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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건국 이후 17세기까지 불교 승려의 정치의식과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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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이 연구는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억압했던 조선시대에 불교 승려들은 세속의 유교 정치를 어떻게 생각했으면 또한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그 특징을 분석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조선 ...

      이 연구는 불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억압했던 조선시대에 불교 승려들은 세속의 유교 정치를 어떻게 생각했으면 또한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그 특징을 분석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조선 건국기로 부터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까지를 대상으로 분석했다. 시기를 이렇게 정한 이유는 임진왜란 이후의 국가의 불교정책이 그 이전에 불교를 억압했던 그런 것에서 불교의 존재를 묵인하는 방향으로 전환된 약간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정책적 전환이 이루어진 역동적인 시기였던 만큼 불교에 관련된 한 사건과 인물이 많았다. 또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까지를 분석 대상으로 정한 것은 이 때에 승병들의 활약이 상당했고 이것이 국가의 불교에 대한 정책적 변화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분석 대상 인물로서는 불교에 대한 억압에 대해 저술이나 토론 등을 통하여 이론과 행동으로 세속 정치와 대결하면서 불교를 옹호했던 3명의 대표적인 승려를 선택했다. 조선 건국기에는 기화, 명종 때에는 보우, 임진왜란 때에는 휴정이 그러한 인물들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교에 대한 이론적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교와 불교의 유사성에 주목하면서 유학자 관료들에게 유교와 불교가 근본정신에 있어서는 같은 것임을 역설했었던 그런 경력이 있다. 다만 현실정치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었다. 기화는 저술과 토론으로 유학자 관료들과 접촉하려고 했다. 조선건국기인 이 시대에는 정도전을 비롯한 유학자들이 불교의 정치적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론과 주장을 펼치면서 억불정책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그런 작업이 극성을 이뤘다. 이런 상황에서 기화는 그런 비판이 부당하다고 또는 불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불교를 이론적으로 옹호하면서 억불정책을 완화시키려고 했다. 반면 보우는 당시의 실세인 문정왕후의 후원을 통해서 불교에 대한 국가적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 보우가 활동했던 명종 이전의 시대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와 같은 대표적인 유학자가 나올 정도로 조선에서 유학이 학문적으로 발전하고 유교가 생활 속에서 자리잡았던 그런 시대였다. 다만 왕실의 일부에서 불교를 개인적인 신앙의 형태로 후원하는 그런 경향이 남아있었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당시 정치적 실세였던 문정왕후의 불교에 대한 관심과 신앙은 그 당시 침체된 불교계를 부흥시키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회로 여겨지는 그런 상황이었다. 보우의 노력에 의해 부활된 승직에 의해서 그 이후 승려 지도자들이 양성된 효과도 있었는데 휴정도 그런 인물에 속한다. 휴정은 저술을 통하여 유교와 불교의 유사성을 주목하면서 승려들에게도 당시의 지배적인 국가 이념인 유교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역설했고 임진왜란 때에는 직접 승병 지휘관이 되어 전투에 참가했다.
      이들은 처한 시대적 상황은 각기 달랐기 때문에 그 성과도 역시 달랐다. 고려시대의 불교 유풍이 남아있고 군주들 역시 불교 신앙이 분명했던 조선 건국기에 활동했던 기화는 그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불교에 대한 유학자들의 편견에 대해서 논박하면서 불교를 지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대응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현실정치의 권력자와의 만남을 통하여 그런 힘을 통해서 불교를 중흥하려고 했던 보우의 노력은 그런 후원자가 살아있는 때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후원자가 사라지자 그 역시 추방되었고 처형되었다. 휴정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의 시대를 맞이하여 절실하게 국가로는 군사적 도움이 필요할 때 승병을 이끌고 전투에 참여함으로써 유학자 관료들이 불교를 무조건 배척하는 그런 태도가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유학자 관료들은 불교를 인정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억압하는 것이 아닌 묵인의 방식으로 불교를 대하게 되었다. 이후 이러한 조선왕조에서의 불교에 대한 묵인정책은 이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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