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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上田秋成硏究 : 春雨物語を中心に

        김옥희 お茶の水女子大學 1997 해외박사

        RANK : 247343

        에도 중기 문학의 최대의 특징으로서 문학과 학문의 밀접한 관련을 들 수가있다. 작가인 동시에 국학자이기도 했던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의 문학 에는 그러한 시대적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오랜 동안의 국학 연구의 성과가 반영되어 있는 『춘양물어』는 에도 중기의 문학적 특성이 드러나 있는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춘양물어』를 중심으로 아미나리라는 문인의 만년의 문학과 사상을 고찰하고자 하는 시도로,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춘양물어』에 드러나 있는 〈국학자 아키나리〉와 〈작가 아키나리〉의 공존의 양상을 부각시키고 자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예를 들면, 『춘양물어』에서 사용된 여러 문학적 표현의 의미를 해석하고자 할 때, 그러한 표현들을 단순한 수식적 표 현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국학자 아키나리〉의 메 시지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고자 했다. 그러한 의도를 충분히 달성하기 위 해서, 본 논문에서는 아키나리의 학문적 저술들을 참조하는 것은 물론, 그 외에 아키나리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의 학문에도 관심을 가짐과 동시에, 당대의 사상계의 거장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의 사상과의 비교 검토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이상의 방법으로 『춘양물어』에 수록된 10편의 단편들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각 단편들의 테마가 거의 국학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또한 『춘양물어』가 구성이나 성립 과정 등에 있어서 아키나리의 국 학 관계 저술인 『遠駝延五登』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과, 『춘양물어』 의 창작은 문인으로서의 「遊ぴ(遊戱)」정신을 지키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 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같이 아키나리의 사상적 측면에 중점을 둔 고찰에 의해서 아직까지 불분명했던 『춘양물어』의 세계의 윤곽이 좀 더 선명히 부각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춘양물어』가 〈국학자 아키나리〉에게 있어서 단순한 소설 창작 이상의 깊은 의미를 지닌 작품이라는 사실도 밝힐 수가 있었다.

      • 夏目漱石の硏究

        장남호 [大東文化大學] 1997 해외박사

        RANK : 247343

        본 연구의 목적은 한국의 근대문학자와 관련지어 漱石像을 밝히고, 일본근 대를 보는 나의 관점에서 漱石문학의 생성(生成)과 사상성(思想性)·시대성 (時代性)을 재조명하려는 데 있다. 본 논문에서는 먼저, 漱石을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 환경속의 漱石을알기 위해 시대적 성격을 밝혀 보았다. 메이지(明治) 시대와 운명을 같이한 漱石은 그 시대적 성격을 노골적으로 작품 속에 나타내고 있지는 않지만, 근 화를 형성한 시대의 의미를 작품속에 나타낸 것은 자명한 일이다. 메이지의 지도자들의 젊음에서 오는 결단력, 실행력과 그 젊음에서 초래한 근대화는 왜곡된 것이었다. 무사와 상인과 부농 이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농민들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脫亞入歐」라는 슬로건 아래 제도적, 기술적인 면은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내적 구조의 모순을 그대로 지니고있었다. 그 내부적 약함과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외적인 활로를 찾게 되었는데 그 희생자는 일본의 민중뿐만 아니라 이런 정책의 대상이 되었던 한국과 중국인 들에게도 미쳤다. 당시의 지식인들은 전쟁과 부의 부조리를 지적하면서도 침 략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진 자는 아무도 없었다. 메이지의 신정권은 표면적으로 일왕을 내세운 점을 주시하고 싶다. 국민의 상징으로서 일왕의 권위가 필요했고, 그 교육 방침으로서 「교육칙어」의 존 재가 핵심이 되었다. 漱石는 그런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제한하는 천황제에 대립하는 사람이라고할 수 있다. 그것은 漱石의 문학 작품에 자아의 문제로서 추구되어 있다. 두번째로 漱石의 「자기본위」와 「개인주의」의 사상형성의 과정과 그 전개를 수석의 서간집과 「道樂と職業」 「現代文明の開化」 「中味と形式」 「文藝と道德」 「私の個人主義」의 강연을 중심으로 고찰해 보았다. 세번째로 개개의 작품내부로 들어가 작품의 구조와 종래의 연구 성과를 주 축으로 작품을 분석하여 수석의 사상적 문학적 세계를 해명해 보았다. 「吾輩は猫である」 에서는 문명비판을, 「草枕」에서는 일상과 비일상의 상극을, 「三四郞」에서는 美邇子의 에고이즘의 문제를, 「それから」에서는 미적생활의 붕괴와 자아의 문제를, 「門」에서는 자연의 사랑을 추구하는 문 제를, 각각의 작품에서 주제로서 인식하였다. 또한, 수선사에서 죽음을 깊이 인식한 漱石는, 또한 「彼岸過 ?」 에서는 인간소외의 문제를, 「こつる」에서는 죄의식의 문제를, 「道草」에서는 자아실현의 문제를, 「明暗」에서는 자아의 이중성의 의미를 제시하는 것으로 인 식하였다. 나는 이러한 수석 작품의 고찰에서 수석의 작품은 인간내면의 소외의 양상 을 일상생활에서 철저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 공통적인 요소로서 이해되었 다. 네번째로, 한국인인 나는 나의 주체성이 입각하여 수석의 문제를 생각하기 위하여 수석의 한국관을 기행문 「 ?韓ところでころ」와 일기, 서간을 날짜에따라 고찰하고, 동시대의 高 ? 虛子」의 한국관을 비교하였다. 또한 한일 동시대의 지식인의 전형으로서 한국의 대표적인 근대문학자인 李光洙를 고찰함으로서 일본근대를 살아가는 수석의 주체성을 생각해 보았다. 이광수는 일본침략 속에서 한일의 근대화를 체험한 작가이다. 이광수의 수석 영향을 고찰하고, 구체적으로 「坊つちやん」과 「無情」을 비교분석하면서 그 구성을 비롯하여 인물, 주제를 고찰해 보았다. 한일근대의최고의 두 작가 작품에서 상징하는 것은 작가는 시대의 인물이고 그 시대와 함께 고뇌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결론으로서는 夏目漱石 문학의 특질로서 이제까지의 논점을 기초로 해서 일본 근대 지식인으로서 수석의 사상적성격을, 특히 則天去私적인 관점을 중심 으로, 이것을 森鷗外와 자연주의 문학과 관련지어 논했다. 수석의 사상의 저변에는 근본적으로 근대화에 대한 의문이 있었고, 거기서 정신적인 고향인 일본 전통으로의 희구가 도출되지만, 동시에 서양근대의 자 아와의 갈등이 생겨나게 된다. 則天去私는 그런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 日本文學に表 れた 韓國像 : 大江健三郞の 文學を中心 に

        안수자 檀國大學校 大學院 1996 국내석사

        RANK : 247342

        본 논문은 일본문학에 나타난 韓國像을 고대로 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고찰한 뒤, 전후 일본문학의 韓國像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한 大江健三郎의 초기의 대표작품 『芽むしり 仔擊ち』와 『叫び聲』의 작품분석을 통하여 韓國像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형태로 변화되어 왔는가를 검토해 보았다. 일본문학에 나타난 韓國像은 각 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고대 문학의 대표작인 『古事記』나 『日本書紀』 속에서는 일본인의 故鄕으로서의 한국, 또는 선진문물을 전수해주는 나라로써 표현되어지고 있다. 시대가 지나 중세의 『宇治拾遺物語』 등의 한국관련 작품에서는 무사계급에 정권을 획득한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여 일본인 무사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한국을 과소평가하려는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옛부터 사람의 왕래와 교류가 잦은 이웃나라 한국을 풍부한 문명의 나라 또는 선진국으로 취급하였기 때문에 한국관도 비교적 긍정적인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일본문학은 고대로 부터 여러형태로 한국을 묘사하여 왔으나, 본격적으로 한국을 취급하게 된 것은 명치 이후 근대로 들어서면서 부터 였다. 근대 일본문학속의 韓國像은 고전문학에서와는 달리 일본의 한국침략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여 한국에 대한 우월감 및 편견 그리고 차별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비난하고 한국에 대하여 동정적이었던 柳宗悅이나 幸德秋水 등의 휴머니스트 및 사회주의 작가들 까지도 한국에 대한 무지와 한국민족의 주체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 등의 한계가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고 한국이 독립하여 한일관계가 정상화됨에 따라 일본작가들의 對韓國觀에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1950년대 등장하였던 大江健三郎, 井上光晴, 小林勝의 작품에는 그 이전의 작가들과는 다른 韓國像이 보여지고 있다. 전후 처음으로 이들은 일본인의 어두운 부분, 또한 한국인의 눈에 비춰진 일본인의 존재를 조명함으로써 일본인을 속박하여 왔던 다양한 형태의 왜곡된 韓國觀으로 부터 탈피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일본인의 한국 인식에 대한 획기적인 변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大江, 小林, 井上는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편견이나 우월감을 바로잡는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그들의 작품은 식민지 체험의 有無에 따라서 작품의 내용도 다르게 묘사되었다. 식민지 체험을 하였던 小林는 한국인의 눈에 비친 일본인의 존재를 그리고 있으나, 井上는 식민지 체험이 없었다는 점에서는 大江와 공통점이 있으나 그는 일본에 강제 연행되어진 광부들의 학대를 포함한 일본인의 원죄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반면 大江는 일본인의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한국인을 포함한 타집단에 대한 배타의식 및 차별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大江는 『芽むしり 仔擊ち』에서 사회적 약자이며 <異人>인 감화원 소년들 및 한국인 소년과, 사회적 규범 및 권력의 상징인 <村人>을 대치시키고 있다. 異人집단은 외부세계로 부터 차단되어진 <벽속의 인간>으로 부터 자유를 추구하여 탈출을 시도하나 실패로 끝남으로써 권력의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일본의 村共同體에 있어서 他者에 대한 배타의식과 악의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한국인은 약자인 동시에 異人으로서 村人으로 부터 소외되어진 인간으로서 묘사되어지고 있다. 한편 『叫び聲』는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는 불안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反authentique>의 인간이 일상생활자로 구성되는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그 질서를 역전시키려고 시도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를 가진 吳鷹男은 <뿌리없는 풀> 같은 존재로서 자신을 억압하고 차별해 왔던 현실세계에 대하여 <현실에는 일어날 수 없는>일, 즉 여자 고교생을 강간ㆍ살인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초월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大江는 <authentique>의 세계로 부터 소외되어진 인간의 반사회적인 행위에도 이유가 있다는 것을 吳鷹男을 통하여 보여줌으로써 일본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吳鷹男은 小松川事件의 李珍宇를 모델로 하고 있으나 大江는 李청년의 문제를 일본인 자신의 본질에 관련되는 보편적 문제로 발전시켜 在日韓國人을 차별되어지고 소외되어진 인간의 상징으로 묘사하고 있다. 『芽むしり 仔擊ち』에서는 한국인을 소외되어진 <異人>으로서, 또한 『叫び聲』에서는 억압되고 차별받는 <뿌리없는 풀>적인 상징으로서 쓰여지고 있으나 결국 大江의 작품에 등장하는 한국인은 <authentique>적 인간을 <異化>시키는 존재로써 형상화 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上記한 두개의 大江의 작품속에 나타난 한국인의 이미지는 소외되어진 인간상으로서 그려지고 있지만 大江는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일본인의 배타의식과 사회구조의 모순을 암묵적으로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후 일본 작가의 對韓國觀의 변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일본문학에 나타난 韓國像을 작가가 한정되기는 하였지만 시대의 흐름과 함께 고찰해본 후 재인식 되어진 것은 일본국내의 내부사정과 한일관계의 영향을 받아 일본문학에 있어서 한국상의 명암이 교차되었다는 것이다. 일본문학자들이 작품속에 그린 韓國像이 독자들의 對韓國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그들이 긍정적이고 객관적인 韓國像을 가진다는 것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놓여있는 오해나 편견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될것이다. 大江가 문학작품을 통하여 화해, 치유, 공생의 문제를 말했던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문학속의 韓國像에 대한 보다 심층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 남양에 관한 아시아 작가들의 문학적 재현과 그 주변 : 다카미 준(高見順), 함세덕, 하릴 D 우이자야(Haril.D.Widjaja)의 ‘푸푸탄(Puputan)’과 아시아

        박지후 고려대학교 대학원 2023 국내석사

        RANK : 247342

        南洋文学とは、 「日本語使用者」と「非日本語使用者」が「南洋地域との不断の接触·隣接関係を維持」する中で成立した文学である。 本稿が議論を通じて到達したこの定義は、 次のような点を規定する。 第一に、 南洋文学は日本の専有物ではない。 本稿以前の研究は南洋文学を「南太平洋上の島嶼国家を含め、今日東南アジア地域に関して日本人が日本語で書いた文芸」を意味する場合が多かった。 南洋という用語自体が近代期の日本で形成された認識論的空間概念であるため、 上記のような解釈はある程度論理的妥当性を持っていると言える。 しかし、 同時期の日本だけでなく、 朝鮮と東南アジア(本稿では重点的にインドネシア)にもそれなりの内在化された南洋言説が存在した。すなわち、 日本の南洋と朝鮮の南洋、 そしてインドネシアの南洋がそれぞれ異なる姿でテキスト化されたのだ。 これを考慮しながら、 本稿では「日本語使用者」と「非日本語使用者」に定義の主体を拡大した。 第二に、 南洋は単に日本という個別国家だけで成立可能な概念ではない。 南洋とは日本の観点から見た東南アジアおよび南太平洋上の島嶼国家であり、 この概念には日本と南洋という双方向が存在する。 これを朝鮮の場合に代入すると、 朝鮮の観点から見た東南アジアと南太平洋諸国になり、インドネシアの場合も同様である。したがって、そもそも南洋という用語は一方向ではなく双方向を含意しているのだ。したがって、 これらは単なる日本文学、 朝鮮文学、 インドネシア文学ではなくなる。 南洋という認識論的空間に対する各国の対応方式であるためだ。本稿の定義の中で「南洋地域との不断の接触」がこれに該当する文脈であり、 またこのような接触は今日も有効だという点で南洋文学は近代期に盛んで消えた時代物ではなくなる。 つまり、 現代まで南洋文学は続いているというのがまさに3番目である。 上記のような問題意識と正義に基づき、 本稿では日本と朝鮮、 そしてインドネシアにそれぞれ異なる姿で存在した南洋文学を比較した。重要な点は、 互いの影響と受容の中でも、 3国の時代に合わせて明確に異なる「南洋認識」を示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る。 これを証明するために本稿ではインドネシアの歴史「ププタン(Puputan)」に対する高見順と咸世徳、 そしてハリールDウイジャヤ(Haril.D.Widjaja)の文学的再現方式を比較した。 要すると、 高見は「ププタン」の歴史を再現し、密かに「大東亜共栄圏」の思想と酷似した論理を展開し、南陽と東洋を同一視した。一方、ハム·セドクとウイジャヤもまた「大東亜共栄圏」の理念の下で歴史「ププタン」を再現したが、前者は南洋を独立させて東洋と区分し、後者は南洋と東洋が最初から異なる空間であることを主張した。 このような一つの歴史に対する彼らの認識の違いは、 すなわち各国が南洋をどのような観点で理解しているかによる結果だ。 すなわち、 各自が考えた南洋が同じ歴史を全く違うように眺めることができる解釈学的枠組みとして適用されたのである。何よりも南洋認識は内側には必然的に東洋認識が前提になっているため、 これら南洋認識の把握はすなわち近代期3国の知識人たちが考えた東洋という抽象にもつながりうる。 本稿は、 高見と咸世徳、 そしてハリルDウイジャヤ個別作家の認識を根拠に、 当時各国が考えた南洋と東洋という普遍的認識に進む方法論を採択した。 このような方式はあくまでも作家たちの個別認識はすなわち時代認識から大きくかけ離れていないという前提に基づいているが、 個別がすなわち普遍を担保するとは言えない。 しかし本稿が行った個別作家の南洋認識比較とこれにともなう解釈は、これまで一国文学史中心的だった研究慣行から脱皮し、 南洋研究が比較文学的方法論で行われなければならない理論的·実践的先行研究として作用するだろう。 남양문학이란, ‘일본어 사용자’와 ‘비일본어 사용자’가 ‘남양 지역과의 부단한 접촉·인접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성립한 문학이다. 본고가 논의를 통해 도달한 이 정의는 다음과 같은 점을 규정한다. 첫째, 남양문학은 일본의 전유물이 아니다. 본고 이전의 연구들은 남양문학을 ‘남태평양 상의 도서(島嶼) 국가들을 포함하여 오늘날 동남아시아 지역에 관해 일본인이 일본어로 쓴 문예’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다. 남양이란 용어 자체가 근대기 일본에서 형성된 인식론적 공간 개념이기 때문에, 위와 같은 해석은 어느 정도 논리적 타당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기 일본뿐만 아니라 조선과 동남아시아(본고에서는 중점적으로 인도네시아)에도 그들 나름으로 내재화된 남양 언설이 존재하였다. 즉, 일본의 남양과 조선의 남양,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남양이 각각 서로 다른 모습으로 텍스트화 된 것이다. 이를 고려하여 본고는 ‘일본어 사용자’와 ‘비일본어 사용자’로 정의 속 주체를 확장하였다. 둘째, 남양은 비단 일본이라는 개별국가만으로 성립 가능한 개념이 아니다. 남양이란 일본의 관점에서 본 동남아시아 및 남태평상 상의 도서 국가들이며, 이 개념에는 일본과 남양이라는 양방향이 존재한다. 이를 조선의 경우에 대입하며 조선의 관점에서 본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국가들이 되고, 인도네시아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남양이란 용어는 일방향이 아니라 양방향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단순한 일본문학, 조선문학, 인도네시아문학이 아니게 된다. 남양문학은 남양이라는 인식론적 공간에 대한 각 나라의 대응방식이기 때문이다. 본고의 정의 중 ‘남양 지역과의 부단한 접촉’이 이에 해당하는 문맥이며, 또한 이러한 접촉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점에서 남양문학은 근대기에 성행하고 사라진 시대물이 아니게 된다. 즉, 현대까지 남양문학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바로 세 번째이다. 위와 같은 문제의식과 정의에 입각하여 본고는 일본과 조선, 그리고 인도네시아에 각기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였던 남양문학들을 비교하였다. 중요한 점은, 이들 문학은 서로 간의 영향과 수용 속에서도 세 나라의 시대에 맞춰 명확히 다른 ‘남양인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본고는 인도네시아 역사 ‘푸푸탄(Puputan)’에 대한 다카미 준(高見順)과 함세덕, 그리고 하릴 D 우이자야(Haril.D.Widjaja)의 문학적 재현 방식을 비교하였다. 요컨대, 다카미는 ‘푸푸탄’ 역사를 재현하며 은연 중 ‘대동아공영권’의 사상과 흡사한 논리를 펼치면서 남양과 동양을 동일시하였다. 한편 함세덕과 우이자야 또한 ‘대동아공영권’의 이념 하에서 역사 ‘푸푸탄’을 재현하였지만, 전자는 남양을 독립시켜 동양과 구분하였고, 후자는 남양과 동양이 처음부터 서로 다른 공간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하나의 역사에 대한 그들의 인식차는, 곧 각 나라가 남양을 어떠한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는 가에 따른 결과이다. 즉, 각자가 생각한 남양이 하나의 역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해석학적 틀로서 적용한 것이다. 무엇보다 남양 인식은 속에는 필연적으로 동양 인식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남양 인식의 파악은 곧 근대기 세 나라 지식인들이 생각한 동양이라는 추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본고는 다카미와 함세덕 그리고 우이자야하는 개별작가의 인식을 근거삼아 당시 각 나라가 생각한 남양과 동양이라는 보편적 인식으로 나아가는 방법론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어디까지나 작가들의 개별인식은 곧 시대인식에서 크게 동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지만, 개별이 곧 보편을 담보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고가 행한 개별 작가들의 남양 인식 비교와 이에 따른 해석은, 지금까지 일국문학사 중심적이었던 연구 관행을 탈피하여, 남양연구가 비교문학적 방법론에서 행해져야 하는 이론적·실천적 선행 연구로서 작용할 것이다.

      • 日本近代文學と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

        박유하 [早稻田大學] 2003 해외박사

        RANK : 247327

        第一部 漱石文學と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 序 近代·文學·ナショナル アイデンティティ 世界各地で民族紛爭がひましに激しくなる中、最近のナショナリズム批判は十分な說得力をもたず、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自體の問題を明らかにすることが必要と思われる。アイデンティティの多樣性·歷史性はすでに指摘されているが、管見のかぎり、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が志向するものを分析しての批判はいまのところない。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を支える中心的役割を擔ったのは、文化の中でも「文學」であり、「近代日本」について考えるとき「文學」とのかかわりを考えることは重要と思われる。近代日本を代表する作家、漱石についての批判はポストコロニアリズム批評を中心に始まっているが、まだ漱石テクストの全容は充分に分析されてはいない。本稿は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を視座に漱石文學やその他のテクストを論じることで「漱石」にとどまらない、すなわち「日本」にとどまらない「近代」の問題を明らかにすることを目指している。本稿が最終的に目指すのは、二十世紀の問題点を見ることに基づいての、未來の望ましい共同體のあり方の模索である。 第一章 別れる理由-漱石のロンドンテクストが語るもの 漱石が始めて公にした文章である「倫敦消息」や渡航·イギリス滯在中の日記や書簡からは「西洋」=「文明」に對する漱石のアンビバレントな姿勢が浮かび上がってくる。 漱石は目にする「西洋」を常に數量化し、日本との比較において優劣をつける傾向を見せていて、發展至上主義的進化論的價値觀を사かせている。その時の漱石の劣等感は、西歐によるアジア差別的認識を內面化したものであった。漱石は日本という主體が希薄化することを恐れ、西洋に「追い付」き、西洋を「敬服」させたいという欲望をもつようになる。漱石が陷った「黃色い」という自己認識はイギリスにおいて始めて作られたものであり、それは、他者との出會いこそが「自己」確定のきかっけとなった「近代」という時代に漱石がいたことを示す。漱石の警戒意識は强い自己尊大意識と他者に對する意味解釋の過剩ゆえのことだったが、「自己」確立への强い欲望を持つようになった漱石は以後、「西洋」に「文學」で對抗することを考える。漱石テクストに繰り返し西洋=文明批判が登場するゆえんである。 第二章 文明觀と擬似植民地的恐怖 漱石にとって「開化」とは集合意識の頂点を示すものだった。漱石は決して「開化」を否定してはおらず、むしろ「開化」のための競爭は肯定的に捕らえられていた。ただし、その「開化」は漱石には「外發的」「不自然」なものにしか見えなかったが、それは「開化」を西洋による「侵食」と考える認識があったためである。そのような意識は西洋の開化こそが「自然」なものでその分强いとする思考に基づいていたが、そこには「開化」―「文明」なるものに對する漱石の誤解と過剩な主體意識があった。自己消失にたいする<擬似植民地的恐怖>は「空虛」という價想の感情を呼びかけ、「神經衰弱」を當然視する。しかし、制度や日常における西洋の文化的「侵食」を恐れる漱石の恐怖は、異文化の受容のあり方に對する誤解から生じたものだった。 漱石がそこでとった戰略は周知のように「自己本位」で、それを支えたのは日本の「特殊性」をもってすれば太刀打ちできるという考えであった。漱石が日本における西洋風樣式の定着に否定的だったのは師ケ―ベルの影響が大きいと考えられるが、ケ―ベルの憂慮は、充足されないオリエンタリズムを基盤にしている。そのような言說を受け入れさせたのはナショナリズムであり、そこにはオリエンタリズムとナショナリズムの共犯關係を見ることができる。漱石の「恐怖」は日露戰爭の勝利をきっかけに「輕蔑」に變り、「誇り」への欲望となる。しかし、漱石が夢想した「日本」の固有性とは、日本という共同體がその構成員に强制し、結果として慣れさせた規範のことにすぎない。何よりもそこには一樣な「純粹」幻想があるが、漱石という人物と文學自體が、英語と日本語で綴られたノ―トのあり樣が語っているように、ハイブリッドな存在だったのである。 第三章 「西洋」のおみやげ―「現代日本の開化」と「私の個人主義」 「現代日本の開化」は、すでに第二章で確認した、漱石の開化觀、西洋への警戒意識、「日本」という一樣の集合意識の存在を前提とした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への信賴、異文化受容にたいする誤解を改めて確認させてくれる。「西洋」を强いものと考える恐怖にもとづく、「强く」なることへのこだわりは、漱石の<强者主義>を露にしている。そのような擬似植民地的恐怖が、强者の「侵略」自體にたいする警戒の聲とは似て非なるものだったのは、したがって平和を求める倫理的呼びかけでなかったのは、のちにみるように日本が實際に「强者」になってアジアの「侵略」に乘り出したときの漱石の姿勢と發言が現している。 「私の個人主義」でも、すでに見たように「國民」的感受性の存在が前提となっているが、「國家」共同體の感受性が一樣なものでありえないにもかかわらず、漱石は自己の感受性に合う俳句的感受性を「日本」として表象している。たとえ「日本」獨自のものがあるとしても、「源氏物語」や「歌舞伎」の世界など、「俳句」の世界と違った「日本」があることがそこでは自覺されていない。漱石の「自己本位」とは文化帝國主義を批判するものというよりは、擬似植民地的恐怖を基に國民に「警戒」(攻擊も)を語りかけるナショナリズムの言說に酷似している。 漱石の個人主義は國家主義を容認するものだった。そしてそこでの「個人」とは「人格を積んだ」エリ―トであって、漱石の個人主義は實は「平等」をみとめていない。「文明」=「敎育」度の高い男性エリ―トたちの優位を認め、「國家」の中心に位置させるその思想は、外部にたいしても例外ではなく、漱石が、日本のアジア侵略を容認したのはその個人主義思想自體のもつ限界によるものだったと言える。 もともと漱石は西洋=個人主義=自由=不安、東洋=關係優先=秩序=心の安定、というような졸組みで東洋と西洋を考えていて、西洋を否定していた。西洋に對抗すべく「個性」の發達も重視する一方で、自由をもとめる個人主義の發達は趣向の多樣さを招いて「國民」としての共通な趣向を失うことになると考えた。人人が「ばらばら」になるとの嘆きはそのことにほかならず、そのような狀態は「永久な文學」の危機を招くとも考えていた。そこで漱石は「國家」の「調整」(介入)を緊急なものとまでするのである。漱石の個人主義は、いわば秩序主義·國家主義的個人主義だったのである。漱石にとって「個人」はしょせん「國民」の「集合意識」の永久な存續のために存在するものであり、「個性」の發達を主張したのも最終的には「日本」という「全體」の「特殊」性を發現するためだった。そのために「强く」なることを志向する漱石の「個人主義」には外部とのコミュニケ―ションの可能性は見えず、思想史的には全體主義的個人主義というべきものである。漱石の「則天去私」は秩序への順應を語るものであり、漱石の「個人主義」はそれと對峙するのではなく、むしろつながるものだったのである。 第四章 「東洋」への回歸―『草枕』 『草枕』は漱石の西洋にたいする對抗意識をもっとも顯著に表しているテクストである。「美しい感じ」を志向する「俳句的小說」『草枕』のような試みは、日本はむろん「西洋にもない」ものだとしながら、漱石はそれが「世界」に拮抗すべきテクストを目指したものであることをはっきりと言明している。そして『草枕』はその內容においても<反西洋>を志向していて、文學をはじめ西洋のものがことごとく批判される。その批判の頂点におかれたのがミレ―の繪だったのであり、畵工がそれとは違った畵―美を志向するのも全體的な反西洋の構圖の中でのことである。 『草枕』の舞台が田舍の溫泉だったのはまずは反都會志向ゆえのことだったが、それが畵家にとって「非人情」の場所として選ばれたのもそこがもっとも「東洋」的な場所と考えられたからである。畵工が溫泉で「昔」を夢想するのはプリミティブへの欲望にほかならず、最後に「憐れ」という傳統美が用意されていたのは必然的な展開である。「昔」は畵工にとってもっとも「非西洋」的な時間であり、そこでミレ―の畵(西洋)を思い起こすのは、西洋への對抗意識を背景においた「自己本位」的發想であった。 ところが溫泉とは、「文明」の利器である「汽車」のおかげで都會の人が出かけていく場所だったという点で、畵工の汽車―文明批判は矛盾している。そしてそこで强調されていた「個性」意識も實は「近代」-「文明」―「西洋」のおくりものである。 その「東洋」的―傳統的場所で、女は眺められる存在となり、男は美の創造者となる。それは、「文明」人である「男」が、「自然」で「野蠻」な存在としての「女」を、「憐れ」という傳統美の中に封じ입めることでもあった。そしてそれは、「文明化」しつつある恐怖の中で「傳統」を確認·保存しておきたいとする、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をめぐる男の欲望がさせることだった。 第五章 排除への欲望―『坊っちゃん』 『草枕』では「田舍」は聖化されていて人人のプリミティブな欲望を發言させる場となっていたが、『坊つちやん』はすでに指摘されているように「田舍」を差別する話である。『坊つちやん』には赴任地を絶えず東京と比較し貶めようとする都會主義―文明主義が見られ、それは「坊つちやん」自身が一方では赤シャツの西歐追隨主義を批判していることと矛盾している。そして田舍への差別意識は、「日本」の中の「野蠻」を制壓し·排除しようとする、「西洋」=他者の視線を意識してのことだった。當時は「田舍」と「都會」の區分はまだ定着しておらず、『坊つちやん』にはいわば後に確定されるであろう地域間の對立が書かれている。そこでは未知の他者への恐怖が否定的表象を絶えず作りだし、根源·本質主義を助長する。「田舍」が「不淨」の地とされた背景には異質なものを絶えずひとつの表象の中に圍い입もうとする選別と排除の運動があり、それはみんなが「平等」になったはずの時代における、<近代>國民統合の新たな動きであった。淸と「坊つちやん」の關係は從來の從僕關係であり、「坊つちやん」の淸への感情には、もはや無條件的な支配を期待できなくなった元「旗本」のひそかな夢が隱されている。淸もまた、忠實に忠誠を示すことで「涉り者」となる境遇を避け、定着者としての安定した立場を保とうとする欲望を持っている。『坊つちやん』は、都會と田舍の、相互的恐怖と、排除のための圍い입みへの欲望の物語である。 第六章 アジアという他者性―『滿韓ところべ』 『坊つちやん』における問題点―都會·文明中心主義とそれにともなう差別意識は、植民地になりつつあった場所である韓國と滿州を旅行した時の紀行文 『滿韓ところべ』にもっとも明確に表れている。 漱石が中國に對して殘している肯定的な發言は、慣れ親しんだ古い「文化」に關するものである。現實の「人間」である「汚な」い中國人·朝鮮人に對しては漱石は閉口し、異質な習慣に反感を示す。彼らに對する視線は抽象的だが、支配下にある人間に對しては好意的であり、その關係を本質化する發言をしている。 「開化」されて「日本」化されている地域に對する見方も肯定的で、それは漱石の發展至上主義·文明主義を示す。また、「日本」のために「個人」を犧牲にしていた植民地開拓者たちに對して「賴もしい日本人」とするような、國家主義的發想も見せている。漱石にとって滿州進出は「男子會心の事業」だったのである。そしてその「事業」が作り出した風景を「純粹な日本の開化」としているように、日本が主導する「開化」に對しては肯定的であった。 漱石は作品の中でも男性の植民地における「冒險」精神を觸發するような發言を揷入していて、日本の植民地政策を批判していたとすることはできない。 第七章 「インデペンデント」の陷穽 漱石がアジアの別の人人を規定した「汚い」という言葉は、感覺的なものでありながら、「淸潔」度で文明度を測る帝國主義的視線という点で帝國主義の先端に立っていた南滿州鐵道會社の人たちと變らない立場でのものだった。日本においても「衛生」は文明開化の言說のひとつであり、早くから福澤諭吉や後藤新平も强調した、「近代」國家の指標でもあって、そのような感覺は歷史的·制度的なものだったのである。 また漱石は「戰爭」自體に必ずしも反對ではなく、その「個人主義」が國家主義と必ずしも對立するものでないことを示している。日露戰爭での勝利を喜んだのもそのような文脈のなかでのことで、漱石は武力や經濟においての成功が文化の上での成功を保證するものと考えていた。それが「日本」の價値を高めるものと考えていたのである。漱石は、自らの擴張や勝つことを喜ぶナショナリズムから自由ではなかった。主體確定へ乘り出した「近代」の「東洋」の知識人としてはむしろ當然のことでもあったのである。 第八章 跳躍と懷疑―『それから』 漱石の個人主義がその可能性を見せていたテクストは『それから』である。代助は、自分の美にたいする關心が深いが、それは言われてきたようにナルシスト的な次元のものというより「男」の言說に對抗してのものと見るべきである。代助は、「度胸」「膽力」こそが「男」の持つべきものとする父の價値觀に抵抗し、「舊時代のもの」として批判する。そして得は「仕事」や「成功」や「國家」の重要性を强調するのだが、それは「男」=「國家」の言說にほかならず、仕事をしていない代助は「國家」の期待の地平に應えていないことで、富國强兵を目指す近代國家の言說に對抗している。 「因緣」を重視した結婚を勸めようとする父に對して「自分で존えた因緣」を重視する代助の姿勢は、共同體の規範より自己を優先視する個人主義に立脚してのものである。そして、父親が重視する「義理」「義俠心」という共同體の規範を重視して三千代を平岡に讓った過去が代助にはあったのだが、代助はそのことの抑壓性に氣づくようになっている。父に抵抗することは傳統的價値觀を否定することであるだけでなく、「男」の價値觀、さらには「國家」の秩序に抵抗することだった。代助は「自己」の欲望を「生活欲」と呼び、三千代を取り返すことで傳統的な「道義欲」への反亂を試みる。 しかし、代助は「生活欲」を重視する個人主義が「我」の擴充を呼ぶ「西洋」からのものと考えていて、完全にその呪縛から解き放たれているわけではない。そこでテクストの末尾には、共同體の秩序を壞してしまうことへの懷疑―不安が、色濃くあらわれることになるのである。そして實は作者漱石は制度を逸脫する變を社會秩序を破壞するものとみなしていて、肯定的に見てはいなかった。 第九章 子供不在の意味―『門』 『門』の夫婦の間に龜裂が入っていることは旣に指摘濟みだが、それは宗助の「子供」と「成功」への欲望ゆえのものである。宗助は自分の家を「缺如」の感覺でとらえ、そのような感覺はお米にも罪の意識を持たせている。二人とも、「子供」がいてこそ完全な「家族」とする「近代家族」幻想の中にいたのである。宗助が神經衰弱にかかっているのも自分の結婚に滿足していない證左であり、宗助はお米との過去をあやまちとして認識している。「腰弁」としての現在の姿もお米とのことがなければなかったものと考え、坂井からは現在の自分を、安之介からはありえた過去の「正しい」結婚の姿を見ている。 お米もまた、妻としての義務である子供の生産を終えその子供が「成功」することで母としての權利を滿喫している叔母の姿から、「幸せ」を見ている。弟との同居がお米にとって苦しいのは、すでにそこに「近代家族」認識が入りこんでいたからである。子供のいないお米にとっては、弟の存在は將來の安定した地位までをも奪いかねない存在でもあった。 お米の感性は、「産む性」としての女性規定が强まった近代國民國家のものである。將來の「國家」の力になるはずの「子供」を設けない家庭は「近代家族」ではありえず、宗助とお米は「近代家族」を作れない焦燥感でそれぞれ神經衰弱とヒステリ―を病んでいる。 子供がいることを當然とする女=産む性の規定は異性愛主義に基づくものでもあり、異性愛主義に基づく一夫一婦制は婚外の交涉を禁止する。それは家父長制下の男性が自らの血緣の混亂を防ごうとしたためと考えられるが、姦通を禁じ、罪惡視する一婦一夫制は、家父長制的近代國民國家の<秩序>を志向する。姦通した男女を後悔させ、不幸な姿として描くことで『門』は姦通を斷罪しているのであり、『それから』で見られた懷疑の行方を示していたと言える。 第十章 漱石とショ―ペンハウア― 『門』における「子供」と結婚の關係に關する考えにおいて漱石はショ-ペンハウア-の影響を受けていると思われる。漱石とショ-ペンハウア-の關係はあまり觸れられてこなかったが、漱石はショ-ペンハウア-をよく吸收していた。 漱石がショ―ペンハウア-に大きな關心を持っていたことは藏書への書き입み調査から知ることができる。東北大學に所藏されている二冊の著書には漱石がショ-ペンハウア-を深く讀んだ痕跡が見られる。具體的には文體に對する考え、내いと過去の連想についての言及、「子供」を種族保存のためのものと考える變愛觀などにおいてだが、「子供」を設けられなかった結婚を不幸なものとする考えなどにおいても漱石はショ-ペンハウア-に共感している。そして、それは第三章で述べたような漱石の民族意識や個と全體の相關關係の理解にも深いかかわりがあるものと思われる。 なお、女の愛は性的關係を結んだあとにむしろ高まるものとすること、人間は利己的なものだとすること、人間は噓をつくものだとする認識などにおいて漱石テクストはショ-ペンハウア-に似通っている。さらに、「正直さ」にかける「技巧」者としての女性觀、「知」の男性觀なども漱石の考えはショ-ペンハウア-から近いところにあり、少なからぬ影響を受けていると考えられるのである。 第十一章 恐怖と不信―『行人』 『行人』は、心を支配できない女に恐れをいだき、他者化し、その結果として關係を結べず孤獨に陷った男の物語である。一郞は妻の愛を不變、あるいはますます高まるべきものとしているが、お直からその確信を得られず、女は「信賴」できないものとする。 それは女の「心」をも所有したい支配の欲望の發露だが、同時に、女という種を、その氣持ちが把握できない別種のものと考える他者化の過程でもある。 一郞にとっては自己規制しない自然人としての女こそが好感の對象であり、それは女から自己表現の能力をうばおうとする欲望である。しかし、心を사こうとする一郞に對してますます武裝し、自己の中に深く沈潛していくお直の「强」さは、二郞にとっても一郞にとっても「恐ろしい」恐怖の對象である。二人にとって、理性をともなった忍耐强い女はミソジニ―の對象でしかなかったのである。 それに反して一郞は二郞やHには無條件の信賴をよせており、「血緣」と「同性」を優先視する男共同體を作っている。一郞の孤獨地獄は他者に對する警戒と不信によるものでしかなく、その貞操試驗は女にたいする不信への欲望とさえ言えるだろう。 第十二章 『行人』と沼波武夫『始めて確信し得たる全實在』 『行人』は、「塵勞」との間に構成の破綻がいわれてきたが、その背後には一冊の書物があったと思われる。『行人』が中斷されていた大正二年の八月の終わりごろに漱石は沼波武夫から本を贈られていて、深い共感を示す返事を送っている。「孤立」への共感とそのことを考えることの重要さについてであった。この本は現在國立國會圖書館に所藏されていて、「自由講座」と稱する講演會での六回講演をまとめたものであることが確認できる。內容は「宇宙の意味」を知ろうとする、「眞」の探求であった。そして、マホメッドの逸話、不安と神經衰弱の問題、科學、實行、思考の過剩、意志、熱中、發狂、自殺など、「塵勞」のキ―ワ―ドといっていい言葉が使われている。 漱石は「歸つてから」で『行人』を終わらせるつもりでいたが、この本を讀んで構成を變えたものと考えられる。沼波が說く「實在」の問題には、西田幾多郞の純粹經驗論との關係も見られ、必ずしも獨自なものではなく、漱石も沼波も精神主義が台頭した明治三十年代という時代の流れの中に位置付けられるべきでありながら、沼波の「塵勞」の成立への影響は大きかったものと思われる。しかし「塵勞」の揷入は、『行人』における個人の苦惱を一般化し、男女の問題を人間の問題として一般化してしまう遠因となった。 第十三章 個人主義の破綻――『心』 『心』で、先生は「現代」を批判している。それは「自由と獨立と己に充ちて」いるという理由からであり、それは先生による「明治」の差異化の試みだった。「明治」という時代は、「倫理」的時代として價値化され、それに殉死した自らや乃木の死も「倫理的」ものとされる。 Kの死の直接の因は、變の氣持ちを先生が告白できなかったことにあるが、それは「變愛」に觸れることを「精神」向上に反する行爲とみなす男性共同體のイデオロギ―ゆえのことであった。彼らにとって「女」は氣になる存在でありながら表象を禁じられた、意識下に葬られるべき存在である。後に先生が內面の告白の對象を妻にではなく、男である「私」に求めるのもそのためである。先生にとって「女」は信賴に堪えず、「男」の深い苦惱を理解してもらえるような存在ではない。男たちの「高尙」な「精神」の爭鬪から女は排除されていたのである。そういう意味で「心」とはあくまでも「男」の心である。「若い」「私」が選擇されたもうひとつの理由は「次世代」を必要とする民族·國家的發想にあった。 個の身體性より、公の觀念性を優先することが「明治の精神」だった。そこでは自己―「己」を優先してはならない。早くに保田與重郞は「明治の精神」を「尊王」のこころとし、「西洋化」が「個人主義」―利己主義を蔓延させてそれをゆがめたとした。漱石の「現代」批判も同樣の文脈にある。當時は乃木の殉死が批判されてもいて、實は「明治」は一樣ではなかったが、その中から「國家」への求心性を大きくクロ―ズアップしたのが漱石の『心』だった。 『心』が大きく評價されたのは明治百周年となる一九六○年代後半においてのことで、それは「明治」を新たに蘇らせる、明治の記憶化作業であり、オリンピック開催を無事濟ませ經濟大國へと進入した、戰後日本の新たな主體確認の作業でもあった。 大正期、日本は世界にほこるべき「文豪」を必要とし、それにふさわしい人物として選ばれたのが「西洋」「文明」を批判して「自己本位」を强調していた漱石だった。それは、武力面だけでなく精神面でも先進國であることを證明してくれることを願ってのことだった。今でも「明治の精神」を語る『心』は、「日本」という主體確認の欲望を滿たしてくれるテクストとして利用されている。そこで言われる「公」の精神が現代の自由主義史觀と酷似しているだけに漱石批判は必要なのである。 第二部 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の諸問題 第十四章 「國醫」鷗外の選擇―『舞姬』 『舞姬』は日本の男が西洋の女を棄てる、日本近代初めての物語である。豊太郞にとってドイツはまず「西洋」であり、その西洋は豊太郞にとって驚くほどに美しい場所だったが、そのことに心を奪われまいと自制する。「勇氣」をもたない豊太郞がエリスに接近できたのは、エリスが「泣いて」いる「少女」であるという、自分より「弱い」立場にいたからである。そこでは自らの「黃なる面」を意識させる負としての「東洋」は忘れていられたのである。エリスは貧しく、十分な敎育を受けておらず、さらに「訛」を使うということにおいて、標準語を使う東洋のエリ―ト豊太郞にくらべて劣る位置にいる。それは「東洋」の靑年と「西洋」の少女を「師弟」關係にすることで「西洋」と「東洋」の位置關係を逆轉させていた。 豊太郞にとってエリスとの生活は「個」の生活であり、職場を失ったのは仕事や國家という「公」から身を引いたことでもあったが、相澤は「仕事」に生きるべき「男」性としての生き方を强調することで成功に結びつかない「愛」の排除にとりかかる。そこでは男同士の約束が女との約束より優位におかれるべきものとされていた。エリスを棄てることが可能だったのは「狂人」となったからだが、それは「狂人」の排除という近代國家プロジェックトに加擔する行爲であり、ドイツという國家にとって周邊化されていた人物だったエリスが變人として選ばれたのは必然だった。それは國家によって統御される「個」の悲慘な姿でもある。豊太郞がエリスを棄てたのは個人的な功名心よりは「日本」という國家に有用な人物になろうとする欲望ゆえのことだったが、それはあらゆる價値の上に「故鄕」や「國家」がおかれるべき言說が台頭した時代を背景においていた。『舞姬』は、一度「西洋」の女を棄てることで確立されるべき「東洋」の國家的男性自我の物語である。そして豊太郞の物語を明治知識人の仕方なき選擇として受け取った近代日本の『舞姬』受容は、鷗外が提示した國家意識を內面化する過程であった。女の妊娠した身體を男の「義理」-精神より輕視したことは、衛生學を專攻していて「國家」の「病」を治し强くしていくことを考えていた鷗外において「個」の身體的健康は重視されなかったということを示す。「近代的自我」とは「個」のレベルにおいてではなく、むしろ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のレベルにおいて發見されていたのであり、それは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以外の自我のあり方を抑壓する過程でもあった。 第十五章 柳宗悅と近代韓國の自己構築について 白樺派の同人でもあった柳宗悅は「朝鮮」に關して、當時の日本の知識人としてはまれに見る好意的な言葉を殘している。柳は軍國主義を批判し、日本が植民地に對して「愛」の姿勢で接すべきだと主張し、その手段として「特殊性」に注目するが、それは最終的には「一致」―「同化」を目指すものだった。その「一致」を可能とするために抑壓的な姿勢でない、「愛」に基づいた柔和政策を唱えていたのである。それは「力」ではなく「情」の日本像、それまでの「政治」的日本像のかわりに「文化」-芸術の日本像を構築しようとすることだった。そのような姿勢は「陶器」に淚の訴えや「女」を見出すような本質主義的なものへとつながっていく。 柳は朝鮮の「特質」を見つけようとし、そのような本質主義は朝鮮だけでなく中國や日本をも對象にしていた。朝鮮に「近代以前」の野蠻な「自然」をみようとする試みは文明=男=日本という圖式作りの過程でもあり、そこにはお互いを參照しながら自己を構築していった<近代>の姿がある。それは「同化」を目指しながらも「差異」を殘すことで「差別」の根據を作るものであった。 柳は同樣のことを台灣、沖繩、アイヌを對象にしてもしていた。政治的にほろびても、文化的に「永遠」に生きるという錯覺をもたらせて抵抗をふせごうとしたのである。 日本の「民芸」を發見したエリ-トたちは「民衆」を價値化することで「近代」國家統合に寄與したが、そこにはその價値を見出す目をもつ「文明人」としての自己意識があった。それは、「西洋」-文明化に對抗しうる「固有」で「太古」的な美を發見しようとするプリミティブへの欲望に支えられており、すでに西洋化してしまった都會(日本)の代わりに彼らにその部分を殘しておくことで「西洋」に對抗し得る「東洋」という言說をつくりだすことでもあった。 一方、近代韓國は柳の自己像を內面化し、次に力のある男性美を具える自己を構築することで柳のやり方を模倣した。そこに<近代>に普遍的な問題があったのである。 第十六章 <在日>作家金鶴泳の沈默 金鶴泳の「凍える口」には、日本人と朝鮮人の兩方による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の强制が書かれている。たとえば日本人の下宿の大家は朝鮮人學生催に民族的コンプレックスがないことを注意し、朝鮮人友人は常に政治的であれと要求する。それは、作家の實際の生活上でもあったことで、朝鮮の批評家は金に傳統的價値觀がついていないと批判し、日本人批評家は金に朝鮮人問題をもっと扱えと要求していた。 「凍える口」の主人公催はそのような要求に朝鮮のことを勉强することでかろうじて應える。しかしその過程が見せているのは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なるものが「學習」によって身につくような、<習得>するものであること、同時に個的な惱みを抱えている催にはそのような過程が憂鬱なものでしか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そこには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以外の「個」として存在する場はない。 日本人による差別は、そのことに言及しない「沈默」でもってなされる場合が多く、沈默が破られる場合は友情が成立する模樣を金は書いている。その人の屬性に觸れないことはその事柄を「劣性」として認識していることとパラレルであり、あまたの匿名の差別に加擔することで差別を顯在化することである。しかし同樣の暴力を、催もまた、自分よりひどい「吃音」の日本人友人を相手に動いている。金のテクストは、「沈默」を破ることこそ個を救いえる道であることを示唆している。 「鑿」には公共空間に自分の居場所を見つけられない靑年が描かれ、日本という空間が自分を「現せる」場所としての公共空間になっていないことが示されている。公共圈とは、聲を出していい場所なのだが、そういう場所が確立されてなかったのである。そういう意味で金のテクストにおける發聲練習は、自己の解放の運動でもある。「在日」という言葉は、彼らがいる場所があくまでも臨時の場所であることを示す。 「在日」が「在日」として認識されたのが一九六0年代の後半だったのは、日本が新たな自己構築をすべき時期だったからで、內部の他者を區別しておく必要があったからである。居場所を得られない「在日」は、自分を「弱い」ものと認識し、自殺の衝動に驅られるがそこには弱いものの生きる權利を見ようとしない强者志向主義がある。 近代國家は、自らの存續のために「强い」人間を育てようとし、弱い人間の居場所をつくろうとはしなかった。そして、弱いものの存在の意義を敎えられなかった弱い者たちは自分より弱い者、あるいは自分自身を對象に加害者となる暴力性を見せている。金もまたその犧牲者である。 第十七章 植民地末期韓國文學に見る「日本」のイメ―ジ 「日本人」になることを强制されていた近代韓國の植民地末期韓國文學には、彼らにとって「日本」とは何だったのかということと、それを習得すべく努力する人人の姿が描かれている。 たとえば李光洙にとって「日本」とは規則正しい生活であり、日常生活における靜肅さであり、宮城遙拜に代表される「國民生活」の秩序と規律の世界だった。大人たちには「日本」「國民」としての生活はすぐに習得できるものでなかったが、子供たちはたやすく、早くに習得している。 韓國の戰後最大の詩人と言われている徐ジョンジュの短編には妻に死なれた男と息子、そして母親が登場するが、そこでも日本は「秩序的世界」として表象され、それをいち早く子供は內面化している。「日本人」とは、「日本語」の使用と日本という共同體が必要としていた「規範」を身につけることで誰にでも可能なものだったのである。 韓國にとってはすべてのことに「熱心」と「誠」を盡くすことが「日本」だったが、それは「天皇」の存在を意識することでもあった。「日本」精神とは、まさに尊皇の精神だったのである。それは具體的には、時間を無태遣いしない勤勉さであり、「個」の所有を否定してすべてのものを天皇のものと考えることだった。それは家族までにも及び、「兄」も「夫」も「息子」も天皇のものと考えられていた。「尊王精神」=日本精神とは、「個」の所有を放棄する精神であり「全體」=「公」を優先する精神でもあったのである。個人の仕事さえも國家のための仕事と考えるのが、「日本」であり、李光洙は、それに反することを(西洋からの)「個人主義」「自由主義」といって攻擊している。 完璧な「日本人」であることを證明するためには自己存在までも天皇に歸屬すべきものと考え、最終的に天皇のために命を捧げうることが必要だった。「內地」と同樣、ここでも、「日本」というのは「個」を殺すことだったのである。ただしそれは、「全體」の中で生まれ變わることと考えられていた。最終的にはむろん戰爭に出て命を捧げることだった。 「秩序」と「規律」は天皇を求心点とするものだったが、飼いならされてない、「野蠻」な韓國としては「近代」を取り入れるためにも秩序と規律の內面化は必要と思われていた。儒敎的價値觀によって「忠」より「孝」のほうを優先視していた韓國人たちは、天皇のために命をささげることの矛盾を「忠」=「大孝」と考えることで解決し、「忠孝の一致」を果たした。すべての懷疑を意識の底に葬りさり隱蔽することで「日本」人になろうとしたのである。日本の母親は息子を戰場に送りながらも淚を見せないことでその自己規制が稱揚され、そのような「個」の感情の抑制もまた「日本」と思われていた。韓國の「男」たちは、「命をささげる」ことを「男」にのみ與えられた特權と考えることで「女」の優位に立ち、先に、そして確實に「日本人」-「國民」になろうとした。それは、韓國の「男」たちが「女」を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において排除することで帝國主義と共謀していたことを示す。 第十八章 ハイブリディティとしての近代-ワシントン·ア―ビングと日本近代文學 ワシントン·ア―ビングの『スケッチ·ブック』は、明治時代、壓倒的な人氣と支持を得ていた。森田思軒や森鷗外の飜譯にはじまるその受容は、今日においてはほとんど忘れ去られているが、當時においてはア―ビングはアメリカを代表する作家として紹介されていたのである。 その受容は主に英語敎科書をとおした原語からの受容だったが、『スケッチ·ブック』は「文章」の手本とされ、日本語文脈の歐文化の一翼を擔ってもいたと考えられる。近代人の複雜な思考の表現には「西洋」の文體こそが合っていると主張されていた時代でもあってそれは肯定的に受け取られる側面もあった。やがて、「文章」が「文學」として價値化されていく中で『スケッチ·ブック』は「文學」を志す靑年たちの必携書のように扱われ、文學靑年たちは志向すべき「文體」や「文學」をア―ビングの『スケッチ·ブック』から見るようになる。繪畵技法としての「スケッチ」が、明治政府の美術敎育への盡力ととともに世間で流行していたことも『スケッチ·ブック』の壓倒的な支持の背景にあったと考えられる。 「近代」文學の「手本」を『スケッチ·ブック』にみいだし、歐文體化された文體で「近代文學」が書かれたことは、「日本」「近代文學」の歷史性、ハイブリッド性を語るものにほかならない。 第十九章 結びにかえて 漱石テクストは、「西洋」への對抗意識のもとに作られたものである。そのときに自覺された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への自覺は、「國家」の統合のために「秩序」を追求するものだったが、「秩序」志向の結果として、女や田舍や無敎育の大衆を排除している。漱石テクストの男たちは「女」にたいする不信·恐怖を隱さず、そのような傾向を支えたのは、狀況に應じて文明や女を相反する二つのレベルで表象する<近代國民國家的ご都合主義>であった。 漱石を「國民作家」にするのに決定的な役割をしたのは江藤淳である。江藤はそれまでの「人格者」のイメ―ジを「暗い漱石」に變えることで「文學的」な漱石にし、そのことは漱石の保守性を隱蔽した。同時に「己」にこだわることを「エゴイズム」として批判し、「超越的價値」に意味を與えることで漱石の「倫理性」を强調し、「國家のために書いた」作家としての漱石のあり方を强調したのである。 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は、「國民」の平等を幻想させるが、その中では「國民」たる資格の選別と排除が行なわれている。女性と同性愛者などのマイノリティと、敎育を受けられなかった人たちなどがその對象で、それは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の男性中心主義·異性愛主義·秩序主義を示す。それは外部にたいする自國の優越を保證する「誇り」を求め、「文化」=「文學」を求めさせた。しかし、特殊や固有を求める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は、「文化」と同時に「文明」をも求める矛盾を露わにするだけでなく、自國內において過酷な競爭主義·强者主義をまねいた。「强い」ことを追求する强者主義は、その終極において自己と他者を殺すことをも要求していたのである。しかし、そのことを隱蔽するために、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は、樣樣な位相において都合よく違う「自己」をつくりだしている。 移民と難民が增えつづけている現在と不確かな未來において求められるべき共同體のためにも、いま、ナショナル·アイデンティティやそれを支えてきた文化―文學を、みつめなおすことが必要なのではないか。そして、所屬するが從屬しない、固定した場にいるのではなく狀況に應じて常に移動しうるような、ポジションの移動が必要と思われるのである。

      • 北村透谷硏究 : 「楚囚之詩」·「蓬萊曲」·「宿魂鏡」を中心に

        이종환 中央大學 1993 해외박사

        RANK : 247327

        본고는 일본 명치20년대의 문학자인 북촌투곡의 작품세계에 관한 연구이다. 그는 시인, 평론 가, 자유민권운동가, 평화주의자로서, 그리고 [정치]에서 [문학]으로 전향한 최초의 작가로서알려져 있다. 그는 동시대의 모리오오가이, 坪內逍遙와 더불어 일본근대문학에 있어서의 그의 자못 크다고 평가되어지고 있다. 본고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져 있다. 透谷의 문학은 일반적읊섟�와 [실세계]라고 하는 양문학상으로 설명되어져 있다. [상]과 [실]은 서로가 모순. 대립의 기보다는 결 항성의 관계로서 전개되어지고 있으며, [상세계]지향성은 透谷사상의 정수인 [명](Inner Life)에 결정되어져 있다. [내부생명] [상세계], 이것은 인간 스스로 만드는 것이 오직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인간은 [순간의 명계](Inspiration)에 의해서 신과 교통할으며 이로인해 비로소 [상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透谷는 [연애]야 말로 인간이 자력[상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로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透谷의 [연애]는 육욕적. 물좀泳� 또는 남녀간의 단순한 정의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정신적인 차원인 것즉, 그 [연애]에는 透谷의 사회관, 국가관, 시대관, 역사관, 종교관 등이 포괄적으로 내재되어. 이에 졸자는 透谷문학의 접근을 그의 [연애]에 대한 고찰로부터 비롯하였다. 그 연구방법은 透생연구자인 도기수촌씨, 정종백도씨, 길전정일씨, 등의종래 설을 뒷받침으로하여 거기에다 졸응�부가하였다. 그 개요는 다음과 같다. 透谷의 시, 극시, 소설, 평론, 일기 중에서 특히{초인{봉래곡}, {숙귀경}에주목하여, 이들 작품 속에 있어서의 작가의 연애관. 그리고 이들 작품들으�종래의 학설과는 달리 일본전통문학작품인 {만세집}(육-1016)과 {남총리견팔견전}, 중국의 품 등에서 구한 점. 나아가서는 이러한 연구를 토대로 명치20년대에 있어서의 透谷문학의 위치엿じ㎢酉括�새로운 설을 지시하게 되었다.

      • 朱耀翰と日本近代詩

        양동국 東京大學 1997 해외박사

        RANK : 247327

        근년에 들어 우리 현대시의 비교문학적 연구는 일본을 중심으로 다각적으로고찰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서구시와 일본근대시의 중개자이며, 한국 현대시태동의 주역인 유학생들의 일본 문단내의 활동에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던 것 이 사실이다. 그 이유로 우선 미성숙된 문학 수업기의 일본어로 된 작품이라는 편견과, 그 이상으로 실제 작품을 발굴하는 것이 극히 곤란하였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들이 일본 시단에 발표한 작품을 직접 대해 보면, 충분히 미독할 가치가 있는 수준의 작품이 적지 않다. 특히 한국 현대시의 본격적인 도래를 알린 주요한의, 일본 문단내의 활약에는 적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1912년에 도일하여 명치학원 중등부와 제일고등학교(현 동경대학 교양학부, 1년 중퇴)에서 수학한 요한은 중등부 재학시절부터 『문예잡지』 『수재문단』 『문장세계』등, 당시 유수의 투고잡지에 시, 엣세이, 그리고 일본 전통시가인 하이꾸, 단카등을 발표한다. 또한 일본근대 자유시운동의 선구자인 가와지류코(川路柳虹)가 설립한 서광시사의 특별사우가 되어 동인시집 『반주』, 시전문지 『현대시가』의 동인이 되어 연이 어 시작품을 발표한다. 1919년 5월 상해에 망명하기까지 요한은 자유시 37편, 엣세이 1편, 하이쿠(俳句), 단카(短歌)등, 총 50여편의 시작품과 많은 단평을 일본어로 발표하였다. 본고는 상기한 것처럼 기존연구에서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새로운 시작품과신자료를 보충하여, 요한의 일본어에 의한 전작품의 정리 소개와 작가론적인 연구의 결락을 메우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또한 요한시의 특질과 관련지어 일본어로 씌여진 초기의 시작품과 후에 한국어로 발표된 작품과의 관련성에 주목하며, 문학성의 검증에 주안점을 두었다. 본 논문은 3장으로 되어있는데이하 간략하게 그 내용을 기술한다. 제1장에서는 요한의 일본문단 데뷔와 시인으로서의 성장과정을 『문예잡지 』 『문장세계』등에 가작으로 당선된 새로운 자료를 중심으로 천삭했다. 동시에 초기 일어시에 보이는 서구 근대시와의 영향문제와 전통회귀를 보이며 불놀이를 발표할 때까지의 행적과 문업을 고찰했다. 제2장에서는 일본근대시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검토했다. 특히 키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미키로후(三木露風), 하기하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郞)등과 의 영향관계를 천삭해 상당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요한의 시인으로서 성장과정과 한일근대문학의 관련양상을 여실히 엿보여 준다. 제3장에서는 처녀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중심으로 요한시의 특질과 한국현대시에서 요한시문학의 위치와 그 의의에 주안점을 두었다. 요한의 초기 일어시는 한국현대시의 태동 배경을 알려주며, 그가 주도한 시험적인 자유시 는 그후 한국현대시의 수준을 한층 높이는 촉매의 역할을 하였다. 그의 적지않은 일어시작품은 앞으로 더욱 심층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한일비교문학연구 와 그 교류에 크게 기여할 것임은 말할나위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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