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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부지(王夫之)의 역사(歷史)와 인간(人間) 이해(理解)

        陳晟秀 한국유교학회 2013 유교사상문화연구 Vol.54 No.-

        왕부지는 근대중국의 전환기 사상가로서 자신의 굴욕적인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학문체계를 완성한 철학자이다. 그는 기일원론적 역학사상에 기초한 새로운 자연관·인간관을 구축하고 人道의 실현을 통해 자연성의 극복을 강조하는 새로운 天人關係論을 정립했다. 특히 왕부지는 인간이 자연을 주재하는[主持] 존재임을 주장한다. 이것은 人間의 능동적 활동을 강조하는 왕부지의 역사관·인간관의 특징이다. 왕부지에게 太虛는 氣가 운동하는 공간으로서 虛無한 텅 빈 공간이 아니다. 天으로 대표되는 자연은 생명의 원리인 氣가 자기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場이다. 따라서 왕부지에게 天은 陰陽二氣의 활동공간[太虛]이며,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蒼蒼한 自然天이다. 이러한 自然性으로서의 天은 程朱學에서와 달리 엄격한 의미에서 天人無關이다. 이것을 왕부지는 人道에 의한 ‘하늘을 이김[勝天]’이라고 말한다. 왕부지는 天에 대한 神秘的 인식을 止揚하고, 현실적으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더욱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왕부지는 이러한 자신의 신념을 기초로 하여 理勢合一의 역사관과 延天祐人의 인간관을 완성한다. 특히 인간존재의 본질인 性의 존재론적 의미와 역사적 의미 모두를 인정하는 性日生日成의 人性論을 제시하여 인간중심의 새로운 天人關係論을 주장했다. 王夫之是近代中國轉型期的思想家, 他以自身坎坷的經歷完成了嶄新的學問體系. 他建構以氣一元論易學思想為基礎的自然觀·人性觀, 確立了通過人道的實現而克復自然性的天人關係論. 王夫之主張人是主持自然的存在, 這就是其歷史觀與人性觀的特徵-強調人的主動活動. 對王夫之來說, 太虛是氣所運動的空間, 故它不是虛無的空間. 而以天為代表的自然是生命的原理-氣按照其規律運動的場域. 因此王夫之認為天是陰陽二氣的活動空間[太虛], 也是無關於人的意志的蒼蒼之自然天. 這種做為自然性的天有別於程朱學, 是嚴格意義上的天人無關. 王夫之指出這是通過人道的‘勝天’. 王夫之排斥有關天的神秘認知, 主張應多關注並力行現實上我們要遵守的道理是什麼. 王夫之根據這種信念完成了理勢合一的歷史觀與延天祐人的人性觀. 尤其他主張性日生日成-肯定性(人的存在本質)的存在論意義與歷史意義, 進而提出了以人為本的全新的天人關係論.

      • KCI등재

        王夫之의 錯綜ㆍ變易論 硏究

        진성수(陳晟秀) 한국양명학회 2007 陽明學 Vol.0 No.19

        본 논문은 張載의 氣論을 계승하여 氣一元論을 확립한 왕부지 易學思想의 特徵을 규명하기 위해 그의 錯綜ㆍ變易論에 대해 검토하고, 그 思想史的 意義를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주역』을 연구하는 것은 왕부지에게 있어서 程朱學의 이론적 근거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 왕부지는 張載의 철학이 『주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것이며, 『주역』은 天人의 원리를 모두 포괄하고 있는 聖人의 典籍으로 이해했다. 이처럼 왕부지의 張載에 대한 계승은 氣論的 易學의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왕부지의 氣一元論的 易學思想의 특징에 대해 錯綜ㆍ變易을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왕부지의 錯綜說은 無始無終한 乾坤竝建의 陰陽二氣에 기초한 62卦의 자기전개과정이며, 구체적인 실천원리이다. 卦變說을 부정하고 있는 왕부지는 陰陽이 無心히 서로 바탕을 이루며 발전하여 우주만물을 생성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사사로운 뜻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로 간주했다. 따라서 왕부지는 錯綜說에 있어서 漢易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단지 64괘의 전개과정을 설명하는 錯綜의 원리만으로 사용할 뿐이었다. 바로 이 점이 왕부지의 역학사상이 갖는 종합적인 성격이다. 둘째, 왕부지는 『주역』의 64괘를 氣의 자기전개에 따라 생성된 것으로서 乾坤竝建의 이치로 보았다. 또한 이러한 건곤의 운동원리인 錯綜은 특정한 원칙이 미리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사사로운 뜻으로 變易의 필연성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氣의 動靜에 의해 자연적으로 條理가 생기는 것이며, 天下의 이치도 氣의 動靜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왕부지는 우주본체인 氣의 운동ㆍ변화에 의해 兩儀, 四象, 8괘, 64괘, 384효가 형성되기 때문에 64卦象의 次序와 重卦의 형식을 모두 자연적인 현상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주장은 純乾과 純坤이 竝立하는 곳에 易의 道가 있으며, 이 乾坤의 錯綜과 變易의 自己展開 과정을 통해 64괘가 생성된다고 하는 乾坤竝建과 錯綜의 合一을 의미한다. 이러한 왕부지의 氣一元論的 易學觀은 思想史的으로 볼 때, 그의 현실비판 및 실천중심의 학문관과 연관되어 있다. 즉 왕부지는 明왕조가 멸망한 원인이 程朱學과 陽明學의 空疎한 학문태도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왕부지는 漢代뿐만 아니라 宋ㆍ明代의 易學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다.

      • KCI등재

        유교경전해석학 : 『대학(大學)』의 해석학적 접근 ; 왕부지(王夫之)의 『대학(大學)』관(觀) -대학지도(大學之道),명덕(明德),심(心)을 중심으로-

        진성수 동양철학연구회 2010 東洋哲學硏究 Vol.63 No.-

        比較分析代表宋學的朱子與淸學的王夫之的思想, 有助於了解中世與近世中國儒學史的演變過程. 因此本論文設定『大學』的核心槪念爲``道``與``德行``·``心``, 集中討論了朱子與王夫之對道·明德·心的解釋, 幷探討了王夫之『大學』觀在思想史上的意義. 王夫之對``大學之道``·``明德``·``心``的解釋, 主要集中在『大學』的經一章, 這一點通過『讀四書大全說』·『四書訓義』·『禮記章句』可知. 然而『四書訓義』大致根據『大全說』, 幷且『禮記章句』也照樣收錄了朱子的『大學章句』. 因此本論文以『讀四書大全說』爲中心, 分析了其對``大學之道``·``明德``·``心``的解釋. 王夫之主張``大學之道``是``確立善而警戒不善``, 卽『大學』的目的爲``鞏固學問之道``. 從而王夫之認爲唯在明明德的前題下能구新民. 這反映了他視『大學』爲修養與學問之文本的立場. 此外, 王夫之把朱子註視爲定本, 理解``明德``爲``心``. 但他主張朱子所說的心是本心, 幷不是八條目之一的正心之心. 然而, 他在晩年就如朱子一樣, 理解明德爲心, 主張做爲明德的心應以工夫來顯現出來. 我們通過王夫之的『大學』觀, 了解到其哲學思想在思想史上的意義. 其主張大致可歸納爲如下二點: 第一, 人是宇宙中唯一的主體性·主動性的存在. 第二, 以明德爲中心, 說明內在修養與實踐是開創歷史的動力. 從這一方面來看, 可說王夫之完成了實用性的學問體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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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夫之의 비판적 『노자』 해석과 그 한계에 관한 고찰: 『老子衍』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이석명 한국도교문화학회 2022 道敎文化硏究 Vol.56 No.-

        본 논문은 明末 淸初의 유학자 왕부지가 남긴 『老子衍』에 관한 연구다. 왕부지는 망국의 원인이 공리공론을 일삼던 당시의 사상체계에 있다고 보고, 이를 비판하기 위한 일환으로 『노자연』을 저술하였다. 따라서 『노자연』은 주로 비판적인 관점에서 저술된 『노자』 주석서다. 이를 논자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보았다. 첫째, 道論이다. 왕부지는 道를 초월적인 것으로 여기는 듯한 노자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道는 物과 분리되지 않고 物에 先在하지 않으며, 道와 物은 상호 영향을 미치고, 道의 유용성은 物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 등을 주장한다. 둘째, 無爲論이다. 왕부지는 노자가 지향하는 무위적인 삶의 태도를 비판하며, 이를 위해 『노자』에 언급되는 소극적인 태도, 至人의 모습 등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셋째, 仁義禮智論이다. 현행 왕필본 『노자』에는 유가의 仁義禮智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 적잖이 보이는데, 왕부지는 그러한 노자의 발언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하나씩 밝히고 비판한다. 『노자연』에 나타나는 이상과 같은 내용은 老學史에서 대표적인 비판적 『노자』 주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왕부지는 노자 비판을 위해 『노자』 本意을 일부 왜곡하였다는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본 논문은 明末 淸初의 유학자 왕부지가 남긴 『老子衍』에 관한 연구다. 왕부지는 망국의 원인이 공리공론을 일삼던 당시의 사상체계에 있다고 보고, 이를 비판하기 위한 일환으로 『노자연』을 저술하였다. 따라서 『노자연』은 주로 비판적인 관점에서 저술된 『노자』 주석서다. 이를 논자는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 보았다. 첫째, 道論이다. 왕부지는 道를 초월적인 것으로 여기는 듯한 노자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道는 物과 분리되지 않고 物에 先在하지 않으며, 道와 物은 상호 영향을 미치고, 道의 유용성은 物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 등을 주장한다. 둘째, 無爲論이다. 왕부지는 노자가 지향하는 무위적인 삶의 태도를 비판하며, 이를 위해 『노자』에 언급되는 소극적인 태도, 至人의 모습 등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셋째, 仁義禮智論이다. 현행 왕필본 『노자』에는 유가의 仁義禮智에 대한 비판적 발언이 적잖이 보이는데, 왕부지는 그러한 노자의 발언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하나씩 밝히고 비판한다. 『노자연』에 나타나는 이상과 같은 내용은 老學史에서 대표적인 비판적 『노자』 주석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왕부지는 노자 비판을 위해 『노자』 本意을 일부 왜곡하였다는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 KCI등재

        孟子의 ‘浩然之氣’ 사상에 대한 朱熹와 王夫之의 관점 비교 ─『孟子集註』와 『讀孟子大全說』의 ‘浩然之氣’章을 중심으로─

        이철승 한국유교학회 2014 유교사상문화연구 Vol.57 No.-

        朱熹와 王夫之는 맹자의 ‘浩然之氣’ 사상에 대해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낸다. 주희와 왕부지는 義를 축적하여 생기며, 道와 義에 짝하는 ‘호연지기’를 곧음으로 배양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이지만, 志와 氣 및 養氣와 知言의 관계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주희는 氣보다 志를 중시하는 면에서 志의 지도 아래 氣가 배양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왕부지는 道와 깊게 관계하는 志를 氣보다 앞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氣에 의탁하여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그는 志가 비록 氣를 지도할 수 있지만, 志가 氣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氣를 소홀히 여긴다면 志가 얻을 것도 없고 이룰 것도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왕부지는 주희처럼 義를 회복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날마다 생기는 것으로 여기며, 이 義와 관련되는 氣도 날마다 생기는 것으로 여긴다. 그에 의하면 날마다 생기는 지극히 크고 굳센 바른 氣를 날마다 배양해야 두려움이 없고 유혹에 동요되지 않는 맹자의 ‘不動心’을 이룰 수 있다. 또한 養氣와 知言의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 주희와 왕부지의 견해가 일치하지만, 知言을 養氣의 전제로 생각하는 주희와 養氣를 통한 知言을 말하는 왕부지 사이의 견해 차이가 있다. 주희는 ‘마음을 다하고 性을 다하는’ 경지인 知言을 갖춘 상태에서 ‘호연지기’를 배양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만, 왕부지는 知言을 義를 축적하지 않은 초학자가 시작하는 단계가 아니라 聖人이 도달한 경계로 여긴다. 그에 의하면 養氣는 맹자가 말하는 ‘참됨을 채워서 빛남이 있는’ 경지이고, 공자가 말하는 ‘함께 설 수 있는’ 경지이다. 그리고 知言은 맹자가 말하는 ‘커서 변화하는’ 경지이고, 공자가 말하는 ‘權道를 행할 수 있는’ 경지이다. 이처럼 養氣를 통한 知言의 경지를 말하는 그의 시각은 下學으로부터 上達에 이른다는 방법론의 반영이다. 또한 주희와 왕부지는 공자 배우기를 ‘호연지기’의 지향점으로 생각한 면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이해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곧 그들은 공자를 ‘仕, 止, 久, 速’한 사람으로서, ‘때에 맞게 하는[時中]’ 聖人이라고 평가한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 주희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왕부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왕부지에 의하면 백이와 이윤은 공자와 같이 養氣의 단계에 이르렀지만, 知言의 단계에 이른 사람은 공자뿐이다. 왕부지는 공자가 모든 일을 ‘때에 맞게’ 하는 權道를 행할 수 있었던 원인을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下學의 공부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면 ‘호연지기’를 지극하게 배양하면 세상의 이치를 다 구현함으로써 세상의 是非와 得失이 다 나에게 권도가 된다. 이처럼 왕부지는 ‘호연지기’의 지향점을 공자를 배우고자 하는 것으로 여기고, 공자를 배우고자 하는 내용을 養氣를 통한 知言의 경지로 생각한다. 결국 ‘호연지기’ 사상에 대한 주희와 왕부지의 이러한 견해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은 각각 세상의 기원을 선험적인 불변의 理로 여기며 현실의 문제를 理의 현현으로 해결하려는 주희의 리철학적 관점과, 세상의 기원을 움직이고 변화하는 氣로 여기고 理를 기의 조리로 여기며 구체적인 경험으로부터 추상적인 원리를 도출하려는 왕부지의 기철학적 관점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 KCI등재

        17세기 동북아시아 "장자" 주석의 현실 대응론 왕부지와 박세당의 제물론 "명(明)" 해석과 현실 대응론을 중심으로

        조한석 ( Han Suk Cho ) 한국철학사연구회 2016 한국 철학논집 Vol.0 No.49

        『장자』 『제물론』 해석 과정에서 왕부지와 박세당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명(明)’ 해석을 진행하고 있다. 왕부지는 『제물론』에 세 번 등장하는‘명’ 가운데 앞의 첫째와 둘째 ‘명’을 ‘일곡지명’으로 규정하여 시비대립의 주체들의 편견으로 지적하여였다. 그리고 세 번째 ‘명’을 ‘편조지명’·‘진지지명’으로 규정하고 그 작용적 특징을 ‘활의지요’로 설정하였다. 반면 박세당은 세 차례 등장하는 ‘명’을 동일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그 특징을 ‘천리지명’·‘천리지공’으로 규정하는 한편 왕부지가 강조했던 ‘활의지요’는 ‘명에 의한 교화 대상’으로 그 의미를 제한하였다. 또한 『제물론』 본문 ‘이시기소비이비기소시(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부분에서 보이는 왕부지의 해석은 『장자』 『제물론』 원문의 의미 변형을 동반하고 있다. 비록 단편적 사례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부분들을 통해서 『제물론』 해석의 다양한 측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왕부지와 박세당의 ‘명’ 해석은 그들의 현실 대응론으로 연결되어 양자 간 사상적 차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금석 역할을 한다. 곧 ‘『제물론』 명 해석이 왕부지와 박세당의 현실 대응론에 응용되고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중심 가설이다. 왕부지와 박세당은 17세기 동북아시아의 격변기를 삶의 무대로 활동한 사상가로서, ‘이 두 사람의 『제물론』 독특한 명(明) 해석이 각자의 현실 대응론에 응용되고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중심 가설이다. 명의 유신을 자처하며 평생 반청의식을 고수하면서 ‘명 멸망의 원인’에 대한 역사적회고에 전념했던 왕부지는 국내 정치에 대해서 강경한 원칙적 대응을 자제하고 현실의 유동성과 상황의 가변성에 입각한 대응, 곧 상황에 따라고안되는 임시 원칙의 활용’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현실 대응론은 『장자』 『제물론』 해석 과정에서 ‘편조지명’과 ‘활의지요’로 그 특징이 압축된다. 한편 17세기 조선 정계에서 서인 소론으로 활동했고, 정계 은퇴 이후에도 줄곧 서인 노론과의 정쟁을 이어갔던 박세당의 경우는 ‘활의지요’를 강조했던 왕부지와는 판이한 양상을 보인다. 우선 『장자』 『제물론』 해석 과정에서 박세당은 ‘활의지요’에 제1의적 지위를 부여하지 않고 ‘명에 의한교화의 대상’으로 그 의미를 강등하여 해석했다. 또한 박세당은 ‘명’을 ‘천리지명’·‘천리지공’으로 해석하여 ‘공명성에 의거한 원칙적 현실 대응론’을 주장하였으며, 이는 그의 ‘대청외교론’에도 적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할 수있을 것이다. 결국 『제물론』 ‘명’ 해석과 ‘시비 대응론’을 기준으로 왕부지와 박세당의 현실 대응론을 정리하면, 왕부지는 ‘현실의 유동성에 입각한 탄력적 대응’을 강조하였고, 박세당은 ‘공익에 우선적 가치를 두는 원칙적대응’을 중시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The theme of this disquisition is the analysis of Zhuang Zi Qi Wu Lun``s Ming of Wang Fu Zhi who China in the late Ming Dynasty and Park Sae Dang who Korea in the late Chosun Dynasty. Wang Fu Zhi and Park Sae Dang of the interpretation has each feature. There are three Ming in Zhuang Zi Qi Wu Lun. At first Wang Fu Zhi was only truly recognized third of three Mings. Ironically, he was truly one interpret Ming is Ming, not Ming(滑疑之耀). This means that he is flexible in response to the political events of reality. In order to establish this interpretation, he modified the original sentence(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of Zhuang Zi Qi Wu Lun. This interpretation is a very special case in the History of Zhuang Zi commentary. In contrast, Park Sae Dang was interpreted to mean all of the three Mings in Zhuang Zi Qi Wu Lun. Unlike Wang Fu Zhi, Park Sae Dang interpreted Ming based on objective truth and that Ming is possible to determine the affair. Park Sae Dang claimed that as a rule do not respond flexibly respond to the political events of reality. Based claims Park Sae Dang can do this is because he interpreted MIng by the public principle. And Wang Fu Zhi highlighted Ming, not Ming(滑疑之耀) was interpreted by her as the object of edification. He eventually Ming in Zhuang Zi Qi Wu Lun was interpreted as Principles of the political incident response(天理之公). Wang Fu Zhi(王夫之) and Park Sae Dang lived a different life in 17 Century Far East. Wang Fu Zhi devoted his life to academic research without political experience. However, Park Sae Dang was involved in the academic and political sides. Different lives of Wang Fu Zhi(王夫之) and Park Sae Dang is evident in the interpretation of Ming in Zhuang Zi Qi Wu Lun.

      • KCI등재

        논문(論文) : 왕부지(王夫之) 기철학(氣哲學)의 특징(特徵)에 관한 연구 -성리학(性理學)에서 기철학(氣哲學)으로의 선회(旋回)를 중심으로-

        진성수 ( Sung Su Chin ) 한국한문고전학회(구.성신한문학회) 2008 漢文古典硏究 Vol.17 No.1

        왕부지의 氣哲學은 기본적으로 明末·淸初의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의식과 경세사상에 기초하고 있다. 즉 明왕조의 멸망 원인을 空疎한 학문풍토로 인한 사상적 혼란 때문이라고 본 왕부지는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실천을 강조하는 이론체계를 구상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으로 출발한 왕부지의 철학사상은 經學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이 과정에서 그는 漢代와 宋代의 학문풍토를 비판하고 張載의 氣哲學을 계승하였다. 왕부지는 張載의 一物兩體說을 계승하여 陰陽이라고 하는 두 가지 운동·변화를 강조하며 陰陽二氣를 상호 대립적인 존재가 아닌 一氣로의 통일을 전제로 한 하나의 본체로 보았다. 또한 왕부지는 一物兩體說을 통해 자신의 철학체계의 골간을 이루었던 기일원론적 역학관을 정립하였다. 즉 氣의 두 가지 존재양태인 陰陽이 『주역』에서는 乾·坤卦가 되어 모든 현상의 두 가지 변화를 상징하게 된다는 것이다. 왕부지 기철학의 특징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주학의 도덕수양 중심의 학문관 뿐만 아니라, 道家의 虛無說과 佛敎의 寂滅說 등을 부정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이념적 추상세계로부터 구체적 현상세계로 관심을 전환하여 사대부로서 明왕조의 멸망에 대해 반성하고, 보다 구체적이며 실용적인 학문을 지향하기 위함이었다. 둘째, 程朱學的 理學體系의 역사적 한계를 인식하고 張載의 氣哲學을 계승하여 氣一元論을 완성했다는 점이다. 즉 漢代·宋代의 철학사조에서 정통 유학의 명맥은 오직 장재의 一物兩體와 易學思想에 있다고 평가하고, 기일원론을 중심으로 유학적 원리를 확고히 세우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왕부지의 氣哲學은 도덕수양과 理중심의 程朱學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실천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철학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易學思想을 `理的易學에서 氣的易學으로 旋回`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왕부지의 기철학은 이후 道器一貫으로 집약되어 `천하에는 오직 器뿐이다[天下惟器]`라는 명제로 정립되면서 氣一元論的 특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것은 思想史的으로 볼 때, 淸代 氣學과 實學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한 선언이었다. Wang Fu-zhi meant to rehabilitate the learning of Chinese Classics(經學) having its roots in ideology and value of orthodoxy Confucian school during the transitional period from Ming to Qing and his thought was formed in the process of transition, from li-centered to qi-centered value system. Wang Fu-zhi criticized the moral cultivation theory of xing li learning and Yang-ming learning and asserted that `acting` should be focused on the moral cultivation and learning. This became a principle moment for him to from xing li learning to qi philosophy. Wang Fuzhi`s criticism was not on xing ji li (Nature is priciple 性卽理), but on logical contradiction of Cheng-Zhu learning`s moral cultivation system. In other words, he pointed out the logical weakness that dualized realm of qi may deteriorate into formalism. On the other hand, his criticism on Yang-ming learning, different from Cheng-Zhu learning`s point of view, is focused on xing ji li itself. This was because of his historical valuation on Yang-ming learning. He laid responsibility on Yang-ming learning, which has similar logics to heretical Daoism·Buddhism, on ideological chaos and the fall of Ming. As mentioned above, Wang Fu-zhi`s criticisms on Cheng-Zhu learning and Yang-ming learning are different in detail. Yet it means the transition of value system from `li`-centered to `qi`-centered. Wang Fu-zhi succeeded and developed Zhang Zai`s qi philosophy, established yi qi (一氣) as a moving noumenon(本體) and completed qi de yi xue (氣的易學) based on qi yi yuan lun (氣一元論). Wang Fu-zhi complemented the logical problems of Zhang Zai`s qi philosophy and established his own qi yi yuan lun. In this process, he completed his view on yi learning which is based on qi yi yuan lun. Wang Fu-zhi asserted that the true essence of the nature and human beings is yi qi(一氣), yin yang er qi(陰陽二氣) filled tai xu(太虛), the principle of the change is mysterious and marvelous so that it is hard to understand, and the harmonious state of yin yang er qi is tai xu. The reason he analyzed the world focusing on yi qi was that his philosophical interest shifted from abstract to concrete while he was analyzing the cause of the fall of Ming Dynasty. Therefore, he criticized the limits of Cheng-Zhu learning, succeeded qi philosophy of Zhang Zai and completed qi yi yuan lun. As a result, qi characterized his thought on I-Ching. Afterward, based on his view, terms, `dao qi yi guan(道器一貫)` and `tian xia wei qi(天下惟器)` were established.

      • KCI등재

        왕부지(1619-1692)의 진,송 교체기 이해

        이윤화 ( Lee Yun Hwa ) 중국사학회 2004 中國史硏究 Vol.28 No.-

        王夫之的史論以人性爲中心對具體的歷史現象加以批評. 同時也以政論性見長. 『讀通鑑論』和『宋論』是王夫之對『資治通鑑』重視經世性的論述. 所以, 有人認爲對王夫之. 歷史就是政治史. 構成以人性爲中心的現實政治的內涵的政論與政治敎化密節相關. 所以, 不僅君道·國是·民情·邊方·臣誼·臣節等等. 而且士人的道德心, 學問的態度都成爲王夫之史論的對象. 王夫之史論的基本性格通過對于晉宋之際一些歷史現象的評價表達出來. 在關于東晉之亡國論的評價中. 王夫之主張君臣共同責任論. 他特別强調國家政治的根本是用人和行政, 而타們主宰權都歸于君主. 這表現出王夫之對于君主具有흔强的希望. 但是, 령一方面, 如果君主??負了希望. 成爲昏君或暴君, 王夫之反而主張放伐論. 所以王夫之主張的是有條件的尊君論和相對的君權論. 在此基礎上, 王夫之對君主和王朝交替進行了開放性的考察. 從而表現出思想的進步性. 王夫之通過晉宋正統論對邊方, 夷夏區別等問題的論述. 對明末淸初的現實社會提出警告. 所以, 古今之通義超越了君臣之義基本信念, 王夫之積極評價劉裕北伐論的歷史意義. 王夫之的華夷論旣有以往華夷區別的一般特徵. 還別强調對外抗爭勝利的歷史意義, 以此對自己所處的時代提出警告和期望. 通過對交替期人心向背的正確分析, 王夫之銳利的指斥現實政治中劉裕的????和政治慾望. 王夫之洞察了環繞于時勢中的現實政治的本質, 王夫之對于土斷法實施的歷史背景的了解不甚全面. 但是, 他論述中除了前人所設的賦稅問題, 還提到選擧問題, 這具有重要的意義. 王夫之認爲, 劉裕殺奚恭帝與其門閥背景有關: 顧明大臣所謂的廢昏立明的政治劇的歷史特點與帝位私護的做法有關. 這是王夫之史論批評中的新??之處. 王夫之認爲私??是晉宋之際歷史人物當中機變,無定情的典型, 由此我們可以知道王夫之對那一類人持最爲否定的態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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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부지의 中華의식, 그리고 移住와 문화융합에 대한 이중성

        이춘복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013 중앙사론 Vol.0 No.37

        在批判的吸收前人硏究成果的基礎上, 作者關於王夫之的中華認識及其對移住與文化融合的二律背反問題進行了深入探討。筆者基本上具有王夫之的中華思想與淸末民族主義思想有着一脈相承的連繫。基於如此認識, 以近代文化民族主義的構成要因爲尺度, 對於王夫之以空間·時間·血緣·習俗·集團·文化爲尺度所區分的華夷之辨和其對於華夷的徙民和文化融合持各不相同立場進行了分析和檢討。通過硏究結果, 我們觀察到王夫之的華夷峻別具有了類似於包涵了空間·血緣·習俗·集團·文化等中國近代文化民族主義之要因。就其時間而言,王將先秦的夷狄和秦漢以後的夷狄嚴格區分開來, 認爲先秦的戎狄和夷狄並不是‘天下萬世’或‘秦漢以下爲中國患者’的夷狄, 而是暫時的夷狄(中國之流民); 秦漢以後所出現的匈奴·鮮卑·突厥·奚·契丹·女眞·蒙古才是蹂躪並占據九州的眞夷狄。就其空間範疇而言, 王將邊疆以塞內和塞外嚴格區分開來, 其所說的中國·中區·九州等塞內有如下, 北端大體上一致於萬里長書以內:南端大體上一致於廣西·廣東:東端大體上一致於廣東·福建·浙江·山東·下北以東的淵海; 西端大體上一致於甘肅四川陝西貴州雲南以西。其次, 就其血緣而言, 王將華夷的血緣上所區分的尺度放在中原王朝對於夷狄集團的賜姓,冒姓以及與夷狄的婚姻。以此爲尺度, 王批判了夷狄王朝的正統性, 警告了由華夷的雜居所生的血緣·風習·文化等認同的混亂和漢族國家的危害。最後, 就其文化而言, 王將文化所區分的尺度放在具有衣冠的仁義禮樂與否, 認定認中華具備了此尺度, 與此相反, 夷狄不具備此尺度。與此同時, 通過硏究, 我們看到了王夫之對於秦漢以後中華和夷狄的徙民和用夏變夷問題提出截然不同的立場。首先,從秦漢以來因夷狄亂入中國而蹂躪和掠奪所産生的警戒心和懼怕心出發, 王夫之提出內地中國人遷移到邊疆或秦漢以來所設置的邊郡的徙民的政策,以便邊防强化和豫防夷狄入侵。就用夏變夷而言, 王所設想的王化對象, 在時間上包涵了先秦時代所稱的夷狄和流民, 在空間上包涵了邊疆和九州以內, 而排斥秦漢以來在塞外威脅中國的匈奴·契丹等北方族群。就其具體方法而言, 王提出了對於包括福建·廣東等中國的東南地區和邊疆地域施行以中華爲中心的用夏變夷的敎化。與此同時, 王提出該地域設置郡縣, 並採取安定民生和救濟等的適當政策, 將其看做堅實邊防的强化措置。最後, 筆者檢討了王夫之對於秦漢以後在塞外的夷狄遷移到境內的徙民和各種流入以及對夷狄的用夏變夷如何處理問題。就夷狄在境內的人的往來而言,無論夷狄遷移到境內的移住,還是因中國內部反亂所産生的結盟, 對於任何形態夷狄的境內流入王都採取了一槪否定的態度。不僅如此, 對於夷狄的朝貢往來和因中國的對外戰爭的結果流入到境內也王都持了堅決反對的立場, 以便事先豫防夷狄乘流入到境內的期會來侵害和蹂躪中國而最終導致中國的滅亡。對於夷狄的用夏變夷而言, 王不將秦漢以來夷狄看做用夏變夷的敎化對象。因爲如此, 無論夷狄王朝的任何漢化政策還是和投降的漢族文人在夷狄所實行的敎化和同化, 王將這些漢化政策比喩成“夫驢母馬,其生其爲騾, 騾則生絶矣, 上雜而而類不延”, 進而其對於夷狄的任何漢化政策從根本上採取否定立場。作爲中華和夷狄的最好關係, 王提出了相好不可侵和相互尊重的原則。相好不可侵就是他所設的“彼無我侵, 我無彼虞, 各安其紀而不相瀆”的原則, 相互尊重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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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夫之 四書學의 특징과 淸代 實學으로의 전환

        진성수 한국동서철학회 2018 동서철학연구 Vol.0 No.90

        This study examines the process in which Wang Fuzhi(王夫之)’s Sishuxue(四書學) was created and has transitioned to Shixue(實學) in the Qing Dynasty. With this goal in mind, the study examines the intrinsic relationship between Wang Fuzhi's Shixue and Bentilun(本體論) and reviews the characteristics of Jingshilun(經世論) and self-discipline. The philosophical thought of Wang Fuzhi, a scholar who succeeds from the Ming Dynasty, has a clear purpose. Therefore, his Jingshilun(經世論) is rooted in strong ethnic awareness and has a yearning for building a new nation through studies that has practical contribution to the society (經世致用). Wang Fuzhi felt strong need for a new worldview and completed Qi-monism(氣一元論) by succeeding Zhang Zai’s Qi philosophy(氣哲學). Based on Qi-monism, Wang Fuzhi criticized theories of Song Ming Lixue(宋明理學), Taoism, and Buddhism and attempted to unify ‘Moral(道德) and Jingshi(經世),’ which was age-old unresolved issue of Confucianism. In this process, Wang Fuzhi criticized "existent but immovable universe," the main theory of the Cheng Zhu Lixue(程朱學) and presented a new world view that believes in the "moving universe body". Based on this, Wang Fuzhi completed the new methodology of classical learning(經學) and self-discipline that emphasized actual practice rather than knowledge. The critical mind of Wang Fuzhi, which started from with an aim to reform the reality, eventually developed into Jingshilun(經世論) and self-discipline that emphasized people’s active practice after going through series of criticism of Song-Ming Lixue(宋明理學). From this point of view, Wang Fuzhi's Sishuxue can be argued to be a turning point in the transition to the Shixue of the Qing Dynasty which has heavy emphasis on practicality. 본 연구에서는 왕부지 四書學의 형성과정과 淸代 實學으로의 전환과정을 검토하였다. 이를 위해 왕부지 經學과 本體論의 내재적 연관성을 살펴보고, 經世論 및 修養論의 성격을 검토하였다. 明朝의 遺臣이었던 왕부지의 철학사상은 大義名分的 성격이 매우 강하다. 따라서 그의 경세론은 강한 민족의식에 기초하고 있으며, 經世致用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겠다는 염원이 담겨있다. 이에 왕부지는 새로운 세계관의 필요성을 자각하고 張載의 氣哲學을 계승하여 氣一元論을 완성했다. 기일원론을 토대로 왕부지는 宋明理學과 老佛을 비판하고, 儒學의 오래된 과제였던 ‘道德과 經世’의 合一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왕부지는 ‘존재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우주’라는 程朱學의 본체론을 비판하고, ‘움직이는 우주 본체’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했다. 이를 바탕으로 왕부지는 지식보다 실천을 강조한 새로운 경학방법론과 수양론을 완성하였다. 현실개혁에서 출발한 왕부지의 비판의식은 결국 宋明理學에 대한 비판을 거쳐 인간의 능동적 실천을 강조하는 경세론과 수양론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왕부지의 四書學은 실용성을 강조한 청대 실학으로의 전환기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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