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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근대 한국" 구상의 사상적/제도적 성찰 : 개화기 조선의 民會 활동과 「議會通用規則」 -「의회통용규칙」의 유통과 번역 양상을 중심으로

        류충희 ( Chung Hee Ryu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4 동방학지 Vol.167 No.-

        윤치호는 1897년 7월부터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토론회와 연설회의 도입을 통해 협회를 정치단체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토론회를 조직하는 실무적 차원에서 협회 조직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 해군장교 로버트의 통칭 Robert`s Rules of Order (1876)를 초역한 『議會通用規則』(1898)을 통해 서양의 토론문화를 소개한다. 1898년 4월 12일자 『독립신문』에 「의회통용규칙」에 관한 광고가 최초로 등장하지만 이듬해 그 광고는 지면에서 사라진다. 그 후 「의회통용규칙」의 판매광고가 러일전쟁을 거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 이듬해인 1906년 5월 31일자 『황성신문』에 다시금 등장하고, 『대한자강회월보』에의 전재, 해를 거듭하여 국한문판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광고가 재등장한다. 이처럼 이 시기에 「의회통용규칙」의 판매 및 유통의 흔적이 여러 지면에서 확인되는 것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인해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토론회와 연설회와 같은 民會에 대한 대한제국정부의 통제력의 약화와 이 시기 전후 보호국 상황의 타개 혹은 이용을 위한 지식인들의 민회 조직의 활성화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Robert`s Rules of Order는 나가미네 히데키에 의해 번역된 『官民議長必携』(1880)의 형태로 메이지 일본에 소개된다. 『관민의장필휴』에는 호소카와 준지로의 「序」가 붙어 있는데, 이것에는 “公共之事”를 “成俗”하지 못한 일본인이라는 시선이 확인되며, 윤치호의 시선 역시 그것과 유사하다. 『관민의장필휴』의 번역에는 역자의 판단을 최대한 배제하고 원문의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러나 「의회통용규칙」은 『관민의장필휴』와는 달리 역자 윤치호의 판단에 의해 필요한 부분만이 취사선택되어 번역이 되어 있다. 「의회통용규칙」의 번역의 주안점은 민회의 설립에 대한 방법, 그 會를 통한 의안제출과 표결 등의 議事 결정과 임원·회원·위원의 선출·역할·권한·처벌 등의 민회운영에 놓여 있다. 「의회통용규칙」이라는 텍스트의 번역은, 민회라는 소사회에 참여하는 회원들에게 그 조직·운영과 합리적 의사 결정의 과정을 이해·학습시키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이 「의회통용규칙」을 통한 계몽의 프로젝트의 최종적 목표는 조선인들에게 그 대사회/국가로서의 조선의 운영 원리와 그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윤리를 이해·실천하도록 만드는 것에 있다. 번역된 텍스트인 「의회통용규칙」은 공공적 의사결정 문화의 번역이자 소개서였던 것이다. Upon joining the Independent Club in July of 1897, Yun Ch`iho (1865-1945) organized a debating society, and introduced a western debate culture through a manual titled Uihoe t`ong yong gyuch`ik (1898), his translation of Robert`s Rules of Order (1876) by Henry. M. Robert (1837-1923). The first advertisement for Uihoe t`ongyong gyuch`ik appeared in The Independent and ran for approximately one year, beginning on 12 April 1898. It then disappeared from the newspapers until it reappeared in the Hwangsong sinmun on 31 May 1906, and was listed continually in Taehan maeil shinbo. The reason for the increased demand for this text during this period was that organizing political civic associations (民會) was popular among Korean intellectuals who wanted to overcome or use Korea`s status as a protectorate of Japan. In Japan, Robert`s Rules of Order was translated as Kanmin gijo hikkei (1880) by Nagamine Hideki (1848-1927). The aim of Kanmin gijo hikkei was a precise transmittance of the information in the original. In contrast, Uihoe t`ongyong gyuch`ik was a selective translation that focused on the organization and management of civic associations. Therefore, the first objective of this translated text was to help members understand and learn reasonable processes of deliberation through their participation in a civic association as a small society. But the ultimate objective of this text, as an Enlightenment project, was to give Koreans an understanding of modern society and the modern state, and what it might mean to be a member of such a society or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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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규슈 지역의 한국학 : 후쿠오카대학 한국학 교육의 현황

        류충희(Ryu, Chung-Hee)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9 동방학지 Vol.189 No.-

        본고에서는 규슈 지역의 한국학 현황을 통해 일본 한국학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먼저 한국국제교류재단 통계센터의 한국학 조사 결과를 통해서 일본과 규슈 지역의 한국학 관련 교육 기관을 살펴보았다. 한국국제교류재단 통계센터의 조사(2016년 하반기~2017년 상반기)에 따르면 한국학 강좌운영 해외대학 총 105개국 1,368개처 중 일본이 372개처로 한국학 관련 교육 강좌를 가장 많이 개설한 나라이다. 같은 조사에 따르면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일본 규슈 지역에는 61개처에서 한국학 관련 강좌가 개설되어 있다. 규슈 지역의 한국학의 특징적인 교육기관으로 규슈대학, 구마모토학원대학, 후쿠오카대학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학사과정을 개설하고 있는 곳은 규슈대학, 구마모토학원대학, 후쿠오카대학이며, 규슈대학, 구마모토학원대학에는 대학원 과정(석사, 박사과정)도 설치되어 있다. 이 중에 필자가 소속된 후쿠오카대학의 한국어와 한국학 교육의 실태를 동아시아지역언어학과 한국코스의 전공과목과 후쿠오카대학 전체 교양 한국어 및 한국학 관련 과목을 통해 살펴보았다. 후쿠오카대의 사례를 통해서 교양 한국어 및 전공 학생들이 2010년 이후부터 꾸준히 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교양 한국어 수강자 수(조선어Ⅰ·Ⅱ를 합친 수)는 2009년에 785명에서 2019년에 1,883명으로 늘었다. 후쿠오카대의 사례를 본다면, 앞으로도 학사학위과정과 교양한국어 및 한국학 교육의 학습자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일본에서 대학원 이상의 한국학 관련 고도전문과정의 개설과 운영은 어려운 상황이다. 일본에서 한국학 관련 대학원 과정 설치 및 고도전문교육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대학원과정의 복합화, 한국대학의 대학원과의 학문체계 공유, 한국학 관련 일자리와 연계 등이 함께 계획되고 실행되어야 할 것이다. This paper examines the current status of Korean studies in Japan with the case of the Kyushu area. Among 105 countries, Japan has been noted to have the largest number of Korean studies institutions, according to the Korea Foundation’s survey of the status of Korean studies between 2016 and 2017. Among the 372 institutions in Japan that offer educational and academic programs in Korean studies, 61 universities and institutions are located in the Kyushu area, including Kyushu University, Kumamoto Gakuen University, and Fukuoka University. In particular, the paper focuses on Fukuoka University’s courses in Korean language and culture as well as the undergraduate major program in Korean studies in the Department of East Asian Studies. The Fukuoka University’s case shows that the educational demand for Korean studies will continue to increase especially as to degree programs and general courses in Korean language and cultures in the undergraduate program. Graduate programs in Korean studies in Japan, however, still face challenges in establishing and operating highly specialized courses in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In order to promote advanced professional Korean studies education in Japan, it is highly crucial to initiate plans to diversify graduate programs, actively engage with academic systems in South Korea, and establish job opportunities in Korean stud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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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화기 조선의 民會 활동과 「議會通用規則」 * ― 「의회통용규칙」의 유통과 번역 양상을 중심으로

        류충희(Ryu, Chung-Hee)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4 동방학지 Vol.167 No.-

        윤치호는 1897년 7월부터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토론회와 연설회의 도입을 통해 협회를 정치 단체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는 토론회를 조직하는 실무적 차원에서 협회 조직을 변화시 켰을 뿐만 아니라, 미국 해군장교 로버트의 통칭 Robert s Rules of Order (1876)를 초역한 ≷議會 通用規則≸(1898)을 통해 서양의 토론문화를 소개한다. 1898년 4월 12일자 ≷독립신문≸에 「의회통용 규칙」에 관한 광고가 최초로 등장하지만 이듬해그 광고는 지면에서 사라진다. 그 후 「의회통용 규칙」의 판매광고가 러일전쟁을 거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된 이듬해인 1906년 5월 31 일자 ≷황성신문≸에 다시금 등장하고, ≷대한자강 회월보≸에의 전재, 해를 거듭하여 국한문판 ≷대 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광고가 재등장한 다. 이처럼 이 시기에 「의회통용규칙」의 판매 및유통의 흔적이 여러 지면에서 확인되는 것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인해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토론회와 연설회와 같은 民會에 대한 대한제국정부의 통제력의 약화와 이 시기 전후 보호국 상황의 타개 혹은 이용을 위한 지식인들의 민회 조직의 활성화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Robert s Rules of Order는 나가미네 히데키에 의해 번역된 ≷官民議塲必携≸(1880)의 형태로 메이지 일본에 소개된다. ≷관민의장필휴≸에는 호소카와 준지로의 「序」가 붙어 있는데, 이것 에는 “公共之事”를 “成俗”하지 못한 일본인이 라는 시선이 확인되며, 윤치호의 시선 역시 그것과 유사하다. ≷관민의장필휴≸의 번역에는 역자의 판단을 최대한 배제하고 원문의 정보를 정확 하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그러나 「의회 통용규칙」은 ≷관민의장필휴≸와는 달리 역자 윤 치호의 판단에 의해 필요한 부분만이 취사선택 되어 번역이 되어 있다. 「의회통용규칙」의 번역의 주안점은 민회의 설립에 대한 방법, 그 會를 통한 의안제출과 표결 등의 議事 결정과 임원·회원·위원의 선출·역 할·권한·처벌 등의 민회운영에 놓여 있다. 「의회 통용규칙」이라는 텍스트의 번역은, 민회라는 소사회에 참여하는 회원들에게 그 조직·운영과 합리적 의사 결정의 과정을 이해·학습시키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는다. 그런데 이 「의회통용규 칙」을 통한 계몽의 프로젝트의 최종적 목표는 조선인들에게 그 대사회/국가로서의 조선의 운영 원리와 그 구성원으로서의 역할과 윤리를 이해·실천하도록 만드는 것에 있다. 번역된 텍스 트인 「의회통용규칙」은 공공적 의사결정 문화의 번역이자 소개서였던 것이다. Upon joining the Independent Club in July of 1897, Yun Ch iho (1865-1945) organized a debating society, and introduced a western debate culture through a manual titled Ŭihoe t ong yong gyuch ik (1898), his translation of Robert`s Rules of Order (1876) by Henry. M. Robert (1837-1923). The first advertisement for Ŭihoe t ongyong gyuch ik appeared in The Independent and ran for approximately one year, beginning on 12 April 1898. It then disappeared from the newspapers until it reappeared in the Hwangsŏng sinmun on 31 May 1906, and was listed continually in Taehan maeil shinbo. The reason for the increased demand for this text during this period was that organizing political civic associations (民會) was popular among Korean intellectuals who wanted to overcome or use Korea s status as a protectorate of Japan. In Japan, Robert s Rules of Order was translated as Kanmin gijō hikkei (1880) by Nagamine Hideki (1848-1927). The aim of Kanmin gijō hikkei was a precise transmittance of the information in the original. In contrast, Ŭihoe t ongyong gyuch ik was a selective translation that focused on the organization and management of civic associations. Therefore, the first objective of this translated text was to help members understand and learn reasonable processes of deliberation through their participation in a civic association as a small society. But the ultimate objective of this text, as an Enlightenment project, was to give Koreans an understanding of modern society and the modern state, and what it might mean to be a member of such a society or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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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윤치호의 식민지 조선 인식과 자조론의 정치적 상상력 -최남선의 자조론과의 비교를 통하여

        류충희 ( Chung Hee Ryu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6 동방학지 Vol.175 No.-

        본고에서는 1910년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윤치호의 인식의 특징을 그의 자유주의적 사상 특히 자조론적 사고에 주목하여 살펴보았다. 당시의 윤치호와 식민지 통치권력의 관련성을 폭력 성에 기초한 긴장관계로 파악하고 그의 행보를 조선지식인의 피식민자의 안전보장의 문제로 검토했다. 자조론적 사고는 윤치호에게 있어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논리인 동시에 조선인을 계몽하는 논리이자 식민지 통치권력을 비판하는 근거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윤치호의 자조론적 사고는 현실주의적 특성의 발현으로 설명될 수 있다. 윤치호의 자조론적 사고를 입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1918년에 자조론을 번역하고 그다음 해인 1919년에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에 주목하여, 그의 자조론적 사고가 3·1 운동의 정치적 상상력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지 살폈다.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 에서도 자조론적 사고가 보이는데, 3·1운동이 일어나기 전년도에 출판된 자조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자조론의 내용은 개개인의 “사람(人)”의 자조를 통해 “국가”의 강성은 물론 “문명”을 달성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요약된다. 이와 같은 최남선의 자조론적 사고는 그가 기초한 기미독립선언서 에 개인의 자유라는 보편성에 근거한 이상적 논리로 작용했다. 1910년대 윤치호는,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며 3·1운동에 참여한 조선인들과 3·1운동에 폭력적으로 대응한 식민지 통치권력, 이 모두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상반된 태도를 보인다. 그 이유는 윤치호의 자유주의적 사상, 특히 그의 현실주의적 자조론이 조선 독립불능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됨과 동시에 조선인의 권익을 보장하지 않는 식민지 통치권력을 비판하는 근거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식민지기 조선인의 안정보장에 대한 윤치호의 추구는 현실주의적 자조론과 자유주의 정치사상에 기초한 틀 안에서의 것이며, 현실주의적 자조론은 식민지라는 현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사고하고자 한 논리로 작용 하게 된다. 3·1운동의 정치적 상상력을 제공했던 이상주의적 자조론은 1920년대 조선지식인들이 식 민지 상황을 용인하는 논리로 전화된다. 식민지상황 속에서 조선지식인들은 자신들, 나아가 조선인들을 계몽하고 자조·자립할 필요성을 주창하는데, 그들의 사상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의 하나로 자조론의 정치적 상상력이 작용하게 된다. 윤치호가 그러하였듯이, 그들이 가진 자조론은 식민지 상황을 받아들이는 현실주의적 논리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This study discusses Yun Ch``i-ho (1865-1945)’s perceptions of colonial Korea in 1910s by focusing on his thought on liberalism, and particularly on the principle of self-help. The paper shows that Yun’s notion of “self-help” was a realistic principle used on the one hand to justify the colonial situation, and on the other hand to criticize the colonial ruling power. We conducted a comparative study by also considering Ch’oe Nam-son (1890-1957)’s different conception of “self-help”. For Ch’oe, who had himself translated Self-Help into Korean as Chajoron(自助論) in 1918, the principle of self-help was a form of ideal political imagination. In Chajoron, the notion of “self-help” supported the development of the individual as well as of the state, and the accomplishment of civilization. Ch’oe re-articulated his conception of “self-help” based on the idea of the universal freedom of the individual in the “Kimi Korean Declaration of Independence,” which he drafted in 1919. The study then turns its attention to Yun Ch``i-ho’s relationship with the colonial ruling power, and the circulation of the principle of self-help and liberalism among Korean intellectuals in the 1910s. Yun criticized Koreans who supported the independence of Korea and who joined the March 1st Movement. However, he also took issue with the colonial ruling power’s repression of the Movement. This ambivalent attitude to Koreans and to the colonial ruling power was based on Yun’s own liberal ideas, and particularly on his notion of self-hel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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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근대 기독교 유입의 여러 갈래 : 윤치호의 계몽사상과 기독교적 자유 -후쿠자와 유키치의 자유관과 종교관의 비교를 통해서-

        류충희 ( Chunghee Ryu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15 동방학지 Vol.171 No.-

        본고에서는 계몽지식인 윤치호(1865~1945) 의 계몽사상을 일본 메이지기 계몽지식인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정치사상과 비교하여 논하였다. 본고에서 윤치호의 자유관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것이라고 가정했다. 특히 윤치호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종교관과 자유관을 분석하여 그 관점의 동일성과 차이, 그리고 그들의 관점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정치적 상상력을 문제 삼았다. 윤치호와 후쿠자와 유키치는 서양문명을 표본으로 삼아 인민계몽을 주장.실천하여 근대화를 추구한 인물들이다. 그 사상적 기반은 자유로운 개인과 사회.국가의 관계성을 전제로 한자유주의적 정치사상이다. 윤치호와 후쿠자와 유키치가 논하는 문명론에는 자연 상태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인식이 공통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인간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 대한이해가 달랐다. “종교 밖에 소요(逍遙)”하는 태도를 일관하여 종교적 신앙에 거리를 두었던 후쿠자와는 인간의 “지력(智力)”에 의한 “정신의 자유”에 중점을 두었다. 윤치호도 후쿠자와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지성을 중시했지만, 신앙에 근거한 기독교적 자유와 구제를 염두에 두고 문명론을 이야기했다. 이처럼 윤치호와 후쿠자와 유키치에게는 종교의 신앙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적 차이가 존재했다. 하지만 이 두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는 종교를 계몽의 도구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공리주의적인 인식의 기층에는 문명론, 내셔널리즘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이 공리주의적 종교관의 기층에는 신(문명, 국가) 등과 개인의 관계에 근거한 개인의 내면화.인격화된 근대적 신앙이라는 정치적 상상력이 작동하고 있다. 윤치호는 조선인이 적자(適者)가 되기 위해서는 기독교가 절대적 조건이라고 여겼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종교의 신앙적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 입장을 고수했지만, 국가와 사회의 발전을 위한 종교의 효용성이라는 공리주의적 태도를 평생 견지했다. 윤치호는 서구문명과 기독교의 암면을 인식하면서도 기독교와 문명에 대한 그의‘신앙’이 존재했기 때문에 문명론을 상대화할 수없었다. 후쿠자와 역시 서구문명을 절대적 명제로 인식하는 ‘신앙’적 태도로 문명론을 주장했다. 윤치호와 후쿠자와 유키치의 정치사상의 비교분석을 통해서, 본고에서는 근대 동아시아의‘자유’라는 정치적 상상력과 ‘신앙’이라는 종교적 상상력이 상호 연관되어 작동하는 사상적 계보의 한 예를 제시했다. This paper discusses the Enlightenment thought of Korean Enlightenment intellectual Yun Ch’iho (1865-1945) in comparison with the political thought of famous Meiji Enlightenment intellectual Fukuzawa Yukichi (1835-1901). This study hypothesizes that Yun’s view of liberty was based on the Christian faith. In particular, it discusses the two men’s views on liberty and religion,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in their views, and the driving forces behind their fundamental political imaginations. We can see that Fukuzawa and Yun shared an understanding of Man’s freedom from, and control over, nature in civilized conditions. However, they differed in the ways they considered the driving force behind this freedom and control. While Fukuzawa believed it was intelligence, Yun Ch``iho agreed that intelligence was crucial but believed that the Christian faith was a more important and fundamental force than intelligence. Yun Ch``iho’s and Fukuzawa Yukichi’s views on liberty and religion involved various factors, including civilization, nationalism, and Christianity. We can assume that what was at work in all of these factors was the religious imagination of modern faith. This faith is based on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or civilization, or the nation) and the individual, and the way this relationship is internalized and personified in the individual’s mind. Therefore, it is difficult for people who believe that civilization and the nation have a divine origin that began with God to stop imagining this divinity as an absolute propos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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