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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 김장생의 가정관과 아홉 아들

        한기범 한국사상문화학회 2015 韓國思想과 文化 Vol.80 No.-

        The family values of Sakye Kim Jang-saeng was basically based on “Sohak(小學)” and “Garye(家禮)”. Kim Jang-saeng’s family values can be called Confucian scholar’s family values, because the books are primer of Neo-Confucianism and Yehak. Kim Jang-saeng was primarily to educate the book in education to student, especially his son Kim Jip is faithful to its teachings. His student Kwon Keuk-jung learned by direct and actual experience with them at Sakye house in two months, he said Kim Jip’s ‘the way serving his father’ correspond with “Sohak”. And when Sakye discussed all the Kajeongeuirye, he discussed in accordance with “Karye”, if it is not entirely satisfactory or unclear to “Karye” he said he follow his own family manners Jagarye(自家禮). The latter can be said to reflect the pride of the traditional manners of his family, he was a prestigious big family. Sakye family values was focused on ‘faithful Hyowoo(孝友) and Budeok(婦德)’. When his father to China as envoy, Kim Jang-saeng went to there with him, Sakye counted how much his father had a few spoons every time he eat meals, so he took care of his father’s health. And Kim Jip had Honjeongseongshin(昏定省晨) for the father, of course, support with all sincerity, he repaired his father’s residence by himself, if the side dishes are insufficient he catched fish and bring the food to his father. Meanwhile, Kim Jip praised Budeok of Somo(小母), so we can know Sakye Gapung(家風). In other words, it is a loyal and obedient, filial piety does not be wrong with Ye, love for children does not fall into personal feeling, love between couple does not fall into Chinap(親狎) and running a household with strictly fair. there is a passage that can guess the Gapung of the Sakye family. The family values of Sakye has the traits is that we focus on the communicative relationship between having a family member. Sakye guarded the identity constraint of his second wife, Kim(7th generations granddaughter of Kim Jong-seo), he gave to nine sons’ names of both wife word Mok(木), unificative name, and he give name Jaho(字號) to his sons homogenize word Sa(士), so he wished communication and fellowship of that brothers. But it is noted, because it has difference from Sakye’s case(names of Sakye and his own half-brother). And, in particular, Kim Jang-saeng defined the relationship between himself and his son Kim Jip as Sangjangjiik(相長之益) and Jigi(知己). This can be a model of high timeliness and exemplary ‘father-son communication’ in today has been focused by communication. 사계 김장생의 가정관은 기본적으로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에 기초하였다. 이 책들은 성리학과 예학의 입문서가 된다는 점에서 김장생의 가정관은 곧 ‘성리학자(예학자)의 가정관’이라 할 수 있다. 김장생은 문인교육에서 이 책들을 우선적으로 교육하였고, 특히 아들 김집은 그 가르침에 충실하였다. 문인 권극중은 두 달간 사계댁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김장생⋅김집 양현의 선비적 삶을 체험하고, 김집의 ‘아버지 섬기는 도리’가 『소학』과 완전 일치하였다고 증언하였다. 그리고 사계는 모든 가정의례를 『가례』에 준하였고, 『가례』에 미진하거나 분명하지 않는 것은 자기 집안의 예법인 자가례(自家禮)를 따른다고 하였다. 후자는 그가 명문대가인 자기 집안의 전통적 예법에 대한 자부심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계의 가정관은 ‘성실한 효우(孝友)와 부덕(婦德)’을 중시하였다. 김장생은 중국 사신으로 가는 아버지를 수행할 때, 식사 때 마다 아버지가 몇 수저씩을 드시는지 마음속으로 헤아려서 아버지의 건강을 보살폈다. 그리고 김집은 아버지를 위해 혼정성신(昏定省晨)은 물론이고, 종일 정성으로 부양하며 아버지의 거처가 부실하면 흙손으로 직접 수리하고, 반찬이 모자라면 스스로 직접 고기를 잡아다가 아버지를 부양하였다. 한편 김집은 소모(小母 : 염선재 김씨부인)의 부덕을 찬양하여, 사계의 가풍을 알게 한다. 즉 그것은 순종하되 의리가 있고, 효행이 예에 어긋나지 않으며, 자식 사랑이 정에 빠지거나 부부애가 친압에 빠지지 않게 하고, 가족을 거느릴 때 엄정함이 있다는 것 등이다. 사계 가정의 가풍을 짐작할 수가 있는 대목이다. 사계의 가정관은 가족 구성원간의 소통적 인간관계를 중시하였다는 데 그 특색이 있다. 사계는 두 번째 부인인 김씨부인(김종서의 7대손녀)의 신분적 제약을 감싸주었고, 두 부인이 낳은 아홉 아들들의 이름을 목자(木字)가 들어간 이름으로 통일하고, 또 자호(字號)를 사자(士字) 로 통일되게 지어 아들 형제의 소통과 화목을 바랬다. 그런데 그것은 사계 자신의 이복형제들의 이름들과는 대조적이어서 주목된다. 특히 김장생은 자신과 아들 김집과의 사이를 상장지익(相長之益 : 서로의 학문과 인격을 자라나게 하는 유익함)의 관계, 지기(知己 : 자기를 알아줌)의 관계로 규정하였다. 이것은 소통이 시대의 화두가 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 매우 주목되고 시의성이 높은 모범적인 ‘부자간 소통’의 귀감이라 할 수 있다. 17세기 사계가문에 있어서 부자간의 지기적 소통은 부자가 산림의 종장이 되고 함께 문묘에 배향되는 윈윈(win-win)의 결과를 낳았고, 아홉 형제간의 이름과 자호(字號)의 통일은 가족소통과 가족 단합의 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 KCI등재

        思庵 朴淳의 官僚活動과 經世觀

        韓基範 한국사상문화학회 2006 韓國思想과 文化 Vol.34 No.-

        The life of Park-Soon and his view of statesmanship / Han, Ki-Bum 박순의 시대는 사화와 당쟁이 점철된 정치적 변혁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또한 훈척정치를 척결하고 사림정치시대를 열어간 청신한 기풍이 진작된 시기이기도 하였다. 박순의 관료활동은 대개 3시기로 구분된다. 제1기(31-42세)는 그가 중앙의 청요직을 구루 경험하고, 외척세력인 임백령의 시호문제로 사림의 중망을 얻기 시작한 시기이다. 그리고 제2기(43-49세)는 명종 말 선조 초에 박순이 삼사(三司)의 수장과 전장(銓長)을 역임하면서 윤원형의 외척세력을 축출하고 사림정치의 기반을 다진 시기이며, 제3기(50-63세)는 박순이 14년간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림정치를 이끌 인재를 등용하고 붕당간의 조화를 추구하며, 사림적 개혁정치를 선도하던 시기이다. 이러한 박순의 관료활동은 선조의 소극적인 대응으로 인해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초기의 훈척정치의 척결과 사림정치의 기반 형성에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한편, 박순의 경세관(經世觀)은 대개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부패하고 고답적인 훈척정치를 배격하고 공론(公論)과 공도(公道)가 중시되는 사림정치를 추구한 경세관이다. 둘째, 사림의 공론애 기초한 무실적인 개혁을 지지한 개혁적 경세관이다. 셋째, 예제(禮制)의 개혁을 통해 도덕적 윤리사회를 이루고자 하는 예치적(禮治的) 경세관이다. 이러한 박순의 경세관은 기본적으로 사림정치의 요체가 되는 것으로, 선조 초의 정치계에는 물론, 다음시기인 17세기의 산림정치와 예학시대를 선도하는 측면을 지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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