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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장(更張)의 리더십, 英祖의 국가경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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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영조는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경제적으로 흉년이 심각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를 추대한 노론을 제외하곤 대다수 신료들과 백성들은 영조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

      영조는 정치적으로 분열되고 경제적으로 흉년이 심각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그를 추대한 노론을 제외하곤 대다수 신료들과 백성들은 영조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이인좌의 난’이 발발했다. 난 초기에 사태파악을 못하고 대응조치도 내리지 못한 조정은 오명항의 자진 출병과 안성전투에서의 승전보 이후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고, 난 발발 17일 만에 반군을 진압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영조의 위기관리 능력이 돋보였는데, 도순무사 오명항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이라든지, 단순가담자와 주동자를 구분하여 도성에서 내응하지 않도록 적극 조치한 것이 그 예이다.
      특히 그는 반군의 재판과정에서 노론을 제외한 대다수 신료들이 위기의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반란의 중요한 동기가 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즉위 초 피상적으로 취하고 있던 탕평책이 난 이후 본격화되었다. 그러면 이 과정에서 영조가 직면한 어려움은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첫째, 조정에 대한 불신과 유언비어이다. 특히 영남의 명문가인 정희량 등 이른바 "명신세가"들의 반군 참여로 인해 민심이 크게 흔들렸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민심이 반군쪽으로 급속히 쏠렸다.
      영조는 조정에 대한 불신을 줄이기 위해 반란의 원인과 진행 상황, 그리고 처벌의 최소화 방침 등을 교서로 지은 다음, (諺書)로 번역한 다음 각 도에 나누어 보내 백성들로 하여금 환히 알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 영조는 도성 안에서 반군과 어떤 방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특히 궁궐 시위 장사(將士)들을 안심시킴으로써 조정 내부 관련자들을 회심시켰다. 실제로 그는 단순가담자의 경우 일체의 처벌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일상생활과 직분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둘째, 적군의 상황과 사태 전개의 불투명성이다. 특히 서울 안에서 적과 내통하는 세력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거나 지시할 수 없었다. 나중에 이인좌의 공초에서 밝혀졌지만, "영남·호남에서 군사를 동원하면 연곡(輦穀)의 친병(親兵)이 마땅히 모두 출정(出征)하게 될 것이니, 남태징·남태적이 서울의 일을 하되, 서울은 이유익이 주장"하게 되어 있었다.
      영조는 이에 대해서 현지 사령관인 오명항에게 작권통제권을 온전히 부여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처음 현지에 부임할 때 왕이 사용하는 상방검(尙方劍)을 직접 내주어서 현지 사령관이 판단하고 결정하도록 위임하는가 하면, 경기도 지역의 전투가 한 고비를 넘은 3월 26일에는 손수 "지확공고(志確功高)"란 네 글자를 써서 내려주었다. 이미 "그 공이 일세에 빛나고 이름이 역사에 남는다"는 것을 잘 알지만 지금 개선할 게 아니라, 유민을 안집시키는 일과 상벌 대상자를 선별하는 일 등을 마무리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도순무사 오명항은 이러한 폭넓은 재량권과 국왕의 신뢰를 바탕으로 여러 가지 장애물을 극복해 나갔는데, 그는 비밀리에 간첩을 만들어서 청주 등의 적진에 투입시켜 반군의 진행경로를 파악했다. 뿐만 아니라 소금장수 옷차림을 한 적의 간첩을 붙잡아서 오히려 적의 동태를 파악했다. 특히 관군은 각 지역의 아전층의 협조를 얻어냄으로써 적의 정세를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관군의 "명령을 빠르게 전달(傳通)하여 전투에 기여했다.

      셋째, 가장 큰 위기는 자칫 농사철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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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This is a study on King Yeongjo's crisis management leadership in Spring 1728. King Yeongjo was faced, in 4 years after the enthronement, with a difficult challenge that several thousands people rised in revolt for turning him out of the the throne. Y...

      This is a study on King Yeongjo's crisis management leadership in Spring 1728. King Yeongjo was faced, in 4 years after the enthronement, with a difficult challenge that several thousands people rised in revolt for turning him out of the the throne. Yi Injwa was at the head of a rebellion. How did King Yeongjo overcome this rebellion
      First, he entrust Oh Myeonghang, the generalissimo, with full powers in order to cope with uncertain condition of fields. Second, he divided rebel army into two: the leader of the rebel and participant uncomplicated. Third, he made progress a trial and demobilized military for engage in farming. As the result, King Yeongjo was a great success in overcoming rebel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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