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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의 1960년대 한국 대외정책 인식: 외교문서와 언론 속의 한일협정과 베트남파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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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1960년대 한-미-일 관계와 한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프랑스의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1차 년도에서는 1965년 한일협정 전후 한일관계에 대한 프랑스의 시각을 분석하고, 2차 년도에...

      1960년대 한-미-일 관계와 한국의 대외정책에 대해 프랑스의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규명하기 위해 1차 년도에서는 1965년 한일협정 전후 한일관계에 대한 프랑스의 시각을 분석하고, 2차 년도에서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전후 한미관계에 대한 프랑스의 시각을 분석할 것이다. 프랑스 외무부문서보관소에 소장 중인 한일관계 관련 외교문서 상자가 12개, 베트남 전쟁과 한미관계 관련 외교문서 상자가 10개, 한국의 1960년대 국내외 상황에 대한 문서상자 2개가 확인되었고, 일간지 3종의 5-6년간 내용을 검토해야만 하기에 2년의 연구기간이 필요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유럽에서는 북대서양조약기구를 통해 안보협력을, 마샬플랜을 통해 경제 원조를 진행하였고,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중심으로 지역통합전략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반일을 내세웠기에 미국의 구상은 쉽사리 실현되기 어려웠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정통성 없는 정권의 운명을 경제성장에 두었고, 일본에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한일회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1년 10월에 재개된 한일회담은 국교정상화를 둘러싼 야당과 학생운동권의 반대, 일본 사회당의 반대, 한일 간 어업경계선 문제 등의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동하면서 어려움을 겪다가 1965년 12월에 채결된다.
      프랑스 외무부와 언론은 5·16 쿠데타 이후 재개된 한일회담 과정에 대해, 학생들의 반대시위에 대해, 한일협정의 동기에 대해, 한일경제협력의 중요성에 대해 어떤 시각을 견지했는가? 한일협정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발휘에 어떤 입장을 지니고 있었는가? 한일회담 과정에서 쟁점이 된 식민지배 피해에 대한 청구권, 해양 영토 문제 등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는가? 한일 국교정상화가 프랑스의 동아시아 정책과 드골의 자주외교 노선에 어떤 영향력을 미칠 것으로 파악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과 분석이 1차년도 연구의 내용이다.
      프랑스는 1883년부터 베트남을 식민 지배하였으나 1946년에 시작된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패배하여 1954년의 제네바 협정으로 베트남에서 철수한다. 이 협정으로 북위 17도선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할된 채 남베트남은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였다. 1950-60년대 과거 프랑스의 대부분 식민지들이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프랑스의 좌파 정당, 지식인, 학생들은 식민지 민족해방투쟁에 지지와 연대를 표명했다. 드골은 1958년 대통령 취임 이후 자주외교 노선을 표방하며 과거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국가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구식민지들에 대한 대외정책의 목표로 삼았다. 이 같은 역사적 맥락 속에서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에 의한 베트남 전쟁이 본격화되자 프랑스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다. 드골 정부는 공식적으로 베트남전에 대해 입장 표명을 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적인 방식으로 베트남 전쟁에 불편함을 나타냈다.
      프랑스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였고 한미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인식을 하고 있었을까? 프랑스 사회의 베트남 전쟁 반대 목소리는 매우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연인원 약 32만 명을 파병한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프랑스 언론과 외무부가 어떤 시각을 지니고 있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2차년도 연구 내용의 핵심이다. 프랑스는 전투부대 파병을 한국이 미국의 요청을 일방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파악했을까, 아니면 한미관계에서 한국의 일정한 주도권이 발휘된 것으로 파악했을까? 베트남 파병으로 얻게 된 한국의 경제적 이익에 대해서는 어떤 시각을 지녔을까? 이 같은 물음에 답을 찾아가는 것이 2차년도 연구의 내용을 구성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1차년도와 2차년도 연구 내용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중심으로 재편된 냉전질서 하의 국제정세에서 1960년대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외교노선을 채택하며 데탕트 분위기를 조성하려 노력한 프랑스가 동시대 한미, 한일관계 및 동아시아의 국제정치적 상황에 대해 어떤 인식을 하고 있었는지 규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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