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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바그리우스의 기도론 연구 : 오리게네스의 기도론과의 비교

        유은호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2019 국내박사

        RANK : 247807

        국문 초록 이 논문은 오리게네스와 에바그리우스의 기도론 비교 연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관상 기도의 신학적 원천을 밝히고 있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대표적인 기도 책인 오리게네스의 「기도」(Περὶ Εὐχῆς)와 에바그리우스의 「기도」(Περὶ Προσεὐχῆς)를 중심으로 연구했다. 이 연구는 두 작품의 연속성, 비연속성, 그리고 특이성을 비교하는 방법론을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두 작품을 위 디오니시우스의 영적 진보의 삼 단계 곧, 정화, 조명, 그리고 완전에 따라 분석한 공시적(共時的) 방법을 사용했다. 나아가 이 논문은 전승사비평을 통해 에바그리우스의 「기도」와 오리게네스의 「기도」,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 그리고 동방 교부들의 작품과의 상이점과 유사점을 밝히기 위해 통시적(通時的) 방법을 사용했다. 이 논문은 세 가지 목적을 달성했다. 첫째, 오리게네스 주의자로 알려진 에바그리우스의 「기도」는 오리게네스에게 영향을 받지 않은 독창적인 그리스도교 최초의 관상 기도라는 것을 밝혔다. 둘째, 에바그리우스의 「기도」를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 그리고 동방 교부들의 작품들과 비교한 결과 에바그리우스의 「기도」가 유일하게 관상 기도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밝혔다. 셋째, 에바그리우스의 「기도」를 통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한 관상 기도에 대한 쇄신을 모색해 보고, 미래에 관상 기도가 나아가야 할 길에 대안을 제시했다. 이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에바그리우스의 관상 기도는 단순히 하느님과 합일을 추구하는 신비체험에 머물지 않고, ‘또 다른 천사’가 되어 이웃을 돕는 중보기도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둘째, 에바그리우스의 관상 기도는 관상 중의 활동을 지향한다. 마지막으로 에바그리우스의 관상 기도의 핵심은 하느님과의 만남이며, 이웃과의 만남이다. 따라서 에바그리우스의 관상 기도가 주는 교훈은 하느님을 만난 관상가는 반드시 이웃을 향해 사랑을 실천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문은 그리스도교 관상 기도의 원천을 다루었기 때문에 관상 기도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귀중한 자원을 제공한다. 아울러 이 논문은 영성 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최초의 관상 기도의 성격을 규명했기 때문에 에바그리우스 이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에 나타난 관상 기도와 비교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는 데 이바지했다. This dissertation attempts to reveal the theological origins of Christian Contemplative Prayer through a comparative study on the theologies of prayer developed by Origenes(AD 185~254) and Evagrius(AD 345~399). It focuses on two texts, representative of the authors’ work on prayer, namely Origenes’ On Prayer (Περὶ Εὐχῆς) and Evagrius’ On Prayer (Περὶ Προσεὐχῆς). The study adopts a comparative research methodology to compare the two core texts in terms of their continuity, discontinuity, and specificity. Taking a synchronic approach, it analyzes the texts according to Pseudo-Dionysius’ three stages of spiritual progress; that is, purification, illumination, and perfection. In addition, the dissertation adopts a diachronic approach. More specifically, it applies tradio-historical criticism to elucidate the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on the one hand, the On Prayer of Evagrius, and on the other, the On Prayer of Origenes, the Enneades of Plotinus, and the works of the Eastern Fathers. The thesis reveals three key points. First of all, although Evagrius’ On Prayer has been labelled as Origenist, this was the original work on Christian Contemplative Prayer, and unaffected by Origenes. Secondly, a further comparison of Evagrius’ On Prayer with the Enneads of Plotinus and the works of the Eastern Fathers, indicates that only the Evagrius text deals with Contemplative Prayer. Thirdly, through Evagrius’s On Prayer, this dissertation sought renewal of the Contemplative Prayer which was emphasized in the Second Vatican Council, and suggested an alternative on how this prayer should proceed in the future. The study draws the following conclusions: First of all, Evagrius’ Contem plative Prayer is not merely a mystery experience seeking unity with God, but also has the character of intercessory prayer for helping neighbors as ‘another angel’. Secondly, Evagrius’ Contemplative Prayer is directed toward the activity in contemplation. Finally, the heart of Evagrius' Contemplative Prayer is meeting with God and meeting with neighbors. Therefore, the lesson of Evagrius' Contemplative Prayer is that the contemplator who has met God must be an activist who practices love toward his neighbors. The dissertation will be a valuable resource for those interested in Contemplative Prayer, because it deals with the source of Christian Contemplative Prayer. It reveals and elucidates the nature and spirit of the first Christian Contemplative Prayer in spiritual theology and contributes to establishing a basis for comparison with the Contemplative Prayer that appeared in the Eastern and Western churches after Evagrius’ works.

      • 칼 바르트(Karl Barth)의 공동체 사상에 비추어 본 공적신학의 특징

        최은택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석사

        RANK : 247807

        This study investigated the characteristics of public theology appearing in the community thought that appeared in Karl Barth.The Christian community, says Barth, is sent into the world not by chance, by chance, but on a mission, and it does not exist prior to that mission, but exists only to receive it. In other words, a community does not exist without a mission, and therefore the question of whether a community has a mission and whether it carries out its mission is not unanswerable. Community exists for the world. Its mission has constituted and shaped the community from the outset. The mission forms the center and horizon of the community. If the community had not been given the mission, the community would not have come into existence. If the community loses its mission, it will no longer exist. Therefore, it is argued that the task does not equal the dignity that is only endowed on the community, and that the community only exists when the community has the task, rather, the task has the community. The task is not like a burden first imposed on the community. It is said that the mission is the foundation that cannot be transferred to the community, the foundation that bears the community, and insists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community theory, and then shows the public theological characteristics. In other words, theology came to be proclaimed to help ordinary believers become the subject, profess their faith in the public realm, and live according to “public faith.”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examine the elements of 'community theory' among various characteristics of Karl Barth's theology. There are many studies on ecclesiology and community theory about Barth. Therefore, the purpose of the following is to examine the public theological elements in the light of Barth's community thought. Although there have been many studies on Barth's ecclesiology and community theory by many scholars, there has been no paper yet linking community thought with public theology in the 21st century. Therefore, in this thesis, I would like to get an answer through the characteristic study of public theology on how to overcome the global crisis of Christianity through Barth's theology. 본 연구는 칼 바르트에게서 나타나는 공동체 사상에서 나타나는 공적신학의 특징을 연구하였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우연히, 닥치는 대로가 아니라, 일정한 임무를 가지고 세상 속으로 보내어졌으며, 이 공동체는 그 임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무를 비로소 받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즉 공동체는 임무 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공동체가 임무를 가지는가, 그 임무를 수행하는가 하는 문제는 답변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는 세상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 임무가 공동체를 처음부터 구성하고 형성했다. 임무가 공동체의 중심과 지평을 이룬다. 만일 공동체가 임무를 받지 못했다면, 공동체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공동체가 임무를 상실한다면, 공동체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임무는 공동체에 비로소 부여된 품위와 같은 것이 아니며 공동체가 임무를 가짐으로써, 차라리 임무가 공동체를 가짐으로써, 비로소 공동체는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임무를 공동체에 비로소 부과된 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임무를 공동체에 양도될 수 없는 기초, 공동체를 짊어진 기초인 것이라 하며 공동체론의 특징을 주장하며 이어 공적 신학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즉 일반 신자들이 주체가 되어 공적 영역에서 신앙을 고백하며 ‘공적 신앙’에 따라 살도록 돕는 신학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 본 논문은 칼 바르트의 신학의 여러 특성 중에서 ‘공동체론’의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바르트에 대한 교회론 및 공동체론에 관한 연구는 많이 있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바르트의 공동체 사상으로 비추어 공적 신학적인 요소를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많은 학자들에 의해 바르트의 교회론, 공동체론에 관한 연구는 많이 있어 왔으나 공동체 사상과 21세기 공적신학을 연결하는 논문은 아직 없었다. 그러므로 필자는 본 논문에서 바르트의 신학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을 공적신학의 특징연구를 통해 답을 얻고자 한다.

      • 깔뱅의 기도론 연구

        임교현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7807

        역사상 유명한 기도론에는 터툴리안(Tertullian), 오리겐(Origen), 닛사의 그레고리(Geregory of Nyssa), 어거스틴(Augustine), 빅토르의 위고(Hugh of St. Victor)의 기도이다. 깔뱅의 기도론 역시 역사상 특출한 것이며 그의 기도론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경건의 글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깔뱅은 자신의『기독교 강요』최종판에서 가장 정점에서 기도론을 저술하고 있으며 그의 기도론은 이론과 실천의 요소를 겸비하고 있다. 깔뱅의 기도론은 현시점에서 다시 평가되고 재고되기에 충분하다. 깔뱅은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을 중심으로 기도에 대해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기도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돕고자 여러 가지 측면에서 기도를 설명한다. 먼저 기도의 본질과 이유에 대해 그는 기도가 절망과 빈곤만이 남아 있는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임을 설명한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에게서 해결책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라고 약속을 주셨으며 약속을 의지하여 기도하라는 명령까지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사정과 필요를 아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령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궁핍과 빈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여 더욱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만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 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들의 덕과 공로에 기대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성인들의 이름을 빌려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유일한 사역의 자리를 빼앗는 것은 크나큰 우를 범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유일한 중보자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주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의 내용과 방법을 알려주신 가장 모범적인 기도문이다. 성경에는 많은 기도문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며 완전한 기도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고려하여 알려주신 주기도문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주기도는 도입부분과 마무리 부분을 제외하고는 6가지 간구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의 3가지 간구는 우리의 필요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 그분의 나라를 먼저 구하며 갈급해 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삶이 나 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 나머지 세 가지 간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육체적, 정신적 필요를 위한 기도이다. 깔뱅은 주기도문의 각 간구를 설명하며 우리의 간구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연결되어 있음도 강조한다. 우리는 앞으로 받을 것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들을 주십사하고 간구를 해야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서도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과 자세를 가져야 한다. 깔뱅은 기도의 탁월한 교본인 주기도문을 설명한 후에 기도가 실제 우리 삶에 잘 적용되어지기 위한 몇 가지 지침들을 제시한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가급적 시간을 정해서 규칙적으로 기도해야 하며 이러한 규칙성은 기계적인 반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마음을 다하는 살아있고 생생하고도 의미있는 반복에 의한 기도가 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기도는 인내를 가지고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한 것을 당장 들어주시기도 하시지만 기도의 응답은 지연이 되는 때도 있다. 우리는 우리의 처음 간구가 바로 이루어지지 않을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귀 기울여 세심하고 듣고 계시다는 것을 믿음으로 늘 기도해야 한다. 또한 응답받지 못하는 기도로 인해 좌절이 될 때에조차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선하시며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예비하고 준비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B. 평가 깔뱅의 기도론은 이론적 탁월성에 기초하면서도 실제적 차원과 결코 유리되지 않는, 이론과 실제를 결합하고 종합하는 기도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깔뱅의 기도론을 공부하고 연구하며 발견하게 된 깔뱅의 기도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4가지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 번째로, 깔뱅의 기도론의 특징은 삼위일체적인 균형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깔뱅의 신학은 하나님 중심주의의 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깔뱅의 사고와 사상은 신중심주의(God-Centered Perspective)의 사고로 일관하고 있다 그의 사상과 저술의 모든 구조에는 하나님 중심적 사고 구조가 그 저변에 구축되어 있다. 깔뱅의 기도론에서도 예외 없이 그는 지속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많이 의식하고 있으며 기도하는 자기 자신이나 상황보다 기도를 명령하시고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집중해야한다는 당위성을 기도론의 구조와 내용에서 동시에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기도론은 단순히 성부 하나님만을 언급하고 지향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깔뱅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이고 경륜적인 관계성의 조화를 염두하고 있으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관계성을 전제하며 기도론에 관한 진술을 전개한다. 깔뱅은 기도가 가능해진 이유와 중보자의 문제에서 기독론을 보다 강조하며 기독론 중심의 사고를 피력하고 있으며 기도라는 영적 행위에서 나약한 인간을 조력하며 오히려 주도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따라서 깔뱅의 기도론은 전반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이며 동시에 삼위일체적인 유기적 관계성을 전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로, 깔뱅의 기도론은 이론에서부터 실제적인 적용까지 기도의 모든 부분을 아우르고 있다. 신학은 단순히 이론에만 머물러서는 완성도를 이룰 수 없는 학문분야이다. 이론에서 발생된 사상이 실제에서 꽃을 피우고 다시 이론의 영역과 연결되어 보다 진취적인 종합의 연속이 계속되는 선(善)순환(循環)적 관계가 형성될 때만이 신학은 생동감과 생명력을 유지하고 확보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깔뱅의 기도론은 이론과 실제를 동시에 아우르며 주기도라는 기도의 모범의 제시와 분석을 통해 실제적인 기도가 기독교인의 삶에 자리 잡을 수 있게 함으로써 기도론이 이론에만 기초한 허무한 사상누각으로 증발하는 것을 방지한다. 또한 깔뱅은 기도론 곳곳에서 언제나 훈련을 강조하고 있다. 훈련으로서의 기도를 제시함으로 그는 실제적인 기도가 살아있기를 권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깔뱅의 기도론의 특징은 그 본질과 핵심에 있어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깔뱅은 26살에 『기독교 강요』 초판을 집필한다. 그는 두 번의 제네바 목회와 스트라스부르그 목회, 그리고 종교개혁이라는 기나긴 터널을 지나기 전에 이미 무고하게 박해 받는 개신교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독교 강요』를 작성함으로써 자신의 성경적 사상을 정립(定立)했던 것이다. 그 후 『기독교 강요』는 23년 동안 끊임없이 깔뱅 자신에 의해 개정되어 무려 초판에 비해 4배의 분량인 방대한 저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신앙과 사상의 내용에서는 조금도 중대한 차이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점이다. 깔뱅의 기도론 역시 『기독교 강요』초판에 그의 사상의 핵심이 이미 구축되어 있고 최종판에서도 그 명맥이 신선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써 그의 신학과 사상은 양과 질에서 발전하면서도 진리에 대한 일관성 있는 태도와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깔뱅의 기도론 역시 그의 『기독교 강요』초판과 최종판을 비교해 볼 때 그의 기도론의 본질이 동일한 면모를 드러내고 있으며 이는 깔뱅의 기도 신학이 성경적인 진리성에 천착(穿鑿)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네 번째로, 깔뱅의 기도론은 이원론적 양 극단에 빠질 수 있는 여러 부분에서 균형 잡힌 기도론이라고 할 수 있다. 깔뱅의 기도론은 기도가 개인적인 과업인 동시에 공동체적 사명을 지향해야 함을 강조하며 공공성과 개인성의 균형을 추구한다. 또한 자신의 간구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보다 우선시하며 동시에 인간편의 간구도 하나님 앞에 청허되고 있음을 제시한다. 이에 더하여 깔뱅의 기도론은 육과 영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과 이해를 유지하며 육을 초월하여 영에 집중하는 기도론을 펼치는 동시에 인간 육신의 연약성과 근본적인 나약성을 충분히 숙지하며 육적인 필요들을 기도에서 제시하도록 권고한다. 마지막으로 시간적인 측면에서 그는 기도하는 것이 현재를 사는 우리가 미래를 동시에 포괄하는 활동임을 통찰한다. 기도는 단순히 현재의 필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과거의 약속이 미래에 실현될 것을 기다리며 소망하는 가운데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주시하며 현실의 삶을 인내하며 극복해가는 하나의 역동성인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깔뱅은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을 소중히 여긴다. 깔뱅의 기도론을 연구하며 필자가 가졌던 한 가지 아쉬움은 깔뱅에 관한 2차 문헌들의 번역이 양적인 면에서 아직 미흡한 수준에 있다는 것이다. 현재 깔뱅의 기도론을 집중적으로 다룬 단행본으로 된 외국의 서적이 국내에 번역된 것은 아직 단 한 권도 없는 실정이다. 뿐만 아니라 불어권과 독일어권의 훌륭한 깔뱅 학자들, 그리고 스위스권의 학자들의 저작에 대한 소개 역시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국의 신학연구의 역사와 수준이 유럽과 비교할 때 아직은 상대적으로 미흡하며 기존의 탁월한 외래저작들을 보다 수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좋은 책들의 수입과 번역은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의 신학과 신앙의 전통이 개혁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깔뱅의 전통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러한 명분에 걸맞는 실제적 연구의 성과와 수준이 탄탄하게 뒷받침되고 지속적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어권과 독일어권, 영미권과 화란계열의 서적들 중에서 깔뱅을 연구한 학자들의 탁월한 저작들이 계속 번역된다면 이는 한국에서의 깔뱅 연구에 강한 활력과 추진력을 제공할 것이다. 이러한 과제를 감행하기 위해서는 영어, 불어, 독일어, 라틴어, 화란어의 텍스트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고 한국어와의 소통이 원활(圓滑)하며 깔뱅 신학에 안목과 식견(識見)이 있는 고급 인력의 창출이 필요하다. 개혁신학의 과업을 이어가야할, 뜻 있는 한국의 신학도와 목회자들, 총회와 총회직영신학교, 교회가 함께 힘을 모아야 할 부분이다.

      • 본회퍼의 교회론

        양영주 호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1999 국내석사

        RANK : 247807

        본회퍼의 교회론은 철저하게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해서 교회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 교회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대리적인 죽음이며, 여기에서 기초한 교회의 본질은 더불어 있음과 서로 위함인 것이다. 이것이 곧 제자됨의 교회요, 남을 위한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본회퍼는 이러한 삶으로 예수의 부름에 즉각적인 순종으로 따르는 행동의 삶을 주장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그리스도의 제자됨에서 주장한 전부인 것이다. 사도신경 중에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이 두 가지 말은 교회의 본질적인 면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나 단체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교제 그 자체인 것이다. 본회퍼는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가 그를 위하여 사람이 되셨고, 다시 사셨고, 그를 위하여 죄사함을 먼저 받으셨고, 그를 위하여 영생을 마련해 주신 그런 사람으로 만나야 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 교회의 모습은 외형적인 교인수, 성전의 크기, 교회 예산등의 물량주의에 깊숙히 빠져있다.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현세의 건강, 축복등의 그리스도의 값싼 은혜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이기적인 개인주의적 인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적 인간상을 제시하고 그러한 모습을 모범으로서 실천해 보여야 한다. 교회는 교회공동체의 회복을 위하여 성도의 훈련을 새롭게 시작해야한다. 공동체에 근거한 기도훈련, 전체성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발견하는 성경공부, 섬김의 훈련, 형제 사이의 고백과 용서의 훈련, 성만찬의 재발견이 이루어 져야 한다. 세상을 향한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교회공동체의 일원으로써의 실제적인 훈련을 철저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 모임은 거룩한 목적이 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받았으니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며, 신앙고백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 사실을 재확인하고,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은총에 보답하고자 새롭게 다짐하는 공동체(communio)인 것이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약 100여개 이상의 교단으로 나뉘어 있다. 이제는 분열이 아닌 하나됨이 필요할 때이다. 신학적 주제(복음, 삼위일체, 구원, 교회, 부활…)과 세례, 성만찬, 직제의 일치를 통하여 교단이 하나가 되고,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하겠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 될 때에 비로소, 교회에 몸담고 있는 성도들은 지역적, 학연, 재산의 유무로 인한 차별이 없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는 세상에 실현될 수 있다. 교회는 사람이 영광받는 그런 곳이 아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곳이다. 교회는 내가 받은 끝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에 나눠주기 위해 배우며, 섬기는 곳이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임무에 충실해야 한다. 교회는 이웃을 섬겨야 한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경제적으로 매우 윤택하지만 이웃을 돕는 일은 소홀히 하고 있다. 수십억의 교회 건물이나, 수양관을 짓는 것도 좋지만 조금씩 규모를 축소하여, 사회의 실직자나, 소년소녀 가장을 돕는 사회봉사에 투자하여야 한다. 언제든지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와 고통당하는 자, 병든 자, 갇힌 자들의 친구이셨기 때문이다.

      • 그리스도인의 삶의 있어서 성령의 사역 : 깔뱅신학을 중심으로

        장규열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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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크신 은혜 중에 하나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신 것이다. 우리 속에 임하신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고, 이 땅에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또한 우리가 얻을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 되신다. 또한 성령은 우리를 외적으로는 능력 있는 사역자가 되게 하시고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온전한 인격의 사람이 되게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의 삶의 현실은 성령의 역사의 한쪽 면에 치우쳐 성령을 통한 바람직한 성장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이는 성령론에 대한 바른 신학적인 이해와 지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비단 오늘날만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 교회 역사를 볼 때 성령론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혹은 지나친 관심이 있었다. 교회와 신학에서는 무관심의 경향으로, 또 교회와 신학 밖에서는 지나친 열광주의적인 경향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성경에 근거한 바른 성령론이 되지 못하고 사변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경향으로 치우쳤다고 할 수 있다. 즉, 교회 밖의 신비주의 운동이나 성서 밖의 학문으로만 존재하는 성령론적 경향이 있었기에, 막상 교회 안에서 성경을 붙들고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신자들에게는 별 영향력 없는 교리나 이론에 그치거나, 또한 소위 지나친 성령운동은 교회의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바람직한 성령론은 교회 안에서 성경을 들고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는 성령론이어야 할 뿐 아니라, 성령과 인격적으로 교제하는 가운데 성령의 주도권과 역동성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성령은 이론이 아니라 인격이고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성령의 사역을 깔뱅 신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어느 누구의 신학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깔뱅의 신학도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것이 아니라 깔뱅 당시의 신학적 상황에서, 특히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스콜라 신학을 비판하는 가운데 성경적인 근거위에 자신의 신학을 세워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깔뱅의 성령론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신학만 들여다보기 전에 깔뱅이 비판했던 스콜라 신학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스콜라 신학을 전부 다 들여다 볼 수 없기에 깔뱅의 성령 이해와 맞물려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총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토마스의 은총론은 한마디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동원해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하여 선행(善行)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공로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토마스는 인간을 긍정적으로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해서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가능성이 충분히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마스에 있어서, 타락 이전의 인간과 타락한 이후의 인간의 다른 점은 병들지 않았거나 병든 인간, 건강하거나 허약한 인간의 차이이다. 인간을 병들게 하고 허약하게 만드는 것은 죄악인데, 죄악은 인간 영혼의 오염이고, 무질서이고, 선함의 부패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이 병들고, 허약하고, 인간 영혼이 오염되고 무질서하고 선함이 부패하게 된 것은 온전한 은총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병들고 허약한 인간, 무질서하고 오염된 영혼을 치유하기 위해서 외부로부터 하나님의 은총의 주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토마스가 말하는 은총에는 은총 자체인 창조되지 않는 은총이 있고 창조된 은총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세례 받을 때에 어떤 창조된 은총을 우리 영혼 안에 주입하여 우리 영혼에 새로운 성품을 만드는데 이것이 품성의 은총이다. 토마스에 의하면, 우리 영혼 안에 이 품성적 은총의 주입으로 일어나는 것이 의화이다. 이 품성의 은총은 영혼에 새로운 형상을 만드는데, 이 새로운 형상은 보다 높고 고귀한 가치와 선을 향해 움직이는 내적 경향성을 갖는다. 새로운 형상으로 의화된 인간은 내적 경향성을 따라 자유의지를 동원해 보다 높고 영원한 가치와 선을 향해 살아가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신자 개개인의 성화를 이루게 하기에 성화의 은총이 된다. 토마스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의화된 인간이 이 성화의 은총을 통해 타인을 구원하는 일에 유익을 끼치면 그것이 그의 공로가 되어 자신도 구원할 뿐 아니라, 남은 공로로 타인의 구원에도 유익을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은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짓는다는 것이고, 죄를 지음으로 중생하게 하는 은총을 상실하여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토마스는 죄로 인해 상실한 은총을 회복해야 하는데, 그 은총을 회복하는 길은 성례를 통하여서라고 한다. 성례전을 통하지 않고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할 수 없다. 세례 때 받은 은총, 즉 의화시키는 은총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고해성사를 하고 그에 따른 책벌을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면죄부가 등장하게 되었고 로마 가톨릭교회의 결정적인 오점이 되었다. 결국 토마스의 은총론은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자유의지, 인간의 선한 행위, 업적을 쌓아 구원에 이른다는 공로사상을 강조하다 보니, 실제 하나님의 은총보다는 인간의 행위가 강조되는 경향으로 치우쳐 하나님의 은혜의 절대성을 잃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토마스의 은총론은 인간의 미덕과 품성, 또한 성화를 위한 선의 추구 등에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인간이 도달할 수 없는 완전주의와 율법주의로 치우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연약한 인간을 성례전이라는 제도와 성직자라는 교권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것은 결국 성령의 주도적이고 역동적인, 또한 인격적인 사역을 제도적이고 교권적인 방편을 통해 제한시키고 있다. 중세 스콜라 신학의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체계 위에 세워진 이러한 신학에 반발하고 나선 것이 종교개혁자들이다. 대부분의 종교개혁자들이 사변적이고 제도적이고 교권적인 중세 스콜라 신학을 비판하면서 성경적이고 성령론적인 입장에서 자신들의 신학을 전개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깔뱅은 종교개혁자들 중에서도 당연히 성령의 신학자로 불릴 수 있는데, 이는 깔뱅이 그의 신학 전반을 성령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깔뱅은 삼위일체와 관계 속에서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같은 동일 본질로서, 또한 성부와 성자와는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깔뱅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성과 일체성을 뗄 수 없는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또한 깔뱅은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는데, 성령을 하나님 본질 안에 있는 실재로서 하나님과 동등한 인격성을 강조할 뿐 아니라, 성령의 비인격적인 표현들을 다 인격적인 표현으로 바꾸어 설명하고 있다. 또한 깔뱅은 성령을 단순히 성부의 심부름꾼이나 성부, 성자의 보조자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사역의 협력자로 또는 사역의 주도자로, 또한 만물을 유지, 생성, 보존자로 표현하면서 신적 행동의 주체로서 성령의 능력을 강조한다. 깔뱅은 성령을 성부와 성자와 똑 같은 하나님으로서, 신적 인격체로서, 또한 신적 행동의 주체로서 이해하고 있기에, 성령을 중생의 창시자로, 또한 성령을 성화의 주관자로, 또한 영생의 창시자로 표현하면서 성령의 구속사역을 전개해 나간다. 깔뱅은 성령의 구속사역을 ‘사람들에게 하는 특별한 성령의 사역들’로 표현한다. 깔뱅에게 있어서 사람에게 행하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 즉 외적으로, 또한 내주하여 도우시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의 초점은 인간의 연약성에 있다. 인간이 연약하기에 도우시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깔뱅은 인간이 얼마나 허물 많고 연약한 존재인지를 밝히고 있다. 깔뱅은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같이 인간을 전적으로 부패한 것으로, 그 속에 결코 선함이 없고 성령의 비추임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비록 칭의로 의롭다고 인정받고 있지만 연약한 육체성 때문에 육욕에 따라 살아 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라고 한다. 이런 연약한 인생을 돕기 위해 성령은 외적인 수단을 사용하시고 내재하셔서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깔뱅은 교회를 성령이 사용하시는 외적 수단이라고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성령으로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택함 받고 성화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교회 안에 사역자들을 두시고, 말씀과 성례전을 두시는데 이 모든 것은 성령이 연약한 인간을 도우시기 위한 은혜의 방편들이라고 한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가 은혜의 방편을 성례전에 한정한다면 깔뱅은 성례전과 더불어 말씀과 성령의 조명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성령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편이 성례전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깔뱅은 말씀이나 성례전이나 직제나 이 모든 것은 성령의 도구로 이해하고 있다. 사역자나 말씀이나 또한 성례전도 그 자체에 효력이 있고 능력이 있거나 그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구로서 성령과의 관계성 속에서 가치가 있고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깔뱅은 교회에게 주어진 이 모든 외적인 수단들을 성령과의 관계성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성령이 외적인 수단들을 통해 연약한 우리를 돕는다면, 이보다 더 실제적인 도움은 신자 속에 내주하여 행하심으로 우리를 주도적으로 이끄신다. 깔뱅에 의하면, 신자 속에 내주하심으로 행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믿음을 불러일으키고, 의를 전가시키고, 죄 용서를 확신하게 하고,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지속적인 교제로 이끄실 뿐 아니라 종국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과 그 영광을 얻도록 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성령에 이끌리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은 육체 가운데 살고 있기에, 끊임없는 죄의 유혹 속에 살고 있기에 성령께 항복하고 성령의 지배를 받는 가운데 자기 부정의 삶, 십자가를 지는 삶과 계속적인 회개를 하는 가운데 일생을 살아가야 한다. 깔뱅에 의하면, 이런 반복적인 회개를 통해 죽임(mortification)과 살림(vivification)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깔뱅이 강조하는 것은 신자에게 행하시는 이 모든 일의 주도적 실행자가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깔뱅에게 있어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 적용하는 자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며 깨닫게 하는 자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혜와 약속의 확증자이며 보증자이다. 한국교회는 전례 없는 폭발적인 교회 성장을 이루어 왔다. 이런 폭발적인 성장의 배경에는 은사 중심의 성령 운동의 흐름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이런 은사 중심의 성령 운동은 성경에 의하면 성령의 다양한 역사의 한 결과로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외적 현상과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교회는 더 이상 성장하지 않고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성령의 외적인 은사나 능력에 치우쳐 내적으로 인격적인 성장을 이루는데 게을렀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외적으로는 능력 있게 사역하도록 성령의 은사를 우리에게 주실 뿐 아니라, 내적으로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격적인 성장을 이루어 성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신다. 우리 속에 임재하시고 일생동안 함께 하시는 성령은 우리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시다. 우리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 성령은 여러 은총의 방편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성령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닮고 또한 그리스도의 나라를 향해 살아 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본 고(稿)는 바로 우리 속에 내재하시는 성령이 어떻게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어떤 은총의 방편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지 살피는데 있다. 깔뱅 당시 깔뱅의 신학적인 주 논쟁 상대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열광주의자들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제도로 바꾸었는데, 이에 대해 깔뱅은 교회 자체의 권위보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강조하였다. 열광주의자들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 성령의 직접적인 계시를 주장하였는데, 이에 대해 깔뱅은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교회와 사역자들의 역할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특히 성령의 신학자라 할 수 있는 깔뱅은 중세 스콜라 신학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거추장스러운 모든 형식과 제도를 벗기고,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성령의 사역의 주도권이 성직자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 자신에게 있음을 밝히며, 성령의 사역의 역동성을 회복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누구보다도 “성령의 신학자”불릴 수 있는 깔뱅은 성령론에 대한 책을 따로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1)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성령의 사역과 그 은총을 강조하고, 2) 중세 스콜라 신학의 사변적 신학과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도화된 성령의 사역 이해에서 탈피하여 말씀중심과 교회중심의 성령 사역의 주도성과 역동성을 회복하였고, 3) 더불어 성령의 사역 중에서도 신자 안에 내주하셔서 행하는 사역으로, 그리스도인의 성화를 이루는 성령의 구속 사역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깔뱅의 성령론이 성령의 역동성뿐 아니라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며 또한 개인의 성화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성을 강조하는 통전적인 성령론으로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용한 성령론이다. 특히 깔뱅의 성령론은 형식주의적으로 치우쳐 딱딱하고 교리적인 개혁교회, 혹은 은사중심으로 치우친 한국교회에 말씀중심, 교회중심의 건전한 성령론을 회복케 하여 한국교회 전체의 성령론을 바로 이끌어 갈수 있게 한다. 또한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는 깔뱅의 성령론은 성령과의 깊은 교제가 가능함으로 성도 개개인의 영적, 인격적 성장을 이루어 교회와 사회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양산할 수 있다. 또한 앞으로의 신학은 성령론적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신학이 될 터인데 깔뱅의 통전적인 성령론은 성령론적 패러다임 신학의 한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본다.

      • 레오나르도 보프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에 대한 개혁신학적 비판

        김대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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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레오나르도 보프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개혁신학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것으로 그의 신학의 교리적 측면과 실천적 적용의 측면으로 각각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크게 다시 다섯 가지의 범주에서 보프에 대한 개혁 신학적 비판을 시도했다. 첫째로 Ⅱ장에서는, 보프가 자신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서 기존 동·서방의 삼위일체 모형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특히, 삼위의 실재적 단일성과 관련하여 기존 모형이 “신적 본질”에만 치중하여 “교통의 본질”을 간과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본 논문은 동·서방의 신학자들이 단일성을 설명하는 출발지점이 다를 뿐이지, 신적 본질과 교통의 본질을 동시에 강조했으며, 오히려 동·서방의 신학에 교통의 본질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보프가 제시하는 현대적 모형(사회적 모형)은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변증했다. 또한 정통적인 삼위일체 모형들을 몰트만과 같이, 군주적인 모형이라고 간주하는 보프에 대해 그러한 규정은 성경적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불합리하며, 교통과 관계성을 말하기 위한 포석으로서, 결국 해방신학이나 정치 신학적 가설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둘째로 Ⅲ장에서는, 현대적 모형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성경 계시와 삼위일체 용어를 관계 중심적인 용어로 재해석하려는 보프의 이론을 분석했다. 즉, 보프는 삼위일체 교리와 삼위일체 실재를 각각 분리하여 생각하도록 이끌면서 삼위일체 용어에 대한 재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며, 기존 용어들이 삼위의 복수성과 등등성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다고 주장하면서 재해석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주장함을 드러내었다. 하지만, 본 논문은 이러한 보프의 주장은 결국 전통적인 삼위일체의 논의를 벗어나는 것으로서 용어의 한계를 넘어 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도록 우리를 이끌면서, 실천적 적용을 위한 장치로서의 재해석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즉, 보프는 삼위일체 용어를 성경 계시로서 존중하지 않으며 성경을 새로운 관점으로 재해석하는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셋째로 Ⅳ장에서는, 보프가 페리코레시스 교리를 통해 자신의 삼위일체가 삼신론이 아니라는 것을 변론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하여 보프는 하나의 의지, 하나의 이해, 하나의 사랑만이 존재하는 세 위격의 동일본질을 강조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와같이 보프가 삼위의 동일 본질을 강조하여 삼신론의 위험을 벗어난 점은 다행스럽지만 보프는 교부들의 함의와는 달리, 존재론적 단일성을 간과하면서 교통과 관계성에 치중하여 이 교리를 사용한다는 것과, 인간의 타락과 부패성, 근본적인 죄성을 미미한 것으로 평가함으로 결국 실천적으로 이 교리를 적용하여 열린 삼위일체론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본 논문은 지적했다. 넷째로 Ⅴ장에서는, 그리하여 보프가 성경적 삼위일체와 정통 삼위일체론을 벗어나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존재론적 차이를 모호하게 만드는 이른바 만유재신론, 그리고 죄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연합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만인구원론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음을 본 논문은 지적했다. 즉, 보프의 의도는 좋지만 결국 그의 논의를 충실히 따라가다보면 성경 계시가 말씀하는 삼위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죄성과 관련없이 하나님과의 교통으로 만물을 초대하며, 이미 만물과 하나인 만유재신론적인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음을 지적했다. 다섯째로 Ⅵ장에서는, 결론적으로 보프의 삼위일체론은 실천적 동기에 치우쳐진 삼위일체론이라는 것을 지적했다. 즉, 그는 해방신학자로서 남미의 현실적 문제 해결을 위해 삼위일체론을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과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심지어는 현대 신학의 이슈인 남녀평등 사상을 가져와 하나님의 남성적 측면과 여성적 측면을 동시에 강조하려고 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러나 정통 개혁 신학자들이 바르게 지적하듯이 하나님은 성의 형태를 지닌 분이 아니며,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두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해방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룬 해방에서 출발하는 것이 복음임을 본 논문은 상기시키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보프는 현실적인 사회인식과 참여에 대한 좋은 통찰을 제공하며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의도로 긍정적인 여러 가지 작업들을 하면서 자신의 삼위일체론을 인간 공동체의 원형 또는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만들기를 원했으나, 이는 인간의 죄성과 부패성이 해결되지 않고는 매우 제한적이거나 실현 불가능한 이상에 불과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았으므로 그 나라를 소망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사는 것이 참된 인간 공동체의 원형이요, 성경적 삶이요, 참된 삼위일체적 삶인 것이기 때문이다.

      • 중국 "漢語(人文)神學" 연구 : 기독교 윤리학적 관점을 중심으로

        오동일 연세대학교 2007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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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자는 본 논문에서 “한어(인문)신학”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위하여, “형식적인 접근”과 “내용적인 접근”에 주력하였다. 형식적인 접근은 “한어(인문)신학”을 전체적으로 鳥瞰하는 의미가 있었고, 내용적인 접근은 “한어(인문)신학”의 중요한 주장이나 개념들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려는데 목적이 있다.지금까지 한어신학계(廣義)에서의 “한어(인문)신학”에 대한 논의는 주로 신학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졌기에, “한어(인문)신학”에 대한 표층적인 이해에만 머물었다고 생각된다. 본 논문에서 추구하는 深層적인 이해 방식은 “한어(인문)신학”을 人文신학으로 규정하고 그것의 인문학적 토대를 기초로 하여 그 신학을 연구하는 방식을 뜻한다. 그리고 “한어(인문)신학”을 상황신학(Contextual Theology)으로 보고, 그것의 “삶의 자리”(역사적 배경)에 대한 분석 또한 중요하게 다루었다. 논자는 인문학적 배경과 역사적 배경에서 “한어(인문)신학”을 연구함으로 전체적이고 역동적인 이해에 이를 수 있었다.인문학적인 접근을 구체적으로 류소펑의 “한어(인문)신학”의 연구에 적용하였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인문학적 고려로, 논자는 류소펑의 “한어(인문)신학”을 “내적논리”와 “외연적 논리”로 구분하여 각각 “한어신학 방법론”과 “기독교사회이론”(漢語思想)으로 정립하였다. 류소펑의 漢語神學의 핵심개념인 “그리스도 사건을 직접 마주하기”(直面基督事件)에 대해서도 바르트(K. Barth)의 “계시론”적 이해와 셀러(Marx. Sheller)의 “가치현상학”적 이해를 병행함으로, 보다 충만한 이해에 이를 수 있었다. 그리고 류소펑의 漢語思想을 트뢸치의 “기독교사회이론”의 틀로 이해함으로 그의 漢語思想 전체를 신학적인 작업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본 연구를 통하여, 논자는 “한어(인문)신학” 연구에 인문학적인 접근의 타당성을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논자는 본 논문에서 “한어(인문)신학”에서 “(인문)”을 반복적으로 표기하게 되었다. 물론 다른 차원의 평가나 이해를 배격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인문학적 접근이 “한어(인문)신학” 연구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연구방법이 되어야 한다.그리고 “한어(인문)신학”의 전체적인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여, 논자는 “형식적인 접근”을 취했다. 형식적인 접근이라 함은, 논문의 구도설정 자체가 “한어신학”의 地形을 나타내는 것으로 심중하게 구성해야 함을 뜻한다. 특히 논자는 류소펑의 주장이 “한어(인문)신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고 생각되어 그에 대한 분석과 연구에 집중하였다. 그의 사상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한어(인문)신학”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그리고 논자는 “중국대륙에서 기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SMSC)의 “두 번째 부류의 연구자들”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되었고, 그들의 정체성과 그들의 “한어(인문)신학”의 참여를 분석하였다. 물론 이들은 “문화그리스도인”(Cultural Christian, CC)만큼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실질적으로 “한어(인문)신학”의 토론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기에 그들에 대한 성격규명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논자는 그들을 “기독교문화가치를 지향하는 자”(Christian Culture Oriented Scholar, CCO)들로 부르기로 했다. 논자는 “한어(인문)신학” 운동의 전체적인 이해를 위해서 이들에 대한 논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기독교 윤리적 이해는 “한어(인문)신학자”들의 과제와 목적을 부각시키고, 그들의 개념을 명료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한어(인문)신학”의 윤리적 특성이 행위론 적이라기보다는 존재론적 성격이 강하기에, 그것의 특성과 지향성을 분석하는데 치중하였다. 이는 또한 “한어(인문)신학”은 보다 실천적인 학문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본 연구를 통하여 논자는 과감하게 자신의 “한어(인문)신학” 연구방법론과 주장들을 내놓았다. 이는 “한어(인문)신학”의 특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것이었으며, 또한 논자의 관점을 분명히 밝힘으로 다른 논의를 불러내기 위함도 있다. 그러나 體系化하는 과정에 當事者들의 논리를 압박한 측면도 있으리라 생각되어 양해도 구하는 바이다.

      • 문익환 목사와 통일운동 : '1989년 평양방문'을 중심으로

        공헌배 호남신학대학교 200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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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자주와 통일 한반도의 분단은 외세에 의해 이루어 졌고, 대세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외세는 이 분단상황을 해결해 줄 능력이 없으며, 외세가 그것을 해결해서도 안된다. 이러한 특징을 고려할 때, 통일은 자주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런데 이 "자주"의 기준을 어디에서 찾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분단이나 통일의 문제는 일종의 해석학적인 문제다. 즉, 애국심의 문제나, 통일 열망의 문제라기 보다는 통일이나 애국심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문제라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도들도 애국심을 갖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복음주의 노선의 애국심과 에큐메니칼 진영의 애국심은 그 관점에 있어서 판이하게 차이가 날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분단은 이미 남한 내에서 뚜렷이 나타나는 특징이다. 남한은 미국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해 "자주"에 대해 부담을 느끼고 있고, 북한은 경제적 난관과 '인권유린'이라는 어려움을 안고 있다. 따라서 통일문제를 논할 때, 기준을 정하는 일은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본 논문에서는 그 기준을 역사의 정통성에서 찾고자 한다. 그 이유는 남북이 통일되려면 역사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데, 이는 원래 한 나라 이었다는 것을 역사가 뒷받침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공통의 매개를 찾는데 과거의 전통이나 관례를 결코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역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국가의 중대사항을 결정할 때, 매우 중요한 지침이 되기도 하는 것이 역사의 해석 또는 역사적 통찰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준을 정하자면 고전의 발견과 해석은 결정적으로 중요할 수 밖에 없다. 문익환 역시 그 분야의 문제를 결코 가벼이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의 인식문제도 사람에 따라 그 이해가 다를 수 있으므로 이 문제 역시 당위성의 문제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 예를 들면, 고전에서 주체성을 찾는다고 했을 때, 그 고전에 대한 인식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주와 통일에 대한 역사의 문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보려 한다. 첫째, 자주의 근거는 고조선에서부터 찾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역사의 출발을 거기서 잡기 때문이고, 따라서 고조선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야 하며, 이는 남과 북(북과 남)이 공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둘째, 역사인식과 정통성에 있어서 신라와 수(중국)나라의 협력 관계나 신라와 당나라의 협력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고구려-백제-왜(倭)로이어지는 관점을 부각시키고, 그 관점에서 역사를 해석하고, 그 동안 소외시켰던 만주와 왜(倭)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셋째, 해방 후 남.북 정국에 대해서는 총체적으로 고려해보아야 하는데, 그 시대의 정통성 문제는 그 동안(약 55년 간)저질렀던 실수를 교훈삼아 깊이 반성하며, 새롭게 나라를 세워야 한다. 넷째, 통일에 대해 반대할 수 밖에 없는 집단(이를 테면, 기득권자나 역사의 죄인,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기득권 때문에 통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물리적 폭력을 가해야 함은 피할 수 없는 과제이고, 그 일에 주체로 부각되어야 하는 것은 무사(無私)계층의 도덕적 집단이다. 다섯째, 조선말 개화파와 보수파 사이의 갈등은 심각한 문제였고, 이러한 유형의 문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나라를 도전하고 있는 외세이므로 이 문제 역시 쉽게 풀기는 힘든데,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체성을 찾는일과 도전해 들어오는 외세의 물결에 대해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응전하는 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나. 신학의 주체성 한국신학에 대해서 말하라고 할 때, 이렇다할만한 신학을 제시하는 일이 그리 쉬운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시할 수 있는 신학이 있다면, "민중신학"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전반적으로 수 적인 우세를 이루는 복음주의 노선에 속해 있는 신도들의 행태 또한 가벼이 다를 수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그러나 복음주의 노선에 속해 있는 교회들의 전반적인 문제는 탈사회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균형이 맞지않다. 그 점에 있어서 통전적 선교의 중요성을 실천하며, 균형있는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는 김동선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그들이 미국의 국익과 얼마나 결별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이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 점에 있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해야한다"는 루터(M. Luther)의 주장은 정당하다. 그간에 있어왔던 한국 기독교인의 행태를 감안해 볼 때, 그들은 말씀 앞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일은 쉽지만, 말씀 앞에서 자본주의도 비판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쉽지않은 일이라 사려된다. 성경이 자본주의를 위한 책은 아니지만, 한국 복음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적 성향을 지닌다. 그리고 서구의 기독교를 받아들여 서구의 정신이 함께 들어와서 서구적 성향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다. 즉, 한국 교회는 구교나 신교 모두가 서방교회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성향에서는 제대로 한국신학을 구성하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한국은 서구적 경험을 한 일이 없다. 즉, 자유주의나 계몽주의, 종교개혁 같은 것들을 자체내에서 해 본 일이 없다는 점이다. 2. 한국은 선교될 당시의 상황이 중세초의 게르만족들처럼 야만족이 아니라 우수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문명의 토양을 갖고 있는 나라에 낯선 서양종교가 들어오는 것은 이질적일 수 있으며, 그 과정 속에서 충분한 대화와 신학화 없이 식민지적 부산물로 낯선 종교가 들어왔는데, 이는 남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나 호주의 원주민들 같은 부족들에게 포교된 것 하고는 그 성향이 판이하게 다르다. 3. 아시아의 수 많은 나라들 중에 유독히 기독교가 강세를 이루는 두 나라가 있는데, 이는 곧 남한과 필리핀이며, 이 둘은 식민지를 경험했다는 것과 아직도 미국의 강한 영향권 아래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므로, 아마 남한에서 기독교가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분명하지는 않지만)남한이 많이 서구화 되었고, 그 서구화의 과정속에서 서양종교가 깊숙이 파고들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안고 있기에 다음과 같은 고찰을 해본다. 첫째, 한국이 신학적으로 주체성을 가질려면, 유럽(혹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것 보다는 이스라엘에서 곧바로 한국으로 연결지을 수 있는 매개를 가질 수 있는 것이 필요하나 그 동안(약 2000년) 서구 교회가 경험했던, 서구교회의 역사도 결코 가벼이 다루어서는 안되고, 서구교회의 경험을 교훈삼아 한국교회의 신학이 성립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에서 태동된 기독교가 어떻게 유럽으로 토착화 되어갔는지, 그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고, 그 과정의 경험을 통해 어떻게 이스라엘의 경험이 극동의 한국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이스라엘이 한국과 만날 때, 중요시해야 될 점은 토착화가 아니라 서로간의 대화이다. 넷째, 이스라엘 출신의 '역사적 예수'가 어떻게 서구 세계에서 기독론화 되어갔는지를 탐구하여 역사적 예수가 어떻게 오늘날 한국의 예수가 될 수 있는지를 깊이 있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다섯째, 기독론 중심보다는 신론(神論)중심의 신학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유대인들은 '예수'에게서 의미를 찾기 힘들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구원문제나 해방되지 못한 국가들에 대해 기독론은 '서구적'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으므로, 신론 중심의 신학은 간과할 수 없다. 2) 아시아에는 매우 많은 이슬람교도들이 살고 있는데, 이들과 협력하여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해 대화하기 위해서는 신론 중심의 신학은 피할 수 없게 되어있다. 3) 서구 세계의 '역사적 예수 탐구'는 신론 중심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좋은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아울러 이러한 시도는 종교 다원주의와 신론 중심의 신학을 하는데있어서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4) 한국 역시 다종교(多宗敎)사회 이므로 다원주의가 태동되는 것은 불가피 하다. 5) 신약의 종말론이 부도난 수표 같은 것이라 했을 때, 구약의 정치 윤리나 약자보호의 윤리 같은 것은 아시아 세계에서 많은 정치적 요청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지만, 이 역시 적용의 원리로서 성서와 상응하게 비교할 수는 없는 관계로 신학적인 해석을 통해 서로 대화해야 함은 필수일 것이다. 문익환 역시 한국신학의 수립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만 그 하나님 경험을 2천년 간의 기간을 뛰어넘어서 어떻게 오늘 우리의 경험으로 현재화하느냐는 점 만을 논해 보기로 하자.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겠다. 그 하나는 구약 성서를 예수, 바울, 어거스틴, 루터, 칼빈, 바르트, 불트만, 김재준...을 통해서 만나는 길이다. 다시 말하면, 신약을 거쳐 2천년 교리사의 끝에서 만난다는 일이다. 구약 성서에 나타난 강렬한 하나님 경험은 2천년 기독교의 전통 속에 면면히 살아 있다...구약의 하느님은 의와 진노의 하느님이요, 신약의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라는 말을 상당히 보수적인 한국 강단에서 흔히 듣는다. 그것은 말시온과 종이 한 장 차이다. 슐라이에르마허-하르낙-불트만을 잇는 루터교 신학의 흐름이 말시온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 나는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또 하나의 다른 길을 제시한다. 이것은 2천년 기독교역사를 뛰어넘어 구약의 세계와 직접 같이 호흡해 보는 길이다...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리(Sitz-im-Leben)어디서고 구약의 하느님을 경험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익환의 주장 역시 한국신학의 필요성을 매우 절감한 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감안할 때, 신학의 주체성은 매우 필요하며, 이것은 조국 통일을 꿈꾸는 현대 한국인들에게있어서 요청되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다. 선교와 통일운동 선교는 본질상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의 파송에 근거한다. 그러므로 선교는 통일보다 앞선다. 즉,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의 현실가운데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의 문제에 대해 부름받은 백성들은 응답해야 한다. 언젠가 "휴전선아 열려라 복음들고 가리라" 라는 글귀를 본 적이 있다. 이는 아마도 남한의 복음주의적 성향의 교회들과 그 맥락을 같이 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휴전선보다도 나약한 복음의 무능함을 표현한 듯한 인상을 준다. 이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니 휴전선이여 너는 이제 끝장이다!"라고 하는 것이 훨씬 더 복음적이고, 신앙적인 것 같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누리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이 땅에 임할 수 있는가? 에 대한 탐구와, 아빠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여 "야훼의 종(Ebed YahWeh)" 으로서의 강한 결단을 한 예언자 예수(혹은 종말론자 예수 또는 최후의 예언자) 에 대한 해석은 하나님의 통치가 고조선의 조상들을 인도하시고, 그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오늘날 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이 땅에 사는 백성(민중)들이 분단의 죄성을 깨트리고, 주체성을 회복하며, 통일을 이루는 그날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결단을 할 수 있게 하는데 대해 중요한 요청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상의 연구를 통해서 필자는 1989년도의 문익환 방북사건을 다루었고, 그것을 신학화 하여 앞으로 통일을 향해서 한국사회와 교회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지를 밝혔다. 아울러 필자는 문익환이 방북했을 때, '주체사상'에 대해 새롭게 이해한 점과 김일성이 '민족주의자'였다는 점을 회고하면서 밝혔던 문익환의 진술, 그리고 평소에 '자주'에 대해 강조했던 그의 뜻을 받들어 특별히 '주체성'을 강조하고자 했음을 밝힌다.

      • 기독교 신비주의 신학과 퀘이커교의 교회론 비평

        염남윤 계약신학대학원 대학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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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서 종교성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래서 인생들은 이 세상 저너머와 영원을 향해 동경하고 신앙한다. 또한 이세상의 위대한 영적 스승이나 장군을 추앙하면서 의지하기도 하는데 쉽게 좌절하고 인간의 한계에 실망을 하고는 절대자, 초월자, 인간이 아닌 신(柛) 을 찾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술사나, 교주, 신비주의 종교가들에게 쉽게 매료되어 영혼이 병들게 된다. 인류역사 만큼이나 신비주의 종교는 오래되고 인간의 정신세계를 면면히 이끌어 갔다. 기독교 신앙은 성경과 더불어 신비적인 요소와 초자연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창조주 하나님을 단순한 신비주의자들의 논리와 사고 속에 가두려는 신앙을 피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을 따라서 창조주의 영의 원리를 따라서 살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 퀘이커들은 신비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며 창시자 조지 폭스는 국교회를 향해서 설교하며 비난했고 청교도와 침례교인들에게도 비난의 설교를 퍼부어서 고난과 박해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들은 성경과 성례전 교리와 설교, 목사제도 까지 모두 내버렸다. 과학과 문명이 발달할수록 신비주의적 종교는 성행하여 피폐해진 인간의 정신세계와 영혼에 호소하여 매력을 끌어서 영혼을 곁길로 인도할 것이다. 이때를 위해서도 신비주의 종교와 사이비 종파를 연구해 두는 것은 필요하다. 시대가 바뀌면서 인류역사에는 신흥 종교가 출현해서 사라지는 반복적 사건이 이루어진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위임한 지상명령을 지키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일과 성경적 교훈과 사도적 교회를 유지하고 신비주의 종교와 사고로부터 인간 영혼을 구원하여 복음을 듣게 해야 하고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고 성례를 거행하여 주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세워 나가야 한다. 사도와 개혁자들의 소원하던 참교회를 이끌어가고 신학의 전통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와 성경진리의 보전을 해야 한다.

      • 루터의 음악신학 연구 : 루터의 찬송을 중심으로

        오선지 목원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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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는 종교개혁을 이끈 신학자이자 음악을 사랑하고 음악성과 실력을 겸비한 음악가이다. 이는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찬송을 통해 입증된다. 종교개혁의 역사에서 음악의 역할은 아무리 과대평가해도 부족하다. 설교, 말씀, 교리 교육 등 이외에도 종교개혁을 대중에게 알린 것은 찬송이었고, 찬송을 통해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루터에게 찬송은 살아 있는 복음의 목소리(viva vox evangelii)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음악을 도구 삼아 선포하고 가르치며 개혁을 주도했고 사람들의 믿음을 성장시키고자 했다. 이는 루터의 뛰어난 음악성과 그가 정립한 음악신학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그가 정의하는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기쁜 마음을 창조하며 사람의 감정의 주인이자 인도자로서 슬픔의 영인 사단을 내어쫓기까지 한다. 그래서 루터는 신학 다음의 자리에 음악을 두기까지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음악은 사람들과 사회에 평화를 가져다 준다. 루터는 음악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명확히 밝히며 음악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선물로 주신 음악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집중하였고 음악신학 토대 위에 37개의 찬송을 직접 작사, 작곡했다. 루터의 찬송은 찬송가의 편집과 함께 발전한다. 루터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개혁자, 음악가들의 활발한 찬송 창작활동과 인쇄업자들의 활약에 힘입어 찬송가는 폭발적 성장을 이루었고 교회와 공동체의 개별적인 믿음의 기초와 경건의 도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루터의 찬송은 예배에도 파격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자국어인 독일어로 예배하고 예배 예식의 순서에 찬송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회중 찬송을 대중화시킨다. 루터는 찬송으로 종교개혁 신학을 전하고자 했다. 찬송은 철저히 성경 말씀, 즉 복음을 기초로 한 시적 언어로 표현되었다. 루터 신학의 근간은 루터의 전형적인 공식인 율법과 복음으로부터 출발한다. 찬송 역시 율법과 복음의 공식에 기초하여 기독론, 칭의론 등의 핵심 신학 사상이 주요 선율로 등장한다. 찬송의 주제에 따라 교리문답 찬송, 전례 찬송, 시편 찬송 그리고 강림절, 성탄절 등과 같은 절기를 위한 찬송 등으로 분류된다. 율법 없이 복음을 설명할 수 없고, 복음 없이 율법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찬송에서도 율법, 복음, 성육신,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 즐거운 교환 사상 등의 신학 사상이 구분되기보다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그가 새롭게 발견한 복음과 종교개혁 신학의 핵심을 노래한다. 루터는 형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했다. 죄인이 은혜에 이른 방법, 즉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으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여정을 찬송으로 노래한 것이다. Luther, a rigorously trained, educated theologian who led the Reformation, was also a talented musician who loved music and composed numerous hymns. Hence, the role and influence of music in the history of the Protestant Reformation cannot be overestimated. Along with the Word of God, sermons of preachers and catechesis, hymns made the Reformation movement known to the public, and it would not be an exaggeration to say that the Reformation was accomplished through music. For Luther, hymns were ‘viva vox evangelii’. Using music as a tool, he preached and taught the Word of God, led the Reformation and tried to edify people’s faith. This was accomplished on the basis of Luther’s outstanding musical ability and the theology of music he had established. He defined music as a gift from God that could create joy in the heart, and as a master and guide of human emotions that could even drive Satan, the spirit of sorrow, out of the heart. Luther believed that music brings peace to individuals and society and he even put music second to theology. Luther made it clear that music is indeed a creation of God. Rather than focusing on music itself, he focused on how to utilize this gift of God. Employing this view of music, he composed and wrote 37 hymns which demonstrated progressive development along with the development of compilation of hymns. Along with Luther, contemporaries, such as reformers, musicians, and printers, contributed creative works resulting in the explosive growth of hymns. Hymns became the basis of faith and piety in the church and communities. Furthermore, Luther’s hymns brought about a radical change in worship. He worshipped in his own native language, German, and actively introduced hymns into the order of worship services, popularizing congregational hymns. Luther’s hymns made a great contribution in terms of music history as well. In line with the Renaissance, he incorporated Gregorian chants and artistic songs as a new form of hymn, and with the Reformation movement and his establishment of church music, he created a momentum for the German Choral to become the center of development of music in Europe. Luther’s Reformation theology was infused into his hymns and these hymns were expressed in poetic language thoroughly based on the Word of the Bible, that is, the Gospel. The foundation of Lutheran theology begins with the Law and the Gospel, which are typical of Luther’s formulas. In his hymns, core theological ideas such as Christology and justification, based on the Law and Gospel, appear as core melodies. The hymns were classified according to the theme of the hymn. Themes included catechism hymns, liturgical hymns, Psalm hymns, and hymns for feasts such as Advent and Christmas. Just as the gospel cannot be explained without the law, and the law cannot be explained without the gospel, so in hymns, theological ideas such as the law, the gospel, the incarnation, the righteous and the sinner (simul justus et peccator), and the pleasant exchange of ideas (fröhlicher Wechsel), cannot be separated but are rather intrinsically related; Luther sang this newly discovered gospel and the core of Reformation theology through his hymns. Luther sang the indescribable grace of God. The journey of how sinners received God’s salvation and came to grace, namely, through sola fide, sola gratia and sola scriptura was conveyed and expressed through his songs and hym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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