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백제 임류각과 ‘류(流)’자명 기와

        윤용혁(Yong Hyuk Yoon)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22 충청학과 충청문화 Vol.33 No.1

        임류각(臨流閣)은 서기 500년(동성왕 22) 봄 백제 동성왕에 의하여건축된 웅진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높이는 5장, 최소 2층 정도의건축물이어서 건축 측면에서도 중요하고, 연못과 함께 구성함으로써 고대 조경으로서도 매우 의미가 크다. 임류각의 위치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논란이 있었고, 현재는 1980년에 발굴된 건물지가 공식적으로는 ‘임류각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초석을 사용한 이 건물지가 백제보디 늦은 시기의 건물지로 인식됨에 따라 임류각의 위치는 재검토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본고는 백제 임류각의 위치로서, 공산성의 동북쪽에 위치한 현재 영은사 자리를 지목하였다. 바로 앞에서 백제시대 지당이 확인된 곳이기도 해서, 건축과 연못을 셋트로 한 궁궐 관련 조경 시설 기록과도 부합한다. 검토의 과정에서 백제 연못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류’자 명 기와에 대해서도 임류각과의 연계 가능성을 제기 하였다. YimRyuGak (臨流閣) was a building constructed by Baekje’s King Dong-seong in spring A.D. 500 (the 22nd year of King Dongseong) representingUngjin Baekje era. It was 5 Jang tall, at least 2 stories building tall. It is highly valuable in the aspects of not only architecture but also ancient landscaping which was constructed with a pond. The location of YimRyuGak has been controversial so far. Today, the building area excavated in 1980 is regarded officially as YimRyuGak buil-ding area. As cornerstone was used in this building area, however, it has been recognized as a building area later than that of Baekje. Such building area, therefore, can not avoid being re-examined. As the location of Baekje YimRyuGak, this study pointed out YoungEun-Sa Buddhist Temple located in the northern-east area away from GongSan-Seong fortress. In front of the temple, a pond of Baekje era was identified,so that its area meets also the record of palace related landscaping facility that sets architecture and pond in combination. While looking into, this study also suggested the possibility that the roof tile carved with the letter pronounced ‘Ryu’ excavated during the excavation process of a Baekje’s pond may have been related with YimRyuGak.

      • KCI등재
      • KCI등재

        The Focal Issues in the Historical Study of the Koryŏ's Resistance against Mongol

        Yoon Yong-hyuk(윤용혁)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06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10 No.-

        본고는 13세기 몽골의 침입으로 야기된 고려ㆍ몽골 전쟁 연구에서 제기된 몇 가지 주제에 대하여 그동안의 논의를 소개하면서 필자의 의견을 덧붙여 정리한 것이다. 무엇이 고려의 장기항전을 가능하게 하였는가, 몽골군은 왜 강화도를 공격하지 않았는가, 고려의 대몽항전은 단계적으로 발전하였는가, 삼별초는 항몽의 불꽃인가 아니면 반민중의 정치군인인가 등의 질문이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고려ㆍ몽골전쟁의 고고학’이라는 제목으로 유적과 유물 등 현장 자료를 통한 13세기 이해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동안의 논의에서는 항몽전쟁에 대한 무인정권의 공과(功過)에 대한 극단적 의견차가 있어왔고 이 전쟁에 있어서 농민 천민 등 고려 인민들의 역할에 대한 높은 평가가 수반되었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고려 인민들의 역할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이를 ‘인민들만’의 공이라는 배타적 역할론에 대해서는 반대 하였다. 전쟁의 전개에 따라 항전의 단계가 발전해간다는 북한 사학의 대몽항전 발전단계론에 대해서도 비판적 의견을 개진하였다. 고려의 대몽항전이 정권의 정치적 입장에 의하여 결정되었다는 점에서 무인정권의 반몽 항전책이 비판될 요소를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정권적 한계라는 관점 때문에 항전의 의미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공정한 평가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 KCI등재
      • KCI등재

        輕部慈恩의 백제고분 조사와 유물

        윤용혁(Yoon Yong-hyuk) 고려사학회 2006 한국사학보 Vol.- No.25

        1927년부터 1945년까지 약 20년간, 백제의 도읍이었던 공주 및 그 인근지역에서 교원으로 근무하면서 백제유적에 대한 조사와 연구를 했던 가루베지온(輕部慈恩, 1897~1970)은 백제문화사 및 백제고고학의 초기 연구자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백제미술』, 『백제유적의 연구』 등 전문 저서를 발간한 바 있고, 그의 학문적 견해는 이후 관련 분야 연구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적의 조사과정에서 행한 비학문적 조사 방법, 그리고 개인적으로 취득한 많은 유물의 증발로 인하여 이후 전문가와 지역민, 양쪽으로부터 극단적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이같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실제 가루베지온의 연구와 조사 혹은 유물 문제는 지금까지 거의 객관적 사실 검토가 이루어진 바가 없다. 본 연구는 가루베의 조사활동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백제고분의 조사, 특히 백제의 왕릉급 무덤인 공주 송산리 6호분에 대한 조사의 경위를 상세히 검토하고, 아울러 유물의 행방 문제에 대한 지금까지의 확인 사실을 정리하였다. 가루베지온은 공주의 백제고분 738기를 6개 유형으로 분류하여 보고하였고, 그중 100여 기를 세부 조사하였는데 이에 대한 중점 조사는 주로 1931년과 1932년에 이루어졌다. 송산리 6호분에 대한 조사는 1933년 여름(7월 말~8월 초)에 이루어졌는데, 6호분에 대한 개인적 조사 직후, 이에 대한 공식조사를 위하여 총독부로부터 전문조사단이 현지에 파견됨으로써, 문화재에 대한 私的 발굴 문제가 사건화 되기에 이르렀다. 그가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던 유물 중 약간은 해방직후 귀국 시 휴대했던 것으로 보이나, 그 대부분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던 유물을 매도하였으리라는 세간의 추정은 아직까지 확인된 사실이 없다. 가루베의 백제문화 조사활동에 대한 파악은 백제사, 백제고고학 연구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다른 한편 이것이 식민지시대의 특수한 여건에서 가능했던 한국문화 연구의 한 사례였다는 점에서 식민지시대의 문화적 실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일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Kalubei-jion(輕部慈恩, 1897-1970) is known for the investigation of the cultural history and archeology of Paekche. He surveys and examines the historical remains of Paekche when he is a teacher in Kongju, the capital city of Paekche, and in the neighborhood of Kongju from 1927 to 1945. His academic view has an effect on the related fields. However, both experts in archeology and inhabitants accuse him of digging up old tombs and taking antiquities. In addition, his method of investigating the historical remains in Kongju is not fair. In spite of the blame on Kalubei-jion, there is no inspection about the objective facts of Kalubei-jion’s survey and Paekche’s antiquities so far. Therefore, this thesis focuses on Paekche's tomb which is problematic in Kalubei-jion's surveys, especially the Tumulus No.6 at Songsan-ri(宋山里), a royal tomb in Paekche, can be examined. And this study researches into the details of Kalubei-jion’s investigation about Paekche’s tomb and arranges the actual inspection about missing antiquities till now. According to Kalubei-jion's reports, the 738 pieces of Paekche’s tomb are classified into 6 groups, he makes close examination 100 pieces among them from 1931 to 1932. The inspection of the Tumulus No.6 at Songsan-ri is examined from the end of July to the beginning of August in 1933. Directly after the inspection of the Tumulus No.6 at Songsan-ri personally, a panel of experts from Governor General Office which Japanese found for exploitation and colonization in Korea are dispatched to investigate officially. Since their researches on Kalubei-jion, digging up cultural assets personally becomes an issue. He takes some antiquities when he returns home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but most of the antiquities are missing. Although people assume that he sells some antiquities which he owns in Korea, it is not certain whether he does. In conclusion, this thesis shows that the inspection on Kalube-ijion’s survey of Paekche culture is important for the study of the cultural history and archeology of Paekche, and that it is meaningful to understand the actual condition of Korean culture during the rule of Japan in terms of the case about the investigation of Korean culture under the colonial days.

      • KCI등재

        제주 삼별초와 몽골·동아시아 세계

        윤용혁 ( Yoon Yong-hyuk )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2016 탐라문화 Vol.0 No.52

        삼별초는 1270년 제주도를 점령한 이후 1273년 제주에서 패망할 때까지 이곳을 주요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제주도를 몽골에 대항하는 중요한 전략 요충으로 처음 파악한 것은 삼별초 세력이었다. 그러나 제주도를 전략 거점으로 실제 이용한 것은 몽골이었고, 이에 의하여 제주도에는 몽골 문화가 깊이 이식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제주도에서 몽골 관련 문화유산의 핵심 포인트인 항파두성은 ``항몽``이라는 민족적 관점이 강조되어 왔다. 항파두성의 문화재 지정 명칭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도 이러한 개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문화 다양성``이라는 제주도의 특성을 적극 배려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제주도 문화유산의 몽골적 요소를 적극 활용하는 의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항파두성의 문화재 명칭 변경,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추진, 그리고 한몽 수교 800년에 즈음한 제주도의 적극적 역할 등이 이에 의하여 과제로서 부각된다. Sambyeolcho used Jeju Island as their strategic, major base until their defeat there after occupying the island in 1270. It was Sambyeolcho force that first figured out that Jeju Island was a key point to fight against Mongolia. However, it was Mongolia that actually used Jeju Island as a strategic base and consequently, Mongolian culture was deeply planted in Jeju Island. Hangpaduseong, the core of Mongolia-related cultural heritage in Jeju Island, is stressed with national perspective of being ``anti-Yuan.`` ``Historic Site of Anti-Yuan Movement in Hangpadu-ri,`` the official name of Hangpaduseong as cultural property, is also reflection of such concept. However, it is now needed to actively consider Jeju Island`s feature of ``cultural diversity.`` In that sense, it is required to change our awareness for fully utilizing Mongolia elements of cultural heritages in Jeju Island. Issues arising include changing the name of Hangpaduseong, promoting it as UNESCO World Heritage and encouraging Jeju Island`s active role upon eight hundred years of Korea-Mongolia diplomatic relations.

      • 백마강 명승으로서의 부여 부산(浮山) : 백제고도 부여 다시 읽기

        윤용혁(Yoon, Yong-hyuk)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21 충청학과 충청문화 Vol.30 No.1

        부여 부산(浮山)은 백마강변 부소산의 서남쪽 건너편에 있는 높이는 106.8m의 산이다. 규모는 작지만 『삼국유사』에 기록된 백제시대 도성의 ‘삼산(三山)’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곳이고, 청주에서 홍수로 떠내려온 산이라는 특이한 전설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공간의 하나였다. 본고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으로, ‘부산’은 어떤 산인가 하는 기초적 정리로부터 시작하여 부산의 문화유산적, 경관적 가치를 주목하였다. 특히 부산에 소재한 백제 성터, 그리고 산신각과 불사, 서원 등이 함께 공존하는 종교적 공간, 혹은 조선조에 유학자들의 탐방처가 된 점을 통하여 부산이 갖는 ‘고도 부여’의 문화적 자원 가치를 강조하였다. 자료를 검토하는 과정에서 부산에 ‘부산사’라는 절이 있었던 사실도 새로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 조선시대 1천 년 간의 고전적 부여 답사는 백마강을 중심으로 한 선상(船上) 답사였다. 근대에 이르러 새로운 고고학적 발굴 자료가 증가하고 육지 중심의 인식이 일반화하면서, 백마강은 고적 답사의 개념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백마강이 갖는 고도 유산으로서의 의의와 특성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가치가 재인식되고 다시 되살려지는 것이 필요하다. 본고에서 주목한 부산의 자원적 가치는 백마강의 문화유산적 가치의 회복 작업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부산에 소재한 문화유산에 대한 추가적 심층 조사와 탐방객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는 접근로의 개선 등을 통하여 이곳이 새로운 부여 명소의 하나로서 부각되기를 기대한다.

      • KCI등재

        오키나와의 '아카하치 홍가와라의 난'에 대하여

        윤용혁(Yoon Yong-Hyuk) 역사문화학회 2012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15 No.1

        본고는 홍길동과의 관련설로 주목을 끌었던 1500년 오키나와 야에야마(八重山) 지역에서의 '아카하치의 난'에 대하여 검토한 것이다. 그동안의 논의 내용에서 특히 아카하치의 인물, 난의 원인과 성격 등을 검토하고, 이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덧붙였다. 16세기 말 야에야마(八重山) 지역에서는 교역의 활성화에 따른 경제적 성장이 이루어져 지역내에서의 세력 경쟁과 통합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여기에 중앙집권 정책을 추구하는 슈리(首里) 정부가 개입하여 들어옴으로써 '반란'으로 확산된 사건이 1500년 이시가키지마(石垣島)에서의 '아카하치의 난'이었다고 파악하였다. '오야케 아카하치 홍가와라'가 1인인지 혹은 2인인지에 대해서는, 역사기록을 존중하여 '오야케 아카하치'와 '홍가와라'의 2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 불확실한 아카하치와 홍가와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주세력과 토착세력의 연합으로 해석하는 의견을 지지하였다. 아카하치 난은 기본적으로 류큐왕조의 슈리(首里) 정부가 야에야마 지역을 무력에 의하여 복속시킨 사건으로, 현재로서는 외부로부터의 또 다른 제3세력의 개입 가능성을 설정하기는 쉽지 않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iew the 'Akahachi Uprising' occurred in Yaeyama area in Okinawa in 1500, which had drawn people's attention due to the theories that claimed its relationship with Hong Gil Dong. In particular, this study focused on the analysis of facts about Akahachi and the reasons and characteristics of the rebellion and, finally, added my opinion concerning the matters. First of all, as for whether 'Oyake Akahachi Hongawara' was one person or not and the unclear relationship between Akahachi and Hongawara, this study agreed with the theories that considered that 'Oyake Akahachi and Hongawara' were two different people and they represented the alliance among the immigrants and aboriginal people based on historical records. In the end of the 16th century, as local economy grew thanks to the increase of trade, local forces in Yaeyama region were engaged in power struggles and sought for ways to unite. The 'Akahachi Uprising' was considered as a 'rebellion' that had broken out in Ishigakijima in 1500 as the Shuri government expanded its influence to reinforce its control in this area under these circumstances. In essence 'the Akahachi Uprising' refers to an incident that had resulted in the subjugation of Yaeyama region to the Shuri government of the Kingdom of Ryukyu by force and there seems to be a remote possibility that the uprising was initiated by a third power or outside force.

      • KCI등재

        전쟁에서 ‘민중’을 발견하다

        윤용혁(Yoon, Yong-Hyuk) 고려사학회 2017 한국사학보 Vol.- No.67

        근대사학에서 재평가된 고려시대사의 한 주제가 대몽항전사이다. 그 첫 번째 계기를 삼별초에 대한 재평가에 의하여 1940년대 초 김상기 선생이 만들었고, 그 두 번째 계기를 만든 것은 1970년대 초 강진철 선생이었다. 그 ‘두 번째 계기’를 간단하게 표현하면, 몽골과의 전쟁에서 ‘민중’을 발견한 일이었다. 강진철(1917-1991)은 사회경제사의 연구 분야를 평생 천착한 대표적 학자이지만, 고려시대 거란 및 몽고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업적을 남겼다. 강진철이 제안한 몽고 침입에 대한 시기 구분은 지금으로서는 가장 유효한 틀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몽항쟁 항전의 주체로서 노비, 농민과 같은 민중들을 부각한 것, 삼별초 봉기의 역사적 의의를 민중의 반몽, 반정부 항전에서 찾은 견해는 지금도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대몽항전 민중주체론은 북한사학의 ‘인민 항전론’과는 구별되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 파악에 의한 결론이었다. 강진철의 연구가 현재에도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사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한 그의 역사적 통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은 대몽항쟁사 연구에서도 일관되고 있다. Kang Jin-cheol (1917-1991) not only was a representative scholar who delved into the field of history of social economy for his entire life but also made remarkable achievements as to the relation with the Kitan and Mongol in Goryeo. Division of Mongol invasion period presented by Kang Jin-cheol is currently accepted as the most effective tool. His point that emphasized the public such as slaves and farmers as the main agent for anti-Mongol struggle and views that Sambyeolcho uprising had historical significance in the public’s anti-Mongol and antigovernment resistance are acknowledged as the most persuasive interpretation. Distinctive from ‘the theory of people’s fight’ in North Korea’s historical studies, his theory that the public was the main agent for anti-Mongol resistance was a conclusion made by objective understanding on facts. The reason why Kang Jin-cheol’s study still has vitality is, above all, his historical insights based on accurate understanding on facts. This point is also consistent in study on history of anti-Mongol struggle.

      • KCI등재

        공주 송산리 6호분의 사신도 벽화에 대하여

        윤용혁(Yoon Yong-hyuk) 고려사학회 2008 한국사학보 Vol.- No.33

        본고는 백제 웅진시대에 제작된 공주 송산리 6호분 벽화의 역사적, 미술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에서 집필 되었다. 송산리 6호분의 벽화는 백제에 있어서 거의 유례가 없는 회화사 자료인데도, 그동안 미술사적으로 소홀히 취급되어 왔고 그 기본적 내용이 충실히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본고를 통하여 원래 6호분 사신도가 가지고 있던 원형의 모습을 최대한 확인하고자 하였고 이를 통하여 6호분 벽화의 회화적 특성을 확인하였다. 지금까지 6호분에 대한 관찰은 주로 건축적 관점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 때문에 이 고분이 벽화분으로 조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중요한 점을 놓친 부분이 있었다는 생각이다. 가령 무령왕릉과 6호분의 벽돌 쌓는 방식의 차이에 대하여 6호분이 아래쪽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20%씩 가로 쌓기 높이를 줄이며 올라간 것은 벽화분의 성격에 부응하는 전축 구도를 선택한 것이라는 점, 사신도 이외에 벽면과 천정의 배경 그림이 갖는 의미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6호분 벽화는 고구려 고분 벽화와는 성격이나 기원이 다르며, 계통상 남조의 것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남조의 일반적 양식에 속하는 것도 아니어서 백제적 요소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많다고 보았다. 흑백 구도의 벽화 구성은 고구려, 혹은 후대 벽화와의 분명한 차이점이다. 본고에서는 기왕의 자료를 검토하면서 6호분과 관련한 시급한 과제로서 6호분 벽화 조성에 사용된 재료, 기법 등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확인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였고, 가루베 지온에 의하여 명명된 ‘송산리 6호분’이라는 유적의 명칭에 대해서도 재검토를 제안하였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