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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세기 우륵의 망명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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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6세기 전반에 우륵이 뜻밖에도 신라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라에서 왕의 최측근 음악인으로서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때로는 정치적 견해도 피력하며,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

      6세기 전반에 우륵이 뜻밖에도 신라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라에서 왕의 최측근 음악인으로서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때로는 정치적 견해도 피력하며,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살았을 우륵. 우륵은 왜 고독한 망명객의 신세를 선택했을까?
      가라의 악사였던 우륵은 왕산악, 박연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樂聖으로 추앙받아 오고 있다. ‘악사’라는 지위에 걸맞게 우륵은 다양한 음악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제까지 학계에서는 그를 가리켜 ‘정치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가 결행한 신라로의 망명은 정치적 행동에 상당하며, 그 망명 동기 또한 매우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음악인 우륵’보다 ‘정치인 우륵’의 망명 동기와 망명 과정을 추적하였다.
      6세기 벽두부터 맹렬하고도 끈질기게 영역을 잠식해오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가라는 522년에 신라와 혼인동맹을 성립시켰다. ‘가라-신라 혼인동맹’이 맺어지는 과정에서 우륵은 ‘악사’라는 지위로 인하여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신라에서 오는 사절을 접대하고 혹은 우륵 본인이 직접 신라에 혼인(준비)사로 갔을 경우도 충분히 상정된다. 우륵은 ‘친신라파’정치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변복’ 사건이 양국의 우호관계를 어긋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신라는 가라의 ‘도가 등 3성’과 ‘북경의 5성’을 함락시켰고, 가라는 종래의 ‘친신라 정책’을 철회하고 ‘친백제 정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친신라파’로 낙인찍혀, 목숨까지 위태로웠던 우륵. 가라가 백제와 ‘상맹’을 맺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마침내 신라로 망명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 시기는 544년 3월∼548년 4월의 사이의 어느 때였을 것이며, 그 과정에는 거칠부의 도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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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Woo-Reuk(于勒) was unexpectedly exiled to Shilla. As the king’s closest musician, Woo-Reuk may have been fully supported from the king, expressed his political views, and lived a fairly relaxed life. Why did W...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Woo-Reuk(于勒) was unexpectedly exiled to Shilla. As the king’s closest musician, Woo-Reuk may have been fully supported from the king, expressed his political views, and lived a fairly relaxed life. Why did Woo-Reuk choose a lone exile?
      Woo-Reuk, who was a musician of Gara(加羅), has been as one of Korea’s three Sacred Musicians along with Wang, San-Ak(王山岳) and Park, Yeon(朴堧). Obviously Woo-Reuk had performed various musical activities according to his status as a royal ‘musician’. Sometimes, however, the academic world highlights his ‘political’ figure.
      In this paper, I tried to examine the cause and process of Woo-Reuk’s exile to Shilla to illuminate the aspect of the ‘political’ Wook-Reuk rather than the ‘musician’.
      From the starting of the 6th century, Baekje had been fiercely and persistently invading Gara’s borders. In order to check Baekje’s invasion, Gara established a marriage alliance with Shilla in 522. It is believed that as a royal ‘musician’, Woo-Reuk played such a role in the process of ‘Gara-Shilla Marriage Alliance’ as hosting the envoys from Shilla or attending the marriage ceremony. On this occasion, he showed his political aspect of ‘Pro-Shilla.’
      However, the so-called “Changing Clothes Clothed” incident had damaged the relationship in the alliance. This led Shilla to conquer three castles and five castles subject to Gara. In turn, Gara repealed its conventional ‘Pro-Shilla Policy’ and pursued the switch into ‘Pro-Baekje Policy’. Stigmatized as a ‘Pro-Shilla Politician’, Woo-Reuk was tried in the political crisis. When he saw Gara form an alliance with Baekje, he eventually fled to Shilla. Perhaps it happened between March 544 and April 548, and his exile seems to have been helped by Geochilbu(居柒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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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Table of Contents)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우륵 망명 이전 가라를 둘러싼 정세
      • Ⅲ. 가라의 반신라 정책과 우륵의 망명
      • Ⅳ. 맺음말
      • 국문초록
      • Ⅰ. 머리말
      • Ⅱ. 우륵 망명 이전 가라를 둘러싼 정세
      • Ⅲ. 가라의 반신라 정책과 우륵의 망명
      • Ⅳ. 맺음말
      • 참고문헌
      •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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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李永植, "六世紀 安羅國史硏究" 62 : 1995

      2 金泰植, "한국사 7" 국사편찬위원회 1997

      3 김태식, "한국 고대 사국의 국경선" 서경문화사 2008

      4 이정숙, "제1부 한국고대사의 복원 : 진흥왕대 우륵 망명의 사회 정치적 의미" 이화사학연구소 (30) : 35-47, 2003

      5 김현구,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Ⅱ)" 일지사 2003

      6 백승충, "의령의 인물 樂師 우륵" (사)우륵문화발전연구회 2014

      7 박승홍, "우륵 출신지 省熱縣 위치 비정의 재검토" 한국지명학회 17 : 141-178, 2011

      8 연민수, "역주 일본서기 2" 동북아역사재단 2013

      9 李泳鎬,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 대가야박물관·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06

      10 朱甫暾,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 대가야박물관·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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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정숙, "제1부 한국고대사의 복원 : 진흥왕대 우륵 망명의 사회 정치적 의미" 이화사학연구소 (30) : 35-47, 2003

      5 김현구, "일본서기 한국관계기사 연구(Ⅱ)" 일지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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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朱甫暾, "악성 우륵의 생애와 대가야의 문화" 고령군 대가야박물관·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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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연민수,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1998

      14 김종택, "거창의 역사와 문화 Ⅲ" 거창군 2006

      15 오필제, "거창의 역사와 문화 Ⅲ" 거창군 2006

      16 白承忠, "가야의 지역연맹사 연구" 釜山大學校 大學院 1995

      17 백승충, "가야의 지역연맹론" 부경역사연구소 (17) : 5-43, 2005

      18 "魏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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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 白承忠, "6세기 전반 백제의 가야진출과정" 31 : 2000

      52 유우창, "6세기 전반 가라와 ‘나제동맹’의 대립 -낙동강과 관련하여-" 효원사학회 41 : 41-7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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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0.52 0.52 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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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5 0.67 1.012 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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