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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적 미학에 관한 연구 : 사회참여를 위한 미적 회심을 중심으로

        박현철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247807

        본 논문은 신학적 미학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과 신학적 도전에 대해 기술하였다. 신학적 미학이 신학 전반에 주는 도전은 다양하고도 근본적이다. 과학적 방법론에 포섭된 기초신학에 대하여 직관적이고도 감성적인 방법론을 제안하고, 예술의 활용을 통해 선교신학적, 예배학적 차원의 논의를 풍성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기독교윤리적 차원에서 신학적미학은 기독교인의 실존을 ‘통합적인 자아’로 인식하는데 도움을 준다. 2장은 신학적 미학의 개념을 정리하고, 특히 박성관이 제안한대로 ‘신학적 미학’이 갖는 실천신학적 함의, 즉 구속적이며 동시에 변혁적인 가치를 포함하는 ‘기독교 미학’으로서의 가능성에 동의하였다. 3장은 주요 기독교 사상사 속에 나타난 ‘신학적 미학’에 대한 생각들을 개괄하였다. 그 결과 ‘미’에 대한 논의는 고대교회로부터 현대신학에 이르기까지 단독적으로 이뤄지기보다는 ‘진’과 ‘선’의 관계성 속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중세의 성상논쟁부터 종교개혁 시기까지 ‘아름다움’은 때로 거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 신학에 이르러서는 바르트나 발타자에 의해 ‘아름다움’이 신학의 근본주제로서 성찰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사고의 기원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았고, ‘아름다움’을 상실한 신학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4장은 신학적 미학의 제반문제들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첫째, 미학적 회심, 둘째, 통합적 자아형성을 위한 미적실존의 문제, 셋째, 예술과 기독교 미학에 관한 내용이다. 이 장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중생, 곧 거듭남이 갖는 미학적 차원을 논하고, 그것이 갖는 근본적인 의미를 성찰하였다.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곳으로부터의 회심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미적 가치판단체계의 변화를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미학적 회심은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차원보다 저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둘을 종합하고 조율하는 데 있어 중심적인 것이다. 종교적 인간은 미학적 판단기준에서 자유하거나, 윤리적 가치판단을 초월해 있지 않다. 이는 인간의 실존이 분리적이거나 단계적이기보다는, 순환적이고 통합적임을 전통적인 동양사상을 통해 논증하였다. 결국 이러한 미학적 실존은, 윤리적 실존과 종교적 실존을 보완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아 인식을 통합적으로 구성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나아가 기독교 미학이 추구하는 예술은 예수가 달린 십자가, 곧 구속적이며 변혁적인 아름다움에 기초한다. 따라서 예술이 어떤 궁극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려 할 때, 그것이 도덕적 선이나 사회윤리, 현실정치의 이슈와 무관할 수 없으며, 나아가 신앙인의 삶을 성찰하고 재정향하는 근본도구로 작동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기독교 미학의 가능성, 출발 지점을 ‘상상의 변혁’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창조로 보았다.

      • 초기 선교사들의 신학과 윤리의식에 대한 연구 : 선교초기에서 1930년대까지

        서진석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7807

        서양 기독교 선교는 19세기의 자본주의, 식민주의 세계팽창의 대세를 따라 동양 혹은 한국에 들어왔으며, 선교사들은 알게 모르게 서양 팽창주의에 협조하여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 들어온 모든 선교사들은 거의 대부분이 청교도적인 보수주의에 그들의 신앙과 신학의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그들이 알고 있었든 모르고 있었든 간에 19세기의 서양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문화를 대변하였고, 피선교지에 관한 모든 정보를 서양 자본주의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서구의 제3세계 지배의 길을 열어주는데 그들이 도움을 주었다. 한국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이러한 서양 자본주의와 식민주의의 문화에 바탕을 두고 성장해 온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친일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는데, 선교사들은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난 뒤 1906년 이토 통감의 통감부 설치를 보고 "우리들은 이토 통감의 통치는 가장 큰 칭찬을 받기에 마땅하며--- 실로 우리들은 통감 정략의 가장 열심 있는 지지자임을 고백하고 이토 통감이 반드시 성공해야 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드러내 놓고 친일적이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정교분리의 정책을 내세우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의지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제에 의해서였다. 미국 정부는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정책의 이익을 위해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에게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고 이런 미국정부의 지시에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순종하였다. 이런 이들의 모습들 통해서 선교사들의 윤리의식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선교지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보다는 자신들과 자신들이 속해 있는 선교부의 이익을 위하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들의 모습들 때문에 선교사들은 복음과 신앙은 사회와 정치 나아가서 악하고 소망이 없는 세상의 문제로부터 초월해야 한다는 초월성을 강조했다. 그들은 이러한 초월적인 신앙이 순수한 복음이라고 한국인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전해준 이러한 순수한 복음은 한국교회로 민중들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하였고,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과 고통을 듣고 볼 수 있는 눈과 귀를 가지지 못하게 하였다. 그 후에 한국교회는 인간구원은 물론 사회, 경제, 정치, 문화적인 구원과 해방을 이룩하여 민족해방을 가져오게 하는 신앙과 신학은 선교사들에 전해준 복음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복음적 신앙이 아니라는 결론을 지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전해준 복음이란 오히려 서구제국주의를 확장해 나간 신학이었고 동시에 일본 식민주의통치를 지원하고 일본 식민통치자들에 아부하는 정치신학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그들의 신학과 그들에게서 크게 영향을 받은 대부분의 한국교회의 신학은 민중의 고난을 외면한 반 민중신학이었고 민족의 독립을 외면한 반 민족신학이라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흘러 온 것이다. 이런 선교사들의 신학과 윤리의식으로 인해서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그 영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중요한 원인중 하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은 아직도 이세상은 악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세상은 잠시 머물다가 가는 곳으로 생각하면서 교인들에게 천국만을 바라볼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과연 이런 모습들이 우리한국교회의 전통이란 말인가? 본 글의 본론에서 연구했듯이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나라를 사랑하자고, 그리고 고난받는 같은 동포들을 구제하기위해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노력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한손에는 성격책을 들고 동포들에게 생명되신 그리스도를 전했고, 한손에는 태극기를 들고 나라를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선교사들이 선교정책에서 재정적인 면에서의 자립의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는 자립이라는 명목하에 자기 교회의 예산을 늘리고 확보하는 데에 집중하게 되었고, 연합사업으로 나라와 이 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이들에게 대한 지원은 소월하게 되었다. 이런 교회의 모습들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탄받는 부분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초기한국교회의 전통을 이어 선교사들에 의해 왜곡된 모습들을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 한국교회는 자기 배불리기에 모든 것을 소비하는 모습들이 아니라,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앞장서서 일하고 선교하며 가난하고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신명기의 유일신 신학 연구

        임채홍 호남신학대학교 대학원 2001 국내석사

        RANK : 247807

        Many people think that monotheism has a little extreme tendency, so they underestimate or misunderstand monotheistic faith in the Hebrew Bible. This study is an attempt to know the original monotheism which Israelites developed through their own history by reviewing Deuteronomy. This study has three starting points. The first one is about the nature of monotheism in the Hebrew Bible. Israelites thought that God is not a static and dogmatic being but a dynamic living being. So I tried to move from Greek philosophical understanding to biblical understanding on Yahweh, for Israelites felt Yahweh their God not through their thinking but met him in their life. The second one is about the origin of monotheism. Most rescent scholars think that monotheism originated at the time of Deutero-Isaiah according to the evolutional assumption of J. Wellhausen, but I support the traditional argument that it began in Mose's period. The third point is about the uniqueness of monotheism in Deuteronomy. There are some expressions in Deuteronomy which cannot be found in the other books in the Old Testament: the opposition of idol worship, centralization of cult, tradition of covenant, the confession of monotheism, the doctrine of election and so on. I insist that the assertions and institutions in Deuteronomy strengthen the faith of monotheism. The above-mentioned points show that the theology of monotheism has two important aspects of theological meaning. One thing is Yahweh, Israelite's God is their only and own God who is different from the god of theocentrism which is said in the theology of religion. Yahweh, the God is who deals with the human history, was not imported from another civilization or made at the end of natural evolution, but he reveals himself to Israelites and lives with them who confess he is a living God in their life. The other thing is the wisdom and lessons that they can overcome all trials in their lives through the recovery of the faith in Yahweh even though they suffered many difficulties in history. The message in Deuteronomy is that human beings can overcome the sufferings and miseries which are repeated in history only when they return to the only God.

      •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따른 신학교 교의신학 교과과정 내용에 대한 고찰

        이건희 대전가톨릭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7807

        The seminary is 'the heart of the church', for it is where the future priests are fostered. Therefore, it is true to say that the themes learned in the seminary have a great effect on the future church; for if 'the future shepherd'(the seminarians) are misguided in their scholar years, than there is a great chance that the 'lambs'(the faithful) are misguided as well. Hence it becomes apparent that the curriculum has to be properly structured in a way so that th 'deposit of faith' could be well delivered. Among many subjects in the curriculum, dogmatics, in particular, has to be carefully reviewed since of its importance of dealing with the core teaching of the church. For this reason in this thesis, we will be focusing on the contents of the curriculum of dogmatics based on 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which includes the core teachings of the church. First, in chapter one, we will be looking briefly at the history and the meaning of the catechism, as well as its birth, goal, structure, and authority. Next, in chapter two, we will examine the structure of the curriculum in other seminaries and consider some of the possibilities of its improvements in the curriculum of dogmatics. And in chapter three, on the basis of what we have gone through, we will make a summary for each subject of dogmatics accordingly to the appropriate contents of the catechism. And furthermore, we will consider 'what are the prime subjects that has to be dealt first in the curriculum' as well as the structural problem and its alternatives. Meanwhile, the problem with the curriculum concerning the dogmatics is that each University has its own unique curriculum which makes the reconciliation difficult. Also, another problem is that Mariology and Theology of the Holy Sprit are not Widely given among the Universities. In fact, only two out of seven seminaries were giving these subjects. To this, as a possible solution, if the addition of new courses to the curriculum is not possible, we can suggest to establish a single course that integrate all dogmatics in one. As Pope Jean Paul 2nd mentioned, the catechism is the 'tool for the new evangelization'. Consequently, teaching dogmatics based on the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to the seminarians who will become the next leaders in evangelization, is of sure an essential one.

      • 몰트만의 십자가 신학 연구

        최병훈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7807

        이 논문의 목적은 십자가 사건의 신학적 해석을 통해서 참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 분을 만나고자 열망하는 인간의 실존을 고찰하는 것이었다. 몰트만의 십자가 신학을 통한 이해는 앞장에서 살펴보았다. 이제 영원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피조된 인간의 실존의 문제를 십자가 신학에 관련하여 결론을 생각해 본다.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그 분이 창조하신 만물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은 사라진다. 따라서 존재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됨이 마땅하다. 이 우주의 모든 만상은 하나님만의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신학을 논하는 것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없는바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 가운데서 십자가의 신학과 모든 것은 존재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논한다. 이와 같은 절대성의 하나님 다음에는 인간이 존재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알고자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의 신비를 올바로 알기 힘들다. 십자가 신학은 계시의 신학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을 통해서 이문제의 올바른 이해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의 절대성을 아는 우리는 십자가 사건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연약함에 크게 놀란다. 그러나 곧 이어 이것이 인간과 함께 하고자 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게 된다. 십자가에서 만난 하나님은 헬라철학이 말하는 형이상학적 하나님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을 근거로 한 구체적 행동이 없이 그저 완전하고 고통이나 죽음은 상상할 수도 없는 형이상학적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 인간과 아무런 관련을 맺지 못한다. 형이상학적 하나님의 존재는 그저 우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피안(彼岸)의 세계에 머물 뿐이며 우리 인류에게 사랑을 베풀거나 혹은 우리 인류의 구원을 위한 구체적 행동을 하지 못한다. 그러한 하나님은 고난의 인간에게 아무런 희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만난 하나님에게 우리는 모든 희망을 둘 수 있다. 십자가의 계시된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체휼하셨고 그것을 대신 지심으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십자가 신앙을 통한 인간 실존의 이해는 무엇인가? 인간의 지금 여기서의 실존은 고난을 직면하고 있게 된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는 자들은 고난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다. 고난의 실존 아래에 있는 모든 인류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지셨던 십자가의 짐을 볼 때 자신들의 현재의 고난을 기꺼이 기뻐할 수 있다. 때문에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말씀하시고 있다. 몰트만은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인내하심과 부활의 기쁨을 말한다. 우리 모두는 여기서 십자가의 순례자의 길을 가게 된다. 이것은 아담의 범죄 후의 인간의 실존인 것이다. 이 피할 수 없는 고난의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올바른 신학은 십자가를 향해 가는 순례자에게 올바른 신앙의 삶을 결정하므로 매우 중요하다. 루터가 말했듯이 십자가 지기를 거부할 것인지, 지기는 지되 억지로 힘들게 지고 갈 것인지, 아니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바라보므로 기쁨으로 고난을 맞이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우리는 왜 십자가 신학을 연구했는가? 먼저는 하나님을 알고자 함이었으며, 그 다음은 인간의 실존의 문제이었다. 즉,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온 인류가 밟고 있는 그칠 줄 모르는 이 엄청난 고난의 가시의 문제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차기까지 고난의 십자가는 필연코 모두에게 동일하게 지워진다. 여기서 올바른 십자가 신학을 소유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우리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부활을 바라보면서 고난 중에 항상 기뻐하는 순례자가 되어야 하겠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있는 우리는 벌써 웃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해방신학이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

        박원일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47807

        해방신학은 라틴 아메리카의 특수한 상황과 형편에서 생겨난 신학이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상황과 모습이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인 특수성을 가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선포하고 인간의 본 모습을 찾으려고 하는 사랑의 행위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해방 신학의 여러 가지 약점들, 즉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 구원과 해방에 대한 편협적 해석, 조건적 폭력에 대한 묵시적 동조 등의 문제점들은 계속해서 비판받고 검토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해방신학의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해방신학은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들의 상태를 개선하는 노력을 했고 구체적인 노력을 하도록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측면에서 사회적 참여라는 긍정적 기여를 해왔고 앞으로도 할 것이다. 전통적인 신앙이 추상적이고 사변적인데서 기인하는 교회 본질적 사명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무책임성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충격을 주었다. 한국에서의 해방신학의 수용이라는 과제에서 두 가지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해방신학에는 분명히 모든 기독교인-그리고 모든 종교인-이 받아들여야 할 좋은 점이 있다. 이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현실성을 구체적으로 적용시키려고 목숨까지 희생하는 그들의 진지성을 무시하거나 공산주의자로 매도하지 말아야 한다. 해방신학의 골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종교란 일단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란 세상을 외면하는 제1차적인 떠남에 머물지 않고, 다시 떠났던 세계로 돌아오는 제2차적인 결단을 동반한다. 사회를 초월한 "하늘의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이 세상을 구원하려는 "땅 의 사람"으로 되돌아 오는 것이다. 둘째, 우리는 이제 우리의 해방신학을 창조해야 한다. 남미에서 마르크스의 사회분석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그대로 우리나라에도 적용된다고 말 할 수는 없다. 황필호교수는 평소에 黃人神學을 주장한다. 이 황인신학은 단지 예수의 얼굴을 황인종으로 그린다거나 그가 결국 아시아인이었다고 주장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아시아의 정세와 한국의 상황에 맞는 기독교를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아시아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해방신학을 발굴해야 한다. 그리고 복음의 현실화라는 해방신학의 근본적인 메시지는 한국에서 남미식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덮어놓고 남미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절대로 남미식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은 다같이 해방신학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상의 두 가지가 실현화되려면 먼저 이데올로기에 대한 우리의 경직성을 풀어야 한다. 위대한 사상은 언제나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해방신학을 동일한 것으로 비판하거나 칭찬하지 말아야 한다. "죽일 놈"과 "살릴 놈" 만 존재하는 흑백논리는 이제 통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해방신학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중에서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思想의 幼稚化 현상은 영원히 치료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사상의 유치화 현상으로부터 하루 빨리 벗어나려면 해방신학이라는 것을 우선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같은 복음이라는 것이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모습 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보았다. 물론 상황이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앞서서 언제나 우리의 신학은 말씀을 중심에 두어야 할 것이다. 해방신학이 얼마나 성서적인지를 생각해 보고 성서안에서 한국적 해방신학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사람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라고 하시지 않았다. 혹, 우리의 신학은 말씀이라는 것으로 다른 것들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말씀 안에서 자신을 되돌아 보고 한국교회의 올바른 신학과 교회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신중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잘 살고 있다. 하지만 1970-80년대 관심을 가졌던 해방신학의 모습이, 21세기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 다시 반성하게 하고 도전을 던진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에게 지식이 많아지고 옛날보다 잘 살고 있지만 우리의 가슴은 점점 가난해져 감을 인식해야 한다. 세상은 도심 속에 묻혀있는 교회를 향해 손가락질 하지만 세상은 교회를 향해 손짓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 가죠 기타모리(北森嘉藏)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에 대한 연구

        이상호 한신대학교 대학원 200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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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의 신학은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이고 그 싹을 틔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 천년 동안 형성되어진 아시아 고유의 종교, 정치, 사회, 문화적 상황(context)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며 해석해 왔는가? 또한 아시아 신학의 주체적이며 역동적인 자리 매김을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가를 새롭게 반성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아시아는 그 동안 서구 신학의 모든 것을 아시아적 상황에 대한 고려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문화적 이질감과 적대감을 형성하는 과오를 범하기도 하였다. 더 이상 서구 신학의 틀 속에서 해석되어 받아들여지는 복음에 머무를 수 없는 것이 우리 아시아의 현실이라 할 것이다. 아시아가 서구의 신학을 받아들인 시기는 서구 열강이 무력을 앞세운 제국주의 침략을 자행하던 때이다. 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서구의 자본과 무력은 서구 중심주의 사상을 아시아에 주입시켰고 이러한 서구 중심주의적 사상의 억압에 의해 아시아의 종교와 문화는 왜곡된 틀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인식 속에서 아시아의 신학은 새로운 전환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아시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너무 오랫동안 서구 신학의 바빌론포로 (Latin captivity) 생활을 하면서 가련한 경계인간(marginal man)으로서 문화적 고아의 신세를 감수하여야만 했다. 전투적인 서구 그리스도교의 꼭두각시 역할, 앵무새의 역할만을 수행하여 온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는 '새로운 신학'을 전개시켜 나가고자 노력을 하게 된다. '새로운 신학'이란 아시아의 상황속에서 형성되는 신학을 이야기한다. 아시아 신학자인 사피어 아트얄(Saphir P. Athyal)의 말을 빌리면 신학이란 그리스도교 메시지를 우리의 경험의 컨텍스트 안에서 이해하고자 시도할 때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영원한 진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과 장소에 적합한 말로써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는 성서가 아시아 신학의 규범이 되어야 하며, 아시아의 문화와 종교 등의 컨텍스트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고 아시아적인 신학이 체계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하면 아시아적 가치를 지닌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송천성은 이것을 '아시아인의 심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리가 찾고 있는 신학적 진리가 내내 아시아 속에 우리와 함께 있어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려는 풍조가 있다. 시장바닥에서 그러한 진리의 부호를 찾을 수 있다. 아시아의 민중 바로 그 속에 신학적 진리의 상징이 숨겨져 있다. 그러니 우리 자신의 역사와 문화가 아닌 다른 어디에서 그러한 진리를 맛볼 것인가? 아시아에서의 삶은 신학적으로 암호 문자화되어 있다. 그것을 해독하려면 그 속에 우리 자신이 파고들어야 한다. 그 문화적인 유산, 종교적 신앙 및 역사적 희망으로 점철된 아시아의 삶을 재정비하고 재 경험하는 것, 이것이 아시아라는 모태로부터 신학을 하는데 있어 가장 본질적인 요소이다. 아시아적 상황 속에서 그 문화와 전통과 사상에 뿌리내린 아시아적 신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은 앞으로 발전시켜 나가야할 아시아적 가치를 지닌 신학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신학의 주제가 '승리와 영광'이었다고 한다면 아시아의 신학의 주제는 '고난' 이라 할 수 있다. 아시아에서 '고난'은 매우 중요한 주제이며, 동시에 아시아인의 삶과 정서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단어이다. 아시아의 근현대사는 억압과 착취와 수탈에 의해 고통으로 얼룩진 고난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신학은 이미 그리스도교의 낡은 도그마나 되풀이하고 있기에는 너무나 다급한 상황에 놓여있다. 신학은 배워야 할 것이 아니고 몸으로 살아야 할 것이고, 생각되어야 할 것이 아니고 체험되어야 할 것이기에 신학은 현실적인 삶과 역사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체험에서 창출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따라서 신학의 작업 역시 실존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인간이 직접 부딪치는 삶의 어려운 물음에 대답하려는 시도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아픔'이 새롭게 신학의 주제로 등장한 것도 바로 이 까닭이다. 인간의 고뇌와 아픔을 반영하지 않는 신학은 진정한 신학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주장은 아시아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너무나 실제적이며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아시아가 처한 '압도적인 빈곤'과 '정치적 억압'으로 인한 결과일 것이다. 이러한 이중적 고통의 상황속에서 이루어진 아시아의 신학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고난'에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 아시아의 '고난신학'에 대한 연구는 고난과 역경의 역사속에서 아시아의 신학적 고민과 몸부림으로 이룩한 아시아신학에 대하여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다. 이러한 각성 하에 아시아적 가치와 문화를 바탕으로 최초로 아시아의 '고난 신학'을 형성한 일본의 신학자 '가죠 기타모리(北森嘉藏)'에 대한 연구가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일본의 신학자로서 일본이라는 특수한 문화적 상황속에서 그 자신이 1944년에 직접 집필한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이라는 책을 통하여 자국은 물론 서구의 신학자들에게도 잘 알려지게 된 신학자이다. 1946년 일본패전의 그 이듬해 당시 일본 그리스도교 신학 전문학교 조교수였던 가죠 기타모리가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 이라는 책을 출판하였을 때, 이 책은 일본 그리스도교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그것은 서구신학만이 유일한 신학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에 일본인이 독창적인 조직 신학서를 저술했던 것 자체가 놀라움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의 신학의 주제는 그의 책제목에서 드러나듯이 '고난'이다. 그는 '고난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어떻게 해석하였으며 그의 영향은 이후 아시아의 고난신학에 어떠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이 논문은 아시아 고난신학의 출발을 연 가죠 기타모리의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의 의미를 연구한다. 그의 신학은 서구의 그늘에 가려진, 아니 서구의 신학속에 묻혀 아시아의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하던 시기에 형성된 최초의 아시아신학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기타모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라는 특수한 상황속에서 일본의 아픔과 사상으로 독특한 고난신학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전쟁하의 일본에 살고 있던 기타모리에게 고난의 의미는 그의 삶에 가장 가깝게 받아 들여졌던 신학적 주제였다. 전쟁의 고통으로 신음하던 일본의 상황속에서 기타모리는 '하나님의 아픔'을 발견하고 그것이 바로 복음의 '본질'임을 깨닫게 된다. 본 논문은 기타모리의 고난신학, 그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아픔의 신학'이 아사아의 고난신학으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신학의 한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를 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신학이 고난의 상황속에 처해 있는 아시아인들의 아픔으로 이해할 때 얼마나 의미가 있는가, 그의 신학은 과연 아시아의 고난 신학이라 할 수 있는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아시아는 근현대사를 지나오면서 이제 21세기 미래의 시대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음에도 아직도 가난과 질병과 정치적 억압으로 고난 당하는 전세계 인구의 2/3가 살고있는 곳이다. 여전히 계속되는 아시아의 고통을 기타모리의 신학은 과연 어떻게 복음적으로 해석하고 있는가를 아시아의 신학자들의 평가와 함께 서남동의 한의 신학을 통하여 밝혀보는 것을 이 논문의 연구 목적으로 삼는다.

      •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론

        김성엽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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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 틸리히, 그는 일생의 경계선상에 산 사람이다. 그의 일생의 경계선은 바로 신앙과 회의, 철학과 신학, 유럽의 구세계와 미국의 신세계. 기독교와 문화, 기독교와 타종교, 프로테스탄 교회와 가톨릭 교회,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경계선이다. 특히 그는 신학과 철학, 종교와 문화 사이를 연결한 신학자였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그의 신학적 방법론을 알 수 있다. 그의 신학의 방법론은 바로 ‘상관 방법’(method of correlation)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는 철학과 신학, 종교와 문화 가운데 하나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양편을 조정하고 중재하여 양자 모두 수용하는 신학 체계를 건설한 것이다. 상관의 방법은 한마디로 철학적 질문과 신학적 대답을 서로 연결시키는 것이다. 틸리히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상관 방법은 기독교의 메시지와 현대 상황을 결합하는 방법이다. 이와 같이 틸리히는 상관의 방법, 즉 실존적 질문과 신학적 대답의 상호 의존의 관계를 통해서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말했다. 이같이 신학의 과제를 상황에 대해 대답하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틸리히의 신학을 ‘상황 신학’(situation theology)이라고 부른다. 또한 메시지와 상황의 상관성을 강조하는 틸리히의 신학은 자유주의와 정통주의 및 근본주의 신학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시도였다. 틸리히에 따르면 신학은 그 기초가 되는 두 개의 극(pole)을 가지고 있다. 영원한 진리와 이 영원한 진리가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시대적 상황, 즉 메시지와 상황이 그것이다. 그러나 신학은 항상 이 양자 중 어느 하나를 희생시킴으로 균형을 잃을 위험성이 있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상황을 강조한 나머지 메시지를 희생시킨 반면 정통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틸리히의 상관 방법은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여 약점을 보완하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틸리히는 종교 또는 신앙을 “궁극적인 관심”(ultimate concern), 혹은 “궁극적인 관심에 붙잡힌 상태”로 정의했다. 틸리히에 말하는 궁극적인 관심이란 우리들의 존재를 결정해 주는 것, 우리들이 존재하느냐 혹은 존재하지 않느냐를 결정해 주는 것 바로 이것이다. 틸리히는 종교적인 관심을 궁극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궁극적인 관심은 태도 뿐 만 아니라 그 대상도 포함된다. 그러면 인간에게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궁극적인 존재인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궁극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틸리히는 궁극적인 관심의 상태인 종교적인 신앙은 상징적인 언어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신앙을 표현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신앙의 언어는 곧 상징의 언어이다. 상징은 우리에게 닫혀져 있던 실재의 영역을 열어 주는 동시에 그것에 상응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의 차원을 높여 준다.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인 하나님에 대한 모든 신학적 진술 역시 상징적이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근거로서 시간과 공간의 영역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틸리히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간접적 그리고 상징적으로 말해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틸리히는 성경은 하나의 상징이므로 문자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비문자화(deliteralation)를 주장했다. 틸리히의 신학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존재 자체로 본 것이다. 존재 자체라는 것은 하나님은 존재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른 여러 존재 가운데 하나가 아닌 모든 존재의 힘과 근거이며 존재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틸리히는 하나님이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그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행동, 열정, 기대, 기억, 고난, 기쁨 등과 같은 인격적인 표현은 존재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살아 있는 하나님(living God)으로 만들려는 상징이라고 주장했다. 인격적인 하나님(personal God)이란 말은 “하나님이 하나의 인격”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인격적인 모든 것의 근거라는 것과 그 안에 인격성의 존재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틸리히는 하나님의 인격을 상징적인 의미로밖에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 상황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으로 새로운 존재의 개념을 제시했다. 인간의 실존 해명이 곧 그의 죄론이며, 새로운 존재의 개념이 그의 그리스도론이다. 틸리히는 인간의 실존 상황을 소외의 상태로 규정하는 한편,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실존한다”(to exist)는 말은 어원학적으로 “밖에 선다”(to stand out)는 의미한다. 그것은 비존재로부터 나와서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서양 철학은 실재를 본질과 실존의 두 측면으로 나누었다. 플라톤은 실존을 단순한 의견이나 악의 영역이요 참된 실재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 반면, 본질을 참된 존재요 영원한 이데아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한편 이와 같은 견해가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에서는 실존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실존을 전락이나 타

      • 레오나르도 보프의 하나님 나라와 해방

        표계만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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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프가 말하는 기독론은 그야말로 라틴아메리카의 제한된 시대와 공간 내에서만 존재하는 특수한 기독론인가? 그의 기독론은 어떤 의미에서 보편성을 지닐 수가 있는가? 이와 같은 질문은 끝없이 제기되는 반론들 속에서 무의미하게 되풀이되는 메아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생각을 그친다면 한 신학자의 신학적 입장을 답습하는 것 이상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에 있어서 보프가 주장한 해방과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적용될 수 있으며, 그의 그리스도론적 고백이 어떠한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A. 평가와 전망 보프는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것이 하나님에 의해 이끌어 들여질 새로운 질서에 참여하는 데 요청되는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라고 한다. 즉 인간이 죄와 모든 다른 일체에서 오는 소외에서 해방되기 위해 그리스도는 두 가지를 요청하는데 그것은 매우 근본적인 요청으로 인격의 회개와 인간 세계의 재건을 요구한다고 말한다. 이런 보프의 주장대로 그리스도가 각 사람에게 다다를 수 있는 것이라면 해방의 문제는 분리되어진 소수나 특수상황 하에서의 인간의 모습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론 또한 마찬가지이다. 해방은 절대다수의 인간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나라를 구성하는 국민들 중의 대다수는 해방되어야 하는 상황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언제나 억눌림의 상황이 존재해 왔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으며, 특별한 해방의 운동이 대대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한에서는 늘 인간 세계의 재건은 세계적으로 요구되는 목소리가 될 것이다. 또한 인격의 회개가 일어나야 할 곳은 도처에 있는 것이다. 이는 특별한 문화나 지역을 선정하여 일어나는 특수한 운동이 아니라 인간의 가슴에 일어나야 하는 당연한 결과인 것이다. 보프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해방자 그리스도로 나타나는 모습이 바로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즉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가 바로 하나님의 권리라는 것이다. 당장 힘없는 사람들, 부당하게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을 편들 수 있는 그같은 신적인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 세상의 구원자이신 메시아와 그 추종자인 그리스도인들의 일차적인 임무에 속한다고 말한다. 예수가 처음으로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61장 1-3절)을 읽으므로 가난한 사람들, 우는 사람들, 굶주림과 불의와 박해를 당하는 사람들의 해방자로서의 그리스도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보프는 그리스도가 바로 어떠한 대립도 원치 않는 분이심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사랑과 정의, 화해, 희망,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인간 실존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선호하는 분이라고 말한다. 오직 죄를 포함한 인간 존재들을 소외시키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총체적이고도 완전한 해방, 이것이 예수의 설교의 핵심이었다고 보프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예수가 개혁가이며 해방자이고 혁명가이라는 어조는 단순히 이 세계적인 의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닌 인간 본연의 문제에 대해 예수가 총체적으로 도전하시고 바꾸시는 분으로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보프는 편협한 예수 이해를 가지고 해방신학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전체적인 그리스도 인식에 있어서 그 결핍된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 인식에 대한 응답을 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보편적인 윤리를 확립할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보프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바로 형제 자매들 간의 나눔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예수를 만나는 것으로 말한다. 인간 존재가 우리의 세계 속에서 부활해 계신 그리스도를 잘 나타내는 것이기에 형제나 자매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자신을 거부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나눔 없이는 구원도 없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우리는 보프의 기독론과 에큐메니칼 정신과의 유사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형제자매들 간의 나눔은 지역과 계층, 국가나 빈부의 격차가 없이 일어나는 것으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 아래에 노출된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복음을 지닌 모든 자들이 세상에 대하여 행하여야 할 행동으로 주어지는 것이기에 특수한 상황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운동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보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철저히 현실의 물음에 대한 답하는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논의만으로 이루어져서 결론을 도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해방의 문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고백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현재의 역사 속에서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 완성도를 향하여 나아가려는 시도를 한다. 이 시도는 총체적 해방을 위한 투신이 이루어질 때에 가능한 것이다. 인간의 영원한 해방을 포함한 이 해방은 모든 인간이 처한 총체적 문제들을 언급하며, 그것에 있어서 당연한 해방을 주창하는 것이다. 그러한 해방은 그리스도를 올바로 고백하는 신앙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이 땅에 총체적인 해방을 가져온 해방자로서 신앙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교리의 완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정의롭고 완전한 해방을 가져다주는 분으로 고백한다. 그러나 이러한 보프의 신학은 이중적인 하나님 나라의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미래적인 것으로서 흔히 역사적으로 언급되어 온 하나님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보편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에 의해 이미 현재화되었으며 보프가 항상 현실에 투신할 것을 강조하면서 주장해 온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현재적인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은 어떠한 도식으로 서로 연결될 수 있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 단지 개개의 것에 대해 설명한 뿐인데 특히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참여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인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되는 것이다. 해방의 전선에 각 사람들이 결단하는 마음으로 투신하는 것들이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거나 그 도래를 이루는 구성요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인 것이다. 보프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부분적 해방이 결국 미래에 일어날 총체적 해방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한다. 그렇게 된다면 부분적 해방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미리 경험되고 있다는 도식이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보프가 기독론의 구조 속으로 그가 주장하는 현실 참여에 대한 문제를 가져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보프의 주장대로 구원이 사회적이고, 경제적이며, 또한 모든 영역에서 투신하는 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에 대한 신학적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프의 기독론에서 초기 저서에 나타나지 않다가 나중에 그의 기독론의 범위 속으로 첨가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중요성은 재림이 지연되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그것은 보프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 재접근하거나 예수의 사명을 계시적 요소로 재해석한다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은 아니다. 보프의 해방적 프락시스에 대한 기독론적 근거는 예수의 하나의 동인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보프는 기독론 그 자체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중요성과 연결하는 것을 다루는 것에 관심하지 않는다. 이런 문제는 현실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약화시킬 우려를 낳는다. 해방의 운동에 동참하는 이들에 대한 평가가 신학적으로 이뤄지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역사적 해방에 무게를 두기 위한 의도때문에 총체적 해방과 역사적 해방 사이의 간격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은 미래에 있어서 유토피아적인 희망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와 현재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양식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 해방에 대한 연결점은 보프에게 있어서 명확하게 확보되지 않는다. 단지 그는 총체적 해방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으로서 현재의 역사적 해방을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둘의 관계는 모호하게 남아있다. 그러므로 보프는 이러한 간격을 이어야 하는 과제를 안는 것이다. 보프는 예수에 대한 종말론의 요소와 도덕적인 요소가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프의 신학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독론과 하나님 나라라는 연관성 속에서 해방을 추구하는 신학은 오늘날 모든 교회가 나아가야 할 향한 목표를 제시한다. 고전적 신학은 누가 보나 명백히 신학적인 소재를 두고 신학을 하였다. 바로 그것은 형이상학적 단어들은 하나님, 예수, 죄, 은총 등에 대한 끊임없는 서술과 비판들이었다. 철저히 신적 존재들에 대한 분석과 재고가 이어져왔던 것이다. 그것들은 새삼 신학적 주제로 구성될 필요조차 없는 것들이요, 종교에 의해서 이미 주어져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제 보프의 외침대로 새로운 필요성이 야기되는데 그것은 신학적인 것으로 제시되지 않은 것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가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경제라든지 정치, 교육 분야와 같은 것에 대한 것이다. 경제적이며 사회적인 과정들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현존과 하나님의 은총을 볼 수 있는 것이 중요함을 그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구원을 언제나 제공해 오셨고 또 언제나 제공하시리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로지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역사를 현재 인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를 신앙한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형이상학적인 지향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지향점이 보프에게서는 분명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인간들의 투신은 명확하게 현실적이며, 그것을 수용하는 것만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올바른 길이라고 설명한다. 바로 이러한 양식으로 실천 지향적인 그리스도론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학을 가치있게 만든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교리적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네 삶에서 구체적인 하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는 것도 종교적인 행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이며 모든 삶의 시간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의 문제로 대두시키고 있다. 그의 하나님 나라와 해방에 대한 신학적 성찰들은 그 특수한 시대의 제한된 공간 내에서 펼쳐진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겸허하게 수용하여, 현재 역사 안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중요성을 확보하는 것에 주력한다면 그의 신학적 외침은 책에서만이 아니라 구체적 삶의 정황 내에서 모든 고난당하는 자들과, 그들의 아픔과 부조리와 가난의 문제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들려질 것이다. B. 한국 교회를 생각하며 한국에 처음 복음이 전파된지도 한세기를 훨씬 지났다. 당연히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사회적 위치와 인식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보프가 지적한 대로 한국 교회는 교회 건물을 건축하고, 신학적인 글(기독론을 포함한)들을 연구하는 작업들은 부지런히 하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거룩성을 이 땅에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인 대형 교회가 교인수를 자랑하고 각종 프로그램들이 홍수처럼 밀려와서 서적과 자료화되어 인터넷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신학적, 신앙적 고백들이 쏟아지고 그에 비판적인 글들이 쏟아지고 있는 현실이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신앙의 실질적인 방향성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한국교회가 교단의 폐쇄성을 높이거나 반대로 서로의 교리를 허무는 작업들만으로는 그것이 한국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성이라고 말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보프의 주장대로 구원에 대한 의식을 가진다거나 신학적인 논의를 전개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는 그리스도신자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은총을 적극적으로 이 땅에 매개하고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준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지상과제는 전체 교회의 신학적 흐름이나 교단간의 형이상학적 문제에 관한 신학적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보프가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이 땅에 선포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당연히 현실의 문제들에 관여하여야 하는 것은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기독교라는 복음 자체가 정치적 차원을 포함하여 인간 생활을 총체적으로 복음화시켜야 할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정의에 대해 목말라 하며 우리 자신의 삶을 통하여 보다 평화롭고 정의로운 인간관계를 수립하는데 기여하며, 폭력과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수단을 제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룩한 분으로 되어지는 것은 억압받는 자들과 나란히 서서 억압의 굴레에서 해방되기 위한 그들의 싸움에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한국교회가 참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교회가 다함께 공유해야 할 신앙의 고백이며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방향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교회 내부를 향한 고백과 방어가 교회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해방하는 은총을 이땅에 이뤄내는 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함께 가져야 할 목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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