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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일본 宮都에 있어 葬地의 성립과 전개

        橋本義則,김은정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17 百濟硏究 Vol.66 No.-

        Fujiwara-kyo, established at the end of the 7th century, was the first imperial capital in ancient Japan. An enormous number of officials, who served the Emperor, were assembled there to live, causing a host of new problems, among them the major problem of the treatment of their dead bodies. The officials were treated as residents of the imperial capital even after their death, and burial grounds were thus created for them in the imperial capital. In the 8th century, the imperial capital was relocated from Fujiwara-kyo to (in order) Heijo-kyo, Kuni-kyo, Koka-no-miya, Heijo-kyo, Nagaoka-kyo, and Heian-kyo; and not only the officials (residents of the imperial capital), but also their burial grounds (understood as their residences after death) were moved with the capital’s repeated relocation. After the imperial capital was relocated and fixed permanently in Heian-kyo at the end of the 8th century, a change occurred in the imperial capital burial grounds. In traditional aristocratic burial rituals, the husband and wife were buried separately in different counties far apart. However, after Emperor Kanmu moved the grave of Fujiwara no Momokawa to the place where his wife had been buried, married couples were buried in the same township in the same county (in graves in the same region, even in the same grave), in adjacent townships in the same county, or in adjacent townships in different counties. This change was brought about by Emperor Kanmu’s acceptance of Chinese thought, specifically the li of Confucianism. The emperor embraced the concept of li seriously and deeply, instead of perfunctorily and superficially, in order to revolutionize the aristocratic society of Japan, and this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character of Japanese burial grounds. 고대 일본에서 宮都는 7세기 말 ‘藤原’京에서 시작되었다. ‘藤原’京에 천황에게 봉사하기 위해 수많은 관인들이 거주함에 따라 다양하고 새로운 문제가 야기되었다. 특히 관인들의 사후 이들의 시신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자 관인들은 宮都의 주민으로 취급되어 이들을 매장하기 위한 새로운 葬地가 궁도에 설치되었다. 8세기에 들어와 宮都는 ‘藤原’京에서 平城京, 恭仁京, 甲賀宮으로 바뀌었고, 다시 平城京으로 환도한 이후에 長岡京, 平安京으로 천도했다. 이렇게 宮都가 그 소재지를 달리할 때마다 宮都에 거주했던 관인들은 당연히 거처를 옮겨야 했고, 이로 인해 이들이 사후 매장될 葬地도 함께 이동되었다. 그런데 8세기 말 平安京으로 천도를 단행한 이후 더 이상 宮都를 옮기지 않게 되자 宮都에 설치된 葬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즉, 종래 귀족 부부의 묘는 멀리 떨어진 다른 郡에 조성되었으나, 환무천황(桓武天皇)이 藤原百川의 묘를 아내의 묘가 있는 곳으로 이장시킨 이후에는 同郡 同鄕(공역묘, 同穴墓 등)인 곳, 同郡 隣鄕인 곳, 異郡 隣鄕인 곳에 조성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으로 환무천황이 중국적인 사상, 유교의 예제를 수용한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도는 종래 형식적이고 표면적으로 유교와 예제를 수용했던 것과는 달리 본격적이고 내면적으로 수용하여 사회를 변혁하려는 데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葬地의 형태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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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이안큐[平安宮]·헤이안쿄[平安京]의 구조와 변모 : 고대도성에서 중세 도시로

        하시모토 요시노리(橋本義則) 국립문화재연구원 2013 헤리티지:역사와 과학 Vol.46 No.1

        도성은 왕권이 존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왕권을 지지하는 지배계층이 모여 거주하는 곳이다. 그리고 중앙집권적 통일지배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의례의 장으로서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에 공통적으로 건설 되었다. 그 기원은 중국에서 유래하며, 일본은 律令制를 바탕으로 하는 천황제 고대국가가 실현되는 7세 기 말‘藤原京(후지와라쿄)’에서 처음으로 지상에 출현한다. 7세기 말부터 거의 1세기 간 複都制가 채택 되었기에‘藤原京’이후 도성은 여러 곳에 건설되었고, 때로는 천도되었다. 그러나 8세기 말‘長岡京(나 가오카쿄)’에서는 複都制를 지양했고,‘ 平安京(헤이안쿄)’에 도읍을 정한 이후, 중세·근세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헤이안쿄-교토에는 1100년에 걸쳐 왕권이 지속적으로 존재하여 지금의‘京都市’(교토시)에 이르게 된다.‘ 藤原京’가 고대 일본 최초의 도성이었다면,‘ 平安京’는 마지막 도성임과 동시에 중세 도시 로 변모해 가는 전환점에 위치하고 있다. ‘藤原京’이래 남북축선에 대한 선대칭 구조를 의식해 도성이 축조 되었고,‘ 平安京’에서는 이러한 구 조가 가장 강하게 표현되었지만, 9세기 초 천황과 관인들의 의식·정무의 동선이나 좌석 배치에 있어서 동서방향이 채용되게 되었고, 이에 더해 9세기 말에는 천황의 거소가 도성의 축선에서 벗어나게 된다. 또한 10세기 중반 경‘平安宮(헤이안큐)’에서는‘內裏(다이리)’를 중심으로 한 잦은 화재가 발생해 천황은 궁외로 거소를 옮기게 되었다. 이후 천황이 궁 바깥에 거주하는 것이 일반화 되었고,‘ 平安宮’는 의식을 행하는 장소로서 한정적으로 유지 수리가 될 뿐이었으나 결국에는 그것마저 어려워져 폐쇄에 이르게 된 다. 한편 귀족의 저택도 7세기 이래의 남북축선에 대해서 동서의 선대칭 구조로 부터,‘ 寢殿造(신덴즈쿠 리)’라고 불리는 건물배치도 공간구성도 비대칭인 건물양식이 주류를 이루어 갔다. 이상과 같이 일본의 고대 도성의 특징을 잘 가지고 있었던 최후의 도성‘平安京’는 남북을 축선으로 하는 선대칭 구조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났으나, 9세기‘平安宮’의 변화를 시작으로 11~12세기에 크게 변모해갔다. 이처럼 고대국가의 도성이 가지고 있었던 남북을 축으로 하는 구조를 버리고 동서방향으로 동선을 취한 움직임은 고대국가의 이념을 탈피하여 다음 시대로 전환하는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고 생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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