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坪井淸足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82 馬韓, 百濟文化 Vol.4 No.-
제량평야의 동남우의 소분지[비조]는 7세기의 일본정치의 중심지이며 이 지방에 6세기 불교전래 이래의 초기사원적이 수없이 발견되어짐은 1900년경 이래의 선인의 조사 즉 주로 와당등의 유물의 채집 초석등의 측량등에 의하여 분명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지방에 대한 과학적인 발굴조사가 행해지게 된 것은 1950년대 부터였다. 1953년에 일본고고학협회안에 승문 미생 고분 각위원회와 더불어 설치 되어진 불교유적 조사특별위원회의 사업으로 [비조시대사원지의 연구]의 저자 석전의작씨를 위원장으로 하여 귤사 정림사가 발굴조사 되어졌다. 그 결과 성덕태자시생지를 기념하여 창건되어 졌다고 하는 소전귤사는 동향의 사천왕사식 가람배치를 갖는 절로서 7세기 중엽에 창건되어 탑의 심초는 기단상면에서 1m정도 낮게 두어지고 삼방에 반원의 첨주를 갖는 원주의 요일단의 주좌를 갖는 것이라는 것 등이 밝혀지게 되었다. 성덕태자건립이 사원의 하나라는 소전을 갖는 정림사적도 귤사 보다도 깊이 지중에 높여진 심초를 갖는 탑 소상편등이 검출 되어졌으나 이 모두가 다 단기간의 트렌치조사에 불과하여 귤사는 그뒤 1955년~6년에 약간의 보정적 조사가 행해져 금당의 규모가 확인되어짐에 머물렀다.
坪井淸足 원광대학교 마한백제문화연구소 1982 馬韓, 百濟文化 Vol.4 No.-
내량분지의 동남우에 있는 7세기 日本 정치의 중심지였던「비조」의 발굴조사가 행해지게 된 것은 1950年代에 들어서였다. 1953年에 일본 고고사협회 불교유적조사 특별위원회가 귤사와 정림사를 발굴하였는데 7세기 중에 성덕태자가 탄생한 곳을 기념하여 창건한 귤사는 그 때까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동향의 사천왕사식 가람배치였음이 밝혀졌고 7세기 성덕태자가 건립한 사원의 하나인 정림사에서는 땅 속 깊이 파묻혀있는 심초를 지닌 탑과 소상편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모두가 단기간의 트렌치조사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1955年에는 대화분지 남반부 일원의 관개용도수로 건설 예정지의 조사가 시작되어 내량 국립문화재 연구소가 이 조사를 담당하게 되어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1955年에는비조를 중심으로 하는 180㎢의 지역을 6500分의 1의 항공사진을 촬영하여 이를 바탕으로 비조지방의 1000분의1의 대제척지도의 제작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現在35面 비조지방의 평지부 태반의 지형도가 완성되고 조사 보존문제의 기본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