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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日 新 防衛協力指針과 「韓半島 有事」 : 關聯 內容 및 問題點

        강경의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200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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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의 목적은 (1) 냉전 이후 미국과 일본의 안보전략 분석을 통해 기존 미·일 안보체제의 개정 필요성을 설명하고, (2) 그 대안으로 기존 지침을 개정한 미·일 신방위협력지침과 실효성 확보를 위해 제정된 관련법안의 내용을 분석하고, (3) 구체적으로 한반도사태에 적용했을 때 예상되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4) 그 보완을 위한 몇가지 제언을 하는데 있다. 냉전 이후에도 동아시아에서는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중국이 대만에 대하여 통일위협을 계속하고 있고, 2000년 6월 15일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하여 화해에 합의하였다고 하나 남북한은 이념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 대립하고 있으며, 핵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의 확산과 군비경쟁 등으로 안보문제에 있어서는 여전히 불안정한 정세가 계속되고 있다. 1989년 구소련의 붕괴 등 동아시아 전략환경의 급격한 변화로 미·일 양국은 새로운 방위정책을 정비할 필요성에 직면하였다. 미국은 "참여와 확대전략"을 통해 냉전이후에도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리더십을 유지하려하고, 일본은 경제력에 맞는 국제적 역할 증대라는 전략적 의도를 갖고 있어 양국의 국익이 맞물려 탈냉전기에도 미·일안보협력체제는 냉전시대 이상으로 강화시킬 필요가 생겼다. 그러나 기존의 미·일안보조약은 소련이라고하는 특정한 공동적을 전제로 한 것이어서 탈냉전기의 "동아시아지역 안정 확보"라는 미국과 일본의 새로운 공동목표 달성에는 적합하지 않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과 일본은 새로운 안보협력틀을 모색하게 되었다. 1997년에 발표된 新미일방위협력지침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출현한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미·일안보협력의 영역 및 대상의 변화 그리고 일본의 역할 확대에 대한 협의를 거쳐 1996년 4월에 1차로 미·일 新안보공동선언을 발표했으며, 1997년 9월에는 다시 1978년의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하여 "일본 주변 유사시" 미일간의 안보협력 내용을 40개 항목에 걸쳐 구체화 시켰다. 新방위협력지침과 舊방위협력지침의 큰 차이는 전자가 소련의 일본침공을 전제로 미일공동방어에 역점을 둔데 비하여 후자는 미일간의 방위협력 내용과 범위를 좀 더 포괄적으로 구체화 및 세분화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이어서 新방위협력지침의 원활한 이행을 위한 법적 제도적 정비를 목적으로 관련법안을 마련하여 1999년 5월 24일 참의원에서 가결함으로써 미국의 지역분쟁에 대한 증원 기반을 구체화시켰으며, 지역 안보문제에 일본도 개입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관련법안은 물품역무상호제공(ACSA)개정안, 자위대법 개정안, 주변사태법안 등 세가지 법으로 일본의 대미군 지원이 요구되는 주변사태 활동을 합법화하는 법들이다. 그러나 관련법안에서 일본은 '주변국 유사'조항과 관련, 주변국의 범위와주변사태의 정의를 모호하게 처리함으로써 일본의 주변국에 해당되는 중국, 한국, 러시아, 북한 등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한반도 유사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미·일안보협력은 한국에 직접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다. 한·미 동맹에 따라 미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될 것인데, 일본 역시 <주변사태법안>에 의거하여 미군을 지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긴급한 사태가 발생하거나, 지역분쟁이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하여 미군의 개입 능력에 한계가 있을 경우에는 일본의 직접, 간접 개입 가능성은 더욱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미, 미·일간은 각각 안보협력체제가 확립되어 있어 서로의 역할과 범위가 확실하게 규정되어 있으나, 한·일간에는 어떠한 협정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한국의 주권 침해, 한·일간의 군사 활동 마찰이 예상된다. 한반도 유사시에 미국의 작전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3국간 협력이 요구된다. 따라서 우리는 한반도 유사시 일본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를 분석하여 한반도 유사시 군사작전상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한편, 한·일간의 마찰이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일본의 역할에 일정한 제한 내지 통제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고, 상호협력이 필요한 경우 신속히 협조할 수 있도록 협력체제를 미리 구축하여 둘 필요가 있다. 한국과 일본의 국민감정등을 감안할 때 한·일간에는 동맹이 아니면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협력을 할 수 있는 체제 즉 미·일 방위협력지침처럼 '韓·日 防衛協力指針'을 마련하여 둔다면, 한·일간의 불필요한 마찰을 줄일 수 있고, 한반도 유사시 한·미 연합군의 군사작전상의 效率性을 增大하기 위해 필요한 일본의 지원을 원활하게 할 수 있으며 사안에 따라서는 우리쪽에서 적극적으로 일본의 협력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plain the current shift in the U.S.-Japan Security system through analyzing the changing defense strategies of the two countries in the post-Cold War era. In doing so, the new "U.S.-Japan Defense Guidelines" and the contents of the related bill submitted to the Diet for guaranteeing the applicability of the new guidelines are analyzed. And as a conclusion, the paper points out the problems that might arise when the revised guideline is applied to situations in Korean peninsula, and finally suggests several policy recommendations. It has been more than ten years since the Cold War order collapsed, but East Asia is still subject to political unstability: China is keep benting on communism threatening to forcefully absolve Taiwan; the two Koreas have yet to overcome ideological dispute although they agreed upon reconciliation at the Summit meeting on June 15, 2000; issues of weapons of mass destruction (WMD), nuclear proliferation, and transfer of missile technology are some of other issues threatening peace in the region. The abrupt change in the East Asian strategic environment, including the sudden fall of Soviet Union, obligated the U.S. and Japan to adjust to the situation by setting new defense policies. The U.S. attempts to maintain its leadership in the region through engagement and enlargement, while Japan aims to expand its political role in the international society commensurate of its already achieved economical prowess. With such interests, the two countries had to strengthen, even more strongly than during the Cold War, their security cooperation system. On the other hand, the U.S.-Japan security alliance, the rationale of which was the Soviet threat, became obsolete and did not reflect the two countries' new aim of establishing a regional stability. Thus, a new set of rules was required between the U.S. and Japan. With this background, the Guidelines for U.S.-Japan Security Cooperation (new Guidelines hereafter) was consigned in 1997. On April 4, 1996, the U.S. and Japan announced the Joint Declaration reflecting the changed scope and focus of the new security cooperation. In August of 1997, the two countries revised the 1978 Defense Cooperation Guidelines, and set forty items of their security cooperation in contingencies in and around Japan. Compared to the former one, the new Guidelines is much more comprehensive and includes specific "guidelines" for cooperation. The Japanese Diet passed a related bill in May of 1999 to prepare a legal and systematic basis for the Guidelines. The related bill includes Acquisition and Cross-Servicing Agreement (ACSA), the revised bill for Japan's Self-Defense Force, and the bill for contingencies in areas surrounding Japan, which provide legal basis for the U.S. and Japan to interfere in regional crisis. The related bill, however, has been viewed with suspicious eyes, particularly from China and North Korea, because it avoids clarifying the scope and definition of the contingencies around Japan. Should a major crisis break out in the Korean peninsula, the U.S.-Japan cooperative system will have direct effects on the situation. The U.S. armed forces will be mobilized according to the ROK-U.S. security treaty, and the Japanese Self-Defense Forces, supported by the bill for contingencies in areas Japan, will support the American troops. If several regional contingencies occur at the same time and the U.S. alone cannot manage the situation, the possibility of Japan's involving in the case will by far increase. Designated roles and boundaries for each country in contingencies are specified in the ROK-U.S. and the U.S.-Japanese security cooperation systems. But there is no such arrangement between South Korea and Japan which leaves the possibility of Japan's violating Korean sovereignty and conflicts between the two countries in conducting military operation jointly. For efficient crisis management in Korean peninsula, a solid trilateral cooperative system among the U.S., Japan, and Korean needs to be established. Efficiency in combined military operation may be achieved by specifying the roles (possible and limited) to be taken by Japan. It is also important to establish a consultative system between ROK and Japan so that they will be able to respond quickly when such cooperation is needed. Considering the public sentiments of Korea and Japan, the pace and degree of South Korea's security cooperation with Japan should be carefully managed. It would be desirable to establish a sort of guidelines for bilateral security cooperation, rather than an alliance. By doing so, they will be able to prevent unnecessary conflict between Korea and Japan in managing crisis, and bilaterally assume a coordinating role regarding security cooperation among South Korea, the United States, and Japan.

      •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 연구의 계보

        유선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2018 국내석사

        RANK : 248719

        본고는 19세기 일본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필립 프란츠 폰 지볼트(Philipp Franz von Seibold, 1796-1866)와 그에 대한 연구에 주목했다. 지볼트의 사후 150년이 지났음에도 일본에서는 여전히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볼트는 1823년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지 총독으로부터 일본에서의 박물학 조사를 명(命)받고 데지마(出島) 네덜란드 상관 소속 외과의로서 일본에 부임했다. 총독 카펠렌의 전폭적인 지원과 전・현임 상관장 및 상관원들의 협력 속에, 일본의 폭넓은 계층의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방대한 자료와 동식물 표본을 수집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829년 귀국 후 󰡔NIPPON󰡕, 󰡔일본동물지󰡕, 󰡔일본식물지󰡕의 3부작을 발간한다. 1859년에 다시 일본에 와 새로운 기준으로 밀려드는 서구를 막부가 이해하고 주도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가 남긴 저작과 수많은 자료, 컬렉션을 통해 19세기 전반의 일본을 직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으며, 서구의 지식인이 일본이라는 다른 문화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국내의 일본학에서 지볼트 연구는 지엽적인 데 그치고 종합적인 분석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일본과 서구에서 진행되고 있는 지볼트 연구의 계보를 정리함으로써 우리에게 지볼트 연구의 의미는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이 작업은 앞으로 지볼트와 관련한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가기 전의 선행작업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본문에서는 우선 선행연구로 국내의 지볼트 연구를 정리했다. 주로 󰡔NIPPON󰡕의 조선 관련 기록에 대한 연구가 중심이다. 다음으로 지볼트 연구동향을 일본과 서구로 나눠 정리했다. 일본에서의 연구동향은 시기별 주요 논저를 소개하고, 여기에서 제기된 연구주제를 추출하여 주제별로 지볼트 연구의 계보를 정리했다. 주요 논저는 (1) 구레 슈조(1926)의 󰡕지볼트 선생 그 생애와 그 공적󰡕, (2) 일독문화협회(1938) 편 󰡔지볼트 연구󰡕, (3) 오가타 토미오 외(1977) 󰡔지볼트 「일본」의 연구와 해설󰡕 등이다. 여기에서 추출한 연구주제는 (1) 인물(전기) (2) 의학 (3) 생물(동식물학) (4) 광물학 (5) 기상학 (6) 지리학 (7) 언어학 (8) 막말(幕末) 외교 (9) 서구의 일본연구・일본관 (10) 이문화(異文化) 교류(컬렉션) (11) 지볼트 사건 등이다. 특히, 지볼트 사건은 아직 정확한 경위가 밝혀지지 않아 계속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 지도, 외교, 막부내 권력관계, 국학, 기후 등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되고 있다. 서구에서의 연구는 독일, 네덜란드, 영국 등 특정 국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독일의 한스 쾨르너(1967)의 󰡔뷔르츠부르크의 지볼트 家 : 18・19세기의 학자 일가󰡕의 연구가 독보적이다. 서구에서의 연구는 국가별로 주요 연구를 정리했다. 이를 통해 지볼트 연구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의 지볼트 연구는 처음에는 일본의 근대화와 개국에 공헌한 지볼트를 현창하는 차원의 내용이 중심이었다. 이후 일본어 이외의 네덜란드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다른 언어로 된 사료가 이용되면서 플랜트헌터, 식민지 과학자, 기업가, 전시(박물관)기획자 등 지볼트의 새로운 면이 부각되고 있다. 최근에는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그가 남긴 컬렉션에 대해 공동연구기관이 종합적인 연구조사를 실시하고 자료의 데이터베이스를 공유화하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 2000년 이후 지볼트의 두 아들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지고 있다. 서구에서의 연구는 일본내의 연구와 연동하여 진행되는 면이 있다. 지볼트 연구의 의미는 다음의 네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19세기 개국 전의 일본의 학문수준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일본의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며 서구의 학문을 전하고 일본의 학문을 서구에 알리고 있다. 그와 관련된 사료를 통해 일본이 당시 어느 정도의 학문수준을 갖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둘째, 대외위기의식이 고조되어 가던 시기에 막부가 서구에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구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그의 2차 방문 시기인 1859-1862년은 막부가 페리의 개항 이후 서구의 여러 나라들과 조약을 맺던 시기이고 일본 국내에서는 양이(攘夷)의 지사들과 난학의 전통을 잇던 이들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였다. 막부는 지볼트를 외교고문으로 고용했고 그가 머무른 도쿄의 아카바네접우소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방문하여 서구의 과학문물, 외교 등 서양사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질의하고 답을 얻었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세력에 의해 막부는 타도되지만, 급박한 위기상황에서 밀려드는 서구세력에 맞서 고심하고 노력했던 막부의 구체적인 활동의 한 예를 볼 수 있다. 셋째, 그의 연구가 기존의 연구를 계승한 것이라는 점에서 서구의 일본연구의 진행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저작들은 앞서 일본에 체류한 캠퍼, 툰베리 등의 상관의(商館医)나 상관장 티칭, 브롬호프 등 수많은 사람들의 저작과 협력에 힘입은 바 크다. 그가 참고로 한 서적들을 통해 서구의 일본연구사를 추적하고 그들의 일본관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넷째, 지볼트 연구의 각 연구주제는 곧 동서 문명이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일종의 동서 문명 교류라고도 할 수 있는데 특히 제자들이 과제로 제출한 논문, 난벽다이묘들과의 교류, 막부 오쿠의사(奥医師)와의 의술교류 등 상이한 문명간에 학문이 어떻게 만나고 수용, 절충되는지를 각 분야별로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사례가 될 것이다. 아울러 문명교류의 현장에서 새로운 많은 개념들이 수용, 번역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개념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9世紀の東西文明の出会いの中で、日本は自ら近代国家への道を歩み、東アジアの3カ国の中では、唯一西欧の植民地化の危機を回避した。それをどのようにして可能にしたのかについての論議は長らく続いてきたが、これに関する論議を主導しているのは西欧が中心であった。韓国が経験した日本による植民地支配は日本を背けたり、否定したりする方向に進ませてきた側面が強い。それでも、過去についての正確な理解と現実への認識が先行してこそ、これからの未来を話し合うことが出来る訳であり、日本についての幅広く、深度ある理解は決して疎かであってはならない問題である。 その延長線上で本稿では、19世紀の日本を理解する方法の一つとして、当時、日本で幅広い階層の人々と交流をしながら、収集した資料と標本を基にして日本に関する3部作や、「19世紀のタイムカプセル」ともいわれる膨大なコレクションを残している「フィリップ・フランツ・フォン・シーボルト(Philipp Franz von Siebold, 1796-1866)」とその研究に注目した。シーボルトの死後、もう百五十年も過ぎていても日本では未だシーボルト研究は盛んであるが、韓国ではほとんど触れられていないからである。ここにシーボルトとシーボルト研究の重要性を韓国の日本学界に紹介するということも意味あることだと考える。 シーボルトは1823年オランダ領東インド植民地総督から日本での博物学調査を命じられ、出島のオランダ商館付き外科医として日本に着任した。総督カぺレンの全面的な支援や、元・現任商館長及び商館員などの協力、幅広い日本人たちとの交流などをつうじて収集した資料や動植物の標本をもとに、1830年ヨーロッパに帰った後、󰡔NIPPON󰡕、󰡔日本動物誌󰡕、󰡔日本植物誌󰡕の3部作を刊行する。 以後、1859年、再来日し、新しい規準で押し寄せる西欧を幕府が理解し、主導的に対応するためのアドバイスを惜しまなかった。シーボルトが残した著作や数多くの資料、コレクションは19世紀の前半の日本を直接的にも間接的にもうかがい知れるようににしてくれる。同時に西欧の知識人が日本という異文化についてどう理解していたかもうかがい知れる。 韓国の日本学でのシーボルト研究は部分的なところにとどまり、総合的な分析は行われていない。シーボルトと関連する研究分野が幅広いのがひとつの原因であろう。ここに本稿ではシーボルト研究の系譜をまとめることによって、韓国におけるシーボルト研究の意味合いは何なのかを考えてみた。この作業はこれからのシーボルトと関連する本格的な論議が始まる前の先行作業としての意味を持つ。 まず、本文では先行研究の検討として、韓国におけるシーボルト研究をまとめた。韓国の研究は主に󰡔NIPPON󰡕の朝鮮関連記述に関する研究を中心に行われている。 次に、シーボルト研究動向について、日本と西欧とを分けてまとめてみた。日本における研究動向では、時期別に主な論著を紹介し、そこで採り上げられた研究テーマを取り出して、そのテーマ別にシーボルト研究の系譜をまとめた。主な論著は、(1) 呉秀三(1926) 󰡔シーボルト先生其生涯及功業󰡕 (2) 日独文化協会編(1938) 󰡔シーボルト研究󰡕 (3) 緒方富雄ほか(1977) 󰡔シーボルト「日本」の研究と解説󰡕などである。そこから取り出した研究テーマは、(1) 人物(伝記) (2) 医学 (3) 生物(動植物学) (4) 鉱物学 (5) 気象学 (6) 地理学 (7) 言語学 (8) 幕末の外交 (9) 西欧の日本研究・日本観 (10) 異文化交流・コレクション (11) シーボルト事件などである。特に、シーボルト事件はまだ正確な経緯が明らかにされていないので、相次いで新しい研究結果が発表されている。この事件は地図・外交・幕府内の権力関係・国学・気候など様々な観点から証明されている。 一方、西欧におけるシーボルト研究はドイツ、オランダ、イギリスなど特定の国を中心に行われているが、ドイツのハンス・ ケルナー著 󰡔ヴュルツブルクのシーボルト: 18・19世紀の学者一家(Die. Würzburger Siebold. Eine Gelehrtenfamilie des 18. und 19. Jahrhunderts.󰡕(1967)が比類のないものである。西欧における研究は国別に主要研究を紹介した。 それによってシーボルト研究の特徴をまとめてみると、次のようになる。まず、日本におけるシーボルト研究は初めは日本の近代化と開国への貢献者としてのシーボルトを顕彰する内容が中心であった。それから、日本語の他にオランダ語、ラテン語、ドイツ語、ロシア語などの資料が研究に使われてからは、プラントハンター、植民地科学者、企業家、展示(博物館)企画者など、その新たな面が浮かんできている。最近は世界の各国に散らばっているシーボルトの残したコレクションについて共同研究機関が総合的な研究調査を実施し、資料のデータベースの共有化を図っている。併せて、2000年以来、シーボルトの二人の息子についての研究も盛んになっている。西欧における研究は日本での研究と連動して進められる面がある。 シーボルト研究の意味としては以下の四つが考えられる。 第一には、19世紀、開国前の日本の学問水準をうかがい知れることができる点である。シーボルトは日本の多くの学者たちと交流しながら、西欧の学問を伝え、日本の学問を西欧に知らせている。それに関する史料を通じて、当時、日本の学問水準はどのくらいであったのか、その力量が見えてくる。 第二に、対外危機意識の高まっていった時期、幕府は西欧にどのように対応しているか、具体的な様子が見られる点である。特に、シーボルトの2回目の滞在時期の1859年から1862年にかけては幕府がペリー来航以降西欧の諸国と条約を締結していった時期で、日本の国内では攘夷の志者たちと蘭学の伝統を繋いでいた人々との間の確執が激しくなっていった時期でもある。幕府はシーボルトを外交顧問として雇い、シーボルトの泊まっていた赤羽根接遇所は数多くの人物たちが訪れて西欧の科学文物、外交など西洋事情について具体的に質疑して答えを求めていた。明治維新の勢力によって幕府は倒れてしまうが、急迫な危機状況の下で押し寄せてくる西欧勢力に立ち向かい、苦心し、危機を乗り越えるために努力した幕府の具体的な活動の一例が認められる。 第三に、シーボルトの日本研究は既存の日本研究を引き継いでいるものであることから、西欧の日本研究の研究過程が窺われる点である。シーボルトの著作は先に日本に来ていたケンぺル、ツュンベリーなどの商館医や、商館長ティチィング、ブロムホフなど多くの人々の著作と協力に支えられたところが大きい。また、シーボルトの参考にした書籍を通じて西欧の日本研究の軌跡を辿ることで、西欧の日本観の変化を垣間見ることができる。 最後に、シーボルト研究の各々のテーマは即ち、東西文明に出会う地点でもあり、一種の東西文明の交流ともいえるが、特に、門人たちがシーボルトに提出した論文や、シーボルトと蘭癖大名たちとの交流、幕府の奥医師との医術交流などは、異なる文明間に学問がどのようにして出会い、受容、折衷されるかを各分野別に具体的に調べられる事例になるだろう点である。併せて、文明交流の現場で多くの新しい概念が受容、翻訳されていた点を考慮すると、概念史研究にも大切な資料になりうるものと考える。 ちなみに、19世紀は、西洋人たちによる体系的な日本・コレクションが形成されはじめた時期である。シーボルト・コレクションもその延長線上にある。シーボルトに幅大い人脈を紹介してくれた商館長ブロムホフの日本・コレクションの手稿目録が最近刊行された。ブロムホフが自ら収集したコレクションについて目録を作成し、解説をつけたもので、シーボルトの前の西欧は日本のことをどのように理解しているかが窺われる貴重な資料である。その中には󰡔NIPPON󰡕に朝鮮編の資料が入ってあるのと同じように、ブロムホフの収集した朝鮮・コレクションの目録や朝鮮についての記述も見られる。西欧に紹介された朝鮮の様子が見られる貴重な資料なので、これからの精密な資料の検討が必要であると考える。

      • 20세기 전반 일본 소학교 국정교과서에 등장하는 '아코 사건' 연구

        요시다유우꼬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201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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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겐로쿠시대(元禄時代, 1688∼1704)에 발생하여 이른바 ‘47인의 사무라이’로 널리 알려진 ‘아코(赤穂) 사건’은, 『주신구라(忠臣蔵)』라는 고전문학 작품으로 각색되어 일본인의 마음속에 있는 충성심을 자극하는 표상(表象)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본 논문은 무사사회에 존재하던 충성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아코 사건’과 여기서 비롯된 창작물인 『주신구라』라고 하는 고전문학 작품이, 일본이 제국주의로 나아가던 20세기 전반에 일본의 소학교 교과서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고찰한 것이다. 일본은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와중에서 빠른 근대화를 통해 천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국가를 수립하려고 했다. 그리고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라는 슬로건으로 상징되는 새로운 국가 일본을 만들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강한 충성심을 가진 신민/국민 만들기에 매진해나가게 된다. 이처럼 일본의 대내외적인 상황이 변화해가면서 일본정부의 교육정책에도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변화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근대 일본 제국의 신민/국민 만들기 과정에서 일본의 교육정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주변국들을 해하고 침략하는 모습으로 변모한 제국일본에 충성스러운 신민을 만들어버렸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본 논문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1903년 ‘소학교령개정’이 이루어지고 러일전쟁이 발발한 1904년부터 국가의식의 고취를 위해 수신·국어독본·국사·지리과목이 기존의 검인정체제에서 국정(國定) 교과서체제로 바뀌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 특히 주목된다. 따라서 본 논문은 1904년부터 일본에서 국정교과서가 만들어진 이후 1945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소학교(1941년부터는 국민학교)에서 사용된 국정교과서들 속에서 ‘아코 사건’과 고전작품 『주신구라』가 어떻게 등장하는지 여부(국가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데 어떻게 이용되었고, 시기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실제로 조사 분석했다. 본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조사 결과에 의하면, 국정교과서 수신·국어·역사 교과서의 각 과목의 교과목표 에 따라 ‘아코 사건’은 다르게 나타났다. 일본에서 수신교과서의 ‘아코 사건’과 『주신구라』에 대한 언급은 민감한 정치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충성심의 차이와 성격에 기인한 것이었다. 역사 교과서는 인물중심의 흥미로운 교과서를 만들려고 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주신구라』를 상기시켜서 전쟁에 임하기도 했다. 그리고 국어교과서는 군부가 주목을 했다. 국어독본은 감동적, 정서적으로 만들어서 천황을 예찬하는 교육에 이용했던 것이다. 제국일본의 근대 신민교육은 국정교과서를 통해 ‘아코 사건’과 『주신구라』의 충성심을 이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소학교 교과서 보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는 1941년 이후의 국민학교 교과서에서 여실하게 나타났다. 국정후기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필터를 통과한 왜곡된 충성심을 교육현장에서 강력하게 내면화하려고 했었다. 그 결과 소년들에게 조국을 위해서라면 전쟁터도 불사하고 참전하게 만든 명분과 믿음을 심어주게 되었다. 특히 ‘해군 특별연소병(海軍特別年少兵)’은 사상 최연소의 소년병들이 문무양도(文武両道)로 훈령을 받고, 자신보다 나이 많은 병사들을 지휘하면서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왔다. 이런 부분은 ‘아코 사건’을 생생히 재현한 뜻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아코 사건’의 충성심은 복수에서 비롯된 이야기라고 알리고 있지만, 소년들의 마음속에는 ‘자기희생의 종교’와 같은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 본 연구를 통해 ‘아코 사건’의 등장은 시대적 상황과 정치적 동향에 민감하게 반영되어 효과적으로 교육에 이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거 일본에서 일어났던 교육의 문제점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앞으로 미래의 대한민국, 나아가서는 세계를 짊어지고 갈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을 어떻게 미래지향적으로 풀어갈 것인지 진지한 연구가 이어질 수 있기를 기대한다.

      • 日韓龍宮說話の比較硏究 : 『浦島太郞』と『放鯉得龍女』を中心として

        林由美子 경상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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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일본의 『우라시마타로(浦島太郞)』와 한국의『방리득용녀(放鯉得龍女)』의 성립 및 전승과 구조와 주제를 비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우라시마타로』는 『니혼쇼키(日本書紀)』·『단고노쿠니후도키(丹後國風土記)』·『만요슈(万葉集)』·『오토기조시(御伽草子)』·『니혼무카시바나시(日本昔噺)』·국정교과서 등에 등장하지만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다르다. 『니혼쇼키』에 ‘우라시마코(浦嶋子)’가 등장하는 권14는 백제의 포로가 되었던 당나라의 도래인 쇼쿠슈겐(續守言)에 의해 작성했다는 학설이 있기 때문에 고대 우라시마코전설은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신선(神仙)이 살고 불로불사의 약이 있고 바다 건너에 있는 신산(神山)인 ‘봉래산(蓬萊山)’이 나오는 점, 거북이가 여성으로 둔갑하는 예가 일본에 없고 중국에 많다는 점, 거북이가 신선도(神仙道)이론과 실천을 설명한 『호보쿠시(抱朴子)』에 장생의 동물이라고 기록되고 있는 점, 『니혼쇼키』에 ‘신선을 잇달아 만나다’는 점 등으로 『니혼쇼키』·『단고노쿠니후도키』의 우라시마코전설은 중국의 신선사상(神仙思想)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만요슈』에서는 ‘봉래산’이 ‘도코요(常世)’로, 그리고 거북이도 선인(仙人)도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로 바뀌고, 일본적인 것이 추가되어 전승되었다. 또『오토기조시』에서는 ‘용궁’·‘오토히메(乙姬)’·‘다마테바코(玉手箱)’가 포함되고, 거북이의 보은이라는 모티브가 추가되어 전승되었다. 또한 어린이를 위한 『니혼무카시바나시』나 국정교과서의 『우라시마타로』에서는 ‘거북이’와 ‘용녀’가 동일인이 아니며, 우라시마 다로와 용녀도 부부가 되지 않는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국정교과서의 『우라시마타로』가 현재 일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옛날이야기로 전승되어 왔다. 이처럼 『우라시마타로』는 고대에 성립한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의 영향을 받아서 전승되어 왔던 것이다. 한국의 『방리득용녀』는 ‘용궁설화’의 대표적 유형인‘잉어의 보은설화’로 분류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른 ‘잉어의 보은설화’와 비교를 하면서 그 특징을 고찰했다. 이런 설화와 『방리득용녀』의 다른 점은 용궁에서 받은 물건이다. 『방리득용녀』이외의 설화에서 받았던 물건은 모두 부귀(富貴)나 주인공에게 도움이 된 물건이며, 이것들과 금기는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방리득용녀』에서 주인공이 받은 물건은 용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보물함이며, 부귀를 가져 올 수 있는 물건이 아니고 이 보물함은 금기와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다른 설화와 크게 다르고 이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점이 『우라시마타로』와 유사하다. 그 다음에 『우라시마타로』와 『방리득용녀』의 차이점에 주목하여 그 원인이 된 문화적 배경을 고찰하였다. 첫째로 『우라시마타로』에서는 주인공 이름이 ‘우라시마 다로’이지만 『방리득용녀』에서는 ‘한 명의 어부’로만 나오고 이름이 없었다. ‘우라시마 다로’는 고대 우라시마코전설에서는 이름이 명확하지 않았지만 『오토기조시』에서 일반적으로 명명했던 이름의 하나였던 「다로」를 우라시마가(浦島家)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명명해서 ‘우라시마 다로’라는 이름이 탄생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족보를 중심으로 한 동족의식이 강하고, 또한 그 동족 속에서도 항렬자에 의해 자신이 어떤 서열인지가 명확하다. 따라서 일본은 어떤 이름을 지어도 자유롭고 옛날이야기에서도 주인공 이름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지만, 한국에서는 항렬자가 있었기 때문에 남자 주인공에는 쉽게 이름을 붙일 수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둘째로 ‘용궁’에 대해서 비교했다. 『우라시마타로』와 『방리득용녀』는 모두 ‘용궁’이 여러 가지 보석으로 꾸며지며, 아름답고 훌륭한 궁전이 있고, 맛있는 요리가 있는 이상향(理想鄕)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우라시마타로』에는 ‘사방사계(四方四季)’라고 한 ‘용궁’과 지상과의 시간 차이를 나타내는 내용이 있고, ‘불로불사의 이상향’으로 묘사되었다. 이처럼『우라시마타로』의 ‘용궁’은 지상과의 시간 차이가 있는 반면, 『방리득용녀』의 ‘용궁’에는 지상과의 시간 차이가 없었다. 이것은 ‘불로불사’를 바라는 일본인과 ‘불로불사’보다도 사후 세계에 중점을 둔 한국인과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에는 선녀나 선인이 나오는 민화(民話)는 몇 가지 있었지만 이런 민화들에도 ‘불로불사’의 모티프는 없었다. 유일하게 ‘불로불사’의 모티프가 있는 민화 『신선처럼 놀다가 도끼 손잡이를 썩힌다(仙遊に斧の柄を腐らす)』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민화가 『우라시마타로』와 같이 시대를 넘어서 사랑받아 온 민화가 아닌 것을 보아도 한국에서는 불로불사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반면 일본에는 『우라시마타로』 이외에도 ‘불로불사’가 그려져 있는 『다케토리모노가타리(竹取物語)』라고 하면, 일본인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일본 최초의 이야기문학이다. 게다가 ‘불로불사의 선약’인 ‘단약(丹藥)’을 먹으면 수은중독이나 비소중독의 위험성이 있다고 알면서도 단약을 먹은 천황이나 귀족이 있었던 것을 보아도 불로불사에 대한 마음이 강했음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용궁으로 가는 방법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었다. 『우라시마타로』에서는 ‘거북이 등을 타고’ 바다 속으로 간다는 것에 반해, 『방리득용녀』에서는 ‘주문을 외면 바닷물이 갈라져 큰 길이 생겨’ 용궁에 갈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니혼쇼키』의 『우라시마타로』의 무대인 단고(丹後)반도에는 마치 바다의 한복판에 길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마노하시다테(天橋立)’가 있었다. 언제나 ‘아마노하시다테’를 보고 있었던 단고에서는 ‘주문을 외면 바다가 갈라져 큰 길이 생겨서’ 용궁에 갈 수 있다는 것은 그다지 신비롭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한국에서는 ‘진도(珍島)의 바닷길’이라고 하는 현상이 신비롭게 여겨져 ‘주문을 외면 바다가 갈라져 큰 길이 생겨서’ 용궁에 갈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이 지리적 특성과 자연현상이 민화 형성 과정에 영향을 주었음을 밝혔다. 네 번째로 용궁에서 지내고 있었던 주인공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지는 이유’는 『우라시마타로』와 『방리득용녀』는 모두 ‘부모를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일본에는 부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지는 이유’에 ‘일하는 것의 중요함’을 전면에 내세운 검정교과서가 있었다. 이 교과서는 1952년부터 다음해까지 사용된 것이지만,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에 패전하고 경제부흥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기에 만들어진 교과서였다. 가족보다도 먼저 나라의 부흥이 요구된 시대였으므로 이러한 내용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또 500년대에 ‘효’의 정신이 중국에서 전해지고 고대 일본에 있어서는 ‘효’는 도덕의 근본이며 교육의 근원이었지만, 에도(江戶)시대가 되서 ‘효’보다도 ‘충’을 중요하게 여겨졌던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우라시마타로』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구조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 주제는 일관해서 ‘불로불사의 이상향(理想鄕)에 대한 동경’이라든지 ‘약속을 지키는 것의 중요함’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국정교과서인 『우라시마타로』는 천황제 국가의 이념을 표방하는 교육을 획일적으로 시키기 위하여 ‘어떠한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아동에게 교육시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방리득용녀』의 주제는 국정교과서의 『우라시마타로』와 같이 ‘약속을 지키는 것의 중요함’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한일 간의 두 옛날이야기의 주제는 ‘약속을 지키는 것의 중요함’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그 유사점이 엿보이는 것으로 고찰되었다.

      • 박태준 리더십에 대한 재고찰 : 일본 문화적 속성의 발현과 그 변용

        허남정 한양대학교 국제학대학원 2013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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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litical disputes between Korea and Japan have been cause for many ups and downs of its bilateral relationship with Japan. In 2012, when the commander-in-chief of the Republic of Korea made a visit to the Dokdo islets and publicly demanded the Emperor of Japan to apologize for its past wrongdoings, such action strained the bilateral relationship. Recently, as new administrations took office in Korea and Japan respectively, hopes have been high among the public that the tension would be eased. However, it seems somewhat unlikely for now. Thanks to Korea’s rapid economic growth and higher standing on the international stage, Koreans no longer think Japan is invincible. However, it is still true that Korea’s trade deficit with Japan remains large which clearly demonstrates that Japan remains economically powerful to the extent that its decisions would impact the Korean economy and security. For the sake of Korea’s economic growth and national security, Korea needs to seek quick ways to mend ties with Japan. Then, why is Park Tae-joon an inspiration for us in this context at this time? Park was a man who successfully secured Japan’s financial support and cooperation for POSCO, which flourished under his leadership in the 1970's and '80's. He was also one of the men who laid the foundation for Korea’s industrial success and opened a new era of the Korea-Japan cooperative relationship. Then, how could Park be offered support and cooperation and at the same time be respected by Japanese people? Park was very fluent in Japanese and had considerable knowledge and understanding of the Japanese culture. Armed with his language skills and cultural understanding, Park successfully formed long-standing friendships with Japanese leaders of many different fields. Park’s friends, all renowned leaders in Japanese society, later financially backed Park’s plan to build and run an integrated steelworks in Korea. Technological support was provided, too. Furthermore, Park introduced and integrated many virtues of Japanese society, one of the advanced countries of the world, into his company. He proactively encouraged his staff to use them to build mills, produce steel, and manage his organization. With his endless effort, Korea finally overcame its prolonged trade deficit with Japan in the steel industry. In the meantime, Park successfully built the world-class Gwangyang Steelworks by exploiting all the technologies his company accumulated based on the well-known dedication and wonderful craftsmanship of Koreans, which fulfilled his ultimate aim to overcome Japan. What's more, with the aim of improving the bilateral economic cooperation and building a more trustworthy relationship, Park, a forward-looking pioneer, also founded the Korea-Japan Economic Association as a means to create a system of cooperation between the two countries. This paper recompiles and reorganizes existing data, documents and verbal evidence made by interested parties with the aim of demonstrating that Park’s leadership was built on Japanese culture and that he used it well to successfully overcome Japan economically. In his childhood and early teens, Park spent 14 years in Japan, a colonial ruler of his mother country back then, which ultimately had a profound impact on his world view. Young Park’s delicate adolescence was influenced by Japanese culture, which manifested itself mainly in the Japanese family system, Yangming studies and Bushido. Through the Japanese familial system, Park learned that interpersonal relationships and long-term views mattered. Yangming studies of Japan taught him the importance of listening to and respecting field workers; unity of knowledge and action; and the spirit of a maestro. Park’s strong sense of mission and integrity came from Bushido, the Japanese equivalent to chivalry. His time in Japan taught Park bitter lessons. His sorrow and dispiriting experience of discrimination against people of a country und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convinced him to firmly believe that Korea should achieve economic growth and development first because that would be the only way to overcome Japan and establish a normal bilateral relationship on an equal footing with Japan. Hence, Park’s strong spirit of victory over Japan was born. Park’s firm beliefs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The first step to overcome Japan is to know and understand Japan well. The second step is to make the most of your knowledge and understanding to develop Korea’s economy. The last step is to overcome Japan. Ultimately, establish a true Korea-Japan relationship on an equal footing. These are key to Park Tae-joon’s leadership. Anti-Japanese sentiment prevails in Korean society to date. However, it is also true Koreans have become more confident and comfortable when it comes to Japan thanks to Korea’s remarkable economic growth and higher standing on the international stage. Some Koreans go one step further and hold an objective view on the bilateral relationship regardless of the past. Park’s leadership reminds us of his ultimate aims, overcoming Japan in the long term. Instead of sticking to the past and not yielding at all, Park believed that Korea should leave the past and its prejudice against Japan behind. He also believed that studying and understanding the Japanese cultural attributes would definitely help Korea achieve economic growth. I am confident that revisiting Park Tae-joon and his great leadership gives us a much-needed fresh look to examine and improve the bilateral relationship, which has seen many political ups and downs; to ease the recent tension between Korea and Japan in particular; and to help the two countries develop a more desirable bilateral relationship in the 21st century. With China’s recent rapid rise on the international stage, the Korea-Japan relation could easily lose momentum. It is my hope that this paper would give a chance to people to rethink the importance of the Korea-Japan relationship and to continue more objective studies on the bilateral cooperation which has been very active since the normalization of bilateral diplomatic ties. 한일관계는 양국의 정치적인 갈등으로 부침을 거듭해오고 있다. 일례로 2012년 대한민국 최고통수권자의 독도방문 및 일본천황에 대한 공개적인 사과요구 발언으로 양국관계는 크게 냉각되었으며 이러한 경색국면은 양국의 새 정부출범에 따른 양국국민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의 경제성장 및 국제적인 지위향상으로 인한 한국인의 대일인식 저하에도 불구, 거대한 대일 무역적자 규모가 보여주듯 일본은 여전히 한국경제와 안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경제대국이다. 한국의 안보와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도 일본과의 조속한 관계회복이 필요하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왜 박태준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가? 박태준은 1970~1980년대 일본의 협력을 이끌어내어 포스코를 성공시켰다. 또 한국의 산업화 기틀을 만들었으며 한일협력의 시대를 개척했던 인물이다. 과연 박태준은 어떻게 일본의 협력을 받으면서도 일본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었을까? 박태준은 고급 일본어 구사능력과 일본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무기로 일본의 다방면의 지도층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그들의 협력을 받아 일관제철소 건설과 운영에 필요한 자금 및 기술을 이끌어내었다. 뿐만 아니라 선진 일본사회의 좋은 점들을 제철소의 건설과 생산, 그리고 경영현장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 결과 철강분야에서는 한국의 오랜 현안인 대일 무역적자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장인정신으로 축적한 기술로 세계적인 수준의 광양제철소를 건설해 그가 지향했던 극일을 마침내 이루어냈다. 또한 한일경제협력의 저변을 확대하고 일본과의 신뢰기반을 구축하고자 한일경제협회를 설립하여 미래지향적인 협력시스템을 구축했다. 논문에서는 박태준 리더십의 바탕에 일본문화가 있었으며, 그가 이것을 극일로 승화시켰다는 점을 기존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재구성하고 논증하였다. 유년기와 다감한 청소년 시절의 14년을 식민지 종주국 일본에서 성장한 박태준의 정신세계에 바탕을 제공한 것은 일본문화였다. 그것은 이에(家)제도, 양명학(陽明學), 그리고 무사도(武士道)로서 ‘이에’ 제도는 감동으로 맺는 인간관계와 장기적인 시야를 제공했다. 그리고 일본 양명학에서는 현장주의, 지행합일, 그리고 장인정신을 얻었으며 박태준의 강력한 사명감과 청렴사상은 일본 무사도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식민지 백성의 서러움과 차별을 경험한 박태준 리더십은 경제발전을 통해 일본을 반드시 뛰어넘어야 일본과 명실상부한 협력관계의 구축이 가능하다는 강한 극일의 신념을 갖게 했다. 일본을 올바로 알고, 적극 활용하여 한국경제를 발전시키고, 종국에는 일본을 뛰어 넘어야 비로소 진정한 한일관계가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 박태준의 확고한 신념이며 그가 가진 리더십의 핵심이다. 오늘날 한국사회의 반일정서는 여전하다. 하지만 한국의 경제적인 발전과 국제적인 지위향상으로 일본을 대하는 한국인의 생각에도 자신감과 여유가 생겨났고, 한일관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분위기도 조성되고 있다. 장기적인 시야에서 극일의 길은 한국주장을 일방적으로 펼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대한 선입관에서 벗어나 상대방인 일본의 문화와 정서를 연구하고 이해하며, 이를 적극 활용해 경제발전을 이루자고 하는 실리적인 접근에 있다는 점을 박태준 리더십을 통해 다시 한 번 상기하고자 한다. 박태준에 대한 재조명은 정치적인 문제로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 한일관계, 특히 최근의 경색된 한일관계를 풀고 21세기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데 필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확신한다. 중국의 부상으로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한일관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재점검하고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활발했던 일본과의 협력관계에 대한 보다 면밀하고 객관적인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 環境問題における日本の対応 : 日本企業の環境経営の事例を中心に

        박진영 韓國外國語大學校 國際地域大學院 201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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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portance of effective use of energy and energy-saving is globally increasing. Environmental issues are globalized and energy-saving is always most prior in international meetings and workshops to discuss energy issues. Environmental issues became an international matter of concern, not to mention, environmental regulations have became more strict. As a result of international comparison with 1st consumption of energy per GDP, it was revealed that Japanese efficiency of energy is world best. I studied causes of the best energy efficiency through Japanese companies cases based on the research on what made level of Japanese energy-saving world best. The companies selected and the reasons for the selection are as follows. First, steel industry has most portion of emission of green house gas among manufacturing industries therefore Nippon Steel Corp. which is a key steel company has been selected and studied. Second, motor industry, one of industries which cause environmental problems most, has much portion of emission of green house gas by mass production, mass consumption, and mass disposal and whole production prosess therefore Toyota motor company which is a key motor company has been selected and studied. Third, Electricity industry has been selected because it consumes chemicals most for production processes among manufacturing industries. Sony which is a key electronics company has been studied. . Japanese economy had achieved peerless high growth of GDP in 1960s and 1970s and it was unprecedented high growth which was bigger than GDPs of Europe and USA and biggest in terms of industrial productivity, energy consumption, and number of cars. However, Japan didn’t conduct sufficient preventive actions against environmental problems during the active growth, development of heavy industries, and urbanization. After experiencing severe pollution problems, Japan has established environmental laws and conducted aggressive environmental policies but there have been lots of demands for more aggressive measurement of environmental regulations. Kyoto protocol took effect according to United Nations Framework Convention on Climate Changes and Japan started to make efforts in setting achievement plan for initiatives of Kyoto protocol in April, 2005 according to 1st promise time frame which bean in 2008. (-6% for Japan, -7% for USA, and -8% for Europe as prescribed as cut goals for advanced countries). According to the status of cutting emission of green house gas, there is big difference to the goal. Japanese companies conducted environmental management to respond to the crisis of strengthened environmental regulations and enforcement of Kyoto protocol. Environmental management is to review all sectors of production, products, services, and management by environmental viewpoint and try to reduce risks of companies. As results of the case studies on responses of Japanese companies which realized necessity of environmental management features of Japanese countermeasures are as follows. First, it is a top runner method which drives companies to independent competition for energy-savings. It is a method which drives the companies to achieve the goal which is norm on the basis of productivity of most energy effective company in target year. Second, they are independent action plans which Japanese companies decide in addition to the plans which Federation of Economic Organizations(hereafter “FEO”) assigns. FEO established a plan to reduce emission of CO2 to below level of 1990s in industrial sectors and energy switchover in 2010. However, each company set independent action plan and a goal and has reported action lists, which have been conducted, and assessment every year. Third, it is overachievement of the goal that is to achieve the goal earlier or more, which each company set. It seems to be a preemptive action while environmental regulations have been strengthened nowadays. It has been pointed out that Japanese environmental policies has lower environmental regulations compare to advanced countries such as Europe and USA as you saw in the precedent studies. It was criticized that the independent goals of Japanese industries are not strict compare to Europe and they didn’t have aggressive attitude to environmental regulations. However, it was confirmed that Japanese companies established the goal independently and has achieved the goal earlier and are conducting preemptive actions to environmental regulations in future as a result of this study. It was also confirmed that Japan is make efforts for more efficient energy-savings through voluntary competitions by companies. 현재 세계적으로 에너지 이용의 효율화, 에너지 절약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 환경문제가 국제화되고 전 세계적으로도 에너지 문제를 논의하는 국제 회의나 워크숍에서 반드시 에너지절약문제가 큰 화두가 되고 있다. 환경문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21세기에는 환경규제도 더욱 엄격해지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GDP단위당 1차 에너지 소비량을 국제비교 한 결과, 일본의 에너지 효율은 세계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본 연구는 일본의 에너지 절약 수준이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를 통해 그러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지를 일본 기업의 사례를 통해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선정한 세 개의 대표기업과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제조업 중에서는 철강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한다. 따라서, 일본의 대표적인 철강기업인 신일본제철을 선정해서 사례연구를 실시했다. 둘째,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로부터 제조공정의 전 과정에서 환경문제가 많이 발생하는 자동차산업도 배출가스문제가 많은 산업 중 하나다. 따라서, 일본의 대표적인 자동차기업인 토요타자동차를 사례 연구했다. 셋째, 제조업 중에서 제조공정가운데 화학물질의 사용이 가장 많은 전자제품분야를 선정했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자제품기업 가운데 소니를 사례 연구했다. 일본의 경제발전의 과정을 돌이켜보면 1960년부터 1970년 사이에 국민총생산이 평균적으로 10.8%라는 수치를 기록할 만큼 높은 경제성장을 달성해냈고, 그것은 당시의 유럽이나 미국의 국민총생산을 훨씬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높은 공업생산성, 에너지 소비량 등 사용중인 자동차 대수의 년 평균성장률도 다른 나라 보다 높은 수치를 나타내는 등 세계적으로도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고도성장을 계속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발한 성장과 중화학공업의 발달, 도시화 성장을 해 나가는 동안 환경문제에 대한 충분한 예방 조치는 실시하고 있지 않았다. 60년대에 극심한 공해문제를 경험한 후, 일본은 환경정책을 형성하고 환경법 제정 및 환경정책을 실시해 왔으나, 환경규제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많았다. 기후변화 협약에 따라 교토의정서를 발효하고 일본에서는 2005년 4월 교토의정서의 목표 달성 계획을 설정하는 등 2008년부터 시작되는 제1차 약속기간에 맞춰서 본격적인 노력에 착수했다. (선진국의 삭감목표를 보면 2008년~2012년까지 5년간 1990년에 비해 일본 -6%, 미국 -7%, EU -8%의 삭감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온실가스 배출량의 삭감 상황을 보면 교토의정서의 삭감 목표치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환경규제가 강화되고 교토의정서가 발효 된 후 일본 기업은 이러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환경경영을 실시했다. 환경경영이란 기업의 생산, 제품•서비스, 경영의 모든 분야에서 환경의 시점에서 다시 보고, 기업 리스크를 저감 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환경경영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있는 기업들이 어떻게 환경문제에 대응하고 있는지 사례연구를 통해 환경문제에 대한 일본식 대응방식의 특징을 살펴본 결과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요약 할 수 있다. 첫째는 기업간 자주적 경쟁을 유도해 효율적인 에너지절약을 달성하도록 하는 톱러너방식이다. 이는 산업가운데 가장 에너지효율이 높은 기업의 생산성을 기준으로 설정하고 목표년도까지 다른 기업들이 그 기준을 달성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둘째는 일본 경제단체연합(이하, 경단련)이 지정한 계획과는 별개로 일본 기업이 기업 스스로가 설정하는 자주행동계획이다. 경단련은 2010년도에 산업부문 및 에너지전환부문에서 CO2배출량을 1990년도 수준 이하로 억제하도록 노력한다는 내용의 계획을 내세웠다. 그러나 각 기업은 기업 자체적으로 자주행동계획을 따로 정해서 기업 스스로가 목표를 설정하고 실천 내용이나 평가 보고서를 매년 작성하고 있다. 셋째는 기업별로 설정된 각자의 목표를 목표시기보다 훨씬 일찍 달성하거나 목표치 보다 높은 수준으로 달성하는 목표의 초과달성이다. 이는 환경규제가 강화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미래에 있을 페널티에 대비해 한발 앞선 대응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앞서 선행연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환경정책은 유럽, 미국의 선진국에 비해 환경규제가 낮은 수준으로 설정되어있다는 지적들이 많았다. 또 일본 산업계의 자주목표는 유럽에 비해 그다지 엄격하게 설정되어있지 않았고, 일본 기업들도 환경규제에 대응하는 자세가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학자들의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연구 결과, 일본기업은 기업 스스로의 목표설정과 목표치의 조기달성을 해 왔고 미래의 환경규제에 사전대응을 하고 있다는 결과를 확인했다. 또, 일본은 기업간의 자발적인 경쟁을 통해서 더욱 효율적인 에너지절약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 航空客室乘務員の日本語の使用について : 韓國語母語話者の乘務員を中心として

        박영미 인하대학교 대학원 일반대학원 2008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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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상의 서비스를 위해서는 고객과의 의사소통이 얼마나 원활하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내'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는 일본어와 한국인 승무원을 위한 교육 자료에서 사용되고 있는 일본어의 특징과 문제점에 대해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본 논문에서는 기내에서 한국인 승무원이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에 대해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우선, 객실 승무원이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를 사용자인 승무원측에서 발생되는 문제, 이는 결국 승무원이 사용하고 있는 일본어에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가에 관한 것으로 기내방송을 실시할 때 발생되는 발음상의 문제에 대해 ‘기내 방송문’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았다. 일반적으로 일본어와 한국어는 문법적인 측면에서 비슷한 점이 많은 반면, 음운체계를 보면 전혀 다른 체계로 운용되고 있다. 両国語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채 일본어를 사용할 경우 발음상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청・탁음의 구별에 대한 오류로부터 특수한 음 - 장음(長音), 「ン」음(撥音), 「っ」음(促音) - 과 「모음의 무성화」, 「ツ」와「ジ」자음의 발음 등 일본어 특유의 발음현상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부정확한 발음으로 방송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객실 승무원이 이와 같은 오류를 범하는 것은 한국어와 일본어의 음운체계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도 있지만, 발음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학습 초기 단계부터 일본어 발음에 대한 기초지식과 문법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시행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객실 승무원이 배우고 있는 일본어에 관한 것으로서, 이는 다시 ‘표현상의 특징과 적절성’과 ‘표기상의 문제’로 나누어서 승무원을 위한 ‘일본어 교재’를 중심으로 고찰해 보았다. 우선, 짧은 교육 기간 내에 많은 양의 일본어를 가르쳐야 하기 때문에 기초적인 지식보다는 교재위주로 암기식 교육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또한 일본어 경어에 있어서 형식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사용되어진 표현이 상대방이나 장면, 장소에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는가에도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일본어 교재의 표기상의 문제로는, 승무원이 읽기 쉽게 하기 위해서 ‘Katakana'와 한자를 모두 ‘Hiragana'로 바꾸어 표기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일본어를 더 읽기 어렵게 만든 결과가 되어 버렸고, 뜻도 파악하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일본어에서는 볼 수 없는 ‘띄어쓰기’ 도 원래의 취지는 승무원이 인터네이션을 고려해서 읽기 쉽게 하기 위해 하였으나 원래의 취지와는 다르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어 교육에 있어서 처음부터 ‘읽기・쓰기’라는 문자언어 교육과 ‘듣기・말하기’라는 음성언어 교육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또한 커뮤니케이션을 성립시키기 위해서는 승무원의 완벽한 발음을 요구하기보다는 일본어의 음운체계 및 문법에 관한 지식에 대한 최소한의 체계적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韓日両言語における謝罪表現と感謝表現の対照研究 : 大学生の意識を中心に

        모리야미사꼬 경상대학교 대학원 2007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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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 &#30740;究에서는 文化나 &#20385;値&#35251;과 깊은 &#38306;係가 있는 謝罪와 感謝의 &#30330;話行&#28858;에 초점을 맞춰서 韓&#22269;語 母語話者의 그것과 日本語 母語話者의 그것에 대해 共通點과 相違點을 밝히고, 韓&#22269;人 日本語&#23398;習者 혹은 日本人 韓&#22269;語&#23398;習者가 母語話者와 보다 円滑한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데 기여함과 동시에 그 &#30330;話行&#28858;의 배경에 있는 日本人과 韓&#22269;人의 &#20385;値&#35251;이나 文化 差異를 밝히는 실마리를 얻으려고 한다. 謝罪와 感謝는 言語나 커뮤니케이션을 둘러싼 여러 분야에서 &#30740;究&#23550;象으로 삼고 있는데 本 &#30740;究에서는 먼저 제2장에서 韓日 &#20001;言語의 謝罪와 感謝의 定型表現에 초점을 맞춰서 이 &#30330;話行&#28858;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어떤 관련성이 있는지를 &#30330;話行&#28858;理論의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제3장에서는 韓日 &#20001;言語에 있어서 각각 어떤 장면에서 무엇에 대해서 謝罪나 感謝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라디오 및 TV드라마의 각본을 토대로 고찰하여 그 &#23550;象과 定型表現과의 관련성에 대해서 논술하였다. 제4장에서는 &#30330;話行&#28858;理論만으로는 밝힐 수 없는 , 특히 日本語의 感謝場面에 있어서의 謝罪表現을 중심으로 談話行動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또한 제5장, 제6장에서는 定型表現뿐만 아니라 謝罪와 感謝를 성립하게 하는 方策(strategy) 전체를 밝히기 위해, 社&#20250;言語&#23398;的인 접근 방법으로 韓&#22269;人과 日本人을 對象으로 談話完成試驗을 실시하여 실제적으로 회화 속에서 &#20001;言語가 어떤 방책(strategy)을 사용해서 謝罪와 感謝를 수행하는가에 대해서 고찰하였다. 그리고 제7장에서는 韓&#22269;語에서 많이 사용되는 慰勞 表現과 感謝 表現과의 關係를 고찰하여 日本語와 韓&#22269;語의 사용법의 차이점을 밝혔다. 먼저 韓&#22269;語와 日本語의 謝罪 및 感謝의 定型表現을 &#30330;話&#20869;行&#28858;로서의 特&#24500;을 適切性&#26465;件, &#30330;語媒介意&#22259;의 관점에서 고찰한 결과, 첫째 韓&#22269;語, 日本語 모두 大多&#25968;의 慣用的인 謝罪表現나 感謝表現이 &#30330;話行&#28858;理論을 토로한 適切性&#26465;件 및 &#30330;語媒介意&#22259;와 &#38306;連되어있는 점이 밝혀졌다. 또한 謝罪 및 感謝表現이 提起하는 問題는 鄭重(politeness)行動 등을 포함한 談話行動의 관점에서 分析할 必要性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로 謝罪와 感謝의 &#23550;象과 表現에 대해서 고찰했는데 그 결과, 謝罪에 있어서는 韓&#22269;語는 전반적으로 구체적인 말하는 이의 잘못을 謝罪하는 장면이 많았는데 비해 日本語는 交際 인사나 儀&#31036;, 또한 注意喚起의 목적으로 謝罪表現이 사용되는 場面이 많았다. 拒絶과 더불어 사용되는 謝罪 表現는 韓&#22269;語도 日本語도 많지 않다. 그러나 依&#38972;나 인사로서 謝罪表現을 多用하는 日本人이 拒絶과 더불어 사용하는 謝罪 表現의 使用頻度가 적다고 하는 것은 拒絶을 할 때 謝罪表現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拒絶하는 場面자체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日本人이 ソト(외부) 사람에 대해서 극도로 緊張하고, &#23550;人恐怖的인 性格을 가지고 있는 것은 臨床心理&#23398; &#30740;究에서도 밝혀져 있지만 ウチ(내부)와 ソト(외부)를 &#21427;密하게 &#21306;別하는 言語&#20307;系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그 때까지 일본인에서만 보이는 典型的인 文化症候群으로 생각되어 왔던 &#23550;人恐怖症이 韓&#22269;人에게도 보인다는 事&#23455;이 밝혀지고 그 원인과 증상이 儒&#25945;文化를 背景으로 한 것이라는 연구결과가 있다. 그러나 &#23550;人恐怖症이 日本人에게는 많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뒷받침하는 확실한 統計的인 데이터가 부족해서 比較文化論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과학적으로 論하는데 있어서 큰 弱点이 되고 있으며 또한 韓國 쪽도 現時點에서는 &#30330;生頻度에 관한 正確한 結果가 없어서 &#29420;&#26029;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러한 自己構造, 言語 特性에서 보면 역시 韓&#22269;人보다도 日本人 쪽이 &#23550;人恐怖的性向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말하는 이의 적절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謝罪 중에서 韓&#22269;語에서는 ‘義務 不履行’에 대한 謝罪가 많았고 그 외는 각각 均等하게 分布되어 있는 반면 日本語에서는 ‘無禮 및 禮節에 벗어남’에 대한 謝罪가 상당히 많았고 친한 사이에서도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日本人의 &#20385;値&#35251;과 ‘出る釘は打たれる(튀어나온 못이 얻어맞는다)’ 라고 하는 &#20385;値&#35251;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세 번째로 談話行動에 있어서 日本語에서 자주 보이는 快適&#29366;況에 있어서의 謝罪 表現의 使用(表現交替現象), 즉 感謝 表現과 謝罪 表現의 &#20341;用現象에 대해서 고찰한 결과 먼저 日本人이 謝罪 表現를 多用하는 感謝 場面에서 韓&#22269;人은 대부분 感謝 表現을 사용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日本語에 있어서는 상대가 指導&#25945;授와 같은 ‘半知り(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 친하지 않은)’ &#38306;係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경향이 강하다. 이는 말하는 이의 有益&#29366;況을 듣는 이의 不快&#29366;況으로 받아들이는 시점의 이동으로 생기는 現象으로, 日本語에 있어서는 고도로 習慣化된 鄭重(politeness)의 方策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韓&#22269;語에 있어서는 ウチ&#12539;ソト(외부와 내부)&#38306;係와 상관없이 感謝 場面에서는 感謝 表現、謝罪 場面에서는 謝罪 表現을 使用하고 있고、韓&#22269;語의 謝罪와 感謝의 표현 방법은 같은 동양권에 속하면서도 日本語보다 오히려 英語의 表現方法과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편 韓&#22269;語는 日本語와 같이 受動 表現이나 使役 表現이 많지 않은데, 이는 일반적으로 韓&#22269;語의 강함이나 外向性, 積極性, 日本語의 약함과 &#20869;向性, 消極性과 관계가 있다고 보여지며 이러한 感謝나 謝罪方法 역시 韓&#22269;語를 外向的, 積極的이라고 느끼게 하고 日本語를 &#20869;向的, 消極的이라고 느끼게 하는 要因일 것이다. 또한 武의 文化 特&#24500;의 하나로 ‘畏まる(황공해하다)’ 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畏まる」라고 하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는 단정하게 앉는 것을 意味하지만 넓은 意味에서는 송구스럽고 조심스러운 태도 자세가 되는 것을 말한다. 東洋에서도, 西洋에서도 封建時代를 &#32076;&#39443;한 文化는 다소 이러한 경향이 있지만 日本의 경우에는 매우 극단적이다. 이 ’畏まる(황공해하는)‘ 態度가 日本人의 ’すみません‘ 의 使用頻度를 높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韓&#22269;語는 感謝나 謝罪의 定型表現 使用頻度가 日本語와 비교해서 상당히 낮다. 특히 父子, 母子 關係와 같은 친한 사이에서는 그 경향이 현저하다. 그러나 이것은 感謝나 謝罪의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라 다른 방책(strategy)을 사용하든지 혹은 마음은 있어도 특별히 표시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일본인 보다 感謝나 謝罪의 마음을 가지기 쉬운 性向이 있는 것도 밝혀졌다. 또한 같은 快適&#29366;況 속에서 ‘すみません’과 ‘ありがとう’를 &#20341;用하는 現象도 日本語에서는 자주 보이는데, 이것은 각각의 表現이 談話 構成에 있어서 다른 機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感謝의 주고받음은 듣는 이가 형성하는 快適&#29366;況의 生起 및 그것이 가져오는 人間&#38306;係의 不均衡과 그 不均衡의 修復作業으로 나눌 수 있는데, ‘すみません’과 ‘ありがとう’ 과의 &#20341;用現象에 있어서의 ‘すみません’의 기능은 이러한 人間&#38306;係의 不均衡의 修復이고, ‘ありがとう’의 기능은 感謝의 주고받음을 終結을 표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韓&#22269;語는 &#20341;用現象 自&#20307;가 지극히 드물고 同一한 &#20250;話에서는 ‘감사합니다 / 고맙습니다’와 ‘미안합니다 / 죄송합니다’가 동시에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韓國語의 感謝 表現과 謝罪 表現에는 日本語가 가지고 있는 談話機能은 없는 것으로 판단이 된다. 네 번째로 謝罪나 感謝의 마음을 表現하고 그것을 성립시키는 定型表現 외의 表現方法, 즉 謝罪와 感謝의 방책(strategy)을 고찰한 결과, 謝罪에 있어서는 韓日 兩言語 모두 直接謝罪表現에 依存하는 비중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謝罪 義務가 작을 경우, 日本語에서는 直接謝罪表現, 責任에 대한 言及, 代償提案이 주가 되고 그 외의 방책(strategy) 出現率은 상당히 낮은 것에 비해서 韓&#22269;語에서는 原因&#35500;明과 配慮, 反復하지 않는 約束의 出現率이 日本語에 비해서 높고, 謝罪를 할 때 다양한 方策 패턴을 폭 넓게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直接謝罪表現을 보면 韓&#22269;語에서는 장면에 상관없이 ‘죄송하다’는 윗사람에게, ‘미안하다’는 同等 혹은 아래 사람에게 사용된다. 日本語에서는 윗사람에 대해서 ‘すみません'을 많이 쓰긴 하지만 'ごめん', 'すまない', '申し&#35379;ない' 등 모든 말에 待遇레벨에 의한 表現의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말 선택은 개인적으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전체적으로 다른 방책(strategy)의 出現率은 장면마다 그 高低의 움직임은 &#20001;言語가 비슷하지만 反復하지 않을 約束에서만은 큰 차이가 나타났다. 韓&#22269;語에서는 반복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는 것은 ウチ(내부) 사람에게 쓰이는 속마음을 토로하는 방책(strategy)이라고 여겨진다. 또한 配慮의 出現率도 日本語에 비해 韓&#22269;語에서는 상당히 높고 配慮도 韓&#22269;語에 있어서는 아주 중요한 謝罪 方策(strategy)이라고 할 수 있다. 感謝를 성립하기 위해서는 謝罪에서와 같이 日本語는 定型表現을 사용 하는 比率이 높고 다른 방책(strategy)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使用頻度가 높다. 장면에 따라 有&#21177;回答&#25968; 이상으로 사용 된 경우도 있어 韓&#22269;語와는 큰 차이가 있다. 그리고 謝罪에서와 같이 感謝에서도 韓國語가 다양한 방책(strategy)을 사용해서 謝罪를 성립하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韓&#22269;語의 경우는 윗사람이나 친한 친구와 같이 매우 가까운 ‘ウチ(내부)’&#38306;係에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定型表現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 대신 事&#23455;이나 利益에 대한 言及, 사례 提案 등이 증가하고, 아래 사람에게도 역시 定型表現이 감소하지만 그 때는 칭찬이 많이 사용되었다. 또한 韓&#22269;語는 感謝 場面에서 慰勞 表現이 많이 사용되는데 이것은 상대가 윗사람이든 아래 사람이든 상관이 없다. 韓&#22269;語의 慰勞 表現은 日本語에 비해서 모든 장면에서 부자연스러움의 평점이 낫다. 다시 말하자면 말하는 이의 受益이든 共同受益이든 듣는 이의 受益이든 모든 상황에서 慰勞 表現을 사용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日本語에서는 말하는 이의 受益일 경우 듣는 이가 부담을 갖고 말하는 이가 利益을 받은 사실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으로 여겨져 실례가 되어 이 경우는 ‘ごくろうさま’가 부자연스럽게 된다. 韓國語에서도 ‘수고’는 ‘受苦’라는 漢字를 쓰기 때문에 윗사람에게는 ‘수고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할 수 없게 되어 있으며, 본래 韓國語에서도 受益關係와 상관없이 慰勞表現은 윗사람에게는 사용해서는 안 될 말이었는데, 漢字 使用이 적어지고 특히 젊은 층에서는 본래의 意味나 使用法과 떨어져, 독립된 인사말 즉 윗사람에게도 感謝나 慰勞를 代辯하는 말로서 定着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日本人에 비해서 韓&#22269;人이 言語 依存率이 높다고 하지만 그 반면에 定型表現의 使用은 日本語보다 적고, 그 외의 表現방책(strategy)을 많이 사용한다. 특히 父子, 母子 關係와 같은 매우 가까운 관계에서는 그 경향이 두드러지다. 感謝에 있어서는 日本語는 여러 對象에 대해서 感謝의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韓國語는 전체 44%가 듣는 이의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感謝이었다. 그것은 韓國人보다 日本人 쪽이 感謝의 말을 쉽고 빈번하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韓國人은 ‘ウチ’ 사람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영향을 주는 言語行動에는 소극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을 묻는 調査에 의하면 日本人이 인사정도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장면에서도 韓國人은 感謝나 謝罪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고, 謝罪에서는 配慮, 感謝에서는 구체적인 사례 제안이라는 방책(strategy)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에서 볼 때 韓國人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은 日本人보다 情意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日本語에서는 指導敎授와 같은 ‘ソト’ 사람에 대해서는 感謝 장면에서 謝罪表現이 多用되는 사실과 관련하여 미야케(三宅)는 일본인의 過&#21104;配慮 경향에 의한 것이라고 논하고 있는데, 韓國語에서는 이러한 使用法은 두드러지지 않다. 李泰圭는 韓國人은 ‘미안하다’라고 하는 말을 상대방의 친절에 대해서 感謝를 표현할 때도 사용한다고 지적하고 있지만 調査 結果로 보면 韓國人의 謝罪나 感謝의 定型表現 使用法은 오히려 西洋사람과 가깝다고 할 수 있고 日本人과 같은 過&#21104;配慮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만약 李泰圭가 논술한 바와 같이 ‘すみません’가 응석(甘え)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日本人 쪽이 韓&#22269;人보다 훨씬 응석(甘え)가 강하다고 봐야 하지만 결코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또한 李泰圭는 Edward&#12539;T&#12539;Hall이 ‘警戒距離’, ‘逃走距離’, ‘臨界距離’로 분류한 親密同心円圈을 親密濃度 즉 情意 次元으로 ‘안면이 있는圈(顔見知り)’, ‘義理圈’, ‘人情圈’ 이라고 하는 말로 재구축했다. 이 3개의 人間層을 ‘&#20869;集&#22243;’, 그 외를 ‘外集&#22243;’이라고 부르고 西洋人은 &#20869;集&#22243;과 外集&#22243;과의 境界가 点線이고 韓&#22269;人은 서로 浸透가 不可能한 線이 되어 있다고 논의하고 있다. 日本人의 境界도 역시 線이라는 것은 확실하지만 韓&#22269;人의 線이 日本人의 線보다 굵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謝罪나 感謝를 보면 日本人의 義理圈과 人情圈에서의 커뮤니케이션 방법의 차이보다는 韓&#22269;人에서의 차이가 더 크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古代에 거슬러 올라가면 日本과 韓國 文化는 상당히 닮았고 민족적인 성격에도 비슷한 점이 많았을 것이다. 金容雲은 民族이 처음으로 형성 되었을 때에 갖추어진 민족의 기본적인 성격을 ‘原型’이라고 부르고, 이 출발점에서 생긴 작은 文化的 要因의 차이가 시간이 많이 흐름에 따라 큰 차이가 되었다고 논의하고 있는데 韓國人과 日本人의 謝罪나 感謝行動의 方策 차이도 역시 日本人이 가지고 있는 賢&#12539;恐&#12539;畏를 일체화한 ‘가시꼬형(かしこ型)’ 文化原型과 韓國人이 가지고 있는 ‘가찌끼형(かちき型)’ = ‘自尊型’ 文化原型에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言語間의 謝罪&#12539;感謝行動의 차이를 아는 것은 異文化 커뮤니케이션을 &#30740;究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실생활이나 言語敎育 현장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異文化間의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생기는 오해는 言語나 非言語行動, 習慣 차이 등 여러 레벨에서 생길 수 있는데, &#21336;語나 文法의 잘못 등 言語能力不足으로 인해 생기는 오해보다도 語用레벨, 즉 言語常用에 있어서 생기는 오해가 심각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유창하게 상대방의 言語를 구사할 수 있는 경우에는 語用에 있어서의 잘못은 &#24403;事者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인간성의 문제까지 발전될 수도 있다. 日本語와 韓&#22269;語는 統語的으로 많은 類似性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서로 배우기 쉬운 言語이기도 하고 실력향상이 매우 빠르다. 그러나 이러한 잘못으로 인한 오해도 많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謝罪나 感謝에서는 韓&#22269;語와 日本語는 ‘ウチ’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스트라테지 사용에 큰 차이가 있다. &#22269;際結婚이 &#22679;加하고 있는 요즘, 謝罪&#12539;感謝라고 하는 社交적으로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言語行動에 있어서 부주의한 잘못을 범할 경우에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어, 言語敎育 현장에서 그 차이를 확실히 인식시켜줄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日本人에게는 定型表現에 依存하지 않은 韓&#22269;語의 謝罪나 感謝 方法을, 그리고 韓&#22269;人에게는 ウチ&#38306;係에 있는 사람이라도 日本人은 定型表現의 依存率이 높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 硏究는 談話完成테스트를 사용한 調査를 토대로 진행했는데 그 限界로서 각각 場面이 연구자가 자의적으로 設定한 것이므로 우발적인 상황에서 관찰된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 상황에 있어서의 發話나 發話 出現率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고, 테스트 대상이 일본인 대학생과 한국인 대학생 모집단을 대표하지 못한다고 하는 점을 지적하겠다.

      • 韓日 兩言語의 <一字漢語> 硏究

        전철 경상대학교 2004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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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韓日 兩言語에서 漢語에 대한 硏究는 지금까지 많은 硏究가 이루어져 왔지만 그 大部分은, 漢語의 受容, 漢語의 起源的 系譜, 漢語의 形態, 漢語의 意味 등에 관한 硏究에 치중되어 있었다. 特히 漢語의 形態에 관한 硏究에서는 단연 二字漢語가 그 中心이 되어왔으며 相對的으로 「一字漢語」에 대한 硏究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러한 現象은 「二字漢語」에 비하여 「一字漢語」의 重要度가 떨어지기 때문인가 하면 實際로는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二字漢語」의 硏究의 한 部分으로 「一字漢語」를 取扱한 結果, 「一字漢語」만을 다룬 先行 硏究는 단 한 편도 찾아볼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一字漢語」語彙의 데이터베이스조차도 構築되어 있지 않았을 만큼 「一字漢語」에 대한 硏究가 적었다. 本 硏究는 이러한 점에 問題 意識을 가지고 「一字漢語」에도 그 나름의 論理와 法則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一字漢語」가 形態上으로 意味上으로 과연 어떠한 樣相을 보이고 있는지 「一字漢語」의 全般的인 모습을 보다 深層的으로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各 章에서 論議된 內容을 整理하면 다음과 같다. 1. 「一字漢語」의 語構成에서는 韓日 兩言語에서 「一字漢語」單獨 語彙의 경우 日本語에서 994語(20.00%)가 調査되어 가장 比率이 높은 語彙 數를 나타내었고 이에 비해 韓國語에서는 639語(16.51%)로 두 번째로 많은 比率을 차지하였다. 이는 韓國語보다는 日本語의 「一字漢語」單獨 語彙가 意味 機能을 가지는 單獨 語彙로서 使用度가 더 높다는 事實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名詞와의 結合에 있어서는 韓國語에서 1,377語, 日本語에서 1,345語로 調査되어 兩言語에서 「一字漢語」는 名詞 語彙와 結合하여 매우 生産的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動詞와의 結合에서는 全體的으로 日本語에서 387語(7.79%), 韓國語에서 424語(10.95%)가 調査되었는데 日本語의 경우 「する」動詞가 붙은 語彙가 大部分이었으며 韓國語의 경우 '하다' 가 連結된 語構成도 상당수 調査되었으나 '하다' 以外의 動詞도 많은 수가 連結되어 活潑한 生産性을 보였다. 韓日 兩言語에서는 이처럼 「一字漢語」와 結合할 수 있는 動詞로 代表될 수 있는 것은 역시 「する」와 '하다'이다. 이는 兩言語에서 「する」와 '하다'가 單語 形成에 있어서 매우 넓은 分布 領域과 多樣한 機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結局 「する」와 '하다'가 固有의 語彙的 意味를 具體的으로 가지고 있지 못한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する」와 '하다'의 이러한 特徵으로 인해 漢語 複合語의 形成에 있어서 先行 語基와 매우 자유롭게 結合하며, 「一字漢語」와도 結合하여 用言을 이룸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特徵的인 統辭 機能의 差異点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日本語의 「一字漢語」+「する」는 모두가 動詞로서의 文法的 機能을 하지만, 韓國語의 「一字漢語+'하다'」의 경우는 形容詞의 機能을 하는 語彙가 상당수 있는데 그 숫자 역시 97語나 됨을 알 수 있었다. 形容詞와의 結合에서는 日本語에서 35語(0.70%), 韓國語에서 15語(0.39%)를 보여 兩 言語 모두 「一字漢語」가 形容詞와는 結合의 정도가 약하다는 事實을 알 수 있었다. 이는 形容詞 語彙의 경우 固有語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漢語가 形容詞로서 使用되기는 힘들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轉成名詞와의 結合에서도 日本語에서 985語(19.82%), 韓國語가 68語(1.76%)가 調査되어 日本語의 「一字漢語」가 轉成名詞와의 結合에 있어서 韓國語 보다는 容易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外來語와의 結合에서는 日本語가 532語(10.71%), 韓國語가 88語(2.27%)로 나타나 日本語 쪽이 훨씬 外來語와의 結合 즉 生産性이 높았으며 語構成에 있어서는 韓日 兩言語 모두 「一字漢語」가 後項에 位置하는 것이 生産的이었다. 韓日 兩言語의 「一字漢語」의 結合 語例 數를 살핌으로서 生産性 즉 造語力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日本語의 경우 「氣(き,け)」에 의한 「一字漢語」複合語가 135語로 나타나 가장 生産的으로 語彙部에 參與하는 「一字漢語」로 나타났으며, 다음이 112語가 調査된 「地(チ,ジ)」,72語인 「茶(ちゃ),繪(エ,カイ)」가 65語, 「本(ホン)」이 50語,49語인 「金(キン), 役(ヤク,エキ)」가 45語,「偏(ヘン)」이 43語, 「半(ハン)」이 40語, 「素(ス,ソ)」가 38語,「台(ダイ)」가 36語, 「棒(ボウ)」가 34語, 「座(ザ)」가 33語, 「番(バン)」이 32語, 「病(ビョウ)」가 25語의 順으로 나타났다. 그에 비해 韓國語에서는 生에 의한 「一字漢語」複合語가 58語로 나타나 가장 生産的으로 語彙部에 參與하는 「一字漢語」로 나타났으며, 다음으로 53語가 調査된 '山'이 그 뒤를 이었으며, 다음이 45語의 '半', 44語의 '標', 38語의 '房', 34語의 '初','門', 32語의 '中', '數', 28語의 '本', 27語의 '醬', '長', 24語의 '金', 23語의 '色', '桶', '雙', '病', '便', 21語의 '間', '窓', 20語의 '氣', '別', '銃'順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結果를 좀 더 具體的으로 살펴보면 日本語에서는 135語라는 結合 語例 數를 가져 가장 活潑한 生産性을 보인 「氣(き,け)」나 112語의 「地(チ,ジ)」,72語의 「茶(ちゃ)」,65語의 「繪(エ,カイ)」의 경우처럼 上位 몇 字에 그 生産性이 상당히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日本語에서 가장 活潑한 生産性을 보인 「氣」가 韓國語에서는 結合 語例 數가 20語 밖에 되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反對로 韓國語에서 가장 많은 結合 語例 數를 보인 '生'의 경우, 日本語에서는 전혀 生産性을 가지지 못해 1語 밖에 調査되지 않았다. 그 외에 韓國語에서 20語 以上의 結合 語例 數를 가진 '山, 標, 房, 藥, 醬, 場, 色, 桶, 雙, 窓' 등의 「一字漢語」를 日本語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러한 韓日 兩言語에서 「一字漢語」의 生産性을 놓고 볼 때 共通的인 要素보다는 各各 獨自的으로 「一字漢語」를 利用해 語彙를 生産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漢語가 다른 말과 結合할 수 있는 生産力이 높다는 것은 否定할 수 없으나 全部 「一字漢語」全部가 生産力이 높다는 結論은 얻을 수 없었다. 2. 「一字漢語」動詞에서는 「一字漢語+する」와' 一字漢語+하다'는 先行要素가 同一하고 形態上으로 같은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統辭的으로 같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먼저 同一漢語 +「する」, '하다'를 兩言語에서의 統辭的 性格 즉, 自動詞인지 他動詞인지 아니면, 自·他 兩用動詞인지를 調査·分類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漢語+する」의 意味機能에 대한 硏究 結果를 바탕으로 「一字漢語+する」가 어떠한 韓國語와 對應하는지도 살펴보았다. 먼저 統辭的 機能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同一한 先行要素를 가지고 同一한 統辭的 機能을 하고 있는 語彙가 35語(66%)나 됨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統辭的으로 一致를 보이지 않는 語彙가 18語(34%)로 調査되었는데 韓日 兩言語의 共通點과 差異點을 同時에 보여주는 例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長ずる(自) - 長하다(形), 毒する(自·他) - 毒하다(形), 便じる(自·他) - 便하다(形)」의 경우, 日本語에서는 動詞로 쓰이나 韓國語에서는 形容詞로 쓰인다. 이는 兩言語에서 이들 漢語를 받아들이는 差異에서 비롯된 結果라 사료된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一字漢語+する」의 意味 對應에 있어서는 旣存의 「二字漢語」를 中心으로 행한 硏究 結果가 「一字漢語」의 경우는 거의 否定됨을 알 수가 있었다. 이는 旣存의 「漢語+する」와 '漢語+하다'의 意味機能 硏究에서 漢語가 가진 特性을 無視한 채 모습이 닮아 있다는 理由로 인해 形態上의 類似性에 執着하여 先行要素인 漢語와 後項要素인 「する」와 '하다'를 나누어 그 一致性과 非一致性을 考察하려고 하여 發生한 誤謬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旣存의 硏究 結果가 「一字漢語+する」와 '一字漢語+하다'와 많은 差異를 보이는 理由로서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먼저 「二字漢語」와 「一字漢語」가 自立性과 安定性이라는 面에서 다른 性格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나아가 非自立的고 安定的이지 못한 「一字漢語」가 兩言語에서 「二字漢語」 내지는 固有語로 대치된 語彙 아니면, 代置가 進行 중인 語彙가 存在하기때문에 發生되는 問題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漢語+する」와 '漢語+하다'의 意味 對應에 差異가 發生하는 것은 動作主(主語)의 性格이나 目的語의 有無를 떠나서 文脈이나 狀況에 따라 漢語의 性格, 즉 對象 漢語가 系列的 혹은 階層的으로 어떠한 類似 意味를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 決定되는 것이다. 3. 「一字漢語」의 品詞性에서는 「一字漢語」 品詞性의 類型으로는 日本의 경우, 하나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① [+N]類 ② [+V]類 ③[+A]類 ④ [+Ad]類의 4개, 두 개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⑤ [+N +V]類 ⑥ [+N +A]類 ⑦ [+N +Ad]類 ⑧ [+V +A]類 ⑨ [+A +Ad]類의 5개, 세 개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⑩ [+N +A +V]類 ⑪ [+N +A +Ad]類의 2개로 모두 11개의 類型이 調査되었는데 비해 韓國語의 경우 하나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① [+N]類 ② [+V]類 ③[+A]類 ④ [+Ad]類가 4개, 두 개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⑤ [+N +V]類 ⑥ [+N +A]類 ⑦ [+N +Ad]類 ⑧ [+V +A]類 ⑨ [+V +Ad]類 ⑩ [+A +Ad]類의 6개, 세 개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⑪ [+N +A +V]類 ⑫ [+N +A +Ad]類 ⑬ [+N +V +Ad]類 ⑭ [+V +A +Ad]類가 4개, 네 개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가 ⑮[+N+V+A+Ad]類의 1개의 類型을 보여 모두 15개의 類型으로 나누어진 반면 二字漢語는 日本語의 경우가 14개의 類型을 보였으며, 韓國語는 12개의 品詞 領域 類型을 보였다. 이러한 事實은 「一字漢語」品詞 領域은 韓國語 쪽이 훨씬 폭 넓게 나타나며, 二字漢語에서는 日本語 쪽이 넓게 나타나 「一字漢語」와 二字漢語가 다른 樣相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語彙의 數에 있어서도 「一字漢語」에서는 日本語의 경우 [+N]類가 639語, [+V]類가 178語, [+N +V]類가 166語의 順으로 나타났으며 韓國語의 경우는 [+N]類가 404語, [+N +V]類가 135語, [+V]類가 76語의 順으로 나타났다. 한편 二字漢語의 경우에는 日本語는 [+N]類, [+N +V]類, [+N +A]類 順으로 語彙數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韓國語에서는 [+N]類, [+N +V]類, [+A]類의 順으로 나타나 韓日 兩言語의 「一字漢語」속에서도 差異를 보이지만 二字漢語와의 對照比較를 통해 살펴보았을 때 각기 다른 特性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一字漢語」의 경우 [+N]類, [+V]類에서는 日本語가 優勢하게 나타났으며, [+A]類 [+Ad]類에서는 韓國語가 優勢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두 개 以上의 品詞性을 가진 경우는 [+N +V]類에서만 日本語가 優勢하게 나타났으며 나머지 [+N +A]類, [+N +Ad]類, [+V +A]類, [+V +Ad]類, [+A +Ad]類에서는 韓國語가 優勢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세 개 및 네 개 以上의 品詞性 가지는 경우는 全體的으로 韓國語 쪽이 語彙面에서 優勢하게 나타났으며 特히 名詞, 動詞, 副詞의 品詞性을 가진 [+N +V +Ad]類와 動詞, 形容詞, 副詞의 品詞性을 가진 [+V +A +Ad]類에서는 이에 該當하는 日本語 「一字漢語」는 存在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는 特徵을 보였다. 이는 形容詞性을 가진 [+A]類를 除外하고는 모든 類型에서 日本語 쪽이 優勢하게 나온 二字漢語의 경우와 對照에서도 特徵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韓國語가 「一字漢語」는 勿論이고 二字漢語에서 形容詞性을 가진 語彙가 日本語 보다 相對的으로 越等히 豊富함을 알 수 있다. 두 개 以上의 品詞性을 가지는 「一字漢語」로서는 名詞性과 動詞性을 同時에 가지는 [+N +V]類가 日本語에서는 166語가, 韓國語에서 135語가 調査되었다. 이는 動詞性의 「一字漢語」는 獨立性이 强하여 名詞로서 自立할 수 있기 때문인데 名詞性과 形容詞性을 同時에 가지는 [+N +A]類의 경우는 日本語와 韓國語가 各各 22語로 語彙數가 急激히 줄어듦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形容詞性을 가진 「一字漢語」는 動詞性의 一字漢語보다 獨立性이 强하지 못하여 名詞性을 가지는데 制約을 받은 結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二字漢語에서도 마찬가지의 結果를 보이고 있어 같은 樣相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 4. 「一字漢語」副詞에서는 「一字漢語」單獨으로 副詞의 機能을 가지는 例들로서 韓國語의 경우 「但, 永, 卽, 惑, 及」의 5語가 日本語의 경우는 「極, 約」의 2語가 調査되었다. 지금까지의 硏究들에서 보여 왔던 兩言語 語彙의 一致性 내지는 共通性을 「一字漢語」 副詞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이들 漢語는 漢文 文章에서 副詞로서 頻繁히 쓰이는 單語들로서 兩言語에서 副詞化하는 特別한 文法的 節次 없이 그대로 쓰이게 된 것들이라 할 수 있다. 零接辭 派生에 의한 경우는 日本語의 경우 「直(ジカ),直(ジキ),万」의 3語가 調査되었는데 이에 비해 韓國語의 경우는 零接辭 派生에 의한 「一字漢語」 副詞는 1語도 存在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重要한 事實은 「一字漢語」의 경우 零接辭 派生이 일어나는 경우는 '名詞-副詞' 사이에서만 일어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日本語의 경우, 「一字漢語+に」가 22語로 「一字漢語」副詞에서 가장 많은 숫자로 다수를 차지고 있었으며 그 다음이 숫적으로 상당한 差異를 보이지만 「一字漢語+と」가 5語임을 알 수 있었다. 韓國語의 경우는 <<資料 2>>에서 보듯이 그 形態가 日本語에 비해 多樣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生産性이 높은 것은 「一字漢語+히」로서 全部 29語가 調査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으)로'(8語)가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一般的으로 많은 論著에서 韓國語 副詞를 形成하는 代表的인 接辭로서 '이/히'가 있다고 적고 있는데 「一字漢語」副詞에서는 '이'가 그다지 生産性을 갖지 못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面面이, 番番이, 一一이, 散散이, 点点이'와 같이 二字漢語의 경우는 '이'가 상당한 生産力을 가지고 副詞로서 派生語를 構成하고 있다. 이는 '이'가 二字漢語 더 具體的으로 말하면 反復 複合語인 漢語에 連結되었을 때 生産力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例外的으로 '獨이'와 같은 形態가 보이나 앞에서 적은 바와 같이 漢語 '獨'의 경우는 '-하다'와 結合할 수 없어 '獨히'의 形態를 취할 수 없기 때문에 '獨이'의 形態를 취한다고 할 수 있다. 「一字漢語」+ 기타의 경우는 먼저 日本語의 경우는 13語가 調査되었는데 즉 아래의 語彙들은 모두 對象 辭典에서는 副詞로서 表記가 되어 있지만 이 중 「頑として, 主として,體よく, 要するに, 牢として」의 경우는 一部 辭典에서는 連語로서 副詞的으로 쓰인다는 副詞的連語로 다루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비해 韓國語에서는 日本語에 비해 상당히 많은 副詞形態을 보이고 있는데 '決코(결단코), 緊찮이(緊하지 아니하다), 願컨대(願하건대)'와 같은 縮約된 形態와 '單숨에, 單칼에, 單통에, 憤김에, 火김에, 興김에'와 같은 固有語 名詞가 介入한 形態가 있는데 이 중 '單숨에, 單칼에, 單통에'의 경우는 '숨, 칼, 통'이라는 實質名詞가 介入한 경우이며,'憤결에, 憤김에, 火김에, 興김에'의 경우는 '意識이 미치지 않는 時間의 흐름이나 동안'의 意味를 가진 '결'이 그리고 '어떤 機會나 契機'의 意味를 가진'김'이라는 依存名詞가 各各 介入한 경우인데 이는 「一字漢語」+ '에'의 形態는 반드시 固有語 名詞의 介入에 의해 副詞의 機能을 가진다는 것이다. '當初에, 不時에, 已往에, 世上에' 등의 二字漢語 副詞와는 다른 樣相을 보이는 特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德스러이, 德스레, 變스러이, 變스레, 別스레이, 別스레, 福스러이, 福스레, 實살스러이, 義로이, 雜스러이, 雜스레, 情다이, 罪스러이, 罪스레, 賤덕스러이, 賤덕스레, 村스러이, 村스레, 蔽스러이, 蔽스레, 恨스러이, 恨스레, 害로이'와 같이 形容詞化 接尾辭'스럽다, 롭다, 답다'의 副詞形이 連結된 形態로서 '스럽다'의 副詞形 '스러이, 스레'의 경우는 [近接性]의 意味를, '롭다'의 副詞形인 '로이'는 [認定性]의 意味를, '답다'의 副詞形인 '다이'는 [價値性]의 意味를 담고 있다. 여기서도 '實살스럽다, 賤덕스러이, 賤덕스레'와 같이 「一字漢語」와 '스럽다'의 副詞形 사이에 固有語가 介入한 形態가 보이나 「一字漢語」와 '롭다'의 副詞形사이에는 固有語의 介入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脈없이, 番갈아, 變함없이, 別달리, 別다르게, 粉결같이, 數없이, 實없이, 連해, 辱되이, 類달리, 限없이, 惑몰라'와 같은 경우는 「一字漢語」+ 用言 '없다, 갈다, 하다, 다르다, 되다, 모르다'의 副詞形이 連結된 形態로서 '粉결같이'과 같이 依存名詞 '결'이 介入된 形態도 보인다.'獨이, 玆에, 惑은, 然이나, 然이면'과 같은 助詞가 붙어 副詞로 기능하는 형태,'願컨대, 決코'와 같이'하다'의 縮約形 '컨대, 코'가 連結된 形態, 역시'하다'의 結合形에'어'가 結合되어 形成된'혀'가 連結된 '全혀, 專혀', '그 한도까지'의 意味를 갖고 있는 '껏'이 連結된 '才주껏, 限껏', 마지막으로 '半나마'와 같이 固有語 副詞 語尾가 連結된 形態도 보인다. 以上의 漢語 副詞 其他 連結形에서 알 수 있는 것은 日本語보다 韓國語 쪽이 漢語 副詞 連結形이 훨씬 多樣하게 存在함을 알 수 있으며, 또한 日本語의 漢語 副詞에서 漢語가 모두 依存形式인데 비해 韓國語의 경우는 '德, 脈, 福, 辱, 情, 罪, 恨'등의 實質名詞가 存在하는 差異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特徵的인 面은 日本語의 경우, 森岡(1994) 등에서 漢語에는 「に,と,の」를 同伴하여 副詞를 構成한다라고 적고 있는데 이는 二字漢語에는 該當되나 「一字漢語」의 경우는「の」가 連結되는 副詞는 存在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韓國語의 경우도 二字漢語 以上의 語彙에서 찾아볼 수 있는 '瞬息間에, 盛況裡에, 暫間도, 暫時도, 都大體가'와 같이 助詞 '도, 가'가 連結된 形態를 一字漢語 副詞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는 역시 漢語 副詞形에 있어서도 二字漢語 등보다는 生産性이 떨어짐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反對로 '코'의 경우는 固有語와 結合할 수 없는 反面에 반드시 漢語와만 結合할 수 있다는 事實을 알 수 있었다. 兩言語의 「一字漢語」副詞의 의미 對應 關係에서는 副詞의 品詞 設定이 辭典에 따라 相異하여 같은 意味 機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副詞 對 副詞의 對應이 아닌 副詞 對 冠形詞, 副詞 對 接續詞로의 對應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一字漢語」副詞의 意味 對應에 있어서는 同一 「一字漢語」가 쓰인 副詞가 存在하느냐 存在하지 않느냐가 相當한 影響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는데 同一 漢語가 쓰인 「一字漢語」副詞가 存在할 경우엔 一對一 對應을 그렇지 못한 경우는 固有語 내지는 二字漢語에 對應함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많은 論著에서 漢語 副詞 形成에 있어서 日本語의 경우 「に, と, も」등을 格助詞나 接辭, 助動詞 등이 連結된 形態로 說明하고 있으며 韓國語의 경우도 「로, 에, 도, 가」등을 格助詞, 接辭로서 意味上의 特殊性을 띠고 生産性을 갖게 되면서 接尾辭化하여 漢語 語基에 結合되어 副詞를 만든다고 說明하고 있다. 日本語의 경우 「一字漢語」인 「切, 俗, 變, 別, 妙, 優, 樂, 碌, 陸」는 統辭的으로 「切だ, 俗だ, 變だ, 別だ, 妙だ, 優だ, 樂だ, 碌だ, 陸だ」의 形態로 形容動詞로서 機能을 가지고 있으므로 本稿에서의 「に」形「一字漢語」副詞인 「切に, 俗に, 變に, 別に, 妙に, 優に, 樂に, 碌に, 陸に」는 形容動詞의 連用形으로서 다루어야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되며, 이 以外의 경우도 漢語라는 特殊性을 考慮해 볼 때 副詞形 語尾들은 固有語 속에서 運用하기 위해서 또는 運用되기 위해 固有語 狀況 속에서 形態的으로 音韻的으로 適切한 語尾를 취하고 있다고 보야 할 것이라 생각되며, 이렇게 볼 때 이들 漢語 副詞들의 語尾는 漢語 副詞를 만드는 形式要素 정도로 다루는 것이 適切하다고 본다. 以上 各 章에서 論議된 內容을 綜合的으로 볼 때, 여러 가지 理由로 인해 漢語라는 넓은 範圍 속에서 다루어져 왔던 「一字漢語」가 지금까지 많은 硏究가 進行된 二字漢語의 先行硏究와 比較해서도 形態的, 統辭的, 意味的으로 差異를 보이며 「一字漢語」만의 特性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數的인 面에서 적다라는 理由 등으로 인해 看過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하며 앞으로 많은 硏究가 이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며 本稿에서 다루지 못한 部分들은 後日의 課題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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