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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平家物語』における極樂浄土の意味 - 浄土教思想との関連を中心に -

        金任仲 한국일본학회 1998 日本學報 Vol.40 No.-

        本 論文에서는 平家物語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淨土敎思想이, 作品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요소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極樂淨土」의 意味와 관련지어서 考察하였다. 淨土敎는 일찍이 奈良時代부터 행하여져 왔지만, 平安末期 法然上人이 나타나 일반 민중들 사이에 널리 보급시킨 佛敎思想이다. 平安時代의 여러 文學作品속에서 묘사된 極樂淨土의 의미는, 現世의 화려함, 장엄함을 나타내기 위한「極樂」의 뜻으로 來世에 있어서도 現世의 延長으서 極樂에 往生하고 싶다는 現世 卽 極樂이라는 一元論的인 세계였음을 엿 볼 수가 있다. 그러나 平家末期에 접어들자, 保元의 亂에 의해 武士의 시대가 열리고 平治의 亂을 통해 권력을 잡은 平家가 그 專制的인 强權이 더해짐에 따라 源三位賴政의 擧兵을 導火線으로 反 平家의 기운이 확산되어간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민중들은 他律的이고, 偶發的인 뜻밖의 죽음에 직면하여 오직 기대할 수 있는 곳은 四方淨土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즉, 淨土를 希求한다는 것은 지금 살고있는 이 땅을 穢土로서 부정한다는 厭離穢土, 欣求淨土 二元論的인 思考가 이 시대에 명확하게 나타난 것이다. 法然은 그 穢土를 壓離하여 四方淨土에 往生하기 위해서는 阿彌陀佛의 本願에 의지하여 念願할 수 밖에 없다고 說敎하였다. 그는 古代 佛敎가 極樂往生을 위하여 요구되는 宗敎的·學問的인 모든 것을 일체 否定하였다. 阿彌陀佛의 本願은 功德을 많이 쌓아 來世에 極樂往生을 비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시달리는 일반 대다수의 민중들을 위해 존재한다고 말 한 것이다. 이러한 淨土敎思想이 당시의 自力念佛에 의해서 極樂往生한다는 觀念에서 平家物語에 묘사된 他力念佛의할 厭離穢土·欣求淨土의 관념이 생겨났다고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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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당법장치신라의상서(唐法藏致新羅義湘書)』에 대해서

        김임중 연민학회 2013 연민학지 Vol.19 No.-

        의상(義湘)은 용삭(龍朔) 원년(661)에 당(唐)에 건너가 중국 화엄종의 제2대종조(宗祖)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법장(法藏)과 함께 수학하였다. 그리고 10여년간 화엄교학을 배워서 귀국한 뒤 태백산에 화엄근본도장인 부석사(浮石寺)를 건립하여 화엄사상을 널리 알려 해동화엄의 창시자로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같은 문하의 법장은 지엄이 입적(入寂)한 지 2년 후에 태원사(太原寺)에서 출가하여 화엄교학을 선양하여 중국화엄종을 집대성하였다. 이 두 사람은 동문이었지만 의상과는 18세의 연령차가 있고 학문의 조예로 말한다면, 법장은 의상을 장형(長兄)으로 사모하였고 의상이 신라로 돌아간 후에도 항상 선배로 대하며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이 두 사람의 교분이 두터웠던 것은 의상이 귀국한 후에 보내왔다는 법장의 서간(書簡)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신라의 의상에게 보내 온 법장의 친필 편지는 ‘현수국사(賢首國師) 해동(海東)에 보내는 서(書)’라는 제목으로 고려시대의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원종문류(圓宗文類)』 권22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의상전교(義湘傳敎)’에 그 전문과 별폭(別幅)이 수록되어 있다. 이 편지에 의하면 법장이 의상과 헤어지고 나서 이미 20여년이 지나가 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내고 있다. 게다가 의상이 신라로 돌아간 뒤 화엄의 깊은 뜻을 설법하고 화엄교학을 널리 펼치고 있는 것에 대해 찬탄한다. 그리고 법장은 스승인 지엄이 저술한 장소(章疏)는 법어(法語)의 뜻은 풍부하지만 문장이 간결하여 후세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하므로 스승의 가르침을 자세히 기록하여 ‘의기(義記)’로 만들어서 신라의 승려 승전(勝詮)에게 부탁하여 자신이 쓴 서적에 대해서 잘못된 곳이 있으면 비판하고 지도해 주길 간곡히 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최치원(崔致遠)이 편찬한 『法藏和尙傳』에 의하면, 의상은 법장으로부터 편지와 함께 보내온 『華嚴探玄記』 등의 서책을 접하자, 마치 스승의 교훈을 듣는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방에 들어가 며칠간을 탐독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장의 편지는 중국의 베이징 리우리창(瑠璃廠)에서 홀연히 나타나 많은 수집가들의 손을 거쳐 일본에 건너가 현재는 텐리(天理) 도서관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본래라면 반드시 한국에 전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왜 중국에서 발견되었을까,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본고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불교교류사에 있어서 매우 주목해야 할 법장의 편지가 한국에는 현존하지 않고 왜 중국에 다시 전래되게 되었는가, 그 역사적 배경과 경위에 대해서 이 편지의 내용과 『法藏和尙傳』, 유기(劉基)의 발문(跋文)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義湘は龍朔元年 (661) 歲の時に入唐し, 中國華嚴宗の第二祖智儼の門下で法藏と共に師事した。 そして, 10余年間華嚴敎學を極めて歸國した後, 太白山に華嚴根本道場の浮石寺を建てて華嚴宗を宣揚し, 海東華嚴の初祖と仰がれた。 同門の法藏は智儼の入寂後2年 (670) 太原寺において出家し, 華嚴敎學を宣揚して中國華嚴學の大成者となった。 この2人は同門であったけれども, 18歲の年齡差や學問の造詣からいえば, 法藏は兄弟子として義湘を慕っており, 義湘が新羅へ歸ってからも, 常に先輩として禮を欠くことはなかった。 この2人の交流が深かったことは, 義湘歸國後に送ったという法藏の尺牘 (書簡) から窺い知ることができる。 新羅の義湘に送った法藏眞筆の書簡は, 「賢首國師海東に寄する書」 と題され,高麗時代の大覺國師義天撰の 『圓宗文類』卷22と, 『三國遺事』卷 「義湘傳敎」に, 全文と別幅の文章が收められている。 この書簡によると, 法藏が兄弟子義湘と別れてからすでに20余年になったことを感慨深く語っている。 さらに, 義湘が新羅の地に歸った後, 華嚴の奧義を開演し, 華嚴敎學を弘めていることを稱贊する。 そして, 法藏は師智儼の書いた文章が簡略なので, 師の敎えの要旨を 「義記」 に作って新羅の僧勝詮に託し, 自分の著した書物に對する批判を懇切に請うているのである。 崔致遠 『法藏和尙傳』によると, 義湘は法藏から書簡と共に送り屆けた 『華嚴探玄記』などの書物を接すると, あたかも師智儼の敎訓を聞くような思いをなして一室に籠もって數日間これを讀んだと記されている。 ところが, この法藏の書簡は中國の北京で現われ, 多くの好事家の手を經て日本に渡り, 現在は天理圖書館に秘藏されている。 本來なら當然韓國に傳わるはずなのに, どうして中國で發見されたのか, 不思議なことであるとしか言えない。 本稿では韓國と中國の佛敎交流史において大變注目に値する, 法藏書簡が韓國に傳わらなく, なぜ中國に傳來されたか, その歷史的背景や經緯をめぐって, この書簡の內容と 『法藏和尙傳』, 劉基の跋文などを檢討しながら, 私見を述べてみ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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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西行の和歌と華厳思想

        김임중 한일일어일문학회 2006 한일어문논집 Vol.10 No.-

        本稿では、西行の和歌と和歌観における華厳思想の影響の可能性をめぐって考察を試みた。西行の信仰状況においては、これまで天台ㆍ真言ㆍ浄土教との関連をめぐって多くの議論がなされてきたが、西行における華厳思想の影響の有無については、あまり考慮きれなかったように思える。西行の和歌に対する仏教の影響、とりわけ真言密教との関わりについては、山田昭全氏や萩原昌好氏等の努力によって大幅に進んでいるが、西行の和歌に窺える華厳思想と唯識説の解明については、ほとんど言及されたところがない。 しかし、西行には華厳経を詠んだ歌が『聞書集』の「十題十首」と呼ばれる歌群のうち、2首収められており、歌の数としては少ないけれども、華厳教学の中枢を占める「如心偈」(唯心偈とも)を歌題にして取り上げたこと自体、すでに西行が華厳思想に触れていたことを示唆していると言えよう。また、西行がその晩年に高雄を訪れ、自分の和歌に対する姿勢を高山寺の明恵に語ったとされる「西行歌論」(『栂尾明恵上人伝』所収)の思想的背景として、筆者は華厳教学の根本理念である「法界縁起思想」から、その意を汲んだものであろうと考えている。このことは、西行の伝記と信仰体系を考える上で、極めて重大な問題を提起してくれるのである。 さらに、西行和歌の「心」の表現上の特色からも華厳思想の影響と見られるものがある。臼田昭吾編『西行法師全歌集総索引』によると、西行は「心」の語を含む歌を全歌数2,186首の中に、346首を詠み込んでいる。これらの歌すべてが華厳思想に関わっているとは言い難いが、西行における「心」の追求にあたって唯心ㆍ唯識説の影響を無視することはでき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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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원효의 『금강삼매경론』 연기설화: 『화엄연기』에마키를 중심으로

        김임중 연민학회 2014 연민학지 Vol.21 No.-

        원효(617∼686)의 종교활동을 보면, 혼자서 연구를 거듭하여 經·律·論의 삼장(三藏)과 대승, 소승의 경전을 통달하여 불교를 종합적으로 체계화 한 ‘화쟁사 상(和諍思想)’을 이루어 한국불교의 토대를 구축하였다. 게다가 신라의 화엄종을 선양하여 그 영향은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의 화엄종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원효 가 저술한 수 많은 저서 중에서 중국불교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권의 저서가 있다. 하나는 『금강삼매경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대승기신론소』이다. 『금강삼 매경』에 관해서는 선종의 창시자 보리달마의 ‘이입사행론(二入四行論)’의 영향을 받아 7세기 후반, 즉 唐 초기 중국에서 성립한 위경(僞經)이라고 하지만, 아직 확실치는 않다. 중국의 불교학자는 이 『금강삼매경』에 대한 아무런 주석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원효의 저서 『금강삼매경론』이 현존하는 유일한 주석서이다. 쿄토(京都)의 코잔지(高山寺)에서 소장하는 『화엄연기(華嚴緣起)』라는 에마 키는 현재 일본의 국보이고, 묘에(明惠)는 원효와 의상을 「화엄종의 종조」로서 뛰어난 필체로 문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화엄연기』‘원효그림’의 문장에 의 하면 신라국왕의 왕비가 중병에 걸려 있을 때 무녀의 진언에 의해 신라의 칙사가 묘약을 구하기 위해 당에 파견되어, 그 도중에 용왕으로부터 『금강삼매경』을 전해 받는다. 신라의 국왕은 원효에게 칙명을 내려 『금강삼매경』의 주석서를 만들어 설 법하게 하였다. 그 뒤 왕비의 병은 깨끗이 완치되어 원효는 당시 여러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것이 현존하는 『금강삼매경』이다. 『송고승전(宋高僧傳)』에는 이 『금강삼매경』을 원효는 절 강당에서 설법을 한 것이 아니라 붓과 벼 루를 소의 두 뿔 사이에 놓고 수레에 타고 이 경을 강의하고 집필하였다고 전해지 고 있다. 말하자면 원효는 『금강삼매경』에 쓰여 있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이라는 관계를 소의 두 뿔(角)과 비유하여 이 경에는 본시이각(本始二覺)의 깨달 음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암시한 것이다. 원효의 『금강삼매경소』3권이 중국으로 전해지자, 너무나 뛰어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것은 보살이 쓴 것이라고 찬탄하 며 『금강삼매경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본 고에서는 일본의『화엄연기』에마키에 쓰여져 있는 『금강삼매경론』연기설화 에 대해서, 원효의 저서가 일본에 수용하게 된 경위에 주목하면서, 찬녕(贊寧)의 『송고승전』과 『삼국유사』등에 기술된 원효전과 서로 다른 점을 중심으로 검토하고 자 한다. 元曉(617∼686)の宗敎活動は、獨自に硏究を重ね、經?律?論の三藏と大 乘、小乘すべての經典に通曉し、佛敎を綜合的に體系化した「和諍思想」を創り あげ、韓國佛敎の土台を築いた。さらに新羅の華嚴宗を宣揚し、その影響は日 本ばかりでなく中國華嚴宗にも及んでいる。とくに、元曉の著書の中で中國佛敎 に大きな影響を與えたものが二つある。一つは「金剛三昧經論」であり、他の一つ は「大乘起信論疏」である。「金剛三昧經」に關しては、禪宗の開祖達磨の「二入 四行論」の敎えを援用し、7世紀後半、すなわち初唐の頃に中國で成立した偉經 であるといわれるが、定かではない。中國佛敎者はこの「金剛三昧經」に何一つ註 疏を書かなかったので、元曉の注釋書が現存する唯一のものである。 京都の高山寺藏「華嚴祿起」(國寶)は、元曉と義湘という二人の云記と說話を 題材としたもので、日本?中國 でもない新羅の高僧元曉と義湘を「華嚴宗の祖師」 として、優れた筆致で文學的に描いているのである。「華嚴祿起」「元曉繪」の詞書 によると、新羅國王の王妃が惡病に苦しんだので、巫女の進言により新羅の勅使 が方藥を求めて唐へ派遣され、その途中で龍王から「金剛三昧經」を授けられる。 新羅の國王は元曉に勅命を下し、「金剛三昧經」の疏を作って講するようにし た。その後、王妃の病は癒え、元曉は時の人□に尊敬されたという。これが現存 する「金剛三昧經」である。「宋高僧云」には、この「金剛三昧經」を元曉は寺院の 講堂で說いたのではなく、筆と硯を牛の二つの角の間に置き、牛車に乘ってこれ を講義し、かつ書いたのであると云えられる。つまり、元曉は「金剛三昧經」が說 く「本覺と始覺」という關係を牛の二角(覺)と譬え、この經には本始二覺の悟りが 隱れていることを暗示したわけである。この元曉の「金剛三昧經疏」三卷が中國に 云えられると、あまりに見事な出來ばえなので、これを菩薩が書いたものであると 感心し、「金剛三昧經論」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本稿では、「華嚴祿起」繪卷に描かれている「金剛三昧經論」の祿起說話をめ ぐって、元曉の著書の日本における受容の問題に注目しながら、「宋高僧云」と 「三國遺事」などに語られる元曉云との相違点を中心に檢討したいと思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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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백제왕 젠코(善光)와 나가노젠코지(長野善光寺)

        김임중 ( Im Jung Kim ) 연민학회 2015 연민학지 Vol.24 No.-

        백제왕(百濟王)씨는 7세기 중엽에 ``質(인질)``로서 일본에 파견된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 젠코(善光)을 시조로 한다. 660년에 백제가 멸망한 후, 젠코(善光)는 결국 본국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그대로 일본에 머물었다. 일본조정에서는 이를 우대하여 ``백제왕(百濟王)``이라는 성씨를 부여했지만, 천황의 후예 이외에 일본에서 왕의 칭호를 받은 것은 백제왕씨가 처음이며 그 특별한 대우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백제왕씨의 본거지는 처음에는 오오사카의 나니와(難波)였지만, 그 뒤 가와치노구니 가타노군(河內國交野郡)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이 땅에 건립한 백제사(百濟寺)는 그 씨족의 절이다. 한편, 나가노현(長野縣)에 있는 젠코지(善光寺)는 그 절의 연기에 의하면 코교쿠천왕(皇極天皇)3년(644)에 칙령으로 젠코(善光)가 먼저 미노치군(水內郡) 이모이(芋井)에 초당(草堂)을 짓고, 이어서 현재의 젠코지(善光寺)를 세웠다고 한다. 젠코지는 일본 최고(最古)라고 전해지는 일광삼존(一光三尊)의 아미타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창건이래 1400여년의 긴 세월에 걸쳐서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아 많은 사람들의 신앙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이 젠코지의 이름은 백제왕 젠코(善光)에 결부시켜서 붙혀진 것이라고 하는 견해도 있으며, 또 젠코지의 이름은 혼다젠코(本田善光)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善光寺緣起』에 의하면, 젠코지의 개산(開山)을 혼다젠코(本田善光)로 하는 것은 오히려 『日本書紀』의 백제왕젠코(百濟王善光)에서 명명(命名)된 것일지도 모른다. 본고에서는 젠코지(善光寺)의 창건을 둘러싸고 시나노노구니(信濃國)의 도래인을 검토한 후에, 젠코지의 창건자 혼다젠코(本田善光)와 와카오미노아즈마비토(若麻績東人)와의 관련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Zenko (善光), son of the last king of Paekche, King Uija, taken to be the progenitor of the Kudara no Konikishi (百濟王) Clan, was dispatched to Japan as a hostage in the mid-7th century. After the fall of Paekche in 660, Zenko was unable to return to his home country and stayed in Japan. The Japanese court gave him preferential treatment and bestowed him the surname of Kudara no Konikishi (百濟王), the first instance of a royal title with the exception of the Emperor`s descendants, a special preference that needs to be paid attention. In particular, although the base of the Kudara no Konikishi was in Osaka`s Naniwa (難波), they later moved to Kawachi Province, Katano district (河內國交野郡) and Hyakusa-ji Temple (百濟寺) was built there, becoming the clan`s temple. Moreover, according to the origin tale of Zenko-ji Temple in Nagano Prefecture, Zenko first built a thatch-roofed house in Imoi, Minochi District under the edict of Empress Kogyoku, where the present-day Zenko-ji Temple now stands. Zenko-ji Temple has Japan`s oldest passed down ``one-light, three bodhisattvas,`` with Amitabha Buddha as the Sakyamuni, capturing the hearts of the people since its founding for over 1400 years and being the object of their worship. There is a theory that the name of Zenko-ji Temple has been linked with the Paekche king Zenko, and the name of Zenko-ji Temple has been named after Honda Zenko. However, according to the Zenkoji Engi (善光寺緣起), the naming of Zenko-ji Temple`s Kaisan (開山) to Honda Zenko could have been named after Kurada no Koshiki Zenko in the Nihongi. This study investigates the migrants to Shinano Province (信濃國) and seeks to examine the builders of Zenko-ji Temple, Honda Zenko and Wakaomino Atsumabito (若麻績東人), which surround the construction of Zenko-ji Temple.

      • 西行の和歌と大峰修行

        김임중(Kim Imjung) 한일일어일문학회 2005 한일어문논집 Vol.9 No.-

        本稿では、西行の『山家集』に収録されている大峰修行の歌、十八首を取り上げて、峰中歌の詞書に記された行場の地名と西行の峰入りのルートについて推定してみた。また、西行の峰中歌の表現内容を分析し、西行の大峰修行における宗教的意味を探ってみた。なお、峰中歌の詞書に記された大峰行場の地名に関しては、筆者が2002年8月25日~9月3日まで直接現地に入って実地調査(吉野ㆍ大峰ㆍ熊野)を行い、修験道関係の諸史料との関連性をめぐって検討したものである。 そして本稿では、まず第一に西行の峰中歌の詞書に記された地名を比定する場合、近世以降に成立したとされる「大峰七十五靡」を用いるのは問題があると考え、『諸山縁起」所収の「大峰宿名百二十所」と『大峰秘所私聞書』など、主に中世以降成立の大峰史料に基づいて、現地比定を行った。 第二に、峰中歌に見える大峰行場の比定の結果を踏まえて、西行の峰入りのルートを推定してみた。西行が辿った順路は、熊野から入峰して吉野へ出る「順峰」(天台宗ㆍ聖護院本山派)と、吉野から入って熊野へ出る「逆峰」(真言宗ㆍ三宝院当山派)のいずれも特定できない不自然なコースである。だが、中世の修験道史料に基づき、西行は吉野から秋の峰入りを遂げた「逆峰」であること、また『山家集」の中-雑三首と、下-雑十六首は同一時期のものではなく、別々の峰入りの際に詠まれた作品であるとし、西行の大峰修行は少なくとも二度以上行ったと考えた。 第三に、西行の大峰修行の歌の表現内容を考察し、その宗教的意味を探ってみた。大峰は昔から現代に至るまで、修験道の根本道場であったから、西行の峰中歌が宗教的なものに結びつくのは至極当然と言えるが、こうした山岳修行の体験を通して、精神的にも宗教的にも深まりを見せ、その後の西行の作歌 態度に少なからず影響を与えたに相違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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