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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호승 시 연구 : 낭만적 아이러니를 중심으로

        김증순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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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정호승 시에 나타난 대상에 대한 양가적 태도를 살펴보기 위해 낭만적 아이러니를 방법론으로 삼았다. 낭만적 아이러니는 ‘자기 창조’와 ‘자기 파괴’ 의 과정에서 ‘자기 제한(절제)’을 하고 그 결과 무한한 동경을 통해 예술의 자율성을 확보하였다. Ⅱ장에서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개념과 특성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정호승 시에서 낭만적 아이러니의 내적 근거를 탐구해보았다. 1절에서는 작품 속에서 ‘자기 창조’와 ‘자기 파괴’를 통해 자아성찰의 계기를 마련하고 미적인 영역에서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낭만적 아이러니는 ‘미적인 것’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더불어 다시 학문적 논의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음을 밝힌다. 2절에서는 정호승시에서 낭만적 아이러니의 내적근거를 ‘거리’에서 찾는다. 우선 실존적 자아에 대한 ‘거리’이다. 정호승은 사랑에 실패한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를 학대하여 자아 분열에 이른다. 다음으로 현실에 대한 ‘거리’이다. 정호승은 빠르고 각박하고 효율성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다움을 잃어가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거리를 두고 있다. Ⅲ장에서는 정호승 시에 드러나는 시 세계를 사랑, 바닥, 빈틈, 자연으로 나누어 ‘자기 창조’와 ‘자기 파괴’의 변증법을 적용해 보았다. 1절에서는 사랑의 이율배반성이다. 도덕적 책임을 동반한 운명적인 완전한 합일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정호승에게 사랑의 실패는 곧 인생의 실패이다. 정호승은 성찰을 통해 사랑을 부정하고 분노를 표출하지만, 사랑의 이율배반적 속성으로 고통 속에 휩싸여 방황한다. 사랑을 가장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 속에서 사랑 부정과 사랑 추구의 모순 속에 놓인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에는 고통이 따른다는 진리 앞에서 사랑의 이면을 보기 시작한다. 사랑은 허공에 못질하는 것처럼 형체가 없고, 평행하게 달리는 철도 레일처럼 마주보는 그리움이고, 겉으로는 시커멓게 타고 있지만 그 속은 노랗게 익어가는 고구마를 기다리는 것과 같고, 외로움을 동반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제야 분노의 ‘독’과 ‘칼’을 버리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정도의 사랑을 또 다시 동경하게 된다. 2절에서는 바닥의 아이러니이다. 정호승은 시인이라면 누구보다 바닥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이고, 자신을 넘어 타인의 고통을 돌아보아야 하는 사명을 가진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시인이 쓰는 시의 바닥은 그가 속한 현실의 바닥과 같다. 정호승이 응시한 현실의 바닥에는 목이 꺾인 꽃, 모가지가 없는 닭, 외다리 재두루미 한 마리, 서울 노숙자들, 사랑 없는 가족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바닥의 삶에 대한 성찰을 통해 정호승은 바닥 자체가 되어 버린다. 바닥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오히려 바닥의 존재에 대해 이해하고 감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호승은 바닥을 인정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바닥 위 천상에 존재하는 별과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를 지향한다. 3절에서는 빈틈의 양가성이다. 정호승은 실체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가지는 ‘빈틈’에 대해 어떤 실체와도 관계를 맺지 못하면 ‘죽음’으로, 타인과 관계를 맺게 되면 타인을 향한 ‘윤리’ 로 채우는 양가적 태도를 드러낸다. 마조히즘 출발한 죽음에 대한 환상으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 하지만, 누구에게나 죽음의 시간은 자연스럽게 온다는 것을 깨닫고 그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이제 ‘빈틈’은 낭만적 아이러니가 실현되는 공간으로 ‘자기 파괴’에 제한을 둠으로써 극도의 주관성(죽음)에 빠져들지 않고, 타인을 향한 윤리(꽃)를 피우게 하는 조정 역할을 한다. 그리하여 빈틈이 ‘빈손’이 되어 다른 이의 손을 잡게 되고, 그것이 실천으로 이어져 타인을 향한 윤리로 발현된다. 4절에서는 자연과의 대조와 동일시이다. 실존적 자기 자신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아 자연과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자신의 원죄의식을 드러내는 한편, 자연과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카타르시스와 삶의 근원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 자연과의 대조를 통한 반성적 사유는 자신을 더욱더 주관적인 자의식에 빠져들게 한다. 그러나 자연과의 동일성을 인식하는 것은 주관적인 자의식에서 빠져나와 삶의 근원적인 이치에 도달하여 객관성을 유지하게 한다. 그리하여 모든 인간은 외롭다는 대명제를 발견하게 된다. Ⅳ장에서는 ‘자기 창조’와 ‘자기 파괴’의 과정을 통해 얻어낸 무한한 동경을 통한 미학화를 다룬다. 1절에서는 사랑에 대한 동경으로 희생이 전제된 모성적 사랑과 순수한 동심으로의 회귀이다. 그러나 여전히 ‘늙지 않는 사랑’을 추구함으로써 사랑은 무한한 동경의 대상으로 열려 있다. 2절에서는 바닥과 희망의 역설이다. 정호승은 역설의 원리를 통해 바닥이 깊을수록 스스로 ‘바닥’이 되어 그 바닥에서 희망을 찾는다. 그러나 정호승이 ‘바닥’의 고통에서 희망을 찾았다고 해서 ‘바닥’의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바닥과 희망의 영원한 교체 속에서 바닥을 동반한 희망을 향해 열려 있다. 3절에서는 비움과 타인을 향한 윤리이다. 정호승은 빈 벽이 되어 닫힌 ‘벽’에서 열린 ‘문’으로 치환하여 배고픈 타인에게 다가간다. 이때 타인을 향한 윤리는 예수와 같은 일방적이고 무한 책임이다. 그러나 정호승은 ‘당신도 빈손이 되어 나의 손을 잡아주기’를 원한다. 또한 타자성과 지나친 관심은 충돌한다고 보고, 타인을 향한 윤리를 상호성과 배려를 향해 열어 놓고 있다. 4절에서는 자연과의 상호공명이다. 정호승은 자연에 애정을 가지고 집중하여 자연의 마음을 읽고 그 자연이 다시 인간의 마음을 읽게 되는 진정한 울림, 즉 상호공명을 실현하게 된다. 그러나 정호승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 공명에서 멈추지 않고 자연성을 내면화하여 ‘자연화’ 상태를 동경하게 된다. ‘자연화’는 사라져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호승이 ‘자연화’를 원한다고 언제든지 자연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 대한 충분한 공감 없이 막연한 부러움의 ‘자연화’는 그 자연이 받아주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과의 상호공명을 통한 ‘자연화를 위해 정호승의 마음은 항상 자연을 향해 열려 있다. 요컨대 정호승은 사랑에 대해 긍정과 부정을 통해 영원히 늙지 않는 사랑을, 바닥의 고통을 인정함으로써 바닥을 동반한 희망을, 빈틈에서 비움을 통해 타자성과 충돌하지 않는 상호적인 윤리를, 자연과의 대조와 동일시 속에서 자연과의 상호공명을 통한 ‘자연화’를 각각의 진리로 설정하여 무한한 동경을 드러냄으로써 예술의 자율성을 확보하여 미학화를 실현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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