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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고등학교 세계사교육과 서구중심주의

        강성호 ( Kang Sung-ho ) 한국서양사학회 2017 西洋史論 Vol.0 No.133

        이 논문은 서구중심주의와 관련해서 고등학교 세계사교육과정을 고찰한다. 서구중심주의 문제는 고등학교 세계사 내용체계 구성의 중요한 부분이고, 한국현실에 맞는 세계사 교육과정을 구성할 때 반드시 고민해야 될 부분의 하나이다. 한국서양사학계에서 2000년대 이후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가 개인연구자, 연구소, 학회차원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어왔다. 이러한 영향을 받아 2007∼2011년 고등학교 세계사교육과정은 서구중심주의적 세계사구성을 개선하는 데 큰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2015년 고등학교 세계사교육과정은 서구중심주의 세계사교육과정을 다시 강화하면서 지역간 교류를 삭제하고 세계사 교육분량을 대폭 줄였다는 점에서 서양사학계와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였다. 이러한 검토에 근거하여 이 논문은 한국 고등학교 세계사 교육 활성화방안을 몇 가지 제안하였다. 한국서양사학계가 세계사교육에 대한 연구를 심화하고, 세계사교사들과의 교류를 확대하고, 교사대상 세계사교육직무연수를 활성화하고, 세계사교육 교재를 개발하고, 2015년 세계사교육과정 개편에 적극 참여하고, 그리고 교육부나 외교통상부 등에 영향력을 미쳐 세계사교육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 This paper examines Euro-centrism and the world history curriculum of Korean high schools. The issue of Euro-centrism is an important consideration, constructing the world history curriculum from the perspective of Korea. Critical review of Euro-centrism and Western history has been actively conducted in Korean academia since 2000. Influenced by these trends, the 2007 - 2011 world history curriculum of Korean high schools made great strides in escaping from a Euro-centric world history. However, the world history curriculum of Korean high schools reversed the trend in 2015, restrenghtening the perspective of Euro-centric world history and eliminating descriptions of inter-regional exchanges. This drastically reduced the amount of world history text. Based on this review, this paper suggests some ways to revitalize western history education in Korean high schools. We suggest that Korean academia of Western history needs to deepen research on world history education, expand exchanges with world history teachers, improve teacher training, develop new teaching materials for world history, actively participate in rearranging the new world history curriculum introduced in 2015, and encourage the Ministry of Education and the Ministry of Foreign Affairs and Trade to support the world history education.

      • KCI우수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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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이 서독 재무장의 원칙적인 결정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최형식 한국서양사학회 1997 西洋史論 Vol.52 No.1

        독일의 패전 후 1945년 8월 2일 포츠담에서 '독일의 완전한 무장해제와 비군사화, 그리고 전쟁 물자와 전쟁 생산품으로 이용될 수 있는 모든 산업의 무력화'의 선언은 승전국들의 세계평화를 위한 지상목표였다. 이러한 승전국들의 독일정책에 대한 공동 의지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후 승전국들의 독일 재무장에 대한 불충분한 통제의 뼈아픈 경험이 포츠담선언의 강력한 의지의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서 양대 진영의 갈등이 심화되고 소련의 위협이 증폭됨에 따라 서방 강대국들은 서유럽 경제재건과 질서회복에 독일의 기여는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마샬플랜과 유럽 경제협의기구 그리고 유럽의회의 창설을 거치면서 서독도 경제적·정치적인 면에서 서유럽 자유민주주의 공조체제에 편입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소련의 핵폭탄 실험 성공과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공산주의 위협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도 서독의 재무장 문제는 서방정치가들에게 있어서 매우 다루기 힘든 일종의 '뜨거운 감자'였다. 소련의 위험이 더욱 증가함에 따라 서독 재무장의 필요성을 어느 정도 인식하면서도 어느 누구도 독일 재무장에 대한 확고한 대답을 회피하였다. 그렇다고 소련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서방 국가들의 군사력 증강은 미국을 제외한 서유럽 국가들에게 있어서 능력 밖의 일이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이러한 모든 상황을 바꾸어 놓았다. 한국전쟁은 군사 전략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면서 그때까지의 정치적인 고려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본 논문은 동서 양대 진영의 냉전구도 속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이 서방세계와 독일연방공화국에 뜨거운 감자였던 독일 재무장의 창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몇몇 역사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과연 한국전쟁의 발발없이 독일의 재무장은 불가능하였을까라는 문제의 제기는 본 논문이 제시하는 논지의 기본전제이다. 이 때 세 가지 측면에서 조명하였는 바 첫째는 한국 전쟁 발발 이후 서방강대국들의 정책입안자들의 독일 재무장에 대한 인식변화이며 둘째는 독일연방공화국 초대 수상인 아데나위(Konrad Adenauer)가 안보정책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당시 국민적 정서에도 배치되었던 재무장 정책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추진할 수 있었는가의 문제와 세째는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재무장에 대해 철저하게 부정적이었던 독일 언론들이 한국전쟁 발발이후 재무장에 대한 그들의 기본입장의 변화를 추적하면서 한국전쟁이 과연 재무장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 내는 데 중요한 자극이 되었는지를 분석하였다. 서방 세계 특히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이미 한국전쟁의 발발이전에 서독의 군사적 기여의 필요성을 인식하였지만 실행을 위한 조건을 성숙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아데나워도 독일의 재무장을 서방체제 편입의 완성을 위한 도구로 인식하였지만 국내의 반(反) 군국주의 정서를 고려하여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재무장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의 독일 언론들은 아직도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국민들의 반군국주의 정서를 감안하면 재무장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음은 당연하였다. 한국전쟁 발발이전까지 독일의 재무장을 반대하였던 가장 중요한 논거는 재무장으로 서독의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정치권력이 부상하여 또다시 유럽의 평화를 위협할 수 있으리라는 것과 갓 태어난 민주주의가 확고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붕괴되리라는 우려였다. 이러한 정치적 고려는 한국전쟁의 발발로 설득력을 잃었으며 소련의 위협에 직면하여 군사전략적인 측면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야기한 소련의 위협에 대한 새로운 안보분석이 서독의 재무장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는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서독의 군사적 참여에 대한 인식변화에 중요한 자극이 되었던 것은 한국전쟁으로 보편화된 소련의 위협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불안과 공포의 정서였다. 즉 한국전쟁의 영향을 서독의 재무장에 대한 반대자와 지지자들 사이의 비율을 완전히 바꾸어 놓음으로써 동등한 자격으로 서독을 군사적으로도 서방 세계 체제안에 편입시키는 데 중요한 조건을 창출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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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시대 글로벌 미국 가정 만들기 -1950년대 한국 아동의 미국 입양-

        권은혜 한국서양사학회 2023 西洋史論 Vol.- No.159

        초국적 입양(transnational adoption)은 한국전 이후 전쟁고아, 특히 미군 아버지와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문제의 적극적 해법으로 등장했다. 수천명의 미국인들이 한국 전쟁고아를 입양해 다인종 글로벌 미국 가정을 만들었다. 이 글은 아시아 이민과 인종 간 가족이 여전히 예외적이었던 1950년대 냉전기에평범한 미국인, 교회, 아동 복지와 입양 서비스 종사자들, 정부 관계자들이 한국인아동의 입양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배경을 이해하고자 한다. 21세기들어 미국 학계에서 축적된 한국인 및 기타 초국적 입양 연구에 따르면, 냉전시대평범한 미국인의 초국적 입양에 대한 관심은 반공주의 문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이 글은 또한 현대 미국 입양의 역사 연구를 참조해 한국 아동의 입양이 미국의 입양제도, 그리고 인종 간 입양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는지를 검토한다. 1950년대 한국 아동의 입양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인종 간 입양으로 부모와 입양 자녀의 인종을 일치시키는 기존 관행을 거슬렀다. 1950년대한국인 입양인은 미군의 한국인 신부와 더불어 아시아 이민 제한 시기에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던 드문 아시아인이었다. 최근 연구에 포함된 1950년대 한국인입양인의 인터뷰를 참조해 이 글은 미국 안에서도 인종 간 입양이 거의 없던 시절에 백인 미국인에게 입양된 한국 아동이 백인 미국인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문화적 동화와 인종적 고립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복합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방식을 살펴본다. During the Korean War, transnational adoption emerged as a solution to the war orphans problem, particularly mixed-race children born to American GIs and Korean mothers. Many American families volunteered to adopt Korean children and spearheaded the trend of making American families global. This article examines why average Americans, Christian churches, and social workers at adoption agencies were interested in the adoption of Korean children in the 1950s, during a time when Asians were not allowed to enter the U. S. It was also a time when transracial adoption was discouraged and rare. This article refers to the research results of Korean adoption studies and the adoption history in modern America. Scholars in the fields of adoption history and adoption studies find that Cold War anti-Communism and individual Americans’ humanitarian interests in Korean War children were interrelated. This article also explores the change that the adoption of Korean children in the 1950s brought to the existing rule of racial matching in adoption. In the 1950s and 1960s, Korean adoptees were one of the few Asians who could enter the U. S. They found themselves as a racial other in their adoptive white homes and communities. Herein, this article examines how Korean American adoptees experienced the pressure of assimilating into white culture as a racial other and formed multiple identities when they came of age.

      • KCI우수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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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올림포스 -한국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 수용의 궤적, 1895-2001-

        박재욱 한국서양사학회 2018 西洋史論 Vol.0 No.139

        This paper traces and examines the reception of western classical mythology in modern Korea. To the modern Korean public, the most prominent aspect of western ancient world is dominated the mythology far more than the history, literature, architecture, and other visual arts. This paper examines why and how the western classical mythology firmly gained the status of ‘classics’ in Korean culture. To examine this phenomenon, this paper introduces the concept of classical reception study, barely known in Korea. Historical examination of the first contact with ‘Greek and Roman mythology’ and of the subsequent process of translating western and Japanese mythology books shows the extent of reception. This paper aims to present an outlined study of how the ‘universal’ cultural heritage of western classical mythology encountered the colonialism, developmental dictatorship, and democratization and was deconstructed and reconstructed accordingly as a ‘new classic.’ 이 논문은 왜 그리고 어떻게 서양 고전 신화가 한국에서 고전이자 교양으로 확립되었는가를 묻는 역사적 질문에서 출발한다. 이에 답하기 위하여 최근 활발한 연구를 자극하는 ‘고전 수용 연구(Classical Reception Study)’를 선택하였다. 고전 수용 연구에서는 고전이 각 시대마다 새롭게 정의되고 해석되며, 그렇게 새롭게 구성된 고전이 그 다음 시대에 다시 ‘원전’이 되어 재해석의 과정을 겪는다고 본다. 이러한 접근법은 ‘주어진’ 원전보다 수용하는 주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때문에, 근현대 한국의 ‘그리스 로마 신화’와 더 크게는 ‘서양’의 수용 과정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고전 수용 연구는 또 매체의 다양성도 인정한다. ‘만화’나 ‘비디오 게임’까지도 연구대상으로 포함한다. 이 논문에서는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고전 수용 연구의 관점과 방법을 간단히 언급하고, 한국에서 ‘그리스 로마 신화’가 소개되고 나아가 필수적인 ‘교양 ‘의 일부로 자리 잡는 과정을 번역서 분석과 한국사의 주요 변곡점에 대한 참조를 통해 역사적으로 고찰한다. 이 과정의 마지막에서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통해 만화라는 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수용되는 현상을 살펴본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서양 고전 신화라는 ‘보편적’ 문화유산이 근현대 한국에서 식민주의, 개발독재, 민주화라는 특수한 상황을 만나 해체되고 재구성되어 ‘새로운 고전’의 역사를 이어가는 과정의 윤곽을 제시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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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세계조약체제와 한국문제, 1905-1946-T. 루즈벨트의 한국정책을 둘러싼 헌법 및 국제법상의 논쟁을 중심으로-

        최정수 한국서양사학회 2019 西洋史論 Vol.0 No.141

        This purpose of this research is to study the United States Treaty Policy regarding Korea, 1905-1946, to focus on interaction among the following actors: World Treaty Systems-the Commercial Treaty System, Hague Arbitration Treaty System(1899), Covenant of the League of Nations(1919), Pacific Treaties System(1921-1922), Kellog-Briand Pact(1928), Charter of United Nations(1945), U.S. Constitution and American Foreign Policy from late 19th century to early 20th century. The following conclusions are drawn from the research: First, the U.S. constitution and world treaty system (particularly Hague Arbitration Treaty System) have an effect on Theodore Roosevelt’s Korean policy which outlines what the Japanese Empire can do to control the Korean Empire’s treaty power. Secondly, the American Treaty Systems during 1920s-1930s particularly the Pacific Treaties System and Kellog-Briand Pact resulted in Korea independence in 1945, because American strategists planned to review the law making-treaty into two new treaty systems which rejects Taft–Katsura agreement and Japanese protectorate agreement. Therefore, the U.S. constitution, the concept of treaty of American style and world treaty system effects on T. Roosevelt and the U.S. Policy toward Korea during 1905-1946. 이 연구의 목적은 1905년에 펼쳐진 루즈벨트의 대한정책을 둘러싸고 전개된 법적 논쟁을 통해서 20세기 전반기의 미국의 대한정책의 실체를 보여주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다음을 추적했다. 루즈벨트의 대한정책을 둘러싼 법적 논쟁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논쟁은 실제로 정책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을까. 이를 위해 다음 두 가지 사실에 주목했다. 하나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전반기에 미국이 가동한 6개의 세계조약체제요, 다른 하나는 1905년에 한국에서 일어난 일을 담고 있는 당대의 조약문과 조약집이다. 전자는 한국을 조약체제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인가를 결정케 했다는 점을 알려주며, 후자는 미국이 한국을 세계조약체제에서 축출한 이유와 과정 그리고 한국을 다시 조약체제에 복귀시킨 까닭을 담고 있는 블랙박스와 같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첫째, 협정체결권과 중재조약체제는 루즈벨트의 대한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두 가지를 복합적으로 사용하여 루즈벨트는 한국을 새로운 조약체제의 가맹국이 되는 것을 막았기 때문이다. 즉 태프트-가쓰라협정과 미일중재재판조약을 합치면 미일 간에는 이런 약속을 한 것이 된다. 미국은 한국을 일본의 사활적 이익으로 인정한다. 따라서 미국은 한국문제를 중재재판에 회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헌법과 세계조약체제는 한국을 해방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루즈벨트의 대한정책이 법적으로 3가지(한미조약, 미국 헌법, 세계조약체제)를 위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루즈벨트가 옹호한 을사협약은 처음부터 조약파괴인가, 조약창설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따라서 법적 관점에서 볼 때 1905년에 한국을 매개물로 하여 체결된 조약과 협정은 모두 원상 복구되어야만 했다. 1920년대 이후 미국은 그런 방향으로 정책을 펼쳤다. 카이로선언은 바로 1905년에 한국에서 저질러진 조약파기 행위에 대한 원상 복구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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