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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에 대한 고등학교『한국사』교과서 내용분석과 교육방안

        조승희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2013 국내석사

        RANK : 234367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은 삶의 터전을 찾아 식민지 종주국인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들은 일본 내의 하층 노동자와 식민지인이라는 이중적 지위를 가진 재일조선인이 되어 민족 운동을 전개했으며, 오늘날에도 법적 ․ 사회적 탄압에 맞서고 있다. 본고에서는 일제강점기 재일조선인의 형성과 이들에 의해 전개된 민족운동을 정리했다. 재일조선인의 형성 배경은 일제의 식민 정책과 도일 정책, 재일조선인의 생활 상태를 정리했다.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은 학우회와 일월회,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 신간회와 근우회 지회, 재일본조선청년동맹의 활동한 단체를 중심으로 정리했다. 정리한 내용을 바탕으로 고등학교 『한국사』교과서의 내용 분석을 했다. 분석 후, 개선 방안과 보완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먼저 개선 방안으로는 첫째, 재일조선인 민족 운동에 대한 내용이 균형 있게 서술되어야 한다. 둘째, 재일조선인의 민족운동은 현재 진행형의 문제임을 인식하여 교과서에 반영하여 서술되어야 한다. 보완 방안은 첫째, 재일조선인의 형성배경에서는 도일 정책이 반영되어야 한다. 둘째, 재일조선인의 생활 상태에 대해서는 당시 문학 작품 등을 자료로 제시해야 한다. 셋째,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을 전개한 단체와 인물, 활동이 간략하게나마 서술되어야 한다. 넷째, 관동대지진에서는 능동적인 역사가 전개되었음을 인식할 수 있도록 서술되어야 한다. 앞에서 정리한 재일조선인 민족운동에 대한 교과서 내용 분석과 개선 및 보완 방안을 바탕으로 교육 방향과 교육 방안을 제시해 보았다. 교육 방향은 이념적 편향된 시각을 지양하고, 다양한 역사 자료를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교육 방안은 역사 글쓰기 ․ 발표하기를 제시했다. 역사 글쓰기는 소설과 신문기사, 동영상, 관련 논문의 읽기 자료를 활용하여 글쓰기 활동지에 글쓰기를 하도록 구성했다. 발표하기는 학생 각자가 쓴 글쓰기의 결과를 말함으로써 역사 만들기 작업에 참여하도록 구성했다. Under the Japanese rule, many koreans moved to Japan, the colonial suzerain state to find a new ground for living. They were koreans living in Japan with a dual status of lower-class workers and the colonized, who later engag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Even today, they face the local-social suppressions in Japan. This study presents an investigation into the formation process of koreans living in Japan and their national movements. The backgrounds of the formation of koreans living in Japan have based upon the contents of Japan's policies on colonization and their move to Japan and their residency in Japan. Their national movements in Japan are reviewed in relation to such organizations as students' associations and Ilwalhoi(一月會), Chosun labor whole union in Japan, the Japanese office of Chosun Communist Party and Koryo communist youth association, the Japanese branch of Singanhoi and Kunuhoi, and Chosun youth union in Japan. Based on the content that have been sorted out, this study analyzes the content of high school Korean History textbooks and proposes the following improvement and supplementation plans: as for improvement plans, first, there should be a balanced narration in the contents of national movements carried out by Koreans living in Japan; and second, there should be an awareness that the national movement of Koreans living in Japan is still going on, which should be reflected in the narration of textbooks. As for supplementation plans, first, the policies on the move of the Koreans to Japan should be reflected in the formation background of Koreans living in Japan. Second, literary works of the times should be provided as materials on their residency. Third, the organizations, figures, and activities of their national movements should be described even briefly. Finally, the Great Kanto Earthquake should be narrated in a way that can be an awareness that developed active history. Based on the result of the content analysis of textbooks and the improvement and supplementation plans with regard to the national movements of Koreans living in Japan, this study suggests the educational directions and plans. Educational directions are devised to move away from ideologically biased perspectives and promote the use of various historical materials. Educational plans include historical writing and presentation. For a historical writing, writing activity using novels, newspaper articles, videos, material-reading activity are required. Presentations are organized to encourage the students to participate in history - making activity based upon the results of their writing.

      • 다카라즈카[宝塚] 재일조선인 공동체의 변화와 지역사회 재정착운동

        정계향 울산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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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 한일병합조약 체결 이후, 자의로 또는 타의로 일본으로 이주했던 조선인 중에는 해방이 된 이후에도 고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일본에 남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과 그 후손들은 오늘날 재일조선인으로 불리고 있다. 식민지 시기의 이주로부터 시작하면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이제 100여 년이 지났다. 재일조선인은 거주국인 일본에서는 소수민족으로, 고국인 한국에서는 한민족공동체의 일원으로 여겨졌지만, 한일양국의 공식 역사서술에서는 배제되면서 오랫동안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많은 연구자들은 재일조선인을 ‘차별 받으면서 동시에 저항하는 소수자’라는 관점에서 파악했다. 이에 따라 재일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면서 차별과 저항의 스토리를 만들어낼 가능성이 컸던 도쿄, 오사카, 교토 등의 대도시 중심의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구성된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보통의 재일조선인에게 공통의 기억이나 경험이 될 수는 없었다. 재일조선인이 거주하고 있던 ‘지역’이 그들의 생활에 매우 많은 변수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 재일조선인의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답을 찾는 과정에서 ‘지역’에 주목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연구는 다카라즈카 재일조선인 공동체의 변화와 지역사회 재정착운동에 대한 것이다. 식민지 시기 다카라즈카로 이주한 조선인은 자신들을 둘러싼 내외부의 조건이 변화함에 따라, 지역사회에서 자기의 위치와 역할에 다른 인식을 하게 되었다. 재일조선인은 지역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현안에 대응하면서 스스로가 역사 기록의 주체가 되어 유무형의 역사를 남겼다. 본 연구에서는 다카라즈카 재일조선인의 생활세계와 네트워크, 기억과 실천, 다원적 경험에 주목했다. 1920년 무코가와 개수공사를 계기로 다카라즈카로 이주한 조선인은 해방 이후 다카라즈카 재일조선인의 기원이 되었다. 이들은 제국과 식민지의 경계위에 있었지만, 일본에서의 정주화 진전에 따라 영주의 의사를 가지기도 했다. 다카라즈카 조선인은 욘코바를 비롯해, 코하마, 나마제 등 공사장 인근에 밀집해서 거주했다. 거주지에서 퇴거될 때에도 집단퇴거였기 때문에 집단거주지는 계속 유지되었다. 식민지 시기 이주는 체인이주의 형태를 하고 있어서 조선인 사이에 이미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욘코바 조선인의 경우 동향출신자들이 많아서 그 네트워크는 매우 촘촘했다. 그러나 다카라즈카 조선인은 사회운동의 역량이 약했기 때문에 내선융화단체처럼 일제의 행정적 지도를 받은 후에야 단체를 구성할 수 있었고, 노동조합이나 동업자 조직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이런 양상은 해방 후 다카라즈카 재일조선인 사회 형성에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해방 이후 재일조선인은 일본사회의 외국인이 되면서 지역사회의 현안으로부터 유리되었고, 고국과 일시적으로 왕래가 끊어지면서 섬처럼 고립되었다. 다카라즈카의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시기에 형성된 재일조선인 마을에 그대로 거주했다. 이들은 조련지부(총련지부)와 민단지부를 결성하고, 각 조직의 민족학교로 조선학교와 한국소학교를 설립해서 운영했다. 두 조직은 교류를 단절한 채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했다. 민단지부는 공산화교육을 막는 것을 민족교육이라고 생각했고, 총련지부는 일본의 차별에 맞서 조선학교를 지킴으로서 민족교육을 수호할 수 있다고 여겼다. 각 조직과 학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기억과 역사는 서로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1970~80년대 다카라즈카에서는 신경환 사건, 니시다가와 홍수피해 보상문제, 고령자연금 특별급부금 지급 문제 등 재일조선인과 관련된 현안이 발생했다. 여기에 대응하면서 개인적으로 사회운동 역량을 축적하는 사람도 있었고, 조직 차원에서 다카라즈카의 일본인 사회단체들과 공동으로 현안에 대응하며 새로운 네트워크를 만들기도 했다. 다카라즈카의 여러 시민단체들은 재일조선인과 다카라즈카 행정당국을 매개해주는 동시에 재일조선인 조직 사이의 연결 고리의 역할을 했다. 민단지부와 총련지부 사이에도 처음으로 조직 차원의 교류관계가 만들어졌다. 이 때의 교류를 계기로 다카라즈카 민족마츠리가 개최되었고, 이후 재일조선인이 직접 기획한 민족축제로 원코리아 다카라즈카가 진행되기도 했다. 이런 축제를 통해 다카라즈카 지역사회에 재일조선인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었으나, 이 과정에서 재일조선인 내부의 차이가 제거되고 매우 정형화된 재일조선인 이미지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다카라즈카 시가 만든 다문화공생 정책은 대부분 뉴커머 외국인이 중심이었고, 올드커머인 재일조선인은 자신들의 역사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다카라즈카와 오사카의 재일조선인, 일본인이 중심이 되어 외국인시민문화교류협회를 결성하고, 다카라즈카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문화를 지역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전개했다. 또 식민지시기 다카라즈카 지역개발 공사에서 희생된 조선인을 위한 추도비 건립운동을 추진했다. 추도비는 다카라즈카 재일조선인의 존재에 대한 변호인 동시에 그들의 역사와 정체성을 재정립하려는 시도이다. 다카라즈카 재일조선인은 일본 주민들과 함께 지역개발을 주도해 온 사람들로, 지역주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누리면서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개발과정에 참여하지 못한 뉴커머가 배제되는 것은, 지역에서 새롭게 형성된 공동체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카라즈카의 재일조선인과 일본인은 지역사회의 역사문화를 공유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있었고, 이것은 모두 재정착운동의 결과물이다. 다카라즈카 재일조선인은 공식역사에서 소외되어 왔지만 지역사회에서의 다양한 주체들과 관계를 맺고 현안에 대응하면서 자기 역사를 만들어왔다. 지역사회의 사안에 따라, 각 주체의 경험과 입장에 따라 대립하고 협력하고, 갈등하고 교류하는 등 관계의 양상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재일조선인 간의 관계도 그러했고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지역에서의 이런 다층적이고 다원적인 관계를 고려할 때 재일조선인을 차별받고 저항하는 소수자로만 정의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사안에 따라 일본인, 조선인과 적극적으로 대립, 협력의 관계를 만들면서 자기 역사를 구축해 온 존재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일본사회의 소수자로서, 피차별민족으로서 역사 속에 자신들을 위치시키던 재일조선인은 이제 ‘다카라즈카 재일조선인’으로서 자기 역사를 새롭게 기록하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정주지에서 보다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활동은 재정착운동으로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귀화를 하거나 폐쇄적인 민족공동체를 유지하는 대신, 실천적 행위를 통해 지역사회에 자신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최근에는 지역사회의 단위를 넘어서서 한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국가 사이에서 외교·문화적 가교 역할을 담당하려는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재일조선인은, 혼종적 존재로서의 자기를 받아들이고, 지역사회 안에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고 다카라즈카 재일조선인의 역사를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 1970년대 재일조선인 문학 연구

        이영호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박사

        RANK : 4958

        本稿では、1970年代在日朝鮮人文学の展開を朝鮮文学、在日朝鮮人文学、在日朝鮮人社会の3本の軸に分けて研究した。1960年代半ば、在日朝鮮人文学は朝鮮総連から離れて転換期を迎えた。在日朝鮮人文学者たちは日本文学界の各領域で活動し、新たな構図を作った。 始まりは朝鮮文学からだった。戦後~1960年代半ばまで日本における朝鮮文学研究は日本人と在日朝鮮人が各自研究をする形だった。しかし、1963年に「朝鮮文学の会」が登場し、在日朝鮮人文学者と日本人文学者が共に朝鮮文学を研究する形が見え始めた。その後、日本における朝鮮文学研究は、韓国での研究とは相違点が見られ、日本における研究のみの特徴が表れ始めた。その背景には、「朝鮮文学の会」と在日朝鮮人の存在があった。 在日朝鮮人文学は、1970年代に日本文壇で全盛期を迎えた。当時、日本では人権運動が相次ぎ、マイノリティ問題が社会の争点となっていた。こんな中、日本文壇は文学賞を利用してマイノリティ文学を包み込もうとした。その一環として、1971年に李恢成に第66回芥川賞を授賞した。李恢成は日本文壇のこのような流れを事前に察知し、受賞の可能性を高くする要素を取り入れた作品「砧をうつ女」を書き上げた。その結果、李恢成は芥川賞を受賞し、韓国入国という個人の目的を達成した他、1970年代の朝鮮文学の全盛期を率いた。 在日朝鮮人文学は、根強い社会の差別、人権問題など様々なマイノリティ問題を全面に出す特徴があった。一方、同時代の在日朝鮮人作家金鶴泳の作品は、一般的な在日朝鮮人文学とは相違点があった。金鶴泳は吃り、民族主義、父を題材にした作品で個人の内面の問題を取り上げた。内向性から始まった問題意識が、社会問題にまで範囲を広げていく傾向は、同時代の在日朝鮮人文学とは異なるものだった。このような特徴は、金鶴泳の4作目の芥川賞候補作だった「鑿」ではっきり表れている。「鑿」で金鶴泳は個人の吃りの根本的な原因は社会差別にあり、この問題は代々続くという問題を取り上げ、個人の内面と社会の問題に同時に触れた。それまで1970年代の日本文壇は「内向の時代」と定義されていた。しかし、金鶴泳で代表される在日朝鮮人文学は既存の定義に反論を提示し、日本文壇と在日朝鮮人文学の新たな関係性を構築した。1970年代の在日朝鮮人文学は、日本文壇という新しい土壌で全盛期を迎えると同時に、在日朝鮮人文学を通じて日本文壇が新しく定義される結果を生んだ。 在日朝鮮人社会も1970年代に転換期を迎えた。その具体的な模様は在日朝鮮人雑誌『まだん』で確認することができる。1973年創刊の『まだん』は、紙面でイデオロギー問題を排除し、民族の伝統と結婚、帰化、教育のような在日朝鮮人社会の問題を取り上げた。同時に、人権運動、慰安婦問題など日本を批判できる様々な談論を通じて在日朝鮮人社会の団結を図った。このような『まだん』の特徴は、政治的傾向が強かった従来の在日朝鮮人雑誌と最も異なる点であり、1970年代における在日朝鮮人雑誌メディアの新たな変化を確認できる証でもある。 上述したように1970年代は在日朝鮮人文学・社会の転換期であった。在日朝鮮人たちは日本という新たな土壌で文学を通じて新しい生き方を模索した。本研究では、朝鮮文学、在日朝鮮人文学、在日朝鮮人社会を共時的に分析し、1970年代における在日朝鮮人文学の具体的な模様、克服と展開を総合的に究明することができた。 본 논문에서는 1970년대 재일조선인 문학의 전개를 조선문학, 재일조선인 문학, 재일조선인 사회 세 축으로 나누어 연구했다. 1960년대 중반 재일조선인 문학은 조총련에서 벗어나며 전환기를 맞이했으며 재일조선인 문학자들은 일본문학계의 각종 영역에 활동하며 새로운 구도를 만들었다. 그 시작은 조선문학이었다. 전후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일본의 조선문학 연구는 일본인과 재일조선인이 각각 연구하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1963년 <조선문학의 회(朝鮮文学の会)>가 등장하며 재일조선인 문학자와 일본인 문학자가 함께 조선문학을 연구는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에서의 조선문학 연구는 한국과 차별화를 보이며 일본만의 특징을 나타냈으며 그 이면에는 <조선문학의 회>와 재일조선인의 역할이 있었다. 재일조선인 문학은 일본문단에서 197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연이은 인권운동의 발생으로 마이너리티 문제가 사회적 화두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문단은 문학상을 이용해 마이너리티 문학을 포섭하려했으며 그 일환으로 1971년 이회성(李恢成)에게 제66회 <아쿠타가와상(芥川賞)>을 수여한다. 그러나 이회성은 일본문단의 이러한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여 수상가능한 요소를 반영해 「다듬이질하는 여인(砧をうつ女)」을 창작했다. 그 결과 이회성은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한국입국이라는 개인목적을 달성하고 1970년대 재일조선인 문학의 전성기를 이끈다. 재일조선인 문학은 강한 사회차별, 인권문제 등 각종 마이너리티 문제를 전면화하는 특징을 보였다. 그러나 동시대 재일조선인 작가 김학영(金鶴泳)은 이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김학영은 말더듬이, 민족주의, 아버지를 소재로 개인의 내면문제를 전면화했다. 내향성에서 출발한 문제의식은 사회문제로 확대되며 동시대 재일조선인 문학과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이러한 특징은 김학영의 네 번째 <아쿠타가와상> 후보작 「끌(鑿)」에서 잘 드러난다. 「끌」에서는 개인의 말더듬이의 근본원인이 사회차별에 있으며 이러한 문제는 대를 건너 계속된다는 문제를 다루며 개인내면과 사회문제를 동시에 다루었다. 지금까지 1970년대 일본문단은 ‘내향의 시대’로 정의되었다. 그러나 김학영으로 대표되는 재일조선인 문학을 통해 기존의 정의를 반박하는 동시에 일본문단과 재일조선인 문학의 새로운 관계성을 정립할 수 있었다. 1970년대 재일조선인 문학은 일본문단이라는 새로운 토양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는 동시에 재일조선인 문학을 통해 일본문단을 새롭게 정의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재일조선인 사회 역시 1970년대 전환기를 맞이했으며 구체적 양상은 재일조선인 잡지 󰡔마당(まだん)󰡕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73년 창간된 󰡔마당󰡕은 지면에서 이데올로기 문제를 배제하고 민족전통과 결혼, 귀화, 교육과 같은 재일조선인 사회문제를 다루었다. 동시에 인권운동, 위안부 문제와 같은 각종 일본비판 담론을 통해 재일조선인 사회의 단합을 도모했다. 이러한 󰡔마당󰡕의 특징은 정치일변도 성향이 주를 이룬 기존 재일조선인 잡지들과의 가장 큰 차이이자 1970년대 재일조선인 잡지 미디어의 새로운 변화를 확인할 수 있는 근거이다. 이처럼 1970년대는 재일조선인 문학과 사회의 전환기였으며 재일조선인들은 일본이라는 새로운 토양에서 문학을 통해 새로운 삶을 개척했다. 본 연구에서는 조선문학, 재일조선인 문학, 재일조선인 사회를 공시적으로 분석함으로써 1970년대 재일조선인 문학의 구체적 양상과 극복과 전개를 종합적으로 규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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