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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후 일본의 「주부논쟁」과 여성정책

        김장호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2018 국내석사

        RANK : 248719

        주부논쟁은 전후 일본사회에서 주부(主婦)의 역할 및 위상과 관련하여 벌어졌던 일련의 사회적 논쟁이다. 1955년에서 1972년까지 『부인공론』 등을 중심으로 1차(주부의 직장진출), 2차(가사노동), 3차(주부해방론) 등 순차적으로 각각의 주제를 가지고 세 차례 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주부논쟁에 대한 기존평가는 기혼 여성의 직업선택을 긍정적으로 수용한 반면, 가사분담에 대한 논의부족으로 성별역할분업을 고착화시켰다는 측면도 있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선행연구들은 주로 주부에 대한 논쟁이자 일종의 ‘주부론’이 아니었냐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논쟁의 발생배경인 이에(家)제도 폐지에 따른 여성역할의 변화나 전후 고도경제성장에 따른 사회구조변화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결여되어 있었다. 특히 주부논쟁은 전후 일본의 여성정책과의 여러 접점이 실제로 있었고, 주요 여성정책의 성립계기가 되었음에도 이것을 주목하고 규명하고자 한 연구가 드물었다. 본고에서는 주부논쟁이 공론화 과정을 통해 사회여론과 공공정책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을 뿐더러 전후 일본의 여성정책과 일치된 흐름으로 진행되었음을 입증하였고, 이를 통하여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었다. 먼저 주부논쟁이 ‘주부역할’에 대한 찬반양론의 대립구조였다는 기존의 분석에서 벗어나, 전후 일본사회에 주부상(主婦像)내지 여성상(女性像)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가는 역사적 전개과정을 밝혔다. 그리고 ‘공론장으로서의 주부논쟁’이란 분석시각으로 매체를 통한 사회적 공론화와 ‘주부연금제’라는 정책제안의 도출과정을 규명하였다. 또한 주부논쟁이 일본의 여성정책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규명한 결과, 정책의 지표인 ‘가족단위모델’과 논쟁에서 표출되고 사회적으로 합의된 주부상인 ‘현대주부’ 사이에 일치된 내용과 성격을 확인하였다. 그러한 흐름아래서 ‘배우자공제제도’(1961년)라는 정책이 탄생했고, 이어서 ‘3호제도(국민연금 제3호 피보험자제도, 1985년)’, ‘배우자특별공제(1987년)’ 등등 현재 일본의 ‘전업주부 우대정책’이 성립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이 주부논쟁이 가지는 사회적 의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의 일본사회에서 계속 그 논쟁이 진행 중이며, 혼인여부를 떠나 성인 여성의 라이프코스에 대한 논쟁으로 이어가고 있는 측면도 존재하여 주부논쟁에 대한 연구는 아직 유효하리라 여겨진다. 또한 결과적으로 여러 선진 주요국 가운데서도 특유성을 가진 현대일본의 가족 및 사회규범이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이른바 ‘일본형 복지사회’라는 국가모델 또한 성립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에서도 주부논쟁이 가지는 사회적 의의는 매우 중요하다. 본고는 또한 주부논쟁 관련 논문 목록을 정리하고 주요 논자 분석을 부록으로 수록한 바, 이에 입각하여 보다 더 구체적이고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사회에 있어 관련 주제의 비교연구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主婦論争は戦後日本社会で主婦の役割及び位置付けと関連して行われた一連の社会的論争だ。1955年から1972年まで『婦人公論』などを中心に第1次(主婦の職場進出)、第2次(家事労働)、第3次(主婦解放論)と逐次的にそれぞれのテーマを持って3次にわたる論争が行われた。 ところで、主婦論争に対する既存の評価は、既婚女性の職業選択を肯定的に受け入れたものの、家事分担に対する議論不足で性別役割分業を固定化させたという面もあるというのが一般的だった。しかし、先行研究は、主に主婦に対する論争であり、一種の‘主婦論’ではないかという先入観から脱することができず、論争の発生背景である家制度の廃止による女性の役割の変化や戦後の高度経済成長による社会構造の変化について踏み込んだ分析が欠けていた。とくに、主婦論争は戦後日本の女性政策との様々な接点が実際にあり、重要な女性政策の成立の契機になったのだが、これに着目して究明しようとした研究が少なかった。 本稿では、主婦論争が公論化過程を通じて社会世論と公共政策に一定の影響を及ぼしただけでなく、戦後日本の女性政策と一致した流れで進行されたことを立証し、これを通じて新しい視点を提示することができた。 先に、主婦論争が'主婦の役割'に対する賛否両論の対立構造だったという既存の分析から離れ、戦後の日本社会における主婦像、また女性像の形成に決定的な影響を及ぼしていく歴史的展開過程を明らかにした。そして'公論の場としての主婦論争'という分析視点でメディアを通じた社会的公論化と'主婦年金制'という政策提案の導出過程を究明した。また、主婦論争が日本の女性政策とどのようなつながりがあるのかについて究明した結果、政策の指標である'家族単位のモデル'と論争により表出し社会的に合意された主婦像である'現代主婦'の間に一致した内容や性格を確認した。 そうした流れの下で、'配偶者控除制度'(1961年)という政策が誕生し、続いて'3号制度(国民年金第3号被保険者制度、1985年)'、'配偶者特別控除(1987年)'など現在の日本の'専業主婦優遇政策'が成立したのだ。 以上のような点が主婦論争が持つ社会的意義だと思う。そして現在の日本社会においても継続してその論争が進行中であり、婚姻の有無を問わない成人女性のライフコースに関する議論として続いている側面も存在し、主婦論争についての研究はまだ有効とされる。また、結果的に様々な主要先進国の中でも特異性を持った現代日本の家族・社会規範が形成され、これをもとに、いわゆる'日本型福祉社会'という国家モデルがまた、成立する契機が設けられたという点でも主婦論争が持つ社会的意義は非常に重要だ。 本稿はまた主婦論争の関連論文リストを整理し、主要な論者分析を付録として収録した。これに立脚してより具体的かつ本格的な研究が行われることを期待する。特に、韓国をはじめとする東アジア社会において関連テーマの比較研究も可能だろうと思われる。

      • 韓日 兩言語의 <一字漢語> 硏究

        전철 경상대학교 2004 국내박사

        RANK : 248719

        韓日 兩言語에서 漢語에 대한 硏究는 지금까지 많은 硏究가 이루어져 왔지만 그 大部分은, 漢語의 受容, 漢語의 起源的 系譜, 漢語의 形態, 漢語의 意味 등에 관한 硏究에 치중되어 있었다. 特히 漢語의 形態에 관한 硏究에서는 단연 二字漢語가 그 中心이 되어왔으며 相對的으로 「一字漢語」에 대한 硏究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現象은 「二字漢語」에 비하여 「一字漢語」의 重要度가 떨어지기 때문인가 하면 實際로는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二字漢語」의 硏究의 한 部分으로 「一字漢語」를 取扱한 結果, 「一字漢語」만을 다룬 先行 硏究는 단 한 편도 찾아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一字漢語」語彙의 데이터베이스조차도 構築되어 있지 않았을 만큼 「一字漢語」에 대한 硏究가 적었다. 本 硏究는 이러한 점에 問題 意識을 가지고 「一字漢語」에도 그 나름의 論理와 法則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一字漢語」가 形態上으로 意味上으로 과연 어떠한 樣相을 보이고 있는지 「一字漢語」의 全般的인 모습을 보다 深層的으로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各 章에서 論議된 內容을 整理하면 다음과 같다. 1. 「一字漢語」의 語構成에서는 韓日 兩言語에서 「一字漢語」單獨 語彙의 경우 日本語에서 994語(20.00%)가 調査되어 가장 比率이 높은 語彙 數를 나타내었고 이에 비해 韓國語에서는 639語(16.51%)로 두 번째로 많은 比率을 차지하였다. 이는 韓國語보다는 日本語의 「一字漢語」單獨 語彙가 意味 機能을 가지는 單獨 語彙로서 使用度가 더 높다는 事實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名詞와의 結合에 있어서는 韓國語에서 1,377語, 日本語에서 1,345語로 調査되어 兩言語에서 「一字漢語」는 名詞 語彙와 結合하여 매우 生産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動詞와의 結合에서는 全體的으로 日本語에서 387語(7.79%), 韓國語에서 424語(10.95%)가 調査되었는데 日本語의 경우 「する」動詞가 붙은 語彙가 大部分이었으며 韓國語의 경우 '하다' 가 連結된 語構成도 상당수 調査되었으나 '하다' 以外의 動詞도 많은 수가 連結되어 活潑한 生産性을 보였다. 韓日 兩言語에서는 이처럼 「一字漢語」와 結合할 수 있는 動詞로 代表될 수 있는 것은 역시 「する」와 '하다'이다. 이는 兩言語에서 「する」와 '하다'가 單語 形成에 있어서 매우 넓은 分布 領域과 多樣한 機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結局 「する」와 '하다'가 固有의 語彙的 意味를 具體的으로 가지고 있지 못한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する」와 '하다'의 이러한 特徵으로 인해 漢語 複合語의 形成에 있어서 先行 語基와 매우 자유롭게 結合하며, 「一字漢語」와도 結合하여 用言을 이룸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特徵的인 統辭 機能의 差異点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日本語의 「一字漢語」+「する」는 모두가 動詞로서의 文法的 機能을 하지만, 韓國語의 「一字漢語+'하다'」의 경우는 形容詞의 機能을 하는 語彙가 상당수 있는데 그 숫자 역시 97語나 됨을 알 수 있었다. 形容詞와의 結合에서는 日本語에서 35語(0.70%), 韓國語에서 15語(0.39%)를 보여 兩 言語 모두 「一字漢語」가 形容詞와는 結合의 정도가 약하다는 事實을 알 수 있었다. 이는 形容詞 語彙의 경우 固有語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漢語가 形容詞로서 使用되기는 힘들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轉成名詞와의 結合에서도 日本語에서 985語(19.82%), 韓國語가 68語(1.76%)가 調査되어 日本語의 「一字漢語」가 轉成名詞와의 結合에 있어서 韓國語 보다는 容易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外來語와의 結合에서는 日本語가 532語(10.71%), 韓國語가 88語(2.27%)로 나타나 日本語 쪽이 훨씬 外來語와의 結合 즉 生産性이 높았으며 語構成에 있어서는 韓日 兩言語 모두 「一字漢語」가 後項에 位置하는 것이 生産的이었다. 韓日 兩言語의 「一字漢語」의 結合 語例 數를 살핌으로서 生産性 즉 造語力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日本語의 경우 「氣(き,け)」에 의한 「一字漢語」複合語가 135語로 나타나 가장 生産的으로 語彙部에 參與하는 「一字漢語」로 나타났으며, 다음이 112語가 調査된 「地(チ,ジ)」,72語인 「茶(ちゃ),繪(エ,カイ)」가 65語, 「本(ホン)」이 50語,49語인 「金(キン), 役(ヤク,エキ)」가 45語,「偏(ヘン)」이 43語, 「半(ハン)」이 40語, 「素(ス,ソ)」가 38語,「台(ダイ)」가 36語, 「棒(ボウ)」가 34語, 「座(ザ)」가 33語, 「番(バン)」이 32語, 「病(ビョウ)」가 25語의 順으로 나타났다. 그에 비해 韓國語에서는 生에 의한 「一字漢語」複合語가 58語로 나타나 가장 生産的으로 語彙部에 參與하는 「一字漢語」로 나타났으며, 다음으로 53語가 調査된 '山'이 그 뒤를 이었으며, 다음이 45語의 '半', 44語의 '標', 38語의 '房', 34語의 '初','門', 32語의 '中', '數', 28語의 '本', 27語의 '醬', '長', 24語의 '金', 23語의 '色', '桶', '雙', '病', '便', 21語의 '間', '窓', 20語의 '氣', '別', '銃'順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結果를 좀 더 具體的으로 살펴보면 日本語에서는 135語라는 結合 語例 數를 가져 가장 活潑한 生産性을 보인 「氣(き,け)」나 112語의 「地(チ,ジ)」,72語의 「茶(ちゃ)」,65語의 「繪(エ,カイ)」의 경우처럼 上位 몇 字에 그 生産性이 상당히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日本語에서 가장 活潑한 生産性을 보인 「氣」가 韓國語에서는 結合 語例 數가 20語 밖에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反對로 韓國語에서 가장 많은 結合 語例 數를 보인 '生'의 경우, 日本語에서는 전혀 生産性을 가지지 못해 1語 밖에 調査되지 않았다. 그 외에 韓國語에서 20語 以上의 結合 語例 數를 가진 '山, 標, 房, 藥, 醬, 場, 色, 桶, 雙, 窓' 등의 「一字漢語」를 日本語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韓日 兩言語에서 「一字漢語」의 生産性을 놓고 볼 때 共通的인 要素보다는 各各 獨自的으로 「一字漢語」를 利用해 語彙를 生産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漢語가 다른 말과 結合할 수 있는 生産力이 높다는 것은 否定할 수 없으나 全部 「一字漢語」全部가 生産力이 높다는 結論은 얻을 수 없었다. 2. 「一字漢語」動詞에서는 「一字漢語+する」와' 一字漢語+하다'는 先行要素가 同一하고 形態上으로 같은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統辭的으로 같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먼저 同一漢語 +「する」, '하다'를 兩言語에서의 統辭的 性格 즉, 自動詞인지 他動詞인지 아니면, 自·他 兩用動詞인지를 調査·分類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漢語+する」의 意味機能에 대한 硏究 結果를 바탕으로 「一字漢語+する」가 어떠한 韓國語와 對應하는지도 살펴보았다. 먼저 統辭的 機能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同一한 先行要素를 가지고 同一한 統辭的 機能을 하고 있는 語彙가 35語(66%)나 됨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統辭的으로 一致를 보이지 않는 語彙가 18語(34%)로 調査되었는데 韓日 兩言語의 共通點과 差異點을 同時에 보여주는 例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長ずる(自) - 長하다(形), 毒する(自·他) - 毒하다(形), 便じる(自·他) - 便하다(形)」의 경우, 日本語에서는 動詞로 쓰이나 韓國語에서는 形容詞로 쓰인다. 이는 兩言語에서 이들 漢語를 받아들이는 差異에서 비롯된 結果라 사료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一字漢語+する」의 意味 對應에 있어서는 旣存의 「二字漢語」를 中心으로 행한 硏究 結果가 「一字漢語」의 경우는 거의 否定됨을 알 수가 있었다. 이는 旣存의 「漢語+する」와 '漢語+하다'의 意味機能 硏究에서 漢語가 가진 特性을 無視한 채 모습이 닮아 있다는 理由로 인해 形態上의 類似性에 執着하여 先行要素인 漢語와 後項要素인 「する」와 '하다'를 나누어 그 一致性과 非一致性을 考察하려고 하여 發生한 誤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旣存의 硏究 結果가 「一字漢語+する」와 '一字漢語+하다'와 많은 差異를 보이는 理由로서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 「二字漢語」와 「一字漢語」가 自立性과 安定性이라는 面에서 다른 性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나아가 非自立的고 安定的이지 못한 「一字漢語」가 兩言語에서 「二字漢語」 내지는 固有語로 대치된 語彙 아니면, 代置가 進行 중인 語彙가 存在하기때문에 發生되는 問題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漢語+する」와 '漢語+하다'의 意味 對應에 差異가 發生하는 것은 動作主(主語)의 性格이나 目的語의 有無를 떠나서 文脈이나 狀況에 따라 漢語의 性格, 즉 對象 漢語가 系列的 혹은 階層的으로 어떠한 類似 意味를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 決定되는 것이다. 3. 「一字漢語」의 品詞性에서는 「一字漢語」 品詞性의 類型으로는 日本의 경우, 하나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① [+N]類 ② [+V]類 ③[+A]類 ④ [+Ad]類의 4개, 두 개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⑤ [+N +V]類 ⑥ [+N +A]類 ⑦ [+N +Ad]類 ⑧ [+V +A]類 ⑨ [+A +Ad]類의 5개, 세 개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⑩ [+N +A +V]類 ⑪ [+N +A +Ad]類의 2개로 모두 11개의 類型이 調査되었는데 비해 韓國語의 경우 하나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① [+N]類 ② [+V]類 ③[+A]類 ④ [+Ad]類가 4개, 두 개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⑤ [+N +V]類 ⑥ [+N +A]類 ⑦ [+N +Ad]類 ⑧ [+V +A]類 ⑨ [+V +Ad]類 ⑩ [+A +Ad]類의 6개, 세 개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⑪ [+N +A +V]類 ⑫ [+N +A +Ad]類 ⑬ [+N +V +Ad]類 ⑭ [+V +A +Ad]類가 4개, 네 개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⑮[+N+V+A+Ad]類의 1개의 類型을 보여 모두 15개의 類型으로 나누어진 반면 二字漢語는 日本語의 경우가 14개의 類型을 보였으며, 韓國語는 12개의 品詞 領域 類型을 보였다. 이러한 事實은 「一字漢語」品詞 領域은 韓國語 쪽이 훨씬 폭 넓게 나타나며, 二字漢語에서는 日本語 쪽이 넓게 나타나 「一字漢語」와 二字漢語가 다른 樣相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語彙의 數에 있어서도 「一字漢語」에서는 日本語의 경우 [+N]類가 639語, [+V]類가 178語, [+N +V]類가 166語의 順으로 나타났으며 韓國語의 경우는 [+N]類가 404語, [+N +V]類가 135語, [+V]類가 76語의 順으로 나타났다. 한편 二字漢語의 경우에는 日本語는 [+N]類, [+N +V]類, [+N +A]類 順으로 語彙數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韓國語에서는 [+N]類, [+N +V]類, [+A]類의 順으로 나타나 韓日 兩言語의 「一字漢語」속에서도 差異를 보이지만 二字漢語와의 對照比較를 통해 살펴보았을 때 각기 다른 特性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一字漢語」의 경우 [+N]類, [+V]類에서는 日本語가 優勢하게 나타났으며, [+A]類 [+Ad]類에서는 韓國語가 優勢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두 개 以上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는 [+N +V]類에서만 日本語가 優勢하게 나타났으며 나머지 [+N +A]類, [+N +Ad]類, [+V +A]類, [+V +Ad]類, [+A +Ad]類에서는 韓國語가 優勢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세 개 및 네 개 以上의 品詞性 가지는 경우는 全體的으로 韓國語 쪽이 語彙面에서 優勢하게 나타났으며 特히 名詞, 動詞, 副詞의 品詞性을 가진 [+N +V +Ad]類와 動詞, 形容詞, 副詞의 品詞性을 가진 [+V +A +Ad]類에서는 이에 該當하는 日本語 「一字漢語」는 存在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는 特徵을 보였다. 이는 形容詞性을 가진 [+A]類를 除外하고는 모든 類型에서 日本語 쪽이 優勢하게 나온 二字漢語의 경우와 對照에서도 特徵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韓國語가 「一字漢語」는 勿論이고 二字漢語에서 形容詞性을 가진 語彙가 日本語 보다 相對的으로 越等히 豊富함을 알 수 있다. 두 개 以上의 品詞性을 가지는 「一字漢語」로서는 名詞性과 動詞性을 同時에 가지는 [+N +V]類가 日本語에서는 166語가, 韓國語에서 135語가 調査되었다. 이는 動詞性의 「一字漢語」는 獨立性이 强하여 名詞로서 自立할 수 있기 때문인데 名詞性과 形容詞性을 同時에 가지는 [+N +A]類의 경우는 日本語와 韓國語가 各各 22語로 語彙數가 急激히 줄어듦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形容詞性을 가진 「一字漢語」는 動詞性의 一字漢語보다 獨立性이 强하지 못하여 名詞性을 가지는데 制約을 받은 結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二字漢語에서도 마찬가지의 結果를 보이고 있어 같은 樣相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4. 「一字漢語」副詞에서는 「一字漢語」單獨으로 副詞의 機能을 가지는 例들로서 韓國語의 경우 「但, 永, 卽, 惑, 及」의 5語가 日本語의 경우는 「極, 約」의 2語가 調査되었다. 지금까지의 硏究들에서 보여 왔던 兩言語 語彙의 一致性 내지는 共通性을 「一字漢語」 副詞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들 漢語는 漢文 文章에서 副詞로서 頻繁히 쓰이는 單語들로서 兩言語에서 副詞化하는 特別한 文法的 節次 없이 그대로 쓰이게 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零接辭 派生에 의한 경우는 日本語의 경우 「直(ジカ),直(ジキ),万」의 3語가 調査되었는데 이에 비해 韓國語의 경우는 零接辭 派生에 의한 「一字漢語」 副詞는 1語도 存在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重要한 事實은 「一字漢語」의 경우 零接辭 派生이 일어나는 경우는 '名詞-副詞' 사이에서만 일어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日本語의 경우, 「一字漢語+に」가 22語로 「一字漢語」副詞에서 가장 많은 숫자로 다수를 차지고 있었으며 그 다음이 숫적으로 상당한 差異를 보이지만 「一字漢語+と」가 5語임을 알 수 있었다. 韓國語의 경우는 <<資料 2>>에서 보듯이 그 形態가 日本語에 비해 多樣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生産性이 높은 것은 「一字漢語+히」로서 全部 29語가 調査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으)로'(8語)가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一般的으로 많은 論著에서 韓國語 副詞를 形成하는 代表的인 接辭로서 '이/히'가 있다고 적고 있는데 「一字漢語」副詞에서는 '이'가 그다지 生産性을 갖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面面이, 番番이, 一一이, 散散이, 点点이'와 같이 二字漢語의 경우는 '이'가 상당한 生産力을 가지고 副詞로서 派生語를 構成하고 있다. 이는 '이'가 二字漢語 더 具體的으로 말하면 反復 複合語인 漢語에 連結되었을 때 生産力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例外的으로 '獨이'와 같은 形態가 보이나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漢語 '獨'의 경우는 '-하다'와 結合할 수 없어 '獨히'의 形態를 취할 수 없기 때문에 '獨이'의 形態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一字漢語」+ 기타의 경우는 먼저 日本語의 경우는 13語가 調査되었는데 즉 아래의 語彙들은 모두 對象 辭典에서는 副詞로서 表記가 되어 있지만 이 중 「頑として, 主として,體よく, 要するに, 牢として」의 경우는 一部 辭典에서는 連語로서 副詞的으로 쓰인다는 副詞的連語로 다루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비해 韓國語에서는 日本語에 비해 상당히 많은 副詞形態을 보이고 있는데 '決코(결단코), 緊찮이(緊하지 아니하다), 願컨대(願하건대)'와 같은 縮約된 形態와 '單숨에, 單칼에, 單통에, 憤김에, 火김에, 興김에'와 같은 固有語 名詞가 介入한 形態가 있는데 이 중 '單숨에, 單칼에, 單통에'의 경우는 '숨, 칼, 통'이라는 實質名詞가 介入한 경우이며,'憤결에, 憤김에, 火김에, 興김에'의 경우는 '意識이 미치지 않는 時間의 흐름이나 동안'의 意味를 가진 '결'이 그리고 '어떤 機會나 契機'의 意味를 가진'김'이라는 依存名詞가 各各 介入한 경우인데 이는 「一字漢語」+ '에'의 形態는 반드시 固有語 名詞의 介入에 의해 副詞의 機能을 가진다는 것이다. '當初에, 不時에, 已往에, 世上에' 등의 二字漢語 副詞와는 다른 樣相을 보이는 特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德스러이, 德스레, 變스러이, 變스레, 別스레이, 別스레, 福스러이, 福스레, 實살스러이, 義로이, 雜스러이, 雜스레, 情다이, 罪스러이, 罪스레, 賤덕스러이, 賤덕스레, 村스러이, 村스레, 蔽스러이, 蔽스레, 恨스러이, 恨스레, 害로이'와 같이 形容詞化 接尾辭'스럽다, 롭다, 답다'의 副詞形이 連結된 形態로서 '스럽다'의 副詞形 '스러이, 스레'의 경우는 [近接性]의 意味를, '롭다'의 副詞形인 '로이'는 [認定性]의 意味를, '답다'의 副詞形인 '다이'는 [價値性]의 意味를 담고 있다. 여기서도 '實살스럽다, 賤덕스러이, 賤덕스레'와 같이 「一字漢語」와 '스럽다'의 副詞形 사이에 固有語가 介入한 形態가 보이나 「一字漢語」와 '롭다'의 副詞形사이에는 固有語의 介入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脈없이, 番갈아, 變함없이, 別달리, 別다르게, 粉결같이, 數없이, 實없이, 連해, 辱되이, 類달리, 限없이, 惑몰라'와 같은 경우는 「一字漢語」+ 用言 '없다, 갈다, 하다, 다르다, 되다, 모르다'의 副詞形이 連結된 形態로서 '粉결같이'과 같이 依存名詞 '결'이 介入된 形態도 보인다.'獨이, 玆에, 惑은, 然이나, 然이면'과 같은 助詞가 붙어 副詞로 기능하는 형태,'願컨대, 決코'와 같이'하다'의 縮約形 '컨대, 코'가 連結된 形態, 역시'하다'의 結合形에'어'가 結合되어 形成된'혀'가 連結된 '全혀, 專혀', '그 한도까지'의 意味를 갖고 있는 '껏'이 連結된 '才주껏, 限껏', 마지막으로 '半나마'와 같이 固有語 副詞 語尾가 連結된 形態도 보인다. 以上의 漢語 副詞 其他 連結形에서 알 수 있는 것은 日本語보다 韓國語 쪽이 漢語 副詞 連結形이 훨씬 多樣하게 存在함을 알 수 있으며, 또한 日本語의 漢語 副詞에서 漢語가 모두 依存形式인데 비해 韓國語의 경우는 '德, 脈, 福, 辱, 情, 罪, 恨'등의 實質名詞가 存在하는 差異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特徵的인 面은 日本語의 경우, 森岡(1994) 등에서 漢語에는 「に,と,の」를 同伴하여 副詞를 構成한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二字漢語에는 該當되나 「一字漢語」의 경우는「の」가 連結되는 副詞는 存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韓國語의 경우도 二字漢語 以上의 語彙에서 찾아볼 수 있는 '瞬息間에, 盛況裡에, 暫間도, 暫時도, 都大體가'와 같이 助詞 '도, 가'가 連結된 形態를 一字漢語 副詞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역시 漢語 副詞形에 있어서도 二字漢語 등보다는 生産性이 떨어짐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反對로 '코'의 경우는 固有語와 結合할 수 없는 反面에 반드시 漢語와만 結合할 수 있다는 事實을 알 수 있었다. 兩言語의 「一字漢語」副詞의 의미 對應 關係에서는 副詞의 品詞 設定이 辭典에 따라 相異하여 같은 意味 機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副詞 對 副詞의 對應이 아닌 副詞 對 冠形詞, 副詞 對 接續詞로의 對應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一字漢語」副詞의 意味 對應에 있어서는 同一 「一字漢語」가 쓰인 副詞가 存在하느냐 存在하지 않느냐가 相當한 影響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同一 漢語가 쓰인 「一字漢語」副詞가 存在할 경우엔 一對一 對應을 그렇지 못한 경우는 固有語 내지는 二字漢語에 對應함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많은 論著에서 漢語 副詞 形成에 있어서 日本語의 경우 「に, と, も」등을 格助詞나 接辭, 助動詞 등이 連結된 形態로 說明하고 있으며 韓國語의 경우도 「로, 에, 도, 가」등을 格助詞, 接辭로서 意味上의 特殊性을 띠고 生産性을 갖게 되면서 接尾辭化하여 漢語 語基에 結合되어 副詞를 만든다고 說明하고 있다. 日本語의 경우 「一字漢語」인 「切, 俗, 變, 別, 妙, 優, 樂, 碌, 陸」는 統辭的으로 「切だ, 俗だ, 變だ, 別だ, 妙だ, 優だ, 樂だ, 碌だ, 陸だ」의 形態로 形容動詞로서 機能을 가지고 있으므로 本稿에서의 「に」形「一字漢語」副詞인 「切に, 俗に, 變に, 別に, 妙に, 優に, 樂に, 碌に, 陸に」는 形容動詞의 連用形으로서 다루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되며, 이 以外의 경우도 漢語라는 特殊性을 考慮해 볼 때 副詞形 語尾들은 固有語 속에서 運用하기 위해서 또는 運用되기 위해 固有語 狀況 속에서 形態的으로 音韻的으로 適切한 語尾를 취하고 있다고 보야 할 것이라 생각되며, 이렇게 볼 때 이들 漢語 副詞들의 語尾는 漢語 副詞를 만드는 形式要素 정도로 다루는 것이 適切하다고 본다. 以上 各 章에서 論議된 內容을 綜合的으로 볼 때, 여러 가지 理由로 인해 漢語라는 넓은 範圍 속에서 다루어져 왔던 「一字漢語」가 지금까지 많은 硏究가 進行된 二字漢語의 先行硏究와 比較해서도 形態的, 統辭的, 意味的으로 差異를 보이며 「一字漢語」만의 特性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數的인 面에서 적다라는 理由 등으로 인해 看過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많은 硏究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며 本稿에서 다루지 못한 部分들은 後日의 課題로 삼고자 한다.

      • 일본 중세의 내전과 왜구 : ー 무로마치 막부의 왜구에 대한 공식 해명 ‘포도(逋逃)’를 중심으로

        조혜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일본언어문화학과 202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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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구 문제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입>과 함께 13 ~ 16세기의 동아시아 국제관계 및 교류의 역사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연구 과제이다. 이러한 왜구 연구는 근대 이후 근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주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일본학계는 왜구를 전기왜구(14~15세기 초)와 후기왜구(16세기)로 구분하고, 전자는 일본인들이 주로 한반도를, 후자는 중국인들이 중국대륙을 무대로 활동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이러한 주장에 변화가 나타난다. 즉, 일본학계는 전기왜구의 실체도 사실은 일본인이라기보다는 고려(조선)인이었다든가 또는 고려인과 일본인이 연합한 세력이었다고 하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러한 주장이 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한국과 중국 연구자들은 왜구의 주체가 일본인이라고 하는 기존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처럼 한・중・일 3국의 연구자들은 왜구의 사회적 실체와 민족적 구성 및 발생 배경에 관하여 각각 인식을 달리해 왔다. 이러한 일본의 왜구 연구는 최근에 적지 않은 문제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왜구 문제를 논하면서 해당 시기 일본의 국내정세, 특히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규슈 지역 군사정세와의 상관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점이다. 오히려 일본학계는 왜구 발생의 배경 및 그 실체를 고려(조선)의 국내정세에서 찾고 있다. 이와 같은 기존 인식들의 상이(相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로마치 막부가 고려 우왕3년(1377)에 언급한 ‘포도(逋逃)’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에 왜구의 침구가 가장 극심했던 1377년 6월, 고려에서는 안길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항의하자, 무로마치 막부가 고려에 침구하는 왜구의 실체를 가리켜 ‘포도(逋逃)’라고 해명했다. 이는 당시 일본의 국내정세와 관련해 고찰할 때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14세기 말 당시 왜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침구했으므로 명(明)나라 역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 금압을 요청했다. 그런데 무로마치 막부는 명나라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외교문서에서 왜구의 실체를 ‘포도(逋逃)’라고 칭했다. 무로마치 막부의 입장에서 ‘포도(逋逃)’란 자의(字意)대로, 체포를 피해서 도주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왜구와 포도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대응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왜구의 또 다른 칭호인 ‘포도’에 주목한 선행연구로는 「여말 ~ 선초 왜구 발생의 메카니즘 ー 왜구의 실체에 관한 용어 분석을 중심으로」(이영, 2012)가 있다. 이 선행연구는 포도라는 용어를 최초로 한국 학계에 소개하는 한편, 포도 발생과 배경에 대하여 밝힌바 있다. 그러나 해당 논문은 구체적인 고찰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포도’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시대적인 맥락에 주목해 왜구의 한반도 침구가 당시 일본의 국내정세와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무로마치 막부가 1377년에 왜구를 포도(逋逃)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래 이 용어를 우리는 한・중・일 모든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포도라는 용어만으로 왜구 침구의 배경과 원인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포도’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는 왜구 발생의 메커니즘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본고 <Ⅱ장>과 <Ⅲ장>에서는 헤이안(平安) 시대 쓰시마노가미(対馬守) 후지와라노 지카미쓰(藤原親光)가 고려로 도항해온 사례와, 고려 우왕3년(1377)에 고려를 침구한 왜구, 즉 무로마치 막부가 이들을 ‘포도’라고 칭했던 사례를 비교 분석하였다. 그 결과, 다음의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규슈 지역의 내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공권력에 대항해 싸워 패한 무리들이 대마도와 이키(壱岐)라는 변경의 섬을 근거지로 삼아 왜구 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Ⅳ장>에서는 이러한 분석에 부합하는 고려 말 ~ 조선 초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고려 말의 경우, 우왕6년(경신년, 1380)에 왜구들이 500척의 선단을 이끌고 진포구(鎭浦口)로 침구해 온 사례가 대표적이다. 경신년 왜구는 규슈탄다이(九州探題)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이 정서부(征西府, 九州의 南朝勢力)를 군사적으로 진압하는 최종 단계에서 발생했다. 즉, 료슌은 1379년 가을부터 남조의 근거지인 기쿠치(菊池)에 진을 치고 ‘효로제메(兵糧攻め)’, 즉 ‘적의 병량이 소진되기를 기다리는 작전’ 중이었다. 이런 가운데 료슌은 규슈의 남조 세력들이 병량을 구하기 위해 한반도나 중국으로 침구해 가는 것(왜구)을 막기 위해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즉, 그는 1380년 6월 중순, 규슈의 내해(內海)인 아리아케카이(有明海) 일대의 남조계 수군들이 ‘왜구화(倭寇化)’되는 것을 막기 위해 료슌은 그들의 배를 압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남조 수군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로부터 불과 십 여일 뒤인 같은 해 7월, 금강 하구의 진포구에 500척으로 이루어진 왜구의 대규모 선단(船團)이 나타난다. 그들이 금강하구에 출현하기 전에 대마도를 거쳐서 왔을 것임은 3년 전인 우왕3년(1377) 3월에 우인열이 보고(報告)한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덮고 오는데, 돛과 돛대가 서로 바라보고 있을 정도입니다”라는 것을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규슈의 남조계 수군들이 공권력인 무로마치 막부의 체포를 피해 대마도를 거쳐 고려에 침구해 왔다는 점에서 이들 또한 포도(逋逃)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한편 조선 초 쇼니씨(少弐氏)의 경우를 보자. 당시 일본에서는 남북조 쟁란이 종식된 후 왜구 활동이 진정되어 가고 있었지만, 규슈에서는 여전히 쇼니씨와 오우치씨(大内氏, 막부 측) 사이에서 전투가 단속적(斷續的)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쇼니씨는 전투에 패할 때마다 자신의 휘하 소씨(宗氏)에게 의지하여 대마도로 도주했다. 이렇게 되자, 대마도 소씨는 조선에 식량을 요청했다. 당시 조선에서 이러한 요구에 응해 식량을 준 것은 그들이 왜구로 돌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왜구 침구의 주요 원인이 규슈지역에서의 내전 발발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즉, 쇼니씨를 토벌하려는 오우치씨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쇼니씨 토벌을 만류한 것이다. 이에 응해 오우치씨는 오랜 적인 쇼니씨를 사면해 줄 것을 막부에 요청했고, 쇼니씨는 사면되었다. 즉 조선에서는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력을 발휘하여 대마도와 규슈의 호족까지도 관리했던 것이다. 쇼니씨 사례는 앞에서 살펴본 지카미쓰의 그것과 유사하다. 즉, 지카미쓰의 경우도 공권력인 헤이케(平家)의 체포를 피해 고려로 도주했지만 왜구로 변질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귀국할 때 고려 국왕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하사받기까지 했다. 이처럼 지카미쓰 사례와 쇼니씨 사례는 공권력의 체포를 피해 대마도로 도주했다는 점에서 ‘포도’라고 할 수 있지만 왜구로 변질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고려(조선)와 대마도가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조선 초의 사례로 세종23년(1441)에 아카마쓰 노리시게(赤松則繁)가 조선으로 도주해 왜구가 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앞의 사례와 달리 교토에서 발생한 반란, 즉 아카마쓰 미쓰스케(赤松満祐)가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를 암살한 ‘가키쓰의 난(嘉吉の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이 사건 직후 막부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몰락한 아카마쓰 집안에서 미쓰스케의 동생 노리시게(則繁)가 토벌을 피해 규슈로 도주한 것이다. 그는 교토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하리마(播磨), 그리고 하리마에서 또다시 막부군의 체포를 피해 규슈(筑前)로 도주한다. 이어서 당시 치쿠젠의 슈고였던 쇼니 노리요리(少弐教頼)의 도움을 받아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달아나 약탈 등 왜구 행위를 자행한다. 노리시게의 경우, 규슈가 아닌 교토에서 내란이 발생했지만 대마도를 관할하는 쇼니씨의 도움으로 한반도로 가서 왜구 행위를 자행할 수 있었으므로 ‘포도(逋逃)’의 조건에 부합한다. 한반도로 침구한 모든 왜구를 ‘포도’라는 용어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고려 말 ~ 조선 초의 시기에 발생한 왜구들 중에는 규슈의 내란에서 촉발된 포도(逋逃)의 사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본고에서는 왜구 발생의 메커니즘을 일본의 공식적인 외교문서에 나타나는 용어인 ‘포도’라는 단어를, 일본의 내란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지어 고찰하였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규슈에서 내란이 발생하고 그 내란에서 패한 무리들이 공권력(막부)의 체포를 피해서 대마도로 도주,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한반도를 침구한 것이 왜구이다. 抄 録 日本中世の内戦と倭寇 ー 室町幕府の倭寇に対する公式解明「逋逃」を中心に 趙 惠 蘭 CHO HAE-RAN 韓国放送通信大学校大学院 日本言語文化学科 (指導敎授 : 李 領) 倭寇問題は13~16世紀にわたる東アジアの国際関係および交流の歴史を理解する上で、核心的な研究課題といえる。その中でも倭寇の社会的実態と民族的構成および発生背景に関して韓国·中国と日本の間に見解が異なるため、論争が活発に行われている。韓国と中国では、倭寇は日本人海賊を意味するが、日本の学界では倭寇は日本人だけでなく、中国人及び韓国人も含まれていると主張してきた。このような韓·中·日3国の研究者による倭寇に対する認識の違いを克服するためには、倭寇問題に関する新たなアプローチが切実である。その一環として、本稿では倭寇を「逋逃」の観点から新たに考察した。 「逋逃」という用語は、室町幕府が公式的に外交文書で「倭冦」の代わりに使用した言葉である。つまり、「倭寇」を「逋逃」と表現したものである。「逋逃」とは、室町幕府の逮捕を避けて逃走した人々という意味である。「逋逃」という用語は、韓·中·日3カ国の文献史料にあまねく現れる。勿論逋逃という言葉だけで、すべての倭寇寝具の背景や原因が究明できるとは思われない。しかし、逋逃という用語を通じて私たちは倭寇発生のメカニズムの一面を分析することができる。まず、逋逃という用語を理解するために対馬の守藤原親光の高麗渡航の事例と 室町幕府で初めて倭寇について逋逃と釈明(解明)した禑王3年(1377)倭寇侵寇の事例を比較分析する。 両者の共通点は、公権力の逮捕を避けて韓半島に逃走したという点と、両者とも対馬を根拠地にしたり、対馬を利用できる勢力であったという点である。ところが親光は高麗で略奪行為をせず、高麗末の倭寇は略奪行為を行った。このような相違点の背景には、当時の高麗と対馬が親善友好関係にあり、高麗末の倭寇の場合は、麗蒙連合軍の日本侵攻により外交関係が回復できず、敵対関係が維持されていた事情がある。 倭寇を逋逃という用語で説明するために次のような背景を検討すべきだと思われる。第一に、九州地域で公権力と反公権力の間の内戦が発生し、それが背景になった。第二に、公権力により追われた勢力が対馬·壱岐へと逃走した。ところが対馬·壱岐に逃走するためには、対馬·壱岐を根拠地とできる勢力や、対馬·壱岐を利用できる勢力の助けを借り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だ。このような前提条件に沿った事例として、逋逃という脈絡で高麗末期と朝鮮初期の事例を考察する訳である。 一方、高麗末、庚申年(1380)に発生した倭寇は九州探題の今川了俊が征西部を制圧する最終過程で発生した。了俊が有明海一帯の南朝系水軍が倭寇化するのを防ぐために彼らの船を差し押えようとしたが、南朝水軍勢力はすでに韓半島へと逃走していた。彼らは、公権力である幕府(了俊)を避け、韓半島に逃走したのである。したがって南朝水軍勢力は公権力の室町幕府の逮捕を避けて逃走したという点で「逋逃」とみなすべきである。 また、朝鮮初期の少弐氏の場合は、当時、日本て南北朝動乱が終息するにつれ、倭寇活動は沈静化していた。しかし九州では依然として少弐氏と大内氏の間で合戦が繰り広げられていた。これにより、少弐氏は戦闘に敗れるたびに、自らの指揮下でにいた宗氏に頼って対馬島に逃走した。ところが少弐氏が対馬に逃走してくると、対馬の宗氏は頻繁に朝鮮に糧食を要請し、朝鮮では彼らが倭寇にならないように糧食を与えるなど、包容政策を行った。朝鮮の朝廷はここからさらに一歩進み、少弐氏を討とうとする大内氏に使節を派遣し、少弐氏討伐を引き止めた。 結局大内氏は少弐氏の赦免を幕府に要請し、少弐氏は赦免された。つまり、朝鮮では倭寇問題を解決するために外交力を発揮し、対馬と九州の豪族までを管理していたのである。 少弐氏の事例は公権力を避けて対馬に逃走してきた点で逋逃と言える。ところが、彼らは朝鮮に糧食を要請するなと、朝鮮の助けを受けていた。これは、前述の親光事例と類似しているといえる。親光も公権力である平家の逮捕を避けて高麗に逃走したが倭寇活動はせず、彼が帰国する際に高麗国王から宝物を下賜された。九州で戦乱が発生し、公権力の逮捕を避けて対馬に逃走したのが逋逃といえるが、この段階で高麗(朝鮮)へ侵寇する倭寇になったり、そうならなかったりしたのである。 また、もうひとつの朝鮮初期の事例として、赤松則繁が朝鮮へ逃走した事例がある。「逋逃」という用語を説明するための第一の背景が九州地域の内戦だった。ところが1441年、京都で6代将軍·足利義教が暗殺される「嘉吉の乱」が発生した。将軍を暗殺した赤松満祐の弟則繁は将軍暗殺後、朝鮮に逃走した。この事件は九州地域ではなく京都で起きた反乱だが、則繁はいかにして朝鮮に逃走したのか。それは筑前守護少弐氏の助けで可能だった。則繁の朝鮮における逃走経路を見ると、則繁は京都での将軍暗殺に主導的な役割を果たし、自分の根拠地の播磨に逃げ、ここからさらに幕府軍を避けて筑前へ逃走した。そのあと筑前守護少弐氏の助けで対馬を経て朝鮮に逃走したものとみられる。このように、畿内地方の豪族といっても九州に逃走して少弐氏ー蘇氏とつながれば、倭寇に変質しかねない蓋然性を示す事例といえる。と言うわけで、赤松則繁も幕府軍の逮捕を避けて逃走したという点で逋逃といえる。 以上のように、室町幕府が倭寇に代わる用語として用いた「逋逃」を中心に、高麗末及び朝鮮初期、倭寇発生のメカニズムについて考察した。このような試みが、韓·日·中3国の研究者の倭寇認識の違い(社会的実体と民族的構成および発生背景)を克服するために一助となることを期待する。倭寇の発生における東北アジア三国の状況と外交的能力、または状況を管理するための努力などに関するさらなる研究を今後の課題にしたい。

      • 일본 대한투자기업의 지배구조와 시장 진입전략

        김현경 계명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박사

        RANK : 248719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지난 수년 간 지속되어온 미국 경기의 호황은 미국식 기업지배구조가 시장논리에 윤리적으로 적합하다고 인식되면서 기업경영의 스탠더드로 정립해 가고 있다. 그러나 미국식 지배구조인 대리인경영방식에서 발생할 수 있는 경영자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와 2000년 이후 미국의 엔론사태, 그리고 최근의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서브프라임모기지(sub-prime mortgage)사태, 미국 자동차 ‘빅3’의 위기에 따른 실물경제 위기와 중국경제의 급부상, 동아시아의 자국경제보호정책, 노동자들의 권리주장 등 다양한 문제들이 부상하기 시작하자 지금껏 표준으로 수렴화 되어가던 미국식 경영구조(대리인경영구조)만으로는 결코 시정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또한 기업의 해외 진출 시 본국 경영문화를 이입하며 본사국 지향형을 주로 택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던 일본기업도 일본경제의 버블 붕괴 이후 끊임없는 자구노력과 일본정부의 관련제도 정비, 정보제공 등의 꾸준한 간접지원의 시행과 함께 일본의 기업지배구조는 일본기업 조직문화의 대폭적인 수정으로 많은 변화를 단행하고 있다. 이렇게 다국적기업의 해외진출과 현지화 과정에서 모기업의 지배구조는 해외진출전략과 현지 자회사의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치고 후자가 전자에 피드백됨으로써 다국적기업 전체의 경영성과와 배분에 좌우된다는 사실이 Kriger의 연구에서 밝혀졌다. 그러나 Kriger의 논지가 타당한 측면도 있겠으나 다국적기업의 진출 초기에는 자회사의 현지국 착근(着根)과 함께 자회사 소속국가, 근로자 의식, 경영자 마인드, 사업실적 등에 따라 모기업과의 관계에서 독립된 객체로 인정해야 하는 시대의 조류에 편승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모기업의 경영방식이 현지시장 진입에 과연 얼마만큼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또한 일본식 경영방식과 미국식 경영방식에 차이점이 있는지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미국기업과는 역사적으로 비교적 다른 기업경영방식을 전개해 오면서 많은 성과를 올렸으면서 비판 또한 많았던 일본식경영구조(소유주경영구조)가 과연 현 시점에서는 어느 정도 적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유형과 전략으로 한국시장에 진입해 어떤 기업지배구조로 모기업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시장 진입전략을 펼쳐가고 있는지 미국기업과의 비교분석을 통해 일본 대한투자기업의 지배구조와 시장진입전략을 분석하여 검증하였다. 먼저 지배구조 선택, 경영전략 구사(최고경영자 선임, 경영전략 수립, 의사결정)에 관한 Step1에서의 로지스틱 분석결과 지배구조 선택에서 ‘수익성과 성장성을 중시하여 투자하는 기업은 대리인경영구조를 선호하며, 문화자본경영을 중시하여 투자하는 기업은 소유주경영구조를 선호할 것이다’라는 가설은 지지하지만 유의도가 낮아 이 가설은 통계검정 결과 기각되었다. 그리고 ‘시장점유율을 중시하는 기업은 소유주경영구조를 선호할 것이다’라는 가설만 채택되었다. Step2의 경영전략 구사에서 첫째, 최고경영진 선임에 있어서 소유주경영구조일수록 본사 경영인 채용을 선호하며, 대리인경영구조일수록 현지 및 제3국 경영인을 채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경영전략 수립에서는 소유주 경영구조일수록 모기업의 관리통제를 많이 받을 것이고, 대리인 경영구조일수록 모기업의 통제를 적게 받아 상당한 권한 위임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의사결정권에서는 소유주 경영구조일수록 본사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많이 받으므로 의사결정에 있어서 신속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대리인 경영구조일수록 본사의 영향보다는 현지법인 단독 결정이 많았다. 현지 법인 단독 결정에서는 주로 주주, 이사회, 노조 등의 의견을 구하고 합의하여 결론을 도출하게 되므로 경영의사결정이 비교적 느리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이상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기업의 조직문화가 대폭적으로 수정되고 있는 현시점에서도 일본계 투자기업은 현지 자회사와의 꾸준한 피드백을 유지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자회사를 모기업의 전략적 관리기구로서 모기업과 자회사의 지배구조를 상호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Kriger를 강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이렇게 설문조사를 통한 연구결과가 기존 문헌연구와 상반된 결과로 조사된 이유를 추론해 본다면 최근의 세계경제 침체 등은 미국식 경영방식(대리인 경영방식)만으로는 자국 정서나 문화에 부합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With a booming economy of America that has been maintained for the past several years after the Asian economic crisis, the American-style corporate governance has been recognized as being ethically appropriate for the market paradigm and hence it has been established as a standard corporate governance. However, a number of problems of the agency management method of the American corporate governance have also surfaced. The examples include moral hazard of managers, Enron scandal, sub-prime mortgage crisis that caused recent global financial crisis, real economic crisis following fall of Big 3 American automobile companies, rapid growth of Chinese economy, protective economic policy among East Asian countries, right claims among the workers, etc. In this situation, despite the recent trend of converging standardized management structures, it turns out that the American management structure alone, i.e., agency management structure, cannot solve the problems. Meanwhile, after the bubble burst of Japanese economy, the Japanese corporate governance went through a drastic transformation, especially in its organizational culture aspect. While Japanese companies are known as opting for adapting local companies to the head office by introducing Japanese corporate culture in the past, they are now making relentless efforts to change such organizational culture by receiving indirect supports from the Japanese government, such as modification of relevant regulations and information provision. As was studied by Kriger, in case of multinational companies, the corporate management of a holding company affects the market entry strategies and corporate management of the local subsidiaries, and the latter provides feedback to the former during the process of market entry abroad and localization. Hence, the corporate governance of the local subsidiaries depends on the management performance and allocation of the multinational company overall. Even if Kriger’s argument is right in some sense, during the early stage of market entry of multinational companies, the local subsidiaries should be recognized as an independent individual in their relationship with the holding company, according to the settlement process of the subsidiaries, considering the national consensus of the country, workers’ attitude, entrepreneur mind, business performance, etc. With this current trend, it is important to examine the role of the holding company in local market entry as well as how their roles differ between Japanese-style management and American-style one management method. This study attempts to verify the validity of Japanese-style management method, i.e., ownership management structure, which has been developed by Japanese companies under different circumstances from the American companies and has produced controversial outcomes throughout the history. With this purpose, the paper examines the corporate management and market entry strategy of Japanese investment companies in Korea through a comparison analysis with the American companies. Specifically, this paper investigates what kind of market entry strategies the Japanese companies used for entering Korean market and what type of corporate governance is selected to maintai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local subsidiaries and the holding company. The analysis results from the Step1 about the corporate governance selection and management strategies implementation, which includes CEO appointment, management strategy planning, and decision making,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In statistical test regarding the selection of a corporate management, the hypothesis that “the investment companies that emphasize profitability and growth prefer agency management structure, while those that emphasize cultural capital management prefer ownership management structure” was rejected with low significance level, even if the hypothesis was supported by the logistic analysis results. Meanwhile, the hypothesis that “the companies that emphasize market share prefer ownership management structure” was not rejected. In Step2 of management strategy implementation, it turns out that the ownership management structure prefers appointing head office managers as a CEO, while the agency management structure tends to appoint managers with local background or those from the third-party. Second, in planning management strategies, it was shown that the ownership management structure is subject to stronger management control from the holding company, compared to the agency management structure where a transfer of considerable amount of authority powers takes place. Third, in decision makings, the ownership management structure showed relatively prompt process due to specific direct/indirect indications from the head office, while the agency management structure followed autonomous decisions within the local corporate, instead of being influenced by the head office. In this case where the local company makes independent decisions, the business decision making process was relatively slow since the conclusion is drawn from the convergence of opinions among the shareholders, members of the board of directors, labor union, etc. According to the analysis results, even if the organizational culture in Japanese companies is going under drastic transformations, the Japanese investment companies are using the local subsidiaries as strategic controlling device of the holding company, based on close interrelationship between their corporate governance and steady feedback from the subsidiaries. This provides strong supports to the Kriger. The reason behind the survey results that contrast findings from previous studies can be interpreted as that the recent recession of world economy made people to think that the American-style management method alone cannot completely correspond to the local consensus or culture.

      • 일제강점기 일본인 선교사의 한국 선교활동에 대한 고찰

        연승 숭실대학교 2016 국내석사

        RANK : 248719

        This paper is mainly aimed at considering whether Japanese people really showed the tendency for ‘Imperialism’ from the political, religious position by looking into the awareness of Japanese Christianity of serious incidents(Japanese annexation of Korea, March 1st Independence Movement, etc.) occurring in Korea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and in what way the then Japanese missionaries developed the missionary activity in Korea. Especially, this paper considered the above issue with focus on the awareness and lifetime of the missionaries named Norimatsu Masayasu & Wataze Tsuneyoshi, who did missionary activity in Korea. In Chapter 2, this paper examined the general position of Japanese Christianity on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on the basis of the preceding research by Min Kyungbae & Seo Jungmin. First, as for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there were the position of protection by the majority represented by Ebina Tanzo and Uemura Masahisa, and the position of distrust by a minority of Japanese Christian people represented by Uchimura Kanzo. However, even Japanese Christianity which had distrust with ‘Japaense annexation of Korea’ failed to get to the distrust with the root of their own country Japan’s ‘Imperialism’. The Japanese Christianity showed a passive position by concluding the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as ‘a disturbance’, but once Japan got to come under a severe criticism from the whole world after ‘Jeamni Massacre’, it also showed a position of aggressively criticising Japan. However, even at this moment, it failed to get to the basic denial of ‘Imperialism.’ In Chapter 3, this paper considered the awareness of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and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shown by Norimatsu and Wataze who did mission work in Korea in earnest, and the view of faith in their lifetime. First, Norimatsu developed the mission work in Korea biblically and religiously only with his political view on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very rarely exposed. Although Norimatsu commented on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as ‘Precipitancy’, it was his biblical view other than a political view. Such a view of faith like this held by Norimatsu was owing to the influence of Herbert G. Brand and his ‘Plymouth Brethern.’ His missionary activity in Korea was the pure religious activity far from ‘Imperialism.’ Meanwhile, Wataze aggressively advocated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saying, ‘It is a foothold for Japan to move towards an advanced country’; in addition, he also perceived ‘March 1 Independence Movement’ as ‘a disturbance’ other than an independence movement. Such a view of faith held by Wataze resulted from the influence of Ebina Tanzo while following Tanzo as his religious teacher. In addition, Wataze did ‘imperialistic’ mission work in Korea while getting huge amounts of support money from political circles and financial circles in Japan. Consequentially, Japanese Christianity perception of Korea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failed to break from the framework of ‘Imperialism’ greatly although there were a minority of distrust groups, and under the influence like this, Wataze developed his missionary activity ‘imperialistically.’ Nevertheless, this paper could confirm that Norimatsu who, wasn’t under the influence of Japanese Christianity perception, developed missionary activity far from ‘Imperialism.’ This paper has a big significance in that it made a lot closer approach to the perception of Korea held by the two Japanese missionaries, Norimatsu and Wataze who were active in mission work at the time of Japanese Occupation, and their lifetime, but this paper feels a sense of frustration at the failure to address the missionaries like Oda Naraji, and Nishida Syoichi, etc. who worked as a missionary after Norimatsu and Wataze. In such a context, this paper intends to adopt the comprehensive consideration of Japanese Christianity perception of Korean issue and missionary activity in Korea during the period of Japanese Occupation as a follow-up task. 본 논문은 일본기독교가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일어난 주요 사건(한일합병, 3・1운동 등)에 대한 인식과 그 시기의 일본인 선교사가 어떠한 방법으로 한국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는지 살펴봄으로써 이들이 과연 정치적・종교적 입장에서 ‘제국주의’의 성향을 보였는지 고찰하는 데에 주된 목적을 두었다. 특히 한국 선교활동을 한 선교사인 노리마쓰 마사야스(乘松雅休)와 와타제 쓰네요시(渡瀨常吉)의 인식과 생애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 2장에서는 민경배와 서정민의 선행연구를 기초로 ‘한일합병’, ‘3・1운동’에 대한 일본기독교의 전반적인 입장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우선 ‘한일합병’에 대해서는 에비나 단조(海老名彈正)와 우에무라 마사히사(植村正久)로 대표되는 대다수의 옹호입장과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로 대표되는 소수의 불신입장이 있었다. 하지만 ‘한일합병’을 불신하는 일본기독교도 자국 일본의 ‘제국주의’ 근본에 대한 불신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3・1운동’에 대해서는 ‘소요’라고 단정하며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제암리학살사건’ 이후로 일본이 전 세계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자 보다 적극적으로 일본을 비판하는 입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부정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3장에서는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한 노리마쓰와 와타제의 ‘한일합병’, ‘3・1운동’ 인식과 그들의 생애 속 신앙관에 대해 고찰하였다. 우선 노리마쓰는 ‘한일합병’에 대해서 정치적인 견해를 극도로 드러내지 않은 채, 오로지 성서적・신앙적으로 한국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에 대해서는 ‘경거망동’이라고 하였지만 이 또한 정치적인 견해가 아닌 신앙적인 견해였다. 노리마쓰의 이러한 신앙관은 헐버트 브랜드(Herbert G. Brand)와 그가 이끄는 ‘플리머드 형제단(Plymouth Brethren)’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그의 한국 선교활동은 ‘제국주의’와는 거리가 먼 순수한 신앙적 활동이었다. 한편, 와타제는 ‘한일합병’을 일본이 선진국으로 가기 위한 발판이라고 하며 적극 옹호하였고, ‘3・1운동’ 역시 독립운동이 아닌 ‘소요’라고 인식하였다. 와타제의 이러한 신앙관은 ‘한일합병’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던 에비나 단조를 신앙적 스승으로 따르며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또한 와타제는 일본의 정계, 재계로부터 막대한 지원금을 받으며 ‘제국주의’적인 한국 선교활동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본기독교의 한국 인식은 비록 소수의 불신파가 있었지만 ‘제국주의’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고, 이러한 영향을 받은 와타제 또한 ‘제국주의’적으로 한국 선교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기독교의 인식에 영향을 받지 않은 노리마쓰는 ‘제국주의’와는 거리가 먼 선교활동을 전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당시 활동하였던 일본인 선교사 노리마쓰와 와타제의 한국 인식과 생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접근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부여되지만, 이들 이후에 활동했던 오다 나라지(織田楢次)와 니시다 쇼이치(西田昌一) 등의 선교사를 다루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제강점기 일본기독교의 한국문제 인식과 한국 선교활동에 대한 포괄적인 고찰은 앞으로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 李恢成の『砧をうつ女』研究 : <境界人>を中心に

        고까이 요우꼬 경상대학교 대학원 201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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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회성(李恢成)은 재일작가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재일’작가들은 특수한 환경 속에서 격동의 시대를 지내면서, 많은 내외적 갈등을 겪으며 살아온 존재들이다. 특히 한국과 일본이라는 특수한 역사 문화적 배경을 하고 있는 두 나라의 경계에 서서 자기분열과 해체와 구축을 반복하면서 자기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있어서 끊임없이 고뇌해온 존재이다. 이러한 과정이 강하게 표출된 것이 이회성의 자전적 경향이 강한 초기 작품이다. 필자는 재일한국인의 자아에는 ‘경계인’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정신은 한국, 육체는 일본에 속해,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경계인’으로서 그들만의 문화나 언어 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재일한국인인 것이다. 그러한 ‘재일’의 애환과 고뇌상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쿠타가와(芥川)문학 수상작인 『다듬이질 하는 여인(砧をうつ女)』이라는 단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통하여 작가의 ‘경계인’적 양상의 본질에 대해 분석해 보고자 한다. 먼저,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는 유소년기의 체험이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1장에서는 작가의 성장배경에 대해 살펴보았다. 작가의 부모는 한국&#65381;조선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진정한 한국인이라 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인내심이 강한 어머니의 모습은 바로 한국의 전통적인 여성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살면서 일본문화에 대한 동경하는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것은 일제시대에 ‘동화운동’의 영향으로 본인도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 침투된 일본 친화적 감정의 하나인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재일’로서의 ‘경계인’적 생활을 하게 되었다. 작가 스스로도 국적은 한국이지만, 고향은 사할린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할린&#65381;한국&#65381;일본의 3국의 문화에 접한 작가는 많은 고뇌와 갈등 끝에 최종적으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되지만, 유년기부터의 사할린이나 일본의 영향은 그의 자아확립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일본과의 관계성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숙명적인 형태로 결정됨으로써 그는 ‘경계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제2장에서는 작품 속에 표출된 ‘경계인’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공간, 언어, 문화와 같은 세 영역으로 나누어서 분석하였다. 그것을 일본적인 것, 한국적인 것, 그리고 그 속에 있는 ‘경계성’을 나타내는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 고찰했다. 한국의 공간으로 등장하는 것은 조부모의 집이다. 거기에는 한국을 상징하는 ‘김치’ 와 ‘항아리’가 있으며, 어두운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다. 사할린에서의 생활과 위화하는 조부모의 존재성을 표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경계로서 존재하는 그 집은 실질적으로 양국의 경계적 토포스가 되고 있다. 집의 묘사 장면에는 ‘다타미(&#30067;)’ 나 ‘불단(&#20175;壇)’도 묘출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기모노(着物)’를 입고 있지만, 장롱 깊숙이에는 색 바랜 치마나 저고리가 들어 있고, 마음 깊은 곳에는 늘 조국을 사모하는 모습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유년기의 작가의 집은 한국과 일본 양국의 문화가 섞인 모습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작품 속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경계성을 분석했다. 작품은 일본어로 쓰였지만 한국어가 빈출한다. 그 각각의 어휘를 망라하여 분석해보면 결국 작가의 정체성이 이르는 지점은 한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재일’이라는 공간적 특수성 때문에 한국 본토와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작가는 양국에 걸친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일본이나 한국 어디로도 귀속되지 못한 채 경계인으로서의 존재방식을 소여 받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의 경계성에 대해 분석했다. 생활문화면에서는 일본적 양상이, 정신문화면에서는 한국적 양상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또 고찰하는 중에 작품에 표출된 한국의 문화 형태가 실제 한국의 그것과 낙차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이국땅에서 자민족의 문화를 전수하고자 하는 것이 재일 1세이지만, 2세들은 일본 국내에 귀속되어 그 문화를 완전히 이해하고 흡수하기에는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끝으로 특히 이 작품의 주제를 결정하고 있는 ‘다듬이질’의 상징성에 대해 고찰했다. ‘다듬이질’은 옛날 한국 여성들의 ‘한(恨)’을 표출하는 상징적 모티프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따라서 본 작품에 있어서도 ‘다듬이’는 어머니의 알레고리이기도 하고 어떠한 고난 속에 있어도 굴하지 않는 인내심 강한 한국의 어머니들을 상징한 것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회성은 이러한 다듬이질의 일반적 상징성을 라이트 모티프로 더욱이 단지 어머니의 존재가 아닌 재일가족을 꾸리고 나가는 재일여성의 애환으로 전환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재일한국인의 3대의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대물림되는 다듬이질 청각적 이미지를 통하여 자신의 경계인적 정체성을 비극적으로 표출하려 한 것이다. 재일작가는 환경적으로는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그것은 시대적인 요소, 장소적인 요소가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정신문화나 전통문화는 한국인의 것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 속에 많은 알레고리를 통하여 ‘경계인’으로서의 삶 속에서도 확실한 정체성을 제시해나가고 있다. 재일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본에서의 삶을 선택한 이회성은 ‘경계인’으로서의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삶의 형태와 가능성을 믿기 시작한 첫 걸음으로 창작된 것이 바로 이 작품인 것이다.

      • 세대별 일본어 어휘사용에 관한 연구 : 일본어 학습자와 비학습자의 비교를 중심으로

        김인숙 공주대학교 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48719

        Since Japanese colonialism many Japanese words have looked their way into the Korean dialect. This was regarded as a bad influence by Korean people and needed to be eradicated. For several decades after independence, Japanese vocabularies were seen as a threat to Korean people. Every field of Korean society has tried to purify 'Hangeul' since A great deal of effort has gone into this movement. Now only a little Japanese influence can be seen in the Korean language. This study looks at the everyday usage of Japanese language between two different Korean generations : the first, a group of teenagers whose parents were of a post-colonial generation, and a second group of Korean people in their 50's, whose parents were directly influenced by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Also surveyed were 646 high school students living in Chungnam, Kyounggi province and Deajeon city areas of Korea, to statistically analyze the Japanese influence in everyday language usage according to region. The study used a questionnaire consisting of 19 items to gather the information. Each item used 4 to 15 key words and asked each participant to select 'often' or 'occasionally' as a response to the frequency in which they used those words. The answers to each vocabulary item were recorded using a table and chart accompanied by remarks. This study came to a conclusion with the synthesis of all the ramarks offered.

      • 國立大學 法人化 硏究 : 日本 國立大 法人化와 關聯 韓國 順天大學과 日本 宮崎大學을 中心으로

        趙善好 순천대학교 대학원 201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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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世紀の知識基盤社会において大学の競争力が国家競争力という旗幟の下で世界各国が大学の改革を完了したか、または現在進行中である。 かつて市民革命を経験したイギリスやアメリカでの大学学長は理事会雇用の大学経営者になった。大学は政府、社会との関係をどのように設定するかによって、ドイツ系統の国家施設型大学とイギリス・アメリカ系統の法人形大学に大別されるが、結局はドイツ系統の国家施設型大学から社会に開かれた関係を目指すイギリス・アメリカ系統の法人型大学へ転換してきている。 日本では2004年4月1日から国立大学の全面法人化を実施した。韓国では2011年ソウル大学を法人化する準備をしており、国立大学法人化は強要された国家施策という側面を否定できない。 本研究では、このような現状を踏まえて、まず企業方式の法人制度がどのようなものか、世界における主要な大学は現在どのような支配構造と法的地位を持っているかを分析する。次に、韓国政府がモデルにしている日本の国立大学法人化の内容と韓国政府の法人化試案を比較検討して、それぞれの長所と短所また、問題点が何であるのかを把握するものである。 日本の国立大学法人は経営に関する主要事項を審議する経営協議会と教員人事や学事などの事項を審議する教育研究評議会を置き、この2つの機構の上に最高意思決定機構として役員会を置いている。一方、韓国の「国立大学法人の設立、運営に関する法律案」は教員人事、学事に関する事項などを扱う教育研究委員会と財務経営に関する事項を扱う財務経営協議会という2つの軸を立て、その上に最高意思決定機構である理事会を設定している。このように、全体的な姿が日本と極めて類似している点から、韓国政府が日本の国立大学法人化をモデルにしていると考えられる。 学長選考会議で選出された学長は理事を任命し、名実ともに独自的な権力を持って大学を導いていくことが出来る。日本とは異なり、韓国においては総長が理事会の個別構成員になり、最高意思決定機構である理事会の議決事項を執行する。しかし、その組織の大綱や法人化推進過程、法人化をスローガンに掲げた目的などの点で両者は極めて類似している。それゆえに、韓国の国立大学法人化に関する法律案は日本の国立大学法人化過程、あるいは国立大学法人法の多くを指標としたものだと言える。 本研究ではこのような観点から地域中心国立大学に焦点を合わせ、相互に活発な交流のある順天大学校と宮崎大学を中心に考察を行ったものである。本研究の基本的な構成は以下の通りである。 ①世界大学の起源に関する考察 ②法人制度の分析 ③先進国大学の設置形態及び管理構造 ④韓国のモデルとしての日本国立大学法人化 ⑤韓国の国立大学法人化試案 ⑥地域中心大学である順天大学校の活路を模索するためのモデルとして、日本宮崎大学の法人化に関する研究 ⑦順天大学校の発展戦略 日本の国立大学法人化以後突出した問題点は次のようなものが挙げられる。まず、運営費交付金の競争的配分における不公平さ、次に大学の自治と自立性の問題が挙げられる。それから、国立大学が持つ自律性と近代大学の理念との差異、また学長への過度な権限が集中することで大学が経営の対象となり、実学とは溝のある基礎研究と人文科学研究の縮小を図る可能性が高いことである。 競争激化と格差が拡大していく法人化の現場で『落下傘学長奮闘記―大学法人化の現場から』という著書が発刊され、教育関連部署へ遺言状を作成した事例まで見られる。このような中で、運営費交付金が増加した大学と減少した大学に分けられる。2004年4月1日、国立大学法人化以前の入学金は一律であったが、2006年4月1日から2007年3月31日までの期間で全国の各国立大学法人に支給された運営費交付金は大学間において予想よりも大きな差が見られた。運営費交付金が増加した大学法人は、東京大学、京都大学、一橋大学、など13の名門大学法人であり、これらの大学だけで交付金の15%を占めている。一方、運営費交付金が減少した大学法人は岡山大学、広島大学など74の大学法人である。この中でも、兵庫教育大学、京都教育大学、愛知教育大学などの教育大学の大部分を含む50の国立大学法人、言い換えれば全国立大学中の57%に該当するこれらの大学は運営費交付金が約50%以上減少し、非名門の地方国立大学法人では運営費交付金の受給額が圧倒的に少なくなった。法人化以後黒字の東京大学と京都大学では、法人化以前の2003年には200件未満だった特許出願がそれぞれ660件と318件に上昇した。知的財産権の活用収入も同様に上昇し、東京大学では100件未満だったものが301件で1億9千万円になり、京都大学でも2006年には27件で3千4百万円になるなどの変化が見られた。このように2006年度の決算黒字の大学法人は運営費交付金の支給額が上位10位以上の大学で多数見られた。 日本の国立大学法人評価委員会で実施された年度別業務実績に関する評価は全体評価と項目別評価で構成されており、この評価において順天大学校のモデルとして考えられる宮崎大学は大部分で「期待される水準に大きく改善されている」「向上しており、質の高い水準を維持している」という評価であった。この点を踏まえて、宮崎大学で導入されたカリキュラム及び施策において教育文化学部と教育学研究科を重点的に考察した。 日本の全国立大学法人化及び宮崎大学の法人化以後の運営過程で観察された事例を参考に順天大学校の法人化対策の一環として次のような対策を考えなければならない。 対策として考えられるものは、「法人化対策用第7次順天大学校総合発展計画の早期立案」「大局・大課へ移行する法人化に対する戦略的組織改編への早期着手」「近隣高校卒業生の中から優秀学生への入学奨励」「地方自治団体などと密着した大学経営」「広報大使及びモニター要員の委嘱活性化」「同窓会との連携強化」などである。これらの国立大学改革政策を積極的に考え、また将来への変化に対して柔軟な対応策をしっかりと用意しなければならないだろう。

      •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여성동원정책에 관한 연구

        장미화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2007 국내박사

        RANK : 248719

        본 논문의 목적은 일본의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여성동원정책에 관한 것이다. 즉,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그때까지 보조국민으로 취급하던 여성을 전쟁시스템에 끌어들이기 위해 내세웠던 여성동원 논리, 시기별·분야별 동원정책에 관한 연구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총력전 체제 하의 여성동원 논리로 이용했던 모성을 이용한 동원정책을 중점적으로 분석하였다. 더불어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실시되었던 다양한 여성정책이 오로지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에서 여성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취해진 것이지 여성의 지위향상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전쟁 이전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명치유신 이래 패전에 이르기까지 여성을 억압하는 주요 법적 기제였던 명치민법을 통해 여성의 법적 지위를 분석했다. 또한 여성들의 협력 없이는 15년이라는 장기간의 전쟁이 불가능했다는 점과 여성은 오로지 전쟁 피해자일 뿐이라는 지금까지의 시각을 극복하고자 여성들의 전쟁협력 실태를 분석했다. 그리고 총력전으로 치른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식민지 조선에서의 여성동원 실태는 어떠했으며 일본여성과는 어떤 역할차이를 요구했었는지를 고찰했다. 이러한 연구목적에 따라 연구한 바에 따르면, 명치유신 이후 정부는 여성들에게 다양한 역할을 요구하면서도 제국신민인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없도록 법체계를 확립함으로써 여성들이 제도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특히 명치민법은 妻의 무능력자 취급, 막강한 호주권, 가독상속 등을 국가법으로 신설해 여성을 근대국민국가를 구성하는 국민이 아닌 ‘보조국민’ 으로 상정했다. 결국, 명치민법을 포함한 일본의 근대 법체계는 명치유신 이래 패전에 이르기까지 여성에게 다양한 역할을 요구할 뿐, 정치적·법적 권리는 주장하지 못하게 만든 족쇄와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법적 지위에도 불구하고 大正데모크라시期에는 엘리트여성들을 중심으로 여성해방운동이 활발해지면서 ‘婦人參政權獲得期成同盟會’를 중심으로 여성 참정권 획득운동이 전개되어 1930년 ‘부인공민법안’이 의회에 상정되었으나 부결되고 곧이어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활발하던 여성의 사회운동은 퇴조를 보이고 앞날의 불안감으로 인한 이상한 침묵은 지속되어 결국, 여성엘리트들은 무기력하게 정부의 전쟁시스템에 동조·흡수되어간다. 15년 동안이나 지속된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적극적으로 여성을 전쟁에 동원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실시된 동원정책은 크게 3기(만주사변기, 중일전쟁기, 태평양전쟁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는데 제1기에는 주로 일본정신 고양과 국민정신 강화가 실시되고, 제 2기에는 국가 총력전 체제 하에 중앙과 지방위원회에 등용된 여성들의 두드러진 활약상을 볼 수 있으며, 제 3기에는 여성노동력에 대한 의존도가 전에 없이 강해져 법적으로 징용까지 가능해 실제로 현원징용이 이루어진다. 여성정책의 분야별 특징을 살펴보면 교육의 경우, 명치기부터 강조되던 ‘양처현모’주의 교육이 ‘충군애국’사상과 결합되어 가족제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천황제 국가’를 지키는 것으로 확대되어 수많은 여성들이 전쟁을 위해 헌신하도록 교육된다. 또한 중일전쟁 이전까지 특별한 조치가 없었던 여성노동에 관한 정책은 ‘國家總動員法’에 의거하여 여성의사와 여성 치과의사, 간호부를 징용하기 시작하여 전쟁 말기에 심각한 노동력부족 현상이 벌어지자 1941년 ‘국민근로보국협력령’, 1943년 ‘여자근로동원촉진에 관한 것’,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 ‘여자징용실시 및 여자정신대출동기간연장에 관한 건’, 1945년 ‘국민근로동원령’ 등이 공포·시행되어 빠짐없는 철저한 동원이 이루어진다. 또한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자원 확보 차원에서 결혼과 출산장려책, 모자보호법, 임산부 신고 의무화 등, 결혼·출산·양육과 같은 여성에게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사가 오로지 전시라는 이유만으로 국가에 의해 철저히 관리·감독된다. 한편, 명치정부가 근대국민 육성을 위해 ‘교육하는 어머니’에 주목하면서 재발견하게 된 ‘모성’은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군인을 공급하는 존재로서의 ‘母’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다. 즉, 아들을 낳아 잘 길러서 천황의 신하로 바치는 것이 여성의 가장 신성한 임무라고 선전하여 여성은 어머니가 됨으로서 비로소 국가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母’에 대한 강조는 총력전 체제가 진행되면서 점차 ‘母’의 聖化로 변질되어 ‘母性愛’를 국가에 대한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둔갑시킴으로써 거국일치를 위한 심리적 기반을 보강한다. 모성을 이용한 아시아·태평양전쟁기의 대표적 모성정책으로는 ‘모자보호법’, ‘어머니 강좌’, 가정교육지도요항 『母性訓』 실천 강요, 어머니의 날 제정, 종군간호부 정책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여성 개인의 권리로서 ‘모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전쟁수행을 위한 동원대상으로서, 또 직접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를 낳아 기르는 어머니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실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전쟁에 동원할 자원으로서의 여성 내지는 모성으로서의 여성은 전쟁에 협력함으로써 자신들의 자리 찾기에 몰입한다. 당시 대표적 엘리트여성으로서 오로지 부인참정권운동에 매진했던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枝)는 ‘여성의 참여가 곧 해방’이라고 주장하면서 여성의 전쟁참여를 촉구했고, 모성의 국가보장을 강조한 히라츠카 라이테우(平塚らいてう) 역시, 정부의 ‘모성’정책을 강력히 지지했다. 또한 자식을 한 개인의 사유물이 아닌 사회·국가의 것으로 보고 아이들의 數와 質이 국가발전과 장래의 운명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그녀의 母性主義는 즉각 정부의 優生思想으로 전환된다. 서민여성들의 전쟁협력은 주로 여성단체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특히 대일본국방부인회는 상호부조를 원칙으로 전쟁수행에 있어서의 여성 역할을 자각하여 돈이 들지 않는, 즉 성의만 있으면 누구든지 국가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는 대중적인 조직이라고 선전하면서 서민여성의 전쟁동원에 앞장섰다. 그러나 대일본국방부인회는 서민 여성들이 전쟁협력을 위해 만든 자발적인 조직이라기보다 군부와 일정한 목적을 가진 여성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해 만들어진 관제여성단체였다. 한편, 총력전이었던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많은 여성을 전쟁에 동원했다. 조선여성들은 노동자로서 조선내외로의 노무동원 대상이 되었고, 조선내외로 남성들을 동원한 이후 조선내의 농업노동력으로서 동원되었을 뿐만 아니라, 총체적인 농촌피폐를 배경으로 여성의 군 혹은 산업위안부로도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동원정책은 조선거주 일본여성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으므로 당시 조선에 거주한 일본여성과 조선여성의 동원정책 간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식민지 조선여성과 일본여성의 동원정책 역시 큰 차이를 보이는데 일본여성에게는 아이를 낳아 기르는 현모와 후방을 지키는 가정주부로서의 역할이 강조된 반면, 조선여성에게는 일본군 성노예, 노동력으로서의 역할만이 강요되었다고 볼 수 있다. This study is on the women mobilization policy of Japan during Asia Pacific War. In other words, it aims at studying the women mobilization policy by times and fields and the theory of such women mobilization advanced by Japan for involving the women in the war system during the Asia-Pacific War although they had treated the women as sub-nationals until then. Among them, it was focused on the mobilization policy using the maternity that was used as the theory for women mobilization under all-out war system and for women's unification. Also, to demonstrate that various women policies enforced by Japan during the Asia-Pacific War were taken inevitably for mobilizing the women for the war in the special condition of war instead of for upgrading the women's standing, the legal capacity of women was analyzed by reviewing the social standing of the women before the war and the civil codes in the Meiji era which was the main legal mechanism suppressing the women from the era of Meiji to the time of war defeat. The status of women's cooperation for the war was also reviewed for the purpose of defeating the views that the war of long period for 15 years would be impossible without cooperation of women and that the women were the victims of war only. In this study, it was reviewed how was the status of women mobilization in Korea which was a colony of Japan for all-out Asia-Pacific war and how different role of such Korean women from Japanese was required. According to the study made with such purposes, the Japanese government since Meiji made the systematic structure that the women could not resist, by establishing the legal system that the women could not urge their rights equal to the ones of men who were imperial nationals while requesting various roles to the women. In particular, the Meiji civil codes included the treatment of wives as the people without legal capacity, very strong rights of family head, succession to house headship, etc. as the national laws so that appointed the women as 'sub-nationals' who are not the nationals consisting of the modern national-state. Consequently, the Japanese modern legal system including the Meiji civil codes was like a shackle that requested various roles to the women but made them not urge their political or legal rights, from the era of Meiji to the time of failure in the war. In spite of such legal capacity, in the democracy era of Daisho, the women's suffrage campaign was developed mainly by 'Federation for Women's Suffrage Acquisition' with the women's liberation movement led by elite women and 'the proposal of civil law for women' was brought up in 1930 but rejected, and active women's social movements was declined with outbreak of Manchu War in 1931 and strange silence due to anxiety for the future was continued, and consequently elite women became to follow and be absorbed into the war system of the government inactively. The Asia-Pacific war continued for 15 years made Japan mobilize the women to the war actively. The mobilization policy enforced as a result can be reviewed by largely classifying into 3 periods of i) Manchu war, ii) China-Japan war and iii) Pacific war. In the first period, Japanese spirit was inspired and the national spirit was strengthened, in the second period, the women employed at the central and local commission under the national all-out war system showed remarkable activities, and in the third period, dependence was strengthened so to enable legal drafting and the actual drafting was made. To review the characteristics of women policy by fields; in the field of education, the ism to be 'a good wife and wise mother' which had been emphasized since the era of Meiji was combined with the ideology of 'loyalty and patriotism' and then expanded to keep the 'imperial nation' extended from family system, so that a number of women could devote themselves for the war. In case of the policy on the women's labor which had not included any special action until China-Japan war, the women doctors, women dentists and nurses started to be drafted according to the 'national total mobilization law', and thereafter complete mobilization was made in the later part of the war due to serious lack of labor, by promulgating and enforcing the 'decree on nationals' labor cooperation for patriotism' in 1941, the 'promotion for women labor mobilization' in 1943, the 'decree on women's mental labor' and 'enforcement of women drafting and extension of activity period of women mental labor corps' in 1944 and the 'decree on the nationals' labor mobilization' in 1945. Moreover, to secure the human resources to carry out the war, very personal routine affairs to the women such as marriage, child birth and child breeding were strictly controlled and supervised by the government, through the marriage and child birth promotion policy, mother and child protection law, compulsory report of pregnant women, and so on. In the meantime, the 'maternity' rediscovered by the Meiji government while noticing the 'educating mother' for cultivate the modern nationals started to be noticed again as 'mother' which is the being supplying the soldiers during the period of the Asia-Pacific war. In other words, it was advertised that the holiest duty of women is to devote their sons as the servant of the king after giving birth and breeding well, so a woman was able to be recognized as a member of nation after being a mother. Such emphasis on 'mother' was changed to the sainting of 'mother' gradually as the all-out war was proceeded, and the psychological base was reinforced for national unification by changing the 'maternal love' to the service and sacrificing spirit for the nation. The policies using the maternity during Asia-Pacific war were establishing the 'mother and child protection law', offering the 'lectures for mothers', forcing to practice the 'maternal precepts' as home education guideline, establishing the 'mothers' day', making the policy of nurses attached to the army, etc. However, those policies were not for protecting the 'maternity' as the women's personal right but for mobilizing them to carry out the war in special conditions of war, and should be construed that they were enforced due to the importance as mothers who give birth and breed the soldiers directly involved in the war. The women as the resources mobilized for the war or as maternal subjects concentrated to find their position by cooperating for the war. Ms. Ichigawa Husae, the representative elite woman at that time who strived for the women's suffrage movement, pushed on women's participation in the war, insisting on that 'women's participation would lead to the independence', and Ms. Hiratsuka Raiteu who emphasized the government's guarantee of maternity also supported the 'maternity' policy strongly. Her idea of motherhood was converted into the government's ideology of genetic superiority, in which the children should be considered as social or national resources rather than as personal belongings and that the number and quality of children give big influence to the development and destiny of the nation. Cooperation of common women for the war was made mainly through the women groups. Especially, 'The Great Japanese Women Group for National Defense' led the mobilization of common women for the war, by enlightening the role of women in carrying out the war based on the mutual cooperation, while advertising that they were a public organization in which anyone can work for the nation only with intention needless of money. However, this Group was made by the government based on the interests of the army and the women having a certain purpose, other than a voluntary organization made by the common women for cooperation in the war. In the meantime, for the all-out Asia-Pacific war, a number of women were mobilized in Korea also. Korean women were targeted for the labor works inside and outside of Korea. They were mobilized for agricultural labor in Korea after mobilizing the Korean men for domestic and overseas works, as well as for military or industrial comfort women's role. However, such mobilization policy was not applied to the Japanese women living in Korea, through which it is shown that there was a big difference between the mobilization policies for Korean women and Japanese women living in Korea. Also, there was a difference in the mobilization policies for the women of Korea which was a Japanese colony and for the Japanese women; for the Japanese women, the role of good mother breeding the children and housekeeper doing the rear service was emphasized, while for the Korean women, the role of sexual servants for the Japanese soldiers or of labor was compel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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