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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신라의 ‘一統’ 인식과 그 영향

        張日圭(장일규) 신라사학회 2014 新羅史學報 Vol.0 No.32

        이 글은 신라의 ‘一統’인식이 형성·변화한 과정을 살피고, 그것이 후삼국통일 과정에서 미친 영향을 고찰한 것이다. 통일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문무왕은 ‘당나라의 義軍’ 과 함께 ‘선왕의 뜻’을 이어 ‘원흉을 제거하였다’고 국내외에 알렸다. 하지만 통일 전쟁이 끝난 뒤에 신문왕은 ‘一統三韓’·‘統三’을 강조하면서 전쟁에서 희생되었던 ‘신라 백성의 추숭’을 부각하였다. 이것은 원성왕과 소성왕 이후까지도 계속 유지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아울렀다는 ‘일통’인식은 신라 중대에 형성되기 시작하여 하대 초에 정립되었다. 신라 말에 ‘일통’인식은 혼재한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대체로 왕명을 받아 비명을 찬술하였던 유학지식인에 의해서 나타났다. 곧 金穎은 ‘삼한’과 ‘신라 백성’을 강조하였는데, 崔致遠은 신라 백성을 위무하였던 무열왕을 강조하였다. 특히 최치원은 ‘일통삼한’·‘통삼’에서 ‘삼한’을 ‘삼국’으로 바꾸어 이해하면서, ‘一統三韓’과 ‘一統三國’을 함께 강조하는 ‘일통’인식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시 신라와 발해를 둘러싼 進士試급제 경쟁에 관련되었다. 따라서 고구려와 발해를 비난하면서 신라의 통일을 강조할 때, 삼한의 비정을 달리하며 진한인 신라 국가를 앞세우는 ‘일통삼국’인식을 애써 강조하였다. 후삼국시기에 ‘일통’인식은 다시 변화하였다. 견훤과 왕건은 세력을 다투면서 ‘일통삼한’인식을 거론하였다. 그들은 신라 국왕을 존중하고 수호해야 할 ‘尊主’로 부각하였다. 특히 신라의 영역을 나누어 지배하였으므로, ‘일통삼국’ 이 아닌 ‘일통삼한’ 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면서 ‘의자왕의 宿憤’을 강조하였고, 왕건은 고려를 세우면서 ‘고구려의 원수’ 가 아닌 ‘고구려’ 를 강조하였다. 견훤은 백제 국가를 유념한 ‘일통삼국’ 을 나타내었지만, 왕건은 사회적·경제적 문제에 관심을 쏟으며 이전의 ‘일통삼한’을 내세우면서 민심을 회유하였다. 신라 국가를 부정하였던 백성들은 점차 ‘삼한이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일통’ 의식을 갖게 되었다. 자연히 민심은 왕건 쪽으로 기울었고, 왕건은 마침내 후삼국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이후에도 고려는 ‘일통삼한’인식을 유지하면서, 따로 ‘고구려 계승의식’ 을 내세우며 발해 유민을 아울렀다. 신라의 ‘일통’인식은 후삼국시기에 통일 방안의 하나인 ‘일통’의식으로 기능하였던 셈이다.

      • KCI등재

        ≪三國史記≫ 신라본기 역주 後記

        권덕영(權悳永) 신라사학회 2013 新羅史學報 Vol.0 No.27

        한국학중앙연구원은 두 차례에 걸쳐 ≪삼국사기≫를 번역, 주석하였다. 이때 필자는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담당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역주 작업은 필자에게 힘들고 고된 훈련과정이었다. 그런 만큼 얻은 것도 많았다. 漢籍 사료에 대한 해독능력을 증진시킬 수 있었고, 한국고대사 연구 성과를 두루 섭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다양한 사료를 탐색하고 활용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었다. 또한 이 작업을 통하여 역사 탐구에 필요한 인내심을 배우게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번역, 주석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첫째는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명실상부한 `본기`라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고, 둘째는 신라 무열왕과 문무왕 본기의 서술이 매우 상세하면서도 주체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셋째는 신라본기의 金春秋 입당기사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넷째는 신라본기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시대 금석문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 금석문까지 널리 섭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절감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 수록된 다양한 천변지이 기사를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으나, 이번 신라본기 역주에서는 그러지 못한 점이 있어 아쉽게 생각된다.

      • KCI등재

        애장왕・헌강왕대의 대일외교와 그 활용

        채미하 신라사학회 2018 新羅史學報 Vol.0 No.44

        These thesis is studying the records on envoys between Silla and Japan during king Aejang and king Heongang and their making use of it in the domestic politics. Japan during king Aejang dispatched envoys just after breaking nations’ relationship between Silla and In the third year of king Aejang, the reason Japan sent envoy to Silla is that they wanted to have assurance of safety in the sea and get help at their arrival in relation to Kyondangsa dispatch. King Aejang in his 2ndreigning year, tried to install a fake prince and send him to Japan as the envoy and in his fourth year, traded with Japan. King Aejang was active in relation with Japan because it was related to his opposition about China’s centered world order internationally. Domestically king Aejang made use of the diplomatic relation with Japan as one way to establish his direct ruling from Kim Unseong’s rule as regent. After beginning direct ruling, King Aejang held in check Tang and kept close relation with Japan. That is, when Tang’s Goaesa concurrent positioned Chekbongsa visited Silla in King Aejang ‘s 4thyear, they were treated poorly, but Japan’s envoy was greeted in Jowon-Jeon and treated hospitably in King Aejang’s 7thyear and 9thyear. And King Aejang tried to establish order internally and extenally through Binrye which was royal authority ceremony, and other various revolutionary politics helped King Aejang to have power centered around himself. In King Heongang’s period, the envoys between Silla and Japan visited each country. Japan’s envoy was sent in King Heongang 4thyear because pirates from Silla invaded Japan and there were worries of Silla’s invading Japan so Japan wanted to know the circumstances. At those days, Silla got through Hwangso’s uprising so they could not send envoys to Tang and also the politics were insecure internally and externally. King Heongang did ingyon the envoys at Jowon-jeon and tried to rid their worries and also tried to overcome the difficulties internally and externally at those days through effects of the ceremony. And at King Heongang’s 8th and 9th year, Japan’s envoy visited again to know news from Tang which caused King Heongang sent envoys to Tang in those years and sent envoys to Japan in his 10th and 11thyear. The reason why around King Heongang’s 10thyear, the king sent envoys to those two countries was related to the king’s feeling of insecurity about the successor to the throne at his late ruling years. Therefore King Heongang colluded with Hyo’s mother in his 10thyear and Hyo became King Hyogong later, and also through his diplomatic relation with Tang and Japan around his 10thyear, he tried to achive strengthening royal authority as well as stability of royal family. 본 논문은 애장왕대와 헌강왕대 신라와 일본의 사신 왕래 기사를 검토하고 애장왕과 헌강왕이 이것을 대내 정치에 활용한 측면을 생각해 본 것이다. 신라와 일본의 국교가 단절된 직후인 애장왕대 일본은 신라에 사신을 보낸다. 애장왕 3년 일본이 신라에 사신을 보낸 이유는 遣唐使 파견과 관련하여 신라로부터 해로의 안전을 보장받고 견당사가 漂着할 때 도움을 받고자 한 것이었다. 애장왕은 왕 2년에 假王子를 책봉하여 일본에 사신을 보내려고 하였고 왕 4년에는 일본과 ‘交聘’하였다. 애장왕이 대일본 외교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대외적으로는 당 중심의 세계 질서에 대한 반발과 관련있었다. 대내적으로는 김언승의 섭정을 받았던 애장왕이 攝政期에 親政 구축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대일본 외교를 활용하였다. 친정 이후에도 애장왕은 당을 견제하고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즉 왕 6년 신라에 온 당의 告哀使 겸 冊封使를 홀대하였지만, 왕 7년과 9년에 신라에 온 일본 사신은 朝元殿에서 引見하고 후대하였다. 그리고 애장왕은 왕권의례인 賓禮를 통해 대내외의 질서를 확립하려 하였고, 이와 연동되어 행해진 다양한 개혁정치는 애장왕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 헌강왕대 역시 신라와 일본 사신은 왕래하였다. 헌강왕 4년 일본이 신라에 사신을 보낸 이유는 신라 해적의 침입과 신라가 침공한다는 우려가 팽배했기 때문에 그 사정을 알기 위해 온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 신라는 황소의 난으로 당에 사신을 보내지 못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정국이 불안정하였다. 헌강왕은 때마침 신라에 온 일본 사신을 조원전에서 인견함으로써 우선 일본의 우려를 불식시키려고 하였고, 의례가 지닌 기능을 통해 당시의 대내외적인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헌강왕 8년 일본 사신은 당의 소식을 알기 위해 신라에 왔는데, 헌강왕은 이를 계기로 왕 8년과 9년에 당에 사신을 보냈고 왕 10년과 11년에는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헌강왕 10년을 전후하여 헌강왕이 양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헌강왕 후반기 왕위계승권자에 대한 불안감과 관련있다고 하였다. 이에 헌강왕은 왕 10년 觀獵에서 후일 효공왕이 되는 堯의 생모와 野合하였고, 왕 10년 전후 당과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통해서는 왕권 강화와 왕실의 안정을 꾀하였다고 보았다.

      • KCI등재후보

        일제강점기 신라사 사료비판론의 전개-≪三國史記≫ 新羅本紀 초기기사를 중심으로-

        이부오 신라사학회 2009 新羅史學報 Vol.0 No.17

        新羅本紀 초기기사에 대한 근대적 연구는 1890년대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일본의 고대 사서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신빙성을 낮게 평가하고, 신빙 가능한 시점을 탈해왕대~법흥왕대 이후로 다양하게 설정했다. 러・일전쟁 이후 滿鮮史가 강조되면서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비교대상으로서 중국 사료가 강조되었다. ≪三國志≫ 韓傳을 기준으로 신라의 건국시기는 2・3세기 이후로 설명되었다. 특히 前秦에 대한 사신 파견을 근거로 신라의 왕통이 4세기에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다. 초기 왕대에 대해서는 혁거세대~흘해대의 16왕에 대한 조작설이 제기되었고, 실제 시기를 수정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대외교섭 기사는 거의 무시된 반면, 任那日本府가 가야지역을 장악해 신라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日本書紀≫의 기록은 중시되었다. 이러한 사료비판론은 신라본기 초기기사의 문제점을 드러냄으로써 합리적 해석의 단서를 제공했다. 그러나 신라본기 초기기사에 대해서는 엄격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중국・일본 사료에 대해서는 특별한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편향적 태도를 보였다. 이는 근대적 사료비판론의 외형을 갖추면서도 이를 위한 구성요건을 결여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태도는 최근까지 한국인 학자들의 연구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쳐 왔다. 신라상고사의 복원을 위해서는 이를 극복하는 한편, 신라본기 초기기사에서 드러나는 모순점에 대해 체계적 분석이 요청된다.

      • KCI등재

        660년 7월 백제와 신라의 황산벌 전투

        문동석(Moon, Dong-seok) 신라사학회 2016 新羅史學報 Vol.0 No.38

        660년 7월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13만 대군을 동원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 나당연합군 중 신라군의 주요한 역할이 무엇이었을까? 나당연합군은 7월 10일 백제 사비성 남쪽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군에게 막혀 약속 날짜를 어겨 7월 11일에 도착하였다. 이에 소정방은 약속한 날짜보다 늦게 도착한 신라군의 책임을 물어 督軍 김문영을 참수하려고 하였다. 왜 소정방은 신라의 주요한 장수 중 유독 김문영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일까? 이는 김문영이 독군이라는 관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독군은 신라군의 전반을 감독하는 지휘관으로 이해되어 왔다. 하지만 중국 사서의 용례를 볼 때 ‘督軍’은 후한 광무제대에 처음 등장하여 군사지휘관이라는 뜻으로 통용되었으나 魏나라부터 督軍糧御史등과 같이 군수물자의 보급과 관련된 직무를 병기하면서 그 임무가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보면 ‘독군’ 뒤에 양식 糧자가 공통적으로 붙어 있음으로 볼 때 김문영은 독군양어사일 가능성이 높다. 김문영을 포함한 신라군 5만은 13만 당나라군의 병참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 주요한 임무였을 것이다. 한편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백제군의 지연작전에 말려들어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그 결과 약속한 날짜에 당나라군에게 보급품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군대가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은 죄가 크다. 따라서 신라군의 입장에서는 황산벌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였으며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정당화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관창이 필요했다. 신라 왕실은 관창의 장렬한 죽음을 강조하기 위해 적장이었던 계백을 영웅화 했다. 백제 영웅 계백에 맞서 두 번의 싸움 끝에 장렬하게 죽은 관창, 이보다 더 극적인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In July 660, the allied forces between Silla and Tang Dynasty destroyed Baekje using a hundred-thirty thousand army. What was the major role of Silla troops among Silla-Tang allied forces? Silla-Tang allied forces promised to meet at the southern part of Sabi Castle, Baekje in July 10th, but Silla troops broke their promise and arrived in July 11thbecause Baekje tried to block the mat Hwangsanbeol. For that reason, Su Ding fang tried to be head Kimmunyoung to hold him responsible. Why SuDingfang at tempted to kill especially Kimmunyoung of all the main generals? That’s because Kimmunyoung was a ‘Tuchun’(督軍), one of a position in the government. In the meantime, Tuchun had been understood as a commander who supervised the whole Silla troops. To take an example from Chinese classics, the word ‘Tuchun’ first appeared during the era of Emperor Guangmu of the Later Han dynasty and used its meaning as a military commander, but it had also written as ‘Tuchun liang yushi’(督軍糧御史), a royal secret inspector who had a duty of military supplies and its duty had found a shape since Wei(魏). In 《Goryeosa》 and 《Goryeosa Jeolyo》, they both have the letter ‘liang’(糧) after ‘Tuchun’, and it means there is a high possibility that Kim munyoung was a ‘Tuchun liang yushi’. The major assignment of fifty thousand Silla troops include Kim munyoung would be supporting logistics to a hundred-thirty thousand Tang troops. Meanwhile, Silla troops entangled themselves in delaying operations by Baekje troops and fought a hard battle with them. As a result, Silla troops couldn’t deliver supplies to Tang troops. In the military, missing an appointment is a cardinal sin; so Silla troops needed to justify how fierce the Battle of Hwangsanbeol was and how they won. To do this, they needed Gwanchang- Silla Kingdom made a hero of Gyebaek, who was an enemy general from Baekje, to emphasize the glorious death of Gwanchang. ‘Gwanchang, who met a heroic death on the battlefield to fight against Gyeback twice’- it couldn’t have been more dramatic.

      • KCI등재

        『구당서』의 王言과 신라의 문예

        張日圭(Chang, Il-gyu) 신라사학회 2020 新羅史學報 Vol.0 No.49

        이 글은 『구당서』 본기의 조서나 제서 등 당 황제의 왕언을 신라 국왕의 외교문서와 비교해 당 문예를 수용한 신라 문예의 특징을 살핀 것이다. 당의 왕언은 821년 이전 조서와 제서가 혼용되었던 반면, 821년 전후 조서와 제서는 칙서와 구분 없이 사용되었다. 특히 805년~846년, 888년~908년에는 활발하게 작성되어 반포되었다. 왕언은 황실 권위 신장과 국가 안정 염원을 담았다. 신라는 당과 외교 관계를 맺은 뒤 당의 제도 정비와 정책 시행을 꾸준히 주목했다. 신문왕 때 당시 전하는 시문을 모은 1천권 문관사림 중 규범에 해당하는 글을 모은 50권을 받았고, 성덕왕 때는 상문사를 통문박사로 개칭하고 서표의 임무를 전담시켰다. 또한 851년 편찬된 개벽~수나라 때까지 제왕의 美政과 詔令, 制置, 銅鹽錢穀 損益, 用兵, 僧道 등을 연대별로 수록한 300권 『통사』도 참고했다. 신라 왕실은 당과의 교류에서 당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고 당의 문예에 민감했다. 신라 문한관은 신라에 있거나 당의 국자감에 머물면서 여러 양식의 글이 담긴 『백씨장경집』 등 당 문인의 문집을 열람했고, 당 문인의 글이나 신라에 파견된 당 사절단, 또는 당 연회에 참석한 문무관과 교유하면서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는 물론 문장의 형식과 내용을 익혔다. 현재 전하는 당의 왕언과 신라의 표문을 비교하면, 형식의 통일성은 비슷하지만, 신라가 중화의 의관과 제도를 수용해 유풍을 품고 예악의 성행을 이룬 번국으로 조공의 임무를 다했음이 特記되었다. 당이나 신라는 당시 동아시아 문서의 보편적 구성, 보편적 문체를 염두에 두어 3단락 구성과 변려문체로 외교문서를 작성했다. 신라 말에 이르러서 신라의 문한관은 중국의 제후국 중에 신라가 가장 유사한 나라라고 자부하는 소중화적 자존의식을 가지고 신라 고유정서를 문예에 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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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羅 종이문서의 現狀과 裝幀·廢棄·再活用 과정

        윤선태(Yoon, Seon-tae) 신라사학회 2020 新羅史學報 Vol.0 No.50

        「신라촌락문서」와 사하리가반에 부속되어 발견되었던 「사하리가반부속문서」는 실물로 전하는 신라 當代의 종이문서라는 점에서 남다른 가치가 있다. 촌락문서와 가반문서는 문서의 내용 판독과 해석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문서의 裝幀 방식이나 재활용 과정 전체에 대한 관련 정보들도 수집 정리되어야 한다. 관문서의 작성 과정에는 최초 종이의 생산에서, 종이의 연접, 괘선 긋기 등 문서의 裝幀 등 물질적 준비가 먼저 이루어진다. 또 문서가 작성된 후 일정한 보존기간이 지나 그 용도가 폐기되면, 문서 裏面의 백지(空紙)를 재활용하여 새로운 문서 작성이나 기타 여러 방식으로 재활용하는 과정이 있었다. 촌락문서와 가반문서로 볼 때, 신라의 관문서 작성에 사용된 종이는 두꺼운 楮紙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촌락문서 제작에 사용된 기본 종이는 그 크기가 29.5×52㎝로 추정되어, 대체로 당시 종이는 唐尺을 기준으로 1척×2척의 크기로 생산되어 용도에 맞게 다시 재단하여 사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종이 생산은 통일기에는 이미 일반화되어 지방 군현에서도 종이제작기술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관문서는 이러한 기본 크기의 종이를 여러 장 연접하여 두루마리 형식의 卷子本으로 裝幀하였다. 연접방식은 오른편 종이가 왼편 종이의 위로 오도록 붙이는 ‘純繼’와 그 반대의 ‘逆繼’ 방식이 모두 나타나는데, 일정 기간 보존했던 보관용 문서인 촌락문서는 순계로 연접되었고 먹줄이나 자를 사용해 괘선을 정연하게 그어 내용을 정리하였다. 반면에 메모용 문서로 추정되는 가반문서 파편 부분은 역계의 방식으로 연접되었고 괘선도 손으로 대충 그어 사용하였다. 신라에서는 메모가 다 되었거나, 보존기간이 끝난 관문서들은 문서를 작성했던 관청내부나 다른 관청 또는 사찰 등에 불하되었다. 이 불하된 관문서들은 불특정의 크기로 다시 잘라 해체한 뒤에, 최초 문서의 이면 백지를 다른 용도로 재활용하였다. 촌락문서는 사찰에 불하되어 『華嚴經論』의 經帙 제작에 재활용되었고, 가반문서는 관청에 불하되어 다시 또 다른 메모용의 문서로 재사용되었다. 한편 앞뒷면의 종이가 모두 서사된 뒤에도, 관문서는 버려지지 않고 다른 용도로 재활용되었다. 가반문서나 쇼소인 소장의 유기 숟가락 포장 상태 등으로 볼 때, 신라에서는 관문서를 손으로 찢어서 對일본 교역물품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하는 충전용 종이나 포장지로 재활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신라의 종이문서는 현재 촌락문서와 가반문서, 이 두 가지 사례밖에 없지만, 一當百처럼 일본의 正倉院文書에 못지않게 신라의 종이 제작, 문서의 생산과 폐기, 문서의 재활용 과정 전반에 관한 유익한 정보들을 소상히 알려준다. 이러한 정보들을 미리 체계적으로 정리해두면, 앞으로 쇼소인 소장의 신라 숟가락 셋트를 포장했던 신라 종이문서들이 공개될 때, 그 문서적 특징을 간취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The “Silla Village Register Document(新羅村落文書 SVR)” and the “Document attached to the Sahari-Kaban(佐波理加盤附屬文書 DAS)” which were found at the Shosoin in Japan, are of extraordinary value in that they are actually paper documents of the Silla Dynasty. While reading and interpreting the content of documents is important for studying Silla history, relevant information on the making and Recycling Process of Paper Documents should be collected and organized as much as for the method of binding and the entire recycling process of the documents. In the process of preparing the documents of the government office, material preparation, such as the production of the first paper, the bond of the paper, and the binding of the documents, such as drawing the line, are carried out first. In a ddition, after the document was prepared and its use was discarded after a certain period of preservation, there was a process of recycling the white paper on the back of the document to prepare new documents or recycle them in various ways. The SVR and the DAS indicate that the paper used to make documents for the government offices of Silla was made of Dak-paper(楮紙). The basic paper used in the production of the SVR, which remains in full form, is estimated to be 29.5×52㎝ in size, and it is generally thought that the paper was produced in the s ize of 1×2check(尺) based on the scale of the Tang Dynasty of China and was re-cut and used according to its purpose. Paper production has already been generalized during the Unified period, so the existence of paper-making engineers can be confirmed in local county. The oficial do cuments of Silla were made in a scroll format by bonding several pieces of paper of this basic size. The bonding method shows both ‘Soongye(純繼)’, which is a general method of attaching the right paper to the top of the left paper, and ‘Yeokgye(逆繼)’, which is a rare method of attaching it to the opposite of Soongye. While the SVR was bonded to Soongye and arranged the lines neatly, the DAS assumed to be for short-term memos were bonded by Yeokgye, and the lines were roughly drawn and used by hand. In Silla, the documents of government offices, which had been completed or whose preservation period had expired, were referred to inside the government offices, other government offices, or temples. These loaded official documents were cut back into unspecific sizes and then recycled for other purpo ses the white paper on the back of the original document. The SVR was reused as paper cloth for wrapping various scrolls of Buddhist scriptures, while the DAS was returned to the government office and reused as another document for memos. On the other hand, even after all the paper on the front and back sides was written, was not discarded and recycled for other purposes. Based on the packing conditions of the brass spoon at the Shosoin, it can be seen that Silla used the documents of government offices to tear them by hand and recycle them as packaging for trade goods sent to Japan. Although Silla currently has only examples of the SVR and the DAS documents, it provides useful information on the overall process of paper making, binding and discarding of documents, and recycling documents as well as numerous ancient Japanese government documents as the Shoso in Documents. If such information is organized in advance, it will be a very useful reference to captu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documents when the documents of Silla government offices, which had packaged the Silla spoon set of Shosoin, are released.

      • KCI등재

        異斯夫의 가야 침공과 伴跛의 逆襲

        서영교(Seo, Young-kyo) 신라사학회 2017 新羅史學報 Vol.0 No.40

        《日本書紀》 繼體紀를 보면 514년 3월 伴跛(=대가야 이하생략)가 성을 쌓고 일본을 대비하고 신라를 대대적으로 약탈했다고 한다. 앞서 백제에게 영토를 침탈당해 왔던 伴跛가 신라에 대한 보복성 공격을 한 것은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해결될 수 없는 문제였다. 여러 가지 대안과 해석이 나왔다. 먼저 시기를 조정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16년 내려 《일본서기》 권17, 계체기 23년(529) 3월 是月조에 보이는 가라(=伴跛)와 신라의 혼인동맹 파기 이후의 일로 보기도 했다. 그 후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 연대는 그대로 두고 伴跛에게 공격당한 주체를 백제나 安羅로 바꾸는 것이다. 己汶, 帶沙를 영유하게 된 것은 백제임에도 불구하고 신라를 공격했다는 기술 내용은 믿을 수 없으며, 伴跛가 공격해야 할 세력은 신라가 백제가 되어야 한다거나, 또는 《日本書紀》 에서 安羅를 新羅로 잘못기록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신라가 백제에 동조했기 때문에 伴跛에게 보복을 당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513년 국제회의에서 신라가 伴跛의 기대를 저버리고 백제의 입장을 지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伴跛가 신라를 급습하여, 子女를 잡아들이고, 남아있는 것이 없을 정도로 村邑을 노략질 하고, 誅殺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의 잔혹행위를 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伴跛의 신라공격에 대한 의문 제시는 신빙할 수 없는 《일본서기》의 모습을 재삼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료를 부정하는 것은 좋은 연구자세가 아니다. 아무리 모순되어 보인다고 하더라도 왜 그러한 형태의 기록이 존재하는지 고심해야 한다. 혁거세 8년(기원전 50)부터 21대 소지왕 22년(500)까지 총 59회의 신라에 대한 왜의 침공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500년 지증왕 즉위 이후 《삼국사기》신라 본기에서 왜침 기록은 갑자기 사라진다. 교묘하게도 이는 倭國 畿內 세력의 장기간 내분과 시기가 겹친다. 또한 같은 시기 고구려의 침공도 중단되었다.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가야로 진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이사부전에 보이는 지증왕대(500-514) 가야병탄 기록을 신빙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증왕 후반인 512년 경 이사부가 가야를 병탄하여 그 영토 일부를 차지했다. 그곳은 伴跛의 영토였다. 여기서 514년에 가서 伴跛가 新羅에 대한 처절한 보복을 감행한 이유가 설명이 된다. 512년 직전부터 백제가 서쪽에서 伴跛의 기문과 대사지역을 공략하여 伴跛의 주력이 서쪽에 묶이자, 지증왕이 이사부를 시켜 동쪽에서 그 영토를 침략했던 것으로 보이며, 여기에 대한 보복으로 514년 伴跛가 신라에 대한 잔인한 급습을 했던 것이다. 양국의 화합의 길은 514년 신라에 대한 伴跛의 급습만 존재했다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앞서 512년 경 신라가 伴跛를 침공했고, 그에 대한 반발로 伴跛가 보복을 하는, 서로 주고받은 역사가 있었기 522년 결혼동맹이 가능했다. There is a contradiction in the record of the Ban-pa attack on the Silla which is shown in the Nihonshoki. Have been questioning this Point for 100 years and Having come up with a lot of speculative views. Above all, it is necessary to strictly contrast it with the records of the Japanese scribes, the Nihonshoki and the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Samguksagi and find the records symmetrical to each other. However, it is understandable that the the Silla attack on the Kaya recorded on the Samguksagi Isabu Electric is contrasted with the records of the Ban-pa attack on the Silla. In the year 512, the governor Isabu battled the Banpa and occupied part of the territory, and in 514, the Banpa tried to retaliate against Sil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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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백제의 문화적 특성과 융합

        서현주(Seo, Hyun-ju) 신라사학회 2018 新羅史學報 Vol.0 No.42

        본고에서는 고고학 자료 중 주거와 건물, 고분, 이와 관련이 많은 기와, 토기 등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신라와 백제의 문화적 특성을 정리해보고, 단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신라와 백제 문화의 융합(교류) 문제에 접근해보았다. 신라와 백제는 6세기 중엽 이후 대체적인 변화 양상이 유사하지만, 그 이전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하는데 이는 주거뿐 아니라 고분, 기와의 제작기법, 토기의 기종 구성과 형식 등에서 잘 드러난다. 그 배경에는 원삼국시대 이래 두 국가의 왕실이나 건국세력의 계통이나 구성, 북방과의 친연성, 지리적인 위치에 따른 중국과의 친연성 차이와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두 국가의 문화적 특성은 신라의 경우 전통성, 배타성(획일성), 후진성, 백제의 경우 다양성(포용성), 개방성, 그리고 선진성으로 정리될 수 있겠다. 두 국가는 일정 시기에 문화적인 융합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 양상은 단계적으로 차이가 난다. 4~6세기 전엽에는 두 국가의 변경지역인 충청지역에 신라가 진출하여 백제계(마한계 포함) 문물이 늦게까지 공존하기도 하는데 이는 그 지역 일대의 백제계 지방민에 의한 것이다. 이 시기에 신라 왕경에 나타나는 토기나 기와 등의 백제 문물도 이들을 매개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 문화가 전반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신라와 백제 문화의 융합이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여러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기와의 제작기술, 사찰을 비롯한 건물의 건축기술, 토기를 중심으로 한 식기문화 등에서 백제 문화의 영향이 확인된다. 이 때의 문화적 융합은 나제동맹, 혼인동맹 등으로 맺어진 백제와 신라 관계가 바탕이 된 것이며, 주로 신라지역에서 백제 멸망 직후까지 이어진다. 이후 신라는 기존의 전통문화나 중국 문물을 받아들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도 하는데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의 문화적 차이는 다소 커지는 양상도 나타난다. This study set out to arrange the cultural characteristics of Silla and Baekje in archeological materials about dwelling, buildings, old tombs, and many roof tiles and pottery related to them and take an approach to the issues of cultural convergence(including exchanges) between Silla and Baekje. The two states showed similar changing patterns overall since the middle sixth century, but there were big cultural differences between them in the former period. These differences are clear in houses, old tombs, making techniques of roof tiles, and types and forms of pottery. As for the cultural characteristics of the two states reflected in them, Silla was characterized by tradition, exclusiveness(uniformity), and backwardness, while Baekje was characterized by diversity(acceptability), openness, and advancement. There was cultural convergence between Silla and Baekje, as well, with some differences in its pattern according to the stages. During the period of the fourth century ~ the former half of the sixth century, the Baekje-style things remained in some areas of Chungcheong that were incorporated into the territory of Silla or were partially found in Wanggyeong of Silla. Since the middle sixth century, cultural convergence between Silla and Baekje became full-blown in the overall changing process of Silla culture. Silla accepted many things from Goguryeo and Baekje, and the influence of Baekje culture was found in Silla"s roof tile-making technology, building construction technology, and tableware culture around pottery. This cultural convergence was based on the relations of Baekje and Silla including Silla-Baekje Alliance and marriage alliance. As Silla created a new culture based on the introduction of Chinese civilization as well as its old traditional culture since then, cultural differences between Baekje and Silla became large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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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천하관과 삼국통일론

        김수태(Kim, Soo-tae) 신라사학회 2014 新羅史學報 Vol.0 No.32

        신라 중대와 관련된 논쟁 가운데에서도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주제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관련된 문제이다.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이었는가, 백제통합만을 위한 전쟁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신라가 처음부터 삼국통일을 의도하고 전쟁을 벌였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신라로서는 백제와 고구려에 대해서 통일전쟁을 벌일 의지를 키워나가기는 어려운 사정이었다. 백제멸망이 신라의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고구려 내부의 혼란이 진행되자 신라는 고구려멸망까지를 계획하고 주도해나갔다. 신라의 삼국통일론이 형성된 시기는 671년 무렵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다는 언급이 처음 나오기 때문이다. 중국의 당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면, 신라는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이는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를 분리시켜 지배하려는 당의 움직임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신라는 삼국통일론이란 천하관에 이어, 삼한통일론을 새롭게 주장하였다. 이제 삼국이라는 국가의 통일만이 아니라, 그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종족의 통일을 언급하게 된 것이다. 삼국이 서로 동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삼한통일론은 673년 김유신의 죽음을 앞둔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신라의 입장에서 삼국인들의 단결을 바라는 현실적인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내부의 통일 없이는 삼국의 진정한 통일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론이 실질적으로 추구된 시기에 대해서 문무왕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676년, 혹은 신문왕대 9주가 설치된 685년을 들기도 한다. 그러나 옛 고구려의 영역을 당나라가 거의 대부분 장악하고 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 늦은 시기인 성덕왕대 나당관계가 개선되고, 당나라와 신라가 발해의 움직임에 공동으로 대처하는 735년에야 그것은 달성되었다. 당나라가 대동강이남 지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를 비로소 인정한 것이다. 선덕여왕대 당나라의 태종과 신라의 김춘추 사이에 맺은 약속이 이제야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동안 신라가 추구해온 독자적인 천하관이 당나라에 의해서 마침내 받아들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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