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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후석 천관우의 고조선사ㆍ삼한사 연구

        문창로(Moon Changrho) 백산학회 2017 白山學報 Vol.- No.107

        본고에서는 후석 천관우가 거둔 고조선과 삼한 연구의 성과와 그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다. 천관우는 연구 활동 전반에 걸쳐 현실에 바탕을 둔 참여의식과 일반 대중을 위한 역사학을 중시하면서철저한실증과거시적통찰을추구했다. 또한민족주의사관에입각하되세계사와연계된 객관적인 입장의 역사교육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조선후기 실학 연구에서 출발하여 여말선초의 군사ㆍ토지 제도사, 3ㆍ1운동과 해방 10년사등으로확장했으며, 1970년대 초 『신동아』에 연재한 「한국사의 조류」를 통해 본격적으로 고대사연구를 시작했다. 그는 『인물로 본 한국고대사』(1982)를 발간하여 새로운 한국고대사 체계를 제시했으며, 이 책은 고대사 분야의 일반 대중서로서 효시를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천관우가 고조선사ㆍ삼한사 연구에 집중한 것은 연구 외적으로 가택연금과 감시로 인한 활동제약 및 자료 활용의 한계에서 연유하지만, 근본적으로 일제의 식민사학 중에서도 특히 임나일본부설 왜곡을 극복하고 가야사 복원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는 북삼한이 남삼한으로 정립되는 과정, 곧 고조선에서 삼한으로 이어지는 ‘한( )=조선계(朝鮮系)’의 전개과정과 역사적 실상을 추적했다. 실제로 단군 및 기자조선의 실체를 비롯한 위만조선의 국가적 성격, ‘삼한 이동설’에 입각한 삼한의 기원과 성립, 삼한 제국(諸國)의 위치 비정, 삼한-삼국의 고대국가 형성 문제 등 관련 주요 과제의 해명을 위해 노력했다. 천관우는 단군조선을 국가성립 이전의 단계로 상정했으며, 단군신화를 선주 어렵민(고아시아인)과 후래 농경민(북몽골인)의 동화 교체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았다. 기자조선과 관련된 ‘은인(殷人) 기자동래설’은 서기전 12세기 후반에 전개되었던 동이계 기자족의 동방 이동 사실로 파악했다. 기자의 후손을 내세운 ‘조선후’의 칭왕 사실에 주목하고, 고조선-연나라의 각축이 전개되었던 서기전 4세기 후반을 한국사상 고대의 개막으로 설정했다. 그리하여 『사기』에 보이는 ‘조선ㆍ진번’의 실체는 ‘북삼한’이며, 이때 ‘조선’은 대동강 하류의 마한족, ‘(북)진번’은 요하하류의 진ㆍ변한족을 합칭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 ‘진국’은 삼한 총연맹체가 아니라 북진번계의 일부가 남하하여 한강 하류에 머물렀다가, 이후 부여계 백제에게 밀려 남하해서 사로국ㆍ구야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다고 했다. 『삼국지』 한전의 ‘진왕’은 진국과 무관한 존재로서 당시 유력했던 백제국과 사로국의 왕을 각각 칭하는 동명이체(同名異體)로 상정했다. 나아가 그는 ‘영역’ 확대를 국가형성의 중요 요소로 꼽아 ‘부족-성읍국가-영역국가’라는 발전단계를 제시하였고, 정복활동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고조선 및 삼국의 국가형성기를 종래의 통설보다 소급 적용했다. 그의 연구는 기자 전승의 재해석 문제를 비롯하여 목지국 위치 비정이나 삼한 토착사회의 실상에 대한 접근 등에서 일부 한계가 지적되기도 하지만, 광복 이후 고조선 및 삼한 연구가 한 단계 발전하는데 중요한 밑돌이 되었다고 본다. This article took a look at the fruition of Cheon Kwanwu’s studies on the history of Gojoseon and Samhan. He always emphasis on the awareness of participation, which based on reality, and historical sciences for general public. And he pursue a complete demonstration and macroscopic insight. He also emphasis on the importance of history education, which is objective position linked the world history and based on the nationalism view of history. His academic interest started from the study on Silhak in the late Joseon period and extended the history of military system, the land system and so on. And he started a study on the Korean ancient history in the early 1970s, when he published 「The current of Korean history」 on the 『Sindonga』. He presented the system of the Korean ancient history by publishing the 『The Korean ancient history in character』(1982). And this book is assessed to be achieved in the first as a general popular book. He focused on the history of Gojoseon and Samhan, because of the restriction of activity and lack of materials by house arrest and watching brief. However why he focused on the history of Gojoseon and Samhan was, fudamentally, from trying to overcome distorted of Japanese theory and restore the Gaya history. His research was generally tracing the established historical reality of the process of North Samhan to South Samhan, which means ‘Han(韓)=Joseon line(朝鮮系)’. In fact, he was a stab at an explanation of the major task, such as a location range of the Samhan’s states, the ancient nation building problems of Samhan-Samguk, the origin and establishment of Samhan- Samguk based on the theory of Samhan drift and so on. He thought the Dangunjoseon as a state before the establishment phase, and the myth of Dangun as a thing, which reflect the assimilation and replacement a matter of fact between ancient asians and north mongolians. He thought that the 4th Century B.C. was the curtain rises in the ancient history of Korea. He also thought that the reality of ‘JoseonㆍJinbeon’, which appeared in the 『Samkukji』’s Hanjeon. And he thought that ‘Joseon’ is Mahan tribe in the Daedong river downstream and ‘Jinbeon’ is JinㆍBeonhan tribe in the Yo river downstream. Meanwhile, he thought ‘Jinguk’ was not a total of Samnhan league but a part of North Jinbeon tribe, which stayed in Han river down stream, and they backed down by Bakjae, so they came to the central force of Saroguk and Guyaguk. And he thought ‘Jinwang’ as a same name and different things, which means each king of Silla and Baekjae states. Futhermore, he suggested theory of ‘tribe-city state-territorial state’ and the formative years of Gojoseon and Samguk were early, based on a viewpoint of the beginning of the conquest of activities, than old common view.

      • KCI등재

        千寬宇(1925~1991)의 史學과 古代史硏究

        文昌魯(Moon Chang-rho) 한국고대사학회 2009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53

        본고는 後石 千寬宇(1925∼1991)의 학문활동과 고대사연구에 대하여 一瞥한 글이다. 천관우는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서 이른바 ‘言官’과 ‘史官’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노력하면서, 참여의식과 ‘非아카데미史學’을 강조하였다. 곧 현실에 기초하는 절실한 요구의 歷史硏究를 중시하면서, ‘나와 우리의 立場’ 그리고 ‘現在의 立場’이 투영된 歷史像을 추구하였다. 그의 고대사연구 체계는 『海東繹史』를 비롯한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연구성과를 두루 살피면서 申采浩, 鄭寅普, 安在鴻 등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이 추구하였던 연구경향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었다. 특히 ‘任那日本府說’의 재검토를 통하여 가야사의 복원을 시도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이룩했던 주체적 전통과 민족적 독자성을 부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자, 식민사학의 폐해를 걷어내려는 것이었다. 1970년대 초에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던 한국 고대국가의 기원 및 형성문제는 광복 이후 고대사연구의 일대 전환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천관우는 ‘韓國 上古史의 爭點’의 토론회를 주관하면서 국가의 기원 및 발전과정을 재검토하고, 이에 대신할 만한 새로운 용어와 개념을 모색하여 ‘城邑國家→領域國家’論을 제시하였다. 이처럼 ‘古代國家 形成論’의 논의를 견인하면서 한국 고대사연구의 외연을 확장하는 한편, 그간 소홀했던 연구 분야의 공백을 메우는 데에도 일조하였다. 곧 三韓의 성립과정과 諸小國의 위치비정 연구는 이후 加耶史 및 新羅ㆍ百濟史 연구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衛滿朝鮮의 국가적 성격, 辰國과 삼한의 관계 및 辰王의 실체, 백제ㆍ신라ㆍ가야의 고대국가 형성 문제, 백제와 가야의 관계, 任那ㆍ任那日本府의 실체와 가야사의 복원 시도 등 일련의 연구는 그간 소홀하게 취급되었던 연구주제들에 주목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천관우는 한국사연구에 있어서 전체적 흐름을 고려한 ‘거시적 파악’과 사실의 면밀한 검토를 바탕으로 하는 ‘철저한 실증’의 병행을 강조하였다. 史料의 취급에 있어서도 새로운 접근 방향을 모색하였는데, 특히 『三國史記』 초기기록 및 『日本書紀』의 비판적 활용은 사료 활용의 범위를 확대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무엇보다 천관우는 上古로부터 近ㆍ現代에 이르는 한국사 전반에 걸친 폭넓은 연구를 바탕으로, 역사의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역사교육의 成敗가 바로 民族의 繁榮과 死滅을 가늠한다고 하여, 객관적이고 올바른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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