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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 평안도의 문화변동과 지역민의 동향

        河明埈(Ha, Myung-joon)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5 역사문화연구 Vol.56 No.-

        18세기 후반 평안도 사회는 종래 京鄕分岐에 입각한 京과 鄕의 양극화된 설명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질적 변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평안도는 고조선을 거쳐 고구려와 고려의 도읍지였던 경험과 전통을 가진 지역이었다. 이처럼 일정 부분 ‘京’으로서의 면모를 지니고 새롭게 전개되는 상황 속에서 평안도의 지역 문화와 지역민의 동향도 그만큼 이전 시기에 비해 다른 차원에서 개진될 공산이 커지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서 평안도 사회에서 자기 지역 문화에 대한 전통을 정리·발굴하고 그 가치를 음미하거나 재조명하는 양상이 군현 단위로 강하게 대두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16세기 말 평양을 필두로 몇몇 군현에서 간헐적으로 편찬되던 읍지가 18세기 후반~19세기 전반에는 각 군현마다 고르게 작성되었는데, 이는 본질적으로는 지역 내에서 인물과 재력 등 제반 역량이 갖추어지고,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선양하려는 인식 등이 뒷받침되었기에 성사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군현과 군현 간에 지역사 인식이 충돌하여 평안도 사회에 균열이 야기되는 사태도 발생하였다. 군현마다의 개별적·독자적 문화 성장으로 평안도의 문화 역량이 증대되는 가 운데 道外 다른 지역과의 관계도 재설정되고 있었다. 평안도 유생들은 대체로 18세기 전반까지는 三南地方과의 對比를 통해 지역 사정을 호소하거나 지역의 요구를 제시하곤 하였다. 그러나 경향분기가 극대화되는 추세에 따라 점차 삼남을 넘어 권력이 집중된 서울과의 대결 의식을 전면화하는 경우가 많이 나타났다. 홍경래 난(1811)을 위시해서 19세기 전후에 평안도인에 의해 주도된 각종 반역·반란 사건에서 그러한 면모를 뚜렷이 목도할 수 있다. 그런데 反京勢力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러한 부류와는 달리 체제 내에서의 지위 상승을 도모하는 세력도 존재하였다. 이들은 문과 급제에 부심하고, 족보와 문집 등을 대대로 편찬하면서 외형상 경화사족과 같은 벌열로서의 모습을 구축해 나가다가, 홍경래 난을 맞이해서는 ‘忠義’를 생존전략으로 삼아 反京 활동을 진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따라서 19세기 전반 평안도 사회를 격동시킨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 지방을 공통 지반으로 하는 反京세력과 忠義세력이 격돌하는 場이 되었다. 여기에서 후자가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忠義는 평안도 사회를 운영·지배하는 강력한 명분과 노선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렇게 향촌 지배권을 장악한 충의세력은 善의 강조와 相互扶助, 지역 적폐를 해소하기 위한 三政策의 제시와 실천 등을 통해 홍경래 난 진압 이후의 지역간 내부 갈등과 분열을 수습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19세기 후반 평안도 문인의 중앙 진출이 보다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었던 계기는 이와 같은 토대에서 마련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Recent studies have focused on the divergence between Seoul and other regions("京鄕分岐") in understanding P’yŏngando society, a phenomenon which prevailed throughout 18, 19 century choson, An example can be found in the typical explanation of Hong Kyŏngnae Rebellion as a rebel against central concentration and monopolization of power and wealth. However, Pyŏngan society at that time was not only exposed to the circumstance of 'regional discrimination' but was also undergoing a substantial change following the steps of Seoul. It is fair to say that P’yŏngando was growing to show several aspects of ‘the capital(京)’, and there was increasing probability that regional culture and local movements were about to advance toward another direction. This regarded, it is worthy to note the ascending trend of unearthing and organizing cultural traditions of their regions and of savoring and illuminating their values, which was integrated in the compilation of upji. Upji compilation was possible due to the expansion of human and material capacity and the support of regional consciousness. However the abundance in cultural capacity and the growing individuality of provinces also became a cause of regional diversion and rupture which resulted in numerous conflicts and challenges among provinces. As the gap between Seoul and the other regions widened, Pyongando also started to express a defiant stand against the powerful and wealthy Seoul. This is evident in various rebellions leaded by people of P’yŏngando around 19th century, represented by the Hong Kyŏngnae Rebellion. On the contrary, there was also a group of people seeking an elevation in their social rank inside the existing system(anti-capital forces, 反京勢力). Showing striking resemblances with the central aristocratic family status(閥閱), they made substantial efforts to pass the civil service exam and to compile family genealogies(族譜) and collections of literary works(文 集). They also adhered to a position suppressing the rebellion(‘義兵’) with loyalty(忠義) as their survival strategy. In this view, Hong Kyŏngnae Rebellion in 1811 can be read as a collision of the anti-capital and loyal forces both based on P’yŏngando. The triumph of the later gave loyal forces a strong ground for advancing into the central government while justifying their rule and control over the Pyŏngan society.

      • KCI등재

        1895~1910년 평안도 사립학교 설립 과정과 주체

        임인재(Im In Jae) 한국사학회 2015 史學硏究 Vol.- No.120

        본 연구는 1895년부터 1910년까지 각종 자료를 통해 확인한 평안도 지역 354개의 사립학교를 분석한다. 이를 통해 평안도 사립학교의 설립과정, 설립 주체, 설립 취지 등을 규명하여 이 시기 평안도 교육의 실상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평안도에서는 이 지역의 독특한 사회․경제적 특징으로 인해 삼남지방과 같은 사족에 의한 향촌지배가 수립되기 어려웠다. 평안도의 향촌 지배층이었던 향인은 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세력도 지역 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평안도는 이러한 내부적 특성과 개신교라는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서양의 문물, 특히 서양교육으로 대표되는 신교육을 받아들이기 수월하였다. 따라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고, 다양한 교육 관련 활동이 나타날 수 있었다. 평안도 사립학교의 설립 과정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1894년부터 1900년까지는 사립학교의 형성기로 대부분 대도시를 중심으로 학교설립이 이루어졌다. 1901년부터 1905년까지는 사립학교가 점차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권회복과 실력양성을 주장하며 교육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사립학교 설립이 최절정에 이른다. 확인된 354개교 중 279개교가 1906년부터 1910년 사이에 설립된 학교이다. 이 시기 평안도의 대부분의 행정구역에 1개 이상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사립학교의 경우 학교 설립 취지서를 통해 학교 설립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다. 대부분 ‘문명개화론’과 ‘자강운동론’에 입각하여 학교 교육을 통해 힘을 키워 국권을 회복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실용지식이나 특수교육과 같은 각 학교의 고유한 목적을 가지고 설립을 추진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학교 설립 취지서를 학교의 재정 확보를 위한 광고의 목적으로 삼는 경우도 있었다. 평안도 지역 학교 설립에는 다양한 설립 주체가 등장하였다. 설립주체는 개신교 선교사 및 신자, 지방관, 그리고 유림, 향인, 상인 등으로 대표되는 지방유지로 나누어진다. 사립학교의 경우 위에 언급한 각각의 설립주체가 독립적으로, 혹은 둘 이상의 설립주체가 협력하면서 학교 설립을 진행하였다. 개신교 선교사의 경우 초기 학교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선교사들은 조선을 구제의 대상으로 파악하여 서구문명을 배워야 하는 존재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입장은 평안도에서도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평안도 내의 신교육의 습득이 매우 빠르게 전개되면서 차츰 민간계열이 학교 설립을 주도하는 형태로 전환되었다. 또한 1907년 이후부터 서북학회, 대한협회, 문화학회, 평북야소교학회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평안도의 사립학교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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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 굿 전승자료 몇 가지

        양종승(Yang, Jongsung) 한국무속학회 2014 한국무속학 Vol.0 No.29

        평안도 굿이라 함은 한국동란을 전후하여 월남한 평안도 무당, 악사, 단골들이 남한 땅에서 전승하여온 평안도 식 굿을 말한다. 본 자료는 한국동란 때 남한으로 월남하여 평안도 굿을 전승하였던 무당과 악사들의 구술와 그들의 굿자료들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본 자료를 통해 평안도 굿의 주요 맥락을 짚어보고 전승 현장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자료가 평안도 굿에 관심 있는 연구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기초적 자료가 되길 바란다. 자료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은 남한에서의 평안도 굿 전승, 남한에서 활동한 평안도 굿 만신과 술말이, 평안도 굿의 신악, 신춤, 신복 그리고 평안도 굿의 성황대제, 맞이굿, 재수굿, 다리굿 등에 관한 것이다. 주지하다 시피, 북한지역의 굿은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등 도 단위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무속연구자들의 안목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법에는 허점이 있게 마련이다. 이를 테면, 같은 지역의 굿이라 할지라도 동과 서 그리고 남과 북이 차별성을 갖기 때문이다. 특히 해변의 굿과 내륙의 굿은 확연히 분별된다. 동일 지역의 굿을 좀 더 세분하여 쪼개본다면, 시와 군의 것이 각각 다르고 또한 마을마다 다르게 행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 뿐만이 아니라 전승계보에 따라서도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 굿 문화이다. 이토록 굿 전승에는 지역이나 계보에 따라 많은 차이를 갖는 특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북한 굿은 남한 땅에서 전승되는 상황과 함께 실향민들로 구성된 단골들이 거의 세상을 떠났다. 월남한 1세대 구대만신(舊代萬神) 및 악사들 또한 작고하면서 자연스럽게 남한의 토질과 남한 사람 입맛에 맞게 바뀌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전승지역 및 전승담당층 변화는 이북 굿 다양성을 약화 시키는데 크게 일조하였다. 그러한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2007년에는 성황대제와 다리굿이 평안북도 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아 올바른 전승력을 갖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평안도굿의 문화재 지정은 굿 문화 다양성을 지속시키기 위한 것이라 여겨진다. 이에 연구자의 입장에서 그동안 변천과정을 겪어 온 평안도굿의 전승내용을 파악하는 일은 의미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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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 굿의 특징과 의의 연구

        김헌선(Kim, Heonseon) 한국무속학회 2012 한국무속학 Vol.0 No.25

        이 연구는 평안도 굿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목표로 한다. 평안도굿은 남북의 분단으로 말미암아서 전승이 단절되었지만 해방 이후나 남북전쟁 당시에 남으로 내려온 몇몇 집단에 의해서 굿의 실상과 전통이 전해져 그 전체적 윤곽을 짐작할 수가 있다. 평안도굿은 역사적 내력이 깊다. 동시에 굿의 실상이 서울굿을 이해할 수가 있는 긴요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 논문에서는 평안도 굿의 전반적 양상을 확인하고 이를 중심으로 평안도굿의 실상을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평안도굿과 서울굿이 상당히 일치하고 동시에 이를 통해서 평안도굿의 음악적 양상, 굿거리의 구성양상, 굿의 전반적 분포와 양상을 전달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평안도굿의 전통을 통해서 우리는 한국무속의 전반적 양상을 파악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점을 평가하면서 이를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평안도굿은 특별하게 서울이북의 전반적 양상을 알리는데 소중한 구실을 하게 된다. 한강이북의 서울?경기도북부?황해도?평안도 등지의 전체적 판도와 체계적 양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굿은 결정적 기여를 할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연구의 입체적 양상 이해를 위해서 이 지역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This study aims to understand the Pyeongandogut is an overview. Pyeongandogut in the north-south division of the sprout, but the liberation tradition disconnected during the Civil War down to the south by the gut in fact some groups and traditions handed down its general outline can be guessed. Pyeongandogut history is deep Pyeongandogut of the historic. Pyeongandogut at the same time were able to comprehend the fact that Seoul is the most critical is. In this paper, the overall pattern of gut check and Pyeongandogut in the center of it though there were efforts to inform the reality of Pyeongandogut. Pyeongandogut and fairly good match in Seoulgut and Pyeongandogut at the same time through this, good musical aspect, the configuration aspects of rituals, the overall distribution pattern of gut core that has been passed. Good tranquility us through the tradition of shamanism in Korea to identify the overall patterns are showing an essential aspect. In assessing this point, I think it’s important to notify. Though there is Pyeongandogut especially in the north of Seoul, to inform the overall pattern will be a valuable excuse. Han River in Seoul, Gyeonggi, Hwanghae Province, Pyeongando and elsewhere in northern and systematic aspects of the overall landscape Pyeongandogut crucial in understanding the two numbers is thought to be able to contribute. In order to understand three-dimensional aspect of the study of this region should be activ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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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대∼1960년대 초반 평안도 출신 『사상계』 지식인층의 사상

        김상태 한국사상문화학회 2008 韓國思想과 文化 Vol.45 No.-

        지금까지 한국 근현대사 연구자들의 지역사 연구는 특정 지역의 총체적 지역 특성에 대한 분석보다는 개별 주제의 지역사례 연구에 초점을 맞춰왔다. 한국의 각 지역을 면밀히 살펴보았을 때 지역 특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던 지역으로 근대의 평안도를 들 수 있다. 평안도는 신흥 상공인층과 근대적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개신교를 적극 수용하고 實力養成論에 입각한 자본주의 근대화를 지향하여 우익진영의 중심지가 되었다. 해방 후 평안도에서 남한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興士團, 朝鮮民主黨, 西北靑年會 등을 중심으로 우익ㆍ친미ㆍ반공 이념을 일관되게 견지하면서 분단체제 형성을 주도하였다. 1950년대의 대표적 학술ㆍ시사잡지였던 『思想界』의 중심 세력도 평안도 출신의 지식인들이었다. 발행인 장준하를 비롯하여 안병욱ㆍ김준엽ㆍ양호민ㆍ지명관 등 역대 편집주간과 편집위원 50명 중 20명이 평안도 출신이었다. 함석헌ㆍ신상초ㆍ김창순 등 주요 필자도 평안도 출신이었다. 요약하면 『사상계』는 평안도 출신 지식인들의 학술ㆍ시사잡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興士團이나 朝鮮民主黨의 중심세력보다 한 세대 아래의 신진 인사들로서, 평안도 출신 지식인층이 남한 사회에서 학술적으로 1950년대 냉전 이데올로기를 선도한 세력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였다. 본 논문에서는 평안도 출신 『사상계』지식인층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해 살펴보았다. 평안도 출신 『사상계』 지식인층은 언론활동을 통하여 자유와 민권, 주권재민, 언론ㆍ사상의 자유 등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강조하면서 이승만ㆍ자유당정권의 장기독재와 부정부패를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195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이승만ㆍ자유당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직접적인 저항, 즉 ‘혁명’을 촉구하기도 했다. 결국 그들은 4ㆍ19혁명을 이끌어내는 데 일정 정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민주당에 대한 오랜 불신으로 말미암아 4ㆍ19혁명과 제2공화국을 부정한 5ㆍ16의 정당성을 인정하여 ‘군사혁명’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근원적 배경은 그들의 철저한 친미ㆍ반공 성향이었다. 그들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소유자들이었다. 미국은 대한민국의 우방이요 은혜를 베푸는 존재였고, 공산주의사상과 소련은 사실상 ‘악마’에 해당하였다. 그들에게는 중도파도, 혁신 정치세력도, 중립화 통일논의도 모두 ‘적’이었다. 자유민주주의야말로 통일에 우선하는 절대적인 가치였다. 결국 평안도 출신의 『사상계』 지식인들은 실제적으로는 반공 보다 자유민주주의를 상위 개념으로 설정하는 데 실패하였다. 민주주의가 반공과 승공의 전제조건으로 인식되는 한, 반공과 승공을 위해서는 민주주의의 희생도 완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민주당정권의 무능 속에 공산주의에 대한 일정 정도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군부 쿠데타를 승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요약하면 1950년대의 대표적 학술잡지로 자리잡은 『사상계』의 전반적인 논조 역시 철저한 냉전이데올로기 속에서 반공 친미 성향을 유지하였으며, 그것이 5ㆍ16을 인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So far 'Region studies', by scholars studying the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Korea, have usually focused upon examining regional situations in terms of particular topics, rather than examining all the characteristics featured by a particular region and presenting a general analysis of that region. Careful examination of all the regions in Korea reveals that the region that featured the most peculiar and distinctive characteristics, was the Pyeongan-do province in the modern era. In the Pyeongan-do province, new-coming merchants & industrial personnel and also modern intellectuals embraced Protestantism, and established the region as the central base for right-wing figures aiming for a Capitalist modernization based upon the argument of 'building strength first('實力養成論')'. After the liberation, people who moved from this province to South Korea played a leading role in establishing and reinforcing the state of division on the Korean peninsula, by firmly maintaining their right-wing, pro-U.S., and anti-Communist ideology, through activities in several organizations such as Heungsa-dan/興士團, Joseon Democratic party(朝鮮民主黨), and the Seobuk(Northwest) Youth group(西北靑年會). The central inner circle behind 『Sasang-gyae/思想界(The Intellectual Society)』, which was a renowned and also representative academic and current-issue magazine in the 1950s, was also composed of intellectuals who hailed from the Pyeongan-do region. Publisher Jang Jun Ha, all the editors including An Byeong UkㆍKim Jun YeobㆍYang Ho MinㆍJi Myeong Gwan, and 20 out of total of 50 editing committee members were from the Pyeongan-do province. Major authors like Ham Seok HeonㆍShin Sang ChoㆍKim Chang Sun were also from the region. In short, 『Sasang-gyae』 was an academic and current-issue magazine created by the Pyeongan-do region intellectuals. They were the next generation after the Heungsa-dan's or Joseon Democratic party's leaders, and they became the most distinctive case which shows us that intellectuals from the Pyeongan-do region led the cold-war ideology in an academic way inside South Korea in the 1950s. Examined in this article are the positive roles the 『Sasang-gyae』 intellectuals from the Pyeongan-do region played, and also the negative aspects of their actions. The 『Sasang-gyae』 intellectuals from the Pyeongan-do region emphasized the basic principles of a free and democratic society, such as freedom, human rights, the principle of sovereignty resting with the people, free speeches and thoughts, through their journalist activities. And they also strongly criticised the prolonged dictatorship and corruption of the Lee Seung Man administration and Freedom party's regime. Especially in the late 1950s, they asked for a full scale resistance of the public and also a 'revolution' against the Lee administration and Freedom party regime. In the end, one can say that they played a certain role in initiating the Revolution of April 19th. Yet they did not have faith in the Democratic party, they didn't for a long time, and therefore came to exhibit an attitude considering the May 16th Coup D'Etat as a legitimate one, and perceiving it, which negated the April 19th Revolution and also the 2nd Republic, as a 'military revolution'. The ultimate source of such perception was their thorough pro-U.S., anti-Communist attitude. They clearly possessed the cold-war ideology and mentality. To them, America was a friend of Republic of Korea, and was its most dear benefactor. The Communist ideology and U.S.S.R were demons. To them, the neutral thinkers, progressive political factions, and discussions of a unification by 'neutralization' were all 'enemies'. Free Democracy was the absolute and ultimate value preceeding all else, including unification. In other words, The 『Sasang-gyae』 intellectuals from the Pyeongan-do region failed to put the ideals and principles of Free democracy before anti-Communism.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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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촌 심언광의 북방 경험과 국방 개선안

        박도식(Park Doh-Sik) 한일관계사학회 2014 한일관계사연구 Vol.48 No.-

        조선의 서쪽에 있는 평안도는 서북쪽으로 압록강 건너 울창한 산림을 경계로 여진과 맞닿아 있었다. 평안도의 지리적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압록강 건너의 여진은 태종 이후 주로 평안도의 江界등 이른바 7읍으로 침입해 왔다. 평안도 군사들은 거의 대부분 변경에서 방수했기 때문에 쉴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던 평안도 군사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赴京使臣들을 迎送하는데 따른 폐단이었다. 이에 평안도 백성들은 군역을 피하기 위해 압록강 너머의 중국으로 도망가기도 하였고, 奴婢가 되거나 승려가 되기도 하였으며, 말단 관속인 衙前등 신분의 우열을 가릴 것 없이 좀더 편한 처지를 택하여 옮겨갔다. 어촌은 도첩으로 승려를 금하는 것은 말단적인 방법이므로 王政과 禮敎를 잘 시행하여 교화가 천하에 가득하면 불교는 절로 없어질 것이라고 하였고, 평안도 감영의 아전들은 도망하여 없어진 戶의 군역과 旅外正兵을 나누어 충당할 것을 건의하였다. 평안도 백성들은 군역 이외에도 貢物?進上物등의 조달과 노역이 심히 과중하였다. 어촌은 백성이 한 가지 공물이라도 바치지 못하면 뼈골까지 우려낸다고 하였고, 노역이 무거워 한 사람이 도망가면 그 피해가 한 가족에 미치고 한 가족이 도망가면 또 한 가족의 친족에까지 미치기 때문에 백성들이 대부분 도망쳐 흩어졌다고 하였다. 당초 국가에서는 군사에게 諸부담을 담당할 수 있도록 保人을 배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가의 토목?수리 공사의 일이 빈번해지는 가운데 보법실시 후 군액이 크게 늘어나 별도로 요역담당자를 찾기가 어렵게 되자 군사를 바로 요역에 동원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에 정병은 복무기간 중에도 일정한 代價를 납부하고 귀가하여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고자 하였는데, 이것이 ‘代立’이었다. 중종대에는 군역의 代立이 일반화되고 있었다. 어촌은 중종 31년(1536)평안도경변사로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중종을 인견하며 그가 목도한 평안도의 군사문제에 대해 개선할 것을 주장하였다.

      • 평안도 공립소학교의 설립과 학교비 분쟁 (1896~1905)

        임인재(Im, In-jae) 경인교육대학교 기전문화연구소 2018 기전문화연구 Vol.39 No.1

        본 연구는 1896년부터 1905년까지 관보 및 신문자료를 통해 확인한 평안도 공립소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대해 분석한다. 이 작업을 통해 평안도 신교육기관 설립의 다양한 측면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을 통해 초등 근대교육을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립소학교 설립 정책을 추진하였다. 소학교 설립은 평안도를 포함한 서북지역에서 주도적으로 진행되었다. 평안도에 설립된 공립소학교는 17개가 확인된다. 공립소학교가 설립된 평안도 각 지역은 대부분 개신교가 활발한 지역이었으며, 외국과의 무역이 발달한 상업도시였다. 초기에는 정부 주도로 설립되다가, 1900년 이후부터는 각 지방관과 지역 유생들이 학교 설립을 주도하였다. 공립소학교의 교원은 일반적으로 교원 1명과 부교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립소학교의 교원은 대부분 한성사범학교 졸업생을 임명하였고, 부교원은 해당 지역에서 추천을 받은 유생을 임명하였다. 평안도 공립소학교는 17개 지역 가운데 8개 지역만 교원이 임명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부교원에 의해 학교가 운영되었다. 부교원의 경우 잦은 임명과 해임으로 인해 학교 운영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조선 및 대한제국 정부의 학부 예산은 전체 예산의 2% 내외에 불과했다. 이는 공립소학교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와 지원을 할 수 없는 구조였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부는 각 지역의 역둔토를 비롯한 지방 공공재산을 공립소 학교에 이속하는 방법을 통해 재정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그러나 1899년 10월 이후 내장원과 공립소학교의 토지 분쟁이 발생하였다. 평안도에서도 학교 비 분쟁은 평양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일반적인 학교비 분쟁과는 다르게 평안도에서는 지방세력 간의 다툼이 적었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생들의 영향력이 적었기 때문이다. 학교비 분쟁으로 인해 재정적 기반이 무너진 평안도 공립소학교는 각 지방 정부에게 지원을 호소하거나, 지역민들의 성금, 학생들의 학비 등을 통해 재정을 확보해야만 했다. This study analyzes official gazettes and newspapers to demonstrate how Gonglip Sohakgyo, equivalent to modern public primary school in Pyeongan province was established and managed during 1896 to 1905. Through this research, this study will shed light on the various aspects of modern educational institutions established in this period throughout the Pyeongan province. It was Joseon government’s policy that first promoted the nationwide establishment of public schools in Gapo Reform. In particular, primary schools were most widely established in Pyeongan province. Those schools, seventeen in total, were largely established in local cities in which the influence of Christianity was strong and the foreign trade was bustling. In the first stage, schools were established by government. Since 1900, local bureaucrats and Yusaengs (儒生) participated the establishment and emerged as main contributor of school establishment. Generally, one permanent teacher and one assistant teacher formed the faculty members of each school. Permanent teachers were appointed among the graduates of Hanseong Normal School in Seoul. With respect to assistant teachers, a local Yusaeng recommended from local community took the position. Only eight schools could afford to appoint permanent teacher while rest of them had to run the school only by assistant teachers. In many cases, assistant teacher’s unstable status, frequently discharged and substituted, brought negative effects to the management of school. Since the ministry of education (學部) took only two percent of national budget of the government, structurally the central government could not afford to provide subsidies to public primary schools. Instead, the government transferred the ownership of public real estates, including Yeokdunto (驛屯土), to the schools. However, since October 1899, the dispute over the ownership of public property was surfaced between the ministry of treasury (內藏院) and public schools. Ownership disputes in Pyeongan province were mainly occurred in Pyeongyang. Contrary to the cases in other provinces, local politics were less involved into the disputes since the influence of Yusaeng was comparatively small in Pyeongan province. Some public schools, financially collapsed due to the ownership disputes, appealed to provincial government for support, or had to depend on local fundraising and tu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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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평안도의 생원 진사시 합격자 실태

        崔珍玉 조선시대사학회 2006 朝鮮時代史學報 Vol.36 No.-

        An Analysis of the Classics and Literary Licentiate Exam Passers in Pyeongan Province of the Joseon Dynasty Choi, Jin-ok 본고는 18세기 이후 평안도에서 생원 진사시 합격자가 급증하는 현상에 주목하여 평안도 생원 진사시 합격자의 실태와 변화 양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으며 또 그들의 존재 형태가 어떠했는지 살펴보기 위해 쓰여졌다. 본고 작성에 이용한 자료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CD-ROM 사마방목이다. 여기에 수록된 조선시대 평안도에서 배출된 생원 진사 1,831명과 그후 수집 보완된 7명을 포함하여 1,838명을 분석 대상으로 하였다. 평안도에서 생원 진사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은 평양이다. 평안도 배출 인원의 29%를 점유하고 있다. 그 다음은 중화, 정주, 성천, 영변, 안주, 의주, 강동, 박천이다. 1, 2명만을 배출한 군현도 있으나 대체로 대읍에서 많은 인원이 배출된다. 각 군현에서 합격자가 배출되는 시기는 각기 다르다. 같은 시기에 배출하였다 해도 사족 기반이 취약한 곳은 지속적으로 배출하지 못하고 있다. 대체로 18세기부터 배출되는 군현에서는 인원이 많지 않다. 18세기 이후 합격자가 배출되는 지역이 확산되어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평안도 내 전 지역에서 생원 진사가 배출되고 있다. 평안도에서 생원 진사를 배출한 성관은 모두 355개 이다. 가장 많은 인원을 배출한 성관은 밀양박씨이고 이어서 김해김, 연안김, 남양홍, 전주이, 파평윤, 경주김, 청주한, 전주김, 배천조, 광주이, 해주오 순이다. 1, 2명만을 배출한 성관이 60%에 해당하는 202개 성관이다. 1명만 배출한 성관에서 합격자가 배출된 시기는 18세기 후반 이후 특히 19세기 후반에 집중되어 있다. 34%에 해당하는 118개 성관에서는 평안도 이외의 타도에서는 1명도 배출되지 않았다. 배출 인원은 대부분 10명 이하인데 시기적으로 19세기에 집중된다. 평안도의 생원 진사의 사회적 위상을 보면 98.5%에 달하는 사람들이 유학으로 존재하다 평균 37.1세에 생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3.9%이며 문과 급제에 소요되는 기간은 평균 11.1년이다.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는 관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15.6%, 품계만 가지고 있는 경우가 4.8%, 과거합겨자가 6.9%이다. 나머지는 모두 유학이나 학생으로 존재한다. 평안도에서의 생원 진사시 합격자의 증가는 16세기부터 시작해 18세기 후반 이후 생원 진사를 배출한 지역이 확산되고 새로이 성장해 올라오는 계층이 확산되면서 이루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크게 성장했음에도 지역적으로나 혈연적으로나 평안도라는 지역적인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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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 다리굿의 음악 구성과 현재적 의의

        김인숙(Kim, Insuk) 한국무속학회 2014 한국무속학 Vol.0 No.29

        이 논문은 1981년 이선호?정대복에 의해 연행된 평안도 다리굿의 음악 구성과 그 특징을 분석하고 자료를 통해 드러나는 평안도 굿의 현재적 의의를 고찰한 글이다. 다리굿은 제차에 따라 다양한 무가가 불리며, 선율은 대개 평안도지역의 향토음악 어법인 수심가토리에, 장단은 초가망장단과 푸념, 비나수, 덕담, 긴염불, 자진염불장단 등이 사용된다. 드물게 서울지역의 <타령> 무가를 가져다 부르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자연스럽게 굿거리장단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 자료에는 다리굿의 모든 절차와 노래(음악)이 비교적 온전히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앉은청배에서 부르는 (3+2+3+2)/8박자의 ‘초가망장단’과 느린 박자의 ‘긴염불’ 장단은 현재 전승이 끊긴 점에서 1981년 다리굿 자료의 긴요함을 확인할 수 있다. 1981년의 이선호?정대복 일행은 평안도굿을 충실하게 연행하고 있으면서도 부분적으로 서울지역의 무가를 적절하게 삽입하여 굿을 진행하는데, 이 때 수심가토리에 경토리가 섞인 타령무가를 굿거리장단에 맞춰 부른다. 남한에 옮겨온 평안도 굿은 서울의 악사와 남한의 단골을 아울러야 하는 입장에 처해 있으며, 평안도 굿의 부분적 변모는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가는 굿의 한 사례를 보여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981년 시점에서 보이는 북한굿의 변화는 청배나 축원과 같은 굿의 의례적인 부분이 아니라, 신을 놀리거나 단골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유흥의 마당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어서 굿의 본질적인 변화는 아닌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1981년의 이 자료는 남한에서 연행된 북한 지역의 굿이라는 점과 이를 보완해 줄 적절한 대상 자료가 없는 점에서 앞으로 굿의 성격이나 절차, 음악 구성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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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안도 다리굿의 특성과 위상

        이보형(Lee, Bohyung),김헌선(Kim, Heonseon) 한국무속학회 2014 한국무속학 Vol.0 No.29

        이 연구는 평안도 다리굿을 중심에 두고 평안도 굿과 무속의 특징을 전반적으로 해명하려는 목적에서 마련되었다. 평안도 무속이나 굿 연구가 진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특징이나 위상이 아직 규명되지 못한 바 있다. 지역적 특색과 의미를 정리하면서 특히 음악적 특징과 함께 지역적 특성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우리는 몇 가지를 정리할 수 있었다. 평안도 지역의 무속은 강신무권과 세습무권의 구분 가운데 강신무권의 전통을 지니고 있는 핵심적 권역 가운데 하나이다. 이 권역은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북부와 서울 등지까지 이르는 넓은 분포를 보이는데 그 중심에 평안도의 서북형 무당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다. 평안도 지역의 굿은 음악적으로 본다면 경서토리의 중심에 해당한다. 경서토리를 중심으로 본다면 이 지역의 토리가 수심가토리라는 넓은 분포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장단의 측면에서는 특별하게 몇 가지 긴요한 장단이 쓰이게 되는데 푸념장단, 청배장단, 앉은 청배장단, 당울림장단, 염불장단, 잦은염불장단, 감응장단, 방애장단, 돈실러가는장단, 덕담장단, 비나수장단, 절장단, 춤장단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This research aimed at generally explaining the characteristic of Pyongan-do gut and shamanism focusing on Pyongan-do Darigut. Nevertheless researches on Pyongan-do shamanism and gut have been progressed, regular characteristic or status have not yet been investigated. This research progressed the discussion focusing on regional characteristic along with musical characteristic, particularly, while arranging regional characteristic and meaning. As the result, this research could arrange some points as follows. Shamanism of Pyongan-do is one of core sphere which has the tradition of Gangshinmu-gwon, among the division between Gangshinmu-gwon and Seseupmu-gwon. This sphere shows a wide distribution covering Pyongan-do, Hwanghae-do, Gyeonggi-do north region, and Seoul, in the center part, northwest type shaman of Pyongan-do lies at the heart. Gut of Pyongan-do is relevant to the core of Gyeongseo-tori, in respect of musical aspect. When focusing on Gyeongseo-tori, tori of this region takes the core of sooshimga-tori, a wide distribution. In the aspect of rhythm, particularly some important rhythms are used, according to this research, they are Punyum jangdan, Cheongbae jangdan, Anjeun Cheongbae jangdan, Dangwoolrim jangdan, Yeombul jangdan, Jajeun Yeombul jangdan, Gameung jangdan, Bangae jangdan, Donsilreoganeun jangdan, Deokdam jangdan, Binasu jangdan, Jeol jangdan, Choom jangdan, 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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