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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명문 괘불궤 연구

        허상호 불교미술사학회 2019 불교미술사학 Vol.28 No.-

        조선후기 괘불궤는 목재로 만들어진 불전(佛殿) 장엄구(莊嚴具) 외에 사찰에 남아 있는 유일한 대형 불교용 가구이다. 괘불을 봉안하는 용도의 일차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지만 불탁처럼 기물을 보관하는 수장구(修粧具)로써의 역할도 수행하며, 괘불 반·출입을 위한 수납 용구밑 야외 설단을 위한 재단의 역할도 겸했다. 현재 남아 있는 명문 괘불궤는 소수지만 괘불의 화기처럼 제작 경위를 기록하고 있어 조선후기 괘불의 가치를 짐작하게 한다. 또한 명문 괘불궤에는 괘불의 화기처럼 제작 연대와 제작 기간, 제작자, 시주 물품 및 시주자 등이 기록되어 있어 불교 목공예의 편년자료로써의 가치가 높다. 명문 분석을 통해 17-18세기 괘불궤는 ‘ 樻 櫃’, ‘掛佛 樻 ’ ‘掛佛欌’, ‘ 樻 欌’, ‘靈山廓’ 으로 기록되어 있어 함보다는 ‘괘불궤’라는 명칭을 선호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록을 통해 괘불궤를 제작한 이는 나무를 다루는 ‘목수’, ‘목편수’, ‘작궤편수’이며, 철물을 다루는 이는 ‘야장 야공 야철편수 로야장’, 그리고 궤를 꾸미는 장인은 ‘궤장편수 장식편수 은장편수’ 등으로 소임을 통해 대형 사찰용 가구 제작에 장인들의 역할 분담을 확인할 수 있다. 괘불궤의 구조는 앞뒷 널, 좌우측 널의 사면을 상자형태로 결구한 긴 장방형의 몸체에 덮개와 바닥이 결합된 것으로, 덮개가 분리되는 분리형과 경첩이 달린 개폐형이 있다. 또한 표면 장식의 유무에 따라 기능적 철물을 가진 기본형과 장식형, 그리고 짜임은 앞뒷 널과 좌우측 널의 결구 방식에 따라 사개짜임과 맞짜임으로 구분된다. 특히 괘불궤 관련시설로 불전에 고정된 반·출입 문 외에 금탑사 극락전에는 조선후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굴림대 장치가 발굴되어 대형 괘불과 괘불궤의 야외 이동을 위한 설비를 확인할 수 있다. 이상 17-18세기 명문 괘불궤를 통해 명칭과 구조, 유형을 분류할 수 있으며, 특징과 표면 장식은 아래와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명칭은 묵서를 통해 조선후기 괘불궤를 ‘함’이라 부르지 않고 ‘궤’라고 칭했으며, 제작 장인 역시 ‘작궤편수’라고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구조와 형태는 문양과 재료의 구분 없이 괘불을 수납하는 용도의 일차적인 목적을 위해 장방형 상자의 기본 틀을 유지한다. 하지만 17세기 괘불궤가 몸체에 소수의 기본형 철물만 부착했다면, 18세기는 화원들의 참여로 체계적인 설계가 이루어진다. 화원의 역량 차이는 있지만 이 시기 괘불궤는 균형과 비례감이 정착되며, 철물을 다루는 야장, 야철, 장식편수 등의 참여로 공정의 분업화에 따른 수준 높은 불교식 가구 철물이 부착된다. 셋째, 구조와 표면 장식은 시대적·지역적 성향과 상관없이 불사에 동원된 재료 수급과 시주 물목, 그리고 제작에 참여한 제작자의 전문성에 따라 문양과 장식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장식형 괘불궤인 흥국사, 금탑사, 법주사, 운흥사, 은해사는 목수와 화원이 제작한 괘불궤에 비해 전문 야장들의 참여로 철물의 장식성과 재단 기법의 세밀함이 돋보이며, 철물의 공간적 배치와 비례, 표면 도금 등 철물의 다양성을 엿 볼 수 있다. 넷째, 표면 채색 장식은 수도사노사나불괘불탱 괘불궤처럼 옻칠 바탕 후 문양을 시문한 유일한 사례가 있다. 시문된 문양은 사경 변상도처럼 연꽃, 보상화, 모란 등 불교적 길상화가 모본으로 쓰이며, 도상화되고 패턴화되... Wooden container for gwebul of late Joseon Period is the unique large-sized buddhist furniture besides the wooden ornamental objects. It has been made for the use of preserving gwebul painting but has been used for keeping buddhist objects as well as protective box for bring gwebul from a main hall. In addition it has been used for outdoor altar during a ritual. Remaining inscribed gwebul container are rare, however they have high value considering that it has recorded aims, year, and period of production, painter, donated offerings and donors as it did in scroll painting. Inscription analysis has informed that the 17th and 18th century container recorded ‘ 樻‧櫃’, ‘掛佛樻 ’ ‘掛佛欌’, ‘ 樻欌’, ‘靈山廓’, which indicates that crate is more popular terminology to call it rather than container. The records provides an information on carpenters, metal craftsmen, and decorative craftsmen and their responsibilities in its production. A container is combined of a front and rear, left and right, and top and botton plank board forming the shape of long in left and right. The structure of a container. There are two types of a container : 1. a container of a separated lid ; 2. a container of a lid connected to the body. In addition its type can be categorised by the existence of surface decoration. Other than a smaller door of a hall for moving a gwaebul, there is a rolling wheel in Amitabha hall of Geumtapsa temple to bring out it to the courtyard. The 17th and 18th century containers can be categorised by name, structure, and types. Following is the summary on distinctive characteristics and surface decoration during the period. Firstly, it was called ‘gwae’, which means crate without calling it ‘harm’, which means container. A craftsman who make it has been called ‘jakgwaepyeonsu’. Secondly, it has long container in left and right because its main function is to keep gwaebul. The 17th century container has a lid of few hinges whereas the 18th century one has been carefully designed due to the participation of painters. Proportion and balance as a artwork has been culminated in this period. Also role of metal craftsmen has been settled by the participation of related craftsmen in production. Thirdly, types of structures and surface decorative elements has affected to the design and ornamental forms, which has reflected artistic capability of painters, quality of materials, and list of offerings, regardless of historic or regional characteristics. In particular container of Heunguksa, Geumtapsa, Beopjusa, Woonheungsa, and Eunhaesa temple which are much decorative, dispays ornamental quality of metal objects through careful choice of location, proportions, and surface gilt skills of metal objects. Fourthly, the 17th and 18th century container has used the same types of metal objects which were used for furniture of daily use and similar wooden materials for body board of a container from pines, Tilia, soft pines, Pyrus. Fifthly, the container of Sudosa temple is the only remaining example, which has been carved after lacquer paintings examples surface decoration. Carved design includes buddhist ornamental flowers such as lotus, floral medallions, Peony, for line-drawings and settled into popular iconography and patterns. It also copies that of the painting, which shows the exchanges between craftsman and painters and the significant role of painters in making a container. This paper has exmined and analysed some distinctive aspects of the 17th and 18th container for large-sized buddhist paintings. Inscribed containes among 118 remaining containers would provide valuable information on periodic characteristics and developments of temple furniture as well as symbolic meaning of them. This paper has provided a platform to recognise a container as a religious objects for worship but also as a sacred space for buddha.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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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 後期 佛卓 연구

        허상호(Her Sang-ho) 한국미술사학회 2004 美術史學硏究 Vol.- No.244

        본 논문은 현재 ‘須彌壇’ 이나 ‘佛壇’으로 불러지고 있는 조선시대 木造 卓子에 관해 고찰한 것으로, 조선 후기 불탁 명문을 통해 밝혀진 ‘卓子’라는 용어를 통해 일반탁자와 구별하기 위해 ‘佛卓’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였다. 조선 후기 佛卓은 예배의 대상이 되는 불상을 봉안하는 기능뿐 아니라 佛殿을 장엄하며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중요한 佛殿莊嚴具로 알려져 있다. 불탁이란 통례적으로 불려왔던 ‘須彌壇’을 지칭하는 것으로, 불상을 모시는 받침을 수미단이라 부르는 것은 석가모니가 마야부인을 위하여 설법한 곳이 수미산 정상이고, 그 모습 역시 수미산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불탁은 고대 불전 내부의 壇에서 佛座에 이르기까지 불상을 받치는 臺로써 알려져 왔으나, 그 중에서도 조선 후기 불탁은 禮佛과 儀禮를 위한 기능적인 ‘卓子’ 로서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구조와 장엄양상을 가진다. 특히 고대에는 佛像奉安部로서 1차적 기능을 하였지만, 17세기 전란 이후 불교대중화에 따른 불교의식의 확대와 의례장소의 공간이동으로. 예불공간의 필요성이 확대되면서 불전 내 불탁의 위치와 장엄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불탁은 불교의식의 발달, 營建 주체자의 변화, 佛身의 재료 변화와 함께 ‘佛座’ 라는 초기의 단순기능에서 供養과 儀式, 그리고 莊嚴을 집행하는 陳設壇이라는 기능적 구조물로 변화하였다. 이와 같은 변화는 戰亂 이후 천도를 위한 齋 儀式의 유행과, 儒敎의 孝思想에 기반을 둔 祖上崇拜, 그리고 基層民의 低邊에 내재한 民間信仰까지 수용하였던 불교대중화의 필연적 결과였다. 이는 17세기 佛殿을 理想鄕으로 바라는 민중들의 심리에 부응한 불전 장식화 경향의 반향으로, 특히 조선 후기 불탁에는 匠人들의 미적 취향과 의식, 그리고 시대적 특징들이 반영되어 있다. 佛卓의 構造는 上臺ㆍ中臺ㆍ下臺의 3단을 기본으로, 상부 가리개인 寶壇ㆍ홍살ㆍ補卓 등 여러 가지 보조물로 구성된다. 이것은 불전 내 장엄체계에 따른 건축요소와도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진다. 조선시대 불탁에 나타나는 주요 특징은 형식분류 결과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불탁의 형식은 3단의 외형적 구조에 따라 古式形ㆍ一般形ㆍ特殊形으로 분류되며, 그 기능과 쓰임에 따라 초기 불좌를 상징하는 고식형에서 17세기 중반 천판의 발생과 표면이 장엄된 일반형 불탁으로 정형화된다. 특히 조선 후기 불탁은 佛殿 내 三段分壇法에 따른 上壇으로서 불상 봉안 외에 공양과 장엄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수용하는 탁자로 다변하였으며, 불전 장식화 경향에 따라 중대를 화려하게 장엄하게 된다. 둘째, 조선 후기 불탁의 위치와 규모는 불전이라는 공간적 입지 속에서 불상의 수, 의식의 확대와 연관성을 가지며, 역으로 의식을 위한 좌석배치와 공간구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불탁은 불전 내 高柱의 위치에 의해 결정되며, 17세기 이후 예불의 편리성을 위해 불탁 전면의 확대와 함께 불탁이 후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불탁은 위치에 따라 中心形ㆍ正置法ㆍ移住法ㆍ側坐法ㆍ後置法의 5가지 형식으로 분류되며, 17세기 이후 3×3칸의 중형 불전을 중심으로 이주법이 현저히 증가한다. 이 밖에 불탁의 세로와 가로 비례는 17세기 이전 평균 1:1.56에서 17세기 중반 1:2.78 후반 1:3.02로 불상 수의 증가에 따른 불탁의 가로 비례가 증가하고, 불탁의 공간 점유율 역시 17세기 이전 7%에서 17세기 중반 11%. 후반 16%로 꾸준히 증가하여, 조선 후기 불탁이 불상을 봉안하는 단에서 헌공구ㆍ장엄구 등이 진설되는 공양대의 기능으로 多變하였음을 보여준다. 셋째, 조선시대 불탁의 장엄과 문양은 中臺를 중심으로 하대의 족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되며, 지역적 특징을 내재하고 있다. 문양은 초기 金剛杵ㆍ供養花 등 佛像守護와 供養을 위한 단순한 기능적 문양에서 후기 메시지를 전달하는 함축적인 도상이 불탁의 표면을 장엄하게 된다. 문양의 주체는 부처전생의 동식물로 일부의 도상은 불교적 소재 속에 몸짓과 동작, 화면의 연속적인 전개를 통해 극적인 ‘說話的 構成’ 을 연출하며, 本生譚을 중심으로 허구의 시작과 끝이 불타의 메시지를 담은 독특한 도상으로 창조 되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들 도상은 인간과 선인의 모습보다 석가 전생의 모습 중 민간인들에게 쉽게 접근 할 수 있는 동ㆍ식물을 주인공으로, 17세기 전란 이후 불자가 바라는 來世의 輪廻觀과 祈福信仰을 함축적으로 묘사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 불전이 極樂淨土로 美化되는 장식화 경향과 함께 불탁 역시 禮佛과 供養을 위한 기능적인 요구에서 민간신앙의 바람까지 포용한 불교적 이상향을 불탁 전면에 도상화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조선 후기 불탁은 초기 수미산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須彌壇’ 이라는 불상 봉안부에서, 供養과 莊嚴을 상징하는 기능적 구조물로 점자 변용되었으며, 의식집행의 설행처로서 불교대중화에 따른 입체적인 경전으로 그 역할을 대변하였다. 또 불상을 장엄하는 수단으로 채택된 불전 장엄법을 통해, 불전의 중심에서 불탁을 장엄하였으며, 그 결과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장엄불탁을 창출하게 되었다. This paper examines wooden altars of the Joseon period which were commonly called “Sumeru Altar" and had a unique structure and decoration. The Buddhist altar developed out of a pedestal or an altar designed to install a Buddha image. It shows aspect to combine decoration with memorial service according to popularization of Buddhism. development of various rituals. and material diversification of Buddha images. The simple function to enshrine Buddha images adds to element of the ritual altar. This tendency resulted from the popularization of Buddhism. which was generated by the emergence of a ritual ceremony for the dead and the incorporation of confucian ideas and the folk beliefs. The structure of the decorated Buddhist table exhibits periodic changes. The Buddhist altar is composed of upper pedestal. middle pedestal. lower pedestal. and subsidiary elements like bar. These elements have a close relation with decorative elements. The Buddhist altars of the Joseon period have several formal characteristics. First. they are classified into three types. (1) classical type. (2) general type, and (3) special type. The Buddhist altar originally derived from the earthen altar and pedestal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After the original form, hall-shaped and pedestal-shaped altars appeared. The Buddhist altars of Joseon period have a structural characteristics that combined various elements. In addition, this type is taken root as a general type of square-shaped. This fact is proved by the inscription of the 17th century. The general type is classified into three types by the middle pedestal. Second, the size of the Buddhist altar are affected by the number of images to be installed and rituals to be performed The scale of Buddhist hall is decided by the high pillar forming the worship space, after the 17th century the Buddhist altar lies in the rear of the hall for the convenience of worship and the expansion of the central space. In the 18th century, the size of the Buddhist altar steadily grows bigger due to the functional expansion for the ritual ceremony and the generality of the main platform painting. Also it took the shape of a rectangle due to the increase of images. Third. the decoration of the Buddhist altar reflected the regional characteristic. The patterns of the middle pedestal seem to show all things in nature around Buddha. These patterns are to form the appearance of Mt. Sumeru. Some of the patterns seem to show the narrative composition. The narrative composition has something to do with the Buddhist literature that became popular at that time, and these patterns seem to describe stories of the Buddha's former births This composition is to illustrate the contents of the sutra.

      • 17~18세기 불화의 『畵記』 분석과 용어 考察

        이종수(李宗洙),허상호(許詳浩) 동국대학교 박물관 2010 佛敎美術 Vol.21 No.-

        사찰에서는 佛像이나 佛畵를 조성하거나 전각을 짓기 위해서 幕緣이라는 과정을 거치거나 승려나 佛子가 化主가 되어 불사를 후원하게 된다. ‘佛事’란 원래 부처의 덕을 讚嘆ㆍ宣揚하는 것으로 부처와 관련된 모든 일을 불사라고 하나, 후세에는 佛前에서 행하는 儀式 또는 法會, 寺院ㆍ塔 등의 건립을 佛事ㆍ法事라고 칭한다. 일반적으로 『畵記』는 불화가 지니는 종교화의 특성 외에 기록성을 겸비하고 있어 불화 조성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여기에는 시대에 따라 불사를 주도하였던 계층과 신앙의 변천, 불화의 조성 목적 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 사원경제와 이를 운영하였던 승려들의 역할에 대해 이해하는 요소가 된다. 「畵記」를 통해서 ‘왜’, ‘어떻게’ 그렸는가를 살펴 볼 수 있으며, 화폭에 표현된 조형언어를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화에서 「畵記」는 그림에 기재된 단순한 기록일 뿐만 아니라 형태와 내용 및 ‘작가’와 ‘작품’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17~18세기 불화의 「畵記」 분석을 통해 단편적이지만 당시 승려들의 소임과 역할, 시주물목과 그 쓰임에 대해 살펴보았다. 16세기 불화의 「畵記」에서는 대개 시주불목이나 승려들의 소임이 극히 한정되게 기록되어 있는 편이었으나, 17~18세기 불화의 「畵記」에서는 구체적인 시주물목의 열거와 더불어 다양하게 분화되고 전문화된 승려들의 소임이 열거되어 있어 당시 변모되어진 사회상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이는 조선후기 兩亂 이후 복구활동과 더불어 사원경제가 확대됨에 따라 그에 걸 맞는 역할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런가 하면 수치적으로 소임의 종류가 증가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실제적으로 증가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같은 의미의 역할을 다른 용어로 적었기 때문임을 유추해 볼 수도 있다. 또한 같은 의미의 소임일지라도 지역에 따라 사용하는 용례가 달랐음을 살펴볼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畵員을 전라도 지역에서는 金魚나 毘首, 敬畵라는 용어로 사용한 반면에 경상도 지역에서는 良工과 龍眼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두 번째 논제인 17~18세기 불화 「畵記」에 기재된 시주품 물목에 대해서 製作用과 佛事用으로 나누어 종류와 쓰임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施主品이란 용어는 16세기에는 ‘施主品列’, ‘施主列目秩’ 등으로 서술되다가, 17세기에는 ‘施主等俱’, ‘旅主目錄’, ‘施主秩’이라는 용어로 정착되어 그 속에 다양한 물목을 시주자와 더불어 나열하였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소임에서 지역에 따라 사용하는 용례가 달랐음이 드러난 바와 같이 시주품에 있어서도 지역에 따라 사용하는 용례가 달랐음을 살필 수 있었다. 그 한 예로 불화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바팅천을 두고 괘불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충청도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婆湯’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전라도 지역에서는 ‘基布’, 경북ㆍ대구지역에서는 ‘基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또한 17~18세기 「畵記」의 정형화를 통해 施主秩이라는 대항목 속에 婆湯ㆍ彩色ㆍ廻莊ㆍ奉安 등 불화 제작용 시주품과 腹藏ㆍ儀式ㆍ供養物品 등을 중심으로 한 불화 불사용 시주품으로 세분화되어 불사후원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었다. 이렇듯 17~18세기 불화의 「畵記」에는 불사를 이끌던 승려들의 소임과 개인적인 공덕을 위한 다양한 후원자들의 기록이 정형화된 체계 속에 정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구체적인 시주물목과 승려들의 소임에 대한 서술은 우리들에게 불화 한 점을 조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성을 기울였으며, 佛事 功德을 축원하였는지 생각하게 한다. 더욱이 예배자들을 향한 화면 틀 속의 畵記欄에는 승려들의 소임과 시주품, 시주자들을 芳名錄처럼 제시하여 기재한 현상은 조선후기 불교가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고, 대중들을 직접적으로 참여시키는 방편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お寺では仏像や仏畵を造成するとか殿閣を作るため募綠という過程を経るとか僧侶や仏子が化主になって仏事を後援するようになる。 ‘寺事’と言うのは元々お釋迦の德を讚嘆ㆍ宣揚することでお釋迦と係わるすべての事を仏事とげったが、後世には仏前で行う儀式または法曾、寺院ㆍ塔などの建立を仏事ㆍ法事と称する。 一般的に「畵記」は仏畵が持つ宗敎化の特性外に記錄性を兼備していて仏畵造成に關する全般的な事項を調べられる資料だ。特にここには時代によって仏事を主導した階層と信仰の変遷、仏畵の造成目的などが一つ一つ記錄されていて、寺院経濟とこれを運營した僧侶たちの役目に到して理解する要素になる。 「畵記」を通じて‘なぜ’、‘どうに’描いたのかを調べられるし、畵幅に表現された造形言語を解釋できるのだ。したがって仏畵で「畵記」は繪に記載した單純な記錄であるだけでなく形態と內容およびㆍ‘作家’と‘作品’の木質を把握できる手がかりになれる。 この文では17~18世紀仏畵の「畵記」分析を通じて斷片的だが当時の僧侶たちの任務と役目、施主品種とその使いに對して調べてみた。 16世紀仏畵の「畵記」ではたいてい施主品種や僧侶たちの任務が極めて限定されるように記錄されている方だったが、17~18世紀の仏畵の「畵記」では具体的な施主品種の列擧といっしょに多樣に分化されて専門化された僧侶たちの任務が列擧されていて当時変貌されられた社曾を調べた見た。 これは朝鮮後期の兩亂以後の復旧活動といっしょに寺院経濟が擴がるによってそれにふさわしい役目が增えたからで思われる。そうであるかと思えば數値的に役目の種類が增加したように見えることは實在的に增加したりしたが一方に同じ意味の役目を違う用語で書かったからなのを類推して見られる。 また同じな意味の役目でも地域によって使う用例が違ったことをよく見られた。その代表的な例で畵員を全羅道地域では‘金魚’や‘毘首’,‘敬畵’という用語で使ったー方に慶尙道地域では良工と‘龍眠’と言う用語を使ったことを調べてみた。 そして二番目の論題である17~18世紀の仏畵「畵記」に記載した施主品の品種に對して製作用と仏事用で分けて種類と使われるに對して調べてみた。これを通じて地主品と言う用語は16世紀には‘施主品列’,‘施主列目秩'などに敍述されてから、17世紀には‘施主等俱’,‘施主目錄’,‘施主秩’という用語に定着されてその中に多樣な品種を施主者といっしょに並べたことを見られた。 そして役目で地域によって使う用例が違ったことが現われたように施主品においても地域によって使う用例が違ったことを調べられた。そのーつの例で仏畵の一番基本になる畵布を置いて掛け仏を中心に調べてみた時忠清道と慶向道を中心に‘婆湯’という用語を使ったし、全羅道地域では‘基布’、慶北ㆍ大邱地域では‘基子’という用語を使ったことが現われたのだ。 また17~18世紀「畵記」の定形化を通じて施主秩という對抗目の中に婆湯ㆍ彩色ㆍ迴莊ㆍ奉安など仏畵の製作用施主品と腹藏ㆍ儀式ㆍ供養物品などを中心にした仏畵仏事用の施主品に細分化されて仏事後援が休系的に成り立ったことを調べられた。 このように17~18世紀の仏畵の「畵記」には仏事を導いた僧侶たちの任務と個人的な功徳のための多樣な後援者たちの記錄が整形化された休系の中に定着されていることを調べられた。特に具体的な施主品種と僧侶たちの任務に對する敍述は私たちに仏畵の一点を造成するのにどれだけ多い人々が眞心を傾けたし、仏事、功徳を成就を祈ったのか考えさせる。 なおかつ礼拜者たちを向けた畵面のフレームの中の畵記欄には僧侶たちの任務と施主品、施主者たちを芳名錄のように提示して記載した現象は朝鮮後期の仏敎が大衆に易しく近付くことができるし、大衆を直接的に參加させる方便だったろう考えら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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