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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 : 세대팀녹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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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1 -K3씨는 1930년 충남 아산군의 한 중농에서 2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살이 되던 1937년에 인근 면에 소재 한 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당시 ...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1
      -K3씨는 1930년 충남 아산군의 한 중농에서 2남 5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살이 되던 1937년에 인근 면에 소재 한 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당시 함께 입학한 80명 중 8살이었던 동급생은 3명에 불과하였다. 입학은 면접 시험을 치고 붙어야 가능하였는데, 학생 중에는 3년 연속 입학을 시도한 삼수생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또한 14살까지만 소학교에 입학이 가능하였으므로 14살이 넘은 학생 중에는 동생의 이름으로 학교에 다닌 사례도 있었다. 학교는 남녀 공학이었으며 반도 같이 편성되어 있었으나 여학생들과는 6년 내내 한 반이어도 말을 한 기억은 없다.
      당시는 소학교만 졸업하고도 면서기가 될 수 있었으며, 13~14세에 소학교에 들어 온 아이들의 경우 졸업할 때면 이미 18~19세가 되므로 바로 면서기가 되는 예도 있었다. 그 때만 해도 전 인구의 8할이 아직 농민이었던 시절이었으므로, 특히 지방에서는 면서기, 군서기, 소학교 선생이 되는 것이 거의 모든 조선사람의 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면내에서는 그래도 “부잣집 아들”에 속했던 K3씨는 소학교 6년을 졸업하고 1943년에 공주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그 당시 “1도1고보”주의에 의해 충청남도 전체에 한 개의 고등보통학교가 공주에 있었으며, 충남 전체의 인구 150만명에서 고보에는 110명 정도가 뽑혔으므로 고보로 진학하는 사람은 자타가 공인하는 “선민(選民)”이었다. K3씨가 중학교로 진학하던 1943년에만 하더라도 면 전체 인구 11,000명 중학교에 들어간 사람은 7~10 명 정도였다. 당시의 중학교는 재산이 있어야만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좋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 국비로 다닐 수 있는 사범학교로 진학하였는데 그 경우에도 500석이상의 재산 보증이 있을 때만 입학이 허용되었다.
      고보에서는 1학년 때는 공주 시내에 사는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가 기숙사에 들어가야 했으며, 2학년 3학년으로 진급할수록 점점 줄어들어 공부 잘하는 ‘모범생’만 기숙사에 남았다. 보통 한 방에 1학년 3명, 2학년 2명, 3학년 1명씩 잤던 기숙사의 생활은 군대와 같은 엄격한 위계로 지배되었다.
      매주 월요일이면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군대식 사열을 받았으며, 학교수업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훈련이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공부를 했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책도 없어 어쩌다가 학교에 책이 한 두 권이라도 들어오면 모든 학생들이 돌려서 읽곤 하였다.
      기숙사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그런 것들보다 배고픈 것이었다. 집에서 농사지어 쌀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숙사에서 학생 1인당 배급되는 쌀은 3홉3작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K3씨 집안이 500석 이상으로 면내에서 두 세 번째에 해당하는 큰 농사를 짓는 집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다니는 동안 운동화를 신어 본 기억이 없다. 사실 일제시대에는 서울에 사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특히 지방에서는 거의 대부분이 빈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K3씨는 1943년부터 1946년까지 공주고보에 다니고, 해방이후에는 서울로 유학하였다. 공주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1946년 9월에 서울 고등학교에 들어가 졸업한 후 바로 서울대학교로 진학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17세 이후에는 6.25때 피난 생활을 하였던 것을 빼고는 계속 서울에서 생활한 셈이다. 그러나 공주에서 학교에 다니던 중학시절부터 방학이면 늘 고향으로 내려가 농사일을 돕곤 하였다.
      징병제가 실시된 것은 1944년으로 당시 K3씨는 아직 중학교 2학년 때였으므로 대상이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 14세때 소년 비행병 시험을 쳐서 붙어서 입영 통지를 기다리다 해방을 맞았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2
      -L1은 1974년 생으로 4남 2년 중 차녀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그리고 그녀의 전 생애를 서울지역에서 보내었다. L1은 성신 중학교와 성신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집이 부유해서 십대 당시 그녀의 집에는 자신의 부모님과 형제들 뿐 아니라, 큰아버지와 큰아버지의 자녀들이 함께 생활했으며, 학교와 집이 멀었던 L1씨의 친구도 L1아버지의 권유로 L1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였다. 식모 2-3인도 동거하였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 공장 일군들의 식사를 담당하여 늘 바빴다. 부유했던 그녀는 당시 몸이 매우 약해서 짚차를 타고 등교하곤 했으며, 간혹 외제 옷을 입고 다녔다. 학교를 오가며 지나다니던 동네 뒷산에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던 기억,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으나 늘 1등만 하던 언니를 무척 시샘했던 기억을 중심으로 십대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매우 순종적이었으며,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매우 권위적이셔서, 반찬도 맛이 없으면 다시 차리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몸이 약한 그녀에게 매우 관대했으나, 오히려 큰오빠가 매우 엄하여서, 자신이 대학생이 됐을 때도 늦게 귀가하면 큰오빠의 꾸지람을 받곤 했단다.
      학교 다닐때 과외를 받을때도 아버지는 여자선생님만 붙여주셨다.
      학교다닐때 현재의 남편과 연애하여 졸업 후 바로 결혼하였다. 직장생활은 해본적이 없으며, 몸이 약했던 그녀는 유산이 여러차례 되어, 현재의 아들을 임신했을때는 10개월을 거의 누워서 지냈다고 한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3
      -1940년대 후반 4남 2녀 중 막내아들로 전주, 풍남선에서 출생하였다. 큰 형과는 13살 차이가 나고 큰누나와는 16살 차이가 난다. 계속 전주에서 생활하였다. 전주사범부족국민학교를 다녔다. 그 국민학교는 유일하게 면접을 보고 들어가는 학교였다. 면접이란 것은 집안을 보고, 숫자세기나 글 읽기 등의 간단한 테스트를 하는 것이었다. 부속초등학교 학생들은 거의 과외를 했다. 학생들이 실력이 떨어지면 담임선생님 집에서 합숙을 했다. 자신은 집안사정이 어려워 경기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집에 큰 단감나무가 있어서, 단감나무와 관련된 기억이 많다. 그 단감나무가 보이는 집에는 모두 단감을 나누어 먹었다. 나무타고 많이 놀았다. 국민학교 한 학년이 백팔십명이었고, 쭉 같은 학교 다니니까 전교생 거의 다 알고 지낸다. 쉬는시간에 남학생들은 공을 차면서 많이 놀았다. 깡통차기도 많이 했다. 쥐불놀이, 개울에서 멱감기, 전주천에서 수영하기 등을 했다.
      당시(50년대 말)에는 버스가 드물고, 자전거를 많이 타고 다녔다.
      아버지는 매우 완고하셨고, 누나가 대학에 합격했는데도 보내지 않으셨다.
      고등학교때는 방학도 거의 없이 공부하고, 책도 많이 읽었다. 공부하고 보내서 중고등학교때는 추억이 없다. 전주에서 부산까지 2박3일로 무전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4
      -K6은 1961년 충남 서산에서 1남 4녀 중 장만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서산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후 대전으로 유학을 갔다. 대전에 있는 아버지 친구분 집에서 하숙을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함께 농사를 지으셨지만, 농사일은 어머니가 주로 전담해서 하시고, 아버지는 중등학교 교사를 겸해서 하셨다. 그래서 가정 형편은 넉넉하였다.
      남아선호가 강했던 집에서 여자형제들은 공부도 별로 시키지 않았는데, 자신에게는 기대가 매우커서 도시로 유학까지 보내주셨다. 어렸을때는 아버지가 방학때 집에 오셔서 공부를 많이 시키셨다. 천자문가르키시고, 못하면 회초리 맞았다.
      중학교 방학때는 보충수업같은게 있었다. 어렸을 때는 산에서 새집 찾아서 알 꺼내서 먹고, 농사일도 돕고, 축구를 많이 했다. 돼지 불알로 공을 만들었다. 중학교때 가정 형편 때문에 몇 년 쉬다가 나이 많아서 다시 복학하는 학생들이 있었다. 중학교때 선후배 관계가 엄해서 선배로부터 기압도 받은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때는 아버지가 간혹 편지를 보내셔서 충고내지는 포부를 가져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고등학교때 가끔 영화보러 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자신의 동네에서 대학 들어간 것은 자신이 처음이었다. 매우 특별한 경우였다. 누나는 고등학교 가고싶어했지만 당시 동네에서 여자가 중학교 나온 경우도 드물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고등학교를 보내지 않았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5
      -K7은 1981년 2녀 중 막내로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현재도 송파구에 거주하고 있다. 아버지는 교회 관리직으로 일하고 있으며, 중산층에 속한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호서전산전문학교에 2년 재학했으며 현재는 강남 케이블 TV에서 일하고 있다.
      K7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클럽활동을 중심으로 기억한다. 중학교때는 볼링부를 해서 볼링 치러 다니고, 고등학교 때는 연극부를 했다. 연극부하면서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친구들은 이성친구들이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연애인들을 좋아했다. 써클 활동 하면서 음주문화를 접했다. 써클활동에서 좋았던게 선배들이 후배들을 잘 채겨주었던 거다.
      중 3때 처음으로 인터넷에 ID만들었다. PC 방에 가서 컴퓨터쓰려면 시간당 2000원 정도 했다. 인터넷으로 메일 주고 받는걸 제일 많이 하고, 채팅했다. 고등학교때 삐삐를 많이 썼는데, 나는 언니가 쓰던 휴대폰을 물려받아서 애들이 한번씩 빌려썼다.
      중고등학교때는 가족에 소홀했다. 학교친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부모님과 거의 단절 상태였다.
      직장다니면서 대학에 가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어 대학진학을 생각했으나,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을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사이버 대학에서 호텔 관광 경영을 전공하고 있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6
      -<J3>
      J3은 1972년 1남1녀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주로 송파구에서 10대를 보냈다. 부모님은 자영업을 하셨으며,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 IT관련 업종에서 일하고 있으며, 2001년에 결혼하여 현재 3살된 아들이 있다.
      당시 고등학교는 뺑뺑이를 해서 갔는데, 부모님이 경기고등학교를 보내기 위해서 삼성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용산고등학교에 걸렸다고 한다. 당시 강남에 거주기간이 6개월 이상 되어야지 경기고등학교에 갈 수 있었다.
      학교다니는 기간동안 모범생이었다. 야간자율학습은 강제가 아니었다. 학교가 멀어서 봉고차를 타거나 학교버스를 타고 통학했다. 점심시간에는 축구, 농구 많이 했다. 고등학교때는 농구구경가는게 제일 재밌었다. 학교 축제가 있을때는 여학교에 가본적이 있다.
      학교에서 공부잘하는 애들은 반에 에어컨 달아주었다.
      아버지와는 거의 만날 시간이 없어서 이야기를 거의 하지 못했다. 가족이 대화가 별로 없다. 중요한 결정이 있을때만 부모님이 선을 정해주는 정도였다.
      기숙학원에서 재수를 했는데, 하루에 4시간 이상 잠을 못자게 했다. 일주일에 한번씩 집에 갓다. 공부하러 모인데라 삭막함을 있었지만, 서울에서 떠나 자연속에 있는 것이 좋았다. 대학진학할 때 전공에 대한 지식이 너무 없었다. 화학공학과 갈려다가 학교가 더 중요한 것 같아 바꾸었다.
      <C3>
      C3은 1974년 전남 고흥에서 4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재혼을 하셔서 4남3녀 중 2남2녀만 현재의 어머니에게서 났다. 7남매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다 함께 살았던 기억은 없다. C3이 국민학교 6학년때 부산으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은 부산에 와서 함게 상업에 종사하셨다. C3은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결혼 전까지 무역회사에서 일하였다. 중간에 보육교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몇 개월 근무하다가, 결혼준비로 일을 그만두고, 결혼하면서 서울로 올라와 살고 있다. 서울에서도 유치원에서 보조교사로 일하였으나 임신을 계기로 현재 전업주부인다. J3과 부부관계이며 3살된 아들이 있다. 현재(2006년) 둘째를 임신중이다.
      전남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와서 친구관계에서 적응하는데 힘들었다. 자신은 경쟁같은거 모르고 살아왔는데 도시아이들은 다르게 느껴졌다. 말투도 다르고, 자신은 손에 주름이 많은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데, 사춘기가 되다보니까 외모 때문에 콤플렉스가 많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때 연탄가스 마시고 죽을뻔한 기억이 있다. 그것을 계기로 기름보일러로 바꾸었다.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다. 3학년때는 대학가려고 했는데 결국 못갔다.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해본 적이 없는 것 같은게 지금은 아쉽다. 그런걸 충고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오빠들이 대학학비 대준다고 했는데, 한번 떨어지고 나서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할때는 오빠들이 자립을 해서 집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지만, 자립을 해야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취업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교때는 아들과 딸을 차별하는 엄마와 많이 싸웠다. 자살할 생각도 했었다.
      부산 오기 전까지는 너무나 순수하고 아무 근심걱정이 없었는데, 중학교 후반부터 고1때까지 가장 힘들었다. 교회다니면서 자신의 콤플렉스를 많이 극복해나갔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7
      -P6은 1974년 4자매 중 3녀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어린시절 아버지는 의류공장 사장으로 매우 부유하였으나, 중학교 시절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매우 어려워져 대학진학을 포기하게 된다. 고등학교 졸업후 한전에서 사무원으로 일하다가 언니가 운영하는 화장품가계에서 일하고 있다.(이후 2006년 결혼하였으며, 현재 언니가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에서 일하고 있다.)
      아버지가 매우 가정적이어서 가족들이 함께 여행하는 것을 무척 즐겼다. 어머니는 가족에 매우 헌신적이었으며, 아버지가 하시는 의류공장에서 디자인과 운영을 도와 일하면서 늘 바쁘셨다. 집에는 일하는 언니가 항상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을 너무 크게 별려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아버지는 너무 실의에 빠져 집을 나가고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당시 너무나 믿었던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이 엄청났다.
      어머니도 기력을 잃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큰언니는 이미 결혼한 상태여서 친정의 일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으며, 둘째 언니와 자신이 돈을 벌어서 집을 꾸려 나갔다. 덕분에 여동생은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자신은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너무 힘들어서 어머니에게 죽는 것이 낫겠다고 했으나, 어머니가 죽을 힘이 있으면 살자고 하셔서 그때부터 더 힘을 내었다고 한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8
      -<P4>
      P4는 1964년 1남1녀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방송국 국장으로 일하시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으나, 경제적 형편은 부유한 편이었다. 아버지는 직장관계로 지방에 계시는 경우가 많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주말부부처럼 생활하셨다. 방학때는 아버지가 계신 지방으로 놀러가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친할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거주하면서 아버지의 식생활을 도와주셨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P4는 10대를 거의 서울에서 보냈으며, 현재 치과의사로, 결혼 했으며, 딸이 두 명 있다. L2는 P4의 아내이다.
      중학교 다닐대 과외금지가 생겨서 공직자 자녀들은 과외하다 걸리면 큰 타격이 있으므로, 고외를 거의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때는 그룹과외를 하는 학원에서 국어, 산수, 자연 같은 걸 배웠다. 중학교때는 공부를 많이 시키지 않았다.
      중학교때는 통금이 있었다. 바보들의 행진 같은 영화가 유행했다. 영화보는 것이 취미였다. 극장에 가기 어려워서 텔레비전을 많이 보았다. 3류 극장은 나이 규제가 심하지 않아서 가서 볼 수 있었다. 당시 이소룡을 숭배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대학준비는 고등학교때부터 하는 걸로 당시에는 인식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내신이라는게 없었다. 고등학교때도 중창단을 하면서 개인의 문화도 즐기고 그랬다. 현재 고등학생들에 비해 낭만이 있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때까지 교복을 입고 다녔다. 아내는 자신이 자율복 세대라서 남편과 세대차이가 난다고 말한다. 남녀 공학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성친구는 교회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매우 관대하셨고, 어머니는 매우 엄하셨다. 자녀를 키우는 책임이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L2>
      1970년 1남1녀 중 막내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한의사이며, 어머니는 전업주부로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이대 경제학과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대학원을 마친후 결혼 전까지 노동연구원, 조세 연구원 등에서 일하였으며, 결혼과 두 번의 출산이 이어지면서 전업주부가 되었다. 현재는 다시 일할 계획이 없다.
      중학교때는 남녀공학이었지만 남녀 반이 갈라져 있어서 교류가 거의 없었다. 1학년때 잠깐 교복을 입었지만 그 후로 입지 않았다. 당시 과외 붐이 너무 심해서 규제도 같이 심해졌다. 학교에서 거의 12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했다.
      중고등학교때 까지도 제주도나 강원도 등으로 가족끼리 여행을 많이 다니는 편이었다. 친정아버지가 매우 엄해서 대학교때도 여행가기 어려웠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9
      -C4는 1977년 2녀 1남 중 장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현재 중학교 교장,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감이다. C4의 어린시절 부모님은 모두 교사였다. 어머니가 계속 일을 하셨기 때문에, 외할머니가 삼남매를 거의 도맡아 키워주셨다. 처음에는 가까이 사시면서 돌봐주셨지만, 남동생이 태어난 이후에 함께 사시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결혼하기 전에 돌아가셨다. 친할아버지・할머니는 전남에 사신다. C4는 대학원을 졸업한 후 고려대에서 외국인 대상으로 한국어 강사를 하고 있다. (2006년 이후 미국으로 유학 중) 미혼.
      어린시절 외할머니와 보낸 시간이 많아 외할머니에게 어려운 점들을 이야기하곤 했으며, 어머니가 일하는 동안 외할머니가 하시는 집안일을 도왔다.
      부모님이 아무래도 아들을 원하셔서 세 명이 되었다. 당시에는 출산 휴가를 한달 밖에 가질 수 없어서, 어머니는 출산 후 바로 복직하셨다.
      부모님은 크리스마스 등에 책을 전집으로 선물해주셨다. 한국소설과 세계 명작들을 많이 읽었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엄한 편이시다. 부모님이 다 공무원이니까 매우 넉넉한 것은 아니었다. 외모에 관심이 있는 시절 어머니가 제때 쇼핑을 같이 못해주는 게 불만이었다.
      한영외고를 다녔으며, 밤에 늦게까지 자율학습을 해서 집에서 보낼 시간은 많지 않았다.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가지고 다녔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교복을 입었다. 비가 올때는 사복을 입어도 되다는 교칙이 있었다. 헤어스타일은 크게 규제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C4이 중학교때 대학원 공부를 하셨다. 그래서 외할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더 길어져서 힘든 얘기는 외할머니에게 많이 했다.
      외고에 가면 1차적으로 좋은 대학에 많이간다는게 있으니까 외고에 지원했다. 엄마들끼리 친하면 아이들끼리도 서로 잘 알고 친해졌다. 그런데 C4의 엄마는 직장생활로 다른 어머니들과 어울릴 수 없어, 자신은 알아서 해야하는 경우였다. 당시 같은 반에서 스물 네다섯명이 해외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었다.
      고1,2학년때는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많았다. 오히려 고3때 교회에서 성가대를 했다.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는 집에서 피아노 치거나 노래부르거나, 주말에 잠으로 풀었다. 현재 고등학교 친구들 중에 연락하는 애들은 없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10
      -L3은 1950년대 초에 김제 백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학교 선생님이셨고, 어머니는 농사를 지으셨다. 아버지가 전근을 다니셔서 어렸을때 살았던 지역에 관한 기억이 분명하지 않다. 홍수가 나면 밭과 외양간, 돼지, 닭이 떠내려가고, 우물가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있어서 포수가 왔다갔다 했다. 사람들이 노루사냥, 토끼사냥도 다녔다.
      갓난하기때 엄마 젖이 부족해서 유모 젖을 먹었다고 한다. 유모젖은 안먹겠다고 유모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울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라 학교 선생님들이 자기를 예뻐해 주셨다. 자신은 다섯 살때 학교에 보내달라고 졸라서 아버지 학교에 같이 갔었다. 학교 뒷산에 가서 도시락 까먹고. 정읍에서 학교에 다녔는데, 어머니가 그때 몸이 굉장히 아파서 어머니가 친정에 가고, 아버지는 하숙하시고. 형제들은 외갓집에서 살았다. 당시 아버지가 정미소 사업을 하신다고 하다가 사기를 당해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아버지는 자신감이 없어 술을 많이 드셨다. 재판에서 이겨도 받은게 없었다.
      어릴때는 동네 다니면서 어른들이 일하는데 끼어가지고 놀고, 동네 어른들이 이야기하는거 듣고 놀았다. 막내동생을 돌보는건 자신의 몫이라서 동생을 항상 업고 다녔다. 고무줄놀리, 공깃돌놀이, 오자미치기, 무덤 같은 데 가서 미끄럼 타기, 그런데 누워서 하늘쳐다보기, 코스모스 꽃잎으로 놀기, 학교 회전그네타기, 시소타기 등의 놀이를 했다.
      소도시로 전학갔을때, 공부를 잘해서 시골애라고 무시당하지 않았다. 소설책읽는거 좋아했다. 학교도서관에 있는 책은 거의 다 보았다.
      어머니는 항상 공부하라는 말을 많이 하셨다. 방학때는 집에 가서 어머니 일도 많이 도와드리고. 사춘기라고 부모한테 불만스러워 한 적은 없다. 자신에 대해 불만스러워 한 적은 있다.
      의대를 졸업하고 결혼을 했는데, 친정은 자녀들 위주로 하셨는데, 시집은 상당히 부부중심이어서 놀랐다. 같은 세대인데 하늘과 땅차이었다.
      학교 다닐때는 남녀 차별을 못느꼈는데, 레지던트 시작할 때 특정 과에 시험을 못치게 하는 등 남녀차별을 경험했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11
      -U1(여)은 1921년 서울 종로구 소격동 16번지에서 태어났으며, 금년 83세이다. 할아버지가 조선왕조 마지막때 충남 당진 부근 한 고을의 원님을 지내셨으며, 부모님도 그 때 결혼하여 함께 살았다. 조부모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어머니와 아들 둘을 천안 근처의 덕산이라는 곳에 있던 어머니의 친정에 맡기고 서울로 공부하러 떠나셨다. 아버지는 시험을 쳐서 서울 시청에 공무원으로 일하셨다. U1은 오빠가 셋이 있으며, 제일 큰오빠와는 나이가 거의 마흔살 가까이 차이가 난다. 서울서 공부하고 취직한 아버지가 오빠들의 어머니와 헤어지고 U1의 어머니와 재혼하셨기 때문이다. 오빠들은 서울에서 중학교를 나와 은행에서 일했으며, 결혼 후에는 지방에서 근무하고, 서울 집에는 같이 살지 않았다.
      7,8세 경에 유치원에 2년 정도 다녔으며, 오가는 길에 개울가와 솔밭에서 놀던 기억이 난다. 결성사범 학교의 부속국민학교에 다녔는데, 남학교와 여학교가 분리되어 다른 동네에 있었다. 학생들은 거의 조선사람이었으나, 교사는 거의 절반이 일본인이었다. 학생중에는 왕가의 자녀가 많았으며, 고종의 딸도 있었다. 경기고녀로 진학하여 4년을 다녔으며 다시 이화여대에 들어가 4년을 다녔다. 경기고녀의 선생은 거의 다 일본사람이었고 아주 규율이 심하였다. 이화로 진학했을때 처음에는 규율이 느슨하고 제멋대로인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졸업할때는 너무 빠져 대성통곡을 할 정도였다.
      경기고녀 시절 나츠메 소세키 등 일본 소설을 죽어라고 보았으며, 집에서 못 읽게 하면 숨어서 보곤 하였다. 4학년 때는 일본으로 보름간 수학여했을 갔었다. 중학교때도 왕가의 옹주들이 함게 다녔는데 그런 아이들은 하인이 도시락을 싸 가지고 따라와 끝날때까지 기다리다 데려가곤 하였다.
      경기고녀 졸업 후 친구들은 동경고사나 나라고사(고등사범학교) 등 일본으로 유학가서 교사 자격증을 따 가지고 돌아왔다. 오빠는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해서, 이화에 시험을 치게 되었는데, 어머니가 여자는 가정과면 된다고 해서 가정가로 가게 되었다.
      U1씨가 입학하던 해에 이화여대에 26명이 진학하였으나 도중 중퇴하거나 혹은 혼인하면 다닐 수 없어 그만 두고 그 중 14명 만 졸업하였다.
      정신대 때문에 배화고녀 교장에게 아버지가 부탁하여 급하게 취직을 하게 되었다. 이후 이화로 옮겼는데, 이전 배화고녀 교장의 중매로 영어 선생을 하고 있던 현재의 남편을 만나 27세에 결혼 후, 선생님은 그만두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3년 상을 마친 후에 결혼 하였다. 결혼식은 경기고녀 강당에서 하였으며, 흰 치마저고리에 베일을 쓰고, 남편은 검은색 연미복을 입었으며, 들러리를 섰던 여자들도 모두 한복을 입었다.
      당시 중학교, 대학교 시절 연애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U2씨는 부모에 거역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결혼 말 등이 있을 때 자신의 의견을 표시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순종하고 살았다. 그러나 학생이었기 때문에 학교 다닐 때 집안 일은 거의 해본 기억이 없다. 항상 집에는 일하는 사람이 있었다. 늦게 다니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지만 낮에는 얼마든지 다닐 수 잇어 명동 극장에 영화를 보러 다니곤 했으며, “잘 먹고, 잘 놀고 아무런 어려움을 모르고 지내던 시절”로 당시를 회상한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12
      -J1은 1913년 충북 진천구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시절 대가족안에서 생활했으며, 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이 적었다. 그녀는 할아버지 밑에서 글을 배웠으며, 천자문에 해당하는 자류, 동문 등 책을 떼면 집에서 잔치를 해 주었다. 밖에 나가는 일이 없어 친구가 없었으며, 만나는 사람들은 집안 사람들 뿐이었다. 아버지는 딸을 가두어키우려 하지 않았으나, 할아버지는 바깥 출입을 허락하는 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J1을 학교에 보내었는데, “양반집 딸이 학교에 왔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 소식에 “시집”에서 당장 데려오라고 하였다. J1은 태어나기도 전에 부모님들에 의해 혼약한 상태였으며, 시집에서는 장차 자기 집안의 며느리 감을 밖에 내보내는 것을 싫어하였다.
      학교는 포기하고 바느질을 배웠으며, 재주가 남달라 11살때부터 아버지의 두루마기 등 모든 옷을 지어입었다고 한다.
      16세에 조부가 혼약해 놓은 이씨의 아들과 혼인하였다. 신랑은 당시 휘문중학교 1학년으로 인기 있던 야기 선수였으며, J1보다 두 살 아래인 열 제 살이었다. 결혼한 후에도 어린애들이 합방하는 것은 잔인하다 하여 얼마 동안 각방을 쓰고 지내었다. 시집가서는 비위를 맞추기 어려웠던 시어머니의 칭찬을 받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남편은 휘문중학교를 졸업한 후 동아일보사에서 일하였다. J1은 19살 되던 해에 첫 아이를 낳았으며 이 후 9남매를 낳아 키웠다.
      시집갔을 때 시집에는 만주에 가서 살았던 시고모의 아들들과 8촌되는 시누이, 6촌 시동생 등 지방에서 올라와 학교에 다니는 친척들이 함께 살고 있어, 식구는 항상 17~18명이었으며 늘 손님이 있었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13
      -O2은 1980년 서울, 용산에서 1남 2녀 중 장녀로 출생하였다. 부모님은 자영업자로 중산층에 속한다. O2는 금란여자중학교와 명덕외고를 졸업하고 현재 고대 법대에 재학중이다.
      신촌에서 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어릴때 주위 대학에서 대모를 많이 해서 최루탄 가스 냄새를 많이 맡았던 기억이 있다. 동네 아줌마들이 불러서 코 밑에 치약을 발라주고 랩으로 감싸줬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이전에는 학원에 다니지 않았고, 한글은 스스로 터득했다. 초등학교때 선생님이 책을 읽으면 상을 주셔서, 칭찬듣는 것이 좋아서 책을 많이 읽었다. 그때부터 공부에 욕심이 생겨서 계속 올백을 맞았다. 중학교다닐때는 써클활동 없이 CA가 있었고, 노량진에서 단과학원에 다닌 경험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말부터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버지는 무능하고 약지 못하다는 평을 들을 수도 있는데, 정말 착하신 분으로 사람들을 좋아하고 가족들에게 헌신적이다. 밖에서는 호인인데, 어머니한테는 편해서 그런지 잘해주지 못한다. 우리 부모님은 천생연분이긴 한데, 엄마는 아빠와 다르게 성격이 칼 같고 똑부러지는 성격이다.
      자신에게 어머니는 가장 큰 의지가 되고, 존경하는 사람이고, 자신이 닮고 싶은 성격의 소유자다. 어머니가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된다. 외가집이 경제적으로 어려울때도 어머니가 장녀로서 경제적인 책임을 다하셨다.
      동생들하고는 친하게 지낸다. 여동생과는 성격이 완전히 반대다. 그래서 부딪히는 적도 많다.
      친할머니는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아서 아버지가 큰아들인데도 작은아버지와 같이 사신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14
      -K2씨는 1911년 생으로 전북 익산의 빈한한 소작농가의 아들로 출생했다. 큰아버지 한 분이 군산에서 한약방을 하고 계셨으나, K2의 부모는 배운 것도 없었고,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셔서 사는 것이 힘들었다. 형님 세 분과 누님 한 분, 여동생이 있었으나, 중학교를 졸업한 셋째 형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학교에 다니지 못했으며, K2는 야학에서 일본말 가나와 산수, 조선어를 배우고, 13세에 보통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2년간 다닌 것이 교육의 전부이다.
      농사일을 하다가 17세 되던 해에 집을 떠나 전주로 나간 후 거의 고향에 가지 않았다. 형제들도 모두 살기 힘들어 잘 만나지 않으며, 집안이 모두 기독교를 믿어 제사도 모시지 않는다.
      전도사의 큰아들 집에 심부름을 하는 아이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전도사의 둘째 아들은 학교에 다녔으나 자신은 심부름꾼이었으므로 많은 설움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
      K2는 큰아들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제과, 제빵 기술을 익혀 그후 스스로 제과점을 내어 5,6년간 운영하였으나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당시는 물자를 구할 수 없어 장사를 하기도 힘들었다.
      K2는 어쩌다 군청의 산림과에서 일하던 일본 고등계 형사의 아들을 알게 되어 그 사람의 소개로 군에 가는 대신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일본군대로 보내는 일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35세경 해방이 되었으나 자신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6.25때 부산에 피난 가서 전주의 같은 제과점에서 일하던 사람을 만나, 그집에서 일해주면서 새로운 기술을 더 배웠다. 그러한 경험이 바탕이 되어 전쟁이 끝나고 전주로 돌아와 지금의 제과점을 차려 크게 성공하였다. K2는 은퇴하고 아들, 사위 등에 의해 하나의 가업으로 여러 지역에 지점에서 운영되고 있다.

      집과 가족의 문화와 역사-세대팀녹취자료15
      -H1씨는 1927년에 전북 전주시 노성동에서 4남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으나 아버지가 외아들로 농사일을 남에게 맡기고 방탕하여 재산도 많이 날리고 어려웠으나, 어머니가 교육에 열의가 있어 딸들까지 6남매를 모두 공부시켰다. 외가가 부유하여 물려받은 재산이 좀 있었으며 어머니가 얌전하여 바느질 등으로 생계를 꾸려가며 학비를 대었다고 한다. 위로 언니 셋이 모두 중등이상의 교육을 받았으며, 오빠들도 큰오빠는 이리의 농림학교를 나오고, 둘째 오빠는 인천의 전문학교를 나와 공무원으로 일하였다. H1씨가 자랄 때는 이미 큰오빠가 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 취직하였으므로 비교적 여유있는 생활을 하여 전주시내에 있던 선교사가 세운 부설유치원을 다녔으며 졸업 후에는 풍남 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공주사범과 전주고녀 시험에 실패하여 간호학교로 진학하였다. 간호학교는 2년제였으며 국비생과 자비생이 있었는데, 국비생은 장학생으로 졸업 후 반드시 간호원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H1씨는 “막내로 귀엽게 커서” 도저히 간호원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오빠가 2년간 국비생으로 받은 장학금을 다 물어주고 그만두었다. 그 후 집에서 놀다가 해방되던 해 봄에 (19세때) 전주 국민학교에 양호선생으로 들어갔다. 8월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 교사들이 다 쫓겨가자 선생이 부족하게 되어 가을에 두세달씩 한글 강습회를 다니게 한 후 12월에 3종 교사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사람들에게 국민학교 교사자격증을 발급해 주었다. H1씨는 당시 합격자 45명 중 유일한 여자로 붙어 해방직후부터 국민학교 교사생활을 시작하였다.
      1946년에 둘째언니와 형부의 중매로 결혼하고 남편이 직장을 못 다니게 하여 그만두었다. 남편은 본래 전라남도 완도의 큰 부자로 서울에서 배재중학을 나오고 일본대학에 유학한 후 돌아와 전주의 북중학교에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5・16 이후 남편이 과거의 좌익활동 경력이 문제되어 퇴직 한 후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H1씨가 다시 교사로 복직하고자 하였으나 전라북도 도청에 불이나 교사 자격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좌절되고, 마침 군청에 있던 오빠가 복지부 과장에게 부탁하여 간호사 기록을 찾아 주어 면 보건소의 보건요원으로 재취업이 가능하였다. 보건요원이란 간호원이 아니라 행정요원으로 주로 당시 막 시작하였던 가족계획 사업의 실행요원으로 일하였다. 그러다 다시 전북대학교 병원에서 6개월 훈련을 받고 보건진료원으로 전직하여 전북 태인면의 한 보건 진료소에서 61세 정년퇴직까지 근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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