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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포탈영상(EPI)을 이용한 의료용 선형가속기의 성능평가에 관한 연구
인위적인 방사선이 발견된 이후로 의학에서의 진취적인 접근은 임상과학의 객관적인 투명성을 고취시켰다. 그 중에서도 고에너지 광자선의 이용은 그 목적에 따라 많은 이론과 실용적인 측면의 차이를 고려하여야 한다. 따라서 광자선이 발생되는 기초원리 뿐만아니라 인체내에 흡수되는 작은 선량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중요시하고 있다. 보편적으로 이론에 의한 실험의 예상값과 측정에 의한 결과값의 상이함은 그러한 세부사항들을 보다 깊은 관심의 촛점이 되도록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방사선의 응용 중에서 전통이 길고 매우 널리 알려진 사실들중의 하나가 바로 의학영상을 얻어내는 일이다. 이러한 영상의 가치는 좀더 빠르고 정밀함을 요구하는 과학기술의 환경적인 변이에 편승하면서 새로운 의료장비와 임상기술을 만들게 되었다. 기존의 필름에 의한 의학영상의 활용을 아나로그 기술로 대표한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역시 디지탈화된 영상의 기술이 비약적인 진보를 안겨줄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영상 그 자체에서 획득할 수 있는 정보 이 외에도 간접적인 데이터의 유도에 의하여 목적으로 하는 충분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고에너지 광자선을 발생시키는 의료장비 가운데 의료용 선형가속기의 활용은 방사선이 치료를 목적으로 할 때 주로 쓰인다. 여기에는 에너지의 크기가 다른 여러 개의 선질을 만들어내면서 그 분포가 일정한 수준을 연속적으로 유지해야 하는 조건이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은 가변적일 수 있으므로 정기적인 점검을 통하여 그 안정성을 평가받아야만 한다. 비록 최적의 상태에서 나온 데이터일지라도 조건에 명시된 값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그 상태를 보존하지 않고 기준값에 일치하도록 수정해야만 한다. 광자선의 분포는 몇 가지 중요한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실제로 임상에서는 그 선량이 영상을 형성하는데 최소량, 혹은 정상조직과 병소가 있는 부위의 최소선량, 최대선량 등의 경계선 값에 주의를 한다. 많은 양의 방사선을 가지고 치료를 위해서 판별을 해야한다면 방사선의 분포는 곧 선량의 합과 같다. 그래서 과거부터 정확한 방사선량을 측정하는 방법들이 연구되어 왔고 성과도 적지 않다. 현재 주로 사용되고 있는 세 가지 형태의 측정법은 이온전리함-물팬톰, 열형광선량계, 필름이다. 그런데 이들 측정에서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는 개선의 의지는 신기술의 영향을 받아 앞에서 언급한 디지탈의 기술과 접목하게 된다. 전자포탈영상(Electronic Portal Imaging)은 본래 물체의 영상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얻을 수 있도록 디지탈 기술을 응용한 것이다. 이러한 특성을 의학물리적인 요소로 재해석하고 방사선의 분포를 알아내는 고난이도의 물리적 성질을 역으로 알아내는 실험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병행하여 기존의 방사선물리와 핵물리에서 제시된 이론과 함수들을 재확인하여 본 연구에서 얻은 결과와 비교하였으며 객관적으로는 권고되는 기준 프로토콜의 범주를 고수하였다. Accurate radiation dosimetric characters is very important to determine of dose to a radiotherapeutic patient. Medical linear accelerators have been developed not only its new quality of convenient operation but also electric moderation. It is reliable to measure more detail physical parameter that linac's internal ability. Typically, radiation dosimetric tool is classified ionization chamber, film, thermoluminescence dosimeter, etc. Now a day, Electronic Portal Imaging Device is smeared in radiation field to verification of treatment region. EPID's image was focused that using both on-line image verification and absolutely minimum absorbed dose during radiotherapy. So, Electronic Portal Imaging was tested for quality evaluation of medical linear accelerator had its pure conditional flash. According to standard protocol, beam profile scan is represented for the measurement of high energy beam. This study has performed symmetry, Light/Radiation field congruence, and energy check, geometry difference on wedge filter using a liquid filled ion chamber(EPID). Prior to irradiated on EPID, high energy photon beam is checked with ion chamber. Using these results more convenient dosimetric method is accomplished by EPID that taken digital image. Medical image is acquired with EPID too. Therefore, EPID can be analyzed by numerical information for what want to see or get more knowledge for natural human condition.
미국 CM 社 분석을 통한 국내 CM 벤치마킹 전략 : 조직구성을 중심으로
윤성익 한양대학교 공학대학원 2008 국내석사
현재 국내에서 발주된 공사 물량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에 따라 건설사들은 국내의 공사 수주의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이에 대한 대책 및 대안으로서 해외 시공 및 플랜트 공사에 대한 비중을 높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최근 원자재 가격의 급등과 개발도상국의 저가 입찰에 따른 낙찰률 저하 및 채산성 악화로 인하여 장기적 관점에서의 또 다른 대안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선진국 건설회사의 경우 이미 그 대안으로서 Construction Management(CM)에 초점을 맞추어 설계 또는 시공 이외의 분야에서의 고부가가치 산업을 지속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국내 건설 및 CM 전문 회사들도 뒤쳐지지 않기 위하여 업계의 글로벌 입지 확보 및 향후 건설산업의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CM 사업의 전략수립이 요구된다. 본 연구에서는 Engineering News Record(ENR)에서 발행한 미국 CM 업계 현황과, 조직 분석을 통하여 국내 건설업체가 CM 분야를 개발하고 활성화하기 위한 벤치마킹 전략을 모색하고, 나아가 국내 건설 업계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Through the tendency of reduced amount of government order, nowadays, the domestic construction firms have been decided to focus on the oversea construction such as buildings and plants as an alternatives. However, due to rapid inflation phenomenon of construction materials and low bidding from the developing countries, now the firms suffering low payability. The other alternatives are required for overcome this situation as a long term aspect. In case of advanced countries, they are already look to the construction management(CM), developing high value industry besides design and build. Therefore, in order for the domestic construction firms and CM firms to enhance their global location and develop high value industry, the strategy of CM business is required. In this study, through the analyze Engineering New Record(ENR) data and organizations of U.S. firm, benchmarking strategy is established for developing and activating the CM fields, furthermore, suggest the way to go with domestic construction firms.
견관절 아탈구가 동반된 편마비 환자의 팔걸이나 테이핑이 보행 중 에너지소모량에 미치는 영향
본 연구의 목적은 견관절 아탈구가 동반된 편마비 환자에 대하여 보행 중 팔걸이나 테이핑을 적용하는 것이 에너지소모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분석하는 것이다. 연구대상은 서울 B, C, H병원 재활의학과, 서울 D보건소, 성남 B보건소, 서울 S복지관 및 성남 S복지관에서 입원 및 외래로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성인 편마비 환자 34명으로 하였고, 조사기간은 2008년 3월 6일부터 2008년 8월 29일까지였다. 자료 분석은 연구 결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환자 특성(뇌졸중 형태, 환측 견관절의 통증 유무, 마비측 및 강직의 정도)에 따른 심박수, 보행속도, 산소소모량 및 에너지소모량을 짝비교 t-검정을 사용하여 통계적 유의성이 없음을 확인한 이후에 1) 보조 도구 없는 독립보행, 2) 팔걸이 적용 보행, 3) 테이핑 적용 보행 동안에 심박수, 보행속도, 산소소모량 및 에너지소모량을 반복측정 일원분산분석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팔걸이 적용 보행과 테이핑 적용 보행시의 심박수는 보조 도구 없는 독립보행과 비교하여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는 없었다(p>0.05). 팔걸이 적용 보행과 테이핑 적용 보행의 보행속도, 산소소모량, 에너지소모량은 보조 도구 없는 독립보행과 비교하여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증가되었다(p<0.05). 팔걸이 적용 보행과 테이핑 적용 보행의 비교에서는 모든 항목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가 없었다(p>0.05). 결론적으로 본 연구는 뇌졸중 환자의 팔걸이나 테이핑 적용이 보행속도, 산소소모량 및 에너지소비량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이 확인되었으며 임상에서 편마비 환자의 보행에 팔걸이나 테이핑의 적용이 도움을 줄 것으로 사료된다. This study was carried out to determine the effects of an arm sling or shoulder taping on energy consumption during ambulation of chronic hemiplegic patients with shoulder submuxation. Thirty-four patients with hemiplegia were recruited from departments of rehabilitation medicine at three hospitals, two rehabilitation centers, and a health center in Seoul and Seongnam from March 6 to 25, 2008. Data were collected in general terms on the patients’stroke-associated characteristics, including: the types of stroke, the presence or absence of shoulder pain, the hemiplegic sides, and the severity of spasticity. All subjects were classified under two groups for each of these items. The collected data were analyzed with the paired-t test to compare the differences in heart rate, walking velocity, oxygen consumption, and energy expenditure between the groups, divided by the patient's characteristics. The differences of the main variables (heart rate, walking velocity, oxygen consumption, and energy expenditure) among the three intervention types (baseline, sling, and shoulder taping) were analyzed using the repeated one-way ANOVA. The heart rate measured in the application of the arm sling and shoulder taping was not statistically significant when compared with that of the baseline (p>0.05). The gait velocity, oxygen consumption and energy expenditure measured in the application of the arm sling and shoulder taping were statistically significant when compared with that of the baseline (p<0.05). The heart rate, gait velocity, oxygen consumption and energy expenditure between arm sling and taping application were not statistically significant (p>0.05). In conclusion, the findings suggest that both an arm sling and shoulder taping are helpful for increasing walking velocity, and decreasing oxygen consumption and energy expenditure of patients with hemiplegia. Further well-controlled researches with a larger sample size are required to confirm clinical cardiopulmonary-related effects of arm sling and shoulder taping applications.
倭寇에 대한 연구는 일본과 중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이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 즉 주로 가해자라는 입장에서의 日本과 피해자로서의 중국은 같은 존재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에서 倭寇에 대해 접근했다. 특히 1945년이전 倭寇에 대한 양 지역의 인식차이는 日本에서 倭寇를 일종의 해외활동으로 보면서 倭寇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재고하려고한데 반해서, 중국에서는 이에 대한 피해 및 방어, 그리고 퇴치의 문제가 주된 테마였다. 그러나 특히 16세기의 倭寇에 대하여 중국인이 다수였으며 중국인 왜구 지도자들에 대한 많은 사료적 뒷받침으로 먼저 일본에서 종래의 ‘일본인 해적’이라는 설명대신 中國人 중소상인층 및 중국 연안 지역민, 그리고 연안 지역 향신의 활동을 강조하게 되었다. 후에 중국도 이를 받아들여 특히 1980년대이후 자본주의 맹아에 대한 논의와 함께 倭寇를 중국인 海商들의 사무역 활동으로 인식하고 여기에서 근대성의 일면을 찾기 위한 노력이 견주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일본과 중국에서는 倭寇에 대해 어느 정도의 공통된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런 인식의 주된 내용은 우선 明代 왜구를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하여 14·5세기의 倭寇, 즉 前期倭寇와 16세기의 倭寇, 後期倭寇 혹은 嘉靖倭寇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전자는 종래의 설명대로 일본인들에 의한 활동, 1차적인 욕구 해소와 단순·도발적인 행동으로 취급하고 후자는 위의 설명대로 中國人 사무역 상인들의 활동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양 시기 倭寇는 같은 용어로만 불렸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 된다. 그런데, 기존 연구들을 재검토하고 기존에 사용된 사료를 살펴보면 後期倭寇의 경우 일본인과의 관계를 전혀 배제할 수 없으며 일본과의 관계가 전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前期倭寇도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일본인만의 활동으로 여겨졌으나, 元末明初時期 張士誠?方國珍 세력과의 관계 및 연해민들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단순한 한쪽의 요인 및 활동이라는 인식도 재고될 필요가 있다. 倭寇에 대한 정의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면서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었던 ‘倭寇는 정의 내릴 수 없는 존재’라는 설명도 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정의를 포기한 상태로 두어서는 안된다. 倭寇에 대한 위와 같은 분리는 이런 혼란을 가중시킨다고 하겠다. 倭寇는 日本人, 中國人만의 활동이라는 식보다는 양국 내지는 동아시아인의 연합활동이라는 식의 관점에서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그리고 아울러 한시기만으로 고정시켜 파악하는 것 보다는 明代 내지는 中國史 전체를 걸쳐 일관성 있는 관점에서 中國이나 日本만의 문제가 아닌 동아시아 海域 전체에 걸친 문제로써 倭寇를 취급하는 것이 왜구라는 실체 파악을 위해서 바람직하다. 본고는 이러한 점에 주목하면서 倭寇 구성원 및 주체에 대한 문제와 활동 성격에 논의의 중점을 두고 이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明代 倭寇를 연구하는데 혼란을 가져오는 요인 가운데 우선 용어의 문제가 있다. 倭寇를 지칭하는 용어는 상당히 많다고 하며, 그 가운데 ‘海寇’라는 용어가 가장 빈번히 이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海寇를 倭寇와 동일시하고 같은 범주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만 倭寇를 海寇와 같은 단위의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많으며 ‘倭寇=海寇’라는 등식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倭寇가 모호한 것으로 된 만큼 분리되어야 한다. 明代人의 기술을 살펴보면 이 둘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지는 않다. 倭寇라고 했을 경우는 日本人의 행위나 그들이 포함되어 있던 경우, 그리고 적어도 일본과 관계가 있는 집단을 지칭했다. 그리고 海寇는 그 보다는 범위가 넓은, 그야말로 바다에서 활동했던 중세적인 의미의 海賊을 뜻했다고 생각된다. 실례로 이들 倭寇와 海寇를 분리하여 서술한 기록도 상당수 있으며, 倭寇이후의 海賊들을 倭寇라고 지칭하지도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倭寇의 구성원과 주체 문제는 倭寇의 본질을 밝히고 그들을 정의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선 明初의 倭寇에 대해서는 그동안 日本人의 행위라는 것에 대하여 異見이 없었다. 그렇지만 明初의 倭寇도 분명히 중국 내지인들과 어느 정도 관계를 갖고 있었다. 실제 구성원에 대하여 알려주는 사료가 거의 없지만 몇가지 경우에서 明初의 倭寇들이 단순히 日本人들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이후 嘉靖時期이전까지 간간히 나타나는 倭寇의 사례에서도 倭寇는 중국 내지인과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倭寇와 중국인과의 관계에 대해 鄕紳의 존재는 그동안 倭寇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지적되어 왔다. 분명 鄕紳들은 明朝의 海禁政策하에서도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주었던 海外貿易에 관여하고 종사해 왔다. 이런 행위는 倭寇를 密貿易 商人으로 파악한 많은 사람들에게 倭寇와 鄕紳은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鄕紳들은 倭寇의 후원자라는 인식을 갖게 해왔다. 그리고 王直과 같은 경우에도 鄕紳들과 어느 정도 연관을 갖고 있었다는 실례가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긍정적인 양자의 관계는 倭寇가 벌였던 폭력적인 침구행위를 생각해 보면 납득되지 않는다. 倭寇를 사무역자로 규정할 경우에는 鄕村의 경제적인 면도 지배하고 있던 향신들과의 관계는 긍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倭寇가 행했던 많은 폭력적 약탈행위는 이런 양자의 사이를 부정적인 것으로 볼 수 밖에 없게 한다. 嘉靖時期에 접어들면서 倭寇의 침구 행위가 급증하였는데, 이 때 그들이 벌인 侵寇의 주요한 대상은 富家·大家들과 같은 이른바 鄕紳층이었다. 이렇게 약탈의 대상이 된 鄕紳들은 이에 대응하여 적극적으로 倭寇에 대해 대비하고 저항하고 있다. 鄕村 지배질서의 안정을 바라는 鄕紳들 입장에서 倭寇가 행한 약탈과 그로 인한 무질서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 이런 측면에서 倭寇와 鄕紳과의 긍정적인 관계는 부정된다고 하겠다. 중국과 일본에서는 보통 倭寇는 16世紀를 기준으로 16세기 이전과 16世紀의 倭寇로 구분한다. 이들의 명칭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일본에서는 대체로 前期倭寇와 後期倭寇로 구분하거나 14·5세기 倭寇와 16세기 倭寇라는 명칭을 사용하며, 중국은 특히 16世紀 倭寇를 嘉靖倭寇라고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 양시기 倭寇에 대해 대체로 16세기의 왜구가 14·5세기와 구분되는 가장 큰 특징은 14·5세기 倭寇가 곡식과 사람의 ‘약탈’을 주로 행하였던데 비해 16세기 왜구의 목적은 ‘밀무역’의 강행에 있었다는 점이라고 설명해 왔다. 그렇지만, 16세기 倭寇가 벌인 폭력적 침구활동은 그 이전시기의 倭寇가 행했던 것에 비해 훨신 대규모적으로 이루어졌고, 파괴적이었으며 피해도 광범위했다. 嘉靖 32년(1553)에서 34년(1555) 사이만 해도 250여회의 침구활동이 있었다. 규모면에서 몇십명이 행동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몇천명 혹은 몇만명까지의 대규모 집단으로도 존재했다. 또 이들은 많은 전투에서 관군에 승리를 거두고 있고, 한 지역을 거점으로 두고 여러 지역을 횡행하면서 약탈행위를 일삼고 있다. 그리고 이런 倭寇의 침구로 연안지방은 공동화상태까지 이르렀고 그 피해도 막심했다. 이런 침구행위는 교역 내지는 밀무역 행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16세기라는 시점에서 물론 모든 해상 세력이 이와 같은 약탈행위만을 일삼았던 것은 아니다. 우선 중국 밀무역상인(즉 해구)들의 활약이었다는 점, 일본과 중국의 입장차이 즉, 중국에서 약탈한 물건을 일본에서 교역해야했던 상황, 그리고 관리들의 과장 가능성 등도 염두 해 두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적 침구 양상은 부정될 수 없다. 당시 일본에서 필요로 했던 물건 중 정상적으로는 입수할 수 없었던 물건을 구할 수 있는 방법과 특히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약탈행위였다. 이렇게 폭력적으로 변한 이유가 중소상인들이 향신들에게서 벗어나 독립하려는 과정에서 투쟁을 시작하고 대립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倭寇의 실제 행동을 보면 단순한 상인집단, 연안의 海民들의 집단으로만 파악하기는 힘든 면이 많다. 倭寇들이 明 官軍과의 전투에서 나타나는 모습들은 상당한 수준의 전투능력을 보여준다. 그들의 전술과 무장 수준 등으로 판단해 보면 이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武裝集團的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西日本 지역과 倭寇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는 점에서 倭寇에 이 지역의 武士들이 참여하고 있었을 개연성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같은 倭寇활동에 대해 明朝는 초기에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로는 우선 너무나 잦은 海防책임자의 교체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한 소극적인 招務 위주의 정책도 문제가 있었다. 후에 倭寇에 대한 적극적인 토벌책과 방어책은 倭寇활동이 잦아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와 함께 倭寇가 증폭된 이유로 당시부터 지적되던 海禁의 철폐 혹은 이완은 倭寇발생의 요인 중 교역상황의 악화라는 부분을 해소해 시켜주었다. 물론 日本으로의 항해는 금지되었지만 中國상인들은 여전히 일본으로 渡航하여 교역활동을 지속했고 日本으로서는 굳이 위험을 무릅쓴 항해와 침구를 통해 중국 및 다른 지역의 물건을 획득해야했던 조건이 사라지게 되었다. 아울러 때마침 豊臣秀吉에 의한 일본의 통일과 豊臣정권의 대외무역 독점은 일본에서의 원인을 완전히 제거하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倭寇종식의 모습에서도 일본과 倭寇와의 관련은 매우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倭寇를 수적인 우위만으로 파악한 嘉靖倭寇나 16세기 倭寇라는 관점은 이런 점에서 再考되어야 한다. 또한 前期倭寇 또는 14·5세기의 倭寇의 성격도 재검토되어야 한다. 이미 이 시기에 倭寇의 침구는 어느 정도 대규모화하고 있고, 중국 내지인과의 관련성도 인정된다. 대규모화된 倭寇를 생각해 보면 종래의 설명, 즉 이 시기 倭寇는 日本의 도서지역 빈민 및 浪人세력들의 1차적 욕구 해소를 위한 해적 행위라는 해석으로는 설명이 될 수 없다. 오히려 14·5세기와 16세기의 倭寇들은 상당한 유사성을 검출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주체라는 면에서 양 시기 倭寇는 中國과 日本 혹은 기타 지역민들이 참여한 多民族적인 집단의 양상을 보인다 할 수 있다. 주체라는 측면도 어느 쪽이 일방적으로 이끈 것이 아닌 양 지역의 요인이 결집되어 발생했다고 보는 편이 가장 타당하다 할 것이다. 그리고 약탈 대상에 대하여 차이를 두고 그에 따라 倭寇의 목적이 달랐다는 종래 설명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14·5세기 倭寇가 이미 대규모이며 조직적이었다는 점에서 부정된다. 아울러 ‘사람’에 대한 약탈이 16세기에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던 점은 16세기 倭寇가 밀무역 중심이었다는 해석과는 역시 맞지 않는 점이다. 그리고 16세기 倭寇를 嘉靖倭寇라는 용어로 대치하는 문제도 다시 생각해 보아야한다. 嘉靖이후인 隆慶·萬曆기는 비록 嘉靖기에 비해 발생 빈도가 적게 나타나지만, 여전히 倭寇가 활동하고 있으며, 상당한 피해를 주고 있다. 16세기 倭寇를 嘉靖시기의 倭寇가 대표한다고는 할 수 있어도 嘉靖倭寇라는 용어는 嘉靖시기로 倭寇활동을 한정시키는 만큼 완전히 대치시키는 것은 역시 적절하지 않다고 하겠다. The Wakou(倭寇) had been studied by Japan and China from the early years. However, Japan and China had the different views, esp., before 1945 the Japan have thought of the Wakou to expand its power to outside. On the other hand, the China have researched them in the view of damage. Particularly, however, the history documents show that there have been Chinese invaders than Japanese one in the 16th century. Therefore Japanese researchers try to emphasize the Chinese merchants the residents in the middle area of China or the local authorities(鄕紳) living near the ocean instead of the Japanese invaders. Chinese also accepted the theory above in the 1980s, and they tried to find the Wakou as the merchants. As the consequence both Japan and China became have the similar view. The main contents of the view break down two periods, which one is about the 15th century Wakou called pre-Wakou, another is about the 16th century Wakou called Post-Wakou or Jiajing-Wakou(嘉靖倭寇). The former is mostly focus on the performance of Japanese Invaders, and, in contrast, the latter is focus on the Chinese merchants. As we look at above, one must differ from another except using the same word "Wakou(倭寇)" If we look through the existing history document, We can't put post-Wakou itself without Japanese relationship. The most definition of the Wakou might be explained as non-definable term, but we should keep defining it as the specific thing. It is more reasonable that the Wakou is referred as integrated performance of whole east Asia. Moreover it would be better way to deal it over the whole Chinese history excluding dealing only the Ming period. In brief, my point in this essay would be focus on the Wako's formation and character. The first problem to study the Wakou is its term. There are the majority of terms of the Wakou. Among them the term "Wakou" is mostly popular. Today most researchers think that both the Haikou(海寇) and the Wakou(倭寇) mean itself with same. However it' not right way to express the Wakou along with the "Haikou" by the same meaning. In the Ming dynasty era, the Haikou related to Japan means broader than the Wakou. Above all, early Ming dynasty the Wakou must be the Japanese performance. Despite of little history documents, they show that the actual the Wakou may be related to Chinese residents. In addition, researchers have pointed out that the local authorities(鄕紳) in China must be related to the Wakou. They must work in oversea trade, which made huge profit. Therefore we guess the local authorities(鄕紳) may be so close to the Wakou being supported by them. Also, there is the actual example that the local authorities(鄕紳) might be close to the loyal people. Despite of the positive relationship between them I don't have a capacity to understand in the view of Japanese invasion to China. The Wakou as the private traders might get along well with the local authorities. On the other hand, they as the invaders couldn't be understood by the view of good relationship. In both Japan and China, the Wakou breaks down before and after the 16th century. The Wakou breaks down Pre-Wakou (also called the 14~15th century Wakou) and Post-Wakou (also called the 16th century Wakou) in Japan. Especially the 16th century Wakou is called as Jiajing-Wakou(嘉靖倭寇) in China. The 16th century Wakou so differ from the 14-15th century by their performance. Pre-Wakou stole harvest or residents living near the sea, but Post-Wakou mostly smuggled products from outside. However, in the 16th century Wakou's violent performance became more serious and specific, and the damage by the Wakou had been spreaded in the huge area. From in 1553 to in 1555 there were 250 times violent invasion. The number of the Wakou consisted of more than ten thousand people. They harmed the area near the ocean nationally. There is another way to express the Wakou. At the point of the 16th century not all people who had a power on the sea stole harvest and people. For example, Chinese merchants worked in the oversea trade. Despite of supporting evidence stealing the products was the easiest way to get them. The reason why the Wakou became violent can be assumed that it was the process to be independent from the local authorities(鄕紳), but it's hard to deal them as the merchants. The battle skill of the Wakou against Ming military was so superior. Also Wakou had been associated with Samurai in west Japan. Ming army didn't handle the Wakou's organization due to being lack of the number of navy military. One reason why Wakou kept increasing was due to remove of The Haijin(海禁; ban on maritime trade or intercourse with foreign countries). At the time the Wakou disappeared they must be so associated with Japan. It should change that the Wakou had been handled in only the number of Wakou in the 16th century. Also the 14th century Wakou should be reviewed because at the time they became broader and was related with the Chinese residents. It can be the similar point between the 14~15th century Wakou and the 16th Century Wakou. In the point of the subject Wakou can be referred as the diverse nations, and each of them could be cooperated together instead of being dominated by one country. Stealing people in the 16th century might be not correct because that time was focus on smuggling. Therefore, We should concern whether the term of Jiajing-Wakou(嘉靖倭寇) in the 16the century is correct because Wakou still spreaded themselves after the period of Longqing(隆慶) and Wanli(萬曆). Even though the Wakou were represented as the history of the 16th century, the term of Jiajing-Wakou(嘉靖倭寇) would be not reasonable because the performance could be limited within the period of Jiajing(嘉靖).
성인 편마비 환자에서 팔걸이가 보행 중 에너지 소모량에 미치는 영향
본 연구의 목적은 편마비 환자에 있어 보행 중 팔걸이의 착용에 따른 에너지소모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연구대상은 한양대학교 서울 병원 재활의학과, 성동 장애인 종합복지관, 신당 종합 사회복지관에서 입원 및 외래로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성인 편마비 환자 40명을 대상으로 하였고, 연구기간은 2003년 5월부터 2003년 9월까지였다. 자료의 분석은 팔걸이 착용 전과 착용 후의 보행에서 심박수, 보행속도, 산소소모량, 산소소모비의 차이를 비교하였고, 통증 유․무, 아탈구 유․무에 따른 심박수, 보행속도, 산소소모량, 산소소모비의 차이를 비교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편마비 환자의 보행에서 팔걸이 착용 전과 비교하여 팔걸이 착용 후가 심박수에 있어 통계학적으로 유의하게 감소하였다(p<0.05). 2. 편마비 환자의 보행에서 팔걸이 착용 전과 비교하여 팔걸이 착용 후가 보행 속도에 있어 통계학적으로 유의하게 증가되었다(p<0.05). 3. 편마비 환자의 보행에서 팔걸이 착용 전과 비교하여 팔걸이 착용 후가 체중 당 산소소모량 있어 통계학적으로 유의하게 감소하였다(p<0.05). 4. 편마비 환자의 보행에서 팔걸이 착용 전과 비교하여 팔걸이 착용 후가 체중 당 산소소모비에 있어 통계학적으로 유의하게 감소하였다(p<0.05). 5. 편마비 환자의 보행에서 환측 견관절의 아탈구의 유무, 통증의 유무에 따 른 팔걸이 착용 전과 팔걸이 착용 후 보행속도, 심박수, 산소소모량, 산 소소모비의 비교에서 통계학적인 유의한 차이는 없었다(p>0.05). 결론으로 팔걸이 착용 보행이 팔걸이를 착용하지 않은 보행과 비교하여 편마비 환자의 보행시 심박수를 감소시키고, 보행속도를 증가시키며, 산소소모량을 감소시켜 에너지 소비를 감소시키는 것으로 나타나 향후 편마비 환자의 보행에서 팔걸이 적용이 기대된다.
윤성익 Seoul National University 2019 국내석사
Since 2003, the Ministry of National Defense has selected the modernization of military facilities as a government project to modernize military facilities. Modernization of barracks facilities has increased the size and complexity of military facilities. Accordingly, there is a need for continuous maintenance and various complex management techniques to extend the life of facilities.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ntroduce overseas systems such as the Multiple Award Scheme in the United States and the Framework Agreement in the United Kingdom as an appropriate remedy for the planning and execution of military facility maintenance and management tasks that require sustainability. Through this, this paper suggests a more effective way of carrying out the task improvement in the military facility maintenance service which is expected to increase the demand for efficient and timely maintenance in the future. In order to apply the multi-supplier contract to the maintenance of military facilities, it was confirmed that the legal basis should be prepared by revising the "Law on Contracts with the State Parties" and its enforcement ordinances. In order to minimize the change of the design between the works, it is necessary to make design-build contracts. In order to improve the satisfaction of the used unit and the construction quality, the used unit selects the contractor and reflects the result of the evaluation on the contract Appropriate contractors may be allowed to participate in maintenance work. In this paper, we propose a method to apply the multi - supplier contract to the maintenance of the military facilities considering the specificity of the military facilities work, and furthermore. In the future, it will be a more effective system if additional studies are carried out on the appropriate scale of repair work to be carried out by multiple supplier contracts, appropriateness review by construction type, selection of qualified companies, and evaluation criter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