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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朝鮮後期 宮房 手本 硏究

        이은진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17 국내석사

        RANK : 1839

        The Kungbang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served as a living space for members of the royal family, a foundation for royal finances, and a place to perform ancestral rites. This paper examines the Subon, one of the various documents that was issued and received by the Kungbang. The Subon was a document issued by the Kungbang when reporting and petitioning the Naesusa (a government office that managed the royal family’s finances)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paper analyzed the background information of the Subon used by the Kungbang, as well as its types, administrative processes and related documents, and the contents of actual documents that are still in existence and those copied in the registry of each Kungbang. Although it was not listed in the code of laws, the Subon of the Joseon Dynasty was a versatile document that was used to both present reports as well as petitions to several government offices. The Kungbang, which was not part of a formal government office, had to avoid the restrictions of the royal court while issuing and using the document. Subons that had been issued by a eunuch, a high-ranking officer in the Kungbang system, were selected for use. When multiple Kungbang reached a consensus, the document was issued under the name of Dosubon. The documents and administrative processes of the Kungbang Subon varied depending on whether they contained an agenda to be presented to the king for consideration or a report to relevant government offices without petitioning the king. First, when a document was presented to the king for consideration, the Naesusa would attach a Subon to a Danja to make a direct appeal to the king. Depending on the period, the participation of the Yijo (a high-level Naesusa official) in the administrative process declined. Second, when a document did not contain an agenda for the king’s consideration, then a Cheopjeong was issued by the Naesusa and sent to the corresponding government office immediately. Last, an agenda on which the Kungbang requested resolution by issuing and reporting a Subon could be classified into five categories: accumulating and managing wealth, procuring goods for the royal family, performing ancestral rites, maintaining relationships with the royal family’s Wondang, and issuing appointments and punishments for palace servants. 조선 후기 궁방은 왕실 일원의 생활공간, 왕실 재정의 기반, 제사 봉행의 공간으로 존재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궁방이 발급하고 수취한 다양한 문서들 중에서 수본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수본은 조선 후기 궁방에서 내수사에 보고‧청원할 때 발급한 문서이다. 본 논문에 서는 실물로 남아있는 문서와 각 궁방의 등록에 謄書된 문서를 통해 궁방의 수본 사용 배경, 궁방 수본의 형태와 서식, 행이 과정과 관련 문서, 수본의 내용을 분석 하였다. 조선시대의 수본은 법전에 명문화되지 않았지만 다양한 아문에서 보고의 목적으로 사용하였고, 청원문서의 한 종류로도 사용되는 등 유동적으로 활용이 가능한 문서였다. 정식 아문이 아니었던 궁방은 문서 발급과 사용에 대한 조정의 제재를 피해 야만 하였다. 궁방 내무 계통의 상위에 위치한 내관이 발급한 경험이 있었던 수본을 선택해서 사용하였다. 다수의 궁방에서 공통의 의견을 낼 때에는 都手本이라는 이름 으로 문서를 발급하였다. 궁방 수본의 관련 문서와 행이 과정은 국왕에게 入啓하는 사안인지 또는 입계하지 않고 해당 아문에 보고하는 사안인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첫째, 국왕에게 입계하는 경우에는 내수사가 단자에 수본을 점련하여 국왕에게 직접 입계하였다. 이때 시기에 따라 내수사의 상급 아문인 이조가 행이 과정에 참여하는 비중이 낮아졌 다. 둘째, 국왕에게 입계하지 않는 경우에는 내수사에서 첩정을 발급하여 곧바로 해당 아문에 보고하였다. 마지막으로 궁방이 수본을 발급하여 보고하고 해결을 요청한 사안은 재산의 형성과 운영, 왕실의 물자 조달, 제사의 봉행, 왕실 願堂과의 관계 유지, 宮屬의 임명과 처벌 5가지로 분류할 수 있었다.

      • 유아의 놀이성과 자아탄력성이 자아존중감에 미치는 영향

        이은진 동양대학교 2019 국내석사

        RANK : 1839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scertain how the playfulness and ego-resiliency of young children 4~5 years of age affect their self-esteem. This study will establish the importance of playfulness and ego-resiliency as the individual intrinsic / psychological factors affecting the self-esteem of young children, while also providing the base materials for efforts to devise measures for enhancing their self-esteem. As such, the research questions pursued in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what are the perceptions of playfulness, ego-resiliency, and self-esteem in young children? Second, what is the relationship between playfulness, ego-resiliency, and self-esteem in young children? Third, how do the playfulness and ego-resiliency of young children affect their self-esteem? The subjects of this study included 198 children aged 4~5, who were enrolled in early childhood education centers located in ‘B’ metropolitan city and ‘Y’ city in Gyeongsang-buk Province. The scale developed by Barnett (1990) for children and young children based on Lieberman (1965)’s definition of playfulness was used to measure playfulness. The scale developed by LeBuffe & Naglieri (1999) was used to measure the ego-resiliency of young children. The scale developed by Hwang H.I. & Jae H.S. (2016) was used to measure the self-esteem of young children. Based on the questionnaire that was finalized via preliminary studies, the main study was conducted from Jan. 2nd to Jan. 18th, 2019. PASW18.0 software for Windows was employed to conduct analysis of the research questions. The findings regarding each research question were as follows. First, the perceptions of the playfulness, ego-resiliency, and self-esteem of young children were found to be as follows. The playfulness of young children exhibited higher-than-average levels, with the highest playfulness observed for the expression of joy, followed by physical spontaneity, social spontaneity, sense of humor, and cognitive spontaneity. The ego-resiliency of young children also exhibited higher-than-average levels, with the highest levels observed for attachment, followed by initiative and self-control. Likewise, young children’s self-esteem also exhibited higher-than-average levels, with the highest levels observed for self-worth, followed by self-responsibility, relationships, and achievements. Second, regarding the correlations among the playfulness, ego-resiliency, and self-esteem of young children, results indicated that there were significantly positive correlations between playfulness and ego-resiliency, playfulness and self-esteem, and ego-resiliency and self-esteem. Third, regarding the effects of young children’s playfulness and ego-resiliency on their self-esteem, results of the 1st stage model that analyzed how playfulness affected self-esteem indicated that playfulness explained 54% of self-esteem. The 2nd st age model, which analyzed how playfulness and ego-resiliency affected self-esteem, indicated that playfulness and ego-resiliency explained about 79% of self-esteem, suggesting that the inclusion of ego-resiliency improved explanatory power by 25%. Looking at how the subcomponents of playfulness and ego-resiliency of young children affected their self-esteem, 69% of self-esteem in the 1st model was explained by the subcomponents of playfulness such as social spontaneity, cognitive spontaneity, expression of joy, and sense of humor. In the 2nd st age model, which examined how the subcomponents of playfulness and ego-resiliency affected self-esteem, 81% of self-esteem was explained by factors such as initiative, cognitive spontaneity, attachment, and social spontaneity, in descending order. These results point to the future need to consider methods for strengthening self-esteem among young children, such as the implementation of early education curricula that emphasize playfulness and measures for enhancing ego-resiliency. Furthermore, when devising activities for strengthening self-esteem in young children, efforts will be needed for enhancing playfulness and ego-resiliency.

      • 초등학생의 영어 강세 및 비강세 모음 발음 능력 신장 방안 연구

        이은진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1839

        본 연구의 목적은 강세 모음과 비강세 모음의 발음 교육에 있어서 두 가지 상반되는 지도 방법을 적용하여, 발음 교육을 받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발화 변화 양상을 알아보고, 이를 통해 어떤 방법이 발화 변화에 더 효과적인지를 알아보고자 하는 것이다. 연구의 실행을 위해, 충청남도 천안시 소재 B초등학교 6학년 2개 학급을 각각 실험학급 A, 실험학급 B로 선정하고, A학급은 기계적 훈련 방법으로, B학급은 의사소통 활동 방법으로 강세와 비강세 모음의 발음을 지도하였다. 실험수업에서 사용된 단어는 강세와 비강세 발음을 분명하게 대조할 수 있는 단어 쌍으로 선별하였으며 실험을 위한 수업은 주 3회, 총 16차시(A학급은 17차시)에 걸쳐 실시하였다. 발음 수업은 정규 영어 수업의 도입 단계에서 연구자가 10분 동안 지도하였다. 본 실험 수업의 효과를 검증하기 위하여 사전(1차), 발음 수업 직후(2차), 발음 수업 일주일 후(3차), 발음 수업이 종료된 약 4주 후(4차)에 각 실험학급 학생들의 발음을 녹음하여 강세 모음과 비강세 모음의 발화 변화를 음향적, 청각적으로 분석하였다. 구체적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두 학급 모두 발음 교육 전후 비강세 모음의 포먼트 분포에는 변화가 별로 없었지만 강세 모음의 포먼트에 많은 변화가 나타나면서 강세 모음과 비강세 모음을 비교적 구분하여 발음하였다. 또 전체적인 포먼트 분포 양상에 따라 기계적 훈련이 더 큰 효과를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음조에 대하여 두 실험학급 모두, 그 구현 능력이 향상되었다. 강세 모음 음조 구현 능력은 발음 교육을 받은 시간이 연속적으로 누적될수록 향상되었다. 비강세 모음의 음조에 있어서는 발음 교육을 받은 시간의 누적에 따른 향상은 아니며 전-후의 향상만 있었고, 발음 교육 직후의 향상된 수준이 장기적으로 유지되었다. 음조 차의 경우, 발음 교육을 받은 시간이 연속적으로 누적될수록 더욱 잘 구현하였다. 강세 모음 음조, 비강세 모음 음조, 음조 차 구현 능력의 향상에 기계적 훈련이 더욱 효과적이었다. 셋째, 음장에 대하여 두 실험학급 모두, 그 구현 능력이 향상되었다. 강세 모음의 음장 구현에서는 발음 교육을 받은 시간의 양과 관계없이 발음 교육 전-후의 향상만 있었고 2차시기의 향상된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비강세 모음의 음장은 4차시기까지 꾸준히 짧게 구현되었으나 그 향상 정도가 녹음 시기에 따라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았다. 지도 방법에 대해서는 특정한 한 가지 방법의 영향이 더 뚜렷하였다고 볼 수 없었다. 음장 차 실현에 있어서, 발음 교육을 받은 시간의 누적에 따른 변화는 없었고 발음 교육 전-후의 향상만 있었으며 4차시기까지 발음 교육 직후에 향상된 수준을 유지하였다. 강세 모음 음장, 음장 차 구현 능력의 향상 및 즉각적인 발음 교육의 효과에 있어서 기계적 훈련이 더 효과적이었다. 넷째, 두 실험학급 모두, 정확성이 향상되었다. 발음 교육을 받은 시간의 누적에 따라 강세 모음 발화 정확성이 점차 향상되었다. 두 실험학급에서 강세 및 비강세 모음 모두 발음 지도 직후에 가장 큰 향상을 보였다. 비강세 모음 발화의 정확성은 발음 교육을 받은 시간의 누적에 따른 변화는 없었으며 발음 교육 전-후의 차이만 유의미하였다. 이후 더 이상의 향상은 없었지만 발음 교육 직후의 향상된 수준을 4차시기까지 유지하였다. 기계적 훈련이 강세 및 비강세 모음 정확성 향상에 좀 더 효과적이었다.

      • 19~20세기 초 견직물에 관한 연구

        이은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04 국내박사

        RANK : 1839

        본 논문은 조선 순조의 즉위년인 1800년부터 순종이 서거한 해인 1926년경까지 사용되었던 견직물에 관하여 고찰하였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이 시기는 세도정치의 병폐와 외세의 개입으로 인하여 조선왕조의 체제가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가운데, 1910년 한일합병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정치적인 막이 내려지고, 1926년 마지막 왕인 순종이 서거함으로써 왕실마저도 사라지게 된 시기이다. 이 시기는 현대사회에 남아 있는 전통문화의 근본이 되는 시기이며 마지막 왕실문화가 존재하였던 시기이므로, 당시의 견직물을 연구하는 것은 전통직물의 명칭과 특성에 혼란이 생겨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 이전 전통직물의 명맥을 파악한다는데 의의가 있다. 본 논문에서는 19∼20세기 초에 사용되었던 견직물의 종류 및 명칭, 길이와 폭, 가치, 용도, 문양, 명칭에 따른 특성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견직물의 종류로는 원사 및 조직의 특성에 따라 平織物인 紬·초·絹, 綾織物인 綾, 냑직물인 紗·羅, 수자직물 또는 重織物인 緞이 있었다. 당시의 대표적인 직물이 총망라되어 있는 『□긔』에 기록된 각 직물의 수량은 紬>紗>羅>緞>초>絹>綾의 순이었으며, 특히 紬와 紗의 비중이 월등히 높았고 그에 비하여 絹과 綾은 극히 미미하였다. 한편 19∼20세기 초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도 수많은 직물이 생성·변화·소멸하였다. 특히 1900년을 전후하여 전통직물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전 시기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던 방사주·수주·정주 등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사라졌으며, 삼팔주·노방주 등은 새로이 생겨났다. 또 면주·토주 등은 그 명칭이 세분화되거나 변형되기도 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사용되기 시작한 여러 직물 중에서 노방주·생고사·숙고사·진주사·국사·양단 등은 전통직물의 주종을 이루게 되면서 현대까지도 계승되고 있다. 견직물 1疋의 길이와 폭은 직물의 종류에 따라 다양하였다. 직물의 종류에 따라 폭이 다른 것은 일반적인 일이지만 1疋의 길이가 직물에 따라 달랐던 것은 매우 특이한 점이다. 1疋의 길이가 가장 다양하였던 것은 紬로서 752∼2350cm였으며, 초는 1410cm, 紗는 1371.60∼1410cm, 羅는 1410∼1828.80cm, 緞은 1371.60∼2286.00cm였다. 紬 종류는 폭도 매우 다양하였는데, 대부분 32.9∼47cm 정도였고 가장 넓은 것은 84.6cm나 되었다. 초는 대부분의 紬보다 조금 넓은 51.7cm였으며, 紗와 緞의 폭도 비교적 다양한 편이었다. 일반적인 紗의 폭은 61.1cm로 당시 넓은 폭으로 생산되었던 직물 중 하나였으며, 종류에 따라 38.10∼68.58cm로 제직되었다. 緞의 폭은 47∼75.60cm이었다. 가장 좁은 폭으로 직조된 직물은 冒羅로서 그 폭이 28.2cm였는데, 이는 冒羅가 관모를 싸는데 사용된 직물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밖에 絹 종류는 通絹이 47cm, 하부타에[羽二重, はぶたえ]가 38.10∼68.58cm, 綾 종류는 小綾이 32.9cm, 大綾은 51.7cm였다. 견직물의 가치는 직물의 종류에 따라 달랐는데, 특히 紬는 종류가 다양했던 만큼 그 가치도 최저가부터 최고가까지 매우 다양하였으며, 초와 絹은 직물의 종류는 많지 않았지만 모두 고급 紬 수준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또 紗·羅와 緞은 가치를 '艮' 즉 '銀'으로 표기한 고급 직물이었다. 각 직물의 10,000㎠당 가치를 비교하여 보면 大緞>紗>大綾≒走紗>초>紬의 순으로 나타나 최고가의 견직물은 緞종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緞이 최고가였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제직 시 필요한 원사의 양이 많고, 수자직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보편화된 까다로운 제직법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緞 다음으로 가치가 높았던 것은 紗였는데, 紗가 비교적 얇은 직물임에도 불구하고 고가였던 것은 경사가 교차되는 織으로 직조해야하는 까다로운 공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견직물은 종류에 따라 용도에 차이가 있었다. 紬는 속옷과 상의의 비중이 매우 높았고, 예복 및 관복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며 포에 사용된 경우도 매우 적었다. 초는 각각의 직물에 따라 사용된 용도가 달라서 곡생초는 주로 속옷에 사용되었으며, 궁초는 왕이나 동궁의 최고의 예복에만 사용되었다. 또 絹과 綾은 매우 적게 사용되었는데, 하부타에는 兩殿의 핫바지와 치마에, 倭繒은 침구류에, 別紋綾은 황후의 누비소고의에 사용되었다. 紗는 가장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갑사는 당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직물이었다. 반면 현재 가장 보편적인 전통직물로 생각되고 있는 숙고사·생고사는 속옷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상의·하의·포 등의 겉옷으로만 사용되었다. 또 궁사는 용포·폐슬 등에만 사용되어 최고급 紗였음을 알 수 있다. 羅는 항라와 숙항라가 일부 예복 및 관복으로만 사용되었을 뿐 대부분 속옷으로 사용되었다. 緞은 비교적 다양한 용도에 사용되었던 편이지만, 羅가 주로 속옷용으로 사용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단 1건도 속옷에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특징이다. 새롭게 규명된 문양은 별문·백복문·백접문·수복문·오호로문·접문의 여섯 가지이다. 별문은 우리 왕실을 상징하였던 문양에서부터 시작되어, 주로 왕실에서만 사용하였던 용문·봉문과 화문·문자 등이 커다란 원형으로 이루어진 문양을 지칭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별문의 의미가 확대되어, 원형이 아닌 여러 가지 형태의 문양도 별문이라 호칭하게 되었다. 백복문은 '百蝶紋' 즉 '박쥐'가 가득 찬 무늬'이며, 백접문은 '百蝶紋' 즉 '나비가 가득 찬 무늬'이다. 수복문은 '壽輻紋', 즉 '壽字와 박쥐가 혼합된 문양'이다. 오호로문은 호로병박 다섯 개가 좁은 입구부분이 중심으로 향하게 원형을 이루도록 배치되고 각각의 호로병박 사이에는 넝쿨이 배치되어 있는 형태의 문양이다. 접문은 나비문[蝶紋]과 창살문[蝶紋]의 두 가지로 분류된다. 명칭에 따른 특성을 규명한 직물은 改只紬·潞州紬·三八紬·潞方紬·方絲紬·十兩紬·合絲紬·綿紬·水紬·吐紬·斑紬, 숙초·련초·궁초·영초, 厚紙絹·羽二重·倭繒, 甲紗·純仁·庫紗·官紗·走紗·銀條紗·廣紗·熟素·倭紗·도리사·貢洋紗·羅紗, 閏州羅·銀羅·苧杭羅·唐杭羅·洋杭羅·秋羅·乙羅·銀羅, 庫緞·模本緞·漢緞·大緞·洋緞·倭緞·錦緞 등이다. 이상 19∼20세기 초에 사용되었던 견직물을 살펴본 결과, 현재 전통직물로 여겨지고 있는 여러 직물들이 이 시기를 전후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는 잊혀졌으나 당시에는 이들 외에도 수많은 직물들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본 논문에서 직물의 길이와 폭, 용도, 문양, 명칭에 따른 특성 등에 관한 분석 결과는 조선 말기 복식유물에 사용된 직물의 타당한 명칭을 밝히는데 일부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또한 박물관 소장유물의 실견이 어려워 본 논문에서는 문헌연구 결과의 일부만을 유물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 본 논문의 연구결과를 토대로 유물과의 연계연구가 더욱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This thesis emphasizes on silk fabrics use in the period of 1800 and 1926, when the king of Joseon dynasty Sun-jo(純祖) ascended to the throne, and when King Sun-jong(純宗) passed away. From the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while Joseon Dynasty's society was falling apart due to the political power's evil practices and foreign power's intervention, the dynasty came to an end by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한일합병). A treaty was signed, and it was also the time when the last dynasty ended as the last King Sun-jong(純宗) had passed away in 1926. As this time it was the last traditional society to be the primary of the present age, and the existence of last era of royalty. Thus, studying the silk fabrics of that time has the meaning of understanding the existence of traditional fabrics prior to the Japanese imperialism. This thesis consists of four different categories which include silk fabrics' type and name, length and width, value, use, patterns, and the characteristic according to the name. First, silk fabrics can be divided into 4 types, depending on the character of its primary thread and structure. It is divided into plain weaved fabrics like Ju(紬), Cho(초), and Gyeon(絹), twill weaved fabrics like Reung(綾), gauze weaved fabrics like Sa(紗) and Ra(羅), and satin weaved fabrics or compound weaved fabrics like Dan(緞). According to Bal-gui(발긔), a book having almost all the fabrics at that time, each fabrics' quantity was in Ju(紬)>Sa(紗)>Ra(羅)>Dan(緞)>Cho(초)>Gyeon(絹)>Reung(綾) order. Especially, the specific gravity of Ju(紬) and Sa(紗) were extremely high while Gyeon(絹) and Reung(綾) were extremely small. Meanwhile, during the short time between the 19th century and the early 20th century, there were various parts of the fabric creation, development, and extinguishment. Especially, there was a remarkable change with the traditional fabrics around the year 1900. Bangsagju(방사주), Suju(수주), and Jeongju(정주), which were commonly used before this era, disappeared. On the other hand, Sampalju(삼팔주) and Nobangju(노방주) were newly created. For Myeonju(면주) and Toju(토주), their names were segmented and changed. Especially, various fabrics like Nobangju(노방주), Saenggosa(생고사), Sukgosa(숙고사), Jinjusa(진주사), Guksa(국사), Yangdan(양단), and so on, which were used during this period had been the main of the traditional fabrics, were inherited to the present. Second, the length and the width of 1 Pil(疋) silk fabrics are various depending on its fabrics type. It is normal for the width being different depending on the type of fabrics, but for 1 Pil(疋)'s length being different is very unusual. The lengths of 1 Pil(疋) for various fabrics are as follows: Ju(紬)(752∼2350cm), Cho(초)(1410cm), Sa(紗)(1371.60∼1410cm), Ra(羅)(1410∼1828.80cm), and Dan(緞)(1371.60∼2286.00cm). The width of Ju(紬) also varies between 32.9∼47cm, and the widest was 84.6cm. Cho(초) was a bit wider than most of the Ju(紬) with 51.7cm, and the width of Sa(紗) and Dan(緞) were also comparatively various. A regular width of Sa(紗), which was a fabric made in wide width, was 61.1cm, and some were made up to 37.6∼68.5cm. Dan(緞)'s width was 47∼75.60cm. The fabric woven into the smallest width was Mora(冒羅) with the width of 28.2cm. This shows that Mora(冒羅) must have been the fabric to wrap the official hat. And for Gyeon(絹); Tong-gyeon(通絹) was 47cm, and Habuta-e(羽二重) was 38.10∼68.58cm, and for Reung(綾); Soreung(小綾) was 32.9cm and Daereung(大綾) was 51.7cm. Third, the value of silk fabrics are different by its type. Especially, the Ju(紬) type fabrics were highly various than the other fabrics, and their value was even more diverse. Cho(초) and Gyeon(絹), which didn't have that many kinds but had the value of a high quality Ju(紬). Sa(紗), Ra(羅), and Dan(緞), are high class fabrics, and their values are marked in Gan(艮) also called Silver(銀). Comparing each fabrics value per 10,000㎠, the order came out in the following order: Daedan(大緞)>Sa(紗)>Daereung(大綾)≒Jusa(走紗)>Cho(초)>Ju(紬). Dan(緞) type was the most valuable silk fabric. The reason why Dan(緞) was the most expensive fabric was that, when weaving the fabric, it required a large amount of yarn, and it had begun to become a common fabric use during the Joseon era. Sa(紗) was the next high valued fabric. Although Sa(紗) was a rather thin fabric, it was expensive because it had to go through a complicated work process. Fourth, silk fabrics had different use according to its type. Ju(紬) was mostly used in making underwears and upper garments, and was not used in making full dresses and official uniforms. Each fabric of Cho(초) had different usage. Goksaengcho(곡생초 was usually used in making underwears, and Gungcho(궁초) was only used in making full dress for the King or Queen. Gyeon(絹) and Reung(綾) were rarely used. Habuta-e(羽二重) was for cotton-padded trousers and dresses, Waejeung(倭繒) for bedclothes, and Byeol-mun-reung(別紋綾) for the Queen's quilted jacket. Sa(紗) was used in various purposes, and especially, Gab-sa(甲紗) was used the most commonly. On the other hand, the Sukgosa(熟庫紗) and Saenggosa(生庫紗), the most common known traditional fabric, weren't used in making underwears but were used mostly for outer garments like upper garments, lower garments, and Po(袍). And Gungsa(宮紗) was the most valuable Sa(紗), used only for Yongpo(龍袍) and Pyeseul(蔽膝). Ra(羅) was mostly used for underwears. Only Hangra(杭羅) and Sukhangra(熟杭羅) were used for particular full dresses and official uniforms. Dan(緞) was used in various purposes, but it was not used in any underwears. Fifth, there are six newly examined patterns: Byeol-mun(別紋), Baek-bok-mun(백복문), Baek-jeop-mun(百蝶紋), Jeop-mun(접문), Su-bok-mun(壽福紋), and O-ho-ro-mun(五葫蘆紋). Byeol-mun(別紋) was assumed to symbolize the royal family. The shape of Byeol-mun(別紋) originated from the character of the royal family. Later, all circular patterns such as dragon patterns, phoenix patterns, flower patters and characters, which were used only for the royal family, were considered as Byeol-mun(別紋). Baek-bok-mun(백복문) had a pattern full of 'bats(복)', and Baek-jeop-mun(百蝶紋) had a pattern full of 'butterflies(蝶)'. Jeop-mun(접문) was classified into 'butterfly patterns(蝶紋)' and 'traditional window flame patterns(접문)'. Su-bok-mun(壽福紋) had a pattern combined with 'the 壽 character(壽字)' and 'bats(복)'. O-ho-ro-mun(五葫蘆紋) had five-gourd-shaped patterns that form a circle, turning their narrow mouth to the center, and vines between each two gourds. Sixth, textiles whose features have been examined are Gaejiju(改只紬), Nojuju(潞州紬), Sampalju(三八紬), Nobangju(潞方紬), Bangsagju(方絲紬) Simnyangju(十兩紬) Hapsaju(合絲紬), Myeonju(綿紬), Suju(水紬), Toju(吐紬), Banju(斑紬), Sukcho(숙초), Ryeoncho(련초), Gungcho(궁초), Yeongcho(영초), Hujigyeon(厚紙絹), Habuta-e(羽二重), Waejeung(倭繒), Gosa(甲紗), Sun-in(純仁), Gosa(庫紗), Gwansa(官紗), Jusa(走紗), Eunjosa(銀條紗), (廣紗), Suksu(熟素), Waesa(倭紗), Dorisa(도리사), Gong-yangsa(貢洋紗), Rasa(羅紗), Yunjura(閏州羅), Eunra(銀羅), Jeohangra(苧杭羅), Danghangra(唐杭羅), Yanghangra(洋杭羅), Chura(秋羅), Eulla(乙羅), Eunra(銀羅), Godan(庫緞), Mobondan(模本緞), Handan(漢緞), Daedan(大緞), Yangdan(洋緞), Waedan(倭緞), and Geumdan(錦緞). After researching the silk fabric use in the 19th century through the early 20th century, it was discovered that most of traditional fabrics were started to be used from this time, and it was figured that there existed more additional fabrics, which are not being used today, in that time period. The result of analyzing fabrics' lengths and widths, use, patterns, and the characteristics according to the name in this thesis is expected to help a bit in clarifying the proper name for the fabrics used in the late Joseon era dress relics. However, only a few relics were used in writing this thesis, but in the future, there should be additional research to preserve the relics.

      • 교육대학원 중국어 교육전공 교과과정 연구

        이은진 숙명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2007 국내석사

        RANK : 1839

        중국어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어 교육을 주체적으로 이끌어 나갈 양질의 교사를 확보하는데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들의 재교육 기관이자 양성기관인 교육대학원 중국어 교육학과의 교과과정을 검토하여 문제점을 제시하고 중국어 교육학과의 교과과정으로서 지향해야 할 기본방향을 모색해 보았다. 교육과정 분석에 있어서는 연구 대상은 서울 소재 9개 교육대학원을 중심으로 하였다. 중국어 교육학과의 교육목표를 살펴보았는데 각 교육대학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긴 하지만, 9개 대학원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교육목표는 중국어 분야에 대한 연구 능력과 교과 교육능력을 가진 창조적인 교육전문가의 양성이었으며 이는 현직교사의 재교육과 신규 교사 양성의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전제로 하고 학교별 중국어 교육전공의 교과과정을 중국어 교육학과 중국어 내용학으로 분류하고, 교육대학원 교과과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교과교육학에 대해 분석하였으며, 내용의 타당성을 위하여 설문조사의 방법을 체택하여 연구한 결과,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문적인 자질과 능력을 갖춘 중국어 교육 전문가를 양성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교육대학원 수업의 질이 달라져야 한다. 둘째, 중국어 교육학과 중국어 내용학이 균형있게 다루어져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중등학교 중국어 교육내용과 보다 더 밀접하게 연계되어진 교육과정이 필요하다. 넷째, 중국어 교육학을 전문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교수(강사)진이 필요하다. 다섯째, 전공과목의 추가 개설 및 융통성 있는 행정운영이 필요하다. 여섯째, 교육과정에 있어서 한두 과목은 임용고사를 위한 과목이 개설되었으면 한다. 본 연구는 서울시내 중국어교육전공을 설치한 9개 교육대학원에 한하여 실시되었다. 그러나 후속 연구에서는 중국어교육전공을 설치한 우리나라 교육대학원 전체를 대상으로 보다 포괄적이고 다각적인 차원에서의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在提高汉语教育质量的关键便在于能否确保优秀老师的前提下,通过研究汉语老师再教育及培养机关的教育硏究所汉语教育系教学课程,不但提出了课程上的问题,而且摸索了汉语教育系的教程应该志向的远大方向。 主要以首尔所在的9所教育硏究所为主进行教育课程分析研究。虽然各所硏究所的教育目标有所不同,但9个硏究所共同提出的教育目标为培养拥有汉语研究能力和课程研究能力的创造性教育专家。在此可见,这里隐含着现任老师继续教育和新老师培养的两大意义。 以上述内容做为前提,将学校别汉语教育专业教程分类成汉语教育学与汉语内容学,且分析教育硏究所教程的核心的科目教育学,还为了内容的妥当性,采取问卷调查的方法进行研究。通过这些研究,得到的主要结论如下。 第一,教育硏究所教程必须转换为能培养备齐天资和能力的汉语教 育专家的方向。 第二,汉语教育学与汉语内容学应该要有均衡运作。 第三,需要与中高等学校汉语教育内容更密切连接的教程。 第四,需要能专门教汉语教育学的教授团。 第五,需要专业科目的追加开设及灵活的行政运营。 第六,希望在教育课程上,开设一或两个有关任用考试科目。 本研究只局限在首尔市内开设汉语教育专业的9个教育硏究所进行的。所以,希望在后续研究里可以以设置汉语教育系的我国教育硏究所全体为对象实现更包括而多方面的研究。 因本研究前所未有,未免不正之处,只望能起到抛砖引玉的作用。

      • 해방 이후의 한복용 소재에 관한 연구

        李銀眞 이화여자대학교 1999 국내석사

        RANK : 1839

        본 논문은 해방 이후의 한복용(韓服用) 소재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여기에서 '소재'라는 용어는 섬유나 사(絲)가 아닌 한복을 이루는 포(布) 즉 옷감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연대별 한복 소재 산업의 변화와 소재의 경향을 고찰하고 이를 토대로 연대별 소재를 5가지 유형으로 분류하였다. 분류된 각 소재들의 특성은 명칭, 섬유 재료, 직조상의 특징, 가공법 및 후처리, 사용된 연대, 계절, 용도 등을 중심으로 기술하였으며 그 실증 사진을 제시하였다. 연대별 소재의 경향은 다음과 같다. 45년에서 50년까지는 해방의 혼란 속에서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틀을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사회 전반적인 혼란으로 이 시기의 의료(衣料) 사정은 궁핍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명, 광목(廣木) 등을 사용하였고, 미국 및 우방으로부터의 구호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의료(衣料)들이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또 일제 시대부터 민족 자본으로 존재하였던 조선견직(朝鮮絹織) 등 몇몇 기업에 의해 숙고사(熟庫紗), 조견단(朝絹緞), 뉴똥 등의 견직물(絹織物)이 생산되기 시작하였다. 50년대에는 해방 이후 독립국가로서 기틀을 세우고자 노력하던 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함으로서 다시 한번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휴전과 더불어 전쟁의 복구가 생활필수품 산업 위주로 이루어짐에 따라 53년경에는 의료(衣料) 사정도 호전되었다. 이 시기에는 무명, 광목(廣木), 옥양목(玉洋木) 등의 면직물(綿織物)이 주로 사용되었고, 조선견직(朝鮮絹織) 등에서 조견단(朝絹緞), 호박단(琥珀緞), 뉴똥, 모본단(模本緞), 법단(法緞) 등의 견직물을 생산하여 의료(衣料)가 다양해졌다. 또한 해방과 한국전쟁 과정을 통해 유입된 나일론이 유행하여 다후다(Taffeta, タフタ), 곰보 나일론, 나야가라 등의 새로운 소재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으며, 외국산을 선호하여 홍콩, 일본 등지에서 양단(洋嚴), 벨뱃(Velvet, ビロ-ド), 오빠루(Opal fabric, オパ-ル) 등이 밀수입되어 사용되었다. 60년대에는 50년대부터 유입되기 시작한 합성섬유가 크게 유행을 하여 양장과 한복의 겸용으로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 한복용으로 사용된 소재는 레이스(Lace), 반짝이소재, 우라기리(うらきり), 후로킹(Flocked pile fabric, フロッキ-), 오빠루(Opalfabric, オパ-ル), 춘추 벨뱃, 지지미(ちぢみ) 등이다. 이들 소재는 표면의 입체감을 통해 장식성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70년대에는 전통 소재인 양단(洋緞), 뉴똥 등이 종래의 천연섬유뿐만 아니라 합성섬유로 만들어져서 그 관리와 가격 면의 실용성 때문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소재 자체의 표면 입체감을 통하여 장식성을 추구하였던 60년대의 경향에서 벗어나 소재의 표면에 금박, 수, 날염, 그림 등을 더함으로써 장식성을 추구하였다. 80년대에는 경제발전, 사회안정, 생활수준의 향상이 이루어졌고 86아시안 게임, 88올림픽을 개최하였다. 이에 따라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한복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섬유 재료 변에서는 천연섬유를 선호하는 경향으로 바뀌었다. 또한 현대적 주거 환경의 변화에 따라 냉·난방이 일반화되면서 새로운 것을 통해 이윤을 추구하려는 업계의 판매 전략과 맞물려 한복용 소재의 계절 구분이 불분명해졌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노방주(老紡紬), 모시 효과를 낸 실크 직물 등이 일명 '사철깨끼'라고 부르는 4계절용 소재로 사용되었다. 90년대에는 4계절용 한복의 유행이 한풀 꺾이고 자연주의, 복고주의 경향에 영향을 받아 계절감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였다. 모시, 항라(亢羅), 숙고사(熟庫紗), 갑사(甲紗), 자미사(紫薇紗), 모본단(模本緞) 등의 전통 소재들이 다시 등장하는 한편,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생활 한복으로 관심이 옮겨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90년대 후반에는 한복 입는 날의 선포, 한복 착용자의 고궁, 박물관 무료 입장 실시 등의 국가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IMF 등의 경기 침체에 따라 한복 산업도 위축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연대별 소재들을 다시 조직을 기초로 평직(平織), 능직(綾織), 주자직(朱子織), 사직(紗織)으로 분류하고 조직에 따라 분류할 수 없는 것들은 기타 소재로 분류하였다. 본 연구에 사용된 총 90점의 소재는 평직 30점, 능직 2점, 주자직 27점, 사직 10점, 기타 21점으로 평직과 주자직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비해 능직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은 것이 특징이었다. 또 편성물, 레이스(Lace), 첨모 소재 등의 기타소재도 21점으로 적지 않은 수를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소재들은 주로 60년대에 양장용 소재가 한복용으로도 사용된 경우로 매우 특징적인 경향이다. 한편, 본 연구 과정에서는 현재 우리 나라의 한복용 소재의 명칭에 대한 분류와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각 연대별로 다양한 소재가 등장하고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는 기술 발전과 함께 소재 자체가 다양화되고 있기 때문이지만, 동일한 소재도 각 회사의 상품명, 원산지, 조직이나 가공의 미미한 변화 등에 따라서 서로 다른 명칭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학계와 업계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분류와 명명, 소재집의 제작 등 전통 소재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 작업이 절실히 요구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can the textiles having been used for Hanbok (韓服) since the 1945 Liberation. Now, at the threshold of the 21th century, it's a good time to arrange one side of the trends in Hanbok by looking into its textile development during the latter half of the passing century. This paper states those backgrounds and the situation of textile industry related to Hanbok. On the basis of this, the popularized textiles of each term and their characteristics are arranged according to times, names, seasons and uses for women or men. Photographs of real textiles and their structures are also presented. The trends of each term are as follows. From 1945 to 1950, in the middle of disorder of this Liberation term, people made efforts to found the basis of policy, economy, society, and culture. Because of the general disorder of society, the clothing situation was very bad, so the majority of people wore clothing of cotton (Moomyung 무명 or Kwangmok 廣木). Various textiles including relief goods from America and other friendly nations began to come in at this term. Silk fabrics like Chosun silk fabrics, having established with the capital of our nation during the Japanese Imperial Rule and existed then, and other factories. In the 50s, while people making efforts to set up much more independent country, the Korean war broke out and they suffered from another great confusion. but with the armistice, rehabilitation began along with the industrial concentration of daily necessaries. As a result, the clothing situation changed better. During this term, cotton(Moomyung and Kwangmok), muslin(Okyangmok 玉洋木), and Poplin were popularized. Chosun silk fabrics manufactured silk fabrics such as Chokyundan(朝絹緞), Hobakdan(琥珀緞), Newttong(뉴똥), Mobondan(模本緞), Po˘pdan(法緞). People could use more different kinds of textile then. In addition, Nylon, which began to come in during the Liberation and the Korean War, seized most of people. Such nylon fabrics as Taffeta, Kombo-Nylon, and Niagara(나야가라) were the favorites. Besides, they preferred foreign-made, so that fabrics like Yangdan(洋緞), Velvet, and Opal fabric were smuggled from Hongkong or Japan. In the 60s, Chemical fibers, beginning to come in from the 50s, were their favorites, with which they made Hanbok and Western style dresses as well. During this term, Lace, golden or silvery, fiber fabric, Woorakiri(ぅらきり), Flocked pile fabric, Opal fabric, Spring-and-Autumn Velvet, and Chichinu(ちちみ) were the materials for Hanbok. They were chemical fiber fabrics and their characteristics were to have an cubic and ornamental effect on the surface. In the 70s, Yangdan, Newttong, and other typical fabrics for Hanbok were manufactured with chemical fibers. Such chemical fiber fabrics widely spread because of their lower prices and practicality. During this term, the trend of the cubic and ornamental effect on the surface in the 60s disappeared. Instead, they intended to give the ornamental effect by putting gold foil, embroidery, printing, and pictures on the surface of the fabrics. In the 80s, with the economic growth, social stability, high standard of living, and '86 Asian Games and '88 Summer Olympic Games held in our country, people got much more interested in our country, people got much more interested in our culture, together with our traditional costume, Hanbok. According to this, people had a tendency to prefer natural fiber fabrics. And there were no seasonable fabrics for Hanbok during this term, as all-year-round fabric like Nobangzu(老紡紬) was in common use. In the 90s, above all-year-round fabric became unpopular under the influence of naturalism and reactionism, and seasonable fabrics reappeared. In spite of such governmental efforts as proclamation of "The Day of Wearing Hanbok." in December, 1996 and "Free Admission to Ancient Palaces and Museum for wearing Hanbok." in 1997, the Hanbok Industry became depressed under the IMF system we came across. But owing to the increasing interest in our typical fabrics like Mosi(紵), Mobondan(模本緞, 募本緞), and Hangra(亢羅) began to be in use again. Interviews and market research showed that there are too many problems in classifying and naming textiles, that is there are no consistent ways to do it. For example, one manufacturing process, another names the same kind after his own way. and other call it their own way according to its brand or company, etc. Moreover, a lot of technology having come in by way of Japan, inconsistency gets higher. Consequently, it is highly desirable that academic authorities concerned textiles should classify and name them consistently and make "a collection of Materials for Hanbok Clothing" through which our textiles could be called commonly right.

      • 도덕교육의 목적으로서의 誠

        이은진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4 국내석사

        RANK : 1839

        본 연구에서는 誠에 관한 유학의 논의를 도덕교육과의 관련에 초점을 두고 고찰하였다. 誠은 원래 행위를 수식하는 부사로 쓰이다가, 『중용』에 이르러 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격상되었다. 『중용』에 의하면, 誠은 하늘의 도이고, 誠으로 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 하늘은 우주만물을 생성하고 운행시키는 궁극적 원인이자, 근본적 존재이다. 誠은 이 같은 우주만물의 운행이 애쓰지 않고도 저절로, 그리고 끊임없이 지속되는 양상을 일컫는다. 그리고 하늘을 지향하고 誠을 실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다. 말하자면, 誠은 인간의 마음이 하늘과 하나가 된 ‘天人合一’을 뜻한다. 唐 중기부터 시작된 유학을 재건하고자 하는 흐름 속에서, 李翺는 『중용』의 誠 개념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후 宋代의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 개념은 더욱 강조되어 왔다. 周敦頤는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따라야 할 마음의 표준으로서, 순수지선한 마음을 誠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불교의 수양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程頤는 이를 비판하며, 유교 경전인 『주역』에서 敬개념을 발견하여 가장 유교적인 수양론을 제시하였다. 주희는 이들의 사상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성리학의 이론체계 속에서 誠과 敬 개념을 보다 깊이 있게 논하였다. 주희는 만물에 내재되어 있으면서, 만물을 이루는 근원적인 원리이자 표준을 理라 하였다. 그리고 만물에 내재된 理를 내면화하는 수양을 통해, 심성은 이상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性을 실현하는 일과 다름이 없다. 본성이 온전히 실현되면, 마음은 하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천인합일이나 성인의 경지는 말 그대로 이상일 뿐, 경험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상을 추구하는 수양에는 결코 완결이란 말이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이상적 경지를 향한 일평생의 끝없는 추구와 부단한 노력이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誠은 교육의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성은 교육을 통해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이면서 또한, 凡人이 교육을 받으면서 갖추게 되는 태도를 나타낸다. 이는 敬의 개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하늘이나 성인과 같은 이상적 경지의 위대함은 거기에 더 가까워지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킨다. 誠은 이처럼 이상적 경지에 가까워지고자 보다 정성되게 수양하는 태도이다. 그리고 교육을 받아 그 경지를 점점 더 알게 될수록, 그 경지와의 거리감을 크게 느끼게 된다. 敬은 이처럼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이상적 경지의 위대함에 대해 자신의 부족함을 성찰하는 태도이다. 즉, 성과 경의 태도는 순환관계에 있으며,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이 같은 순환은 범인이 성인의 모습에 가까워지도록 이끈다. 이상에서 살펴본 성과 경의 개념은 도덕교육의 목적과 역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도덕교육의 목적은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간을 기르는 것이며, 도덕교육 본연의 일은 삶의 궁극적 이상으로서 도덕적 완성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아 이를 부단히 추구하도록 마음 속에 강렬한 열망을 심어주는 일이다. 또한, 성과 경의 개념은 도덕교육에는 종교적 측면이 있음을 일깨워 준다. 성과 경의 태도는 종교에서 신을 대면한 인간의 태도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신이나 하늘과 같은 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는 한편으로는 그 경지에 비해 한없이 부족한 자신을 반성하게 하여 겸허한 자세를 갖추게 한다. 또 한편으로는 그 존재를 향한 열망의 감정으로 고양되기도 한다. 종교이론가인 루돌프 오토에 의하면, 신이라는 어마어마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신의 모습을 닮고 싶은 동경이라는, 서로 상반된 감정들이 동시에 생기는 것을 ‘누멘적인 감정’이라 한다. ‘누멘적인 감정’과 성과 경의 태도는 마음을 더욱 참되고 고귀하며 성스러운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은 신이나 하늘과 같은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가정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 점에서, 誠은 도덕교육의 궁극적 목적이라 할 수 있으며, 학생으로 하여금 삶 전체를 통해 ‘도덕적 완성’을 추구하도록 강렬한 열망을 심어주는 것이 도덕교육 본연의 일이다.

      • 온라인 커뮤니티에 탑재된 미술과 교육 자료가 초등교사의 교수활동에 미치는 영향 연구 : 인디스쿨을 중심으로

        이은진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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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라인 교사 커뮤니티는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로 형성된 인터넷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가상공간으로 교사들은 이곳에서 교육에 관한 다양한 정보나 자료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초등교사들에게 영향력이 큰 온라인 커뮤니티에 탑재된 미술과 교육 자료는 초등 교육 현장에서 미술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이 연구는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 탑재된 미술과 교육 자료가 초등교사의 교수 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보고자 초등교사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인디스쿨(이하 인디)을 중심으로 질적 연구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7명의 연구참여자들은 모두 인디의 회원이며, 인디에 탑재된 미술과 교육 자료를 활용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미술에 대한 경험이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미술 수업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미술 수업에 대한 부담감 역시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연구참여자들은 인디의 미술과 교육 자료를 수업에 활용하고 있었으며, 인디의 자료를 활용했을 때 아동의 흥미도와 수업 참여도가 높아졌으며, 수업에 대한 만족도가 더 높았다고 말함으로써, 인디의 미술과 교육 자료가 교수 활동에 일정 부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연구참여자들은 인디의 미술과 교육 자료가 교수 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다양한 예시 작품과 제작 과정을 보여줄 수 있으며, 실제 수업에 꼭 필요한 아이디어와 팁이 들어 있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또 다른 참여자는 인디의 미술과 교육 자료의 특성보다는 인디에서 미술과 교육 자료를 찾아보는 과정을 통해 미술 수업에 대해 더 관심을 갖고 고민하고 연구를 하게 된다는 점에서 미술 수업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닌 가라는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연구참여자들은 인디의 미술과 교육 자료를 다음과 같이 수업에 활용하고 있었다. 첫째, 교육과정과 교과서 내용을 바탕으로 한 자료를 중심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이는 초등학교에서의 미술 수업이 교육과정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실제 인디에 비슷한 내용의 자료들이 비슷한 시기에 무리지어 탑재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둘째, 인디의 미술과 자료 중 표현 영역의 자료를 체험이나 감상 영역의 자료보다 더 많이 활용하고 있었다. 이는 아직까지 초등학교에서의 미술 교육이 표현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인디에 탑재된 표현 영역의 자료 수가 다른 영역에 비해 월등히 많은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셋째, 자료를 선정할 때는 아동의 수준에 맞는지,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들어있는지, 교육과정에 맞는 내용인지, 수업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자료인지, 정해진 시간 안에 활동을 마칠 수 있는지, 수업의 결과물이 잘 나올 수 있는지 등을 고려한다. 넷째, 다운로드 받은 교육 자료를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학급의 실정에 맞게 재구성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또 일부 연구참여자의 경우에는 자신이 재구성한 자료를 다시 인디에 탑재하고 있었다. 연구참여자들은 인디의 교육 자료를 통해서 수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뿐만 아니라, 사고의 폭이 확장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또한 인디의 교육 자료를 탐색하고 활용하면서 전문성을 키우고, 자료의 교류를 통해 초등교사로서의 자부심과 연대감을 느끼며, 교사로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교육에 대한 열정을 키워 나가기도 한다. 연구참여자들은 인디의 미술과 교육 자료가 교사들의 교수 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인디의 교육 자료가 초등 교육에 미치는 영향력이 큰 만큼 그에 따른 문제점도 있음을 지적한다. 이 중 가장 의미 있는 지적은 온라인상에서의 교육자료 공유가 수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연구를 차단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나 노력 없이 단지 쉽게 구할 수 있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온라인상에서 공유되는 교육 자료를 마구잡이로 수업에 활용하는 것은 전문성을 가진 교사라면 지양해야 마땅하다. 또한 교사 스스로 미술 교육에 대한 철학을 확립하고, 좋은 미술과 교육 자료를 선별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야 할 것이다. 본 연구를 통해 온라인 커뮤니티(인디스쿨)의 미술과 교육 자료가 일부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초등 미술 교육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교수 활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초등 미술 교육의 발전을 위해 초등 교사 양성 대학에서의 미술 교육과정을 개선하고, 미술 교육과 관련된 교사 연수의 다양화와 활성화, 미술 교육 동아리의 활성화, 수준 높은 미술과 교육 자료의 개발과 보급을 통해 보다 초등 미술 교육 과정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것을 제언하였다. 또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탑재되는 미술과 교육 자료에 대한 미술 교육 전문가들의 보다 폭넓은 관심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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