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지난 60년 동안 이룩한 한국고대사 연구의 주요성과를 살펴서 그 동향과 과제를 정리한 글이다 . 光復과 함께 전개된 좌·우 대립의 정국과 분단의 고착화 과정에서 일제의 植民史學�...
본고는 지난 60년 동안 이룩한 한국고대사 연구의 주요성과를 살펴서 그 동향과 과제를 정리한 글이다 . 光復과 함께 전개된 좌·우 대립의 정국과 분단의 고착화 과정에서 일제의 植民史學을 청산하고 고대사연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1950년대에 實證的 연구풍토가 정착되는 가운데 새로운 주제와 방법론의 모색은 비록 소박한 수준으로 평가되지만, 이후 한국고대사의 주체적인 인식을 모색하는 토대가 되었다. 곧 1960년대에 이루어진 연구성과는 식민사학에 의해 왜곡된 한국고대의 歷史像을 불식시켰으며, 이후 고대사연구의 범위를 확대하고 연구주제를 구체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에 古代國家의 形成問題가 제기되면서 연구활동을 촉진하였고, 고대사회의 발전과정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또한 고대의 사회구조 및 구성단위 문제와 함께, 小國 間의 연맹과 통합과정을 거쳐 성립한 고대국가의 支配體制가 논의되면서 삼국의 지배세력 동향, 중앙 및 지방 통치체제의 정비, 군사조직의 운영, 民에 대한 편제방식 등에 접근하여 고대사회에 대한 구조적인 인식이 가능하였다. 1980년대 이후 연구자의 증가, 다양한 주제와 연구내용의 심화로 고대사의 체계적 구성이 더욱 튼실해졌다. 실제로 民族의 형성문제와 함께 檀君 및 古朝鮮史와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가 있었고, 신라와 백제사에서 축적된 연구성과가 가야와 고구려사 연구로 자연스럽게 확장되었다. 渤海 역시 귀속문제에서 점차 발해사 자체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으며, 이밖에 樂浪·帶方郡의 재검토, 夫餘史의 전개과정, 三韓의 성장과 대외관계, 영산강유역의 甕棺古墳과 그 축조세력을 둘러싼 논의 등을 통해 고대사의 지평을 넓혀갔다. 1990년대로 접어들어 祭儀 및 建國神話, 고대 女性史와 관련된 문제, 농업생산 및 交易에 관한 접근 등도 다양한 연구주제의 모색에 일조하였다. 나아가 '고대 동아시아와 백제', '古代 韓·中關係史의 새로운 조명', '동아시아에서의 낙랑' 등의 학술회의를 통해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적 국제질서나 문화적 교류에 대한 이해를 더하였다. 이와 함께 고대와 중세의 시대구분 문제, 三國의 遷都 및 都城制, 불교사상사 연구의 심화, 촌락문서 및 통일신라의 토지제도에 대한 재검토, 장보고와 청해진을 중심으로 한 해상활동, 나말여초 豪族의 동향과 후삼국의 성립, 필사본 「花郞世紀」를 둘러싼 진위논쟁 등의 문제도 부각되었다. 한편 考古學的 成果와 새로운 金石文의 發掘은 고대사연구에 커다란 활력소가 되었다. 실제로 百濟本紀의 신빙성 확인, 백제문화사의 이해증진, 삼국의 중앙정치 및 점령지 통치방식, 민의 존재양태, 고구려-신라의 대외관계, 신라의 정치·경제·제도사 정리에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처럼 광복이후 60년 동안 고대사학계는 식민사학의 폐해를 극복하고 고대사의 체계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결과, 새로운 방법론의 모색, 연구주제의 다양한 접근, 관련자료의 발굴 및 확대 등을 통해서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연구성과가 크게 진전하였다. 이는 전적으로 어려운 여건을 딛고 고대사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했던 1세대 연구자들, 그리고 이들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2·3세대 연구자들의 노력과 구체적인 성과물의 축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