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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羅加耶와 倭国의 初期 交流―倭漢氏의 出身地를 중심으로

        오하시 노부야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4 한국민족문화 Vol.51 No.-

        안라가야와 왜국의 교류의 개시에 관해서는 『고구려호태왕릉비명문』에 보이는 ‘安羅人戍兵’이 최초인데, 『일본서기』에서 백제의 옛 기록을 근거로 한 「百濟記」에 의거하여 기술한 초기 백제와 왜의 교류사에 관한 내용은 대체로 이것을 뒷받침한다. 즉 360년대에 왜국과 교류하고자 한 백제의 사자가 안라가야의 이웃국가인, 아마 제휴관계로 여겨지는 탁순국의 중개로 교섭이 진행된 것이 알려져 고구려의 남하에 앞서 안라가야가 탁순과 함께 왜와 교류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고고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4세기말 경부터 大阪灣沿岸과 奈良盆地의 왜국의 중추에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가진 도래인 집단이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5세기 전반부터 중엽까지도 지속되어 도래인의 활동이 활발하였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도래인 집단의 출신에 관해서는 백제나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남부인 금관가야․안라가야를 중심으로 한 지역과 영산강유역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특히 함안양식의 도질토기는 大阪灣沿岸의 久宝寺北遺蹟, 大和의 布留遺蹟・新堂遺蹟, 南山城의 宇治市街遺蹟 등 왜국의 중추로 직접 건너간 것으로서 안라가야와의 밀접한 교류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도래씨족의 전설적 기재를 재검토하면, 대표적인 도래씨족 倭韓氏는 그 씨명과 도래시기를 감안해 볼 때 안라가야의 이주민이 씨족조직의 중추를 구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4세기말 경부터 잇따라 大阪灣沿岸과 야마토의 주요부에서 이주해 온 가야동남부․가야남부․전라남도서부의 영산강유역 출신 도래인 집단 중에서 안라가야의 집단이 각지에서 도래한 다양한 집단을 통괄하여, 그 중핵을 차지한 것으로 상정된다. 이리하여 倭韓氏는 씨족을 형성하여 야마토정권의 중추에 등용됨에 따라 출신지인 안라=안야(아야)를 가문의 씨명으로 채용한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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