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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사학사(中國史學史) 국제학술대회國際學術大會) 특집논문(特輯論文) : 신유학의 시각에서 본 중국전통사학의 해석과 정립 -유이징(柳이징徵)의 중국전통사학관 평론

        쉬꿔리 중국사학회 2014 中國史硏究 Vol.93 No.-

        柳飴徵은 중국현대 사학의 대가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부정하는 역사문화 허무주의에 반대하여 중국 역사문화의 진면모를 연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柳飴徵은 사학은 역사와 문화를 인식하는 도구이기에 유가사상이 이끄는 중국의 전통사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기초하여 중국현대 신사학을 건립해야만 국민을 위해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진면모를 인식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현대 신유학의 시각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특징과 정신을 결합하였고, 史學本體論, 方法論 및 價値論의 영역에서 모두 서방의 역사와 문화와 대비되는 중국 전통사학 및 정신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정립하였다. 柳飴徵은 중국사학의 기원과 사관제도와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중국사학은 기원에서부터 정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통치를 보조하였고, 禮는 施政의 근본이자 도구였기에 역사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은 禮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言史一本于禮”는 柳飴徵의 전통역사관의 핵심이었고, 또한 그가 중국사학과 역사문화에 근거하여 이끌어낸 치밀하고 독창적인 이론이었으며 서방사학의 이론을 중국사학에 적용시켜 해석한 중국사학에 대한 견해는 아니었다. 근대 진화사관에 대한 柳飴徵은 인식을 상당히 복잡하다. 그는 역사에 진화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였고, 그의 역사저술에는‘진화’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역사의 진화와 퇴보는 종종 교체, 병존한다고 인식하였다. 물질경제는 무궁하게 진화할 수 있으나 도덕과 정신은 반드시 진화한다고 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퇴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중국역사의 진화에 관해 그는 중국의 정치와 종교의 규모와 문명은 周代에 이미 절정에 도달했으며 上古 三代를 숭상하는 복고의 경향을 체현했다고 인식했다. 柳飴徵은 유가의 민본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生民之本”을 중국사학의 요결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聖賢史觀을 새롭게 해석하여 역사상 인민의 지위와 작용을 강조하였고, 중국의 고대 특히 三大에 이미 민권과 민치가 존재하였다고 인식하였다. 柳飴徵은 중국현대 사학의 대가로 중국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부정하는 역사문화 허무주의에 반대하여 중국 역사문화의 진면모를 연구할 것을 주장하였다. 柳飴徵은 사학은 역사와 문화를 인식하는 도구이기에 유가사상이 이끄는 중국의 전통사학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에 기초하여 중국현대 신사학을 건립해야만 국민을 위해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진면모를 인식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해 그는 현대 신유학의 시각에서 출발하여 중국의 역사와 문화의 특징과 정신을 결합하였고, 史學本體論, 方法論 및 價値論의 영역에서 모두 서방의 역사와 문화와 대비되는 중국 전통사학 및 정신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정립하였다. 柳飴徵은 중국사학의 기원과 사관제도와의 관계에서 출발하여 중국사학은 기원에서부터 정사를 기록하는 것으로 통치를 보조하였고, 禮는 施政의 근본이자 도구였기에 역사에서 사실을 기록하는 것은 禮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言史一本于禮”는 柳飴徵의 전통역사관의 핵심이었고, 또한 그가 중국사학과 역사문화에 근거하여 이끌어낸 치밀하고 독창적인 이론이었으며 서방사학의 이론을 중국사학에 적용시켜 해석한 중국사학에 대한 견해는 아니었다. 근대 진화사관에 대한 柳飴徵은 인식을 상당히 복잡하다. 그는 역사에 진화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였고, 그의 역사저술에는‘진화’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또한 역사의 진화와 퇴보는 종종 교체, 병존한다고 인식하였다. 물질경제는 무궁하게 진화할 수 있으나 도덕과 정신은 반드시 진화한다고 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퇴보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중국역사의 진화에 관해 그는 중국의 정치와 종교의 규모와 문명은 周代에 이미 절정에 도달했으며 上古 三代를 숭상하는 복고의 경향을 체현했다고 인식했다. 柳飴徵은 유가의 민본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서 “生民之本”을 중국사학의 요결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聖賢史觀을 새롭게 해석하여 역사상 인민의 지위와 작용을 강조하였고, 중국의 고대 특히 三大에 이미 민권과 민치가 존재하였다고 인식하였다. 柳飴徵은 전통적인 史德論의 의미를 독창적으로 해석하여 史德은 역사가 忠實과 의문을 중시하는 것으로 표현된다고 인식하고, 實錄의 필법과 정신 및 역사기록이 사회생활 등의 면을 전면적으로 반영할 것을 강조하였다. 전통사학이 史德을 중시한 것은 중국문화가 덕을 본위로 한 것이 治史에 반영되고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柳飴徵은 “治史之必本于德”을 주장하였고, 史德을 史家의 四長(史才, 史學, 史實, 史德)의 첫 번째에 두어 治史 에서 史德의 중심적인 지위를 부각시켰다. 그의 사상은 중국유가의 以德治世 사상을 구현한 것으로 史德論을 중국문화의 높은 경지로 상승시켜 인식하였다. 柳飴徵은 중국고대 사관제도에 의한 記事는 모두 관련이 있는 제도와 특징을 갖고 있으며 중국 전통사서의 체제를 결정하였고, 특히 紀傳體(혹은 紀傳表志體)는 역사적 사실간의 관계를 서술하는데 치중하였고 또한 능하였기에 사회역사생활의 면모를 전면적으로 반영하였다. 이는 근대 이래 서방의 章節體를 편면적으로 숭상하여 중국사학의 체제와 서술을 부정한 극단적인 사상을 실질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 도덕적 합법성을 국사 서술의 근본적인 준칙으로 삼다. 柳飴徵은 중국사서 저술의 도덕 평판문제를 매우 강조하여 “史之所重在持正義”라고 하였다. 그는 역사상의 각종 正史論과 正統論에 대한 변별과 분석을 통해 전통사학이 실제로는 역사적 정의를 정통으로 삼아 국사를 서술한 것이고, 이로부터 도덕적 합법성을 국사 서술의 근본준칙으로 보았다. 정통론에 대한 柳飴徵의 새로운 해석이 그 원 뜻에 반드시 부합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상당한 이론적 가치와 현실적 의의를 갖고 있으며 근대 민족국가관과 애국주의 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유학화된 역사학은 사학의 도덕적 기능을 강조한다. 柳飴徵이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중국사학에는 蓄德과 明德의 기능이 있고, 사람의 도덕을 배양하는 그러한 기능을 기타 학문은 따라올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은 유가도덕적 역사학의 기능을 선양한 것이다. 그는 또한 以史致用은 心正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사학으로 심성을 말하는 것과 공로를 말하는 것을 서로 결합시킬 것을 주장하였는데 이를 통해 중국 역사상 출현한 심성과 도덕의 공론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그르치는 학술적 병폐를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柳飴徵은 전통사학의 致用觀을 계승하여 사학이 개인과 국가, 사회에 유용하다고 밝혔다. 그는 治史와 讀史의 의미가 역사적 지식을 얻고 나아가 흥망성쇠를 보고, 과거를 살펴 미래를 아는 것이라고 심도있게 분석하였다. 사학은 이러한 기능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知類通達”할 수 있고, 역사 발전에 인과의 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柳飴徵은 “학문을 위해 학문을 하는” 고증학풍을 반대하였다. 柳飴徵은 사학이 국가와 민족에 유용해야 한다고 특히 강조하였다. 사학의 기능은 크게 보아 바로 민족을 부흥하고 국가를 진흥하는 것이다. 국민으로 하여금 중국의 유구하고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근대이래 민족문화에 대한 허무주의를 반박하고, 역사학이 민족정신을 선양하고, 애국정서를 배양하는 기능을 충분히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중국문화사는 중국문화의 특징과 성취를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사학의 기능관은 선명한 민족주의와 애국정신을 구현하고 있다. 柳飴徵은 중국 전통사학의 분석과 정립은 현대 신유학의 시각에 입각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현대 신유학의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현대 신유학 및 신유가는 광의와 협의의 구분이 있다. 광의의 현대 신유학은 일체의 현대적 신유학을 포괄하는 것으로 유학과 중국문화에 대해 사실적 측면에서 學理연구에 깊이 몰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신앙적 측면에서 가치정체성을 확고하게 정립해야 한다. 柳飴徵의 사상적 문화적 주장과 현대 신유학은 의심할 여지 없이 서로 부합된다. 그는 공자와 유가를 중국 전통문화의 중심이자 주체라고 인정한다. 현대 신유학의 주요한 경로는 철학과 역사학이 있다. 현재 대부분은 철학적 경로를 인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협의의 신유학이다. 현대 신유학에는 아직 역사학의 경로가 남아있다. 즉 유가문화와 사상에 대해 역사학의 시각에서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학술문화사상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기본적은 의미와 특징은 사학을 중국 학술과 문화의 근본으로 파악하여 經과 史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經學이 곧 史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유가의 심성도덕이 사학에 담길 수 밖에 없고 중국문화의 부흥 또한 사학이 본위가 되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柳飴徵은 사학은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史部의 여러 책들은 단지 협의 중의 협의의 역사이다. 그는 중국사학에 숭고한 지위를 부여하여 사학을 문학, 과학과 비견할 수 있는 학문분야라고 칭하였다. 이는 중국사학이 가장 발달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며 더욱 중요한 한 것은 인륜도덕이 사학에 담겨있기 때문이며 또한 사학을 통해서 구명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즉 사학이 유학이며 곧 경학이다. 현대 신유학의 시야에서 출발하여 중국 전통사학을 해석하고 정립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유학의 입장에서 유가적 도덕인륜과 인문정신이 전통사학에 발전과 정립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혀내야 한다. 柳飴徵은 중국 전통사학의 해석과 정립에 대해 특히 『國史要義』에서 이러한 학술적인 특색을 충분히 드러냈다. 둘째, 서방문화사상을 흡수하여 유학사상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부여하여 유학과 중국문화를 현대화시켜 현대적인 활력과 특징을 가지도록 해야 하며 이는 또한 신유학에 ‘新’이 붙는 이유이다. 柳飴徵은 이에 대해서도 강력하게 자각하고 있었고, 서방의 문화와 사학을 수용하여 참고할 것을 매우 중시하였다. 현대 신유학의 각파는 공통적인 사상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유가문화를 과도하게 추앙하여 이상화시키는 반면에 서양문화에 대한 인정이 부족하여 중국문화 중심론 혹은 유가문화 중심론의 경향을 띠는 경우가 많다. 다음으로 현대 신유학은 “開新”을 강조하여 서양문화사상을 학습하고 융합하여 중국의 현대문화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지만 “返本”과 “據舊”는 많고, “開新”은 부족하여 서양의 문화사상에 대한 이해와 수용이 부족하다. 또한 어떻게 중서문화를 융합할 것인가에 대해서 특히 유가의 인문도덕적 이성문화와 서양의 과학기술적 이성문화 사이에 종종 적절한 접합점을 찾지 못하여 사상체계가 치밀하거나 융합하지 못하고 모순된 곳이 많다. 柳飴徵은 현대 신유학의 시야에서 중국의 전통사학을 해석하고 정립을 시도하였으나 역시 유사한 이론적 한계가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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