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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영국의 초기 추상, 1937~1949

        정영목,Chung, Young-Mok 한국미술이론학회 2005 미술이론과 현장 Vol.3 No.-

        Yoo Youngkuk started his career as an artist when he entered Bunkagakuin of Tokyo in 1935 he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Japanese art scene as a young Korean artist until 1943. In his earliest works, Rhapsody and Work B, Surrealist and abstract influences are manifested as these were prevalent in Japan at the time. With the exception of Rhapsody and Work B, all works available that were executed between 1937 and 1940 are abstract, which points to the fact that Yoo intended abstraction from the beginning. Surviving works in relief suggest his early style was founded on the abstractions similar to Russian Avant-Garde, Neo-plasticism and Bauhaus simplicity. His early abstractions were not the ideational images derived in the process of the abstraction of the representational image, but they arose from the constructive attitude in composing the already stylized non-representational geometries. It is worth noting that his early emphasis was on the pure and absolute geometric abstraction, rather than the images motivated from the figurative representation. Yoo differentiates himself from Kim Whan Ki in the following aspects: one, he eliminated the subject matter i.e. human figures and the nature; two, he maintained the constructivist attitude in creating a strict and absolute abstraction; three, he experimented with different styles without combining them. He manifests direct influences from the prevalent Western art influences, such as Futurism and Russian Avant-Garde, unlike Kim who vaguely references. In both paintings and reliefs, Yoo's attempt in the realization of the pictorial depth and space seems cerebral and conceptualized compared with the other artists of the time who resolved abstraction via the constructive dimension. Uemura, a contemporary critic to the geometric abstractions in Japan, disapproves the stylistic bent in the adaptation of the abstract painting without the comprehension of its spiritual movement. As witnessed in other criticisms as well, contemporary Japanese critics' interest lie mainly in the superficial observation such as the presence of representational elements, composition and use of color. Such formal and superficial understanding of the geometric abstraction resulted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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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현대회화의 추상성, 1950-1970: 전위의 미명아래

        정영목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1995 造形 FORM Vol.18 No.1

        1967년과 68년이라는 연도에 한국 현대미술은 두가지의 큰 의미를 부여한 해이다. 전자는 한국 현대 추상미술의 본격적인 발현을 유렵의 앵포르맨이나 미국의추상표현주의와의 접목이 나타나기 시작한 1957년으로 잡아 그 후로부터의 10년간의 성과를 돌아보는 후자는 한국신미술의 원년을 고희동이 서양화를 배우러 일본으로 건너간 1908년으로 잡고 그 후로부터의 60년간의 발자취를 회고한다는 뜻의 해였다.과거에의 검증과 평가, 그에 따른 미래에의 예견이라는 취지와 함께 기념행사로서 예를 들면 '공간'잡지사 는 1967년 12월호에 '한국 추상회화 10년' 이라는 특집을 내보냈고, 한국미술협회는 1968년 10월 26일 '신문화 60년 기념 미술세미나'의 주제로 '신미술 60년과 오늘의 문제점'이라는 토론과 발표의 장을 마련하였다. 위의 예가 아니더라도 60년대의 추상회화를 점검하거나, 아니면 60년 동안의 한국 근현대미술을 돌아보거나, 그 성과에 대한 비평의 태도는 대개 다음의 두 상반된 관점으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현대'나 '신'분기점의 원년이 하나같이 서양것과의 밀집한 관련 속에서 설정되어 그래서 지나치게 외래의 사조에 의존하여 '주체성이 빈약하다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고 '뿌리깊은 모방의 연속과 전통의 수립이 불가했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지적의마지막 합류점은 항상 일본미술과의 연관성을 실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가령 '서구의 미술을 받아들임에 있어 이념은 도외시하고 다만 방법론만을 받아들인데 그쳐 토착화하지 못했던 일본의 미술을 일본 유학생들이 자기비판의 안목도 없이 무분별하게 받아들였을 때부터 한국미술은 위험성을 내포' 하고 있었다고 지적한 1972년 당시의 변종하는 '그러나 일본문화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일부 신진화가들의 일본에 대한 맹종은 새로운 문제점으로 등장했다면서 그의 속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는 비평의 예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결론과는 달리 한국미술의 '현대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세계사조와 호흡을 같이 하는 일이 시급'하다며 '세계미술의 가장 첨단적인 사조의 전위적 대열에 서도록 꾸준한 노력과 전진'을 부르짖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로서의서구미술의 도입과 수용을 예찬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평가한 1960년대의 추상미술운동은 소위 '후진국가에서 근대화하고 사회가 근대화하는 동시에 미술이 현대화하는 단계에 있어서 우리 나라 추상작가들이 전위적인 일을 위해서 10년동안 꾸준히 노력'한 성과하고 자화자찬하기도 한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결국 '세계사조와 호흡을 같이 하는 일'의 정도에 관한 문제로 집약된다. 이 '정도에 관한 문제'는 더욱 구체적으로 여기서 논의될 것이나, 앞에서 제시한 인용구문들이 예시하는 다음과 같은 몇몇 현상과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보수세력에 도전하는 전위의 전진자세'로서 '57년이래 이 나라에 이식한 현대미술의 씨가 60년대 초기부터 싹이 트기 시작하여 미술계의 새로운 분포를 형성'하였다는, 즉 앵포르멜 혹은 추상표현주의식의 '추상성' 의 발현 혹은 이식을 전반적인 미술의 근대와 현대를 가르는 기준으로 또는 '전근대에서 근대로' 전환하는 시점으로 잡을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관점의 해석으로 말미암아, 상대적으로 그 이전의 '추상적 경향'의 작품들이 과소평가되어 온 것은 아닌가? 한편 이러한 문제점과 결부된 흥미있는 사회심리로서 당시의 조형심리와 연관된 현상은 너나할 것 없이 조금의 젊은 식자층이라면 '전위'라는 단어를 즐겨 쓴다는 사실이다. 가령, 1957년 11월 제1회 '현대작가 초대미술전' 의 전시평문인 김영주의','미술 한국의 전위','전위정신','전위작품','전위의 광장'등 전위라는 글자가 빠지면 큰일날 현대미술인 양 너도나도 전위이더니 급기야 1969년에는 더욱 세련되어 보이는 외래어의 표기로 'AG'라는 무크지 성격의 잡지를 발행하고 협회를 결성하기도 한다. 추상성과 관련된 당시의 전위의 성격은 무엇이길래 이렇듯 전위에 매료되었을까? 전위의 분위기는 혁명의 계절에 싹터 혁명과 함께 무르익는다. 설혹, 그것이 당대의 정치적 감각과 무관했더라도 혁명의 느낌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것이 4.19 혁명이건 5.16 쿠데타적 혁명이건 전위의 감각과 뉘앙스는 혁명의 사회심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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