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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黃興의 정치활동에 관한 일고찰

        조수련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49631

        Huang-Hsing is an outstanding patriot in the modern history of China. From his days of youth, he pursued the truth of saving his country, suffering the unjust persecution under the Chang dynasty and lived a long vagrant overseas life suffering difficulties until his death after having done all his best. His thought of loving country is just the noble spirit we should succeed to as our spiritual heritage. Huang-Hsing never got a contact with the western bour geoisde mocracy but sought for revolution line, in the severe circumstance of his national crisis. Huang-Hsing is regarded as an important person who combined his strong patriotism to save the country with the bourgeois democracy closely in the constant political thought. From the end of 19th century to the beginning of 20th century, the crisis of Chinese nation grew rapidly warning it consecutively. From 1844 to 1889, Japanese imperial caused the Japan-China War and China surrendered to Japan and entreated peace with Japan and shared the holy land, Formosa, to Japan. From the start of German occupation on China by force, the imperial strong nations began to share China by lease. In 1900 8 imperial nations made allied forces to invade China and collapsed Beijing. The ruler of Ching dynasty who fled to the west coast made haste to proclaim to associate with the imperial countries in his royal edict unexpectedly without shame. This circumstance caused greatly all the patriots preparedness and made them stand against Ching dynasty. And Huang-Hsing is one of the important figures of anti-Ching dynasty line. 본고는 黃興의 성장배경과 교육활동을 통해 그의 정치사상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구체적인 정치활동은 어떠했는지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황흥은 1874년 湖南省 長沙에서 출생하여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정통 한학교육을 받고, 武昌의 兩湖書院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유신운동 등 개혁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던 호남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점차 혁명에 대한 생각을 키워나가게 되었다. 시대의 변화는 젊은 황흥을 文士의 길에서 革命家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1902년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이는 황흥의 일생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다. 유학생활 중에 황흥의 反淸감정은 더욱 커졌고, 교육과 군사의 역할을 인식하게 되면서 1903년 몇몇 학생들과 ‘軍國民敎育會’라는 애국단체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1903년 6월 귀국하여 ‘拒俄義勇隊’를 결성하여 활동하다 가, 송교인 등과 함께 호남성 최초의 혁명조직인 ‘華興會’를 만들어 본격적인 혁명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가로회와 힘을 합쳐 장사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여 일본에 망명하였다. 1905년에는 동경에서 孫文 등과 ‘中國革命同盟會’를 조직하고 서무간사가 되어 손문 다음가는 지위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광동, 광서, 운남에서 여러 차례 무장봉기를 지휘하였다. 1911년에는 광주 봉기에도 참여하였고, 무창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 사령관이 되었으나 漢口 방위에는 실패하였다. 이후 상해.남경에 가서 혁명정부 수립에 분주하다가, 1912년 1월 中華民國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육군총장에 취임하여 임시 대총통이 된 손문을 보좌하였다. 당시 혁명세력은 손문이 이끄는 興中會, 황흥이 이끄는 화흥회, 장병린이 이끄는 光復會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혁명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모두의 힘을 모아야 했는데, 혁명파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주장만을 내세워 화합하기가 어려웠다. 이때 황흥은 대의를 이루기 위해 혁명세력의 화합을 주장하며 손문에게 양보하였던 것이다. 1913년 袁世凱를 반대하는 2차 혁명 당시 남경에서 거병하였으나 실패하여 미국에 망명하였다가, 1916년 귀국하여 손문과 합작하였으나, 얼마 후 상해에서 과로로 사망하였다. 황흥의 정치사상과 혁명 활동에 여러 가지 착오와 한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황흥의 화흥회 활동은 兩湖에서 혁명운동이 기초를 다지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신해혁명시기 황흥은 무장봉기의 기본군사방침을 지도하였으며, 투철한 애국주의 사상을 가지고 중화민국 건설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따라서 필자는 황흥을 혁명의 숨은 지도자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 디지털 중소기업 정보화 서비스의 성공요인에 관한 분석적 연구

        류연우 한성대학교 2007 국내박사

        RANK : 249631

        The Small-Medium Enterprise(SME)-based information service is one of the most significant areas of study to emerge m information science in the past several years. The SME-based information service is, in broad terms, a computerized service that allows a community of users to obtain a coherent means of access to an organized, electronically stored repository of information and knowledge. The information resources and technologies embodied by the web site are now accepted as the primary example of the SME-based information service. The need exists for a means to measure user success in the SME-based information service environment. Because a SME-based information service environment involves two functions-l) information search and retrieval and 2) interactivity with and through the medium-this research posits that measures of both of these functions will show positive correlation with user utilization. The current research utilized as its target population undergraduate and graduate students who are current users of a SME-based information service in medium to large-sized universities in Korea. The research revealed the five dimensions and three dimensions by studying the two constructs within the context of the SME-based information service user population. Correlation was found between and with four dimensions retained as components of a Comprehensive Model. It was determined that these four dimensions-Content Intrinsic Interest, Control, and Timeliness-are significant predictors of user success. The Comprehensive Model was validated, and it is therefore suggested as a basis for further study of user success indicators in the SME-based information service environment.

      • 17世紀 朝鮮·淸·러시아의 關係와 '羅禪征伐' : 羅禪征伐의 性格과 意義를 中心으로 : Focusing on the characteristic and the meaning of 'the Conquest to Russia'

        김동철 中央大學校 大學院 2002 국내석사

        RANK : 233263

        17세기는 동아시아의 대 변혁기로 국제 질서의 재편 시기였다. 동일한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이 문화에서뿐만 아니라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모든 면에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볼 때,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세 나라였던 명ㆍ조선ㆍ일본도 그 변화의 바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임진왜란’이 있었다. 임진왜란은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 전쟁이었다.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쇠퇴기에 접어든 명은 임진왜란의 타격으로 몰락의 가속화를 밟았고, 가장 피해가 컸던 조선은 나라는 유지했지만 뒤에 호란까지 겹쳐 엄청난 시련을 겪으면서 조선 후기로 시대 구분이 될 정도로 변화되어갔으며, 일본도 대륙 침략(임진왜란)의 실패로 정권이 바뀌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계기로 이익을 본 세력도 있었다. 여진족이 바로 그들로, 명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결속을 강화해 후금을 거쳐 청이라 칭하면서 조선을 굴복시키고 중국 대륙을 장악해 명실상부하게 동아시아의 주인공으로 자리잡았다. 임진왜란과는 무관하지만 또 하나의 세력인 러시아가 접근해와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몽골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국가적 결속력을 강화시켜 국력을 키워온 러시아는, 몽골의 몰락으로 유라시아 대륙의 힘의 공백이 생기자 동진을 시작하여 흑룡강까지 진출하였고, 이에 청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러한 동아시아 변화와 국제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빚어진 ‘사실’이 ‘나선정벌’이었다. 나선정벌은 흑룡강에서 벌어진 청ㆍ러 사이의 각축전이었으므로 두 나라가 당사국이었다. 하지만 당사국은 아니었지만 조선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개입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청나라의 강요에 의한 ‘원병’으로의 참전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조선의 의지는 ‘북벌‘에 있었다. 생활 방식과 문화의 내용이 다른 여진족이 조선을 굴복시키고, 더 나아가 중국의 지배자가 되어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자, 조선의 지식인들은 당혹감과 함께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이런 당혹감으로 부터 벗어나 유교 문명의 전통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 ‘소중화’의 자존심이며, 혼란을 잠재우고 일체감으로 국가적 단결을 꾀했던 것이 대의명분을 내세운 ‘북벌운동’이었다. 그러나 현실적 상황은 조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전개되었다. 여진족의 청나라가 중국을 확고하게 지배하게 되자 북벌운동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고, 소중화의 자존심도 청나라가 이중통치로서 유교문화의 전통을 이어가자 후에 현실을 인정한 실학으로 변모해 갔다. 이 중에서 17세기 나선정벌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이 북벌운동이었고, 본고를 쓰게된 동기도 여기에 있었다. 왜냐하면 ‘나선정벌’이라는 용어가 북벌론의 ‘북벌’이라는 용어에 의거하여 나왔고, 실제로 나선정벌의 역사적 사실은 청나라가 주도하고 조선은 종족적인 강요된 출병의 성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사 교과서에는 그대로 실려 일반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나선정벌’ 문제는 본고의 제목과 같이 관련 당사국의 역학적 관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정확한 사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좀 더 객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본고는 관계사적 시각에서 ‘나선정벌’의 성격과 의의를 다음 네 가지의 쟁점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규명해 보았다. 즉 ‘정벌’이란 기존의 역사적 용어의 문제점, ‘북벌’과의 상호 모순적 측면, 조선ㆍ청ㆍ러시아의 득과 실, 그리고 ‘나선정벌’의의의 등이 그 내용이다. ‘나선정벌’은 확실히 17세기 격변하는 동아시아 정세가 만들어낸 특별한 ‘사실’이었다. 「역사란 ‘우연’이 ‘일반’화되는 과정이다」라고 가정해 본다면 이 ‘특별한 사실’도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청이 당시 지켜낸 영토는 지금까지 중국의 국경선으로 자리잡고 있고, 몽골 제국의 몰락이 가져온 유라시아 대륙의 힘의 공백을 이용해 영역를 확장한 러시아는 아직까지 세계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는 국가로 남아 있으며, 그 때는 인지를 못했지만 나선정벌을 통해 만난 러시아가 이제는 우리와 국경선을 맞대면서 외교의 중요한 파트너가 되었고, 또 최근에 우리는 이번에는 패배한 전쟁이지만 ‘용병 성격의 원병’으로 참여한 ‘사실’이 있다. The 17th Century was the revolutionary period in the East Asia because the international order was rearranged. Since the nations which belonged to the same cultural area interacted in certain aspects including politics, economy, society, and etc., Ming, Chosun, and Japan which were the major nations in the East Asia at that time couldn't escape from the trend. And there was 'the Invasion to Chosun from Japan' in 1592 which was the major fact of the change. The war between Chosun and Japan in the East Asia was international at that time. Ming accelerated its fall because of the blow of this war. Chosun which was damaged most survived but suffered from severe ordeals from Mongol attacks. This kind of development served as the latter term of Chosun. The new political power rose in Japan because the continent invasion ended with the failure. However, this war gave some advantages to the Yeojin tribe. It was liberated from Ming dynasty and bound together. Then the tribe formed nation called Hookeam. Later it became Qing dynasty. It forced Chosun to give in and took charge of China. Finally it became a major power in the East Asia. Russia had nothing to do with this war but independently it raised power of its own. Russia was liberated from Mongol's domination and formed the nation strengthening the nation's defense. After Mongol was fallen down, Russia moved to the Eurasian Continent such as the Black Dragon river(the Amur River) taking the advantage of the power vacuum in this region and confronted with Qing. The Conquest to Russia was a historical fact which represented the change of the East Asia and the rearrangement of international order. This conquest which held in this river was the war between Qing and Russia. However, Chosun had to participate this war without its own intention. In fact, Qing forced Chosun to help out with the reinforcements. Anyhow, Chosun had intention to conquering the North Region secretly. Ching which had a different living pattern and culture overpowered Chosun and then became the ruler of china. As Qing gained the hegemony from the East Asia, the educated class of Chosun fell into the chaos with confusion. In order to escape from this dilemma and to keep the tradition based on the confucianism, they proclaimed the self-esteem of Sino-centrism and adopt a slogan of 'the Conquest to the North Region' wishing to calm down the confusion and led the national unity. But the story developed into an unexpected ending. Qing ruled China firmly so that the Sino-centrism died out gradually and turned to 'the Practical Science' because Ching used the confucianism as a dual ruling system. This dissertation's motivation came from 'the Conquest to the North Region' which gave a direct and indirect influence to 'the Conquest to Russia'. The term of the Conquest to Russia came from the Conquest to the North Region. Historically Qing led the Conquest to Russia and Chosun participated as reinforcements. Even though Qing forced Chosun to do it, it is believe to be the general fact written in the Korean history book. Dynamic relationship between nations definitely existed in the Conquest to Russia according to this dissertation's title. In order to access to the exact fact more objective understanding is needed. This dissertation in the aspect of historical connection tried to make a close inquiry into the characteristic and meaning of the Conquest to Russia with four issues and the awareness of trouble. Four issues are as follows such as, first, the problem of old usage of historical term "Conquest", second, the aspect of mutual inconsistency with the Conquest to the North Region, third, the advantage and disadvantage among Chosun, Russia, and Ching, and finally the meaning of 'the Conquest to Russia'. The Conquest to Russia is the historical fact which was created by the revolutionary 17th century's East Asia. If it is supposed that 'History is a process which coincidence becomes a generalization', this special historical fact can correspond to this case. Qing's territory which was kept at that time is still the border line of china. Russia taking advantage of Eurasia's power vacuum after the fall of Mongol and expanding the domain still is the biggest country in the world. Although it was not recognised at that time but Russia has become the important partner of foreign policy with the border line faced between Koran and Russia. Even though we failed this expedition, it was the historical fact which we participated as hired reinforcements.

      • 秦·漢 帝國의 國家祭祀 硏究 : 古代 中國의 祭祀 體系 확립 과정

        김용찬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8 국내박사

        RANK : 233263

        前漢 末 이후 國家祭祀에서 郊祀가 중심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郊祀가 만들어지기까지 秦·漢 帝國의 國家祭祀는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한 혼란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前漢 末에 가서야 最高의 天神을 위한 祭祀 施設은 長安의 郊祀로, 郡·國의 郡國廟는 七廟를 중심으로 모두 정리되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변화를 새롭게 등장한 儒家 官吏들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前漢 末을 기준으로 秦·漢 帝國의 國家祭祀를 나누어 보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현재까지 추종되고 있다. 그러나 그 內實을 들여다보면, 前漢 末의 改革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변화의 흐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무질서해보이는 最高의 天神을 위한 祭祀 施設과 郡國廟는 前漢 初 형성된 이른바 郡國制의 遺産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高祖에서 武帝까지 漢 皇帝들은 諸侯國을 무력화시키고 天下를 지배하는 名實相符한 ‘天子’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러한 노력은 最高의 天神을 위한 祭祀 施設의 ‘남발’이라는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高祖 死後 惠帝가 세운 高廟와 長陵은 남·북을 잇는 子午線 위에 있었고, 그 연장선에는 북쪽으로 東井과 五星을 상징하는 祭祀 施設, 남쪽으로 子午谷이 위치하는 등 中軸線을 뚜렷하게 보여주었다. 사실 이와 같은 中軸線은 秦 始皇에 의하여 구상된 것이었다. 極廟를 중심으로 한 地上이 天上을 그대로 구현하게 하여 秦 帝國의 권위를 絶對化할 수 있도록 시도한 것인데, 이와 아울러 秦 始皇은 極廟에 자신의 아버지인 秦 莊襄王을 太上皇으로 추존하여 모시고 이를 ‘帝者의 祖廟’로 삼기까지 하였다. 나아가 秦 始皇은 모든 縣級 行政 單位마다 廟를 만들어 中央의 極廟와 마찬가지로 太上皇을 모시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漢 帝國의 郡國廟로 계승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高祖 이후 武帝 이전까지 漢 皇帝들은 諸侯國의 존재로 인하여 秦 始皇이 實現한 것과 같은, 天下에 대한 완전한 지배를 이룰 수 없었다. 高祖 이후 漢 皇帝들이 지속적으로 諸侯國을 약화시켰고 그 지배 영역을 天下로 확대하여 마침내 武帝 시기에 郡國制를 완전히 극복하였다. 이와 더불어 全國的인 國家祭祀 體制도 갖추어지기 시작하였다. 武帝는 東方 巡狩를 통하여 受命天子로서 封禪을 올리고 그 주변의 神들과 祭祀를 확보해나갔는데, 이 과정에서 武帝를 도운 主役은 方士들이었다. 이것은 宣帝에게 계승되어 五嶽·四瀆과 主要 祭祀 施設로 정리되어 各級 行政 單位에 위임되었다. 成帝 시기에 이르면 方士들이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地方 長官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地方 行政 單位마다 확보된 主要 祭祀 施設은 前漢 末에 이르면 全國的으로 700여 곳에 달하였고, 國家祭祀에 포섭된 祭祀 施設은 1,500곳 이상이었다. 郊祀는 이와 같은 前漢 末의 歷史的 背景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後漢 初 光武帝에 의하여 집결된 雒陽 南郊의 1,514位 神들은 前漢 末까지 漢 帝國이 확보한 天下의 神들을 망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光武帝는 郊祀 중 南郊의 上壇에 天과 함께 漢 帝國의 始祖인 高祖를 配祀함으로써 漢 皇帝의 권위를 極大化하였는데, 이것은 秦의 極廟에서부터 文帝의 渭陽 五帝廟, 武帝의 長安 泰一祠와 甘泉 泰畤까지 이어지는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다. 심지어 그 祭壇의 外形인 3壇 8角 구조, 여러 神들을 한 곳에 모아 한꺼번에 祭祀지내는 것조차 長安 泰一祠와 甘泉 泰畤를 계승한 것이었다. 郊祀는 儒家 官吏들의 專有物이 아니었다. 秦·漢 帝國의 國家祭祀는 中央의 郊祀와 地方의 五嶽·四瀆 및 主要 祭祀 施設뿐만 아니라 末端인 里에 이르기까지 神과 祭祀를 규제하는 體制를 갖추어나갔다. 春秋 시기 秦에서부터 民들의 자연발생적인 社를 行政 單位를 중심으로 조직, 神과 祭祀를 집중시켜 그 시기와 祭物을 규제하였다. 나아가 秦·漢 帝國에서는 中央의 社禝에서부터 各級 行政 單位마다 社 祭祀를 두어 全國에 대한 一元的인 지배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 운영에 필요한 인원과 물자를 제공하기 위한 體制를 갖추어갔다. 처음 그 祭祀는 商·周 이래로 史·卜·祝 등 祭祀에 특화된 世襲的 技能人들이 담당하였으나, 점차 地方 長官과 그 屬吏들이 담당하게 되면서 國家祭祀는 점차 制度化되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主要 祭祀 施設 이상에서 巫·祝과 方士가 축출되고 一般 官吏들이 祭祀에 참여하는 변화와 함께 이루어졌다. 이 변화를 가속화한 것이 바로 史·卜·祝의 선발 과정보다 우위에 선 文學 선발 과정이었다. 郊祀의 등장과 함께 後漢 初에 이르면 孔子가 國家祭祀의 對象으로 포섭되었다. 孔子 祭祀는 前漢 末부터 祭祀 改革을 주도한 儒家 官吏들에 의하여 제안되었고, 王莽이 孔子를 簒奪에 이용하면서 國家祭祀 안에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孔子 祭祀는 明帝 시기에 中央의 辟雍과 地方의 學校마다 설치되어 天下에 고루 분포하게 되었고, 明帝, 章帝, 安帝의 東方 巡狩로 漢 皇帝에게 완전하게 장악되었다. 나아가 魯國의 孔子 祭祀 施設이 孔子廟로 격상되면서 孔子는 儒家 經典의 편찬을 통하여 漢 帝國을 豫備한 豫言者로서의 地位를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儒家 經典에 입각한 漢 帝國의 國家祭祀는 완전히 儒敎化되었고, 그 이후를 名實相符한 ‘儒敎國家’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漢 帝國의 ‘儒敎國家’적인 모습은 어디까지나 前漢 末까지 이어진 國家祭祀 건설의 결과물로, 巫·祝과 方士, 地方 長官과 屬吏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儒敎的’으로 粉飾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基底에는 天下를 對象으로 완전한 지배를 추구한 國家權力의 노력이 담겨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二年律令에 반영된 前漢初의 토지제도

        최연희 경북대학교 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33263

        有關漢初的土地制度研究,到20世紀以前由於相關資料的不足,只能以土地私有制弊害至極的漢中後期的情況為延長線進行理解。但事實上,已經成為定說的漢初土地制度由於新出土的《張家山漢簡ㆍ二年律令》,使深入的研究成為可能。因此,筆者就以《二年律令》為中心,考察了漢初土地的相關規定、相關規定的實施可能性,并及針對它們的意義提出論點展開了論述。 本文的內容整理如下: 第一,在秦漢代土地的相關資料中名田與授田共同登場。名田指登記在官府帳簿中的土地,只有在爲戶擁有戶籍之後才能進行土地登記。授田指國家授予的土地,授田中不僅包括開墾的土地,也包括未開墾的土地或惡田。國家在將土地授予個人之後,受田者可以任意處理被授予的土地。因此,土地所有者變更的時候,要將事實報告到鄕,鄕要將田宅的轉讓情況及時記錄在籍。也就是說,國家授予的土地都要被登記在帳簿上,名田與授田不是完全一致的。授田只是名田的來源之一,名田中除了授田,還包括通過買賣、轉讓、繼承而獲得的土地。因此,以授田規定為依據,將漢初的土地制度——名田制斷定為國家授田制的見解是需要再考的。 第二,“名”不包括限制的意義,即便是參考當時社會、經濟情況,沒有任何需要限制土地佔有的理由,授田宅條文只是規定了相應的爵位所授予田宅的面積。一部份學者認為,授田宅條文中記載的田宅面積中,包含了“限制了名田面積的意義”,這種主張的根據是商鞅變法的規定和有關哀帝時期“均田之制”的孟康的注。但是,由於爵位的不同授田面積就存在差等,這樣的授田被記錄在帳簿上,這表明的是名田的情況,並不是土地佔有本身存在差等的意思。因此,保有爵位的人在最初被授田時,國家按照規定的各爵級的授予面積授予土地,而後土地面積的擴大或是縮減都是自然會發生的事情。當然,由於名田沒有限制,所以在超過名田的面積限制時也不存在收回的規定。因此可以說,規定為漢初土地制度的名田制是國有制與私有制的混合體,在二年律令喪失效力的文景帝以後,授田制崩潰無法再看到土地國有制的影子,進入了完全的土地私有制階段。 第三,二年律令中規定的授田面積是非常廣大的。不僅如此,與漢文帝、平帝時期百姓實際佔有的土地數量相比也屬於相當寬廣的面積。加之後漢時期的鄭玄等主張“漢代沒有授田法”,這樣看來,規定的土地面積很有可能不是實際授予的土地面積。即,只是規定了要按照爵位的差等授予規定的面積,但這並不是保證了實授的規定。這樣一來,如果授田宅條文中記載的面積不是保證實授的數值,那麼這就與授田宅條文制定時期的社會、經濟情況有非常密切的關係。授田宅條文的制定時期是高祖五年(公元前202年)到高祖六年(公元前201年)之間,這一時期處於楚漢戰爭剛剛終了,由於戰爭人口急速縮減社會、經濟狀況非常衰退。因此,二年律令的授田規定希望能改善這種困難的經濟、政治情況,并能通過限制土地授給規定來謀求當時政治、社會、經濟的安定。但像這種律令中規定的數值如果不以實授為前提的話,具有強制力的律令其意義就只能是衰退,作為律令的規定性與公共性中就必然蘊含致命的限度。不僅如此,二年律令沒有受到抵制而被受用很可能是因為,對於這一律令大眾很有默契的認同是從秦始皇時期的“使黔首自實田”以後就出現了。

      • 명초, 전각대학사의 설치에 대한 일고찰

        정진아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1996 국내석사

        RANK : 233247

        洪武帝는 1368년 明왕조를 건국하였다. 지주의 지원으로 건국한 홍무제는 왕조를 안정시키고 황위를 견고히 하기 위해 지주들을 대상으로 유화책과 탄압책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지주에 대한 탄압책의 일환으로 옥사를 일으킴으로써 왕조의 안정과 황권의 강화를 꾀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을 배경으로 홍무제는 지방의 행중서성과 중앙의 중서성을 폐지하고 지방의 3정사와 중앙의 6부를 중심으로 하는 황제중심 체제를 완성하는 정치개혁을 단행하였다. 중서성을 폐지한 후, 홍무제는 皇權과 相權을 한손에 쥐고 천하의 정무를 수행 하였으나 예상치 못했던 업무의 과다로 홍무제는 급히 四輔官이라는 論思기관을 설치하였다. 사보관으로는 耆儒들이 임용되어 황제에게 治道를 강론하고, 한정된 정무에 참가하였다. 사보관은 顧問官과 實務官이 미분화된 체제로써 내각의 맹아 형태인 전각대학사가 설립되까지의 과도기적 기관이었다. 홍무제는 사보관을 폐지한 후 大學士를 설치하였다. 이것은 고문관과 실무 행정관을 엄격히 구분하여 황위의 안정과 황권의 강화를 도모하려는 홍무제의 계획하에 설치된 것이었다. 홍무제는 대학사를 時事에 밝고 親皇적인 翰林院에서 임명하였으나 한림관이 대학사가 되면 대학사는 정사에 관여할 수 없게하고, 한림원과 대학사를 모두 정 5품의 낮은 지위에 머물게함으로써 그들이 황제의 곁에 머물면서도 권신으로 성장하는 것은 방지하였다. 한림관을 선발하여 황제가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보좌하게 했던 輔臣의 방법은 成祖 永樂시기에 內閣으로 완성되었다. 영락제시기의 내각의 각신은 정사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모든 정무의 최종적인 황제가 결정하였고 그들을 正 5品이라는 낮은 관질에 머물게 함으로써 宰相과 같은 권신으로 성장하는 것을 방지하는 원칙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내각운영을 위한 기본 방침이 되었다. 洪武帝在1368依빙地主的支持建立明朝, 可是, 不久, 他就力了隱定王朝和堅强皇位, 在對支柱推行柔和政策的同時, 彈壓政策也施行了. 一系列的獄事就是從他彈壓地主的意圖出現的. 通過這種政策, 洪武帝達到一定程度上的目的. 基于這種政策, 洪武帝廢地方的行中書省和中央的中書省, 而樹立了以地方的三政司和中央的六部爲中心的皇帝執權體制. 廢止中書省之後, 洪武帝掌握了皇權和相權一手, 執行天下的所有政務. 由于事先不能豫期的過多的業務量, 他敏捷地設置叫做四輔官的一種論事機關. 一些耆儒選用爲四輔官, 타們主要擔當了對皇帝講述治道和直接參與一定範圍之內的政務的職掌. 但是四輔官當時嫌在作爲顧問官和作爲實務官的作用未分化. 타只過是在過渡機關. 如果我們要看到內閣的萌芽出現, 我們須要等到殿閣大學士設立. 廢止四輔官之後, 洪武帝設置殿閣大學士. 這是一個通過嚴格區別顧問官和行政官, 要達到皇位的隱定和皇權的强化的他意圖投射的機關. 洪武帝把曉事, 근他自己親密的翰林院學士任用爲大學士. 可是, 洪武帝叫他們不能從政而不能留在正五品的較低的地位, 而避免他們成長爲權臣. 選拔翰林官, 把他作爲皇帝的輔佐的輔臣, 到成朝永樂時期才完善爲內閣. 這一段時間, 內閣的閣臣雖可以參與政務, 但是一切的政務仍然由皇帝最終決定, 而他們却一如旣往地留在正5品的較低的官位. 以上可見, 豫防閣臣成爲像前代宰相那樣흔有權力的威脅皇權的勢力的洪武帝的當初計劃, 在他後代也繼續貫徹到, 這個原則被歷明代皇帝作爲運用內閣的有效根幹.

      • 秦漢代 琅邪지역 연구 : 행정조직과 정치동향을 중심으로

        남영주 영남대학교 대학원 201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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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郡縣制는 황제지배체제를 지탱한 기본적인 제도적 장치의 하나이다. 秦代 이래 시행된 군현제에서 내지의 一般郡인 '內郡'은 대부분 '皇帝의 直接的 支配單位'로서의 성격을 갖는 郡縣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지배체제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郡의 경우에도 秦漢시기 동안 郡縣制가 정착되어 운영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그 중에서도 秦漢의 郡縣支配體制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지역으로서 낭야군을 들 수 있다. 낭야군이 속했던 齊 지역은 戰國時代 동안 郡이 설치되지 않았다. 낭야군의 경우에는 郡과 유사한 기능을 한 齊國의 고유한 행정조직인 都도 설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秦이 전국을 통일한 후 설치한 낭야군은 이 지역에 처음으로 秦의 지배체제가 도입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뿐만 아니라 한초 군국제가 실시되었지만 漢은 제후왕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諸侯王國을 분할하였는데, 이 때 분할의 중심이 된 지역이 낭야군이 속한 齊國이었는데, 齊國에 속한 모든 郡이 여러 제후왕국으로 분할되었지만 유독 낭야군만은 郡으로 유지되었다. 따라서 秦漢시기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琅邪지역의 행정조직 변화와 그에 따른 운영 실태에 대한 연구는 秦漢의 군현지배제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서 연구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연구는 秦漢代 군현지배가 관철 방식에 대한 이해와 군현지배체제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낭야지역이 내포한 位相과 지역적 특성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확인된 사실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戰國時代 琅邪지역의 특성과 秦이 전국을 통일한 후 始皇帝가 이 지역에 郡을 설치한 정황에 대해 고찰하였는데, 춘추․전국시대 낭야지역은 바다를 접하고 있던 지리적 환경이 이 지역의 특성을 드러내는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琅邪는 춘추시대부터 남쪽에 위치했던 吳․越國이 북상할 때 이용한 港口로서 齊國의 門戶 가운데 하나였다. 또한 이 지역에서는 魚鹽이 생산되었고, 전국시대 동안 전란의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농업적 기반도 비교적 양호하였다. 秦이 전국을 통일한 후 낭야는 秦 帝國의 東端에 위치했을 뿐 아니라, 전국시대 동안 戰線이 형성되지 않은 지역으로서 秦의 영향력이 비교적 약하였다. 따라서 시황제는 낭야지역에 郡을 설치한 후,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琅邪로 3萬戶를 徙民한 후 琅邪臺와 琅邪城을 축조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모든 점령지에 대한 확고한 지배의지를 표출한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둘째, 漢初 高祖시기부터 文帝시기까지 통치자들이 琅邪郡을 지배기반으로 확보했던 과정에 대해 파악하였다. 이 시기는 중앙집권화의 기초가 놓이는 시기로서 낭야 또한 경제적 우월성으로 인해 高祖 이래 주목되는 지역이었다. 高祖는 낭야의 경제적 우월성과 더불어 제후왕들이 낭야군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황제권에 대항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낭야군을 중앙에 속하게 하였다. 이후 高祖는 이성제후왕을 동성제후왕으로 교체하면서 齊國에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아들을 封하였는데, 이 때 낭야군은 齊國의 封地에 속하였다. 呂后시기에는 여후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齊國의 封地를 분할하여 呂氏 一族들을 諸侯王으로 封하였는데, 齊國의 봉지에 속한 琅邪郡에는 大將軍인 劉澤이 諸侯王으로 봉해졌다. 여후가 이러한 조처를 취한 것은 유택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功臣들과 劉氏 諸侯들에 의해 옹립된 文帝가 유명무실화된 황제권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낭야군을 중시한 사실도 확인하였다. 문제는 封地에 대한 분할과 회복을 통해 자신의 옹립에 功을 세운 劉氏 一族들을 우대하였다. 이 때 文帝는 琅邪王 劉澤을 燕國으로 옮겨 封하였다. 劉澤이 봉지를 옮긴 것은 낭야군을 기반으로 성장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논공행상에 대한 불만과 황제권에 대한 제후왕들의 도전이 지속되자, 文帝는 16년에 이르러 諸侯王國의 封地를 분할하여 모든 王子들에게 封하였다. 그렇지만 琅邪郡만은 漢初 齊國의 封地에 속한 7개의 郡 중에서 유일하게 郡으로 존재하였다. 이는 漢初 낭야군이 중앙집권화의 직접적 지배 대상으로 분류되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셋째, 漢代 낭야지역의 郡縣支配 양상에 관해 고찰하였다. 前漢시기 동안 낭야군은 주변에 여러 제후왕국이 위치한 정치적 환경으로 인해 가장 많은 侯國이 설치되었다. 琅邪郡에는 王子侯들이 많이 封해졌는데 그 중에서도 城陽王子들이 가장 많이 封해졌다. 城陽王子들은 推恩令 이후에 봉해진 자들로서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漢은 王子侯들이 侯國을 기반으로 豪族化되는 현상에 주목하였다. 그 결과 漢 정부는 列侯들의 封地를 이동시키는 徙封을 통해 이들의 세력을 견제하였다. 또한 後漢이 건국된 후 琅邪國이 설치된 정황에 대해 살펴보았다. 後漢은 前漢과 달리 제후왕들을 황제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후왕국을 수도와 멀리 떨어진 帝國의 동쪽에 封했던 前漢과 달리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이민족으로부터 안전한 지역에 封하였다. 낭야국은 前漢시기에 비해 縣과 侯國의 수가 급격하게 감소하였는데, 이는 兩漢 교체시기 이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人口와 戶數가 감소하고, 이로 인해 광무제가 인구 수에 비례하여 郡縣을 통폐합한 결과였다. 넷째, 後漢시기 낭야지역의 정치동향을 통해 이 지역의 특성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낭야지역은 鹽․鐵官이 설치되어 여기에 종사하고 있었던 백성들은 가혹한 노동에 불만을 품고 언제든지 반란에 가담할 수 있었다. 또한 낭야군은 바다를 접하고 있는 지리적 환경으로 인해 섬을 기반으로 反 정부적인 성향을 가진 세력들이 형성되었다..이들 중에서도 낭야군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킨 장보는 梁國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킨 劉永과 東海郡에서 거병한 董憲과 연합하여 '東方'세력을 형성하였다. 광무제는 張步를 진압하기 위해 琅邪郡 출신인 伏隆을 파견하였는데, 이는 복륭이 낭야군의 토착세력으로 屬吏인 督郵를 역임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지방속리들은 郡의 사정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복륭을 비롯한 伏氏 一家는 낭야군을 기반으로 經典을 전수하고 門下를 양성한 '經學世家'였다. 광무제는 복씨 일가의 名望이 낭야군을 비롯한 齊 지역 일대에 존재했기 때문에 충분히 백성들의 민심을 수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야지역에서는 伏氏 一家 뿐 아니라 많은 儒生들이 배출되었다. 전한시기 낭야지역은 五經에 대한 전수가 활발하였으며, 유생들은 이를 기반으로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다. 낭야군 출신의 儒生들 중 王吉과 諸葛豐은 魏晉南北朝시기 門閥貴族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기반을 닦은 존재들이었다. 이러한 낭야지역의 학문적 전통은 이후 문벌귀족 사회가 형성되는데 있어서 기반이 되었다. 향후 낭야지역을 기반으로 성장한 문벌귀족들에 대한 고찰이 이루어진다면 낭야지역의 특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지역의 位相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In this paper, I investigated a change of administrative organization and an operating system in the course of centralization of power in Langye District during Qin-Han era(秦漢代) Through this work, I could illuminated a status of Langye District during the centralization of power by Qin-Han Empire. Also I could grasp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district. The facts identified through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character of the Langye area in the age of civil wars(戰國時代) and the circumstances which Shih Huangti(始皇帝) installed the chün system(郡) in the area were examined. A geographical environment of the area which faces the sea is important to expose the nature of this region. Langye was the harbor which WuYue(吳․ 越), located in the south of the area, had used to go to the north and was one of the door(門戶) of Qi(齊). Also a rich seafood and salt(魚鹽) was produced in this area, and it's agricultural base was relatively good because it did not damage during the age of civil wars. Therefore, after installing the chün system, Shih Huangti had made 30,000 households and constructed the Langyetai(琅邪臺) and the Langyecheng(琅邪城). All these measures expressing a firm ruling volition on the occupied territories are an example. Second, the process which rulers had made a ruling based on Langye Commandery from Gaozu(高祖) period to Wendi(文帝) period in the early Han dynasty was investigated. This period was a period to lay the foundation for centralization of power. Gaozu made Langye Commandery belong to the center, because he could fight against the Emperor's rights on the basis of an economical superiority of Langye. The efforts to secure a power base at Langye Commandery was exposed more specifically in Luhou(呂后) time. Luhou made Liuze(劉澤) feudal lords(諸侯王) at Langye Commandery in order to strengthen his power. He did take action because of Liuze's military capability. Wendi enthroned by meritorious retainers(功臣) put emphasis on Langye Commandery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the Emperor's right having been nominal. By the 16 years of his reign, Wendi divided lands of feudal lords, and then imparted to the prince. But he leaved only Langye Commandery behind as chün system among seven chün system which belong to the lands of Qi. This is sufficient to show that Langye Commandery was classified as a direct ruling subject of a centralization of power in the early Han Dynasty. Third, I examined the aspects of governance of chün-hsien system in Langye district during Han Dynasty. Langye Commandery was only maintained as a chün(郡) in the region of Qi during the period of early Han, and the most houguo(侯國) had been established in the area due to a political environment. Many princes were appointed in Langye Commandery. Therefore, Han Dynasty noted the phenomenon that the princes become a lord in based on houguo. As a result, the Dynasty tried to keep in check the their forces through xifeng(徙封) which move their lands. In addition, I examined the context that a marquisate of Langye(琅邪國) was installed after the late Han Dynasty was established. Unlike the early Han, the late Han did not seen feudal lords as threatening the Emperor's rights. While the early Han laid the nations of feudal lords to the east of the empire far away from the capital, the late Han laid the feudal lords to the economically prosperous and secure region from the other ethnic. In addition, compared to the early Han period, the number of hsien(縣) and houguo in a marquisate of Langye was sharply decreased. This result was due to decrease of the number of population and households by revolt in the region during both Han, and due to the combination and abolition by Emperor Guangwu(光武帝). Fourth, I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gion through it's political trends during the late Han. Langye Commandery, as a area which yantieguan(鹽鐵官) was installed, It's people could take part in the revolt because of a harsh labor at any time. Due to it's geographical environment which faces the sea, anti-government forces based on an island were formed in the area. Finally, I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Langye area through the suppression of Zhangbu(張步)'s rebellion. Fulong(伏隆) who Guangwu accredited to repress Zhangbu(張步)'s rebellion was a local officials from Langye Commandery. Hence he had a good understanding of the situation in that area, passed down scriptures(經典), and trained disciples. In Langye Commandery, many Confucian scholars as well as Fulong were produced. The Five Books of Confucianism(五經) were actively on the transfer during the early Han, and Confucian scholars had entered into a central bureaucracy on this basis. Among the scholars, some had contributed to form aristocracy(門閥貴族) during the Period of North and South Dynasties(南北朝時代). Therefore, the academic tradition of Langye Commandery has significance in that it formed the foundation of the society of arist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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