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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韓國 古代 律令의 考古學的 硏究

        산본효문 釜山大學校 2005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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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 성숙된 古代國家의 완성은 明文化된 法制의 확립과 그에 따른 중앙집권체제의 성립, 각종 통치제도의 정비 등의 측면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면 물질문화의 면에서도 그 전 단계까지의 漸移的인 변천과는 달리 어느 정도의 劃期性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며, 그 시점 이후의 자료를 추출하고 종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당시 정치상의 제도적인 측면이 조명될 것으로 추측된다. 본 연구는 물질자료로 남기 어려운 고대 정치제도의 제 측면을 고고학적인 방법으로 복원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하였다. 구체적인 연구 대상 시대와 지역은 삼국 통일을 전후하는 시기의 한반도로, 특히 6~7세기대 멸망 직전 시기의 백제와 통일을 추진하고 달성한 신라·통일신라로 설정하였다. 이 시점은 중국과의 교류·교섭이 특별히 활발해진 시기로서 각종 문화현상과 더불어 정치제도적인 측면에서도 중국의 영향이 크게 작용된 단계이다. 특히 체계적인 法制인 律令의 시행을 큰 특징으로 하는 隋唐帝國의 성립은 백제·신라의 국내 통치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되며, 그러한 사정은 고고자료에도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본 연구에서는 ① 중국의 정치제도 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한반도 각국에 수용(繼受)되었는가, 바꾸어 발하면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부분은 무엇인가 하는 傳受主體(중국측)의 연구시각, ② 정치제도를 수용한 한반도 각국이 그것을 어떻게 자국의 사정에 맞게 取捨選擇하고 개편해서 이용했는가 하는 繼受主體(한반도측)의 연구시각, ③ 그 수용 방법과 양상에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각 국가마다 어떤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가 무엇에 기인하는가 하는 客體比較的인 연구시각이라는 세 가지 관점을 유지하면서 논의를 진전시켰다. 물질자료를 우선적인 분석 대상으로 하는 본 연구에서는 당시의 복합적인 고고학적 양상에 대한 검토를 토대로 律令의 일단을 도출하기 위해 (1)考古學的 分析→(2)文獻史料·時代狀況과의 對比→(3)政治相 復元이라는 연구 순서를 밟게 되었다. 현존하는 물질자료의 검토를 전제로 한 경우, 해명 가능한 내용 중의 하나가 유물이나 유구의 계층성에 근거를 둔 官制와 그 관련 부분에 대한 고찰인데, 고고학적 연구가 가장 유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분야라고 판단된다. 律令을 기초 통치방식으로 채택한 국가(소위 律令國家)의 가장 큰 특징이 다수의 관위 보유자(官人, 官僚)와 그것을 통치하기 위한 官僚機構의 존재이기 때문에, 官制는 律令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본론에서는 官制의 실태를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내는 墳墓, 土器, 服飾, 都城 등의 고고자료에 대한 고찰을 시행하였다. 우선 第Ⅰ章「律令硏究의 史的前提와 考古學的 方法」에서는 실질적인 분석과 고찰에 앞서 당시의 정치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알아 둘 필요가 있는 역사적 전제와 연구사를 정리하고 고고학적인 방법과 그 유효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본 연구가 중국에 기원하는 법체계인 律令을 검토 주제로 채택된 만큼 그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과 특성에 대한 정리는 불가결하다. 따라서 현재까지 한국 내에서 이루어진 관련 연구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국내 자료에 적용시켜 왔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아직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추출하여 그것에 대한 접근 방법으로서 고고학적 연구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第Ⅱ章「墓制와 社會規制」에서는 律令에 포함되는 喪葬과 官位 관련 편목의 존재를 전제로 크기, 부장품 등 분묘를 구성하는 각 속성을 계층화시켜 피장자의 위상과 관등제의 실질적인 대비를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한반도의 사례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묘제 상황과도 비교함으로써 백제·신라에서 시행되었던 官制와 喪葬制가 동아시아 속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거기에 중국 법제의 영향을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 한반도에서 이 시기 고분의 구조가 간략화되고 고분군의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어 가는 현상과 그 배경에 대해서도 고찰을 가하였다. 第Ⅲ章「器物과 文書行政」에서는 일정한 시기에 한반도에 등장하는 특정한 기물(기종)의 정착과정과 그 배경, 그리고 토기양식의 전환이 나타내는 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해 검토하였다. 특히 중국의 금속기나 도자기 등의 영향으로 출현한 것으로 여겨지는 臺附器種의 전개를 검토함으로써 중국식 생활습관의 도입 시기나 사용 계층을 추측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문자 사용의 본격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되는 定形硯의 출현·보급 양상을 검토함으로써 成文法 시행에 불가결한 文書行政의 보편화 양상을 검토하였다. 第Ⅳ章「服飾과 身分表象」에서는 역시 律令에 포함되는 衣服과 官位 관련 편목의 존재를 전제로 장신구나 복식에 나타나는 신분 표상과 계층성에 대해 검토하였다. 여기서는 관등을 나타내는 유물로서 문헌에도 기록된 백제의 관식이나 중국과의 관련성이 확실시되는 소위 唐式?帶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백제 및 신라 관제의 특수성에 대해 접근함과 더불어, 동아시아 각국에서 볼 수 있는 보편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第Ⅴ章「都城과 領域」에서는 중국의 법제 도입으로 인한 사회변화의 무대가 된 도성과 국가의 領域意識에 대해 검토하였다. 여기서는 관제를 비롯한 새로운 통치조직의 도입이 도성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새로 생긴 다량의 관료계층의 거주지역으로서 도성이 어떻게 기능했는지에 대해 추론하였다. 또 官位·官職制, 土地制度, 地方統治體制 등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형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국가의 영역의식과 실질적인 영토 확장 정책을 개관하여 삼국시대 각국의 발전단계와 다른 요소들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결론 부분에서는 앞에서 검토한 내용을 토대로 백제 및 신라지역에서 도입된 중국식 통치방식의 실제를 추론하였다. 부분적인 해석에 그치는 감은 부정할 수 없으나, 중국에서 발달한 律令과 한반도에 도입된 律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고 당시 한반도에서 시행된 법제의 繼受性과 固有性을 분리 추출하는 작업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분석의 결과 중국의 주변 국가들의 律令은 어떤 한 시기에 수용된 것이 아니라 律令受容, 律令施行, 律令編纂 등의 단계적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우선 律令受容段階에는 律令이 체계적인 法典으로서 도입되지는 않았으며, 자국을 통치하는 방법으로서 유효성이 있다고 판단된 한정적인 요소만을 부분적·단편적으로 수용·실행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도입된 律令的 요소는 원초적인 固有法의 일부를 보완하는 형태로 시행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 律令施行段階는 계속해서 중국 律令의 영향을 받아 어느 정도 체계화된 統治시스템이 시행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할 필요성과 늘어나는 자국민과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관리할 필요성이라는 外的·內的 요인으로 인해 체계적인 법령의 제정이 요구된 시기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律令編纂段階는 중국 주변에 위치하는 각 국가마다 서로 다른 여러 상황이 표출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 상황에는 중국의 律令을 그대로 자국의 통치기구로 채택하여 중국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아들이는 경우, 중국의 律令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국 내의 사정에 맞게 일부 조문을 改撰해서 시행하는 경우, 律令을 참고로 자국 내에서 새로운 통치제도를 創定하는 경우 등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편목이나 조문이 잔존하지 않은 한국의 경우 검토하기가 어렵지만, 이 때 자국의 정치제도에 걸맞는 律令을 創定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가 이후 중국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轉機가 되었을 수도 있다. 고고자료를 통해 본 律令 수용 양상을 비교해 보면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차이점은 당시 국제정세에서의 양국의 입장의 차이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즉, 백제의 경우 관제가 묘제에 가장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고 중국과의 외교를 통한 생활양식이나 문서행정의 전환양상을 엿볼 수 있는데 반해 복식제에는 중국적인 특색이 멸망시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신라의 경우 묘제에는 세밀한 신분적 서열이 반영되지 않았는데 복식·도성제 등에 중국적 요소가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중국에서 받은 영향의 크기, 또는 얼마나 깊은 연계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반영하는 듯하다. 백제의 경우 중국적인 문물이나 제도적인 측면을 지향하고 있긴 하나 마지막까지 중국의 정치적 영향을 거부했던 듯한 감이 있다. 그에 반해 신라는 적극적으로 중국의 제도와 정치적 영향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용하면서 한반도 내부에서의 자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통일사업을 진전시켰음이 고고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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