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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화 韓國産業技術大學校 産業技術·經營大學院 2006 국내석사
한국사에 있어서 조선 후기는 중세 사회의 완강한 틀 안에서 근대를 지향하는 주목할 만한 변화들이 태동했던 시대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임병(任丙) 양란(兩亂)을 겪은 뒤 백여 년의 세월이 경과한 18세기에 이르면 전후(戰後)의 극심했던 피폐와 혼란도 어느 정도 극복되면서, 농업생산력과 상품 화폐경제의 발전, 민중의 사회적 성장과 민중 문화의 발달 등 근대 지향의 계기를 머금은 새로운 변화들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더불어 청이 대제국으로 발전하여 극도의 융성를 누리는 한편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동점해오던 새로운 국제 정서는 종래의 존명배청주의와 쇄국정책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사태임이 점차로 분면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집권사대부들은 이 같은 시대적 전기를 맞이하여 과감한 개혁에 착수 하기는 커녕, 갈수록 치열한 당쟁을 벌이면서 구태의연한 지배 체제를 고수하기에 급급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은 갖가지 모순과 변동에 직면하여 그 해결점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회 개혁 사상이며 발전적 학문이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의 충돌이 근대를 향한 암중모색으로 나타나던 시대에 오늘날 '실학파(實學派)'라 일컫는 일군의 진보적 문인학자 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실학자들은 전대 학문에만 사로 잡혀 있는 비현실적 태도를 비판하고 경세치용, 이용후생 등의 실용적인 학문 태도로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의식은 민중에게 확산되어 그들의 경제력은 향상되었고, 서민의식이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북학파(이용후생학파)들의 사고는 다분히 도시적이어서 그들의 생활 의식은 당시 소시민에 매우 가까웠으므로 예술을 이해하고 새로운 가치창조에 적극성을 보였다. 이러한 북학파 실학자들의 연행을 통한 서양화의 접촉을 통한 자극이 적지 않게 영향을 미쳤으므로, 조선조의 서학 전래와 북학파의 수용 자세를 검토하고 그들의 실용주의적 미관을 탐구하여 서구의 모더니즘의 실용성과 북학파의 실용적 심미관의 실용성과 유용성의 미관 및 유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 북학파(홍대용, 박지원, 박제가)를 중심으로 그들의 심미관과 또한 실용가치를 지닌 실용적 미관과 그곳에 내재하는 현실성(실용성) 및 북학파의 실용주의적 미관 대해 고찰하고자 하였다. On the Korean history, the later part of ‘Chosun’ is appraised as a periods when remarkable changes intent modernity were quickened in an obstinate formality of the middle ages. Specially from 18th century, passed a lapse of hundred years after suffering two wars the ‘Imjinoaelan’ and ‘Byungjahoran’, with impoverishment and disorder were overcame somewhat, a new changes which bear momentum of intention of modernity such as growth of agriculture production capacity, commodity-monetary economics, social development of the people and people’s culture were raised. With this changes, Ch’ing dynasty possessed utmost prosperity and the fact of a situation of which an international atmosphere which was possessed exclusively by western imperialism is not able to cope with a situation by existing a basis of respect Ming-exclusion the Ch’ing dynasty and a policy of seclusion becoming cleare. Though this status, far from setting a drastic reformation, the gentry of those days who grasping political authority were intent on holding fast to keep his obsolete governing structure doing party strife intensively as time goes on. The ‘Silhak’ of the later part of ‘Chosun’ is a thought of society reform and developmental study which appears in the course of grapping of a way faced various contradictions and changes. With those facts, when the conflict between old and new things revealed a groping in the dark which toward modernity, a group of progressive literary scholars called ‘Silhak’ today. The scholar of ‘Silhak’ criticizeda unrealistic attitude which was possessed with the scholarship of previous generation and started on making approach to realistic attitude like as ‘Kyungsechiyong’ and ‘Yeeyonghuseng’ and the such kind of consciousness was spread to the people, then the economic strength of them was risen and the consciousness provided a opportunity of formation of democratic awareness. So that the thought of ‘Bukhakpa(Yeeyonghusengpa)’ was very much of urban one, their way of life was closed to the lower middle class, so they understood an art and had active posture about creation of new paradigm. Because of a scholar’s impetus from viewing of western painting through a trip to Yanjing influence considerably, I would like to examine on a introduction process of ‘Seohak’ and an attitude of reception of ‘Bukhakpa’ and through a research of their view of estheticism study about their view of estheticism, the thought of ‘Bukhak’ in which practical worth is preserved, actuality (practicality) is immanent in the thought and the practical view of estheticism based onpracticality of western modernism, practicality of practical view of estheticism, estheticism of utility of ‘Bukhakpa’ and Confucian value focused on ‘Bukhakpa’(Hong Dae Yong, Park Ji Won, Park Je Ga).
윤경희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4 국내석사
본 연구는 조선후기 청(淸)나라 사행(使行) 이후에 북학파(北學派) 지식인들의 연행록(燕行錄)에 기록된 복식 자료를 통하여 조선후기 복식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아울러 중국 사행이라는 경험을 통해 북학파 지식인의 복식에 대한 인식이 어떠한 양상으로 변화되는지 그 특성을 분석하고, 조선후기 복식 제도의 변화에 끼친 영향에 대해 다루었다. 연구 방법은 일차적으로 조선 후기 새로운 사상체계의 접근과 문화융성기에 기록된 북학파의 연행록 8편을 중심으로 복식 관련 내용을 파악하는 간접 고찰 방법을 사용하였다. 관련 자료로써 경국대전(經國大典) 및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같은 문헌과 각종 문집류, 그리고 유사 시기의 회화자료를 활용하였다. 이를 통하여 북학파 지식인들의 복식관 변화의 추이를 살펴보고, 이후 복식제도에 미친 영향에 대해 파악하였다. 북학파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파(流派)속에서 탄생하였으며, 북학파 지식인들의 사상적 기반을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었던 중요한 경로는 부경사행(赴京使行)을 통한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부경사행을 통한 경험을 기록한 북학파 연행록은 외교관계ㆍ문물제도ㆍ생활양식ㆍ문학교류ㆍ견문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조선을 비롯한 청나라와 기타민족의 관복 뿐 아니라 일반 복식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남자복식 중 관복에서 사절단의 조복(朝服) 착용에 대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으며, 단령(團領)으로 표현되는 공복(公服)ㆍ상복(常服)ㆍ시복(時服)을 착용한 기록이 있다. 각각의 구성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사신(使臣)과 역관(譯官)이 단령을 기본으로 사모(紗帽)ㆍ오모(烏帽)ㆍ모대(帽帶)ㆍ복두(幞頭)를 착용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융복(戎服)과 군복(軍服)은 군관(軍官)을 비롯한 다양한 직분에서 착용하였는데, 융복은 무관(武官)이 착용하다가 사신이 문관(文官)으로 바뀌면서 문관은 융복을, 무관은 군복을 착용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국경 안에서는 융복을 착용하고 청나라의 국경으로 들어가면 군복으로 바꾸어 입었다. 편복(便服)은 사행 의식 절차에 따른 공무 이외에 숙소에 머무르거나 평상시에 착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편복으로는 도포(道袍)와 중치막(中致莫)의 착용이 나타난다. 박지원의 기록을 통하여 심의(深衣)에 대한 인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조선의 여자 복식은 18세기 후반 여자 예복에 관한 의견을 정리해 놓았다. 청을 비롯한 타민족의 복식에 대한 기록에서는 사행에 참여한 신분에 따라 그 기록의 특징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다. 객관적인 복식의 묘사를 통해 다른 민족의 복식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경우와 복식의 묘사와 함께 그에 따른 본인들의 의견을 기록하는 경우가 있다. 북학파 지식인들은 청나라의 복식에 대해서 그동안 전통적 윤리 관념으로 자리 잡았던 화이론(華夷論)적 관점에서 청의 복식을 바라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사행을 통하여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청나라 지식인들과의 교유를 통한 복식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 대한 인식의 확장은 그들에게 중요한 경험이 되었다. 북학파 지식인들의 자발적인 복식 인식의 전환은 전통 성리학적 복식관(服飾觀)과는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였다. 따라서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복식 개정에 대해 주장하고, 19세기 후반 고종의 의제개혁을 통하여 제도의 개정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서구 열강의 문호개방 요구와 일본의 침략 등 당시 시대적 상황에 의해 그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또한 조선 사절단이 착용한 관복은 18세기 전후의 관복제도가 반영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북학파 연행록에 기록된 복식에 대한 내용과 청나라에서 제작된 사행기록화의 조선 사절단 복식이 차이가 보이는 사례도 확인되었다.
임명걸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3 국내박사
본 논문은 18세기 후반기 북학파 지식인들의 연행록을 중심으로 그 속에 반영된 실학(북학)정신을 살펴보았다. 18세기 북학파 지식인들은 연행을 통해 실학의 논리와 사유를 보다 구체화시켰고 이러한 점들은 그들이 남긴 ‘연행록’에 적실하게 담겨져 있다. 그런 점에서 북학파 연행록은 연행 주체들의 내면세계를 담아낸 기록물이라는 특징도 함께 지니고 있는 셈이다. 北學의 탄생과 발전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집단 지성과 같은 그룹의 예지를 바탕으로 산생되고, 그 산생의 밑거름은 연행이 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를테면 燕巖 朴趾源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그룹 혹은 流派 속에서 탄생한 북학과 북학파는 기본적으로 燕行과 깊은 관련성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북학파의 연행록 역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이를 종합해서 파악해야 그 실상에 다가설 수 있으므로 앞에 그들이 남긴 연행록을 하나로 묶어 고찰하였다. 기존 연구는 주로 한 개인의 연행록으로 들여다보거나, 단지 개별 연행록 작품을 주목한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북학파 지식인이 남긴 연행록을 18세기 후반기 조선 사상사의 한 획을 그은 북학파의 집단 지성이 일구어낸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였다. 이 점에 착안하여 본고는 연암 그룹의 대표적 인물들인 燕巖 朴趾源, 湛軒 洪大容, 靑莊館 李德懋, 楚亭 朴齊家, 泠齋 柳得恭, 綸菴 李喜經 등의 연행록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그들의 북학정신이 연행록에 어떻게 구현되는지 살펴보았다. 북학파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이용후생의 사안을 상호 토론과 학문적 교류를 통하여 상호 소통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행에서의 견문지식과 체험을 공유한 바 있었다. 무엇보다 북학파 지식인은 연행록에서 집단적 관심을 보인 북학의 諸문제를 고스란히 담아내어 공통 사항을 보다 예리하고 논리적으로 심화시킨 바 있었다. 이는 평소 그룹을 통해 지닌 공통의 사유방식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연행 체험에서 평소의 사유와 논리를 구체화시킨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북학파 지식인들은 연행록을 통해 북학정신의 구현이라는 동일한 토대를 구축하면서도 각자의 출신과 신분, 성장배경 등의 차이로 하여 연행 체험을 담은 기록에서 다른 특징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북학파 연행록이 보여주는 특징이기도 하지만, 북학 혹은 이용후생을 통해 자국을 혁신시키려 한 방향에서 어긋나지는 않는다. 본고는 각기 다른 결을 담고 있는 북학파의 연행록의 각 특징을 거론하면서도 가능하면 하나의 사상 그룹, 유파로서 그들 북학파들의 연행록에 나타나는 북학정신의 기본적인 흐름을 읽어내려고 하였다. Ⅱ장에서는 18세기 전반에 거치는 연행록의 실체를 통시적으로 살펴보았고 담헌 홍대용의 연행록을 기점으로 하는 후기 연행록 즉 북학파의 연행록이 18세기 전반기 연행록과 어떤 차별화를 보이는지 살펴보았다. 북학파의 연행록은 18세기 전반기의 연행록에 비해 작자층과 문체형식의 변화, 연행록에 기록된 내용에서 뚜렷한 변별성을 보였다. 북학파 지식인들의 연행록은 기존의 연행록에 비해 작자층이 대부분 삼사가 아닌 수행원으로서 연행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여유 있게 중국을 다방면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형식적인 특징에 있어서도 기존의 일록형식 위주의 연행록에 비해 다양한 형식을 도입하였는데, 잡지체, 기전체, 일기체 등이다. 내용상에서 북학파 지식인들은 기존의 청조에 대한 부정일변도의 시각에서 벗어나 조선사회에 대한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발전된 청나라의 문물과 선진기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중국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였고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Ⅲ장에서는 북학파 연행록에 대한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분석을 통해 그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북학정신이 어떻게 연행체험을 통해 검증되고 재확인 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때 연행의 과정과 그 체험은 그들의 북학정신이 청나라의 실상을 통해 재확인되고 논리적 근거를 획득하는 현장체험의 장이 되었다. 북학파의 이러한 연행 자세와 기록의 방향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관찰의 자세와 열린 시선이다. 북학파들은 연행 이전에 각종 서적에서 얻은 정보와 지식들을 연행과정에서 직접적인 체험과 관찰을 통해 실증하고 재확인하고자 하였으며, 특히 선진적인 문물에 대해서는 최대한 자세히 관찰하고 설명함으로써 선진적이고 우수한 문물을 조선에 소개하고 나아가서는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용하고자 하였다. 다른 하나는 실사구시의 태도와 개방성으로 볼 수 있다. ‘북학’파 등장 이전의 조선 지식인들의 청나라에 대한 인식은 ‘북벌’론의 영향 하에 선입견의 작용으로 굉장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이었다면, ‘북학파’들은 청에 대해 무조건 부정이 아니라 실사구시의 자세로 청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 사실을 왜곡 없이 인식하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합리적 타자인식과 객관성으로 볼 수 있다. 북학파 지식인들은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과 기술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수용하여 낙후한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는 것을 연행의 주요한 목적으로 삼고 있었지만, 중국의 문물과 풍속을 있는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표준으로 그것의 장, 단점을 분석하고 최대한 합리적으로 인식하고자 하였다. Ⅳ장에서는 북학파 연행록의 글쓰기 방식에 대해서 살피고 새로운 지식과 다양한 정보의 유통과 학계에 남긴 충격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들의 글쓰기 전략은 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그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하나는 비평방식을 통한 지식 ․ 정보의 제시이다. 비평 방식을 통한 글쓰기는 청나라의 문물이나 문화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연행한 실학자의 시각과 비평을 통해 분석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게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글쓰기 전략을 가리킨다. 그 와중에 비판적인 것을 거쳐 조선 현실에 어울리는 방향에서 논하는 것이 있을 수 있고, 청나라와 조선의 사례를 비교함으로써 더 좋은 것을 수용하려는 것이 있을 수 있으며, 비평자의 안목을 통과하면서 다소 원래 내용과 바뀌거나 굴절되어 수용되는 경우 등 여러 가지 방식이 나타난다. 이런 글쓰기는 비평의 과정을 통해 자국의 실정에 맞게 청나라의 선진적인 문물이나 지식, 정보를 제시함으로써 그 수용과정이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과정이 될 수 있도록 독자들에게 비판적 안목을 키워주는데 그 장점이 있다. 다른 하나는 탐문을 통한 북학의 구현이다. 조정에서 연행 중에 꼭 수행해야 할 특별한 명이 있을 경우 그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단히 탐문을 하여 맡은바 임무를 수행하는데, 그 결과에 대해서만 기록하여 글의 내용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탐문 과정을 중심으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마지막으로 북학파 연행록의 가장 대표적이고 전형적인 글쓰기 전략으로 필담과 대화를 통한 타문물의 수용을 들 수 있다. 이는 18세기 북학파의 연행록이 연행 체험을 통해 청나라와 외국의 선진 문물과 기술을 수용하여 조선의 낙후된 현실을 개혁하고자 했던 뚜렷한 목적과 의식을 가진 글쓰기였던 것으로부터 연유한다. 이 과정에서 필담은 주로 청나라의 관리, 문인, 서양 선교사 등과 새로운 문물의 원리, 사용방법, 특징 등을 물어보는 담화 형식으로 나타나며 대화는 주로 조선인과의 문답형 교류를 통해 청나라와 외국의 새로운 문물과 조선의 것을 비교하고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에 대해 설명하고 그 우수성에 대해 설득하면서 그것의 수용을 주장하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이 논문은 집단 지성으로서의 북학파의 그룹 내지 유파적 성격에 주목하여 연행체험과 북학사상의 공유라는 측면에서 그들의 연행록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공유된 체험과 사상이 주로 다뤄졌으며 그 기본적인 흐름에서 이탈하는 미세한 가닥의 차이에 대해서는 세밀한 분석을 진행하지 못했다. 이는 이후의 작업으로 미룬다.
박병욱 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2003 국내석사
조선후기의 연행사절을 통한 교류는 대청외교의 유일한 통로였다, 따라서 연행사절들이 귀국 후 자신들의 견문을 기록한 연행기는 당시 조선 사회에서 대청 인식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또한 연행기에 기록된 내용을 분석해 보면 기록자의 사상적 경향과 시대 인식을 확인할 수도 있다. 本稿서는 이러한 점에 주의하며 북학파의 시대인식과 사상적 경향이 연행 경험을 통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그들의 연행 기록을 통해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럼으로써 연행경험이 북학파의 성격규정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본고의 주제이다. 북학파는 18세기 후반의 조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하며 활동하였던 학파이다. 이들은 당시 날로 번성하던 상공업을 중심으로 국가 경제를 발달시켜 한다는 점에서 '중상주의 학파'라고 불리웠다. 또한 백성들의 실제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각종 도구 및 제도의 개선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이용후생 학파'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定義는 이들이 추구하는 사회 발전의 중심이 종래의 주자학적인 관점에서 벗어나 상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經世觀을 가졌다는 점에 주목하여 성립한 것이다. 그래서 이들 학파의 가장 큰 특징은 이용후생과 관련된 제도 및 기구의 제작 파 적용을 강조한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당시 선진적이라고 생각하였던 중국을 주목하였다. 중국의 제도와 각종 기구를 직접 경험하고 확인하며 그 중 우리에게 적합한 것을 적용시키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대부분 燕行을 열망했고 실제로 중국을 다녀왔다. 그들의 燕行은 각 개인이 처한 입장과 관점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었지만 그들 자신이 국내에서 연구하였던 학문의 정당성을 확인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였다. 그 결과 비교적 충실한 주자학자였던 洪大容은 연행 이후 점차 陽明學을 비롯한 타 학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허용적이고 긍정적인 입장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만년에 가서는 多元主義的 세계관과 相對主義的 문화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朴趾原은 연행 이전에는 활발한 문예활동을 통해 사회적 비리와 지배층의 부도덕을 비판하고 풍자하던 지식인이었다. 그런 그가 연행을 통해 당시 중국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본 뒤에는 종래의 전통적 경세관인 지배층 위주의 正德보다 피 지배층 위주의 利用과 厚生에 필요한 학문의 필요성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연행 이후 중국에서 경험하고 확인했던 이용후생파 관련된 각종 제도 와 도구의 제작 사용과 보급에 적극 노력하는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바뀌어 갔다. 또 다른 북학파인 朴齊家는 燕行 이전부터 이용후생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燕行은 이러한 관심을 실제로 확인하고 體得함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그의 주장의 정당성을 연행에서 확인한 다양한 사례를 통해 제시함으로써 시급히 국가의 발전을 위한 대책으로 채택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북학파에게 있어서 燕行은 그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변화를 수반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즉, 燕行 이전의 북학파가 단순히 이용후생과 관련된 이론적 모색과 방안의 도출에 노력하는 집단이었다면 燕行 이후는 자신들이 중국에서 경험하고 확인한 이용후생의 도구와 제도의 적용 및 실천에 노력하는 집단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 변화는 중국에서의 경험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燕行을 검토할 때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그들이 燕行 이전에 이미 이용후생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이론적 준비는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이론적 작업의 결과로서 燕行을 추구하였고 燕行을 통해 더욱 실천의 필요성과 사례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燕行경험을 기록한 燕行錄은 이전의 많은 燕行과는 다른 시각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反響을 일으켰다. 그 결과 중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이용후생에 관련된 다양한 활동이 보다 많은 이들에게 확대되어 나가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The Bukhakpa(The school of Northern Studies) is a group of scholars who played positive roles in innovating the society of Joseon dynasty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group was also called "the School of Mercantilism" in that they maintained the development of the national economy centering on commerce and industry. They were also referred to as "the School of Utility and Welfare" in that they searched for the development of all ale devices and institutions to improve the practical quality of life of people. The school was described with all the names owing to the new views of world-administration, which emphasized on commerce and industry instead of Jujahak, a Chinese philosophy founded by Zhu-zi. From the beginning they were engaged in many types of thoughts and academic studies concerning utility and welfare, instead of the subjects for the National Examination, which was the general intellectuals' final goal of study, Such a movement came to its zenith in the 1770s. In this period of lime, the individual movements of the scholars of the school came to have a common denominator. The greatest characteristic of this school was that the members emphasized the production and application of the institutions and devices concerning "utility and welfare." In such a point of view they paid attention to China, which they thought was an advanced country in those days. They meant to experience and identify all the institutions and devices in China and then have those suitable to our situation applied to our life. Thus most of the scholars in the school were eager for the journey to China, and had been there in practice. Thus their journey to China was of diverse significance according to the individual situations and points of view, it had become a precious opportunity for them to justify them study in Joseon. As a result, Hong Dae-yong, one of the faithful scholars in the line of Zhu-zi's philosophy, came to enlarge his capacity of thought through diverse discussions and academic exchanges with the three scholars he had made friends with during his stay in China. After returning to Joseon, he came to take a permissive and positive attitude towards the other fields of scholarship, such as Yang-ming philosophy, Subsequently, in his later ages, he had a pluralistic world-view and relativistic cultural consciousness. As for Park Ji-won, before his journey to China, he was a satirical intellectual who criticized the corruption of society and immorality of the upper class through his active literary works. However, after his journey to China, he was sure of ale necessity of the scholarship of the Utility and Welfare being of service to the lower class, not that of the Right Virtue for the upper class. After his journey, instead of being engaged in literary works, he, as a practical intellectual, became indulged in the production and utilization of all the institutions and devices for the Utility and Welfare that he experienced and identified during his stay in China and their distributions. Park Je-ga, another member of the school, had great interest in the Utility and Welfare before his journey to China. Thus, for him, his journey had become a chance to identify and experience his interest, embodying his faith. He especially emphasized the promotion of commerce and industry, which was an epochal argument totally different from the previous economic-view based on Zhu-zi's philosophy, philosophy. Furthermore, he tried to justify his arguments by presenting diverse examples he experienced during his journey to China, so that they could be adopted as the plans for the development of the country. As such, the journey to China became a critical opportunity for the scholars in the school of Northern Studies, which brought about the changes in their thoughts and actions. That is, before their journey to China, the scholars in the school were a group of scholars who were groping for the theoretical methodologies for the principle of Utility and Welfare, but after their journey, they had changed into the ones who tired to apply and practice in real life all the institutions and devices concerning Utility and Welfare that they experienced and identified during their journey to China. And for the change their experience in China had critical influence. However, what ought to be premised in the study of their journey to China is that the scholars had already been equipped with theoretical foundation to adopt principle of Utility and Welfare long before they had the journey. The journey itself was a practical result of the theoretical preparation, reinforcing the necessity and examples of the practice. The book Yeon-Haeng Rhok(A Record of the Journey to China), which had been written from the diverse points of view of diverse people, had great influence in many people. As a result, the book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spreading the changes in the attitudes towards China and diverse activities concerning the principle of Utility and Welfare among the multitude of Public.
This study traces prose spirit and prose style of a literary sketch of Yeonam(燕巖) Pack Ji-weon and Hyungam(炯菴) Lee Deok-mu who belonged to the Northern School. In the second chapter, the background of prose style of a literary sketch of Northern School is discussed. The style of the Northern School in the latter period of Choseon Dynasty was the object of the movement toward an ancient style(文體反正), because it was thought to get influenced by the literary sketch of Ming(明) Dynasty. The argument about the literary sketch at the period of the movement toward an ancient style, the tendency of literary circles at the end of Ming Dynasty, and Lee ji(李贄) and Kong-an School's(公安派) literary theory are traced. In the third chapter, prose spirit related to the prose style of a literary sketch is traced, focusing on Yeonam and Hyungam's literary theory revealed in Preface(序). Their prose spirit is composed of relative Sipoun theory(相對的 時變論), that is, the cognition of object changes depending on time, creative personality theory(獨創的 個性論), and truth in child's mind theory(童心的 眞實論). They are connected to each other consistently. In the fourth chapter, texts are analysed. By analysing Yeonam and Hyungam's ‘Narrative’(記) and 'Epistle’(書), the fact that the prose spirit discussed in the third chapter is consistently dominant in their books is revealed.
하태일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1983 국내석사
After 18th century, Li Yong ( 利用厚生 ) of Bug-Hag theory scholars appeared. They tried to solve problem of the contradiction in the society of the late of Yi-Dynasty period, through the economical prosperity on the commercial and industrial development, though we've much studied so far on the Bug-Hag theory. There was little case of studing the economical theory of Bag Gi-Won and Bag Je-Ga who we thought were the center figures of Bug-Hag theory scholars. The purpose of this study, therefore, is to understand more clearly the thought of these two figures, relating Bag Gi-Wan's economical side with Ba Je-Ga's on the basis of the academic achievement of the scholars in the past,and through this make the shift to approach more closely the ideological current of Bug-Hag school. They that economical stagnation of Yi-Dynasty was due to, the rejection on the basis of Hwa-I theory( 華夷論 ) of Cheung's culture(淸文化), the backwardness of appliances and technics and the weakness of economical circulation. And their views of Cheung's Dynasty attached more importance to the cultural relation than political relation. While Bag Gin tried to introduce Cheung's culture in the harmony of reality and justification, Bag Je-Ga tried to introduce it in the standpoint of reality rather than justification. They also emphasized that people should take advantage of cars(車) boats(舟)-bricks(벽),and people should improve the agricultural instruments, in order to rise the standard of people's livings,and that in measures for the promotion of the economical circulation, car and boats affected much to that. So insufficient finance, though. we make up for all the industries of Yi-Dynasty should be compensnated for overseas trades, they said, and the watch for the state of unbalanced trades because of the outflow of silver was l the to the modern economical policy. While Bag Gi-Won insisted all the indusries to be developed equally but had no perfect thought in developing the commerce as well as the agriculture, Bag Je-Ga indicated the justifcation of thecommerce, saying the want of public welfare would increase without the commerce, and insisted that superfluous aristocracy class should be engaged in the commerce for a means of livings. Such faced insistence at that time must be daring challenge as well as bold means of revolution. Their economic theory of Hug-flag school, there fore, was transformed the thought of civilization an(i seemed to have a great influence on continuing to formulate a modern thought.
문호주 東亞大學校 經營大學院 1989 국내석사
This article is a study of the economic thought of Bug-hak School esteemimg commercial in the latter of Chosun dynasty. So to speak, this is to study the significance and content of their thought and value of the thought. The construction of the article is made of 5 chapters. Chapter 1 is an introduction and the aim, way and scope of study of this article are described. Chapter 2 researches commercial esteening economic thought of Sil-hak. Sil-hak is a thought extending from the middle of the 17th century to the 19th century centering the 18th century-the latter of Chosun dynasty. The economic point of view of Sil-hak School not only emphsize commerce and manufacturing industry as the important branches of industry but also require a balanced development of commerce and industry. They stressed that Yang-ban-the two upper class of old Korea, especially in Chosun dynasty should engage in commerce to develope commerce and industry and insisted upon formation of commercial capital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regular stores. The function of money was affirmative and they suggested progressive theories about it. Chapter 3 is commercial esteeming economic thought of Bug-hak School. Bug-hak School was a group of scholars who studied the civilization of Ch'ing-china in the middle of the 18th century and then suggested applying it to industry of Chosun dynasty. Park Chi-won and Park Che-ga were the representative scholars of Bug-hak School and esteemed commercial. Park Chi-won emphasized the execution of free commerce and foreign trade by wagon and ship. Also insisted the balance of price and the good circulation of goods through the currency stabilization. Park Che-ga rejected the feudal status system and stressed superiority of commerce. He gave weight to the smoothness of production and circulation and foreign trade, his thought accorded with the western mercantile thought more or less. He proposed technical renovation such as building up road and bridge, using wagon and ship. It is the same kind of economic development policy of today using the social overhead capital. Chapter 4 is a study about the limit of political reflection and influence of the thought of Bug-hak School. Though the economic thought of the School was based upon the immediate and reasonable request of common people in the latter period of Chosun dynasty, it was not reflected in policy because of contradictory profit of the upper party in power. However, it was succeeded to the economic thought of the reformatory party and showed the basic theory to promote the modernization. Chapter 5 is a conclusion. The economic thought of Bug-hak School were planned to develope commerce and industry and to reform the indeveloped society of Chosun dynasty. Though their judgement was modernistic, it was not accepted in the feudal Chosun dynasty and was not practiced into the the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