제 정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남조의 진뿐만 아니라 북제와의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그리고 북주가 화북을 통일하자 곧바로 사신을 보냈으며 다음 해에도 또 사신을 보내 고구려와 관계를 확인하는 작업을 하였다. 당시 고구려는 북주가 들어선 다음 단 한 번의 사신 파견으로그쳤으나 백제는 두 번이나 사신을 파견한 것에서도 그 사정을 충분히 헤아려 볼 수 있다. 개로왕과 달리 위덕왕의 이와 같은 북조 왕조와의 교섭은 이후 통일왕조 隋로 이어진 중국의변화에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개로왕의 실패를 거울삼아 위덕왕은 북조 왕조와의 교섭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고 상대방을 제대로 이해하였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백제의 북조 왕조와의 교섭에서 사행로는 서해 횡단항로가 주로 이용되었다. 물론 개로왕대와위덕왕대 사신들의 출발 장소는 상이하지만 바다로 나아간 이후 대체로 서해 횡단항로를 이용하였고 새로운 항로의 개척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This paper reviewed Baekje s negotiations with the Northern Dynasties rather than the Southern Dynasties and its meaning. To prevent the invasion of Goguryeo, King Gaero sent an inscription to the emperor of Northern Wei, Hyo-je, asking for the conquest of Goguryeo. It was a desperate countermeasure; however, the Northern Wei refused Gaero’s diplomatic contacts, which eventually led Baekje to a military attack from Goguryeo. Baekje enforced foreign policy to the North in a departure from its one-sided policy toward the South. Nevertheless, they did not prepared customized policy for the Northern Dynasties, so Baekje did not have any overachievements with the North. King Weduck negotiated with the Northern Dynasties following King Gaero. Dispatching his envoys to Bukje was more aimed at keeping Silla in check than keeping his mind on Goguryeo. Of course, Baekje had a purpose to detect changes in the North and South Dynasties and to cope with those changes in the international affairs. For example, Goguryeo sent the envoys only once to the Northern Dynasty, but Baekje sent twice. The Northern Dynasties and Baekje usually used the cross-border route in the West Sea as their negotiations. Surely, King Gaero and Weduck used different departure places to dispatch their envoys; however, the importance is that they pioneered a new route while using the cross-border route in the West S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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