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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새로운‘영웅형 공주서사’로서 백제 계산공주 설화

        정재남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석사

        RANK : 233258

        As one of the old tales related to princesses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the tale related to Princess Gyesan(桂山) of Baekje(百濟) dynasty, which were not only recorded in various documents like The Heritage of the Three States(『三國遺事』), The Miscellaneous records on the Eastern Capital 'Tongkyeong'(『東京雜記』) and On Shamanism of Korea (『朝鮮の巫覡』), buy has been passed down orally utill recently. The story of Princess Gyesan has been little known compared to other ancient Korean princess stories of the same period. Born as the daughter of King Uija(義慈王) of Baekje at the end era of the kingdom, she was competent enough to master swordsmanship in her earliest years, and had mysterious abilities, such as the invention of the "self-propelled bravely fighting weapon(自勇兵器)" after getting training under the tutoring of woman Taoist master in the South Sea region. When the Allied Army of Shilla(新羅) and Tang(唐) dynasties invaded Baekje, she turned into a magpie and was discovered by General Kim Yu-shin's mysterious sword while searching for the Silla army camp. She then returned to Baekje and reportedly went into hiding in the Buso Mountain(扶蘇山) after failing to persuade King Uija to reconcile with Silla. The story, which has a narrative structure and key elements of the ancient hero's story, is also specific to the major common characteristics and labeling of the Korean general tales. And compared to other princess-related literature narratives of the Three Kingdoms Period, such as Princess Nakrang(樂浪), Princess Pyeonggang(平岡), and Princess Seonhwa(善花), there are common features including the narrative background of the conflict between father and daughter, who had the historical princess records in a biographical narrative structure with mysterious and strange narrative elements. In the tale of Princess Gyesan, there are no narrative elements such as marriage, male spouse, women's suffering, and a favorable change in fortune. On the other hand, the heroine who did not rely on men have a female hero-seeking character who decides and pioneered her life independently and aggressively. This tale, which seems to reflect the mythical goddess statue of Korean shaman mythology, could be evaluated positively from a feminist point of view, as it presented the image of a female warrior or heroine who breaks down stereotypes about gender and social taboos and opens new horizons. Therefore, depending on the results of the follow-up study of the tale, it may be classified as a new type of "Princess narrative" in the history of Korean epic literature. In addition, the female hero narrative of the tale can be a valuable basis and asset for the historical and stylized Korean fantasy. Key words : princess of the Baekjae Kingdom, princess tale, general's tales, Princess Gyesan(桂山), General Kim Yu-shin, The Heritage of the Three States(『三國遺事』), The Miscellaneous records on the Eastern Capital 'Tongkyeong'(『東京雜記』), On Shamanism of Korea (『朝鮮の巫覡』) 고대 공주 서사의 하나로서 고려시대 『삼국유사』, 조선시대 『동경잡기』 및 일제강점기 『조선의 무격(朝鮮の巫覡)』 등 여러 문헌 기록 및 구비전승으로 전해진 백제공주 관련 설화는 삼국시대의 여타 공주 설화에 비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백제 말기 의자왕의 딸로 태어난 미녀공주 계산(桂山)은 어려서 검법을 통달하고 남해 여도사로부터 신술(神術)을 전수받으며 ‘자용병기(自勇兵器)’를 발명하는 등 신이한 능력을 갖추었는데,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침공하자 까치로 변신하여 신라군 진영을 정탐하던 중 김유신 장군의 신검에 의해 발각되고, 이어 백제로 귀환하여 부왕 의자왕에게 신라와의 화해를 설득하지만 실패하자 부소산(扶蘇山)으로 잠적하였다고 전해진다. 동 설화를 같은 삼국시대의 공주 설화인 낙랑공주, 평강공주 및 선화공주 서사와 비교하면, 모두 ‘역사성을 가진 공주’ 이야기를 소재로 하고, ‘아버지와의 갈등’이 핵심화소이면서, 신이한 요소까지 구비한 ‘일대기’적 서사구조라는 공통점이 있다. 반면 계산공주 설화는 혼인 및 남성 배우자 화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고, 여성 수난이나 발복(發福) 등의 요소가 없는 차별점이 있으며, 여주인공은 남성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결정하고 자아성취를 이루어 나간다. 삼국통일 주역인 ‘김유신 영웅만들기’와 관련이 깊어 보이는 동 설화의 일부 변이형은 고대 영웅이야기의 서사구조와 핵심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으며, 한국 장군설화의 주요 공통특징 및 표징과도 구체적으로 부합된다. 한국 장군설화 유형에서 계산공주 설화를 분류하자면, 인간계 혈통의 주인공이 과업에 실패한 후 사후 입신(入神)되지 못한 유형인 ‘인손(人孫) 실패후 미입신형’으로 볼 수 있다. 한편 동 설화의 서사 주체는 남다른 조건을 갖추며 자라나, 일정한 ‘통과의례’과정을 거쳐 특별한 능력을 획득하고, 이어 자신이 속한 공통체가 직면한 엄청난 과제에 적극 도전하여 큰 위기에 처하며, 극적 반전을 통해 비장하게 마무리된다. 따라서 동 설화는 조동일(1973), 조셉 캠벨(1999) 및 반 겐넵(2000) 등이 제시한‘영웅의 일생’이나 영웅이 치루는 신화적 모험의 표준궤도인 ‘통과의례’ 양식에 부합되는 서사구조와 핵심화소를 다수 갖추고 있어, 한국 서사문학사에서 그간 찾아보기 어려웠던‘영웅형 공주서사’로 새로운 유형화를 시도할 수 있다고 본다. 한국 무속신화의 신화적 여신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동 설화는 성(gender)에 관한 고정관념이나 사회적 터부 등을 깨고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는 여전사 내지 여성영웅적 형상을 제시하였기에,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긍적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King Lear)>이나 동화 <백설공주(Snow White)>처럼 공주관련 역사적 서사물이 풍부한 서양에 비해 다양한 공주 서사가 부족한 한국 서사문학사에서,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영웅 탐색담적 성격을 갖춘 계산공주 설화는 후속 연구 결과에 따라 새로운 ‘영웅형 공주서사’유형으로 착근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어 : 백제왕녀, 공주설화, 장군설화, 계산공주, 김유신 장군, 삼국유사, 동경잡기『東京雜記』, 조선의 무격(朝鮮の巫覡)

      •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인식에 관한 연구 : 일제강점기 민속조사 보고서를 중심으로

        김희영 전남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00527

        日帝强占期、 朝鮮總督府の舊慣調査の一環として&#23455;施された民俗調査は&#24403;時の日常的な生活はどうだったのか、朝鮮の民衆が守っていった慣習の中にはどんなものがあったのか、あの時代の文化の一端が&#35223;き見られる。 この時期村山智順(1891~(1891~1968)は1919年から1941年、日本へ&#24112;&#22269;するまで總督府の囑託として朝鮮の民間信仰と鄕土神祀を調査ㆍ整理して一連の報告書を出したのである。それらは今日も韓&#22269;の民俗硏究において參考すべき貴重な資料だと評されている。 この論文は村山の朝鮮滯留期の間の朝鮮認識と彼の&#23398;術活動を&#38306;連づけて考察する硏究の必要性に依るものである。村山は信仰現像の糾明によってある人の性向と生活理想等が分かると言った。その通に彼の思想と認識を察するには彼の民間信仰に&#38306;する調査報告書が最適な&#23550;象になれるだろうと思われるので彼の「朝鮮の民間信仰」4部作、すなわち『朝鮮の鬼神』(1929)、『朝鮮の風水』(1931)、『朝鮮の巫覡』(1932)、『朝鮮の占卜と豫言)』(1933)を&#26908;討して彼が朝鮮についてどんな認識を持っていたのか、またそれが調査報告書にどんな形態で反映されているのかを考察した。 この論文は全&#20307;が次のように4章に構成されている。 1章では先行硏究を調べると共にこの硏究の目的を取り立てた。 2章では村山の生涯と時代的背景を槪觀した。それから朝鮮總督府の舊慣調査と村山の調査報告書との&#38306;連性を察した。 3章ではまず「朝鮮의 民間信仰」4部作の內容を分析した。その後村山の朝鮮についての認識の流れに於て時期別に&#21306;分して考察しようとした。 最後に4章では今まで論議してきた內容を要約整理して、これからの硏の方向に&#38306;して記述した。 調査報告書の內容を分析した結果, 朝鮮と朝鮮民俗についての彼の認識を次のような三項に要約が出&#26469;たのである。 一、朝鮮の思想の根底には鬼神信仰があり、朝鮮の文化はこの鬼神信仰の影響の下にある。 二、朝鮮人の民間信仰は原始的で、その弊害が大きい。 三、朝鮮人は消極的な運命論者である。 村山は朝鮮において宗敎思想の本流を成しているのは鬼神信仰で、その中軸は巫覡信仰だと把握していたのでる。同じ流れの中から韓&#22269;の社&#20250;構造と幸福&#35251;が反映されているのは風水だと思っていた。また鬼神に依るからの災禍から離れ、その神意が分かりたくて朝鮮民衆はひたすら巫覡に寄りかかるのだと言った。これは朝鮮の民衆が自分の運命を自ら開拓しようとしないでただ攘鬼で鬼神の災殃を&#25173;おうとする消極的な生き方をしているからだと言っている。 このように彼が‘鬼神信仰ㆍ墓地風水ㆍ巫覡の攘鬼と占卜’という核心語で要約出&#26469;た村山の朝鮮民間信仰についての認識を&#35500;明するため、それら&#27010;念を一つの&#20307;系&#22259;の中にそれぞれ位置づけてみた。 そして「朝鮮の民間信仰」4部作と『部落祭』(1937)の內容をいっしょうに&#26908;討し、調べて村山の朝鮮についての認識の流れを時期別に&#21306;分した。彼は『部落祭』が完成する時点の前に認識の&#36578;換があったように見える。これは『部落祭』での敍述樣相の&#22793;化をその根&#25312;にしたものである。これに&#24467;い、調査報告書の中に現れる村山の朝鮮認識についてその時期を次のように&#21306;分することが出&#26469;るのである。 前半期: 民間信仰執中硏究段階(1919-1936) : 朝鮮は原始的な鬼神信仰による巫覡の弊害が大きく、民衆は科學的な思考が出&#26469;なく鬼神の力に順&#24540;する運命論者だと考えたる時期である。 後半期: 傳統文化 認定 段階(1937-1941) : 思考の&#36578;換が成し遂げられ、朝鮮の民衆が共同&#20307;精神で&#25968;多くの美しい&#20253;統文化を保持していると認識した時期である。 加えて朝鮮に&#38306;する村山の認識の性格及び限界にもついていっしょうに調べてみた。彼は朝鮮民間信仰の原始性ㆍ劣等性ㆍ低級性による弊害が大きいことを强調した。&#24403;時の朝鮮人が幅&#24195;い意味としての祖上神たる鬼神に祭祀を奉ることを多樣に&#30330;達してきたひとつの信仰形態に認定しないで原始的で迷信だという&#35251;点を持っていた村山の認識は間違っていたと言える。 また彼は鬼神に順從する恭順法等を例えながら朝鮮民が運命に順&#24540;し、大勢に&#24467;う氣質があると言った。これは&#24403;時、多くの知識人が持っていた認識と同じで、それは植民支配に正&#24403;性を附與する役割も果たしただろう。このような認識が『部落祭』を起点として&#22793;ったとはいうものの、囑託としての彼の身分により、その後の調査報告書の敍述も一定の方向に限定されるしかなかった。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구관조사(舊慣調査)의 일환으로 실시된 민속 조사는 당시 일상적인 생활이 어떠했는지, 조선의 민중들이 지켜가던 관습으로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그 시대 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시기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은 1919년부터 1941년 일본으로 귀국할 때까지 총독부의 촉탁으로서 조선의 민간신앙과 향토신사(鄕土神祀)를 조사ㆍ정리하여 일련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것들은 오늘날에도 한국의 민속연구에 있어서 참고할만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논문은 무라야마의 조선체류기간 동안의 조선인식과 그의 학술활동을 관련지어 고찰하는 연구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무라야마는 신앙 현상의 규명에 의해 한 사람의 성향과 생활 이상 등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 말처럼 그의 사상과 인식을 살펴보는 데에는 그의 민간신앙 관련 조사보고서가 최적의 대상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의 「조선의 민간신앙」4부작, 즉 『조선의 귀신(朝鮮の鬼神)』(1929),『조선의 풍수(朝鮮の風水)』(1931),『조선의 무격(朝鮮の巫覡)』(1932),『조선의 점복과 예언(朝鮮の占卜と豫言)』(1933)을 검토하여 그가 조선에 대하여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한 그것이 조사보고서에 어떤 형태로 반영되어 있는가를 고찰하였다. 이 논문은 전체를 다음과 같이 4장으로 구성하였다. 1장에서는 선행연구들을 살펴봄과 함께 본 연구의 목적을 밝혔다. 2장에서는 무라야마의 생애와 시대적 배경을 개관하였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구관조사와 무라야마의 조사보고서와의 관련성을 살폈다. 3장에서는 먼저「조선의 민간신앙」4부작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그 다음으로 무라야마의 조선에 대한 인식의 흐름에 대해 시기별로 구분하여 고찰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4장에서는 이제까지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조사보고서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조선과 조선 민속에 대한 그의 인식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첫째, 조선의 사상의 근저에는 귀신 신앙이 있고, 조선의 문화는 이 귀신신앙의 영향 하에 있다. 둘째, 조선인의 민간신앙은 원시적이고 그 폐해가 크다. 셋째, 조선인은 소극적 운명론자이다. 무라야마는 조선에서 종교사상의 본류(本流)를 이루고 있는 것은 귀신신앙이며 그 중추는 무격신앙이라고 파악하였다. 같은 맥락 안에서 한국의 사회구조와 행복관이 반영된 것이 풍수라고 보았다. 또한 귀신으로부터의 재화(災禍)에서 벗어나고 그 신의(神意)를 알고자 조선민중은 오로지 무격에 의존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민중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려 하지 않고 다만 양귀(攘鬼)로 귀신의 재앙을 없애려는 소극적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귀신신앙ㆍ묘지 풍수ㆍ무격의 양귀(攘鬼)와 점복’이라는 핵심어로 요약되는 무라야마의 조선 민간신앙 인식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 개념들을 하나의 체계도 안에서 각각 자리매김해보았다. 그리고 조선의 민간신앙 4부작과『부락제(部落祭)』(1937)의 내용을 함께 살펴 무라야마의 조선에 대한 인식의 흐름에 대해 시기별로 구분하였다. 그는『부락제』가 완성되는 시점 이전에 인식의 전환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부락제』에서의 서술 양상 변화를 그 근거로 하였으며, 이에 따라 조사보고서 속에서 나타나는 무라야마의 조선 인식에 대하여 그 시기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전반기: 민간신앙 집중연구 단계(1919-1936) : 조선은 원시적인 귀신 신앙으로 인한 무격의 폐해가 크고, 민중은 과학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여 귀신의 힘에 순응하는 운명론자들이라고 생각한 시기이다. 후반기: 전통문화 인정 단계(1937-1941) :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져 조선의 민중이 공동체 정신으로 다수의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유지하고 있다고 인식한 시기이다. 덧붙여 조선에 대한 무라야마의 인식의 성격 및 한계에 관해서도 함께 살펴보았다. 그는 조선 민간신앙의 원시성ㆍ열등성ㆍ저급성으로 인한 폐해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조선인들이 넓은 의미로서의 조상신인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을 다양하게 발달해 온 하나의 신앙 형태로 인정하지 않고 원시적이며 미신이라는 관점을 가진 무라야마의 인식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그는 귀신에 순종하는 공순법 등을 예로 들어 조선민중이 운명에 순응하며 대세를 따르는 기질이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가지고 있던 인식으로, 식민지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부락제』를 기점으로 바뀌었다고는 하나 촉탁이라는 그의 신분으로 말미암아 그 후의 조사보고서 내에서의 서술도 일정한 방향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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