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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19세기 초 줄풍류 전문음악가 연구 : 유춘오악회와 북학파 풍류방을 중심으로
유춘오악회는 홍대용의 집 유춘오에서 열렸던 음악 모임이다. 이 악회는 현재까지 전승되는 줄풍류의 초기 형태로 여겨지며, 신분을 초월한 모임으로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여기 참여한 문인 비전문가들은 문집을 통해 자신 및 서로에 대한 기록을 풍부하게 남겼지만 전문음악가들에 대한 기록은 드물다. 또한 줄풍류가 문인음악 혹은 중인음악의 관점에서 주로 파악되다보니 상대적으로 전문음악가들의 존재는 간과되었다. 본 논문은 문집‧저술물‧고악보 등의 민간 문헌, 실록‧선생안‧의궤 등의 공적 문헌, 학계의 선행연구 등을 종합하여 유춘오악회 및 북학파 풍류방을 중심으로 활동한 전문음악가들의 행적을 규명하고 이들이 어떻게 주체적으로 또 전략적으로 활동했는지를 추적하고자 했다. 유춘오악회 및 북학파 풍류방과 인연을 맺었던 전문음악가들은 연익성, 박보완, 문명신 같은 장악원 음악가들이다. 연익성은 홍대용의 10대에서 40대까지를 함께 했던 금사(琴師)였다. 홍대용과 연익성은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한 집안의 자제와 충청도 지역의 악공으로서 충청도 수촌에서 처음 조우했다. 이후 연익성이 장악원에 들어가고 홍대용도 상경하며 이들의 인연은 30년간 이어진다. 그들은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이고 평등한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였다. 이후에 활동했던 박보완은 연익성과는 달리 대금과 생황 등 관악기에 능한 음악가였다. 그는 활발한 민간 활동의 자취를 남겼고 공적으로도 50년 이상 궁중의 각종 연향에서 (가)전악으로 활약했다. 박보완은 유춘오에서 양금을 접하고 그 유행 가능성을 내다보았으며, 중국 사행(使行) 때는 생황과 함께 양금의 연주법을 배워와서 민간 풍류방에 확산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향악 전공 우방 악공 출신으로 민간에서 생황과 양금의 유행을 주도하였다. 박보완 이후에 활동한 생황 전문가 문명신 역시 양금으로 관심영역을 넓혔으며 『구라철사금자보』의 저본이 되는 최초의 양금자보인 『문명신양금자보』를 제작하였다. 그는 당악 전공 우방 악공 출신으로, 유춘오악회 이후 북학파 풍류방에서 활동한 인물로 보인다. 연익성, 박보완, 문명신의 행적은 조선후기 악회에서 활동하던 장악원 전문음악가들의 전략 양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전 시대인 17세기 말~18세기 초에 활동했던 김성기와 한립은 거문고 전문가로서 문인 비전문가들의 미감에 맞춘 신성(新聲)을 짓고 악보를 만들어 가르쳤다. 18세기 후반 유춘오악회의 연익성 역시 이러한 전략의 연장선상에서 활동한 음악가였다. 그런데 18세기 말이 되면 청(淸) 문물의 활발한 유입을 배경으로 전문음악가들이 새로운 악기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한다. 생황 전문가 박보완은 민간 풍류방을 통해 양금을 접하고 청에서 연주법을 익혀와 우리 곡조에 맞추었으며, 문명신은 최초의 양금자보를 만들었다. 1828년에는 이들 가계에 의해 궁중에서 처음으로 양금이 연행된다. 장악원에는 이처럼 자신들의 전공 영역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하고자 했던 우방 소속의 진취적 음악가 가계들이 있었으며, 이들의 관심사는 대체로 대금->생황->양금 순으로 움직인 것이 확인된다. 그러나 양금은 민간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궁중 도입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는 양금이 1801년 신유사옥 때 풍속을 교란하는 사특한 악기로 여겨졌던 것과 관련된다. 유춘오악회와 북학파 풍류방에서 활동했던 전문음악가들은 변화하는 시장의 수요에 맞추어 기존 악기에서 생황과 양금 등의 새로운 악기로 역량을 키우면서 그 유행을 선도하였고, 연주법과 악보 보급 등 비전문가들의 필요와 어려움을 해결하였다. 또한 이들은 유춘오악회와 북학파 풍류방의 악풍을 다른 민간 풍류방에 전파하는 한편, 궁중으로 새로운 악기인 양금을 들여오는 매개자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