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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政煥(Jin, Joung-hwan) 신라사학회 2018 新羅史學報 Vol.0 No.42
본고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고분 출토품, 제와술과 목조건축술 등 기술, 불교미술품 등 다양한 분야의 대표적인 유물을 통해 양국 간의 미술 및 문화교류의 일면을 살펴보았다. 교류의 정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본고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미술교류에 대해 양국 간의 정치적・군사적 遠近에 따라, 첫째 ‘적극 동맹기’, 둘째 ‘동맹 소강기’, 셋째 ‘대치 시기’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첫 번째, ‘적극 동맹기’는 450년~500년으로 고구려의 남하에 백제와 신라 양국이 적극적으로 공동 대응한 시기이다. 이 시기 양국 간 미술교류 양상을 보여주는 사례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 식리총에서 출토된 금동신발과 당시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 송산리 4호분에서 나온 은제과판이다. 식리총 금동신발은 한성시기에서 웅진시기로 넘어가는 과도기 백제 금동신발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송산리 고분의 과판 역시 신라의 전형적인 과판이다. 이 시기의 교류는 비록 적극 동맹기였으나, 이처럼 완제품이 상대 국가에 사여되는 것 이외에 문화교류는 그렇게 활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동맹 소강기’는 500년 이후부터 백제 성왕이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554년 이전까지이다. 이 시기 양국은 명목 상 동맹이었으나, 신라는 백제와의 동맹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양-백제-신라 3국의 국제 관계 속에서 백제의 제와술과 같은 기술이 신라에 전해지는 한편 중국 남조 불상양식의 영향을 공유하는 등 동맹이 굳건했던 그 전시기에 비해 오히려 미술교류의 폭이 더 넓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세 번째, ‘대치 시기’에는 ‘동맹 소강기’ 그 이전 시기 있었던 국가 차원의 직접적 교류는 점차 쇠퇴됨에 따라, 목조건축술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일방의 문화 내지 미술이 그대로 전달되기보다, 다른 국가의 문화와 미술의 모티프를 바탕으로 자기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후삼국기 후백제는 전반적으로 신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가졌으나, 황룡사지 출토 금동불입상, 남산 늠비봉 석탑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듯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후백제에서도 후백제 미술을 신라지역에 이식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에 세련된 백제 미술이 신라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많이 끼쳤을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런데, 본고를 통해 국가 차원의 미술교류는 직접적인 영향이 많은 것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백제의 미술이 신라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끼쳤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백제와 신라의 미술교류는 당시 양국의 정치적 상황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