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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세기 망명 위그노의 삶의 궤적과 정체성

        정원철 고려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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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교를 국가 통일의 장애물로 여겼던 17세기 프랑스에서 위그노들은 점증하는 공권력의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이에 신앙의 자유를 지키고자 유럽 각지로 망명하였던 위그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종교·가족적 유대·정치의 측면에서 정체성의 위기를 겪게 되었다. 이삭 뒤몽 드 보스타케와 자크 퐁텐의 망명 위그노 회고록은 이 시기에 프랑스를 떠나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에 정착했던 망명 위그노들의 다양한 삶의 정체성 형성 과정을 보여준다. 보스타케는 가톨릭으로 개종을 함으로써 자신의 종교적 정체성에 큰 상처를 입었던 반면 퐁텐은 종교적 수난을 극복하고 위그노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켰다. 이 가운데 이들이 집필한 회고록은 가족적 유대를 지키고 이를 후대에 보전하고자 했던 이들의 의지를 반영한다. 한편, 망명 위그노들에게 있어 정치적 정체성도 매우 중요했다. 보스타케는 잉글랜드 국왕 윌리엄 3세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면서 정착지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고자 했다. 반면 든든한 정치적 후원자가 없었던 퐁텐은 정착지 하층 토착민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회고록에 상세히 기술하면서 선량하고 충성스러운 잉글랜드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게 된다.

      • 중세 말 남독일 무술교본에 나타난 무술

        이재훈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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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 후반 요한 리히테나우어에 의해 정립된 독일 무술체계는 비갑주무술을 토대로 하는 이론적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고도의 감지능력과 활달하고 자유로운 움직임을 중시한 리히테나우어 무술은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 싸우는 것을 선호한 귀족층의 취향과 거리가 멀었다. 비록 통념상 중세 말 무술문화는 귀족적인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15세기 무술사범들의 저서에서는 마상무술과 갑주무술에 대한 귀족 후원자들의 선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비갑주무술 중심의 무술체계를 지켜오려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리히테나우어 무술은 중세 말 남독일의 독특한 환경 속에서 빚어졌다.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혼란과 내분 속에서 남독일의 크고 작은 귀족들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자신의 전사적 가치를 선전하고자 했다. 이는 무술사범들에 대한 후원으로 이어졌으나 결국 그들은 과시적인 궁정 스포츠에 눈을 돌렸다. 한편 도시민들은 14세기 동안 도시 공동체 안에서 주요한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면서 무술 문화가 뿌리내릴 토양을 마련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중세 성기 이후로 부상하기 시작한 개인의 정체성의 자각은 무술 문화를 싹틔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리히테나우어 무술은 고립 속에서 생존과 안전을 추구했던 도시민들의 욕구에 맞추어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호신무술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이 때 중세 말의 결투재판 제도는 독일 무술이 체계화된 전문지식으로 발달할 수 있도록 기여했다. 결투는 중세 말에도 여전히 도시 평민들의 주요한 법적 판결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무술사범들은 결투절차에 관여함으로써 전문가로서 자신들의 사회적인 역할을 확보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결투의 통제된 환경을 통해 자신들의 무술전통을 유지·계승했고 그 외연을 창조적으로 확장시켰다. 무술사범 탈호퍼의 책 속에서 결투에 대한 사범의 인식을 잘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결투를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정의하고 심지어 신의 심판보다도 사범의 역할을 더욱 중시한다. 그리고 고객을 위해 기술을 가르치는 사범의 역할과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전문가로서 그의 위상은 더욱 드높아진다. 결국 도시민 무술사범이 지닌 자부심의 근원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고유한 전문지식이었다. 그리고 15세기 말의 사회적 변동이 리히테나우어 무술의 생명력을 앗아갈 때까지 무술사범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독자적인 정체성과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 12세기 잉글랜드의 반유대주의 : 윌리엄 노리치 살해 사건을 중심으로

        이수인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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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4년 노리치의 소년 윌리엄의 살해 사건은 유대인들이 제의적 목적으로 기독교도를 살해한다고 믿는 제의살인 혐의에 대한 잉글랜드의 첫 번째 사례로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사후 민심에 의해 순교자 성인으로 추대되어 많은 기적을 일으키며 숭경을 받았다. 수도사 토마스 몬머스가 기록한 『생애와 기적』은 윌리엄 노리치의 짧지만 경건한 생애, 유대인들에 의한 끔찍한 죽음, 살해자 유대인과 유대인 보호자가 겪은 천벌, 그리고 그의 사후에 일어난 기적을 상세히 담고 있다. 그러나 성인 숭경과 성인전 전통의 측면에서 『생애와 기적』은 차별적 특징을 드러내지 못한다. 토마스 몬머스의 역할은 12세기 잉글랜드에서 새로 추대된 성인들의 전기 작가들이 수행한 전형적인 역할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므로 『생애와 기적』은 성인전으로서보다는 제의살인 혐의의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먼저 문제가 된 것은 과연 유대인이 그를 살해했는가의 여부였다. 이에 대해 초기 연구자들은 유대인을 혹은 기독교도나 가족을 혹은 정신이상자를 범인으로 추정했다. 이처럼 범인의 정체가 불확실한 가운데 홀로코스트 이후에는 유대인의 범행설 자체를 언급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20세기 후반에는 제의살인의 기원과 전파가 쟁점이 되었다. 토마스 몬머스의 창작설, 대륙 기원설, 다른 기원의 소문 등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12세기 잉글랜드는 윌리엄의 살해 사건을 제의살인 혐의로 받아들일 수 있는 독특한 상황이 조성되어 있었다. 12세기는 유럽에서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에서 큰 변혁을 겪은 시기였는데, 잉글랜드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있었지만 약간 색다른 환경에 처해 있었다. 잉글랜드는 정치적으로 1066년의 노르만 정복을 겪은 뒤 새로운 봉건제와 지배계급을 받아들이며 혼란을 겪었고, 이 혼란은 12세기의 내전으로 더욱 깊어졌다.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문화적·계급적 이질감이 아직 크던 이 당시, 정복자인 노르만인들이 프랑스에서 데려온 유대인들은 더욱 더 이질적인 집단으로 비쳤고, 왕권의 유대인 보호는 이들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웠다. 또한 경제적으로 유대인들은 각종 특권을 누리며 고리대와 금융업에 종사함으로써 좋지 못한 반응을 초래했다. 이와 동시에 문화적으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문화적 정체성을 엄격하게 고수함으로써 지역사회에 효과적으로 동화되지 못했으며, 이 점이 여러 오해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배경은 대부분 유럽에 공통된 것이지만, 특히 유대인이 외래인인 노르만 지배층과 결속되어 있었고 새 정착지에 거주한 역사가 비교적 짧았던 것은 유대인에 대한 토착 잉글랜드인의 반감을 증폭시킨 특수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12세기 잉글랜드의 반유대주의가 제의살인 혐의의 측면에서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제의살인은 직접적으로 십자가와 유대인들의 살인을 나타냄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재현한다. 윌리엄의 죽음에 관해서는 십자가, 어린 양의 이미지, 유월절과 부활절이라는 시기적 배경 등이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수난을 모방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에 관한 상징적인 의미까지 재현한다. 또한 출혈이라는 요소는 유대인들의 옹호자가 출혈로 사망한다는 점에서 유대인들의 오랜 피의 저주를 실현시키는 요소로 등장함과 동시에, 희생자 소년 역시 피를 흘리며 사망함으로써 기독교도를 구원하고 유대인들의 제물이 되는 구원적인 이미지를 드러낸다. 이런 점에서 제의살인 혐의는 새로운 반유대주의의 등장을 보여준다. 그것은 기독교도들의 내면의 불안에서 비롯된 실체 없는 환상이 생명력을 지니면서 지배층이나 식자층보다는 일반 대중에게서 더 많이 나타났다. 이들은 제의살인 혐의를 통해 기원후 1세기에 일어났던 유대인들의 죄를 12세기의 현재로 불러냈고, 무지로 범행을 저질렀던 죄인의 후손들을 악의를 품은 고의적 살해자로 만들었다. 또한 이는 살해자인 유대인뿐만 아니라 희생자인 예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당시의 신앙과도 연관되어 있었다. 예루살렘이 십자군 운동으로 상징에서 실제가 되었듯 유대인들의 죄도 제의살인 혐의로 인해 상징에서 실제가 되었으며, 이후 이들은 회개나 개종의 가능성마저 의심받으며 기독교 세계에서 공존할 입지가 좁아졌다. 이는 13세기의 대박해와 이후의 대대적인 축출로 이어지는 반유대주의 흐름을 조성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

      • 12-13세기 랑그독 지방에서의 카타르파 번성 배경

        최하나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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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의 목적은 신화화된 카타르파 해석을 벗어나 시대 맥락 속에 카타르파를 위치시키고자 하는 최근의 연구 경향에 따라 카타르파가 번성한 배경을 지역의 정치, 사회경제, 문화의 측면에서 살펴봄으로써 랑그독 사회 고유의 문화와 정체성의 일면을 밝혀보는 데 있다. 이를 위하여 랑그독에 카타르파가 유입된 1140년대부터 카타르파 섬멸을 위한 이단심문이 효과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던 1250년대까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카타르파는 이 시기에 귀족이나 도시 유력자 같은 세력가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랑그독에 자리잡았으나, 몽세귀르성의 함락과 맹렬한 이단심문 활동으로 초기의 지지세력을 잃게 된다. 이 시기는 카타르파가 랑그독에서 가장 번성했던 시기이므로 랑그독 고유의 문화를 드러내는 데 적합하다. 또한 이 글에서 ‘랑그독’(Languedoc)은 오크어권 중에서 서쪽으로 피레네 산맥, 동쪽으로 론강, 북쪽으로 중앙산악지대를 경계로 하는 남프랑스 중서부를 의미한다. 카타르파가 가장 번성하였던 툴루즈와 알비 지역에서의 이단심문 기록에 의존하였기에 중심지는 중서부 랑그독이 될 것이다. 카타르파가 랑그독에서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정치권력의 분열 덕분이었다. 서로 간 함부로 개입할 수 없었던 랑그독 영주들의 상황을 틈타 카타르파는 영주들의 지지, 적어도 그들의 묵인 아래 자신들의 신앙을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낼 수 있었다. 알비 십자군 이후에도 이단심문 제도가 장기간 존속했다는 점은 랑그독 사회에 카타르파가 얼마나 뿌리 깊게 정착하였는지 보여준다. 카타르파의 교리에 매혹된 귀족, 특히 농촌귀족을 구심점으로 하여 도시와 농촌 사회의 개방적 사교 구조를 통하여 카타르파는 확산되었다. 카타르파의 신자층은 수적으로 소수파였지만 그 계층 구성의 양상이나 이단심문 시기의 현상으로 볼 때 상당히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 계층 간 개방적 교류 구조 속에서 랑그독인들 특유의 공동체 의식은 카타르파의 번성에 기름진 문화적 부식토를 제공했다. 또한 반교권주의 기류를 타고 공동체 속에서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존경스런 ‘선생님’인 완덕자들을 매개로 카타르파는 공동체 내부에 안착할 수 있었다. 랑그독의 공동체는 고유의 정체성을 가지고 밀접하게 맺어져 있었고, 가족을 기본단위로 삼아 카타르파는 그러한 공동체 속에서 랑그독의 사회관계망을 활용하여 확산해 나갔다. 이 글은 여러 가지 아쉬움을 남겨두고 있다. 하나는 카타르파 번성의 원인을 랑그독 사회상과 치밀하게 연결시키지 못한 점이다. 카타르파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그저 상정해두고 당시의 랑그독 사회에 연결시켜 중세 랑그독 환경을 정리해 보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다른 하나는 카타르파가 왕성하게 활동한 또 다른 지역인 북부 이탈리아와의 비교를 전혀 시도하지 못한 점이다. 마지막으로 랑그독을 북프랑스 비교하는 일도 미흡했다. 이러한 아쉬움은 남프랑스 문화의 독특한 정체를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한 과제로 남을 것이다.

      • 토마스 모어의 정의담론과 정의를 위한 죽음

        조명동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2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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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유토피아』의 정의담론과 관련하여 모어의 ‘정의를 위한 죽음’의 성격을 해명해보고자 하였다. 혁명적 공화국인 유토피아국의 창조자로서의 모어와 허물어져가는 천년 전통의 가톨릭 질서 수호자로서의 모어 간의 간극은 평생 그의 정신세계를 사로잡았던 화두인 정의에 의해 봉합될 수 있다. 모어의 정의는『유토피아』에선 완벽한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개개인의 영혼 속에 내면화된 공동체 공익 정의였고, 이단 논쟁기의 글들에서는 가톨릭 신의 정의 수호를 위한 호교론적 정의였으며, 옥중기의『고난을 이기는 위안의 대화』와『그리스도의 슬픔에 관하여』에서는 순교의 여정으로서 내세를 향한 신의 정의였다. 혁명적 유토피아국은 불의한 현실 유럽의 종말을 가정하고 그 역상으로서 지리적 외딴 섬에 세워진 세속화된 신국의 성격이 짙다. 그렇기에 사회질서 추구자로서 휴머니스트인 그가 유토피아국의 공유제 같은 급진적 제도를 유럽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공유제는 유토피아국 인민의 영혼 속에 정의를 내면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유토피아국에서 이 내면정의는 자연스러운 인간 유대의 토대로서 정의공화국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덕으로 자리한다. 독특하게도 이곳의 정의는 가부장적 가족질서와 가족애 그리고 동무로서 형제애를 강조하는 공유제적 평등에 기반을 둔다. 이것은 사익을 배제하는 플라톤적 관념과 형제애를 강조하는 키케로적 관념의 결합이다. 모어가 풍자문학적 도덕서『유토피아』를 집필한 의도는 복합적이다. 첫째 당시 식자귀족층으로서 동료 휴머니스트들 간에 정의공화국 담론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고, 둘째 당시 휴머니스트들이 가졌던 낙관적 사회조화 이상론의 현실적용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기 위해서였으며, 셋째 당시 유럽의 불의를 상쇄하기 위한 근본책으로 정의의 내면화를 거론키 위해서였다. 넷째로는 그 의도가 유럽현실이 그렇게 불의하게 된 데에 대한 원인이 모어 자신과 같은 식자귀족층이 위로는 군주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잘 섬기고 아래로는 일반민의 민생을 잘 돌봐야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망각한 데 있었음을 동료 식자귀족층에게 환기시키는 데 있었다. 반교권주의가 확산되고 헨리 종교개혁이 현실화되자, 가톨릭 질서 수호자로서 공직자였던 모어는 상전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면서도 그의 잠복된 본심을 노출시킨다. 예컨대 유토피아국에서 노정되었던 형평적인 사회 정의가 논쟁기엔 배타적인 반이단 호교론적 정의로 변모하게 된다. 논쟁에서 교회 전례 의식에 대한 모어의 집착은 호교론자로서의 모어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모어에게 이단자 척결은 가톨릭 사회에 번져 있는 암세포를 도려내는 정의로운 일이었다. 그에게 정의는 장기간 다수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동의된 공통의 질서이자 권위였다. 사회계층 피라미드 상단에서 하단에 이르기까지 교황, 세속군주, 귀족, 일반민과 가솔이 순서대로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들 각각이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직분과 기능을 다하여 질서 정연하게 조화를 이룬다면 그러한 공동체는 자연스레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이라는 인식이 모어의 내면에 잠재해 있었다. 그러니까 모어의 정의는 계서적 정의였던 셈이다. 죽음 직전에 자신이 왕의 충복이었지만 왕보다는 신이 먼저였다는 모어의 언급도 그것을 반증한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든 권력욕, 명예욕, 물욕, 육욕, 가족애 등의 본능적 기본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와 같은 보통 인간으로서 모어 또한 그러했다. 그러나 모어는 정의를 위해 이 모든 것들을 저버렸다. 그에게 죽음은 개인 구원 전략으로서 신의 정의를 향한 그의 양심의 자연스러운 발동이었다. 그것은 최후의 정의였던 신의 성령으로 세워진 천년 전통의 가톨릭 질서가 붕괴되어가고 있다는 모어의 심층적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모어가 당대의 불의한 현실에 더욱 비관적으로 반응했지만 절망에 매몰되지 않고 그 심정을 자신의 저서들 속에 승화시켰으며, 그 동안 쌓아 놓은 현실의 모든 것들을 다 저버리고 죽음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면서까지 양심이란 보편적 도덕 가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모어가 무엇을 위해 왜 죽었는지는 모어의 옥중 저서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게 된다.『고난을 이기는 위안의 대화』와『그리스도의 슬픔에 관하여』에서 파악되는 그의 수난과 죽음은 타자를 회심시키고 그 자신 개인의 구원을 위해 예정된 신의 섭리작용으로서 신의 정의의 수호 과정이었다. 여기서 신은 천년 전통의 신앙 공동체를 이끌어왔던 정신적 이데올로기로서 가톨릭 신을 말한다. 가톨릭 신은 그가 수호해야 할 궁극적 이데아로서 부동(不動)의 동자(動子)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모든 행적과 사상은 바로 이 가톨릭 신의 섭리에로 수렴되고 환원된다. 그러니까 죽음으로 정의를 수호하게 한 모어의 양심의 중심부엔 중세 천년의 신앙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 카타르파 교리의 특징과 그 현실적 의미

        주나미 高麗大學校 大學院 201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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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라노 칙령 이후 기간이 기독교화의 시대였다면, 12~13세기는 서구 기독교 사회가 종교적ㆍ사회적 재통합을 추구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새 천년에 대한 기대감과 종교적 열정, 교권과 속권의 투쟁과 연합, 도시와 상업의 발달과 함께 복잡하고 다양해져가는 사회적 욕구 속에서 중세 가톨릭은 교회가 영적ㆍ현실적 지배세력으로 통합의 중심에 선 사회를 만들기 위해, 내적으로는 정화작업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재기독교화(re-Christianization)라는 두 가지 중요한 과제에 직면했다. 수도원 운동과 공의회를 통한 수많은 성직자와 교회 쇄신 시도들이 가톨릭의 내적 정화작업이었다면, 재기독교화는 외적 정화작업이자 이를 위한 세속 규율화였다. 또한 세례를 통해 표면적으로는 기독교 사회에 들어왔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수많은 평신도들을 완전하게 기독교 사회 구성원으로 만들어 가톨릭의 지배를 공고히 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고자 가톨릭은 교황의 수위권 인정을 전제로 한 상부 두 위계인 교권과 속권의 제휴, 그리고 이 양자의 지배와 특권 등을 재확인하려 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과 정신까지 세세하게 규율할 정책들을 마련해 현실에 적용시켜 갔다. 이원론과 복음주의 특성을 함께 갖춘 카타르파 교리는 초대교회의 청빈함과 순수함을 찾는다는 점에서 가톨릭의 내적 정화작업과 일치하는 면이 있었으나, 재기독교화를 위한 가톨릭 정책과는 근본적으로 정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의 창조주가 천상과 지상 모든 것을 직접 창조해냈다는 가톨릭 교리와 달리, 카타르파는 이원론에 근거해 선과 악을 정신과 물질로 나누고, 자연과 인간의 육신을 악마의 작품이라 생각했다. 카타르파의 영적인 신은 <구약>의 신이 아니었으며, 가톨릭교회가 강조하는 맹세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또한 카타르파는 에덴동산의 사건을 신의 말씀을 거역한 불복종의 대가가 아닌 조물주의 계략으로 인한 육체적 타락이라고 여김으로써 가톨릭의 자유의지와 원죄를 부정했다. 신의 법을 어긴 것을 인간의 그릇된 선택으로 보고 죄의식을 상기시키는 가톨릭과 다르게 카타르파는 죄를 세속세계 자체로 보기 때문에 인간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았다. 이러한 카타르파의 이원론적 사고는 가톨릭교회의 세속 참여가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고, 일원론 교리를 통해 하느님과 사도들에서 교황으로 그리고 그 아래 사제로 이어지는 가톨릭의 중앙집권적 권력구조를 흔들었으며, 자유의지에 따른 불복종과 원죄, 선천적인 한계를 인간에 대한 외부통치 합리화로 보는 가톨릭의 정치적 논리를 위협했다. 더 나아가 카타르파는 예수의 육화와 부활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구원 또한 영적으로 해석했으며, 성육신에서 파생된 삼위일체 논리와 육체적 구원을 동반하는 종말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려움과 영원한 육체적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뒤섞인 가톨릭의 최후의 심판과는 달리 카타르파에게 마지막 날은 아예 오지 않거나 인간이 육신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환영할 만한 순간이었다. 또한 가톨릭에서는 한 번의 삶으로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지만 카타르파는 천상과 합일을 이루는 구원 전까지는 윤회라는 장치가 삶과 죽음 사이에서 세상 모든 것들을 순환시킨다고 믿었다. 이러한 카타르파 교리는 예수의 육화를 재현하고 세속 삶의 가치를 되새김으로써 교회의 세속참여와 규율 정책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가톨릭의 구체적 실천들인 세례, 성체성사, 고해, 성인과 십자가 숭배, 연옥, 종말론에 대한 직접적인 거부로 이어졌다. 이는 세속에 대한 교회의 윤리적&#8228;경제적 지배 기제들을 무가치하게 만들고, 가톨릭을 중심으로 이루려는 중세 기독교 사회의 외적 내적 단일화 모두에 방해가 될 여지가 있었다. 인성이 배제된 천사 성모 마리아는 이원론, 영적인 육화와 함께 카타르파 교리를 움직이는 주요 축이었다. 따라서 이 역시 인성과 신성의 결합을 통해 가톨릭이 추구하려는 교권의 세속 권력화와 교권과 제권의 결합에 방해가 되었다. 또한 뱀과 조물주를 사탄으로, 선악과를 성행위로 묘사한 카타르파식「창세기」해석과 실제 출산을 하지 않은 성모 마리아는, 가톨릭이 옹호하는 출산과 결혼의 가치를 찾는 데도, 성과 결혼을 규제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브의 영이 남성과는 다른 형태의 육체에 갇히기 전에는 본래 아담과 같은 천상의 존재였다는 카타르파 교리 해석과 비록 제한적이기는 하나 성사와 설교의 권한을 모두 갖는 여성사제의 존재는, 가톨릭이 그동안 펼쳐왔던 여성 배제 및 여성을 이용한 성 통제 정책과 맞지 않았으며 사회적 변화 속에서 나날이 높아져 가는 여성 신도들의 종교적 열정을 교회 밖으로 이탈시킬 우려가 있었다. 요컨대, 카타르파 교리는 12~13세기 재기독교화를 위해 가톨릭이 취했던 모든 외적 정책과 대립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리 갈등과 연결된 현실적 문제들은 알비 십자군, 이단 재판과 같은 카타르파 탄압사건이 발생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결국&#985170;초자연적인 투쟁에 대한 초기 기독교도들의 비전은 인간의 갈등을 표현하고 그것을 우주적 차원까지 끌어 올린다”라고 초기 기독교 역사를 평가한 종교 사학자 일레인 페이젤의 관점과,&#985170;교의(dogma)란 것은 어느 개인이 순수하게 이론화한 신앙 명제가 아니라 하나의 현실 표현”이라는 기독교 사상사가 폴 틸리히의 지적은 로마 교회의 재기독교화 정책이 불러일으킨 사회적 갈등 속에서 가톨릭과 충돌한 카타르파 교리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이다.

      • 10~12세기 프랑스 리무쟁 지역 귀족사회의 재편

        차승현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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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도비쿠스 1세 때부터 시작된 카롤루스 왕가의 갈등으로 인해 아키텐의 분리주의적 성향은 더욱 강해졌다. 아키텐 왕국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내정에 간섭하려던 서프랑크의 카롤루스 대머리왕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그 결과 9세기 후반의 아키텐은 ‘왕국’에서 ‘공국’으로 이행하기 시작했다. 원래 왕권을 대리하던 아키텐의 대귀족들은 오랜 내전으로 왕가의 정통성과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다수의 백령들을 병합했으며, 관직 및 토지 분배를 통해 토착 귀족을 길들이고 이들을 부백으로 삼아 각 지방을 다스렸다. 서프랑크 왕으로부터 ‘아키텐 공’이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완벽한 왕권을 사용했던 경건공 기욤은 리모주 백령을 장악하고 카롤루스 대머리왕의 가신이었던 일드베르를 첫번째 리모주 부백으로 임명했으며, 여타의 리무쟁 부백들도 아키텐 공으로부터 부여 받은 권력, 그리고 결혼을 통해 확보한 인적 관계망 및 토지를 활용하면서 독자적인 영향력을 확장해 나갔다. 리무쟁에서는 1000년을 전후하여 구체제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폭력의 증가 현상이 나타났으며 주교들은 무기력한 왕권을 대신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세속 귀족들의 부당한 간섭과 침탈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의 평화’ 운동을 개시했는데, 이는 공권력이 해체되고 성주와 기사들이 득세하는 성주령의 시대가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리무쟁의 봉건적 주종 관계는 1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확산되었다. 군소 귀족들은 리모주 부백에게 종속되었던 반면, 유력 봉신들은 부백과의 관계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그리고 11~12세기 초반의 리모주 부백들 역시 주군이었던 아키텐 공과 느슨하게 연결되었다. 그러나 결혼을 통해 아키텐 공을 겸하게 된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는 리모주 부백 가문의 계승 문제에 차례로 간섭하면서 리무쟁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한편 헨리 2세와 그의 아들 리처드가 노골적으로 추진했던 중앙집권화 정책을 위협으로 받아들인 리무쟁 및 인근의 주요 귀족들은 12세기 후반 내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의 저항은 관습을 통해 존중되어 오던 기존 관계가 일방적으로 파기된 것을 항의하는 정치적 제스쳐였으며, 군주권이 강화되던 시기에 제후와 지역 귀족들 간의 관계를 재정의하려던 시도로 볼 수 있다. 이처럼 10~12세기의 정치∙사회적 혼란을 겪은 리무쟁의 귀족들은 급변하는 사회에서 낙오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의 가족 구조를 변화시켰다. 1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 두 이름 체계에서 식별 기능을 담당했던 첫번째 구성 요소는 ‘개인 이름’이 되었으며 가족의 수장은 집안 고유의 특정한 이름을 장남에게 부여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뒤를 이어 가문의 책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공표했다. 차남의 개인 이름 역시 어느 정도 제한된 이름 창고를 활용했던 반면 딸을 위한 가문 고유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이는 11세기부터 여성을 배제한 남성 우위의 가족 구조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성(姓)으로 발전한 이름의 두번째 요소는 해당 가문이 보유한 성채나 영지의 이름을 활용하거나 시조의 이름 또는 별명을 사용함으로써 가문의 표지가 되었다. 이처럼 개인 이름과 성 모두 리무쟁 귀족들의 친족 구조가 11세기부터 장남을 중심으로 재편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름의 전달 관행에서 드러난 장남 우위의 가족 체계는 장자상속제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11세기 중반까지는 엄격한 부계 친족 구조를 도입하지 않고 양계제적 상속 원칙을 활용했는데, 이는 가산의 공동 상속, 여성의 토지 상속, 부백 칭호의 공동 보유 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12세기에는 장남이 모든 가산을 장악했으며 차남 이하의 아들과 딸은 원칙적으로 배제되었다. 한편 결혼은 권력과 재산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자 갈등을 종식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은 다양한 전략을 활용하여 장남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처럼 장자 상속제와 결혼 전략을 통해 수평적이었던 가족 구조가 수직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구성원들은 가문 의식을 체화했다. 리무쟁의 주요 가문들은 특정 수도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조상들의 영혼 구제를 부탁했고, 그 대가로 증여를 받은 수도사들은 망자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도록 정기적인 기도를 통해 추모를 이어갔다. 특히 가문의 유구한 역사 그 자체로부터 권력의 정당성을 얻기 원했던 유력한 귀족들은 기록에 의존하여 더 오래된 과거를 기억하고자 했다. 따라서 구전과 기록을 모두 이용하여 가계도를 재구성한 족보는 가문 의식의 강화에 반드시 필요한 도구가 되었다.

      • 12~13세기 동물지에 나타난 기독교적 상징과 이념

        주나미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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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edieval Bestiaries, which draw religious and moral teachings from the characteristics of animals, are interesting but not very reliable from the viewpoint of modern. But that is not just because medieval people did not have knowledge of nature. Rather, it should be said that their main purpose is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ours. At that time, Bestiary was a kind of Commentary to God's creation and a textbook of symbolic interpretation of God's wisdom in the world of creatures. In analyzing the totemism of primitive tribes, early on, Claude Lévi-Strauss said that we should focus on the system made by means of animals, not animals themselves. So the purpose of this dissertation is to elucidate about purpose of Bestiary of the 12th and 13th Centuries, in other words, what kind of symbolism and meaning system it gave to the medieval society. In particular, I focus on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ymbolic meanings given to animals by Bestiary and the ideological strategies of the church that tried to increase control over secular society. Bestiary was born and developed on the basis of Physiologus and Etymologiae. As time goes by, Bestiary came to rely increasingly on encyclopedias such as Etymologiae. But through ‘selective quotation’, ‘intentional omission’ and ‘addition of meaning’, Bestiary kept its character as a religious document inherited from Physiologus. That is to say, Bestiary is not simply a collection of knowledge about nature. It was a document aimed at spreading the value system of Christianity by conveying the symbolic and religious interpretation of the nature of creatures. What kind of symbol and meaning did Bestiary give to medieval European society? For an answer to this question, I explore how the characteristic of animal symbols in Bestiary of the 12th and 13th Centuries is different from the characteristic of animal symbols of Physiologus and Etymologiae. Next, based on these differences, I analyze how the symbolic meanings of animals are related to society at the time. Compared to others documents of the previous period, Bestiary reflects the anti-Semitic tendencies that have emerged since the 11th century. This shows that the Medieval European society not only gradually otherized the Jews but also rationalized racial oppression and attack on Jews. In addition, Bestiary reveals the ideology of the church, that it should contribute to the expansion of Christian power by enlightening the violence of secular power. And above all, Bestiary has abundant evidence about Christian ideological devices that are used to regulate and control the lives of lay people. Especially, Bestiary tends to emphasize Seven Sins that directly connected with the lives of laymen. Unlike Physiologus, the bad animals of Bestiary are not simply focused on faith, but are related to internal and individual sins of everyday life of ordinary people. Also by using various animal symbols, Bestiary emphasizes the Confession as the core requirement of salvation and preaches a new method of confession called private penance. This shows that Medieval Bestiaries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Christian ruling Id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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