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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淸末의 北洋新政 硏究 : 直隸省의 鹽政改革과 財政問題

        구범진 서울大學校 2004 국내박사

        RANK : 248351

        淸末 各省의 新政 가운데, 直隸總督 袁世凱가 주도했던 北洋新政은 당시 자타가 인정하는 모범 사례였다. 北洋新政은 성과가 뛰어났던 만큼, 그 추진에 많은 자금이 필요했다. 여기에 直隸의 省權力은 매년 80만량의 庚子賠款을 분담해야 했으며, 袁世凱가 주관했던 北洋陸軍의 건설에도 거액의 자금을 투입해야 했다. 이처럼 재정수요가 급증했던 新政期에 鹽稅는 省權力에게 가장 효율적인 籌款對策이었다. 짧은 시간에 거액의 자금을 비교적 수월하게 조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세 저항도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鹽政改革은 直隸의 재정 확대와 北洋新政의 추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新政期 直隸의 鹽稅는 아주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宣統 연간에는 第一의 재원으로 성장하였다. 19세기말까지 直隸의 재정은 외부의존도가 높은 취약한 구조 아래에 있었지만, 新政期를 거치면서 直隸 재정의 ‘자립도’는 크게 제고되었다. 直隸에도 사실상의 省財政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鹽稅였다. 新政期에 증가된 鹽稅는 또한 北洋新政의 여러 개혁에 필수적인 재원이 되었다. 列强으로부터 天津을 회수했던 光緖 28년(1902) 7월, 長蘆鹽區의 鹽政은 사실상의 붕괴 상태에 있었다. 長蘆 鹽商들이 전란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만큼, 省權力은 鹽運의 조속한 정상화를 위하여 恤商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直隸總督 袁世凱는 鹽商들의 밀린 鹽稅를 면제해 주는 한편, 그들이 자금을 원활하게 조달할 수 있도록 외국은행으로부터의 차입을 지원해 주었다. 또한 賠款加價의 납부 조건을 鹽商들에게 비교적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鹽稅의 납부 방식을 ‘先鹽後課’에서 ‘先課後鹽’으로 개혁하여 鹽稅 수입의 안정성을 제고하였다. 直隸의 口北과 永七 지역은 사실상 長蘆鹽區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長蘆 鹽商들과는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었다. 이는 省權力이 초기부터 강도 높은 개혁을 추진하는 데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국가권력의 염정 운영이 200여 년 동안 포기 상태에 있던 口北에, 光緖 29년(1903) 直隸의 省權力은 口北督銷局을 설립하였다. 光緖 32년(1906) 이후 省權力이 口北에서 거두는 鹽稅 수입은 81,000량에 이르렀다. 道光 말년 이후 廢弛 상태에 있던 永七 지역에는, 光緖 29년 官辦의 永平鹽務總局을 설립하는 改革을 추진하였다. 鹽務總局은 袁世凱의 측근인 張鎭芳이 경영을 맡았는데, 鹽務總局이 거둔 순익은 매년 20만량 이상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新政 초기의 염정 운영에서 直隸의 省權力은 恤商에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지만, 光緖 30년(1904) 이후에는 恤商보다는 籌款으로 크게 기울었다. 北洋新政의 각종 개혁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러일전쟁을 계기로 군사개혁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省權力의 재정 부담이 크게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長蘆 鹽稅는 光緖 30-33년에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였으며, 이 기간에 실시된 두 차례 平價의 납부 조건은 역대 鹽斤加價 가운데 염상들에게 가장 불리한 내용이었다. 恤商에서 籌款으로의 旋回와 함께 주목되는 것은 염정 운영에서 국가권력의 개입 및 관료적 통제가 크게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염정에 대한 관료적 통제의 강화 현상은 緝私政策의 변화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과거 장로염구의 緝私는 商巡을 위주로 이루어졌지만, 鹽稅의 증가가 고스란히 鹽價의 증가로 연결됨으로써 그 어느 때보다도 緝私의 중요성이 커진 터인지라 直隸의 省權力은 緝私에 직접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省權力은 官辦의 武裝緝私組織을 만들었으며, 緝私局을 설치하여 각 引岸의 緝私에 개입하였다. 또한 장로염구의 골치거리였던 硝鹽에 대하여 강력한 嚴禁政策을 추진하는 한편, 硝鹽의 생산에 생계를 의존하던 사람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 善後對策을 입안■집행하였다. 光緖 33년(1907)에 시도된 津武口岸의 官辦 改革도 염정에 대한 관료적 통제의 강화라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新政期를 포함한 淸末의 長蘆 鹽稅는 淸朝 중앙권력과 直隸□河南의 두 省權力에 분배되었다. 전체적으로 장로 염세의 분배구조에서 중앙재정이 차지하는 비중은 咸豐 연간 68.7%, 신정 직전 44%, 신정 말기 21.6%로 급락한 반면, 성재정의 비중은 咸豐 연간 31.3%, 신정 직전 56%, 신정 말기 78.4%로 가파르게 상승하였다. 장로 염세의 분배구조에서 省財政의 비중 확대 현상이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신정 후기 ‘豫備立憲’을 통해 중앙집권의 실현을 추구하던 청조는 더 이상 이러한 현실을 방치해 둘 수 없었다. 청조는 宣統 원년(1909) 11월에 督辦鹽政處를, 宣統 3년(1911) 8월에 鹽政院을 설치하는 등, 염정에 대한 중앙집권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直隸의 염정 운영과 관련하여, 중앙권력은 永七과 口北의 염무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新政期 鹽稅□鹽利의 분배와 관련된 경쟁□갈등은, 中央과 省보다는 오히려 省區와 省區 사이에서 보다 뚜렷하게 나타났다. 熱河의 都統衙門과 永平鹽務總局 간의 갈등, 口北의 鹽利를 둘러싼 直隸 省權力과 차하르都統衙門 간의 경쟁 등도 그러한 사례를 보여 주지만, 장로염구의 豫岸에서 발생하는 鹽斤加價 수입을 두고 여러 차례 반복되었던 直■豫 두 省權力의 마찰은 이 시기 省을 단위로 한 지역주의의 강화 현상을 잘 보여 준다. 이 지역주의의 논리는 신정 후기 地方自治의 실시를 계기로 州縣 단위에서도 발현되었다. 自治財源의 확보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던 紳士層은 염정 운영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익을 地方公款으로 삼으려 하였다. 天津에서는 天津縣議事會가 二次平價의 餘利를, 武淸縣에서는 官■紳이 津武口岸의 餘利를 각각 自治財源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鹽利를 自治財源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던 紳士層이 내세운 논리는, 鹽利가 궁극적으로 本地 人民의 부담으로 형성된 것이므로 本地의 地方公款이 되며, 따라서 本地의 地方自治에 사용해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宣統 원년 개회한 順直諮議局도 自治財源 문제와 관련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直隸의 염정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특히 諮議局은 自治財源을 조성하려는 紳士層의 시도에서 발단한 補底紛爭에 개입하여, 결국 市錢으로 鹽價를 결제하라는 運司의 결정을 이끌어냈다. 諮議局은 또한 鐵路加價로부터 발생한 加價息款과 加價路股의 처리를 둘러싸고 長蘆 鹽商과 갈등하였다. 直隸의 鐵路加價는 津浦鐵路에 대한 利權回收運動을 주도했던 京紳, 즉 直隸의 상급 紳士層이 長蘆 鹽商들의 협력을 통해 철로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려는 취지에서 실시한 것이었다. 長蘆 鹽商들은 京紳들과 함께 加價息款의 운영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加價路股의 절반을 사유재산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諮議局은 加價息款을 直隸의 地方公款으로 규정, 그 운용에 대한 주도권을 요구하였다. 또한 鹽商의 몫으로 인정되었던 加價路股의 절반마저 전액 地方公款으로 귀속시켜 自治財源으로 지정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長蘆 鹽商의 몫은 50% 삭감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長蘆 鹽商과 諮議局 간의 이해 대립이 諮議局과 省權力 간의 마찰로 비화되었다. In this dissertation, I analysed the reforms on salt adminstration and their effects on the public finance in Zhili 直隸 province during the first decade of the 20th century. In this decade, the Zhili provincial government championed a variety of reform programs for modernization, which were called Beiyang Xinzheng 北洋新政, and achieved very impressive accomplishments. The modernization programs, as well as its share of responsibilities imposed by the Qing court for the foreign debt and indemnity services, gave rise to a great deal of new financial demands, and drove the provincial government to search for as many resources as possible at that time. Among them, salt profits was the most convenient source of revenue to mobilize. The reforms on salt administration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expanding the public finance of Zhili province and supporting Beiyang Xinzheng. The revenue income from salt dramatically increased and finally became the biggest source of revenue as a result of the reforms. The provincial government was able to put to its own use the increased salt revenue, not infrequently without the knowledge of the central government. It can be said that the salt administration reforms, initiated and managed by the provincial government, contributed to the formation of the de facto, if not de jure, provincial public finance system, which was virtually independent of the central control. Entering Xinzheng 新政 period, the Zhili provincial government devised and carried out very active reform policies in salt administration. When the Allied Forces returned Tianjin in the summer of 1902, Yuan Shikai 袁世凱, governor-general of Zhili, began to reform the Changlu 長蘆 salt administration, which had almost collapsed during the Boxer Uprising. While providing the merchants with the exemption of unpaid tax obligations, Yuan promulgated a law that prescribed the payment of salt tax before receiving yanyin 鹽引. This required the Changlu merchants to prepare enough money to pay tax and all the costs for the transportations and sales of the salt. On the other hand, the Zhili provincial government made an arrangement more favorable to the Changlu merchants when the latter had to carry out yanjin jiajia 鹽斤加價 for the payment of Boxer indemnity. And Yuan helped the merchants borrow money for operation from foreign banks in Tianjin. In 1903, Yuan Shikai introduced a reform program into northwestern part of Zhili povince, or Koubei 口北, which had been abandoned for more than 200 years with regard to salt administration. He established the system of Duxiaoju 督銷局, or the Office for the Supervision of Sales. By 1906, Zhili''s salt revenue from Kobei had amounted to 81,000 taels a year. For the seven counties of Yongping prefecture 永平府, which, in reality, had also been abandoned as far as salt administration was concerned, Yuan Shikai introduced a government-managed institution run by his protégé Zhang Zhenfang 張鎭芳. Zhang succeeded in this enterprise, at least, with respect to revenue increase. Zhang could supply the Zhili provincial government with more than 200,000 taels a year. As the financial demands caused by the modernization policies increased, nothing was more important to the Zhili provincial government than increasing revenue income in making policy decisions on the salt administration. The enforcements of pingjia 平價, in 1905 and 1907, brought to the provincial treasury additional revenue of more than a million taels a year and the payment arrangements of the two pingjia were made favorable to the government at the cost of the Changlu merchants'' interest. In order to secure the salt revenue, the Zhili provincial government enforced stronger measures to tighten the prohibitive control of siyan 私鹽, or illegal trade of salt. New armed agencies and the offices for the supervision of the illegal trade were set up. Especially, it took very tough measures against xiaoyan 硝鹽, or nitrate salt. It prohibited the production and trade of xiaoyan, while working out some programs to help the local xiaoyan producers find alternative ways of living. In contrast to the preference for merchant-operated system in the past, the provincial government of Zhili preferred strengthening official control over the salt administration, as it expected stronger official control would bring more money to the treasury. For example, in 1907, the provincial government attempted at replacing the merchant-managed sales system in Tianjin with a government-managed one. In the post-Taiping era, it is said, the central state power was, at least relatively, on the track of decline, financially as well as militarily. In salt administration, “provincialization” appears to have been in process. Especially, during the Xinzheng period, more and more of salt revenue came to be controlled by the Zhili provincial government through its fairly aggressive engagement in the salt administration. When it comes to the distribution of salt revenue, Xinzheng period witnessed the share of the provincial treasury increasing with that of the central treasury dwindling. In 1850s the central government in Beijing took as much as 68.7% of the Changlu salt revenue, but in the late 1900s it could take only 21.6%. These numbers explain why the central government, which pursued the centralization of public finance system in the late 1900s, attempted to recover central control over the salt administration in Zhili, especially through the operation of Duban Yanzhengchu 督辦鹽政處, or the Office of the Controller-general of the Salt Gabelle. As mentioned above, salt profit was the most convenient source of revenue to mobilize. Not only to the Zhili province was it convenient, but also so to the neighborhood provinces. Increased salt revenue during the Xinzheng period caused competition and conflict among the province-level authorities of Zhili, Chahar, Rehe, and Henan, each of whom sought to maximize its own portion. Especially the fact that part of Henan province also belonged to the Changlu salt division made unavoidable the conflicts between Zhili and Henan, where we can watch “provincialism” looming larger than ever. It was not only the state power, central or provincial, that perceived the salt profits as an easily accessible source of revenue. In the second half of the post-Boxer decade, the constitutional reform programs, including local self-government reform, were advocated. With the introduction of local self-government reform, local elite, especially those who participated in local self-government projects, also jumped into the arena of competition for the salt-related funds. Local elite began to claim salt profits from their own locality, where we can see the rise of “localism” at the county level. The need for financing the local self-government programs gave rise to new forms of salt-related conflict. In 1907, Tianjin county council tried to control the additional revenue from the pingjia in Tianjin county. The local elite in Wuqing 武淸 county also claimed the salt profit from their own county and insisted on spending it for the local welfare. As soon as it was established in 1909, the Provincial Assembly, or ziyiju 諮議局 of Zhili province began to intervene in the salt-related conflicts. In budi 補底 dispute between the local elite and the salt merchants in some counties, the Provincial Assembly strongly supported the former, who took for granted their access to the salt profits produced from the salt consumption of the local people in order to secure the funds for local self-government projects. On the other hand, the provincial elite of Zhili, who were trying to build Tianjin-Pukou railway with the Chinese capital, also paid attention to the salt money. They persuaded (or forced) the salt merchants to cooperate with them, and succeeded in securing the fund for the Tianjin-Pukou railway by means of the salt price increase. According to the original plan, the Changlu salt merchants were supposed to enjoy 50% of the profit from the price increase. But the merchants were denied their share by the Provincial Assembly. The merchants ended up losing half of their share. The demand of reducing the merchants' share came from the need for financing the local self-government programs, as in the cases mentioned above.

      • 秦漢 祭禮와 國家支配

        문정희 延世大學校 2005 국내박사

        RANK : 248348

        本稿는 秦漢 帝國初에 실행된 郊祀, 封禪祭, 明堂祭祀 등과 社 祭祀를 皇帝支配體制의 成立과 함께 國家가 制度化하고자 했던 國家儀禮(禮制)란 觀點에서 고찰해보았다. 本稿가 禮制에 注目하게 된 것은 古代 中國社會에서 禮가 法과 함께 國家支配에 必要不可缺한 要素로서 認識되어 歷代 王朝에서 律令과 官僚制에 기초한 法制的 統治手段을 物理的 기반으로 삼음과 동시에 禮制를 통해 統治의 正當性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役割을 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秦漢時期는 皇帝支配라는 새로운 政治秩序가 形成, 發展된 데 따라 이 政治秩序를 새로운 支配理念으로 정당화할 思想的 必要性 또한 대두된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天命’이란 傳統 觀念을 天人感應論과 陰陽五行論 틀 속에서 皇帝支配體制의 基本理念으로 再定義하고 그 表象으로서 祭禮 또한 神話와 傳統 속에서 끄집어내어 制度化되었다고 본다.그런데 이 天命은 皇帝에게 統治할 정당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萬民을 敎化해야 할 當爲性 또한 內包하고 있다. 天命의 이 두 가지 이념은 祭禮를 통해서도 象徵的으로 再現되는데, 統治의 正當性은 一次的으로 天과 皇帝의 관계와 位相 定立으로 確保되며 그 절차가 다름아닌 祭天儀禮이다. 그러나 天으로부터 부여받은 統治의 正當性[天命]은 統治機構인 官僚集團의 同意와 支持를 통해서 實現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官僚들의 助祭 하에 皇帝가 建國始祖를 明堂에서 宗祀함으로써 再確認된다. 이 과정을 통해 天命이 皇帝에 의해 具體的인 實現形態인 月令으로 頒布되고, 이 月令은 明堂 宗祀에 참여한 官僚들에 의해 政治의 場에서 行政의 準則으로서 遂行된다. 이로써 萬民敎化가 실현되어 一元的인 皇帝支配體制가 완성된다고 본다.이러한 관점에서 本稿는 天命의 두 가지 상징적 含意인 皇帝權의 正當性과 敎化 觀念이 祭禮를 통해 어떠한 형식과 논리로 구성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먼저 皇帝權의 정당성은 郊祀와 封禪, 明堂祭祀 등 祭天儀禮를 통해 그 상징화과정과 논리를 검토해보았고 敎化 觀念은 基層社會인 社가 月令的 統治構造 속에서 어떻게 再編되는지를 통해 접근해보았다. 이와 관련해서 月令에 내포된 本源的인 時間의 强制力이 가지고 있는 一元的 支配意志에 주목하여 月令과 궤를 같이하는 日書에 나타난 祭祀를 분석해보았다.그 결과 郊祀는 天과 一次的으로 관계를 갖는 祭天形式과 始祖를 天에 配祀하는 以祖配天의 郊祀形式이 서로 다른 觀念構造에 기초하여 皇帝權을 규정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前者는 統一帝國 成立 직후 皇帝의 儀禮로 再整備된 秦의 郊祀制를 繼承, 發展시킨 漢武帝의 郊祀이며 그것을 思想的으로 뒷받침했던 것은 天의 絶對性으로부터 皇帝權의 神聖性과 尊嚴性을 導出한 董仲舒의 郊祀論이었다. 한편 後者는 漢武帝 이후 豪族세력의 성장을 사회배경으로 한 儒家集團의 전통적 天子觀이 대두되며 皇帝權의 神秘化를 主導했던 祭禮들을 부정하고 새로운 논리로 재구성된 것으로 王莽의 郊祀論으로 歸結된다. 이것은 ‘嚴父配天’의 論理에 입각하여 皇帝 個人에게 그 權威가 집중되기보다는 皇帝의 血統을 강조, 一姓에게 權威가 부여되어 皇帝는 이 一家 내에 孝의 충실한 실천자로서, 郊祀는 天子의 孝를 행하는 祭祀로 그 의미가 변질되어갔다.明堂은 郊祀와 비교할 때 天命 神話를 또다른 방식으로 再現해야 할 祭禮場所였다. 특히 明堂이 가지고 있는 ‘布政之堂’으로서의 상징성은 嚴父配天의 論理와 결합하여 天命神話를 時空間的으로 가장 완벽하게 具顯하는 場所이자 儀禮로서 政治의 場에서 기능하였다. 이러한 明堂의 含意는 漢武帝 때부터 시작하여 王莽을 거쳐 後漢代에 이르는 과정에서 각 시대마다 강조점이 달라지는데, 먼저 漢武帝期 明堂制는 文帝 이후 진행되어온 改制論議의 延長線上에서 ‘漢家禮儀’의 樹立을 目標로 提起된 것으로, 五年一修封의 巡狩封禪制 틀 속에서 考案되어 泰山 근처인 汶上에 造營되었다. 그 行事는 “修封,祀明堂,因受計”로 要約되며, 明堂祭祀는 安置된 神位를 볼 때 上房에 太一을 頂点으로 해서 五帝를 配置하고 高祖를 配祀하고 下房에서는 后土를 제사함으로써 天地神과 祖上神을 함께 祭祀하는 總饗의 성격을 띤다. 王莽의 明堂制는 周公의 制禮作樂을 模倣하여 傳統文化 복원을 표방한 祭禮改革 속에서 재정비되었다. 이른바 ‘元始故事’로 일컬어지는 祭禮改革의 특징은 都城을 宇宙의 縮約형태로 설정한 점에 있다. 都城을 中心 軸으로 하여 南北에 天地 郊가 확립되고 이하 諸神들의 兆域이 四方에 조성되었다. 또한 그에 걸맞게 諸神들의 稱號가 부여되어 官僚組織의 君臣關係와 같이 神들의 位階가 體系化되었다. 明堂 역시 이 과정에서 泰山이 아닌 城南에 조성되었다. 王莽은 이 明堂에서 舜을 始祖로 하여 四代古宗과 함께 宗祀하였고, 諸侯에게 茅土를 下賜하고, 大射禮와 養老禮를 행하여 ‘朝諸侯’와 ‘布德政’을 試演하였으며 「四時月令詔條」를 頒布하여 ‘班時令’의 의식도 행하였다. 이로써 王莽의 明堂은 儒家의 이상적 統治觀念인 月令的 世界觀을 實現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이것은 天命을 ‘嚴父配天’의 論理로 具顯한 것으로, 결국 王莽의 明堂은 神話 속의 禪讓儀式으로 具現되어 漢으로부터의 政權簒奪을 正當化하는 데 이용되었다. 後漢의 明堂은 王莽의 元始故事를 기본구조와 논리를 수용하면서 雒陽 城南에 造成하였다. 後漢 雒陽 明堂祭祀는 明帝 永平 2년 光武帝를 宗祀하여 五帝를 처음으로 配祀함으로써 중요한 先例가 되었다. 여기에 配祀된 五帝는 感生帝로 이제 天命은 더 이상 形而上學的 道德律이 아닌 星의 ‘精氣’라는 生物學的 根據로 설명되고 있다. 이것은 前漢末 經學上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陰陽災異說과 讖緯說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明堂에서의 時令頒布와 五郊에서의 迎氣儀禮, 靈臺에서의 雲氣觀察, 辟雍에서의 養老禮 등 後漢에서 중시되었던 儀禮活動은 각각 독립적인 장소에서 機能함과 동시에 서로 有機的으로 연결되어 모두 月令的 世界觀 틀 속에서 진행되었다. 또한 이 月令的 統治觀念은 四時의 時令을 主管하는 羲和官을 中心으로 그 屬僚로 外史, 閭師 그리고 孝經師, 月令師 등의 ‘班敎化, 禁淫祀, 放鄭聲’의 吏治를 통해 실현되었다. 月令的 統治構造 속에서 ‘班敎化, 禁淫祀, 放鄭聲’의 敎化가 窮極的으로 행해져야할 곳은 基層社會인 社였다. 古代 聚落 共同體의 중심인 社는 春秋戰國 이래 中央集權的 權力이 强化되고 그 統治가 深化되면서 한편으로는 地方行政의 末端機關으로 再編됨과 동시에 自律的으로 행해지던 社 祭祀 역시 점차 國家의 禮制 속에서 統制되기 시작하였다. 즉 國家가 정해놓은 規定을 벗어난 祭祀를 ‘淫祀’로 처리하여 法令으로 統制하는 한편, 社 제사에 社嗇夫와 같은 地方 屬吏의 祭祀 干與와 鄕里를 대표하던 父老와 里正이 祭酒, 社老, 社掾, 社正, 社史 등 ‘庶民在官’의 形態로 官僚制的 統治構造 속에 編入됨으로써 그 祭祀 對象과 時間, 儀式節次面에서 그 祭禮 역시 調律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月令의 ‘命民社’는 社의 月令的 統治構造로의 編入을 明文化한 것이라 할 수 있다.月令的 統治는 무엇보다 天子가 時間의 主宰者로서 매년 頒布하는 달력[曆]을 통해 가장 效率的으로 貫徹된다. 달력의 기능을 가진 曆譜에 24節氣와 節日 같은 時間의 標識뿐만 아니라 時日의 吉凶을 判斷하는 建除, 反支, 血忌 등이 附記된 점, 그러한 時日禁忌를 綜合한 日書가 地方 屬吏의 墓에서 法律, 行政文書와 함께 出土된다는 점에 주목하여 日書를 또 다른 時間의 强制力이란 側面에서 살펴보았다. 그 결과, 日書 建除類 曆忌의 占辭 중 도망한 奴隸나 盜賊에 대한 체포(‘捕亡’), 土木工事(‘作事’ ‘起土’), 軍事行動(‘攻伐’ ‘出師’) 등과 이밖에 耕作과 收穫, 창고관리 등의 내용이 地方의 行政과 民政 전반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嗇夫의 업무와 일치하여 日書가 이들 吏治에 이용되었음이 확인된다. 또한 이 吏治에 日書의 占辭 중 多數를 차지한 公共 祭祀도 포함되는데, 그것은 內容面에서 日書에 보이는 大祭가 종종 大事와 서로 互換되기도 하며 이 大事는 또한 作事, 起事, 聚衆과 連繫된다는 점, 그리고 飮食, 歌樂, 祭祀가 大事의 一環으로 竝稱된다는 점 그리고 觀念構造面에서 時日禁忌의 按配가 五行說에 基礎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地方屬吏에게 日書가 또다른 시간의 강제력으로 吏治에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月令의 ‘命民社’를 구체적으로 실천한 것이라 하겠다.이상에서 살펴본 秦漢 祭禮는 郊祀의 경우 皇帝의 威儀로서, 明堂祭祀의 경우 天子의 統治權 발효를 의미하는 祭禮로서 새롭게 형성된 皇帝支配의 象徵으로 制度化되었으며, 동시에 그 統治論理 역시 天人感應說과 災異論에 기초하여 月令形式으로 綱領化되었다. 또한 基層社會인 社도 이 月令的 統治構造에 編入시켜 敎化의 場으로 변모됨으로써 皇帝支配體制를 維持, 强化해나갔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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