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논문]최치원의 재당생애 재고찰

        이황진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2 한국민족문화 Vol.42 No.-

        최치원의 재당생애에 대한 연구는 한중 양국에서 상당히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논자들의 결론은 각양각색인데, 특히 최치원이 동도 유랑을 했던 이유와 그 기간, 율수현위로 부임한 시기, 율수현위직에서 물러난 시기와 임기만료 여부, 고변막부로의 입막 시기 등에 대한 견해차가 심한 편이다. 이에 필자는 한중 양국의 견해들을 토대로 이를 종합 분석하였으며, 그 바탕 위에 그간 연구자들이 최치원의 재당행적을 살필 때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당의 과거제도 중 전선제도를 그 근거로 삼아 최치원의 재당생애를 재고찰하였다. 874년 과거에 급제한 최치원은 전선제도의 규정에 따라 3년 동안 ‘수선’(관직을 받기까지 기다림)을 해야 했기에, 그 기간동안 동도유랑을 하였으며, 그 기한을 마친 후 877년 율수현위로 부임하였다. 그리고 만당시기 종구품의 임기 기한인 3년을 다 채운 후 879년 겨울 율수현위직에서 물러난 후 다음 관직을 받기까지 기다릴 필요 없이 곧바로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지름길인 박학굉사과에 응시하고자 준비하였다. 하지만 황소의 난 등으로 인해 당시 정국이 혼란해지면서 그것마저 시행이 취소 혹은 무기한 중단되자 다른 출로인 막부로의 입막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880년 여름 즈음 고변막부로 입막하였다. 对于崔致远的在唐事迹, 中韩两国都进行了较为活跃的研究。但是在一些问题上-特别是崔致远浪迹东都的原因和时间, 赴任栗水县尉的时间, 卸任栗水县尉的时间, 是否为期满卸任, 入高骈幕府的时间等, 论者们得出的结论多种多样, 看法上存在着不小的差异。为此, 笔者以中韩两国的见解为基础, 对其进行综合分析,并在此基础上, 以唐代科举制度中的铨选制度-特别是“守选”这一规定为根据, 对崔致远的在唐事迹进行再考察, 这项制度在以往研究者对崔致远的研究中是不甚受重视的。崔致远于874年科举及第, 按照铨选制度的规定, 必须“守选”三年, 因此他便在这期间浪迹东都, 并在此后于877年赴任栗水县尉。晚唐时期, 从九品的任期期限为三年, 崔致远在三年期满后卸任溧水县尉一职, 并开始为应考无须“守选”便可登上仕途的捷径—博学宏词科而做准备。但因“黄巢之乱”等原因, 当时的政局陷入混乱, 博学宏词科的考试也不得不取消或无期限中止了。崔致远在摸索中找到了入幕府这一出路, 并于880年夏进入了高骈幕府。

      • KCI등재

        한ㆍ중 속담에 나타난 불보살(佛菩薩)에 대한 인식 비교 고찰

        이황진 열상고전연구회 2016 열상고전연구 Vol.49 No.-

        본고는 한․중 속담에 나타난 불보살에 대한 인식을 비교 고찰한 글이다. 불보살은 부처와 보살을 함께 아우르는 명칭으로, 본고에서 필자가 대상으로 삼은 불보살이 직접 등장하는 속담은 한국 속담이 50여개, 중국 속담이 170여개이다. 먼저 한국과 중국 속담에 등장하는 부처와 보살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는지를 속담 속 칭호를 중심으로 그 양상을 살펴보았다.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전래받은 한국은 자연스레 중국에서 음차하거나 번역한 용어를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기에 대다수의 불교용어들은 중국어와 한국어라는 발음상의 차이를 가질 뿐 거의 동일한 뜻을 갖고 있는 편이다. 하지만, Buddha를 음차한 한자어 ‘佛陀’(Fótuó)는 한국에서 ‘부처’라는 한국만의 칭호로 정착하였으며, ‘보살’은 한국과 중국에서 각기 다른 의미를 내포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다음으로 불보살에 대한 인식을 비교 고찰하였다. ‘보살’이란 용어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인식이 서로 다른데, 그러한 인식이 속담에도 반영되어 나타난다. 한국에서 보살은 불교를 믿는 여자 신도를 지칭하기도 하고, 여자 무속인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중국에는 없는 뜻이다. 반면 중국에서 보살은 넓은 의미의 부처로 인식되며 보통 부처를 보살로 칭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경우가 드물다. 또한 마음씨가 착하고 자비심 많은 사람을 비유하는 용어로 한국에서는 부처가 흔히 사용되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보살이 그런 존재로 여겨진다는 차이를 보인다. 그리고 한국의 돌부처와 중국의 금부처, 불보살을 대하는 태도, 향공양[燒香], 성불(成佛)을 소재로 한 속담들을 통해 한국과 중국의 불보살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This study aims to compare the awareness of Fopusa(佛菩薩), or the Buddha and the Bodhisattva through Korean and Chinese proverbs. Fopusa(佛菩薩) refers to both the Buddha and the Bodhisattva, and proverbs used as the subject of this study that included the Buddha and the Bodhisattva were over 50 Korean proverbs and over 170 Chinese proverbs. First, it looked into what kind of the Buddha and the Bodhisattva were there appeared in Korean and Chinese proverbs, focusing on titles used in proverbs. Since Buddhism came to Korea via China, most of Buddhist terminologies used in Korea was either borrowed or translated from the Chinese language, thus sharing almost the same meanings. The difference lied in the fact that the Chinese word referring to the Buddha, or “佛陀’(Fótuó)” became a uniquely Korean word, “부처(Bucheo)” in Korea, while the word referring to the Bodhisattva had different meanings in Korea and China. Next is to compare the awareness of the Buddha and the Bodhisattva. The awareness of the term “Bodhisattv” were different in Korea and China, therefore such difference was reflected in proverbs. In Korea, a Bodhisattva can also mean a faithful female Buddhist, or at times a female shaman, but there’s no such thing in China. In China, on the contrary, the Bodhisattva means the Buddha in a broader sense and the Buddha is often referred as the Bodhisattva. In Korea such meanings are rare. Also in Korea, to call a person with a good and generous heart the term Buddha is used as a figure of speech but in China it is the Bodhisattva that is used in a similar way. In addition, this study confirmed the difference between the awareness of the Korean Buddha and the Bodhisattva and the Chinese Buddha and the Bodhisattva, through proverbs featuring the Korea’s stone Buddha and the China's gold Buddha, attitude toward the Buddha and the Bodhisattva, incense prayers(燒香) and attaining Buddhahood(成佛).

      • KCI등재

        최치원의 재당시기 한시 고찰 - 『계원필경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를 중심으로 -

        이황진 열상고전연구회 2013 열상고전연구 Vol.37 No.-

        본고는 최치원이 당에서 생활하며 지은 한시, 즉 ‘재당시’에 대해 고찰하였다. 본고에서는 『계원필경집』 에 수록된 시는 그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이는 권17의 「기덕시」 30수는 고변의 공로와 업적을 칭송한 헌시이며, 권20에 수록된 30수의 시는 거의가 귀국기에 쓰여진 시라는 창작시점의 특수성이 더 강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존시 중 28수가 재당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보았다. 최치원의 재당생애는 크게 과거급제시기, 율수현위시기, 고변막부 시기로 나눌 수 있다. 과거급제시기(8수)에는 과거급제 후의 기쁨과 웅대한 포부,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방랑해야하는 자신의 처지와 가난을 걱정하고 한탄하는 모습도 보이게 된다. 이 시기에 지은 시들은 이미 습작의 수준을 넘어 작품수준 면에서 많은 발전을 보인 시기라 할 수 있다. 율수현위시기(5수)에 지어진 시 가운데 4수가 『천재가구』에 수록되어 있는 데, 이로 보아 이 당시에 지은 작품은 빼어난 예술성을 가진 작품들이 많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만당시풍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는 할 것이지만, 비교적 안정된 생활과 정신적인 여유도 이 시기의 시 창작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고변막부시기(15수)는 최치원이 고변에게 중용을 받기 시작한 881년 5월을 기준으로 두 시기로 나누어 살폈다. 중용을 받기 전에는 자신의 재능과 포부를 마음껏 펼칠 수 없는 현실 한탄이 주조를 이룬다. 881년 5월 이후 최치원은 고변의 부름을 받아 종사하게 되고, 7월에는 <격황소서>를 통해 문명을 천하에 떨치며 고변의 두터운 신임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로 인해 주변의 시기와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는 최치원이 당에서 지내왔던 그 어느 시기보다 희로애락이 매우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던 시기였으며, 그로 인해 다양한 풍격의 시가 지어졌다. 최치원의 재당시를 통틀어 현전하는 오언시는 단 3수밖에 안되지만, 이는 칠언시가 더 유행했던 만당 문단의 경향과도 관계있을 것이다. 또한 최치원은 당에서 당시의 저명 시인들과의 친분과 교류를 통해, 그리고 당시의 문학풍조와 시풍을 몸소 체험하며 시 창작에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또 외국인인 신라인이었기에 그의 시에는 당나라 문인들과는 또 다른 감성과 고민이 담겨있음도 확인할 수 있다. This study considers Chinese poems written by Choi Chi Won while he was staying in Tang, that is, ‘Jaedangsi(poems written during a stay in Tang)’. This article excludes the poems contained in 『Gyewonpilgyeongjip』 from its study subjects. This author assumes that the existing 28 pieces were written in the period of his stay in Tang. In the period of passing the state exam (8 pieces), he showed not only the ecstasy and great aspiration after passing the exam but also his aspects of worrying and bemoaning the circumstances he had in which he had to wander about and poverty as well. The poems written in this period exceed the level of mere practice but show great development as real pieces of art. 4 pieces among those written in the period of Yulsuhyeonwi (5 pieces) are contained in 『Cheonjaegagu』 . This seems to show that many of the works written in this period exhibit superior artistry. This may be not just because he was influenced by the style of the late Tang poetry but because the quite stable life and mental composure he had then affected his poetry writing in this period. The period of Gaopian's shogunate (15 pieces) was examined as two periods with May, 881 as the point of division when Choi Chi Won began to get important post from Gaopian. Before getting important post, most of his poems bemoan the reality that he cannot exhibit his talent and aspiration to the fullest. After May, 881, Choi Chi Won got to have Gaopian's confidence. However, because of this, he also suffered from jealousy and exclusion from those around him. Therefore, this period is mingled with all different feelings more complexly mixed than in any other period he lived in Tang, which made him write poems showing more diverse features. From all Choi Chi Won's Jaedangsi, oeonsi still existing are only 3 pieces; however, this may have been associated with the trends of late Tang's literary circles in which chileonsi was more popular. Also, as having friendship and exchanges with many famous poets in Tang then and experiencing the literary trends and the styles of poetry in Tang in person, Choi Chi Won may have been influenced very much in terms of his poetry writing. However, since he was a foreigner, a person from Shilla, we can see that his poems contain emotion and consideration different from those of the literary persons of Tang.

      • KCI등재후보

        <秋夜雨中>의 창작시기 再考

        이황진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소 2012 인문학연구 Vol.0 No.43

        <추야우중>은 역대로 최치원의 시 중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 받아 온 최치원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에게도 매우 친근하고 익숙한 한국 한시이기도 하다. 본고는 최치원의 대표작인 <추야우중>의 창작시기에 대한 선행 연구자들의 논의를 토대로 그 근거와 논리를 보충하여 이를 좀 더 명확히 하고자 하였다. 즉, 최치원의 생애고찰, 최치원의 향수시와의 비교, 시어의 재해석 측면에서 <추야우중>의 창작시기를 밝혀보았다. 먼저 최치원의 생애를 살펴보며 이 시를 어느 시기에 창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타당한지를 분석하였는데, <추야우중>은 최치원이 은거를 결정하기 전 즈음의 상황과 정조를 반영한 것이라고 보는 게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된다. 그 다음으로 최치원의 향수시를 분석하며 이들이 <추야우중>의 시적 분위기와 정조 그리고 시어 측면에서 적잖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곧 <추야우중>이 향수시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추야우중>의 시어를 재해석하였다. 보통 재당시절 고향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라고 보는 근거가 되어왔던 ``만리``의 분석을 통해 ``만리``가 신라가 아닌 당을 의미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추야우중>은 최치원이 신라로 귀국한 이후에 창작한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 포부를 더 이상 실현할 수 없다는 현실 속의 좌절과 조국의 운명에 대한 근심 그리고 통치계급에 대한 증오 등의 감정들이 교차하던 시기, 즉 은거를 결심하기 전 즈음에 창작된 것으로 자신이 당에 머물던 시절 사귀었던 친구들과 그 시절을 그리워하며 읊은 시라 할 수 있다. ≪秋夜雨中≫不僅曆來被認爲是崔致遠詩作中最爲優秀的作品, 還是韓國人最爲熟悉的韓國漢詩之一. 有關崔致遠代表作≪秋夜雨中≫的創作時間問題已有不少硏究成果, 本文的意在於以前人的硏究成果爲基礎, 在論據和邏輯方面進行補充, 以求對此問題做出一個更加明確的認識. 此前的大多數硏究都是根據崔致遠在唐留學這一事實和詩的意境來判斷≪秋夜雨中≫爲"在唐留學時期因思念故鄕(新羅)所作";或者單憑回新羅後的政治現實和詩的意境, 認爲這首詩是"崔致遠在回到新羅後後, 面對理想與現實的背離, 爲表達自己的苦悶心境而作的". 當今, 在韓國更加傾向於回國後創作的說法, 這種看法傳覆了曆來被當做定論的"在唐思念故鄕所作詩"一說, 因此有必要爲此說法提供更加明確的說明和邏輯根據. 但事實上, 目前爲止持此種看法的硏究者對此問題的探究大部分僅停留在簡要槪括的層面上, 認爲"回新羅後所作有充分的可能性, 持這種觀點也無妨". 基於此, 本文試從崔致遠的生涯考究、與崔致遠鄕愁詩的比較、對詩詞詩句的再解析等方面揭示≪秋夜雨中≫的創作時間。首先, 從崔致遠的生平考察入手, 分析將之看作是那個時期創作的詩作最爲自然, 妥當, 筆者認爲不妨將之與崔致遠決定隱居之前的情況和心境聯系起來。接下來, 對崔致遠的鄕愁詩進行分析, 由此可知≪秋夜雨中≫一詩的詩境, 分圍, 詩語與鄕愁詩存在不小差異. 這反過來也可以證明≪秋夜雨中≫不能歸入鄕愁詩的範疇. 最後, 對≪秋夜雨中≫的詩語進行再解析, 對向來被當做"在唐思念故鄕所作詩"一說的根據的"萬裏"一詞進行分析, 指出"萬裏"所指有可能不是新羅, 而是唐. 綜上所述, ≪秋夜雨中≫爲崔致遠返回新羅之後所作, 表達了詩人百感交集的心理狀態, 其中機有因無法再實現自己政治理想和抱負的現實而産生的挫敗感, 也有對祖國命運的擔憂, 對統治階級的憎惡;在此情況下, 詩人決定隱居, 倂創作了這首詩, 表達了自己對在唐時期, 以及在此期間所結交知己的深切懷念.

      • KCI등재

        고운(顧雲)이 최치원에게 준 송별시 「고운편」에 대한 진위 고증 -「고운편」과 최치원의 재입당 시기에 대한 한중 연구사를 겸하여-

        이황진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1 人文論叢 Vol.65 No.-

        據傳,≪孤雲篇≫是崔致返回新羅之時,他的摯友顧雲爲他所作的贈別詩。這首詩收錄在李仁老的≪破閑集≫中,幷流傳至今。一直以來,對於這首詩爲顧雲所作這一點,中韓學界深信不疑,也未提出過任何異議。但是,綜合分析中韓學者對≪孤雲篇≫的具體解析以及他們對崔致遠再入唐的時間的看法,就不難發現這首詩存在是僞作的可能性。즉,不少硏究者將≪孤雲篇≫作爲依據,認定崔致遠再入唐的時間是在顧雲生前(894年),但령一方面,在對崔致遠的再入唐時間進行考證的硏究者中,有不少人認爲是在顧雲死後,因此≪孤雲篇≫究竟是否果眞出自於顧雲之手,在作品的眞僞問題上仍存在不少疑點。而且最能說明問題的是,顧雲(851~894)的≪孤雲篇≫是截取了於武陵(788~852)的五言律詩≪孤雲≫的암聯和尾聯,經過평湊和再編輯而成的一首五言絶句詩,由這一點可證實該詩爲一篇僞作。簡而言之,≪孤雲篇≫幷非顧雲所作,只不過是盜用崔致遠的摯友顧雲的名字,將於武陵的作品≪孤雲≫進行再編輯而成的一篇僞作,顧雲送崔致遠的所謂贈別詩≪孤雲篇≫從一開始就是子虛烏有。因此,不能將李仁老≪破閑集≫中所載的≪孤雲篇≫作爲考證崔致遠再如入唐的這一事實及其時間的線索或根據,亦不能當作考究,論證崔致遠生平的任何根據。

      • KCI등재

        고운(顧雲)이 최치원에게 준 송별시 「고운편」에 대한 진위 고증 -「고운편」과 최치원의 재입당 시기에 대한 한중 연구사를 겸하여

        이황진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1 人文論叢 Vol.65 No.-

        据传, ≪ 孤云篇≫ 是崔致返回新罗之时, 他的挚友顾云为他所作的赠别诗。这首诗收录在李仁老的≪ 破闲集≫ 中,并流传至今。一直以来,对于这首诗为顾云所作这一点, 中韩学界深信不疑, 也未提出过任何异议。但是, 综合分析中韩学者对≪ 孤云篇≫ 的具体解析以及他们对崔致远再入唐的时间的看法, 就不难发现这首诗存在是伪作的可能性。即, 不少研究者将≪ 孤云篇≫ 作为依据, 认定崔致远再入唐的时间是在顾云生前(894年), 但另一方面, 在对崔致远的再入唐时间进行考证的研究者中, 有不少人认为是在顾云死后, 因此≪ 孤云篇≫ 究竟是否果真出自于顾云之手, 在作品的真伪问题上仍存在不少疑点。而且最能说明问题的是, 顾云(851~894)的≪ 孤云篇≫ 是截取了于武陵(788~852)的五言律诗≪ 孤云≫的颔联和尾联, 经过拼凑和再编辑而成的一首五言绝句诗, 由这一点可证实该诗为一篇伪作。简而言之, ≪ 孤云篇≫ 并非顾云所作, 只不过是盗用崔致远的挚友顾云的名字, 将于武陵的作品≪ 孤云≫ 进行再编辑而成的一篇伪作, 顾云送崔致远的所谓赠别诗≪ 孤云篇≫ 从一开始就是子虚乌有。因此, 不能将李仁老≪ 破闲集≫ 中所载的≪ 孤云篇≫ 作为考证崔致远再如入唐的这一事实及其时间的线索或根据, 亦不能当作考究,论证崔致远生平的任何根据。

      • KCI등재

        겸재 조태억의 제석시(除夕詩) 연구

        이황진 열상고전연구회 2022 열상고전연구 Vol.76 No.-

        Poems of New Year’s Eve refer to the poems written on the last day of a year as the writer looks back on the year and expects the new year. Gyeomjae Jo Tae-eok (1675~1728)’s Gyeomjaejip contains a number of poems of New Year’s Eve, 14 topics and 32 pieces, singing about 11 times of New Year’s Eve, so it is noteworthy because we can examine the contents and changes of his feelings with them. Looking into Jo Tae-eok’s poems of New Year’s Eve along with his life and history, this researcher analyzed the contents of them in each year and his sentiments. Having the envoying of the Diplomatic Mission in the year of Sinmyo(1711) as a point of division, this author divided Jo Tae-eok’s poems of New Year’s Eve into former poems including the one written at the age of 16(1690) to the one written in the year that there was an event of the Sinmyo Diplomatic Mission and latter ones including the one written at the age of 37(1711) during his envoying as a member of the Sinmyo Diplomatic Mission to the one written at the age of 52(1726) when he was removed from office and expelled from Hanyang on account of Eulsahwanguk(1725). The Sinmyo Diplomatic Mission was taken as a point of division because it is thought to have been a crucial turning point in his life as he was imprisoned and punishedright after returning to the country due to the matter associated with Japan regarding Avoid mentioning over The title of the king and Credential. In terms of contents, too, after the event, his poems of New Year’s Eve reveal different aspects from the former ones as he began to lament his oldness or wish for secluded life in them. Jo Tae-eok left more poems of New Year’s Eve compared to other writers as he enjoyed writing poems usually. It seems that New Year’s Eve did provide him with great subject matters for poetry writing and motives for creation. Concerning the subject matters and contents of his poems of New Year’s Eve, former poems written before the Sinmyo Diplomatic Mission sing about strengthening his will to study, striving to live righteously, or longing for his older brother mostly while latter ones mainly depict yearning for his brother, sighing about getting old, or pursuing secluded life. Also, investigating his poems of New Year’s Eve along with the history of his life, we can see that he endeavored to live according to his own motto: “One ought to be strict when trying to supervise oneself and never fails to be humble when treating others. When one wants to get something, one must consider integrity and should never lose composure in one’s official career. Jo Tae-eok wrote his own poems of New Year’s Eve at the age of 39 inspired while appreciating Dufu (杜甫)’s <Duwitaeksuse(杜位宅守歲)> and at the age of 52, Baijuyi(白居易)’s <Jeyagimiji(除夜寄微之)>. Their poems of New Year’s Eve were, in fact, beloved by a lot of literary persons generation after generation around those ages. Generally, many of the poems of New Year’s Eve embody the poets’ delicate sentiments in literarily superb ways, so they form such a crucial genre allowing us to consider a poet’s world of poetry in general. Therefore, this study will also contribute to figuring out Jo Tae-eok’ poetic world afterwards. 한 해의 마지막 날에 지난해를 돌아보고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며 쓴 시를 제석시라 한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문집을 남긴 사람 대부분이 제석시 한 수 정도는 썼을 정도로 제석은 문인들에게 좋은 창작 동인이 되어 왔다. 겸재 조태억(1675~1728)의 겸재집 에는 11차례의 제석을 읊은 14제 32수라는 상당량의 제석시가 수록되어 있어 그 내용과 정서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 볼 만하다. 본고에서는 조태억의 제석시를 그의 삶의 궤적과 함께 살펴보며 조태억 제석시의 특징을 찾아보았다. 필자는 조태억의 제석시를 그가 정사로 갔던 신묘년(1711) 통신사 사행을 기준으로 하여 16세(1690년)에 지은 제석시부터 신묘년 통신사 사건이 있기 전까지의 제석시를 전기의 제석시로, 신묘통신사를 가서 지은 37세(1711년)의 제석시부터 을사환국(1725)으로 삭탈관직당하고 문외출송 된 상태에서 지은 52세(1726년)의 제석시까지를 후기의 제석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신묘통신사를 기준으로 삼은 이유는 그때 일본과의 국왕호와 국서의 범휘 문제가 빌미가 되어 조태억은 귀국하자마자 수금되고 죄를 받는 등 이 사건이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며, 내용 면에서도 이 사건 이후의 제석시부터 늙어감을 한탄하는 내용이나 은거를 희구하는 내용이 등장하는 등 이전 시기의 그것과는 다른 면모를 보이기 때문이다. 조태억은 시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며 기록하는 데에도 능했는데, 이는 33세(1707년)와 52세(1726년) 두 차례에 걸쳐 작성한 90편의 <전․후감군은>에서도 확인되며, 또한 이는 그가 역대 문인 중 손에 꼽힐 만큼 많은 제석시를 남길 수 있던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제석시의 소재와 내용면에서 신묘통신사 이전의 제석시는 면학 다짐, 청렴한 삶 다짐, 형에 대한 그리움 등이 주를 이루며, 그 이후의 제석시에서는 형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늙어감을 한탄하거나 은거를 희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또한 그의 제석시를 그의 삶의 이력과 아울러 살펴보면 그가 “자신을 단속할 때에는 마땅히 엄격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마땅히 겸손함으로 해야 한다. 얻을 것이 있으면 반드시 청렴함을 생각하고 벼슬길에서는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자신의 좌우명에 맞게 살아가려 애써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태억은 39세에는 두보의 <杜位宅守歲>를, 52세에는 백거이의 <除夜寄微之>를 음미하다 감회가 일어 제석시를 지었는데, 이들의 제석시는 예로부터 많은 문인이 그 나이대에 애송해온 시이기도 하다. 제석시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쓰는 시이기 때문에 작가의 삶에 대한 성찰과 태도를 극명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대체로 시인의 섬세한 감정이 문학적으로 뛰어나게 형상화된 작품들이 많다. 그러하기에 제석시는 시인의 시세계 전반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지표가 된다. 본고 역시 조태억의 시세계를 파악하는 데 일조할 수 있을 것이다.

      • KCI등재

        『『삼국사기』』「최치원전」 고구(考究) - 내용의 사실 검증을 중심으로 -

        이황진 한국문학언어학회 2022 어문론총 Vol.92 No.-

        현전하는 문헌 기록 중 최치원의 생애 전체를 살펴볼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최치원전」으로 이는 최치원의 생애와 행적을 살피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자 최고의 권위와 영향력을 가진 기록이다. 그런데 그 내용 중에는 사실과 다르거나 그 사실 여부에 의심을 가질만한 부분이 곳곳에 존재한다. 이에 필자는 본고에서 최치원의 생애와 행적 관련 선행연구를 참고하여 그러한 부분에 대한 고찰을 진행하였다. 먼저, 「최치원전」의 내용 중 사실이 아님이 분명하게 밝혀진 네 부분을 사실에 맞게 바로잡았다. 첫째, 그 세계(世系)를 알 수 없다고 기록한 부분에 대해서는 최소한 최치원의 부친이 최견일(崔肩逸)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최치원이 경문왕 9년(874) 가을 9월에 당에서 과거에 급제했다는 『삼국사기』권11의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경문왕 9년 봄 정월이나 2월로 정정되어야 한다. 셋째, ‘율수현위의 업적으로’ 승무랑 시어사내공봉 벼슬을 받고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는 내용은 잘못된 것으로, ‘고병막부에서의 활약으로’로 정정되어야 한다. 넷째, 최치원이 문창호로 추증된 시기가 고려 현종 14년 태평 2년 임술 5월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현종 14년 태평 3년(1023) 계해 2월로 정정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최치원전」의 내용 중 의심의 여지가 있는 부분, 즉 최치원의 재입당 문제와 관련한 사항, 고운(顧雲)이 주었다는 송별시 「유선가」에 대한 진위 문제, 최치원이 고려의 조업을 몰래 도왔다는 근거가 된 ‘계림은 누른 잎이오, 곡령은 푸른 솔이라.’(雞林黄葉, 鵠嶺靑松)의 진위 문제 등에 대해 살펴보았다.

      • KCI등재

        四名子 車佐一의 遊覽詩 연구− 關西지역 유람시를 중심으로 −

        이황진,박난아 동양고전학회 2020 東洋古典硏究 Vol.0 No.80

        Samyeongja Cha Jwa Il is a writer who was active in the mid-18th century. He is the sixth-generation descendant of Cha Cheon Ro, who is known as a famous writer of the late Joseon Dynasty. He had a will to serve in the literary – subject government, but it didn't work out the way he want it to. So in his later years, remaining a military official was all he could do. Cha Jwa Il was out of office in 1804, mingled with a “wandering poet” named Song-Seok-Won poetry company. After experiencing the extinction of his family, hardships of life, he was out of the mainstream. So he always had pent-up anger at the base. So ironically, in his poem, showing the same tendency as a “wandering poet” For example, critical sentiment and pent-up anger toward reality. His collection of poem called 『Samyeongja-si-jip』 is consist of one volume. It wasn't compiled until 100 years after his death. In his collection of poem, his poems are 278 title 356 poetic works. The rest of part is the preface, epilogue, religious writing and writing of history of the deceased for Cha Jwa Il. His later years were not smooth. But he was travel around various regions and created a poem. So in his travel poems, different emotions are expressed than non-travel poems. Among his travels, westward region travel is the most detailed and concrete. Based on current known data, the westward region travel is only long-term travel in his whole life. Get out of a harsh reality, he traveled and created westward-region travel poems and expressed emotions in two opposite ways. A sense of futility and leisurely sentiment. In this study, we will consider the aspect of two opposite expression in his westward-region travel poems. As a result, we can expand his poetic world view in his personal lifetime.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