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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회에서의 음악목사제도의 필요성

        박수욱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RANK : 249663

        한국교회에 음악목사 제도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 안에 수요와 공급이 원활하게 균형을 이루어져야 한다.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기 위해 각 교단과 교회는 음악목사 필요성을 인식해야 하며, 음악목사로의 사역을 감당하길 원하는 지원자들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이들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존재해야 한다. 물론 한국의 각 교단 산하 신학대학교에 교회음악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진로는 음악목회자로서 활동하기보다 단지 교회 안에서 피아노 반주자, 성악가, 지휘자 등으로 활동할 뿐이며 이들을 부역자로 인정하는 교회는 극히 드문 실정이다. 첫째, 교회의 담임목회자들은 교회의 음악은 신학적 배경과 지식 그리고 음악을 전공한자에게 맡겨 팀 목회를 지향해야 한다. 전문화된 목회를 담임목회자 한 사람의 능력으로 교회의 모든 부분을 대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현 한국교회는 교육을 담당하는 목회자, 심방을 담당하는 목회자, 행정을 담당하는 목회자를 두어서 그 전문 분야를 맡기고 있다. 하지만 음악 분야에 있어서는 일반음악 전문가에게, 유명한 교수나 성악가에게 교회음악의 일부분을 감당케 하고 있다. 신학적 지식과 배경을 갖고 있지 않다보니 교회력과 맞지 않는 찬양곡이 선곡되기도 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하며 보여주기 식의 찬양대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제 한국교회는 팀목회를 통해 담임목회자 혼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목회가 아니라 전문사역자들과 함께 사명을 가지고 분담한다면 효과적인 목회가 될 것이며 예배중 25-30%를 차지하는 예배음악이 제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음악목사 제도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교회 안에 교회음악을 전담해야 할 음악목사 제도가 총회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또한 각 교회는 음악목사 또는 전임 음악사역자를 두는데 필요한 모든 후원을 다할 때 팀 목회는 현실적인 목회 방향으로 자리 잡게 될 것이며 한국교회에 제2의 부흥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둘째, 음악목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그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미국의 영향과 침례교, 성결교단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교회들은 음악목회자를 원하고 있으며 실시하고 있는 교회들도 있다. 앞으로는 교회 자체적으로 음악목사를 원하는 교회들이 많아 질 것으로 볼 때, 그만한 자격을 갖춘 목회자를 찾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앞으로 음악목사를 꿈꾸고 있는 자들은 교단에 음악목사제도가 없다는 것에 실망하지 말고 그에 합당한 노력과 자질을 연마해야 한다. 음악목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 중에는 음악인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서론 부분에서 언급했듯이 목사는 세상의 직업을 갖지 않은 자이어야 자기에게 맡겨진 사역을 감당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음악목사는 기능인이기 이전에 목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음악목사가 되고자 하는 자들은 자신의 전공분야와 신학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교인들과 교회 안의 음악인들을 리더 할 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교단적으로 음악목사를 배출 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운영해야 한다. 각 교회에 음악목사가 정착되지 못하고 이유 중 하나는 교육과정의 부적절한 운영에 있다고 본다. 교회음악과 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적 내용 즉, 예배학, 찬송가학 등의 기본적인 학과도 가르치지 않는 학교도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각 교단에서 목사가 되려면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신대원 교역학 석사(M.Div) 과정을 이수해야 하며 또는 목회연구과정을 졸업해야 하듯이 음악목사가 되기 위해서도 일반학부에서 음악을 전공한 자가 신대원을 졸업하였다든지, 아니면 교회음악대학원 재학 중에 신학과정의 필수 과목을 이수하였다든지, 아니면 신대원 재학 중에 교회음악목사 제도에 필요한 필수 과목을 이수하였을 때 각자 교단의 음악목사로 사역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를 실천하고 있는 대학교를 소개하고자 한다 침례신학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은 교회음악 지도자, 음악목사와 음악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교과과정에는 교회음악전공(MCM)과 목회음악전공(M.Div in CM) 과정을 두고 있다. 이 중 음악목사가 되기 원하는 자들은 목회음악을 전공해야 한다. 목회음악 전공자는 신학과목 26학점을 이수해야 하며 이 중에는 설교학, 전도학, 목회신학개론, 예배학, 침례교회사 등을 이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위의 내용을 보듯이 이제 한국교회의 각 교단에 음악목사 제도를 위해 각 교단 산하의 대학 또는 대학원에 교회음악과 두어야 하며, 두고 있는 교단들은 신학적 지식과 음악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교육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 모든 교회가 음악목사를 두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다면 한국교회의 교회음악은 뒤쳐질 수밖에 없으며 더 나아가 예배의 부흥은 기대할 수 없다. 음악목사를 두기 힘들다면 평신도 중에 선택된 교회음악을 담당하는 자 즉, 지휘자, 성가대장 등을 교회음악 세미나 또는 평신도를 위한 교회음악 수료과정을 수료하게 하여야 하며 교회 자체적으로 찬양학교를 개설하여 예배학, 찬송가학, 교회음악과 예배에 관한 부분들을 강의하여 그들의 질적, 양적 수준을 높여야 한다. 넷째, 각 교단별로 각 교단의 헌법에 음악목사제도를 합법화 하여야 한다. 현재 교단헌법에 음악목사 제도를 두어 음악목사 안수를 주고 있는 교단은 침례교, 성결교(기성, 예성, 나사렛), 복음교단 단 5 교단뿐이다. 그 외 교단은 교회의 필요에 의하여 음악목사, 음악전도사를 두어 부목사나, 전임 전도사가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각 교단별로 음악목사제도를 법적으로 확립한다면 교회음악의 질정향상은 물론 교회음악과 일반음악 사이에서 방황하던 수많은 인적자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될 것이며 그로인해 한국교회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세계 교회에 비춰질 것으로 확신한다. 우리는 지금 감성의 시대, 변화의 시대, 전문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각 개인은 물론, 사회의 모든 조직은 변화의 움직임에 민감하게 대응해야 하며, 이는 교회도 예외일 수 없고 제외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 더 시대와 문화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해야 할 장이 바로 교회임을 명심해야 한다.

      • 생명문제에서 본 농촌교회 활성화 방안 : 무안 운남중앙교회를 중심으로

        문귀병 한일장신대학교 아시아태평양국제신학대학원 2006 국내석사

        RANK : 249647

        생태위기의 극복은 인류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공동의 과제이다. 누구보다 우리 교회들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 되고, 우리에게는 행복의 보금자리가 되도록 잘 관리하여야 한다 특히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에 놓인 농촌이라는 특수성을 지닌 농촌교회는 생명을 살리고 생태위기를 극복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책임과 사명이 크다. 따라서 본 논문은 농촌의 문제들을 고찰하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주체를 농촌교회로 정하고 생명을 살리기 위한 성서와 생태신학적인 원리들을 탐구하였다. 논문을 정리하면서 토지나 환경, 농사와 농민, 농촌과 교회, 농촌과 도시, 그리고 전 우주적인 것에 대한 농촌교회의 역할에 관해 성서와 생태신학적인 계속적인 연구와 바른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먼저 목회자가 성서의 합당한 인식으로 변화되어야 하고, 교회내의 성도들이 변해야 한다. 농민이 변할 때 농촌이 변하고 농촌이 변할 때 사회가 변화될 것이다. 개인주의와 물질만능주의 등의 세상풍조를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활하는 삶으로의 회복이 있어져야 할 때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청지기로서 그의 피조물인 자연환경을 섬겨야 한다. 바른 창조신학 안에서, 농촌에서 농사하는 농부는 하나님을 섬기는 청지기로서 노동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농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사랑의 사귐 속에 존재하시며 하나님과 창조세계와의 관계, 또 창조에 속한 모든 생명체, 무생명체의 관계도 지배와 복종이 아닌 사랑과 상호 존중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이해가 생태위기를 극복하는 신학적 원리가 된다. 어떤 것도 소홀하지 않고,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모든 것을 사슬처럼 연결한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잠 11:25)는 말씀은 땅을 자본으로 하여 농사를 짓고 생활하는 농부에게도 적용되며, 모든 생태계에 적용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와 화평케 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셨고,(마 5:9) 우리 인간이 사람이든 동물이든 아니면 식물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해 '마음을 다 할 때' 세상의 탄식소리를 듣게 되고, 그들과 함께 탄식하며 그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성령님으로부터 얻게 된다고 가르친다. (마 22:37-40) 이런 인식들이 농촌이 자연과 이웃, 그리고 도시와 모든 세계를 향해 행해야 할 삶의 원리들이다. 농촌지역의 황폐화 속에 농촌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길은 생명 살리기 운동의 실천에 있다. 나아가 농촌교회의 회복은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생존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전 지구적인 생태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구심점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다. 농촌교회는 농촌교회의 주어진 사명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는 생명을 살리는 목회의 현장이 농촌이라는 분명한 비전을 가지고 농촌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실천해 갈 수 있는 목회자와 교회가 요구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농촌을 주님의 마음으로 품는 마음과 주님의 사랑으로 농촌의 필요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헌신된 모습이 교회에 있어야 한다. 모든 피조물과 함께하시며 함께 탄식하시는 성령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우주적 구원을 교회공동체에서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의 심장과 눈이 되어 만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랑의 눈은 강도만난 이웃과 같은 농촌의 필요들을 보게 되는 안목을 주고 움직이게 한다. 지금까지 우리 교회는 농촌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주체로서 활동하지 못했다 사람들의 영혼구원과 교육적인 섬김에 치중해 있었다. 이제 우리 교회의 사역도 자연과 농촌과 모든 피조물을 포함하는 생명을 살리고 풍요롭게하는 사역으로 맞추어 져야 할 것이다. 농촌교회로 농촌의 문제인 농지감소와 오염, 인구감소와 고령화, 농촌에 대한 정부정책에 필요한 실천방안들을 모색해 보았다. 실천방안들을 꾸준히 실천하면서 평가가 이루어지고 효과적인 섬김을 위한 연구와 노력이 계속 있어야 할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다. (슥 4:6) 본 논문을 통해서 생태목회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농촌교회의 구체적인 사역방향의 설정과 함께 그 정체성을 확인하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께선 세 가지를 요구하신다. 첫째는 정의, 둘째는 자비, 셋째는 겸손히 하나님과 행동하는 것이다. (미 6:8) 탐구한 실천방안들을 겸손히 성령님과 함께 행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계획하신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는(요 10:10) 축복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 세계에서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고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통해 이 일을 이루심을 믿는다.

      •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제고를 위한 성찬의 활용 가능성 연구

        최재룡 한일장신대학교 아시아태평양국제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RANK : 249647

        1.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및 그 제고를 위한 과제 한국교회는 대단히 풍부한 선교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선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국교회의 선교자원들은 바르게 정렬되어 있지 못하다. 다시 말하면, 한국교회의 선교자원은 풍부하나 한국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은 대단히 미약하다. 그것은 한국교회의 뿌리깊은 반공성과 사회성 결여, 그리고 분열상 때문이다. 1960년대 이후 형성된 에큐메니칼 진영이 성장하면서 1980년대와 그 후에 이르러 한반도 평화의 진전에 크게 기여한 바가 있지만, 기본적 선교 자원의 부족으로 한계에 다달아 있다. 오히려 대다수의 선교자원은 뿌리깊은 반공성으로 인해 한반도 평화실현의 과제에 있어 역행 양상을 보이고 있는 보수적 복음주의 진영에 축적되어 있다. 이 둘 사이의 분열관계가 한국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을 크게 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제고를 위해서는 몇 가지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에큐메니칼 진영의 양적 성장이 이루어져야 한다. 진보적인 교회는 양적 성장을 이루어야 하고, 한반도 평화 문제를 선교적 과제로 인식하고 있으나 보수적인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들은 자신이 사역하고 있는 개교회 내에서 선교적 방향 전환을 이룸으로써 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평화지향성과 평화 실현체로서의 사회적 공인을 얻어 내야 한다. 교회의 사회성을 보다 깊이 인식하고 민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선교활동을 일으켜야 하는 것이다. 이룰 위해서는 선교신학적 방향전환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적 정체성만이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과 인류공동체척 정체성을 자각하고 아울러나가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간의 상호 인정과 협력을 통한 역량의 극대화가 요청되고 있다. 북한교회는 외견상 그 선교역량이 매우 미약하다. 교인의 수나 교회 지도자의 수 등 기본적인 선교자원이 대단히 빈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체주의 사회인 북한 체제의 특성상 종교의 자율성이 약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갈등 경험 안에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내면화되어 작용하고 있다. 북한사회 내에서의 역할 가능성이 매우 한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한계점이 북한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을 제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교회는 나름의 역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적대적인 여건 안에서도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에 적응하면서 그 안에서의 생존을 이루어냈다. 또한 사회건설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기여를 함으로써 교회를 세우고 교회지도자를 길러낼 수 있을 정도로 운신의 폭을 넓힘으로써 향후의 발전기반을 마련해 놓았다. 그 과정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신앙형태를 창출함으로써, 세계교회 및 남한교회와의 관계맺기를 통해 한반도 평화선교에 참여하여 기여하는 정도의 역량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북한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제고를 위해서는 교회의 기본적인 선교기반을 확충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우선은 체제 내에서의 위상을 강화함으로써 자율성을 보다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교회의 리더쉽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 한국교회의 협력이 이러한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북한교회가 처해 있는 체제적 특수성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또한 북한교회가 수행하는 통일전선체적 기능을 인정하고, 가능한 한도 내에서 그것에 협력해 주는 것은 매우 요긴한 일이 될 수 있다. 북한교회의 선교자원 확충을 위해 시급히 요청되는 목회적 신학적 지도력의 육성을 위한 인적 물적 지원과 교류도 매우 유효한 일이 될 것이다. 북한체제에서 북한교회는 남한 및 서방세계로 나아가는 접촉의 통로라는 통일전선체적 차원에서 가치를 갖는다. 그러므로 남한교회가 북한교회를 통하여 북한사회에 대한 접촉과 지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확대해 나감으로써 북한교회의 체제 내 위상을 보다 높여줄 수 있다. 또한 북한교회가 사회 내에서 기여할 기회가 많아짐으로써, 북한사회 내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들이 불식되어지고 새로운 관계설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 또한 남한 교회는 북한교회의 지도력이 강화되도록 하기 위해 북한교회의 신학수준이 높아지도록 학문적 교류 및 신학교육 지원을 할 수 있다. 평양신학원에 신학서적들과 교육기자재들을 지원하고 장학금을 지원할 수 있다. 장기적으로는 신학교육 요원을 파송하거나 북한교회의 인재들이 남한 내의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2. 성찬예전의 활용 가능성 이상과 같은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제고를 위한 과제들의 해결에 성찬이 활용될 수 있다. 선교적 성격을 강하게 갖는 성찬예전은 상징의 생산지로, 선교와 예배의 통전 지점으로, 그리고 영성의 고양처로 역할하며 한반도 평화 정착과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의 제고에 기여할 수 있다. 다시 한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신학과 종교의 추상적 개념들을 전달하고 수용하는 유통관계에서 상징이라는 매개체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리고 기독교의 경우 가장 풍부한 상징유통의 현장이 바로 성례전이다. 일상성을 대변하는 상징 매개물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그 의미들이라고 하는 비일상적 차원들이 일상화되고 구체화, 경험화되는 현장이 바로 성례전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성찬은 규칙적으로 행해질 수 있으면서도 풍부한 상징력을 담고 있는 예전이다. 이러한 성찬예전의 상징적 기능은 한반도 평화선교를 위해서도 넉넉한 활용 가능성을 지닌다. 우선은 남과 북의 교회가 만나고 교류할 때 성찬을 적절히 시행함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강력한 상징을 표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를 한반도 평화의 상징으로 드러낼 수가 있다. 남과 북의 교회가 함께 참여하는 성찬예전은 한반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며, 그것은 곧 남북통일을 가리키는 지시자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또한 이 성찬예전은 한반도 교회의 자기시여적 선교의 사명을 새롭게 함으로써 남과 북 양측의 교회로 하여금 한반도 평화선교에 보다 매진토록 힘을 부여할 것이다. 이러한 일은 그 자체로 선교활동임과 동시에 남과 북의 교회가 공히 한반도 평화선교 수행자로서의 역량을 크게 강화하는 일이다. 한국교회의 일치 문제에도 성찬의 상징 기능을 활용함으로써, 한국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 제고에 기여토록 할 수 있다. 한국교회의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을 저하시키는 주요 요인 중 하나가 교회일치의 실패이기 때문이다. 성찬예전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교회의 본질적인 일치성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교회일치 과제의 실천을 위해 성찬을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치성의 본질을 먼저 주목하고 확인함으로써, 차이를 넘어선 자기동질성에 따라 대화하고 협력토록 하는 데에 성찬예전이 긴요하게 활용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선교와 예배는 각각 기독교의 관계성과 자기정체성의 표현을 대변하면서도 서로가 긴밀한 관계를 갖는 활동들이다. 특히 이 둘은 공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활동에 본원을 두고 교회의 참여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본원적 일치성을 갖는다. 이 둘의 불일치는 각각의 왜곡을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바른 선교, 바른 예배는 선교와 예배의 일치가 담보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선교와 예배의 가장 확실한 통전지점이 바로 성찬이다. 성찬은 기독교 예배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선교자들의 계약관계를 새롭게 갱신하고 흥기하는 선교적 예전이기 때문이다. 선교와 예배의 통전은, 한반도 평화선교 역량과 관련하여,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진영과 보수 진영 모두에게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의 자기정체성을 가장 분명하게 표현하는 교회 활동인 성찬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에큐메니칼 진영은 기독교적 정체성이 불분명하다는 복음주의 진영의 우려를 확실히 불식시키고 상호협력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한국의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는 예배와 선교의 자기봉사적 내향성이라고 하는 왜곡을 바로잡고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고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지는 하나님의 활동에로 각각 내향화하고 또한 외향화함으로써 자기정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는 선교와 예전의 통전을 필요로 하며, 성찬이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부분이다. 한반도의 평화는 남과 북의 평화적 통일을 통해 자주적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중요한 이정표로 삼지만, 그곳에 이르기까지와 그 이후의 여정은 매우 복잡하고 많은 부침을 동반하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매우 길고 지루하며 혼란스럽기까지 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발걸음이 중단없이 이어지기 위해서 절실히 필요케 되는 것이 평화를 위한 영성의 측면이다. 한반도 내에 뿌리내린 교회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여정에서 끊임없는 영성의 물줄기가 되어주어야 한다. 끊임없이 평화의 비전을 선포하고 이정표들을 만들어 나갈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헌신할 인재들을 양성하여 공급하고, 평화의 모범을 창출하여 민족적 평화공동체 창출을 도울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평화적 영성 고양처로서 성찬의 활용 가능성은 크게 두드러진다. 성찬예전을 통해 복음과 선교의 평화적 의미가 강조되도록 할 수 있다. 말씀을 듣고 배움으로만이 아니라 성찬예전을 통해 평화와 화해의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 사건 및 평화와 화해의 화신이신 그리스도의 몸을 경험함으로써 교회 안에서는 평화와 화해의 영성이 크게 고양될 수 있다. 성찬예전을 중심으로 예배교육을 시행하면서 교회의 평화교육이 크게 강화될 수 있다. 이를 통해 평화의 일꾼들이 길러지고 그들의 평화 영성이 고양되며 그들을 위한 후원기반이 든든해 질 수 있다. 특히 개교회 내에서 한반도 평화와 관련한 회중들의 인식을 전환하고, 회중 내에 평화와 화해의 영성을 진작시킴으로써 한반도 평화선교를 위한 개교회적 활력과 전교회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제고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의 선교 자원들이 전면적으로 재조직, 재배치됨으로써 교회의 선교 잠재력이 한반도 평화선교에서 현실화되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3. 선결되어야 할 과제들 이처럼 성찬예전은 한반도 평화선교와 그 역량강화를 위해 활용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활용의 실제에 있어서는 먼저 해결되어야 할 과제들이 있다. 한국교회는 다음의 두 가지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 점은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에 공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선은 한국교회의 예배가 갱신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초기 선교사들이 전하여 준 예배형태를 유지해 오고 있다. 청교도적 혹은 개척자 예배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이 예배형태로 인해 한국교회의 예배는 설교에만 주안점을 둘 뿐 성찬예전을 도외시하고 있다. 성찬은 1년에 2회 정도만 시행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교회의 예배는 성찬예전을 회복해야 한다. 성찬예전이 말씀의 예전과 함께 예배의 중요한 기둥으로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찬의 횟수뿐만 아니라 성찬의 의미 부분에서도 갱신이 필요하다. 한국교회의 성찬은 '기념'에만 강조점을 두고 있어,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대속성을 회상하는 것으로서만 시행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BEM 문서에 나타나고 있는 성찬의 5가지 의미 등을 참고하여 성찬의 다양한 의미들을 교육하고 그것이 교회의 선교적 삶과 영성으로 기어지도록 하는 예배의 갱신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또한 선교신학적 전환의 노력이 필요하다.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 모두 선교신학적 전환을 이루지 않고서는 선교의 물적 기반의 확충과 평화지향성, 교회의 일치라고 하는 과제를 동시적으로 추진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성찬을 통하여 상징을 생산하고, 예배와 선교의 통전을 이루며 평화와 화해의 영성을 고양시켜 한반도 평화선교 및 그 역량 제고를 실천하는 것은 요원케 된다. 이에 관해서는 세계교회의 사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20세기 후반 세계 선교신학계는 통전적 관점으로의 수렴을 이루었다. 에큐메니칼 진영과 복음주의 진영이 서로의 강조점이 동시적으로 필요함을 인정하고 각각 문서화하면서 통전적 선교를 실천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즉 복음전도와 그에 부합하는 사회참여를 동시에 포괄하는 통전적 선교의 필요성에 대해서 양진영이 일치를 보고 있다. 복음주의의 "로잔언약"(1974년)과 에큐메니칼의 "Ecumenical Affermation: Mission and Evangelism"(1982년)이 바로 그 문서들이다. 물론 두 선교운동이 걸어온 여정이 다르듯이 통전성 이해의 세부적 구조에서는 차이점들도 안고 있다. 그러나 선교의 통전성이라고 하는 동일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이 정도의 차이점은, 장애물이라기보다는 건전한 다양성을 위한 토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교회의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 양 진영은 세계교회의 이러한 흐름과 접맥하는 가운데, 각각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의 통전적 선교신학을 수용할 수 있다. 서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인정할 수 있는 정도의 선교신학을 수립하고 실천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 한국교회의 통일 운동과 북한 선교 정책

        박문기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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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최후 명령, 곧 주님의 지상명령은 선교이다. 그리고 오늘 한국 교회를 향해 주님의 최후의 명령이 있다면 그건 단연코 북한 선교일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 사명이다. 한국 교회의 북한 선교는 짧은 시간에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선교 경험과 전략의 부족으로 부정적인 오류를 범하기도 하였다. 한국 교회는 북한 선교 활동을 하면서 보여준 허점이나 실수를 거울삼고,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사랑의 선교활동을 기초 삼아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힘찬 도약을 해야 한다. 통일선교는 한반도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의 구현을 통해서 생명을 살리고 지키고 보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선교는 통일의 과정과 방법이 정의롭고 평화적인 것이 되도록 이끌어야 하며 그 결과가 정의를 이루고 평화를 이루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 교회는 한반도의 치유와 화해를 넘어 통일한국을 위해 감당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첫째로, 한국 교회는 자기 스스로의 개혁과 교회일치운동에 앞장서야 한다. 한국 교회는 자신의 치부를 제거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개혁해야만 한다. 특히 한국 교회는 수많은 교파들로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단일구조의 가톨릭처럼 효율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이제라도 힘을 모아 개별적인 교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모아 교회의 일치운동을 통해서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둘째로, 좀 더 통합적이고 포괄적인 신학적 접근이 요구된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생각할 때, 북한 선교의 환경은 매우 급박하게 변하고 있으며, 방향은 매우 다양해질 전망이다. 따라서 이제는 다양한 북한 선교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변화를 계속 모색해야 할 것이며, 특히 통일 신학의 정립을 통하여 모든 계층과 민족을 화해시키는 이념과 실천적 방안을 부단히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구약성서의 희년정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비폭력 사랑을 우리 민족의 고난의 역사와 분단의 현실에서 재해석 함으로써 민족의 통일적 신앙과 도덕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의 입장에 서서 고통받고 있는 북한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보다 더 인식해야 할 것이다. 남한교회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북한에 '교회를 재건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공동체를 건설할 것인가?' 하는 근본 문제는 둘 다 증요하고 필요한 일들이지만, 무엇보다도 당장 고통받고 있는 북한이 보다 행복한 상황을 맞을 수 있도록 남한교회가 기도하고 고통의 해결을 위해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즉, 교회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보다 많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통일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2002년 배급제를 폐지함으로서 사회주의적 사회보장제도를 축소하여, 이제 시민적 정치적 권리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 영역까지도 악화되고 있다. 한국 교회는 북한주민들을 위한 사회복지선교를 보다 폭넓게 시행해야 한다. 교회 내의 물적 자원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북한주민들의 구호와 북한사회의 개발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선교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완성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크신 선교 계획과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교회는 하나님의 원대한 민족 복음화의 계획과 뜻에 동참하고 성취해야 할 사명과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평화통일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다. 이제는 평화 통일과 북한 선교가 한국 교회의 최대 관심사의 한 가운데에 들어서야 한다. 한민족의 통일을 위해 가장 위대하고 절대적인 역할을 감당할 주체세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한국 교회이다. 이제 한국 교회는 구체적인 실천과제를 목표로 삼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교회 안과 밖에서의 개혁과 갱신 그리고 부흥으로 나아가 복음의 역량을 확대시켜 민족의 숙원과제인 평화 통일과 교회의 선교과제인 북한 선교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 니케아·칼케돈 신조(信條)로 본 종교다원주의 신관(神觀)의 문제 연구

        문영옥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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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以上)에서 삼위일체 논쟁과 기독론 논쟁(論爭) 과정 속에서 형성된 니케아 신조와 칼케돈 신조에 대하여 살펴보고 두 신조의 관점(觀點)에서 종교다원주의 신관(神觀)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과 기독론(基督論)은 모두 아들 하나님에 대한 논쟁(論爭)이었다. 하나님을 잘못 이해한 많은 이단(異端)들이 출현(出現)하여 잘못된 신학(神學)을 외치고 있을 때 그 이단(異端)에 맞서 진리(眞理)를 수호(守護)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사람들로 인하여 결국 하나님의 진리는 보존(保存)되고 계승(繼承)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왜곡(歪曲), 변질(變質)될 위기에 놓일 때마다 신조(信條)를 만들어 다함께 하나님에 대한 바른 고백(告白)을 함으로써 이단들에 대처해나갔던 지혜(智慧)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발견해낼 수 있다 지금의 시대 역시 하나님에 대한 논쟁(論爭)이 활발했던 아리우스, 사벨리우스 시대나 네스토리우스, 시릴의 시대와 다를 바가 없다. 제 2차 바티칸공의회로 인해 기독교 내부에서도 종교다원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가고 있는데 제 2차 바티칸공의회는 타종교와의 대화(對話)를 시도하기 위해 그들을 포용(包容)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로 인해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유일성(唯一性)과 절대성(絶對性)이 큰 위협(威脅)을 받게 되었음은 그 누구도 부인(否認)할 수 없다. 그 핵심(核心)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는 인류의 일치(一致)와 사랑을 증진(增進)시킨다는 정신으로 타종교와 보다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접촉할 필요가 있다. 둘째, 힌두교와 불교의 종교철학, 명상(瞬想)과 자비행, 종교의식과 신화들 속에서 궁극적 실재자의 현존(現存)을 인지(認知)했음을 확인한다.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종교들 안에 있는 참되고 거룩한 것들을 어느 것 하나라도 배척(排斥)하지 않는다. 첫째,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선포(宣布)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은 종교적 생명의 온전함을 찾게 될 것이며 그 분 안에서 하나님은 만물(萬物)을 자기와 화해시켰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권면(勸勉)한다. 신중한 사려분별의 마음과 사랑의 심정으로 타종교와의 협의(協議)와 공동 연구에 참여할 것과,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자신의 기독교 신앙과 삶을 증언하면서도 다른 종교 안에서 발견되는 선한 영적 요소와 도적적 요소, 사회 문화적 가치들을 인정해야 하며 보존(保存)하고 그들을 격려해야 한다. 넷째, 교회는 자비롭고 전능하시며 자존(自存)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는 이슬람교도를 존경으로 대한다. 인격적 창조주 신관(神觀), 죽은 자의 부활 신앙과 심판 신앙, 기도와 이웃 선행(善行)과 단식(斷食)을 중심한 신앙 경건 생활, 전능하신 하나님의 경륜(經綸)에 복종하려는 태도, 예수의 신성(神性)을 부인하지만 예언자로 존경하며 아브라함과 마리아에 대한 태도 등을 기억한다. 다섯째,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는 믿음의 족장(族長)들과 모세와 예언자들의 믿음과 그 믿음의 유산(遺産), 하나님이 이스라엘 선택을 통한 특별하신 경륜과 계약(契約) 등을 공유(共有)하는 관계로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여섯째,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形狀) 안에서 피조되었으므로 그리스도 교회는 인종(人種), 피부색, 계급, 신조(信條)의 차이를 들어 형제인 인간을 갈라서 대하며 갈등관계로 몰아넣은 모든 이론(理論)과 사상(思想)은 '그리스도의 마음' 에 반대되는 것으로 단호히 거절한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자 역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같은 입장에서 그들의 사상(思想)을 전개해 나간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기존의 타 종교 전통에 대한 그리스도교 입장이 종교(宗敎) 다원(多元) 현상의 상황 안에서 견지될 수 있는지 의문(疑問)을 제기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철저하게 서양의 사고방식의 틀 속에서 전개(展開)되는 교회적(敎會的), 교의적(敎義的) 신학(神鐘)의 한계를 넘어 탈(脫) 서양적이고 탈교회적인 사고방식의 토대를 세우고자 시도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공통적으로 세계 종교들의 상대성(相對性)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교 역시 세계 종교들 가운데 하나로 규정된다. 그들은 모든 종교 전통의 가치를 동등(同等)한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교의 배타적(排他的) 혹은 규범적(規範的) 성격에 대한 주장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다원주의 신학자들은 패러다임의 전환(轉換)이니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니 루비콘 강을 건넜느니 하는 표현(表現)들을 통해 그리스도교가 세계 다른 종교들 앞에 주장하는 우월성(優越性), 절대성(絶對性), 규범성(規範性) 안에 들어 있는 유일성(唯一性)의 진리를 비판한다. 그들에 의하면 신약 성경 전체를 해석하는 관건(關鍵)이 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그리스도의 절대적 유일성(唯一性)의 주장은 사실상 특정 문화적 맥락에 의존하는 표현들과 역사적으로 제한되어 있는 세계관(世界觀)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 다원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편성(普遍性)이 있다면 다른 구원적 모습들이 의미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의 욕구에 응답하는 메시지의 성격과 관련지어서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唯一性)을 부인(否認)하며 각 종교들이 신앙하고 있는 그 모두가 그리스도이며 중보자라고 하면서 예수는 그 여러 중보자들 중 하나라고 보고 있다. 이렇게 될 때만이 비로소 모든 종교들을 이해하고 포용(包容)할 수 있으며 평등(平等)한 입장에서 타 종교간의 대화(對話)가 가능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명백히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와 기독론(基督論), 또 성경(聖經)과도 위배되는 주장이다. 이와 같이 종교 다원주의자들의 잘못된 성경이해로 인한 신학(神學)과 주장(主張)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세계 여러 종교 중의 하나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역시 여러 중보자 중 하나에 불과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삼위일체론, 특히 기독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다. 우리는 다시 성경(聖經)으로 돌아가야 한다. 성경(聖經)에 대한 바른 이해만이 하나님의 진리가 왜곡, 변질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유일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고백함으로써 다원주의(多元主義) 현실에서의 신학(神學)의 방향을 바로 잡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 본회퍼의 공동체론에 관한 연구

        한재영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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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우리는 본회퍼의 삶과 사상을 그가 지내온 시대적 상황과 삶의 자리 그리고 그의 여러 저서들과 그를 연구한 여러 연구서적들과 논문들을 통하여 살펴보았다. 이제 각 장의 내용을 간략하게 다시 한번 더 살펴본 후에 본회퍼의 공동체적 교회론이 쇠퇴해 가는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에서 갖는 의미를 짧게 논하고 본 논문을 마무리 하고자 한다. 본 논문의 2장에서는 본회퍼가 살아온 삶의 여정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고난의 시대 속에서 그가 어떠한 모습으로 성장하였고, 어떠한 신학적 배경 속에서 그의 신학을 정립시켜 왔으며, 이러한 시대상황이 그의 신학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갓세이가 그의 생애를 사상의 변화와 시대적 변동에 따라 크게 세 시대로 구분한 방식을 따라 정리해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신학적 배경을 통하여 그가 고민하고 실천하며 살았던 그의 주요 신학적 입장을 그의 신학 방법론과 신학 내용으로 구분하여 그의 저서들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알아보면서 본회퍼의 신학을 간단히 살펴보았다. 3장에서는 그가 핀켈발데의 공동체 생활을 토대로 기록한 『신도의 공동생활』과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성도의 교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를 통한 공동체의 사귐과 교회의 본질적 구조인 '서로 위함' 과 '더불어 있음' 속에 현존하는 교회공동체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와 성육하신 하나님과 낮아진 그리스도 등을 통하여 본회퍼의 하나님 이해와 교회공동체론 이해를 제시하였다.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형제들이 서로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 라고 말한 본회퍼는 무신의 세계에서 보이는 공동체 생활의 축복을 강조하면서 미래의 교회는 성숙한 세계, 무신의 세계를 전제로 하면서 설교와 신학이 구체적인 그리스도의 설교이며, 해석이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에 '신앙의 비밀 훈련' 으로 공동의 삶, 예배, 기도, 성서의 명상이 보존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로운 형태의 교회는 교권주의와 개교회주의가 사라지고 세상의 사회적 정치적 삶에 참여하여 세상에서 '빛과 소금' 의 사명을 다하며 복음을 말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실재 삶으로 살아가며 실천하는 교회이다. 4장에서는 작금(昨今) 한국교회의 현실과 문제들을 살펴보고 본회퍼의 성육신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바라론 그의 교회공동체론을 '어떻게 한국교회에 적용 · 수용할 것인가?' 를 고민해 보았다.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가 지니는 신학적 의미는 두 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대리행위 그리고 교회공동체에 기초한 본회퍼의 하나님 이해가 고대 서구철학의 형이상학적 실체개념에서 벗어나 공동체적 관계성에 근거함으로써 새로운 신학적 전망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 하나님 이해를 이제는 '십자가에서 고난받고 죽으신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이해함으로 교회공동체 가운데 실제 하시는 현실적인 하나님 이해의 길을 연 것이다. 둘째는 본회퍼의 하나님 이해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에 근거함으로써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 이해로부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하나님 이해로 '인간을 위해 인간이 되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는 고난 받는 구체적 이웃의 구체적 상황과 유리될 수 없는 현실의 신학이다. 이러한 본회퍼의 신학은 이론과 실천, 전통과 상황을 통합시킴으로 이후의 세계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현실에서도 본회퍼의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로서의 교회공동체의 신학은 큰 의미를 가진다.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이끌어온 근본주의 신학은 성서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를 제시해 주지 못하였다. 이런 점에서 본회퍼의 철저한 그리스도론적 하나님 이해와 그리스도의 대리행위로서의 교회공동체의 삶은 한국교회 공동체에 건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방향과 성서관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다.

      • 복음주의 선교신학과 로잔운동의 발전에 관한 연구

        박재현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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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으로 복음주의 선교신학을 살펴보며 로잔언약의 발전과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로잔 언약에 나타난 복음주의 선교신학은 소위 전통적인 복음주의자들의 신학을 전제로 하며 발전하였다. 즉, 로잔 신학의 근거로서 성서가 기록된 말씀으로서의 권위와 능력이 있음을 확인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전제한다. 또 구원은 하나님과의 화해이며, 이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써만 얻어진다는 이신득의 교리를 확인했다. 결국,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보편성을 확인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티의 영향을 받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혼합주의나 만인구원론의 위험을 배격한다고 로잔 언약은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로잔 운동은 기독인들도 기타 종교들이나 이념들을 바로 이해할 필요도 있고 타종교나 이데올로기를 대할 때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척도로 삼아 진리를 판별해야 한다고 입장을 갖는다. 다만 로잔의 입장은 타종교와의 대화도 인정하나 그런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전해야 하며,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하나의 방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로잔에 나타난 복음주의의 선교신학은 복음전도, 또는 세계 복음화를 교회의 최고의 사명이라고 고백한다. 지금처럼 복음이 확장된 것이 전도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복음전도의 내용은 반드시 성서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적어도 네 가지 요소를 가져야 한다고 한다. 먼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중심이 되는 복음의 사건, 둘째는 복음의 증언 즉, 사도들에 의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복음선포, 세 번째는 복음의 약속, 네번째는 회개와 믿음이라는 복음의 요구 곧, 은혜에 대한 요구라는 요소들을 말한다. 이 복음 전도는 복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며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죄의 용서와 성령의 은사를 주시는 예수를 전하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은 바로 예수임을 밝히고 있다. 세 번째로 전 복음에 대한 이해인데, 복음은 통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잔 언약은 전도와 사회 참여의 관계에 있어서 "전도와 사회, 정치참여 이 두 가지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라고 말함으로써 전통적으로 견지해 오던 견해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목적과 활동에 기초하는 선교신학을 전개한다. 교회의 선교적 과제를 삼위 일체적으로 이해함은 선교를 교회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런 신학적 접근은 선교를 교회의 일로 보던 입장에서 선교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선교의 모든 상황과 전망을 폭넓게 보게 해준다. 이렇게 폭 넓게 이해하는 선교개념은 에큐메니칼 운동권에서 전개되고 있는 신학적 입장이나 선교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로잔 언약에 나타난 신학은 복음전도와 사회참여를 혼도해서는 안된 다고 못 박고 있다. 전도의 우선성을 놓치지 않는 사랑의 봉사가 복음주의 선교신학이 추구하는 사회참여의 모습이나 복음 주의자들은 봉사는 물론 사회제도나 구조의 개혁을 위해서도 꾸준히 일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로잔 언약에 나타난 복음주의 선교신학이다.

      • 오순절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

        이혜선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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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에 들어가면서 기독교에 신앙적 활력소를 제공한 것 중의 하나는 오순절 성령운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00년 찰스 파램(Cllarles F. Parham)이 성경학교의 문을 열면서 소위 방언파라는 이를으로 그 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래 한 세기도 되기 전에 이미 국제적인 대 교단으로 급성장 하였고, 그 증가 추세는 아직도 둔화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20세기에 사는 인류들에게 기독교는 인류의 정신적 회복을 가져오게 하는 종교임을 일종의 정신운동민 "성령운동"을 통하여 보여줌으로써 "가뭄 들에 불어오는 신선한 비바람"처럼 느껴져서 인기를 얻기도 했다. 본문을 통해 얻어진 결과들을 장별로 요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1장 서론 부분으로서 연구 목적은 한국교인들이 바른 신학과 바른 성령운동을 통헤 바른 신앙 생활관을 정립하고자함이며, 연구의 방법은 오순절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여러 가지 문제들을 파악하기 위함이다. 제2장에서는 교회와 성령의 관계를 논하였는데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언제든지 하나님을 알게하고, 말씀을 듣고 깨닫게하고, 은혜를 보존케하고, 성장케하고, 부흥케하고 전진케한다. 제3장은 한국교회의 성령사역과 성령운동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운동은 한국교회를 급 성장시켜온 반면에 샤머니즘으로 전략시키고 신비주의로 빠지게 하는 오류를 범했다. 제4장에서 오순절 성령운동의 강조점을 말하는데 그것은 방언과 신유의 은사이다. 오순절 주의자들은 방언과 신유의 은사는 성령세례를 받은 성도들이 누려야 할 축복이라고 가리켰다. 제5장은 성령운동의 문제점과 그 영향을 살펴본 즉 문제점에 있어서 성령세례, 방언과대평가, 특정은사, 기복신앙 신학의 빈곤이며, 이런 문제점들로 인한 한국교회의 영향은 급성장으로 인해 신앙의 질적으로 볼 때 너무 형편이 없다. 즉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방언과 신유 등 화려한 "성령의 불꽃놀이"는 성령충만을 사모하는 기성교회의 많은 성도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영적 빈곤과 은혜였음을 더욱 절감케 하고 오순절주의야말로 한국교회 신자들이 "20세기 한국교회의 성령부재의 광야"에서 바라보고 나가야할 "성령의 구름 기둥이요, 불기둥" 이라는 생각에 빠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6.25사변이 안겨준 고통의 쓴 잔을 마시면서 인내하고 살던 50년대 중반부터 이 운동이 사람들기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후에는 무서운 속도로 파급되기 시작했다. 지난 30년 등안 이러한 운동으로 한국교회는 심한 열병을 앓는 셈이 되었고 일부에서는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운동의 초창기에는 일반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심지어는 이단이라는 정죄를 서슴치 않코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운동의 신학적 정당성이 어떠하든지 간에 거기는 별로 개념치 않고 교파를 초월하여 많은 성직자들과 평신도들이 직. 간접적으로 이 운동의 동조자가 되어 있고, 신학적, 교리적 비판의 칼날도 많이 무디어져 버렸다. 지금은 성령운동 그 자체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고 문제시하고 있는 내용도 거의가 예언, 악령추방 등 지엽적인 현상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성령운동이 한국교회에 미친 영향은 아무도 과소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유익이라고 한다면 신학적으로 성령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가져다주었고 목회적으로는 기성교회가 크게 각성할 수 있는 자극제의 구실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국가적으로는 교회인구의 증가를 가져오는데 크게 기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교회에 끼친 해독 역시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 번째, 비오순절계 교회의 신자들에게 침투해 들어가 그들로 하여금 "성령세례"와 그 증거들로서의 방언과 신유 등 "이적적 은사"들을 추구케 하는 오순절 교회, 성령집회 또는 은사집회에 열정적으로 참여케 하므로 소위 "주일오후 3시 기독교"를 형성해가고 있는 "신오순절주의"자 오늘날 기독교의 제3세력으로 급속한 확장세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현대교회의 성령운동과 특히, "신오순절로 이어지고 현대 오순절 주의가 한국 기독교계와 일반사회까지 누리고 있는 폭발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경험(그것이 신령한 체험이라고 할 지라도)이 하나님의 구원계시의 서책인 성경보다 높이 평가하는 경험주의적 신앙은 인간의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우월시 하는 사상 때문에 성경적 기독교의 바른 신앙과 신학을 변질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세 번째, 하나님보다는 하나님의 축복을 더 좋아하는 수복신앙과 성령운동 성령의 은사들을 더 열망하는 은사주의 등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에 무속신앙의 요소를 혼합시켜서 교인들의 영성을 흐려 놓았으며 성경말씀보다 체험을 우위에 후는 감각적인 신앙풍조를 조성시켜 놓았을 뿐 아니라 현실주의에 뿌리를 둔 기복신앙이 전통적인 경건주의 신앙을 크게 오염시켜 놓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필자가 성령세례, 방언의 은사, 신유들을 완전히 무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뜨겁게 사랑하며 전파하려는 그러한 뜨거움보다는 어떤 체험을 위해 몸부림치며, 어떤 은사나 방언을 해야만 참 신자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함이다. 또한 우리 주변에는 은사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하고, 그 사람들을 공격하며 이단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는 아무도 가지지 못한다. 다만 바울처럼 긍정은 하지만 소극적인 범위 안에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튼 한국교회는 개혁되어야 한다. 하나님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의 바른 신학의 정립이 시급하다. 즉, 물밀 듯이 밀려오는 이단과 신흥 성령운동의 신학 사조에 대한 바른 신학사조에 대판 바른 신학의 보급이 유기적으로 정비되어야 한다. 물질적 축복보다는 신령한 축복에 관심을 갖도록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일 것이다. 진정한 오순절 성령의 참된 역사는 "오직 성령과 더불어" "성경을 가지고" 역사 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다.

      • 몰트만의 교회론 이해

        김형준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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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20세기와 두 번째 천년대를 마감하고 21세기에 들어서서 이제는 세 번째 천년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 있는 시대적 변화를 겪을때마다 우리는 지난 시대를 돌이켜보고 앞으로 올 시대를 내다보는 작업을 하곤 한다. 이렇게 긴 역사를 통해서 보면 한국교회의 역사는 100년을 조금 넘어선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역할에 있어서만큼은 그 이상이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길지 않은 한국교회의 역사에 비해 그 순기능도 지대했던 것에는 이의가 없으나 또한 그 역기능에 대한 부분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다. 이에 더 나아가야 할 한국교회의 앞날을 위해 교회를 향한 진적의 소리에 겸허히 귀를 기울이고 점검해 보아야 할 때이다. 한국교회사 100년을 통해 이루어 낸 부흥과 발전은 세계교회의 역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그야말로 괄목상대할 만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도 놀랄만한 성과를 이루어 낼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믿음의 선배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부흥과 성장으로만 치우쳐져 가는 듯한 한국교회의 시선에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나타나고 1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한국교회는 그 결과로 인한 자체적 문제와 고민에 몸살을 앓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교회는 언제나 국가의 위기 속에서도 그리고 국민의 불안과 불만을 대변하면서 교회뿐만이 아닌 한 민족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다. 사회 안정과 세계 평화, 그리고 사회 문제의 예방과 사회 변동에 대한 촉진제 역할의 중심에는 언제나 교회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러나 그 과정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때로는 사회 불안과 분쟁에, 그리고 사회 문제의 주체와 사회 변동을 오히려 억제하는 데에 교회의 역할이 적지 않았음을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한국교회의 외적이고 양적인 면에 치우친 성장주의는 "현세적 번영과 안일추구"라는 관점에서 물량과 타협 지향적이 되어 교회와 복음의 순수성을 변질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에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다원주의 사상이 교회 내에 급속도로 퍼지게 되면서 교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가 하면 비현실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종말론으로 인해 많은 성도들의 신앙적가치관이 위협을 받고 있음에,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위기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는 변화하는 세계를 바로 인식하고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해야할 때이다. 과거와 현실의 맥을 더욱 견고히 하고 하나님 부르심에 합당한 한국교회의 미래적 사명을 깨달아 더욱 장성한 모습으로 발돋음 하기 위해 보다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로 거듭나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렇다면 오늘 한국 현실에서 교회란 무엇을 의미하며, 교회는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참으로 중요하다. 단순히 일정한 장소에서 예배드리는 모임이 교회를 의미하고, 교인의 수가 증가하는 것이 교회 성장의 지표가 되고, 전체 인구의 20%이상이 등록 교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마치 교회가 할 일을 다 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오늘 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아닐까? 혹 참 교회의 모습을 물량주의나 자본주의의 논리를 통해서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한국교회의 모습은 아닐까?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교회란 무엇이며,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해서 몰트만의 교회론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몰트만은 일찍이 '희망의 신학'을 주창하며 정치 신학을 전개하였으며 21세기를 시작하는 현실 속에서 전 세계가 함께 당하고 있는 위기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그의 신학은 메시야적 신학이며, 삼위일체론에 근거하고 있는 신학이며, 에큐메니칼 신학이다. 따라서 우리는 몰트만의 교회론을 이해하는 것이 현재 우리가 닥친 교회의 위기 상황에도 적절한 대답이 될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몰트만이 제시하는 교회론을 살펴보고 그가 말하는 교회의 참 모습을 다시 되새김으로써 오늘의 한국 교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 흑인신학과 오순절운동을 통해 바라 본 흑인영성 연구

        오무일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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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에 즈음하여 주요 오순절 교단들은 흑인들의 인권 쟁취 추진을 공식적으로 지원했다. 그 해 클리블랜드 하나님의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인내는 인종 차별과 혐오를 용납할 수 없다"라고 선언하는 "인권"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 결의를 이행하기 위해 하나님의 교회는 1966년 차별화되어 있던 "유색인들의 모임"을 철폐하고 교단에 속한 흑인 교회들을 교단의 본체로 흡수함으로써 완전한 통합을 이루었다. 감리교회는 아직도 전체가 흑인인 "중앙관할 구역"의 운명에 대해 논쟁을 계속하고 있을 동안에 이러한 조치가 취해졌고 이 일의 진행이 완료되었딘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 오순절주의자들은 실제로 보다 전통적인 기존의 개신교 교단들의 업적을 능가하였다. 기존의 개신교 교단들보다 짧은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으므로 오순절 단체들이 20세기 인종문제에 관한 요구 사항들에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미국 기독교에 있어서 단 하나의 유력한 인종혼합적 조합으로 시작한 그들은 당시의 사회적 압력에 고개를 숙여야 했고 피부색의 차이로 분열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후반세기 동안 오순절주의자들이 다시 한번 교회의 인종 간 단결을 주도할 수 있으리라는 여러 가지 징후들이 있었다. 같은 맥락에서 한국에서 오순절의 성령운동이 성장하는 이유는 한국문화의 저변에 자리잡고 있는 고대 또는 원시 종교적 요소들을 수용하고 변형시켰다. 기독교가 불교와 만났고 유교와 만났다. 이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흑인신학이 출발했던 조건들과 만난다. 그것은 민족 특유의 고유의 문화와 다른 문화가 만날 때 전적인 수용이 일어나지 않고 거부되거나 의심되어지고 때로는 충돌하면서 발전한다. 흑인신학이 백인들만의 예수를 거부하고 회의하면서 그들의 정체성을 인식해 갔던 것이다. 둘째로, 치열한 경쟁의 도시 사회 속에서 소외하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사회적 변화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책임을 부여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몇 가지 문제점들도 야기되었다. 첫째로는 성령을 받은 자는 물질적인 축복까지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축복받지 못한 자들은 성령의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측은히 여긴다. 이것은 아주사 스트리트 부흥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 의해 시작된 것에 비교하여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무엇이든지 수치개념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도의 경우에도 몇 명 정도 전도되었는지 질적인 것은 보지 못하고 수적인 것을 기준으로 한다. 그리고 세 번째로 특정 성령운동 교회의 제도화와 그 교회 지도자의 카리스마화 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무교를 기독교에 지나치게 수용함으로써 주체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여의도 순복음 교회가 가난했던 한국사회의 이농자들의 안식처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현실적 가난과 소외의 조건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니 복음은 한없이 기복화 되고 세속화되었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교회의 외적인 성장을 가져오는데 일조(一助)했을지 모르지만, 내적인 부분에 많은 부실을 가져왔다. 복음주의가 담고 있는 약점의 일환이기도 하다. 지나치게 신비적이고 추상적인 메시지는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는 수단이 될 수는 있었을지 몰라도 성숙한 기독교인이 배워야 할 많은 것들을 상실케 했으며 나아가 복음의 변질을 가져왔다. 또한 기독교가 가지는 사회적인 책임을 외면하고 말았던 것이다. 흑인신학 역시 복음주의와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런 성질을 내포하고 있다. 흑인 특유의 풍부한 감성과 고단했던 그들의 역사는 자칫 현실을 잊고 피안을 바라보게 하는 복음주의의 감각적 마취에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흑인 교회가 극복해야 할 요소이기도 하다. 21세기 신학에서 '흑인' 은 누구인가?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노예들 만인가? 오늘날의 세계는 여전히 흑인과 유색인종들과 전쟁의 공포에 시달리는 이슬람의 선량한 사람들은 백인 그리스도인들의 차별과 부당한 대우의 선상에 놓여있다. 안타깝게도 이 권력 행사의 주체는 미국 기독교이다 이것은 근본주의적 복음주의는 독선적이고 감성적인 그리스도인은 만들어 냈지만, 예수의 정신을 인지하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만들어내지 못했으며 여전히 타문화와 타종교와 타 인종에 대해 둔감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여전한 그들의 멈추지 않는 성장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안한 미래를 사는 인간의 고독한 자화상과 기복적 개인주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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