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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한시에 나타난 수사(數詞)의 수사학(修辭學)

        김성언 ( Sung Un Kim ) 한국한시학회 2011 韓國漢詩硏究 Vol.19 No.-

        한국 전통사회의 문인들이 한시를 창작할 때 가장 고심했던 것이 대구를 제대로 짓는 일이었다. 대구 창작 능력은 일상의 문화생활에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으며 비평가들은 한시의 우열을 평가할 때 흔히 대구의 대응법이 정확하고 기발한가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곤 했다. 이런 중요성을 가진 대구에서 매우 흔하게 사용된 시어의 하나가 바로 숫자다. 숫자는 그 자체가 지닌 기호언어로서의 특성들, 즉 구체성과 상징성과 간결성 때문에 대구에서 사용되는 대응어로 적합한 시어였다.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서 숫자는 하나하나마다 인문적인 복합성과 다의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특성은 시어로서의 숫자가 내포한 장점이었다. 시인들은 숫자를 사용해 경제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주장을 전달할 수 있었으며, 특히 노련한 시인들은 다양하게 변용된 숫자를 통해 절창으로 손꼽히는 작품들을 생산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아 각종 연회나 시회에서 귀족 계층이 향유했던 중요한 지적 유희의 도구의 하나로 기능해온 한국 고전 한시의 경우, 숫자는 말놀음에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된 시어였다. 또한 조정에서 문한의 일을 관장한 신하들이 관각풍의 시를 쓸 때 숫자의 사용은 반드시 엄수해야할 준칙이었다. 적절히 사용된 숫자가 장엄미의 구현과 군주의 찬미에 가장 적합한 도구였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 시각과 청각 등의 대응을 보여주는 대구의 창작에서 숫자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로서의 기능을 다했다. 증별시나 만시 등 다양한 종류의 시작에서 한시 시인들은 여러 가지 숫자와 유사 숫자를 대응시킴으로써 시적효과를 높이는 한편 자신의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Investigating Hansi, a poetry which was written by Chinese character in ancient Korea, we will find out so many numbers in every stanza and line. Especially, such poetic composition emerges in a antithesis. In the ancient Korean customs, capacity of making a antithesis was regarded very important skill, because that skill was necessary to carry on a cultural living and so was the only way to gain a court office. Numbers was used in the Hansi because of its substantial virtues as a concreteness, symbolism, laconism. Many poets like Jisang Jeong who lived in the middle Koryo Dynasty used diverse numbers in his works, as a result he was admired a great literary master in spite of personal career of treason. In this essay, I describe distinguishing marks of number as a instrument of literature and take several examples. First, Number was inflected as a object of joke because of its playable character. Second, most court poets used numbers for make eulogies admiring rulers. Three, numbers used in a poem made diverse rhetorical funtions as a correspondence, for example in the countermeasure of time and place, visual and auditory s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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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기 학동의 감성훈련으로서의 대구(對句)학습과 창작

        김성언 ( Sung Un Kim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1 石堂論叢 Vol.0 No.49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관료사회에서 행해지는 공식 행사는 물론 지식인들의 사적인 각종 회합에서도 반드시 문학적 소양, 특히 시창작의 재능이 우수한 자가 높은 대접을 받았다. 고려나 조선시대 지식사회에서 관습적으로 성장기의 학동들에게 시를 암송시키고 창작능력을 길러준 것은 이 같은 교육환경에서 비롯된 결과로 판단된다. 학동들이 시적 교양을 쌓은 연장자들이 먼저 제시하는 시구(詩句)에 대(對)를 짓는 연습을 함으로써 사물의 이름과 특징을 익히는 교육방식은 훌륭한 감성훈련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우리 전통사회에서는 어떤 사물을 성장기 학동들에게 제시하고 그것을 기본적인 어휘의 대어(對語)로 표현하게 한 다음 그 대어(對語)들을 엮어 대구(對句)를 창작하게 했다. 대구(對語)의 표현을 통해 어휘력을 제고시키는 한편 한시의 기본 구조를 이루는 간단한 대구(對句)의 창작을 통해 사물을 은유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능력을 함양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남용익의 예에서 보듯, 한시의 대구(對句) 학습은 오늘날의 발달심리학에서 말하는 언어능력과 사고력의 향상에 가장 잘 들어맞는 하나의 사례가 될 수 있다. 또한 어른들은 산봉우리, 소나무, 매화, 국화와 같은 자연물들을 통해 성장기의 학동들에게 뒷날 관직에 올랐을 때 반드시 필요한 충의(忠義)라는 덕목을 자연스레 떠올리도록 교육했다. 고대의 위대한 시인들과 철인들의 시구나 교훈을 암송시키고 그것을 학동들 스스로 자신의 창작품 속에 모방해 구현하도록 하는 한국 전통사회의 교육방법은, 학동이 앞으로 진출할 관료 사회에 제대로 어울리기 위해 필요한 문학적 교양을 배양하기 위한 배려에서 기획되었을 것이다. 또 한 귀족계층의 문화적 특성인 전아성(典雅性)을 획득하는 데 있어 전 고인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과 아울러 수사법으로서의 인용법이 지닌 장점들, 즉 설명적이고 긴 문장을 쓸 필요 없이 동급의 교양인에 게 논리를 납득시키는 경제성과 이미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글이나 인물을 인용함으로써 글의 권위를 쉽게 획득할 수 있다는 점도 고려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성장기 학동들의 감성교육을 위해 위와 같은 방식으로 대어(對語)와 대구(對句) 학습을 사용했다면, 오늘날에 와서 이러한 교육 기법을 새롭게 해석하고 수용해 교육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시도도 크게 무의미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에 따라 마지막 장에서는 죽순과 눈비 등의 일상자연물을 옛 학동들이 어떻게 시화했는가를 살피고 그것을 바탕으로 교안을 시험적으로 제시하였다. In ancient East Asia which used Chinese character, it was a settled custom that a well poet was kindly treated in the high society. In this reason, so many people lived in the Koryo and Chosun dynasty gave lesson of reciting Chinese poems and of writing new poetry for their children. Especially 5~10 years old children in a growth period received a subject for a poem from their parents or teachers at any time and had to make a complete poem. From this educational process, children learned names of natural objects and methods of representing the peculiar characters of those objects. In any case, skilled teacher first presented one verse and student made responded verse using an antithesis. Today we know the importance of EI, or Emotional education. Scholars insist the need of encouraging the emotional intelligence inherent in a child`s mind. Person of High EI can attain a good human relation and social success. A goal of literary education is not only cognitive, but affective. I think the korean traditional literary education can assure the success of cognitive and affective lear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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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한시(漢詩)의 대구(對句)에 나타난 대응법(對應法)의 제 양상(1)

        김성언 ( Sung Un Kim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0 石堂論叢 Vol.0 No.47

        동아시아의 전통적 수사법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대응법이다. 대응법은 운문뿐만 아니라 산문까지 포함한 모든 문학영역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대응을 사용한 대구의 창작 그 자체가 문학적 능력의 우열을 가름하는 기준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대응법의 보편적 사용은 동양 사회의 이분법적 사고 체계와 관련이 있는 듯하며 조선 초기 악장인 『용비어천가』는 대응법이 작품 전체의 기본 구조로 사용된 예이기도 하다. 본 논문은 현대문학과의 관련을 염두에 두고 한국 한시에 나타난 대응법의 여러 모습들을 분석한 것으로, 수직과 수평, 시간과 공간, 여러 감각들, 여러 색채들이 시 속에서 어떻게 대응되어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형성되고 있는가를 사례 별로 검토하였다. 고구려 승려 정법사의 <영고석>으로부터 조선 후기의 이수광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저명한 시인의 작품을 분석 대상으로 하였으며, 회화의 기본 구도인 수직과 수평이 어떻게 시에서 변용되어 묘사되고 있는가, ‘處’와 ‘時’로 맺어지는 대응법이 그 간략성과 함축성에서 어떤 장점을 지니고 있는가, 현대시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감각의 심상들이 대응을 통해 어떻게 시 전체를 완결시키고 있는가, 붉은 빛과 푸른 빛 등의 색채를 대응시킴으로써 한시인들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자신의 시적 미감을 전달하고 있는가 등을 분석 제시하였다. 함축과 절제를 근간으로 하는 이러한 한시의 대응법에 대한 내재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고전문학이 현대문학의 창작에 기여할 가능성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Antithesis is the most popular in the tradition of East Asia literature. It was used widely not only in verse but also in prose, and the possibility of creating proper antithesis was regarded as one`s literary talent. In this paper, I analyze some poets written from Koguryo Dynasty to Chosun Dynasty from the viewpoint of using this rhetorical method. At first, I select the contrary vertical and even composition depicted in the poetry. This composition emerged in drawing is also adopted in the poetry and contribute to raise the literary beauty. Contrary time and place which used by antithesis is not rare in the Korean classical poetry. Two words (處ㆍ時) situated in the last of a phrase are doing particular role, which simplify and signify the messages of poems. Imaginations of the sense of visual, hearing, touch and smell make mutual influence and create particular aesthetic inspiration. Also representative colors as red and green are compared in a poem and create clear poetical imag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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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이문화로서의 한시

        김성언 ( Sung Un Kim ) 한국한시학회 2014 韓國漢詩硏究 Vol.22 No.-

        전통적으로 놀이는 진지성이나 신성성이 결여된 여가나 유락의 개념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인류학을 중심으로 인간문화에서 놀이가 가진 본질적 측면이 강조된 이래 여러 문화현상에서 놀이적 요소가 연구되고 그 중요성이 밝혀졌다. 한국 전통사회의 고급문화인 한시 역시 많은 놀이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한시도 다른 정형시와 마찬가지로 엄격한 규칙들 위에서 이루어지며 특히 글자수, 각운, 평측, 대구 등 준수해야 할 형식적 제약이 많은데, 규칙의 제정과 준수는 바로 가장 중요한 놀이 요소다. 은유 등 수사적 장치들도 놀이의 미감 및 쾌락적 기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시의 특히 전통사회에서 행해진 다양한 형태의 시놀이는 함께시놀이의 표본적인 것으로서 참가자들은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거나 군주의 정치를 찬미함으로써 동질성을 확인하고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다. 또한 중요한 놀이요소의 하나인 내기와 보상을 통해 즐거움을 배가시키고 경쟁의식을 북돋기도 했다. 혼자서 짓는 시에도 역시 놀이 요소는 깃들여 있다. 내기나 보상, 함께 누리는 즐거움은 없으나 암묵적으로 시작의 규칙을 충실히 따르고 고인의 시를 화운함으로써 시놀이를 통해 지루한 시간을 때우고 창조의 보람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In the traditional point of view, the notion of play had been considered as a mere leisure or a useless entertainment. However in recent days, some creative anthropologist like Johan Huizinger said that all kinds of culture have diverse play elements and that play is the nature of culture itself. Hansi written in the ancient Korean high society also was constituted with several play elements. It has many rhetorical devices, for example metaphor, poetic diction, rhyme, antithesis etc.. It is a clear evidence of play. In this point, poetic play with many people or play alone are same. And Hansi as a play had some affirmative functions in the traditional society. It contributed to unite of special social classes and promotion of individual pleasure. In some cases, poets made intentional destruction against the play rule of poetry. However it should accepted as a attempt of constructing new play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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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정(春亭) 변계량(卞季良)의 관각풍(館閣風) 한시(漢詩)에 대하여

        김성언 ( Sung Un Kim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07 石堂論叢 Vol.0 No.38

        여말 선초의 격동기에 생존했던 변계량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손꼽히며 정치·철학·문학의 각 방면에서 현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고려말의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館閣大手筆로 관각풍 한시의 전통에서 가장 빛나는 시인이기도 했다. 또한 국가의 공식 碑文과 祭文, 事大宴享樂, 개국 송축의 樂章으로부터 각종 序跋과 記文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이런 점에서 그는 군주 및 당대의 비평가로부터 "나라를 빛낸 문장"이라는 찬양을 받았다. 그러나 당대에 받았던 이런 명성에도 불구하고 창의적 수사와 문학적 긴장을 중시하는 오늘날의 문학의 관점에서 볼 때 그의 문학은 결코 고평될 수 없는 몇 가지의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이 사실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점을 인정하면서도 조선 초기 신민의 복속과 일체감을 유도하기 위해 변계량 등 관각의 대표적 문신들이 수행했던 문학적 업적을 재조명하고자 했다. 이들의 문학적 성과의 내재적 의미를 규명함으로써 보편적인 정치 행태로서의 상징조작의 양상을 밝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변계량의 대표적인 한시인 <勤政殿>같은 작품을 보면, 궁궐의 모습과 君臣의 의례가 장엄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이러한 장엄미야말로 관각풍 한시가 지녀야 할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관각의 문신들은 중국 漢代의 賦에 사용되었던 수사적 장치와 어법 및 시어를 차용해 그것들을 잘 배열함으로써 장중하고도 독특한 하나의 장르를 산출했던 것이며, 이것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 바로 변계량이었다. 또한 군주에 대한 찬미 외에도 시의 후반부에 군주에 대한 경계를 적절히 산입함으로써 『詩經』이래 전통적으로 묵수되어온 美刺의 구도를 제시하고 있음을 본다. 또한 고려조 『翰林別曲』을 연상하게 하는 일련의 시편들을 통해 그는 문학과 정치 양 방면의 엘리트로서의 자긍심을 한껏 뽐내고 있다. 이러한 시들에 나타난 우아미와 화려함은 배타적 기득권을 누렸던 그들의 정치적 위상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엄미와 우아미 외에도 그는 긍정 행사를 묘사한 몇 편의 시들을 통해 득의의 생애를 보낸 고관으로서의 여유와 해학미도 드러낸다. 이러한 태도는 유가 문학가들이 창작에 있어 至善의 목표로 여겼던 이른바 `溫柔敦厚`로부터 기인된 것이라 생각된다. Byun Gye-Ryung, who lived between Koryo and Yi Dynasty, was respected as a representative writer, and leave his name to posterity in the fields of politics, philosophy and literature. Especially, he inherited the orthodox of the Neo Confucianism, and was the most excellent courtly poet. So he was admired as "a poet bringed glory to nation" by king. In spite of this kind of reputation, today we rate his works low. Because his literary legacy is lack in creativity and literary tension. In fact, the great part of Byun`s poets is simple eulogy for a king or a hymn of Yi Dynasty. However, we can see a political idea of that period, and know the phenomena of symbol manipulation in his poets. In a poet <Geunchungchun(勤政殿)>, he describes the magnificent palace, the sight of grave morning meeting. This kind of the magnificent beauty is a essential rhetoric factor and important implement in the courtly literature. His principle connected with eulogy is based on a tradition of the Book of Odes. Also he presents self conceit as courtly poet through some works. In these, we see the beauty of humor which can hold only by the high office having attained wealth, position, honors, or the li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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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논문 : 『국역 고려사』 완간의 의미와 활용 방안 ; 고려사 세가 수록 시가(詩歌)의 문학론적 검토

        김성언 ( Sung Un Kim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12 石堂論叢 Vol.0 No.54

        고려사의 수사자들은 정치적 사안을 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 기사 속에 문학 작품을 인용했으며, 그 목표는 군주나 신하의 도덕적 선악이나 행정적 공과에 대한 포폄이었다. 따라서 사서에 등장하는 문학 관련 기사를 문학적 관점에서만 평가하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에 빠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사관들이 문학작품을 기사 속에 삽입한 이유와 의도를 간파해 역사적 전후맥락 속에서 평가해야 한다. 사관들이 견지했던 시가 취택의 원칙은 역사적 감계로서의 문학의 기능이었으며, 세가에 등장하는 시가들은 『시경』이래 연면히 계승되어 온 찬미와 규계라는 동아시아 시가의 전통적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찬미의 반열에 드는 고려조의 어제나 응제시들은 관각풍 시의 전형적인 수사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내용이나 등장하는 소도구와 시간 공간적 배경 역시 동일하다. 그 작품들은 동아시아 봉건왕조 아래서 고도로 발달한 문학적 상징조작의 기법이 응결된 정화라고 평가되며 상상력과 문채 또한 빼어나다. 그러나 규계의 기능을 중시한 사관들은 군주의 연문학 애호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을 가했으며, 연문학을 마치 가무잡희 같은 퇴폐적인 놀이와 동일시하기도 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낙천적 전망과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범인과 구별되는 넓고 큰 국량을 시에 담아내는 것을 군주가 지녀야할 문학적 덕목으로 파악했으며, 올바른 문학의 길은 경세에 대한 부단한 관심에 있다고 믿었다. 한편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조 문신들은 시가를 통해 승국의 역사를 정서적으로 왜곡 폄하함으로써 조선왕조의 도덕적 우월성과 역사적 당위성을 조작해내었다는 사실도 지적되어야 한다. Historians who published Koryosa put various poets in the king`s chronicle for the purpose of delivering political events objectively and concretely. Their goal is a strict evaluation founded Confucian rules about governor`s ethical virtue and vice or administrative merit and demerit. A principle maintained by the historians is a literary function related to the historical mirror So many poetry emerged in the Chronicle perform function of praise and restriction which continuing literary tradition after the Book of Odes. Some poets written by kings and following officials of Koryo Dynasty are shown typical rhetorics and metaphors used in Far East Asian court literature. Also their themes, linguistical properties, settings of time and space are presented between two historical heritages. We consider that the poets are the essence of ancient literature shown the techniques of political symbol manipulation developed in the medieval dynasties. Besides, historians who lay emphasis on the function of restriction criticized publicly kings` biased fondness towards pure poetry of beauty. They believed that kings should have strict virtues as a optimistic view, an unyielding spirit, and should describe them in the imaginative produc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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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시에 나타난 고려(高麗)의 기억

        김성언 ( Sung Un Kim ) 東亞大學校附設 石堂傳統文化硏究院 2008 石堂論叢 Vol.0 No.42

        비극적인 생애를 마친 端宗을 위해 出仕를 거부하고 은둔한 生六臣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리는 秋江 南孝溫은 우수한 시인이자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특히 동시대의 다른 문인들과는 달리 모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넓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는 至治를 지향하는 정통 유가를 자처했던 그에게 있어 역사는 현재를 재는 잣대이자 미래를 비추어주는 鑑戒였기 때문이다. 기행과 유람 때 지었던 시와 산문들을 통해 그는 고려라는 나라에 대해 자기가 지닌 기억들을 진술하고 나름대로 명확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본고는 『秋江集』을 텍스트로 하여 한 鮮初 지식인의 高麗觀을 재구성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조선 개국공신의 후손임을 큰 자부심으로 여겼던 남효온의 경우, 시문 도처에서 고려에 대한 역사적 견해를 표출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특히 고려 후기 군주와 정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은 작품의 비율이 현저히 높다. 그는 『高麗史』의 왜곡된 부분을 그대로 신빙하고 있으며 나아가 군주의 악행은 결국 亡國이라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유가의 이론을 자신의 신념 체계로 완벽히 이행시키고 있다. 남효온은 고려의 멸망은 군주를 보필하는 신하의 잘못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는 당시 세조조의 훈구대신들이 장악하고 있던 성종의 조정을 풍자적으로 지적하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또한 남효온의 시편들에는 이성계와 그 추종자들이 무력에 의해 고려왕조를 전복시킨 사건인 이른바 易姓革命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작품들이 몇 편 존재한다. 이 시들은 위에서 든 고려조 후기 군주에 대한 비판과 신하들에 대한 평가를 읊은 시들과 정치의식 면에서 서로 상응하고 있다. 이 연작시의 핵심어는 결국 天命과 禪讓으로서 개국공신 南在의 후손인 남효온도 시를 통해 자신이 발붙이고 있는 왕조의 정통성을 강변하고 있다. 고려의 정치와 이념에 대해 남효온이 견지했던 管見은 고려조의 사찰을 찾아가서 썼던 시편들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양적으로 매우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사찰 기행시들을 통해 때로는 직설적인 어조로, 때로는 풍자적인 어조로 불교의 교리를 비판하기도 하며, 고려 말엽 승려의 惑世誣民과 그에 따른 정치적 폐단을 적시하기도 한다. 고려 불교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사례의 예거와 비판은 결국 고려 왕조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과 조선왕조의 개국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하나의 논거로 작용하고 있다. 고려 왕실의 불교 신앙에 대한 작자의 비판은 또한 조선 초기 왕실의 불교 선호에 대한 경계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Nam Hyo-on(1454-1492) was a famous poet in Chosun Dynasty and was known as a member of living six loyal retainer of the former King Danjong(端宗). As a radical idealist with Confucian ideas, he accused some courtiers of power who supported usurping the Danjong`s throne. But immediately he met with political enemies` reverse, and retired to his hermitage in the rural district. At this period, he travelled so many beautiful places, including the vestiges of Koryo the former dynasty. Nam wrote brilliant poetry about the sad memories of Koryo, kings` wicked acts, courtiers` failure in their duty, and buddhist monks` swindles. In this paper, I`d like to define the poet`s attitudes toward the political situation of Koryo Dynasty and the sincere objects of his poetic satires. He strictly believed that the king who had mortal ethical defects bring calamity not only upon his kingdom but himself. He also believed that the subject was not relieved of his responsibilities for the downfall of a country. The fact was clearly defined in the case of Chung Mong-ju(鄭夢周) and Gil Jae(吉再). In some poets depicts beautiful old buddhist temple built in Koryo period, Nam showed undisguised contempt of the superstitious belief. Based on the reasonable Confucian ideas, he firmly criticized Koryo Kings and aristocracies` religious attitudes, they only relied on the compassion of Buddha even in severe situation like Mongolian invasion. He was a descendant of a meritorious retainer of Chosun Dynasty, and the fact restricted the poet`s imagination like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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