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세기 전반에 우륵이 뜻밖에도 신라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라에서 왕의 최측근 음악인으로서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때로는 정치적 견해도 피력하며,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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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Korean
KCI등재
학술저널
29-66(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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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전반에 우륵이 뜻밖에도 신라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라에서 왕의 최측근 음악인으로서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때로는 정치적 견해도 피력하며,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
6세기 전반에 우륵이 뜻밖에도 신라로 망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가라에서 왕의 최측근 음악인으로서 왕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때로는 정치적 견해도 피력하며, 상당히 여유로운 삶을 살았을 우륵. 우륵은 왜 고독한 망명객의 신세를 선택했을까?
가라의 악사였던 우륵은 왕산악, 박연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樂聖으로 추앙받아 오고 있다. ‘악사’라는 지위에 걸맞게 우륵은 다양한 음악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제까지 학계에서는 그를 가리켜 ‘정치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가 결행한 신라로의 망명은 정치적 행동에 상당하며, 그 망명 동기 또한 매우 정치적이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음악인 우륵’보다 ‘정치인 우륵’의 망명 동기와 망명 과정을 추적하였다.
6세기 벽두부터 맹렬하고도 끈질기게 영역을 잠식해오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하여, 가라는 522년에 신라와 혼인동맹을 성립시켰다. ‘가라-신라 혼인동맹’이 맺어지는 과정에서 우륵은 ‘악사’라는 지위로 인하여 일정한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믿어진다. 신라에서 오는 사절을 접대하고 혹은 우륵 본인이 직접 신라에 혼인(준비)사로 갔을 경우도 충분히 상정된다. 우륵은 ‘친신라파’정치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변복’ 사건이 양국의 우호관계를 어긋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신라는 가라의 ‘도가 등 3성’과 ‘북경의 5성’을 함락시켰고, 가라는 종래의 ‘친신라 정책’을 철회하고 ‘친백제 정책’을 모색하게 되었다. ‘친신라파’로 낙인찍혀, 목숨까지 위태로웠던 우륵. 가라가 백제와 ‘상맹’을 맺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마침내 신라로 망명하고 말았다. 아마도 그 시기는 544년 3월∼548년 4월의 사이의 어느 때였을 것이며, 그 과정에는 거칠부의 도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Woo-Reuk(于勒) was unexpectedly exiled to Shilla. As the king’s closest musician, Woo-Reuk may have been fully supported from the king, expressed his political views, and lived a fairly relaxed life. Why did W...
In the first half of the 6th century, Woo-Reuk(于勒) was unexpectedly exiled to Shilla. As the king’s closest musician, Woo-Reuk may have been fully supported from the king, expressed his political views, and lived a fairly relaxed life. Why did Woo-Reuk choose a lone exile?
Woo-Reuk, who was a musician of Gara(加羅), has been as one of Korea’s three Sacred Musicians along with Wang, San-Ak(王山岳) and Park, Yeon(朴堧). Obviously Woo-Reuk had performed various musical activities according to his status as a royal ‘musician’. Sometimes, however, the academic world highlights his ‘political’ figure.
In this paper, I tried to examine the cause and process of Woo-Reuk’s exile to Shilla to illuminate the aspect of the ‘political’ Wook-Reuk rather than the ‘musician’.
From the starting of the 6th century, Baekje had been fiercely and persistently invading Gara’s borders. In order to check Baekje’s invasion, Gara established a marriage alliance with Shilla in 522. It is believed that as a royal ‘musician’, Woo-Reuk played such a role in the process of ‘Gara-Shilla Marriage Alliance’ as hosting the envoys from Shilla or attending the marriage ceremony. On this occasion, he showed his political aspect of ‘Pro-Shilla.’
However, the so-called “Changing Clothes Clothed” incident had damaged the relationship in the alliance. This led Shilla to conquer three castles and five castles subject to Gara. In turn, Gara repealed its conventional ‘Pro-Shilla Policy’ and pursued the switch into ‘Pro-Baekje Policy’. Stigmatized as a ‘Pro-Shilla Politician’, Woo-Reuk was tried in the political crisis. When he saw Gara form an alliance with Baekje, he eventually fled to Shilla. Perhaps it happened between March 544 and April 548, and his exile seems to have been helped by Geochilbu(居柒夫).
목차 (Table of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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