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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사 기우만 산문 연구 = A study on the prose of Songsa Gi u-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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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6655581

      • 저자
      • 발행사항

        익산 : 원광대학교 일반대학원, 2022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박사) -- 원광대학교 일반대학원 , 한문고전학과 , 2023. 2

      • 발행연도

        2022

      • 작성언어

        한국어

      • 발행국(도시)

        전북특별자치도

      • 형태사항

        159 p. ; 26 cm

      • 일반주기명

        지도교수: 이군선

      • UCI식별코드

        I804:45008-200000664531

      • 소장기관
        • 원광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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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Songsa Gi uman(松沙 奇宇萬, 1846~1916) was a scholar representing Jeonrado(全羅道) in the late Joseon Dynasty. He was a scholar who inherited the academic tradition of his grand father. Nosa Gi jeungjin(蘆沙 奇正鎭, 1798~1879). This pape...

      Songsa Gi uman(松沙 奇宇萬, 1846~1916) was a scholar representing Jeonrado(全羅道) in the late Joseon Dynasty. He was a scholar who inherited the academic tradition of his grand father. Nosa Gi jeungjin(蘆沙 奇正鎭, 1798~1879).
      This paper developed the following discussions on Songsa's prose.
      II. Life and relationships; Songsa's life is largely divided into the period of succession of home education, the period of active lecture, and the period of active military service. Songsa's succession of home education usually lasted until at the age of 33. The period of activity in the righteous army originated from the outbreak of the Eulmi Incident(乙未事變) in 1895, and in 1896, Songsa raised an army with about 200 Honam(湖南) righteous warriors and became the Honam Grand Righteous Officer(湖南大義所將). When the Eulsa Treaty(乙巳勒約) was concluded in 1905, he agreed with Myeonam(勉庵) and tried to cross the West Sea(西海) to go to China and appeal for his support. He was also imprisoned in relation to the execution of the Eulsa Ojeok(乙巳五賊). In 1909, when the Honam Righteous Army was almost wiped out, Songsa practiced anti-Japanese activities centered on records by writing 󰡔Honam Righteous People's Books(湖南義士列傳)󰡕.
      People who followed Songsa during his lifetime include Myeonam Choi Ik-hyeon(勉庵 崔益鉉), Lee Seung-hak(李承鶴), Kim Pyeong-muk(金平默), Jo Seong-ga(趙性家), and Kim Seok-gwi(金錫龜). Most of these people were close friends. Songsa's friends include Lee Man-do(李晩燾), Lee Joong-eop(李中業), Jeong Jae-gyu(鄭載圭), Jeong Eui-rim(鄭義林), and Lee Choi-seon(李最善). People who followed the Songsa include Jeong Si-hae(鄭時海), Yang Hoegap(梁會甲), Yang Hyung-beom(梁亨範), Yang Pyapson(梁彭孫), Yang Jae-hae(梁在海), An Byeong-taek(安秉宅), and Lee Eung-ho(李應浩). Most of them were people who participated in righteous army activities following the will of the Songsa or devoted their efforts to nurturing younger students in their local villages.
      III. Song's view of literature. Song sa followed the literature theory held by the existing Neo-Confucian scholars and put Mun(文) under the Do(道). Rather than acknowledging the intrinsic value of literature, he prioritized and prioritized the accumulation of virtue through internal training of character.
      IV. The awakening of the consciousness; The first thing that catches our eye in this pavilion left by Songsa is the emphasis on integrity and the mention of their ancestors who left their traces.
      V. Confucian teachings; The Songsa considered that the preservation of ‘confucian reader(讀書種子)’ and elevation of Family Consciousness were one way to save a country in crisis. Therefore, he encouraged his younger students to devote themselves to reading scriptures or books related to Confucianism through various types of writings in order to develop a Neo-Confucian worldview.
      VI. The seal of the female figure; Songsa clearly distinguishes the terms 'Yeo-sa(女史)' and 'Yeo-sa(女士)' in many prose texts. And in accordance with the Neo-Confucian teachings of the Three Compassionate Principles(三從之道), the existing notion is given to women who immediately follow their husbands and give up their lives. Songsa wrote the word Yeo-sa(女士) fir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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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松沙 奇宇萬은 이 땅의 漢文學 결산 시기에 全羅道를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는 祖父였던 蘆沙 奇正鎭의 학통을 계승한 性理學者이자, 나라를 위해 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義兵 활동에 가담했...

      松沙 奇宇萬은 이 땅의 漢文學 결산 시기에 全羅道를 대표하는 학자였다. 그는 祖父였던 蘆沙 奇正鎭의 학통을 계승한 性理學者이자, 나라를 위해 구국의 기치를 내걸고 義兵 활동에 가담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본고는 송사의 산문을 대상으로 아래와 같은 논의를 전개하였다.
      II. 생애와 교유관계. 송사의 생애는 가학 계승기와 강학 활동기 그리고 의병 활동기로 크게 삼분 된다. 송사의 가학 계승기는 대체로 그가 33세에 부친상을 마친 때까지이다. 이때 그는 고봉 기대승과 노사 기정진의 가학을 전승하며 과거에 뜻을 두기도 하였다. 강학 활동기는 月松里 澹對軒에서의 강학에서 시작하는데, 이때 󰡔노사집󰡕의 간행과 󰡔猥筆󰡕 논란이 있었다. 노사의 학문적 성과를 수습ㆍ정리하면서 자신의 학문적 정체성과 위상을 본격적으로 확대한 시기에 해당한다. 의병 활동기는 1895년 을미사변의 발발에서 기인하는데 1896년 송사는 200여명의 호남 義士들과 거병하여 湖南大義所將이 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면암과 뜻을 함께하는 한편, 중국에 가서 지원을 호소하고자 西海를 건너려고 하였다. 또한 을사오적의 처단과 관련하여 수감되기도 하였다. 1909년 호남의병이 전멸되다시피 하자 송사는 󰡔湖南義士列傳󰡕을 지어 기록 중심의 항일을 실천하기도 하였다.
      송사가 생전에 추종한 인물로는 勉庵 崔益鉉과 李承鶴ㆍ金平默ㆍ趙性家ㆍ金錫龜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노사와 가깝게 지냈던 인물이다. 송사가 평교한 인물로는 李晩燾ㆍ李中業ㆍ鄭載圭ㆍ鄭義林ㆍ李最善 등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으니, 이들 역시 노사의 제자들이 많다. 송사를 종유한 인물로는 鄭時海ㆍ梁會甲ㆍ梁亨範ㆍ梁彭孫ㆍ梁在海ㆍ安秉宅ㆍ李應浩 등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송사의 뜻을 따라 의병활동에 가담하거나, 향리에서 저마다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던 인물들이다.
      Ⅲ. 松沙의 文學觀. 송사는 기존의 성리학자들이 지녔던 문학론을 답습하면서 文을 道의 아래쪽에 두었으니 기존의 貫道之器 또는 載道之器의 문학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그는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훌륭한 말을 하게 마련이지만, 훌륭한 말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有德者, 必有言. 有言者, 不必有德].”라고 한 孔子의 가르침에 따라 문학의 본질을 德의 發現이라고 여겼다. 文藝美를 追求하는 문학 본연의 가치를 인정하기보다는, 내적인 心性修養을 통해 德性의 축적을 前提하고 우선시 했던 것이다.
      IV. 士意識의 昂揚. 송사는 󰡔송사집󰡕의 권17에서 부터 권21까지에 무려 420편의 樓亭記를 남겼다. 이 누정기 안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내용은 志節의 강조와 그 자취를 남긴 그들의 조상들에 관한 언급이다. 송사는 누정기마다 이런 사실을 귀중하게 소개하면서, 그 후손들에게 효행의 고취와 계승을 당부하였다. 안으로는 지절을 지키고 밖으로는 효행을 실천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선비다운 선비가 되라고 당부한 것이었다.
      V. 儒敎的 結束 圖謀. 송사는 ‘讀書種子’의 保存과 家門意識의 高揚이 풍전등화처럼 위급한 나라를 구하는 하나의 방편이라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성리학적인 세계관의 간단없는 전개를 위하여 후학들에게 여러 형식의 글을 통해 儒敎와 관련한 經典이나 서적의 독서에 힘쓰라고 격려하였다.
      그리고 祖上들이 남긴 遺訓을 이어받는 일이야말로 구체적인 수양의 한 방도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저마다 碩果가 되기를 당부하였다. 더불어 族譜는 일실 된 역사를 대신해서 후세에 증거가 될 만한 문헌이라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VI. 女性像의 探索. 송사는 많은 산문 속에서 ‘女史’와 ‘女士’라는 용어를 명확하게 구별해서 쓰고 있는데 三從之道의 성리학적인 가르침대로 남편의 뒤를 따라서 목숨을 버리는, 바로 下從하는 여인들에게 기존의 관념을 쫓아 女史라는 말을 먼저 썼다.
      그리고 烈女나 貞婦라는 가치 부여에서 큰 의미를 지녔던 下從에서 벗어나, 未亡人의 신분이지만 心從을 선택했던 근대 지향적인 여인들을 위해 송사는 ‘女士’라는 단어를 아끼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夫人으로서 士君子의 言行에 능한 이’, ‘君子의 德에 짝할만한 이’, ‘文字를 알아 女史에 통달하고 外物의 얽맴을 초탈한 이’ 등으로 女士를 정의하였다.

      이상과 같은 논의를 통해 본고는 열강의 침입이라는 가혹한 시대 상황에 마주쳤던 송사라는 한 지식인의 고뇌와 현실적인 대응 방안을 산문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선의 패망 앞에서 나라의 보존을 위해 문자를 활용하여 義理와 道의 顯彰을 통해 敎化와 士意識의 昂揚에 힘쓰는 한편, 讀書種子의 保存과 家門意識의 高揚을 부르짖던 朝鮮 遺臣의 간절한 소망과 位相을 짚어보았다. 더불어 노도와 같은 西勢의 流入 시기에 下從을 지양하고, 한 걸음 더 내디딘 삶을 지향하는 女士들의 행보에 주목했던 송사의 눈길도 함께 다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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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I. 序論 1
      • II. 生涯와 交遊關係 7
      • 1. 生涯 7
      • 2. 交遊關係 19
      • I. 序論 1
      • II. 生涯와 交遊關係 7
      • 1. 生涯 7
      • 2. 交遊關係 19
      • III. 松沙의 文學觀 40
      • 1. 德의 發現 40
      • 2. 義理와 道의 顯彰 47
      • IV. 士意識의 昂揚 59
      • 1. 志節의 崇尙 60
      • 2. 孝行의 鼓吹 72
      • V. 儒敎的 結束 圖謀 85
      • 1. ‘讀書種子’의 保存 85
      • 2. 家門意識의 高揚 99
      • VI. 女性像의 探索 114
      • 1. 下從의 ‘女史’像 114
      • 2. 心從하는 ‘女士’像 127
      • VII. 結論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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