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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世紀 高麗 木造阿彌陀佛像과 腹藏墨書銘

        崔聖銀(Choe Songeun) 고려사학회 2008 한국사학보 Vol.- No.30

        본 논문에서는 고려 후기 13세기 목조아미타불상들 가운데 최근에 불상 복장의 봉함목이 조사된 瑞山 開心寺 목조아미타불좌상, 2006년에 새로 복장이 조사된 서울 水國寺와 光州 紫雲寺의 목조아미타불좌상, 기존에 조사된 서울 開運寺 목조아미타불상의 복장묵서명에 대해서 고찰하고 13세기 아미타불상의 성격과 그 조성배경을 살펴보았다. 이 불상들은 나무라는 동일한 재료로 제작되었다는 점 이외에도 몽고와의 항쟁이 끝난 뒤, 사찰의 보수되던 13세기 후반에 조성 또는 중수된 상으로서 이 당시 아미타신앙의 성행을 알려준다. 특히, 開心寺아미타불상은 복장 봉함목의 묵서명을 통해 충렬왕대인 至元 17년(1280)에 중앙기관인 僧齋色에 의해 불상의 보수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어 당시 승재색이 경전을 판각하는 업무이외에 불상을 보수하는 업무까지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었으며 개심사가 이 지역에서 차지하고 있던 중요성뿐 아니라 중앙왕실과의 관계까지 엿볼 수 있었다. 또한 開運寺 아미타불상의 경우는 조성원문과 개금발원문을 통하여, 牙州(牙山) 東深接에서 조성되었으며, 아산이 고려시대 12漕倉 가운데 江都에서 가장 가까웠던 하양창이 위치한 곳이었으므로 동심접의 사찰이 대몽 항쟁기간에 훼손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여기서 ‘接’이라는 표현은 당시 유행했던 향도와 같이 특정 목적을 위해 결성된 조직이라기보다는 지역성을 바탕으로 결성된 조직이었을 것으로 이해하였다. 한편, 수국사 아미타불상의 복장에서는 己亥年에 판각된 侍中 崔宗俊 발원의 「보협인다라니」가 발견되어 이 불상의 조성배경에 鐵原崔氏 家門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고, 慈雲寺 목조아미타불좌상은 복장에서 발견된 개금발원문을 통하여 이 불상이 ‘羅州止接’에서 개금보수된 상임을 알 수 있었다.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을 비롯한 13세기 목조아미타불상들은 조각적으로 우수한 불상으로서 고려시대 불교조각이 중국 南宋代 조각양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발전된 양상을 잘 보여준다. 양식적인 고찰을 통해 볼 때, 이 상들 가운데 개심사상은 12세기 말에서 13세기 초 사이에 조성되었으며, 다른 아미타상들은 戰後 13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와 같은 고려후기 아미타불상의 조성은 당시 신분계층의 구분 없이 널리 확산되었던 아미타신앙을 배경으로 하는데, 염불과 참회를 통하여 아미타정토로 왕생하고자 하는 대중화된 미타신앙의 유행으로 인하여 다수의 아미타불상이 조성되면서 불상형식이 정형화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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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원ㆍ영양왕대 고구려 불교조각에 대한 고찰

        최성은 ( Choe Songeun ) 한국고대학회 2020 先史와 古代 Vol.- No.63

        고구려가 정치적으로 안정되었던 25대 평원왕(559~590)과 26대 영양왕(590~618)이 재위했던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까지 약 반 세기 간의 불교조각을 통해서 중국 南北朝와 倭에 대한 고구려의 불교문화 교류의 가능성을 고찰하였다. 평원왕 18년(576) 북제에 갔던 고구려 승려 義淵은 法上의 가르침을 받고 귀국하여 고구려 불교를 一新하였다고 알려져있다. 의연은 북제에서 여러 불교 典籍을 가져왔으며, 이때 북제 불상도 고구려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평원왕 12년(570)에는 왜국에 사절을 보내 외교적 관계를 시작하였으며 영양왕 6년(595)에 왜로 건너간 慧慈(?~622)는 20년간 聖德太子의 스승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僧隆과 雲聰(602년)을 비롯해서 慧灌(605년) 및 曇徵과 法定(609년) 등도 왜로 건너가 수준 높은 고구려 불교를 알린 기록이 있다. 불교문화를 앞세운 對倭교섭에서 ‘금동불상’은 고구려 왕실이 왜 조정에 보내는 중요한 예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현재 전하는 飛鳥時代불상들 가운데는 고구려 불상들과 이 상들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불상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평원ㆍ영양왕대의 고구려 불교조각으로 소형의 在銘일광삼존불상들이 전해오고 있는데 소형의 상들을 통해 당시 불교조각의 전모를 파악하기는 어려운 면이 있으나 6세기 불교조각은 5세기 후반의 고식적인 요소와 6세기의 새로운 요소가 섞여 있는 복합적인 양상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일본에 전해오는 大津石山寺금동불입상, 法隆寺헌납보물 143호 금동삼 존불상, 飛鳥寺금동장육불좌상[飛鳥大佛]을 이러한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石山寺금동 불입상과 法隆寺헌납보물 143호는 고구려에서 전래된 불상으로 판단되며, 飛鳥寺금동장육 불좌상(飛鳥大佛)은 고구려에서 전해진 불상의 範本을 기초로 하여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의 두 상에서는 古式요소와 새로운 요소가 混在하는 점을 근거로 하였다. 飛鳥寺 금동장육불상에서는 착의형식의 일부분이 발해초기 이불병좌상에서 나타나는 고구려적인 요소를 보이는 점과 飛鳥寺가람배치가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이라는 점, 飛鳥寺건축에 고려척[고구려척]이 사용된 점, 영양왕이 飛鳥寺불상의 주조에 황금 삼백냥을 보낸 기록을 들어 飛鳥寺창건과 불상조성에 고구려의 영향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았다. monk Faxiang(法上), an eminent figure of the Daśabhūmikā school of Buddhism. When Uiyeon returned to Goguryeo in the year 576 or 577, it is assumed that he brought back a few Buddhist scriptures and images from Northern Chi, and that he renewed Goguryeo Buddhism. In 570, King Pyeongwon sent an envoy to Japan to start diplomatic relations and, years later, King Yeongyang sent the monk Hyeja, who stayed for twenty years in Japan as a teacher of Prince Shotoku. Many other Buddhist monks of Goguryeo were sent to Japan, and they developed the Buddhist culture of Asuka Japan. Several extant Buddhist images dated to King Pyeongwon and Yeongyang periods, though small in size, show that old traditional stylistic features of the later half of the fifth century are mixed with new aspects of the style of the sixth century in a single image. Based on the characteristics of Goguryeo Buddhist sculptures, three Buddha images in Japan gilt-bronze image of Ishiyama-dera(石山寺) at Otsu, No. 143 gilt-bronze Buddha triad of Horyuji(法隆寺) now in Tokyo National Museum, and gilt-bronze Great Buddha image of Asuka-dera(飛鳥寺) are stylistically and iconographically examined in comparison to the Buddhist sculptures of China and Korea in the fifth and sixth centuries. From this investigation, it is fair to assume that the Ishiyama-dera image and No. 143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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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주 법천사지의 고려시대 불교조각

        최성은(Choe, Songeun)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5 美術史學 Vol.- No.29

        이 글은 원주 법천사지에서 출토되었거나 수습된 고려시대 불교조각에 대해서 살펴본 글이다. 법천사지 출토의 불교조각품은 완전한 상태의 것은 없고 대부분 훼손되었거나 작은 파편에 불과하지만 불, 보살상을 비롯하여 공양상, 석등 화사석 등 다양하고 수준 높은 조형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 나말여초 이래 고려시대 중기까지 크게 융성했던 법천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출토품들 가운데 석조공양보살상의 하체부분은 법천사의 탑 앞에 공양상이 안치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며, 연산 개태사와 오대산 월정사, 강릉 신복사지의 공양보살상과 같은 동일한 형식의 고려시대 공양보살상들에 비해서 조각적으로 이르다고 판단되는 요소도 발견된다. 법천사지 탑비전지에서 출토한 석등의 화사석편에는 이 공양보살상들과 거의 유사한 형태의 공양상이 부조되어 석탑 앞에 놓였던 공양보살상의 도상이 석등의 장식에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출토된 사자상의 몸체를 통해 법천사에 쌍사자가 받치고 있는 석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머리 정상이 높은 보살상은 ‘미륵’으로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도상의 보살상이 법천사에 봉안되어 있었음을 알려준다. 법천사지 출토의 고려전기의 불교조각들은 사실적인 표현과 섬세하고 부드러운 조형성 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조각적 특징은 아마도 당시 수도 개경에서 유행했던 불교조각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법천사가 개경의 사찰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중앙지역의 불교미술이 법천사에 이식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This paper investigates Buddhist sculptures of the Goryeo period unearthed from the Beopcheonsa Temple-site at Wonju. Excavated images, though mostly damaged pieces, still show a high quality of stone sculptures, which exhibit the high status of Beopcheonsa flourishing from the Late Silla and early Goryeo period on to the mid-Goryeo. An offering Bodhisattva image, only part of his lower body suviving, demonstrates that there was a pagoda and its offering image at Beopcheonsa (Beopcheon temple) in the Goryeo period. A relief of an offering image, most likely a part of stone lantern, shows a Bodhisattva with a tall cylindrical crown offering incense. This piece tells that offering Bodhisattvas placed before a stone pagoda at Woljeongsa, Sinboksa, Gaetaesa temple were holding incense. Part of the lower body of a stone lion reveals that Beopcheonsa had a stone lantern supported by two lion images, which were popular from the late Unified Silla period. A stone Bodhisattva image now in the Wonju History Museum, which is quite similar to the stone Bodhisattva images of Maejiri at Wonju and of Seolbulsa at Goesan in his exaggerated high head, could be a new type of Maitreya, who will descend from the Tushita Heaven and receive enlightenment for the three preachings. The Buddhist images unearthed from Beopcheonsa temple-site are mostly stone works except for three tiny bronze images. However, since a great number of Buddhist images were made of wood, lacquer, bronze, and clay during the Goryeo Period, it is fair to assume that images made of these materials carved in subtle and delicate ways might also have been enshrined in the halls of Beopcheonsa, which were most likely burned and reduced during many w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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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麗時代 護持佛 摩利支天像에 대한 고찰

        崔聖銀(Choe Songeun) 한국불교연구원 2008 불교연구 Vol.29 No.-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행하였고 밀교의식도 활발하여 국가적인 차원의 밀교도량이 많이 설행되었다. 정토와 천태, 선종에도 밀교적인 요소가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밀교의 여러 존상 가운데 마리지천상은 전란과 여행길을 보호하여 안전을 지켜주며 여러 종류의 고난에서 구해준다는 신이다. ??고려사??에는 국가적으로 마리지천 도량이 설행되었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으나 실제로 마리지천에 대한 개인들의 신앙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다. 현존하는 마리지천의 小像들은 3cm가 조금 넘는 매우 작은 크기로 보아서 옷 속에 넣고 다니는 호지불의 용도로 제작되었다고 생각되는데, 북송대에 번역된『佛說大摩利支菩薩經』된다. 그런데 이 상들은 경전에 수록된 도상의궤에 따른 1면 2비, 3면 6비, 3면 8비가 아닌 1면 6비의 도상을 보이고 있어 고려사회의 정서에 맞추어 적절히 도상의 변용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를 통해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독창적인 면을 엿볼 수 있다. 또한 관음보살과 나란히 배치된 병존상도 있어 전통적인 관음신앙과 함께 밀교적인 마리지천이 함께 신앙되었던 상황을 알 수 있다. 즉, 이 마리지천상들은 불교미술사적인 측면에서 뿐 아니라 고려시대 불교의 신앙양태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귀중한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This paper investigates gold-plated silver amulets of Mar?ci(摩利支天)from the late Goryeo period. These images have crowns decorated with a stupa in its center and six arms, whose hands hold sutra, leaf of bodhi-tree, bow, vajra, sword, and cudgel, seated on a pedestal supported by the back of a wild boar. In the Goryeo period when Buddhism was in full flourish, esoteric Buddhist ceremonies were held with royal support. Textual record exhibits that national ceremonies on Mar?ci were performed at Myotong-sa temple(妙通寺) in the capital, Gaegyung(開京).<BR>  Sutras on Mar?ci say that if anyone bears an image of Mar?ci under his clothes or in his top-knot, Mar?ci will protect him from all kinds of danger, even when he goes into battle or on a long trip. Tiny images of Mar?ci in the collection of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and in private collections in Japan show worship of Mar?ci just as written in the sutras. These amulets display one-headed and six-armed Mar?ci, which is different from the iconography of Mar?ci with three-heads and six or eight-arms written in the sutras.<BR>  It is presumed that iconography of Mar?ci was somewhat modified for the cultural atmosphere of Goryeo society. They look friendly and gentle, not as aggressive as Indian Mar?ci images of the Pala period or Chinese images of the Southern Song period, which demonstrate the taste and capability of Goryeo artists in applying textual iconography and foreign models to their own type of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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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皇龍寺 중금당 장육삼존불상에 대한 연구

        崔聖銀(Songeun Choe) 신라사학회 2011 新羅史學報 Vol.0 No.23

        진흥왕 35년(574)에 조성된 황룡사 금동장육삼존불상은 ‘전륜성왕’으로 일컬어지는 인도 아육왕과 관련된 조성 연기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지금까지 이 연기설화는 ‘전륜성왕’인 진흥왕과 그가 지배하는 ‘佛緣國士 新羅’라는, 신라의 불국토설에 치중한 시각으로만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하는 불상의 재료와 모형, 주조시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이 설화가 진흥왕대에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설화적’으로 구성한 ‘기록’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즉, 아육왕이 보냈다는 불상의 재료와 모형은 신라왕실에서 황룡사 장육삼존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남조의 ‘陳’으로부터 가져온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난조지역은 동의 산지로도 유명할 뿐 아니라 아육왕상에 대한 신앙이 널리 유행했던 곳이므로 불상의 재료와 모형과 함께 아육왕상 설화에 대한 기본적인 소재도 강남지역에서 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아육왕의 장육존상과 달리 황룡사 중금당에는 장육삼존불상과 함께 16존상이 더해져 모두 19존의 불ㆍ보살ㆍ제자의 권속이 봉안된 석가불의 장엄한 會上이 구현되었는데, 장육불상의 형식은 기존의 학설과 달리 인도풍의 아육왕상에서 중국식으로 토착화가 진행된 단계의 ‘통견식 대의에 시무외인과 여원인의 통인을 결한 불입상’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형식의 불상은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황룡사 장육불상의 도상이 후대 불상들의 범본으로 모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좌우 협시보살상은 신라지역에서 출토한 숙수사지 금동보살입상이나 거창출토 금동보살입상과 유사한 형식으로 중국 남북조시대와 삼국시대에 널리 유행한, ‘X자’로 천의가 교차한 위에 다시 영락이 ‘X자’로 교차하는 유형의 보살상이 양식적인 면에서 시기적으로 가장 근접하는 형식일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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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신라 四天王寺녹유소조신장상의 연구 성과와 향후 과제

        崔聖銀(Songeun Choe) 신라사학회 2012 新羅史學報 Vol.0 No.26

        경주 사천왕사지에서 출토한 녹유소조신장상 벽전(?塼)은 뛰어난 조형성을 보이는 중대신라 불교조각의 걸작품으로 문무왕 19년(679)이라는 명확한 조성시기와 함께 양지(良志)라는 조각가의 이름까지 전하고 있어서, 그 명칭과 제작기법, 문헌기법, 조각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개진되어왔다. 그런데 2006년부터 시작된 사천왕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소조신장상의 형태는 모두 3종류뿐이며, 동서 목탑의 기단부에 안치되어 있었고, 한 면에 6구씩 한 탑에 24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면서 소조신장상에 대한 지금까지의 이해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 그 동안 제기되었던 논의와 추정이 일시에 문제점을 드러내고 그 논거를 잃게 된 점은 앞으로의 고대 불교조각사 연구에서 현장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향후 사천왕사 불교조각의 연구는 소조신장상 명칭문제에 편중되었던 기존 연구 단계를 넘어서 사천왕사 불교조각 전체로 연구의 대상이 확대되어 통일신라와 당, 일본 불교조각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동시기의 동아시아 불교조각을 재조명하고 사천왕사 불교조각을 자리매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This paper investigates studies on the glazed tile guardian images of Sacheonwangsa at Geongju: on their identity, on the sculptor Yangji, and on their construction method. The identity of the guardians has been presumed to be either the Four Heavenly Kings or the Eight Kinds of Divine Guardians. The excavation of 2006, however, revealed that 24 glazed tiles showing three different types of guardians were placed on the base part of each pagoda to the east and west, numbering 48 pieces all together. After the excavation, the identity of the guardians was assumed to be guardian kings protecting the pagodas. With the textual evidences and this excavation result, how can we address the Buddhist images of Sacheonwangsa from now on? We need to have broad perspective of the Buddhist sculptures of Sacheonwangsa in relationwith other Buddhist images of the East Asia, particularly China and Japan, in order to explore the characteristics of the Buddhist images of Sacheonwangsa including these glazed tile guardian images. It is hoped this will lead us in an approach to apprehending the paradigm of Buddhist sculpture of the early Unified Silla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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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소재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연구현황

        최성은 ( Choe Songeun )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1 인문과학연구 Vol.0 No.32

        본고는 북한에 있는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주요작품들을 살펴보면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40년간 진행되어온 우리 학계의 연구현황을 정리하고, 미술사적인 측면에서의 문제점을 제기하여, 향후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조사와 연구의 방향을 밝혀본 것이다. 북한지역 고려시대 주요 불교조각을 석불과 석탑조각, 철불. 금동불 등, 재료별로 나누어 보았는데, 지역적으로는 크게 세 지역(수도 개경을 중심으로 황해남북도, 서경이었던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평안남북도, 고려 화엄불교의 성지였던 금강산 일대)에 분포되어 있다. 수도 개경 일대의 불상들은 남경이었던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경기지역으로 연결되고, 여기서 다시 남한강을 따라 원주, 충주지역으로 확대된다. 수도 개경과 서경, 남경 등, 행정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경영되었던 중심사찰들이 육상로와 수로의 주요 거점에 세워진 지방의 여러 사찰들과 상호 영향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었음은 남북한 불교조각의 지리적 분포를 조망함으로써 유추가 가능하다. 남북교류를 통해 이루어졌던 금강산과 개성 지역 관광으로 일시적으로 당일 또는 단기 여행이 가능하기도 하였으나 연구자들의 실물조사는 허락되지 않는 상황이어서 도록에 게재된 도판이나 일제강점기에 촬영되었던 흑백필름을 가지고 연구되었다는 점에서 연구 환경이 매우 제한되고 열악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소재 불상들에 대한 연구는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있어 제기되는 여러 문제점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남한 소재 자료만으로는 밝히기 어려운 점을 명확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It is the purpose of this paper to discuss the major images and monuments of the Goryeo period in North Korea and to summarize the scholarly research from South Korea between 1980 and present. In doing so, we will focus on several important objects or monuments of the Goryeo period in North Korea, highlight the art-historical problems associated with them, and suggest a new direction for future studies of Goryeo Buddhist sculpture. Goryeo Buddhist sculptures of North Korea are categorized by their materials : stone Buddha and relief on stone pagodas, iron Buddha, and gilt-bronze Buddha. They are found mainly across three areas : in the Hwanghae province with Gaeseong(開城, Capital of Goryeo dynasty) at the center, in the Pyeongan province with Pyeongyang(平壤, West Capital of Goryeo Dynasty) at the center, and in the Gangwon Province with Mt. Keumgang(金剛山, sacred place of Avatamsaka Buddhism of Goryeo period) at the center. Buddhist images at Capital Gaeseong are connected in style and iconography to those in the Gyeonggi Province with Seoul(the North Capital of Goryeo dynasty) at the center. They also spread to Wonju(原州) of the Ganwon province and Chungju(忠州) of the Chungcheong province along the southern Han River. It is assumed from the geographic distribution of Buddhist sculptures in South and North Korea that the major monasteries serving as religious and administrative bases in Gaegseong(Capital), Pyeongyang(West Capital) and Seoul(South Capital) were related to the temples constructed along the land and river traffic routes. To carry out cultural exchange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the North Korean government temporarily allowed South Korean people to travel Mt. Keumgang and Gaeseong area on guided one-day tours(Gaeseong) or package tours(Mt. Keumgang). But it was not possible for scholars of South Korea to investigate images and monuments for their research. Unable to see real images at the major Buddhist temples of the Goryeo period, scholars used photographs published in the catalog and black and white negative films taken during the period of the Japanese occupation, for their research on Buddhist sculptures in North Korea. Despite these challenges, the research on the Buddhist sculptures in North Korea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xploring many problems associated with Buddhist images and monuments of the Goryeo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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