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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제고를 위한 성찬의 활용 가능성 연구

        최재룡 한일장신대학교 아시아태평양국제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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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및 그 제고를 위한 과제 한국교회는 대단히 풍부한 선교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선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교회의 선교자원들은 바르게 정렬되어 있지 못하다.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의 선교자원은 풍부하나 한국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은 대단히 미약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뿌리깊은 반공성과 사회성 결여, 그리고 분열상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형성된 에큐메니칼 진영이 성장하면서 1980년대와 그 후에 이르러 한반도 평화의 진전에 크게 기여한 바가 있지만, 기본적 선교 자원의 부족으로 한계에 다달아 있다. 오히려 대다수의 선교자원은 뿌리깊은 반공성으로 인해 한반도 평화실현의 과제에 있어 역행 양상을 보이고 있는 보수적 복음주의 진영에 축적되어 있다. 이 둘 사이의 분열관계가 한국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제고를 위해서는 몇 가지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진영의 양적 성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진보적인 교회는 양적 성장을 이루어야 하고, 한반도 평화 문제를 선교적 과제로 인식하고 있으나 보수적인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자신이 사역하고 있는 개교회 내에서 선교적 방향 전환을 이룸으로써 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평화지향성과 평화 실현체로서의 사회적 공인을 얻어 내야 한다. 교회의 사회성을 보다 깊이 인식하고 민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선교활동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이룰 위해서는 선교신학적 방향전환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적 정체성만이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과 인류공동체척 정체성을 자각하고 아울러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간의 상호 인정과 협력을 통한 역량의 극대화가 요청되고 있다. 북한교회는 외견상 그 선교역량이 매우 미약하다. 교인의 수나 교회 지도자의 수 등 기본적인 선교자원이 대단히 빈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체주의 사회인 북한 체제의 특성상 종교의 자율성이 약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갈등 경험 안에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내면화되어 작용하고 있다. 북한사회 내에서의 역할 가능성이 매우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한계점이 북한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을 제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교회는 나름의 역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적대적인 여건 안에서도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에 적응하면서 그 안에서의 생존을 이루어냈다. 또한 사회건설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기여를 함으로써 교회를 세우고 교회지도자를 길러낼 수 있을 정도로 운신의 폭을 넓힘으로써 향후의 발전기반을 마련해 놓았다. 그 과정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신앙형태를 창출함으로써, 세계교회 및 남한교회와의 관계맺기를 통해 한반도 평화선교에 참여하여 기여하는 정도의 역량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북한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제고를 위해서는 교회의 기본적인 선교기반을 확충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우선은 체제 내에서의 위상을 강화함으로써 자율성을 보다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의 리더쉽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의 협력이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북한교회가 처해 있는 체제적 특수성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또한 북한교회가 수행하는 통일전선체적 기능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도 내에서 그것에 협력해 주는 것은 매우 요긴한 일이 될 수 있다. 북한교회의 선교자원 확충을 위해 시급히 요청되는 목회적 신학적 지도력의 육성을 위한 인적 물적 지원과 교류도 매우 유효한 일이 될 것이다. 북한체제에서 북한교회는 남한 및 서방세계로 나아가는 접촉의 통로라는 통일전선체적 차원에서 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남한교회가 북한교회를 통하여 북한사회에 대한 접촉과 지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확대해 나감으로써 북한교회의 체제 내 위상을 보다 높여줄 수 있다. 또한 북한교회가 사회 내에서 기여할 기회가 많아짐으로써, 북한사회 내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이 불식되어지고 새로운 관계설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남한 교회는 북한교회의 지도력이 강화되도록 하기 위해 북한교회의 신학수준이 높아지도록 학문적 교류 및 신학교육 지원을 할 수 있다. 평양신학원에 신학서적들과 교육기자재들을 지원하고 장학금을 지원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신학교육 요원을 파송하거나 북한교회의 인재들이 남한 내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성찬예전의 활용 가능성 이상과 같은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제고를 위한 과제들의 해결에 성찬이 활용될 수 있다. 선교적 성격을 강하게 갖는 성찬예전은 상징의 생산지로, 선교와 예배의 통전 지점으로, 그리고 영성의 고양처로 역할하며 한반도 평화 정착과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의 제고에 기여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신학과 종교의 추상적 개념들을 전달하고 수용하는 유통관계에서 상징이라는 매개체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 가장 풍부한 상징유통의 현장이 바로 성례전이다. 일상성을 대변하는 상징 매개물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그 의미들이라고 하는 비일상적 차원들이 일상화되고 구체화, 경험화되는 현장이 바로 성례전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성찬은 규칙적으로 행해질 수 있으면서도 풍부한 상징력을 담고 있는 예전이다. 이러한 성찬예전의 상징적 기능은 한반도 평화선교를 위해서도 넉넉한 활용 가능성을 지닌다. 우선은 남과 북의 교회가 만나고 교류할 때 성찬을 적절히 시행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강력한 상징을 표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를 한반도 평화의 상징으로 드러낼 수가 있다. 남과 북의 교회가 함께 참여하는 성찬예전은 한반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며, 그것은 곧 남북통일을 가리키는 지시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성찬예전은 한반도 교회의 자기시여적 선교의 사명을 새롭게 함으로써 남과 북 양측의 교회로 하여금 한반도 평화선교에 보다 매진토록 힘을 부여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그 자체로 선교활동임과 동시에 남과 북의 교회가 공히 한반도 평화선교 수행자로서의 역량을 크게 강화하는 일이다. 한국교회의 일치 문제에도 성찬의 상징 기능을 활용함으로써, 한국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제고에 기여토록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을 저하시키는 주요 요인 중 하나가 교회일치의 실패이기 때문이다. 성찬예전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교회의 본질적인 일치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교회일치 과제의 실천을 위해 성찬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치성의 본질을 먼저 주목하고 확인함으로써, 차이를 넘어선 자기동질성에 따라 대화하고 협력토록 하는 데에 성찬예전이 긴요하게 활용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선교와 예배는 각각 기독교의 관계성과 자기정체성의 표현을 대변하면서도 서로가 긴밀한 관계를 갖는 활동들이다. 특히 이 둘은 공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활동에 본원을 두고 교회의 참여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본원적 일치성을 갖는다. 이 둘의 불일치는 각각의 왜곡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른 선교, 바른 예배는 선교와 예배의 일치가 담보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선교와 예배의 가장 확실한 통전지점이 바로 성찬이다. 성찬은 기독교 예배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선교자들의 계약관계를 새롭게 갱신하고 흥기하는 선교적 예전이기 때문이다. 선교와 예배의 통전은,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과 관련하여,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진영과 보수 진영 모두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는 교회 활동인 성찬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에큐메니칼 진영은 기독교적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복음주의 진영의 우려를 확실히 불식시키고 상호협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한국의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는 예배와 선교의 자기봉사적 내향성이라고 하는 왜곡을 바로잡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에로 각각 내향화하고 또한 외향화함으로써 자기정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는 선교와 예전의 통전을 필요로 하며, 성찬이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한반도의 평화는 남과 북의 평화적 통일을 통해 자주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중요한 이정표로 삼지만, 그곳에 이르기까지와 그 이후의 여정은 매우 복잡하고 많은 부침을 동반하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매우 길고 지루하며 혼란스럽기까지 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발걸음이 중단없이 이어지기 위해서 절실히 필요케 되는 것이 평화를 위한 영성의 측면이다. 한반도 내에 뿌리내린 교회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여정에서 끊임없는 영성의 물줄기가 되어주어야 한다. 끊임없이 평화의 비전을 선포하고 이정표들을 만들어 나갈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할 인재들을 양성하여 공급하고, 평화의 모범을 창출하여 민족적 평화공동체 창출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평화적 영성 고양처로서 성찬의 활용 가능성은 크게 두드러진다. 성찬예전을 통해 복음과 선교의 평화적 의미가 강조되도록 할 수 있다.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만이 아니라 성찬예전을 통해 평화와 화해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 및 평화와 화해의 화신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경험함으로써 교회 안에서는 평화와 화해의 영성이 크게 고양될 수 있다. 성찬예전을 중심으로 예배교육을 시행하면서 교회의 평화교육이 크게 강화될 수 있다. 이를 통해 평화의 일꾼들이 길러지고 그들의 평화 영성이 고양되며 그들을 위한 후원기반이 든든해 질 수 있다. 특히 개교회 내에서 한반도 평화와 관련한 회중들의 인식을 전환하고, 회중 내에 평화와 화해의 영성을 진작시킴으로써 한반도 평화선교를 위한 개교회적 활력과 전교회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제고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선교 자원들이 전면적으로 재조직, 재배치됨으로써 교회의 선교 잠재력이 한반도 평화선교에서 현실화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3. 선결되어야 할 과제들 이처럼 성찬예전은 한반도 평화선교와 그 역량강화를 위해 활용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활용의 실제에 있어서는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있다. 한국교회는 다음의 두 가지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 점은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에 공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선은 한국교회의 예배가 갱신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초기 선교사들이 전하여 준 예배형태를 유지해 오고 있다. 청교도적 혹은 개척자 예배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 예배형태로 인해 한국교회의 예배는 설교에만 주안점을 둘 뿐 성찬예전을 도외시하고 있다. 성찬은 1년에 2회 정도만 시행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성찬예전을 회복해야 한다. 성찬예전이 말씀의 예전과 함께 예배의 중요한 기둥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찬의 횟수뿐만 아니라 성찬의 의미 부분에서도 갱신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성찬은 '기념'에만 강조점을 두고 있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대속성을 회상하는 것으로서만 시행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BEM 문서에 나타나고 있는 성찬의 5가지 의미 등을 참고하여 성찬의 다양한 의미들을 교육하고 그것이 교회의 선교적 삶과 영성으로 기어지도록 하는 예배의 갱신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선교신학적 전환의 노력이 필요하다.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 모두 선교신학적 전환을 이루지 않고서는 선교의 물적 기반의 확충과 평화지향성, 교회의 일치라고 하는 과제를 동시적으로 추진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찬을 통하여 상징을 생산하고, 예배와 선교의 통전을 이루며 평화와 화해의 영성을 고양시켜 한반도 평화선교 및 그 역량 제고를 실천하는 것은 요원케 된다. 이에 관해서는 세계교회의 사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20세기 후반 세계 선교신학계는 통전적 관점으로의 수렴을 이루었다.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이 서로의 강조점이 동시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하고 각각 문서화하면서 통전적 선교를 실천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즉 복음전도와 그에 부합하는 사회참여를 동시에 포괄하는 통전적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서 양진영이 일치를 보고 있다. 복음주의의 "로잔언약"(1974년)과 에큐메니칼의 "Ecumenical Affermation: Mission and Evangelism"(1982년)이 바로 그 문서들이다. 물론 두 선교운동이 걸어온 여정이 다르듯이 통전성 이해의 세부적 구조에서는 차이점들도 안고 있다. 그러나 선교의 통전성이라고 하는 동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이 정도의 차이점은, 장애물이라기보다는 건전한 다양성을 위한 토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양 진영은 세계교회의 이러한 흐름과 접맥하는 가운데, 각각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의 통전적 선교신학을 수용할 수 있다. 서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인정할 수 있는 정도의 선교신학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 희망과 기다림이 주는 신학적 의미연구

        김계주 한일장신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50671

        기다림은 희망의 다음의 단계이다. 희망이 없다면 기다림도 없다. 또한 기다림 없는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을 앞둔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단장하듯 그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경건한 신앙과 삶으로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다. 제 2장은 몰트만의 희망신학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의 신학은 전쟁과 포로생활에서 겪었던 실질적인 고난이 그의 신학의 장과 주제가 되었다. 또한 그에게 신학적 영향을 끼친 세 사람은 괴팅엔 대학 교수들이었다. 오토베버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적용시키려는 사회 윤리의 영향을 받았고, 한스 에반트에게서는 철학적 신학방법을 배웠으며, 에른스트 볼프에게는 사회 참여하는 역동적 신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가 전개했던 희망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약속된 십자가에서 그 의미를 찾았다. 제 3장은 한국신학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신학은 민중의 인간다운 권리와 삶을 다룬 민중신학과 국내적으로 토착화 신학이라고 말하고 있는 유.불.선의 혼합종교인 풍류신학과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받아들여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별세신학을 살펴보았다. 제 4장은 배경식교수님이 전개하고 있는 기다림의 신학을 살펴보았다. 기다림의 신학은 성경적의 근거와 한국인의 심성 그리고 한국 여성의 삶안에 자리잡고 있는 지고한 기다림을 통해 그려낼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또한 희망의 신학에서 기다림의 신학으로 전환과정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희망신학에서 인간의 희망이외에 인간의 자유에 대한 문제를 기다림의 신학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다림이 개인의 변화을 추구하고, 인간이 현실적으로 직면한 고난을 이길 수 있는 동기가 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제 5장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경건한 삶을 살았던 독일경건주의 기다림의 신학자들을 살펴보았다. 첫째, 벵엘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기록된 그대로 믿고 실천하며 가르치고 따랐던 그의 신앙과 생활은 성경중심의 신앙적 사고였음 살펴보았다. 둘째, 블룸하르트의 부자(父子)를 통해서 경건주의의 문제점인 신앙의 내면화, 개인화와 같은 개인주의적 경건 신앙을 극복하고 사회적 구원에 참여를 통해 복음의 능력이 세계를 뻗어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실천했다는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크는 종말론을 완성으로 보았다. 그 완성인 종말 성도들은 준비와 기다림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연구를 통하여 희망과 기다림의 신학에 관한 의미에 나타난 연구 내용을 3가지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희망과 기다림은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희망은 기다림을 가능케하며, 그 희망은 기다림이란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이다. 즉 기다림의 신학은 희망의 신학을 구체화시키는 다음 단계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희망이 없다면 기다림도 없다. 또한 기다림 없는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혼을 앞둔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몸을 단장하듯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경건한 신앙과 삶으로 만남을 준비하는 것이다. 둘째, 기다림의 신학은 성경적 종말론에 근거를 두고 있다. 종말의 신앙은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속성은 크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로 요약된다. 현실을 살아가는 현 세계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세대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나라 운동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올바로 삶을 살아가며 회개를 기대하며 그리고 사회의 개혁과 변화를 하기 위해 현실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것이다. 셋째, 한국신학으로서의 기다림의 신학 가능성의 발견이다. 기다림의 신학은 성경적 기다림을 시작으로 한국인 심성과 한국 여성의 삶 안에서 자리잡고 있는 기다림에서 그 신학의 가능성 유추하여 신학의 출발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성경적 그리고 인간의 삶안에 자리잡은 기다림의 신학은 한국인의 정서와 삶을 바탕을 둔 신학 사상으로 한국 신학의 가능성을 충분히 가진 신학이다.

      • 칼바르트의 생애와 신학사상

        최홍성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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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바르트 신학의 사상과 변천과정을 살펴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인식론에 있어서 인간의 존재 사이에 존재론적 상호관계 내지는 연결성을 전제하고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인식을 주장하는 19세기 문화신학 및 자연신학을 향한 바르트의 변천하는 신학 가운데서 드러나는 입장은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간격에 대한 깨달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기능성은 오로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계시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며 이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과 경외와 순종의 태도이여야 함을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이 바르트에게 주는 의미는 정통주의의 무력한 합리화 경향을 극복케 해주었다. "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를 강조하기 위해 구축한 태도로써 인간의 전적 타락과 죄의 공장으로써의 이성, 성서의 기계적 영감설을 강조한 정통주의의 한계성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큰 업적이며 역사의 경험에 의한 결과라고 말 할 수 있다. 특별히 바르트가 영향을 받은 것은 성서에 대한 새로운 이해, 이성의 존중, 예술을 중심에 두게 되는 기동론적 영향, 역사 진보와 합리적 사고 등이다.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틀은 자유주의를 극복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종교 사회주의를 문화 신학의 지류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엄밀히 말해서 바르트에게 있어서의 종교 사회주의는 문화 신학에로부터 로마서 강해로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경험의 신학이었다. 그 영향은 지상에서 이룩되기를 원했던 하나님 나라 경신과 형제 공동체 정신 그리고 개혁정신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각각 제 1차 대전의 충격과 어우려져서 하나님 나라와 형제 공동체의 파괴가 곧 개혁이라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해준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개혁이 그의 경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종교사회 주의자였던 바르트는 잘 드러내준다 " 로마서 강해" 제1판의 신학이 헤겔의 양적 변증법에 따른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정의하였다면 제2판은 키에르케고르의 질적 변증법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단적을 정의하였다. 이것은 자유주의로부터의 완전한 이탈의 표현으로써 신인식의 불가라는 사형선고를 집행한 것이었다. "위기의 신학" ,"역설의 신학"을 가지고 그는 비록 하나님을 "원역사"로 축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모든 것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리는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하나님의 신성의 재발견이라는 20세기 신학의 지평을 열게 되었다. 이것은 후반부에 그의 신학이 정당화 시키는 문제이기도 하다. 바르트이 인식론은 틸리히의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틸리히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유일한 사물들의 "존재의 깊이", "존재의 힘" 내지는 "존재의 증거"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되어" 있으며 거꾸로 하나님은 인간의 존재뿐만 아니라 모든 유한한 사물들의 존재에 "참여되어" 있다.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은 예수그리스도의 계시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관계 유비적 방법론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의 유대관계를 회복시키고 있다. 틸리히의 상호 관계를 통한 "궁극적 관심" 이 인간의 교만을 담고 있다면 바르트의 신인식은 하나님의 은총인 예수그리스도의 계시 사건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긴 기동론 중심의 신학이라 말할 수 있다.

      • 본회퍼의 공동체론에 관한 연구

        한재영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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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우리는 본회퍼의 삶과 사상을 그가 지내온 시대적 상황과 삶의 자리 그리고 그의 여러 저서들과 그를 연구한 여러 연구서적들과 논문들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각 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다시 한번 더 살펴본 후에 본회퍼의 공동체적 교회론이 쇠퇴해 가는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에서 갖는 의미를 짧게 논하고 본 논문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본 논문의 2장에서는 본회퍼가 살아온 삶의 여정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고난의 시대 속에서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성장하였고, 어떠한 신학적 배경 속에서 그의 신학을 정립시켜 왔으며, 이러한 시대상황이 그의 신학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갓세이가 그의 생애를 사상의 변화와 시대적 변동에 따라 크게 세 시대로 구분한 방식을 따라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신학적 배경을 통하여 그가 고민하고 실천하며 살았던 그의 주요 신학적 입장을 그의 신학 방법론과 신학 내용으로 구분하여 그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알아보면서 본회퍼의 신학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3장에서는 그가 핀켈발데의 공동체 생활을 토대로 기록한 『신도의 공동생활』과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를 통한 공동체의 사귐과 교회의 본질적 구조인 '서로 위함' 과 '더불어 있음' 속에 현존하는 교회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와 성육하신 하나님과 낮아진 그리스도 등을 통하여 본회퍼의 하나님 이해와 교회공동체론 이해를 제시하였다.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형제들이 서로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라고 말한 본회퍼는 무신의 세계에서 보이는 공동체 생활의 축복을 강조하면서 미래의 교회는 성숙한 세계, 무신의 세계를 전제로 하면서 설교와 신학이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설교이며, 해석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 '신앙의 비밀 훈련' 으로 공동의 삶, 예배, 기도, 성서의 명상이 보존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로운 형태의 교회는 교권주의와 개교회주의가 사라지고 세상의 사회적 정치적 삶에 참여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 의 사명을 다하며 복음을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실재 삶으로 살아가며 실천하는 교회이다. 4장에서는 작금(昨今) 한국교회의 현실과 문제들을 살펴보고 본회퍼의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라론 그의 교회공동체론을 '어떻게 한국교회에 적용 · 수용할 것인가?' 를 고민해 보았다.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는 두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대리행위 그리고 교회공동체에 기초한 본회퍼의 하나님 이해가 고대 서구철학의 형이상학적 실체개념에서 벗어나 공동체적 관계성에 근거함으로써 새로운 신학적 전망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 하나님 이해를 이제는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죽으신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함으로 교회공동체 가운데 실제 하시는 현실적인 하나님 이해의 길을 연 것이다. 둘째는 본회퍼의 하나님 이해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에 근거함으로써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 이해로부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하나님 이해로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되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는 고난 받는 구체적 이웃의 구체적 상황과 유리될 수 없는 현실의 신학이다. 이러한 본회퍼의 신학은 이론과 실천, 전통과 상황을 통합시킴으로 이후의 세계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현실에서도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로서의 교회공동체의 신학은 큰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이끌어온 근본주의 신학은 성서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를 제시해 주지 못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회퍼의 철저한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로서의 교회공동체의 삶은 한국교회 공동체에 건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방향과 성서관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 한국교회의 통일 운동과 북한 선교 정책

        박문기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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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최후 명령, 곧 주님의 지상명령은 선교이다. 그리고 오늘 한국 교회를 향해 주님의 최후의 명령이 있다면 그건 단연코 북한 선교일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사명이다. 한국 교회의 북한 선교는 짧은 시간에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선교 경험과 전략의 부족으로 부정적인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국 교회는 북한 선교 활동을 하면서 보여준 허점이나 실수를 거울삼고,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사랑의 선교활동을 기초 삼아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힘찬 도약을 해야 한다. 통일선교는 한반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의 구현을 통해서 생명을 살리고 지키고 보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선교는 통일의 과정과 방법이 정의롭고 평화적인 것이 되도록 이끌어야 하며 그 결과가 정의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한반도의 치유와 화해를 넘어 통일한국을 위해 감당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첫째로, 한국 교회는 자기 스스로의 개혁과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한국 교회는 자신의 치부를 제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개혁해야만 한다. 특히 한국 교회는 수많은 교파들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단일구조의 가톨릭처럼 효율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이제라도 힘을 모아 개별적인 교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모아 교회의 일치운동을 통해서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둘째로, 좀 더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신학적 접근이 요구된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북한 선교의 환경은 매우 급박하게 변하고 있으며, 방향은 매우 다양해질 전망이다. 따라서 이제는 다양한 북한 선교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변화를 계속 모색해야 할 것이며, 특히 통일 신학의 정립을 통하여 모든 계층과 민족을 화해시키는 이념과 실천적 방안을 부단히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구약성서의 희년정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비폭력 사랑을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와 분단의 현실에서 재해석 함으로써 민족의 통일적 신앙과 도덕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입장에 서서 고통받고 있는 북한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보다 더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남한교회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북한에 '교회를 재건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공동체를 건설할 것인가?' 하는 근본 문제는 둘 다 증요하고 필요한 일들이지만, 무엇보다도 당장 고통받고 있는 북한이 보다 행복한 상황을 맞을 수 있도록 남한교회가 기도하고 고통의 해결을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즉,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보다 많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2002년 배급제를 폐지함으로서 사회주의적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하여, 이제 시민적 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영역까지도 악화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북한주민들을 위한 사회복지선교를 보다 폭넓게 시행해야 한다. 교회 내의 물적 자원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북한주민들의 구호와 북한사회의 개발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선교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완성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크신 선교 계획과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원대한 민족 복음화의 계획과 뜻에 동참하고 성취해야 할 사명과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화통일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다. 이제는 평화 통일과 북한 선교가 한국 교회의 최대 관심사의 한 가운데에 들어서야 한다. 한민족의 통일을 위해 가장 위대하고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할 주체세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 교회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구체적인 실천과제를 목표로 삼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교회 안과 밖에서의 개혁과 갱신 그리고 부흥으로 나아가 복음의 역량을 확대시켜 민족의 숙원과제인 평화 통일과 교회의 선교과제인 북한 선교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써 이야기체 설교방법에 관한 연구

        강경인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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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의 전성기는 이제 지나갔는가?"라는 미국 워싱턴의 설교자대학에서 웨델(Theodore O. Wedel)이 수년전 설교의 위기를 논하면서 발표한 글의 제목이다. 설교의 위기를 맞는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청중들을 설교라는 커뮤니케이션에 참여하도록 하는 방법이 이야기체 설교이다. 설교는 교회의 예식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설교는 그리스도교의 발전과 전파에도 절대적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리스도교 신앙에 있어서 이야기는 구약성서에서 신약성서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복음 전달의 수단이었다. 더불어 설교갱신을 요구되는 현상황에서 이야기체 설교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본고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으로써 이야기체 설교의 방법에 관한 연구이다. Ⅱ장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이해를 위하여, 커뮤니케이션의 정의와 유형, 커뮤니케이션의 구성요소와 과정, 커뮤니케이션의 원리와 역할, 커뮤니케이션과 설교와의 관계, 그리고 공중커뮤니케이션을 살펴보았다. 커뮤니케이션이란 언어·몸짓이나 화상 등의 물질적 기호를 매개수단으로 하는 정신적·심리적인 전달 교류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유형은 언어적 커뮤니케이션과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 자기완결적인 커뮤니케이션과 도구적인 커뮤니케이션, 퍼스널커뮤니케이션과 매스커뮤니케이션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구성요소는 송신자, 데시지, 채널, 수신자, 그리고 효과이다. 이런 구성요소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지 전달단계, 접촉단계, 반응단계, 이해단계, 수용단계, 내면화단계, 그리고 행동단계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원리에는 수신자 중심의 원리, 반복의 원리, 관련성의 원리, 적절한 정보량의 원리, 슬리퍼 효과의 원리, 선택적 인지의 원리, 선정의의 원리, 그리고 구성의 원리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은 설교자가 메시지를 잘 준비하여 준비한 메시지를 잘 전달해야 한다. 설교할 때 설교자나 청중 그 어느 쪽이라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청취태도가 결여되어 있다면 효과적인 전달은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설교자의 뜻이 명확하게 전달되고 청중들의 주의가 설교에 집중되었을 때 비로소 효과적인 설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 공중커뮤니케이션은 그리스도교의 설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살펴보았다. 공중커뮤니케이션의 정의는 한 사람의 전달자가 대중이 아닌,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다수의 수용자에게 설득을 목적으로 메시지를 전랄하는 행위 또는 과정을 말한다. 그리고 공중커뮤니케이션의 네 가지 특징을 제시하였다. 공중연설의 목적은 정보전달의 목적, 설득의 목적, 오락의 목적 등 세 가지로 구분하였다. 공중연설의 주제는 TV에서나 지역단체, 학교 등 연설이 행해지는 상황과 환경에 관계없이 다양하며 제한이 없으나, 주제선정시 주의사항을 제시하였다. 공중연설의 유형은 연설의 목적에 따라 크게 정보적 연설과 설득적 연설로 나뉘며, 전달요령에 따라 즉흥 연설, 무원고 연설, 암기식 연설, 원고 연설 등으로 구분하였다. 커뮤니케이션과 설교와의 관계에서 설교를 위한 커뮤니케이션 이론은 의사소통과정의 신학적 차원과 인간적 차원 모두를 설명하였다. 커뮤니케이션 원리는 커뮤니케이션의 역동성에 관한 특정의 이론적 이해를 근거로 하여 그 과정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커뮤니케이션의 원리를 활용함으로써 설교자는 설교에 대한 신학적 입장들을 좀더 포괄적 입장에서 잘 이해할 수 있었다. Ⅲ장에서 전통적 설교이론에서 새로운 설교이론으로의 요청을 다루었다. 전통적 설교이론은 흔히 연역법적 논문 형식의 3가지 요점과 유머로 이루어진 설교가 전통적 설교이론을 대표하는 설교 형식이다. 이 이론에서 설교의 목적은 설교자의 마음과 머리에 있는 바를 청중의 머리와 마음으로 가져가는 것으로 일방향적임을 의미한다. 이 설교이론의 설교 목적이나 내용은 언어에 대한 이해와 분리할 수 없다. 본문형식의 특징은 설교의 내용이나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한 문장이나 혹은 하나의 중심 아이디어로 표현하도록 하는 것과 이야기체와 귀납법을 전용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설교란 그리스도교적 믿음을 전하고 되풀이해서 가르치는 기능을 수행한다. 하나님의 말씀 신학의 설교이론은 말씀의 신학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설교이론으로 설교의 케리그마 이론이라고 한다. 케리그마의 전달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건이 바로 설교의 목적이다. 케리그마 설교이론에 있어서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놓여 있는 틈은 점점 더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설교 후나 전이나 혹은 설교 도중에 설교자와 청중이 대화를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설교의 내용은 본질적인 복음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에서 능동적으로 역사하여 설교를 역동적 사건으로 만들고 있다. 이 이론은 말씀의 역사를 통한 설교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에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부여한다. 변형적 설교이론에 의하면 설교는 예배자에게 경험, 사건, 만남, 혹은 해프닝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설교가 사건이 되는데 있어서 케리그마 설교의 이론과는 다른 역할론을 펼친다. 설교자의 책임을 더 강조하며 조우의 초점이 인간적인 측면으로 이동된다. 설교의 목표는 예배자의 가치나 세계관 혹은 실재를 변화시키는 설교적 사건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이 설교이론에서 말씀과 세계는 서로 분리할 수 없으며 성서로부터 추출한 어떤 신학적 지식으로부터 특정한 성서 본문의 의미에 대한 해석을 한다. 변형적 설교학의 공통적인 점은 언어, 특별히 설교언어와 삶 사이의 연결을 중요시하는 것이다. 귀납적인 설교는 청중을 위해 설교자가 본문의 메시지를 얻게 된 경험을 재창조한다. 그것은 설교의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그것과 함께 유회하고, 씨름하고, 명료화하도록 한 설교자의 경험을 재추적한다. 설교자 경험의 시각과 음성을 언어로 포착함에 의해 설교자가 들은 것을 청중이 들을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귀납적 설교는 변화하는 시대를 사는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려는 시도로부터 나온 하나의 방법론이다. 새로운 설교이론인 이야기체 설교는 구성의 연속적인 요소를 따르는 설교 형식이다. 이야기체 설교 구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불안정과 해결을 향한 중간의 전환과 해결이라고 할 수 있다. 로우리는 해결을 경험이나 사건으로서의 설교를 작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원리로 묘사하고 있다. 그는 역전의 원리를 강조한다. 그것은 사태를 거꾸로 뒤집는 것이다. 그는 이런 행위에서 복음은 급진적인 비연속성과 역전으로 경험된다는 말이다. Ⅳ장에서 이야기 신학은 미국 신학계에서 등장한 이야기 신학은 새로운 설교학운동의 발전과 형성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4세기 이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는 신학에서 배제되어 왔다. 그 이유는 초기 교회가 이단과의 논쟁을 거치면서 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교회를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야기 신학의 태동 배경은 계몽주의의 영향, 해석학의 영향, 객관적 탐구, 그리고 공동체적 탐구이다. 이야기와 신학과의 관계는 달리 구분될 수 있다. 신학은 논리적이며 논쟁적이고 합리적인 설명을 가진 형태이고 이야기는 경험과 줄거리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신학에 이야기를 사용하는 것은 신학을 이해하는데 풍부한 가능성을 제공해준다. 이야기와 성서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규범인 성서에는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이처럼 성서의 이야기는 이스라엘인들의 신앙을 통해서 후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야기와 계시와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대해 말할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계시는 결국 인간의 신앙으로서만 받아들여지고 인식할 수밖에 없으니 이런 객관과 주관, 보편과 특수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수 있으며 이때에 계시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계시의 사건의 증언되는 가장 중요한 문학적 형식중 하나이다. 계시의 의미는 이야기 신학의 신학으로의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Ⅴ장에서 이야기체 설교의 정의는 특정한 시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그 사건은 불안정 상태(또는 충돌)에서 계속적인 갈등(혼란)이 지나고 극적 반전으로 그리고 대단원의 끝으로 이어가는 이동이다. 이야기체 설교의 가설들은 개인적 경험이 의미의 토대라는 것이다. 이 전제는 개인간의 의사소통이란 경험의 공유라는 토대 위에서 가장 잘 이루어진다. 철학적 전제들은 진리의 상대성, 커뮤니케이션의 주관성, 그리고 경험의 지고성이다. 이야기체 설교의 특징은 사람은 논리보다 감정에 의해 삶을 이끌어간다. 설교자는 청중과 의사소통을 위해 이야기한다. 간접적인 표현으로 설교를 전달한다. 설교자가 결론을 내리지 않고 개방적이다. 설교의 목적은 설교에 청중을 참여시키고 심취하게 한다. 성서의 본문의 특별한 문학형식과 그 본문을 오늘날 재구성하는데 중요한 암시를 지니는 내용으로 취급해야 한다. 이야기체 설교의 방법에서 이야기는 산문이나 운문에서 사실이거나 허구적인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특징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가슴에 말한다. 시대를 초월한다. 청중을 사건 속으로 초청한다. 시대적 요청이다. 치유 능력이 있다. 행동하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성서는 스토리를 가진다. 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은 복음을 듣고 싶어한다. 이야기의 구성 요소에는 개념적 요소와 기술적 요소가 있다. 개념적 요소는 사건, 등장인물, 배경, 줄거리이다. 기술적 요소에는 관점, 아이러니와 상징, 구조 형태, 한 본문을 다른 본문 안에 인용하는 본문의 상호 관련성, 이야기의 독특한 문체인 반복, 대조, 말놀이, 중심 낱말, 어구, 문장, 주제, 교차대구, 인용 등의 수사학적 장치들이 있다. 성서의 이야기 해석방법은 일반적 성서 해석방법과 이야기의 성서 해석방법이 있다. 일반적 성서 해석방법에서 모든 설교의 기본은 성서의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설교작성에서 소홀하기 쉬운 것이 본문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개관식 해석방법으로 이야기를 해석하는 방법은 먼저 누가, 언제, 어디서라는 배경을 살피는 것이다. 핸드릭스의 해석방법은 구약성서의 이야기의 해석방법이다. 먼저 구성에 대한 연구이고, 이야기 속에 어떤 움직임 또는 흐름은 실제적 움직임일 수도 있고 영적인 흐름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 중에 어떤 식의 발전이 이루어져야 하는 지이다. 스테인은 비유해석을 위한 네 가지 해석의 원리를 제안했다. 비유의 중요한 한가지 요점을 찾아라. 비유가 말해진 삶의 자리를 찾아라. 복음서 기자가 비유를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찾아라. 하나님께서 비유를 통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를 찾아 보라. 이야기체 설교의 형태는 없으나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이야기체 설교는 정해진 형태를 탈피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형태로 말해야 한다고 권하기도 한다. 로우리가 소개한 네 형태는 본문 이야기를 그대로 따르기, 지연시키기, 중단시키기, 그리고 교체시키기이다. 이야기체 설교 구성 단계에 대하여 로우리의 방법과 로빈슨의 방법을 살피보았다. 로우리는 이야기체 설교 구성을 위한 기본적인 5단계를 제시했다. 1단계: 웁스! 평형을 뒤집어라! 2단계: 우! 모순을 분석하라! 3단계: 아하!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4단계: 와! 복음을 경험하라! 5단계: 예! 결과를 기대하라! 로빈슨은 이야기체 설교의 구성을 위한 4단계를 제시했다. 1단계: 쟁점을 발견하라. 2단계: 쟁점을 탐구하라. 3단계: 쟁점을 재구성하라. 4단계: 쟁점을 해결하라. 로빈슨의 방법을 그 쟁점을 발견하거나 혹은 상상함, 쟁점을 탐구하거나 혹은 돋보이게 함, 쟁점을 재구성함, 그리고 쟁점을 해결함이다. Ⅵ장에서 이야기체 설교의 실제는 이야기체 설교의 준비지침과 이야기체 설교의 실례를 제시하였다. 이야기체 설교의 준비지침은 모든 중요하지 않은 것에 주의하라. 행간을 읽어라. 만나는 모든 것을 파악하라. 당신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자료를 도입하라. 행동에서 동기로 옮겨가라. 사실보다 그 이전의 역동성으로 나아가라. 감각을 총동원하라. 늘 해오던 동일화 작업을 전환하라. 능동태 어법을 사용하라. 1인칭이나 2인칭 단수 형태로 이야기를 몰고 가라. 주관적인 것에서 객관적인 것으로, 특별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옮겨가라. 단계를 정하라. 이야기체 설교의 실례로써 로우리의 설교문, 월리스의 설교문, 그리고 강경인의 설교문을 들었다.

      • 몰트만의 신학과 교회의 사회봉사

        김영숙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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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에서는 교회사회봉사의 개념을 정의하고 성서적 신학적 의미를 살펴 보았다. 다음으로 몰트만의 신학을 근거로 교회의 역할, 신학과 교회와의 조화의 산물인 교회 사회봉사의 신학적 의미 등을 연구하였다. 제Ⅰ장 서론에서는 연구의 목적을 이렇게 밝히고 있다. 본 논문이 교회가 실천적인 사명을 건강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도록 교회 적인 관심과 목회적인 방향 설정에 기초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문헌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였다. 사회봉사에 대한 문헌 자료는 많으나 몰트만의 실천신학에 대한 자료 부족으로 인한 한계를 언급했다. 제Ⅱ장에서는 사회봉사의 신학적 근거로서 신학이론과 교회의 실천에 관하여 서술했다.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윤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 윤리가 과제로 하는 개인의 인격적인 변화와 사회윤리가 과제로 하는 사회구조의 변혁을 동시에 담고 있다. 모든 개인은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개인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사명에로 부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인 표현인 사회선교(교회의 사회봉사)는 삶의 질이 달라진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사회 속에서 이웃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하는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구조를 건설하고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사회적인 차원을 동시에 배려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의 일환인 사회선교(교회의 사회봉사)는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윤리와는 구별되고, 하나님과 무관하게 모색되는 인간의 정치와도 구별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를 지배하는 기독교 왕국적인 태도도, 사회를 무비판적으로 지원하는 후견인의 태도도 멀리하면서, 그리고 교회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과제와 한계를 바로 설정하면서, 사회선교(교회 사회봉사)를 통해 사회와의 연대적인 태도를 유지하여야 한다. 이렇게 하여 사회선교는 사회와의 연대적인 태도 속에서 신학과 제반 학문들이 이루어낸 성과들을 고려하면서, 개인윤리 차원과 사회윤리 차원의 신앙적인 과제를 올바로 수행하도록 자극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제Ⅲ장에서는 교회 사회봉사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교회의 봉사사업은 사회사업만이 아닌 선교적인 사업이 돼야 한다. 즉, 교회의 봉사사업은 다른 사회사업 기관들이 하지 못하거나 기피하는 봉사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나 사회단체들이 하지 못해도 교회의 에큐메니칼 봉사사업이 이를 감당해야 한다. (정치적 망명자, 외국인 노동자 문제 등) 교회의 봉사사업은 사회복지 기관들의 사회사업에 대한 협력자일 뿐만 아니라 보완자의 역할을 해야 하며 때로는 비판자의 역할도 해야 한다. 여기서 교회봉사는 사회사업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복지제도와 정책을 입법적, 정치적 차원에서까지 관여하며 봉사를 철저히 책임감 있게 해야 한다. 봉사활동은 시행착오와 부분적 성과를 계속하면서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성취하는 모델을 실험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의 사회사업이 선교적인 봉사사업이 되어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제Ⅳ장에서는 몰트만의 신학을 중심으로 교회와 신학의 조화, 그 조화의 결실인 교회 사회봉사에 관한 몰트만의 견해를 언급했다. 몰트만 신학의 각도에서 볼 때 생겨나는 실천신학의 성격과 그 과제는 세 가지 요점으로 말할 수 있겠다. 첫째로 한 면에서 보면, 교회 내의 모든 일은 복음의 선포와 함께 시작된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 가운데에 존재한다면, 복음의 선교 때문에 교회가 단순히 선교만 하는 곳으로 전락되지는 않는다. 설교, 교육, 복음 전도 이 모든 것이 코이노니아 및 디아코니아와 함께 긴밀히 연결되어야만 한다. 복음이 가진 약속과 자유를 선포하는 일은 예수와의 교제 안에 존재하는 새로운 인간성을 낳게 하고 나아가 세상 안에서 봉사를 하게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좋은 소식"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는다. 실천신학의 과제는 바로 이 좋은 소식의 실현을 확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 번째로 어느 한 면에서 보면 교회 안의 모든 일은 카리스마적 회중의 형성에 좌우된다. 하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삼위 일체적 역사 안에 존재한다면, 카리스마적 회중을 형성하는 일 때문에 교회가 전적으로 공동체를 조직하는 단체로 전락하지는 않는다. 예배, 목회학, 교역 및 교회 안의 여러 직무들은 케리그마 및 디아코니아와 긴밀히 연결되어야만 한다. 카리스마적 회중은 예수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전한다. 또한 이 회중은 그리스도의 이익을 위해 자유롭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회중은 아직도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실천신학의 과제는 이런 회중이 생겨나게 힘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어느 한 면에서 보면 교회 내의 모든 일은 이 세상 안의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메시아적 친교(messianic fellowship)를 실제로 형성하고, 또 그것으로부터 사람들을 파송하는 일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의 삼위 일체적 역사 안에 존재한다면 위의 일 매문에 교회가 사회적 행동과 혹은 종교적인 복지만을 위하는 그런 단체로 전락하지는 않는다. 교회 행정, 교회 정책, 윤리, 선교학 등은 케리그마 및 코이노니아와 긴밀히 연결되어야만 한다. 교회의 선교는 복음의 자유 및 성령을 받은 공동체의 힘 가운데에서 생명력을 갖게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교회의 선교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이리라. 실천신학의 과제는 이런 선교가 실제로 일어나도록 확실히 만드는 것이다. 제Ⅴ장 결론에서는 앞의 내용들을 정리 요약하였고 교회가 사회봉사의 신학적 근거로, 더욱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여,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한다. 몰트만은 독일의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과도기적 상황 속에 있다. 이 변화는 극적이고 엄청난 변화가 아니라 느리고도 지속적인 변화이다. 통계적으로 볼 때, 기독교인 삶의 양은 줄어들고 있지만 많은 공동체에 있어서 삶의 질은 증가하고 있다. 예배 참석자의 수는 줄지만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수동적인 교인의 수는 줄고 있지만 이웃을 돌보는 일이나 봉사, 예배 의식, 정치적인 과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인 사람들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민중을 위에서부터 돌보는 목회적 교회가 비능률적이 되는 만큼 밑바닥에서는 독립의 과정이 형성되고 있으며 "아래로부터의 공동체적 교회"가 나타나고 있다. 위에 언급한 내용이 독일 교회의 모습이라면 현재 한국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그동안 한국 교회의 사회봉사 참여는 국가의 관심이 못 미치는 사각 지대에 있는 가난하고 소외 받은 작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돌보아 왔다. 그러나 교회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 끊임없는 고찰과 반성이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활동은 정체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복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실천하는 삶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바탕이 될 신학이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든 기독교인들은 복음 전파를 위해 부름을 받았고, 모든 사람이 이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집에서나, 관계된 모임에서 이웃을 돌보도록 부름을 받았다. 훈련을 받은 상담자나 사회사업을 위한 전문가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이에 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교회라는 공동체 속에 봉사활동. 교회 기구의 복지 사업도 필요하다. 교회 소속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단지 속해 있다거나 지금도 계속 다니고 있다는 사실에 의존하지 말고 오히려 결정의 자유와 신앙의 자발성이 필요하다. 능동적인 기독교인의 예수님의 삶을 담고자 하는 열망은 활발한 교회 사회봉사로, 실천으로 열매 맺어나가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져본다.

      • 오순절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이혜선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50671

        20세기에 들어가면서 기독교에 신앙적 활력소를 제공한 것 중의 하나는 오순절 성령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00년 찰스 파램(Cllarles F. Parham)이 성경학교의 문을 열면서 소위 방언파라는 이를으로 그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래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이미 국제적인 대 교단으로 급성장 하였고, 그 증가 추세는 아직도 둔화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20세기에 사는 인류들에게 기독교는 인류의 정신적 회복을 가져오게 하는 종교임을 일종의 정신운동민 "성령운동"을 통하여 보여줌으로써 "가뭄 들에 불어오는 신선한 비바람"처럼 느껴져서 인기를 얻기도 했다. 본문을 통해 얻어진 결과들을 장별로 요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서론 부분으로서 연구 목적은 한국교인들이 바른 신학과 바른 성령운동을 통헤 바른 신앙 생활관을 정립하고자함이며, 연구의 방법은 오순절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제2장에서는 교회와 성령의 관계를 논하였는데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알게하고, 말씀을 듣고 깨닫게하고, 은혜를 보존케하고, 성장케하고, 부흥케하고 전진케한다. 제3장은 한국교회의 성령사역과 성령운동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운동은 한국교회를 급 성장시켜온 반면에 샤머니즘으로 전략시키고 신비주의로 빠지게 하는 오류를 범했다. 제4장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강조점을 말하는데 그것은 방언과 신유의 은사이다. 오순절 주의자들은 방언과 신유의 은사는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누려야 할 축복이라고 가리켰다. 제5장은 성령운동의 문제점과 그 영향을 살펴본 즉 문제점에 있어서 성령세례, 방언과대평가, 특정은사, 기복신앙 신학의 빈곤이며, 이런 문제점들로 인한 한국교회의 영향은 급성장으로 인해 신앙의 질적으로 볼 때 너무 형편이 없다. 즉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방언과 신유 등 화려한 "성령의 불꽃놀이"는 성령충만을 사모하는 기성교회의 많은 성도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영적 빈곤과 은혜였음을 더욱 절감케 하고 오순절주의야말로 한국교회 신자들이 "20세기 한국교회의 성령부재의 광야"에서 바라보고 나가야할 "성령의 구름 기둥이요, 불기둥" 이라는 생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6.25사변이 안겨준 고통의 쓴 잔을 마시면서 인내하고 살던 50년대 중반부터 이 운동이 사람들기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후에는 무서운 속도로 파급되기 시작했다. 지난 30년 등안 이러한 운동으로 한국교회는 심한 열병을 앓는 셈이 되었고 일부에서는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운동의 초창기에는 일반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심지어는 이단이라는 정죄를 서슴치 않코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운동의 신학적 정당성이 어떠하든지 간에 거기는 별로 개념치 않고 교파를 초월하여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직. 간접적으로 이 운동의 동조자가 되어 있고, 신학적, 교리적 비판의 칼날도 많이 무디어져 버렸다. 지금은 성령운동 그 자체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고 문제시하고 있는 내용도 거의가 예언, 악령추방 등 지엽적인 현상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아무도 과소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유익이라고 한다면 신학적으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가져다주었고 목회적으로는 기성교회가 크게 각성할 수 있는 자극제의 구실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는 교회인구의 증가를 가져오는데 크게 기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교회에 끼친 해독 역시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 번째, 비오순절계 교회의 신자들에게 침투해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성령세례"와 그 증거들로서의 방언과 신유 등 "이적적 은사"들을 추구케 하는 오순절 교회, 성령집회 또는 은사집회에 열정적으로 참여케 하므로 소위 "주일오후 3시 기독교"를 형성해가고 있는 "신오순절주의"자 오늘날 기독교의 제3세력으로 급속한 확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현대교회의 성령운동과 특히, "신오순절로 이어지고 현대 오순절 주의가 한국 기독교계와 일반사회까지 누리고 있는 폭발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경험(그것이 신령한 체험이라고 할 지라도)이 하나님의 구원계시의 서책인 성경보다 높이 평가하는 경험주의적 신앙은 인간의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우월시 하는 사상 때문에 성경적 기독교의 바른 신앙과 신학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 좋아하는 수복신앙과 성령운동 성령의 은사들을 더 열망하는 은사주의 등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에 무속신앙의 요소를 혼합시켜서 교인들의 영성을 흐려 놓았으며 성경말씀보다 체험을 우위에 후는 감각적인 신앙풍조를 조성시켜 놓았을 뿐 아니라 현실주의에 뿌리를 둔 기복신앙이 전통적인 경건주의 신앙을 크게 오염시켜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필자가 성령세례, 방언의 은사, 신유들을 완전히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며 전파하려는 그러한 뜨거움보다는 어떤 체험을 위해 몸부림치며, 어떤 은사나 방언을 해야만 참 신자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함이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은사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하고, 그 사람들을 공격하며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는 아무도 가지지 못한다. 다만 바울처럼 긍정은 하지만 소극적인 범위 안에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튼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바른 신학의 정립이 시급하다. 즉,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이단과 신흥 성령운동의 신학 사조에 대한 바른 신학사조에 대판 바른 신학의 보급이 유기적으로 정비되어야 한다. 물질적 축복보다는 신령한 축복에 관심을 갖도록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일 것이다. 진정한 오순절 성령의 참된 역사는 "오직 성령과 더불어" "성경을 가지고"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

      • 송천성(C. S. Song)의 아시아신학방법에 관한 연구

        장민호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50671

        지금까지 송천성의 신학방법과 그가 신학에서의 고난을 어떻게 다루었으며 그가 신학을 찾아내고 전개하는 소재인 이야기와 민담, 시 등을 어떻게 전개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송천성의 신학을 잠시 요약해 보면 그의 신학 방법은 아시아는 아시아의 상황에 맞는 아시아의 신학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것은 신학이 아시아의 상황, 문화 정치, 생활 등에서 나오는 물음에 대답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삶을 이해하지 않으면 그러한 다양한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양의 신학에서 대답을 찾는다면 서양식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남미신학에서 대답을 찾는다면 남미 식의 대답이 나올 것이며 흑인신학에서 대답을 찾는다면 흑인신학의 입장에서 대답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곳은 아시아이다. 아시아는 서구 유럽이 아니며, 남미가 아니며 흑인이나 아프리카도 아니다. 그러기에 아시아는 아시아의 눈과 심성으로 신학을 해야만 다양한 물음에 아시아다운 대답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천성은 전위의 신학을 말한다. 전위란 일정한 시간이나 장소로부터 다른 시간이나 장소로 옮겨지는 것을 의미하며, 의사소통(통역)이다. 신학이 이스라엘에서 유럽으로 옮겨졌다. 또한 이 유럽으로 옮겨진 신학이 제3세계에 전달이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신학의 주체도 옮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루살렘이 신학의 주체였었다면 이것이 바울에 의하여 유럽으로 전위되었다. 이 유럽에 전위된 신학이 제3세계에 전위되어 제3세계가 신학의 객체가 아닌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천성은 아시아로의 신학의 전위를 말한다. 그러면서 각 나라의 서로 다른 의사소통을 예로 들고 있다. 이것이 그가 주장하는 상황의 신학이다. 인도에 맞는 상황에서 신학이 이루어져야 인도인들이 받아들여지는 복음이 되고, 중국에 맞는 상황 안에서 신학이 이루어져야 중국인들이 받아들이는 복음이 된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상황은 중국의 상황도 아니고 인도의 상황도 아니다. 더욱이 서구의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한국의 신학은 한국의 상황에 맞는 신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송천성이 말하는 상황의 신학이다. 송천성은 신학의 방법을 풀이하는 방법과 아시아의 독특한 신학의 특성을 찾아내고 발견하는데 이야기나 시, 동양의 민담 등에서 신학을,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낸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서양에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동양에서도 타 종교에서도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보면서 이사야 11:6-9와 ≪리그베다≫(Rigveda)에 있는 비쉬뉴(Vishnu)를 비교한다. 더욱이 서구 유럽의 신학이 아시아에 들어오면서 몇 가지 부정적인 면을 드러냈다. (1) 서구 신학의 대량 유입이 아시아 기독교인들의 창조적 역량의 개발을 막는다. (2) 서구식으로 신학하는 방식이 주입된다. (3) 신학을 하는 목적을 효율적으로 이루기 어렵다.

      •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평화윤리와 에큐메니칼 운동

        소남숙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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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회퍼라는 인물의 삶이 우리의 눈시울을 적시게 하는 것은 그가 걸어간 좁은 길 때문이다. 그는 학문적으로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다. 21세에 박사 학위를 받고, 23세에 대학교수의 자격을 얻었다. 본회퍼는 신학이 아니더라도 학문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소질을 갖추고 있었으며, 신학자로서도 자신의 안일만을 원했다면 왕도를 걸을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에 있어서나 목회에 있어서도 촉망을 받았고, 얼마든지 독일에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 남아서 장수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회퍼는 이 모든 유리한 길을 거부하고 좁은 길,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이 선택 때문에 30세에 학문적 지위의 문이 닫혔고, 34세에 설교의 길이 막혔고, 35세에 저술의 자유를 박탈당했고, 37세에 그의 친구들과의 대화의 길마저 끊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침묵하였고, 그는 어느 때보다도 더 높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신학은 에큐메니칼 진영뿐 아니라 복음주의 진영의 신학, 로마 가톨릭 신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동구의 무신론적인 정부 아래서 교회는 본회퍼의 제자직에 관한 신학을 크게 의존하였다, 억압받는 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흑인신학 그리고 여성신학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몰트만은 본회퍼의 '십자가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cross)을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을 진술하는 핵심으로 삼았으며, 융겔은 본회퍼의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the crucified God)을 무신론자와 논쟁하는 무기로 사용하였다. 신학적인 영향을 넘어서 본회퍼는 교회의 사회윤리, 선교적 책임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교회가 세계를 향한 책임을 본격적으로 말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로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러한 흐름의 배후에는 교회의 세상에 대한 책임을 진지하게 질문한 본회퍼의 신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교회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해한 그의 신학은 '하나님의 집'인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의 책임을 묻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근본적인 틀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신학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본회퍼의 또 다른 공헌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직의 고귀함을 일깨워준 데에 있다. 그는 특히 십자가와 고난의 의미, 순종하는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에 순종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길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길, 바로 제자의 길이다. 그는 교회도 십자가 아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십자가와 고난이 없는 신앙은 기독교의 신앙이 아니라고 말한다. 본회퍼는 당시의 독일교회를 순종 없는 신앙, 십자가 없는 은혜를 소유한 값싼 교회라고 질타했다.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도 본회퍼의 이 같은 질타를 경고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본회퍼는 신앙과 일치된 삶으로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관심을 끌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책임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과 교회의 참모습을 가르쳐 주었다. 또한 그는 사회참여 신학의 선구자로 정의와 평화와 사랑을 실천하는 길을 보여 주었고, 그리스도 앞에서 진실하게 살았던 삶의 모습은 죽음 이후에도 후세의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신앙적 삶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한국교회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을 자체 내에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오히려 사회와 세상을 향한 교회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갱신해 나갈 필요가 있다. 본회퍼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그 자체의 내적인 질서를 위해서가 아니라, 참된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은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현장을 바라볼 때,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이 깊이 명심해야 할 귀한 충고가 아닐 수 없다. 본회퍼의 삶은 세상 안에서 교회에게 주어진 책임을 외면하고, 교회 안으로 몸을 숨기고 싶은 유혹을 받는 모든 교회가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이 유혹을 이기기 위해 모든 교회는 자신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관심을 넘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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