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학위유형
        • 주제분류
        • 수여기관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지도교수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현대 역사학의 고전, 마르크 블로크의 [봉건사회]

        심갑수 건양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석사

        RANK : 248700

        고전이란 무엇인가? 일반적 의미에서 고전은 오래된 책이지만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의미 뿐만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회와 세계를 이해하는데 한줄기 빛을 던져주는 책이다. 또한 고전은 인류 지성사의 보고이자 연구가치가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시대를 변화시키고 한 사회를 도약하게 하며 지적 기반을 견고하게 하는 상당한 토대’를 또한 고전이라 한다면, 출간되자마자 당대 학문계의 저명한 학자들의 다양한 논평을 이끌어내고 그들의 후속 연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마르크 블로크의 󰡔봉건사회󰡕는 충분히 현대 역사학의 고전으로 불릴 만하다. 󰡔봉건사회󰡕는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역사가인 블로크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위대한 역사가였음을 증명해 준다. 󰡔봉건사회󰡕는 출간되자마자 역사학자와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대단히 다양한 반응을 낳았고,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점에서 󰡔봉건사회󰡕는 현대 역사학의 고전이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관이 가장 잘 반영된 저서이자 “행동하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명성을 부동의 것으로 만든 현대의 영원한 고전 󰡔봉건사회󰡕를 교양대중의 시각에서 다시 읽어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1세대에서 4세대에 이르는 아날학파의 역사세계를 살펴보았고 그 토대위에서 아날의 공동창시자이자 1세대였던 블로크의 역사세계를 고찰하였다. 아울러 마르크 블로크의 역사관의 집합체이자 그의 명성을 부동의 것으로 굳히는데 기여했던 우리 시대의 영원한 고전 󰡔봉건사회󰡕의 서술 및 서지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나아가 ‘사회환경’과 ‘당시 정신상태와 관련한 농민층의 종속’을 중심으로 󰡔봉건사회󰡕의 내용을 분석한 다음 󰡔봉건사회󰡕 출판 이후 나타났던 현대 역사학계의 다양한 반응들을 살펴보았다. 20세기 역사학의 흐름에 있어 획기적인 한 장을 장식했던 아날학파의 창시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50이 넘은 나이임에도 자원입대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다 사망한 실천적 지식인, 바로 이러한 마르크 블로크의 명성은 오늘날 역사를 전공하는 이들의 강의실에서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도 더 이상 생소한 것이 아니다. 1886년-1944년이라는 역사의 격동기를 살아가며 역사는 인간을 위한 것이고 역사를 쓰는 것은 현재의 인간을 위한 것임을 보여주었던 그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의 삶과 학문에 매료된 이 시대의 많은 대중 독자들이 역사학의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역사학에 지대한 관심을 표하기도 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실임을 떠 올린다면 블로크의 󰡔봉건사회󰡕는 충분히 현대 역사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What is a classic? In a general sense, a classic is an old book, but it is still ‘living’. It is a book that throws a ray of light in understanding the society and world of ‘now’ and ‘here’ as well as the meaning of life for us living in the modern age. Classics are also a treasure trove of human intellectual history and a book worth researching. However, if ‘a significant foundation that changes an era, makes a leap in a society, and solidifies an intellectual foundation’ is also a classic, it drew various comments from prominent scholars in the contemporary academic circles as soon as it was published and had a profound influence on their subsequent research. Marc Bloch's ‘La société féodal’ deserves to be called a classic of modern history. ‘La société féodal’ proves that Blok, a representative European historian in the 20th century, was a great historian, transcending time and place. As soon as ‘La société féodal’ was published, it provoked a wide variety of reactions among historians and social scientists, and it is still the case today. In this respect, ‘La société féodal’' can be said to be a classic of modern history. In this thesis, based on the existing research, I would like to re-read the modern classic 〈La société féodal’〉, a book that best reflects Marc Bloch's view of history and that made his reputation as a "practical intellectual in action" immovabl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educated public. To this end, the historical world of the Anal School from the 1st to the 4th generation was examined first, and on that basis, the historical world of Block, the co-founder of Anal and the 1st generation, was examined. In addition, the narrative and bibliographic background of Marc Blok's historical view and the eternal classic of our time, which contributed to solidifying his reputation as immovable, were examined. Furthermore, after analyzing the contents of 'Feudal Society', focusing on 'social environment' and 'subordination of the peasant class in relation to the mental state of the time', various reactions of modern historical academia after the publication of ‘La société féodal’' were examined. The founder of the Anal School, which marked a landmark in the history of the 20th century, and a practical intellectual who died while volunteering for the resistance activities during World War II despite being over 50, Marc Blok's fame is today's history. It is no longer unfamiliar to the general public as well as to the classrooms of those majoring in computer science. Living in the turbulent period of history from 1886 to 1944, remembering that he showed that history is for humans and writing history is for humans today, many popular readers of this era, fascinated by his life and studies, If we recall that today's fact that some people have entered the road and expressed great interest in history studies, Blok's ‘La sociétéféodal’ is sufficiently established as a classic of modern history.

      • 1920년대 한·중 지식인 소설의 사회 형상화 연구 : 현진건과 욱달부(郁達夫)의 소설을 중심으로

        ZHAI YUE 경희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석사

        RANK : 248669

        본 논문은 1920년대 현진건과 욱달부(郁達夫)의 소설을 통해 당시의 조선과 중국의 사회 양상을 규명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시대 배경으로 1920년대의 한국과 중국은 모두 일제의 억압을 받아 봉건사회에 처하고 있는 시기이며 양국의 문인들은 각자 자기의 방식으로 구국 운동을 하였다. 성장 배경으로 현진건과 욱달부는 모두 구식 혼인을 하여 일본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으며 일본에서 새로운 문학 사조의 영향을 받아 귀국한 후에 '사소설'을 많이 창작하였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 다루는 현진건과 욱달부의 소설은 동일 영역의 범주에서 논의가 가능해진다. 본 논문은 현진건의 작품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 그리고 욱달부의 「조라행(蔦蘿行)」, 「찬바람 속에서(在寒風里)」를 중심으로 비교연구를 진행하겠다. 기존의 연구를 참고하면서 평행연구 방법으로 이상 네 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지식인층의 시각으로 보는 1920년대의 조선과 중국의 사회 양상을 비교하여 제시하는 것은 본 연구의 의의이다. 논문은 제 1장 서론, 제 2장 현진건과 욱달부의 소설에 대한 예비적 검토, 제 3장 지식인 소설과 1920년대의 한중사회, 마지막 제 4장은 결론과 참고문헌, 총 다섯 부분을 나누었다. 제 1장 서론 부분은 문제 제기, 선행 연구 검토, 그리고 연구의 시각 및 연구 대상을 제시하였으며, 제 2장 현진건과 욱달부의 예비적 검토에서 소설의 창작 배경과 줄거리를 결합하여 소개하였다. 제 3장은 논문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제 3장의 주제는 지식인 소설과 1920년대 한중사회를 제목으로 잡고 네 부분을 나누어져 있다. 3장 1절은 구성 분석 및 비교이다. 3장 1절에서 현진건과 욱달부의 소설에서 실제와 허구한 부분을 분석하였고 소설에서 실제와 허구를 결합한 구성은 1920년대의 가난한 실상과 봉건사회의 부부 사이를 더 충실하게 보여주었다. 3장 2절은 기법 분석 및 비교이다. 내용 분석에서 심리 세계의 묘사와 대화 장면의 서사로 나누었고 이 부분에서 1920년대의 남녀관계와 지식인 남편의 양상을 분석하였다. 3장 3절은 인물 분석 및 비교이다. 이 부분에서 구체적으로 봉건사회 하의 지식인 남편과 구여성 아내의 남녀관계를 토론하였다. 3장 4절은 주제 분석 및 비교이다. 이 부분은 주인공 남편의 지식인 양상과 두 작가의 정치적 모순, 사회적 모순을 결합하여 소설의 주제 분석을 진행하였다. 제 4장 결론은 두 부분을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봉건사회 하의 남녀관계이다. 1920년대의 지식인은 외국에서 신사조의 영향을 받고 새로운 지식을 섭취하였지만 봉건사상이 여전히 마음속 깊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가부장 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사회의 경우, 한편은 지식인 남편이 책임감이 약하고, 다른 한편은 남존여비(男尊女卑), 남주여종(男主女從) 등 사상의 영향이 심하였다. 둘째는 1920년대의 사회와 지식인의 관계를 제시하였다. 하나는 당시의 지식인은 사회에서 도피하려고 하였고, 다른 하나는 1920년대의 사회에서 일제나 조국을 배신하는 사람이나 다른 현실 문제의 원인으로 지식인이 자기의 포부를 실현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사회를 거부하거나 사회에서 거부를 당하였다. 작가는 이 부분을 통해 사회의 암흑면과 불평을 폭로하였다. 현진건과 욱달부는 1920년대 한국과 중국의 어둡고 불평등한 사회적 현실과 가부장제로 억압받는 여성의 현실을 형상화하였다는 것이 본 논문의 연구 결과이다.

      • 10~12세기 프랑스 리무쟁 지역 귀족사회의 재편

        차승현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박사

        RANK : 248639

        루도비쿠스 1세 때부터 시작된 카롤루스 왕가의 갈등으로 인해 아키텐의 분리주의적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아키텐 왕국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내정에 간섭하려던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대머리왕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결과 9세기 후반의 아키텐은 ‘왕국’에서 ‘공국’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원래 왕권을 대리하던 아키텐의 대귀족들은 오랜 내전으로 왕가의 정통성과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다수의 백령들을 병합했으며, 관직 및 토지 분배를 통해 토착 귀족을 길들이고 이들을 부백으로 삼아 각 지방을 다스렸다. 서프랑크 왕으로부터 ‘아키텐 공’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완벽한 왕권을 사용했던 경건공 기욤은 리모주 백령을 장악하고 카롤루스 대머리왕의 가신이었던 일드베르를 첫번째 리모주 부백으로 임명했으며, 여타의 리무쟁 부백들도 아키텐 공으로부터 부여 받은 권력, 그리고 결혼을 통해 확보한 인적 관계망 및 토지를 활용하면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리무쟁에서는 1000년을 전후하여 구체제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폭력의 증가 현상이 나타났으며 주교들은 무기력한 왕권을 대신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세속 귀족들의 부당한 간섭과 침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의 평화’ 운동을 개시했는데, 이는 공권력이 해체되고 성주와 기사들이 득세하는 성주령의 시대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리무쟁의 봉건적 주종 관계는 1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군소 귀족들은 리모주 부백에게 종속되었던 반면, 유력 봉신들은 부백과의 관계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그리고 11~12세기 초반의 리모주 부백들 역시 주군이었던 아키텐 공과 느슨하게 연결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통해 아키텐 공을 겸하게 된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는 리모주 부백 가문의 계승 문제에 차례로 간섭하면서 리무쟁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한편 헨리 2세와 그의 아들 리처드가 노골적으로 추진했던 중앙집권화 정책을 위협으로 받아들인 리무쟁 및 인근의 주요 귀족들은 12세기 후반 내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의 저항은 관습을 통해 존중되어 오던 기존 관계가 일방적으로 파기된 것을 항의하는 정치적 제스쳐였으며, 군주권이 강화되던 시기에 제후와 지역 귀족들 간의 관계를 재정의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10~12세기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겪은 리무쟁의 귀족들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낙오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가족 구조를 변화시켰다. 1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두 이름 체계에서 식별 기능을 담당했던 첫번째 구성 요소는 ‘개인 이름’이 되었으며 가족의 수장은 집안 고유의 특정한 이름을 장남에게 부여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의 책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공표했다. 차남의 개인 이름 역시 어느 정도 제한된 이름 창고를 활용했던 반면 딸을 위한 가문 고유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는 11세기부터 여성을 배제한 남성 우위의 가족 구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성(姓)으로 발전한 이름의 두번째 요소는 해당 가문이 보유한 성채나 영지의 이름을 활용하거나 시조의 이름 또는 별명을 사용함으로써 가문의 표지가 되었다. 이처럼 개인 이름과 성 모두 리무쟁 귀족들의 친족 구조가 11세기부터 장남을 중심으로 재편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름의 전달 관행에서 드러난 장남 우위의 가족 체계는 장자상속제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11세기 중반까지는 엄격한 부계 친족 구조를 도입하지 않고 양계제적 상속 원칙을 활용했는데, 이는 가산의 공동 상속, 여성의 토지 상속, 부백 칭호의 공동 보유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2세기에는 장남이 모든 가산을 장악했으며 차남 이하의 아들과 딸은 원칙적으로 배제되었다. 한편 결혼은 권력과 재산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갈등을 종식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은 다양한 전략을 활용하여 장남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처럼 장자 상속제와 결혼 전략을 통해 수평적이었던 가족 구조가 수직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구성원들은 가문 의식을 체화했다. 리무쟁의 주요 가문들은 특정 수도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조상들의 영혼 구제를 부탁했고, 그 대가로 증여를 받은 수도사들은 망자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정기적인 기도를 통해 추모를 이어갔다. 특히 가문의 유구한 역사 그 자체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얻기 원했던 유력한 귀족들은 기록에 의존하여 더 오래된 과거를 기억하고자 했다. 따라서 구전과 기록을 모두 이용하여 가계도를 재구성한 족보는 가문 의식의 강화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가 되었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